조선 후기 관리들의 수탈과 픽밥으로 1차 동학농민혁명이 1894년 4월 발생하여서 5월 31이 전주성이 함락하였습니다.   고종, 민영준은 중국 청나라에 대해 지원할 병력 요청을 주장하였고 김병시는 텐진조약 ' 조선에 출병시 상대 나라에 대해 통보한다.' 는 항에 때라 일본 군대가 출동할 것을 우려하여 반대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고종과 명성황후는 6월 4일 중국 청나라에 군대 병력을 요청합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죠.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 구식 군대가 월급으로 받은 쌀에 모래가 썩여있는 것에 대해 시작되어 권력에서 물러난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을 추대한 난임. ] 때에도 조선 자체 군대 병력으로 난을 다스리지 못 하여 청나라 군대를 요청하여 임금의 아버지가 중국 북경으로 포로로 끌려가고 일본 군대가 출동하는 일이 벌여졌었지요.

   이렇게 해서 일본 오오토리 케이스케(大鳥圭介) 공사는 6월 10일 새벽에 해군소장海軍少佐 무코야마 신키치向山愼吉 함께 육전대陸戰隊 400여명 야전포野戰砲 6문, 순사 20명 인천에 상륙하여 경성으로 향합니다.   

  육전대의 파견과정에서 일본군의 불법적인 측면은 명확하게 파악되는데 육전대를 포함한 일본군의 조선출병에 대해 6월 7일, 스기무라 임시공사로부터 통보받은 조선은 독판 교섭통상사무 督辦交涉通商事務  조병직 趙秉稷으로 하여 금 일본임시대리공사 스기무라에게 조회를 보내 동학 및 공관호위를 빙자한 일본군의 출병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하고 철회를 요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주일 조선공사 김사철金思轍을 통해 일본정부에 철병을 철회 하도록 요구했다.  

* 구한국외교문서 舊韓國外交文書 일안日案2, 고종 31년 5월 5일, 동학난 東學亂 및 공관보위빙자公館護衛憑藉의 파병방침철회요구 派兵方針撤回要求.

  6월 16일부터 17일에 걸쳐 육군소장 오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가 지휘하는 5사단 9 혼성여단 8천여명은 인천항에 상륙하여 임시 주둔했으며 17일에 대위 原野兼이 지휘하는 보병 21연대 8중대가 부산에 상륙하여 주둔했다.


                    조선 정벌 일본 9 혼성여단 조직


일본 조선 출병 현황

※ 출전 : 참모본부 편 參謀本部 編, 명치27,28년 明治二十七八年 일청전사日淸戰史 卷1,東京印刷株式會社, 1904.97~101쪽. 

※ 3차,4차 수송부대는 1894년 6월 하순에 동원을 완료하여 7월 중순 경복궁 점 령이 임박하자 수송을 결정했다.

혼성여단 전투서열


  일본군은 장기적인 전투를 벌이기 위해 군용전선을 1894년 7월 부터 1지대는 부산에서 대구방향으로, 2지대는 경성(서울)에서 부산방향으로 가설을 하였습니다. 조선 보호국 또는 정복하기 위해 자국민, 공사관 보호 명분을 얘기하며 군대를 무단으로 출병, 주둔하여 전쟁 준비를 하였던 것입니다.

 조선군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1883년과 1884년에 각각 교련병대를 모태 로 한 친군전·후영이 신설되면서 조선의 중앙군제는 전통 조선군식 훈련을 받는 군영과 청군식 훈련을 받는 친군좌·우영, 일본식 훈련을 받는 친군전영 등이 존재하는 기형적인 편제였다.  모순적인 조선의 중앙군제는 갑신정변 당시 일본군식 훈련을 받은 친군전·후영은 정변에 가담하고 청군식 훈련을 받은 친군좌·우영은 정변을 진압하는 등 난맥상을 보였다. 

  1888년(고종 25) 3영으로 통폐합됐다. 전영과 좌영을 합쳐 장위영壯衛營, 우영과 후영 및 해방영海防營을 합쳐 통위영統衛營, 별영은 총어영總禦營으로 개편하고, 이경하李景夏를 통위대장統衛大將, 신정희申正熙를 장어대장壯禦大將으로 임명했다. 조선의 중앙군은 통위영, 장위영, 총어영, 경리청 등 친군4영체제로 지속되어 1894년 청일전쟁시기까지 유지됐다. 

