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국과 부여남하설
2006.07.01 조원영 / 합천박물관 학예사, 문화재 감정위원
1990년 발굴이 시작된 김해 대성동고분군은 전기 가야제국을 주도했던 가락국 지배자집단의 공동묘역이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그 뿐만 아니라 가락국의 국가 형성 문제, 가락국 지배세력의 정체 등 가야라는 국가에 대한 새로운 문제점이 다각도로 제기되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 가야의 성립과 정치적 동향에 대한 문제는 역사학계나 고고학계에서 가장 중요한 연구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모두를 만족시킬 만한 견해가 나오지 않고 있다. 연구자들은 각자 개성이 뚜렷한 견해를 제시하면서 역사적 진실에 접근하고자 하지만 기초적인 역사자료가 빈약하여 상당부분 추론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합일점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대체로 역사학계에서는 가야의 어원과 변천, 문헌에 