    1894 7 23일 새벽 5시경에 오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중장 휘하의 일본군 혼성여단 2개 대대는 조선의 왕궁인 경복궁을 불의에 습격·침입하였다.   조선측 궁성수비대(箕營兵) 600명은 영추문 迎秋門 광화문 光化門으로 돌입하는 일본군과 격전을 벌인 끝에 7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어명을 받은 우포장(右捕將) *안경수(安駉壽)의 전투중지 명령으로 무기를 버리고 왕궁을 빠져나갔습니다.  


1. 군부대신 안경수(安?壽)를 일본공사에 훈련대해산과 무장해제를 통보한 후 명성황후가 시해됨

2.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乙未事變)에 연루됨

3. 고종이 러시아로 빠져나갈려고 계획했는데 밀고해서 '춘생문 사건' 으로 다시 유폐됨 

4. 김재풍(金在豊) 등과 함께 고종 황제 양위 음모를 꾸밈


   
이렇게 쉽사리 일본군은 경복궁을 점령하고 국가통수권자인 고종을 포로로 잡고 감금하고 경회루 慶會樓 본부를 설치하고 서울과 수원 등 궁성 내외의 조선군대를 무장해제시켰다.  

   이어서 별도로 동원된 일본군 1개 중대와 경찰대 및 일본인 壯士輩 호위 아래 대원군이 경복궁에 입궐함으로써 민씨계 친청정권을 대체하는 새로운 친일 정권이 수립하였다.    7 23일 이후 8 24일까지 경복궁은 일본군에 의해 수비되었고, 일본공사관이 발급하는 문표門票없이는 궁궐 출입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런 친일 꼭뚜각시 정권 최고의사결정 기구인 군국기무처 軍國機務處 통하여 개혁의 서막이 열렸는데 이때 부터 조선은

일본에서 정복된 것입니다.  일본과 서양을 배척하고 나라사랑과 충성의 기치로 2차 동학혁명과 의병이 일어나고 대한제국 망국 후 독립전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1895년 을미왜란, 을미사변으로 한 나라의 어머니 명성황후가 한낱 일본 낭인과 해산된 시위대에 의해 시해(살인)이 되는 참극이 발생합니다.   



    갑오왜란 (갑오경장 또는 갑오개혁) 기간 ( 1894년 7월 27일부터 1897년 2월 11일) 중 정치 세력은 갑오파 (국내 개화파 ; 김홍집) , 갑신파 (망명한 갑신정변파; 박영효), 궁정파(왕당파) 왕족 및 외척, 정동파 (정동구락부; 외국 공사관 지역으로 세부 친미파, 친러파 구분), 신진관료들이 있다. 

   동학농민혁명 1차 봉기로 전주성이 점령되고 관군이 전투에서 패배하여 조선정부에서 청나라에 군대가 출동할 것은 요청하게 되자 일본에서도 즉시 1894년 6월 9일 오시마 요시마사 소장이  일본군 제5사단 혼성 제9여단 6000명 (보병 3,000명, 기병 300명)을 이끌고 인천항에 상륙하여 6월 21일 새벽 5시 경복궁을 점령한다. 그렇게 하여 기존 수구파 정권을 전복하고 대원군과 김홍집을 앞세워 정권을 수립한다. 대원군과 김홍집은 1880년대 기구인 군국기무처(軍國機務)라는 최고 의결 기구를 만들어 개혁을 추진한다.

갑오왜란 기간 중 김홍집 내각 조직을 간략하게 표로 정리해보았습니다.



친미개화파 박정양, 이완용, 이채연, 윤치호, 이하영, 이상재(李商在)

갑신계      :   윤치호(尹致昊)․서광범(徐光範)․서재필(徐載弼)

친러파      :   이범진(李範晉)․이윤용(李允用)․민영환(閔泳煥)․민상호(閔商鎬)




대한제국 박정양 내각


갑오왜란 김홍집 내각_180811_JYKim.ppt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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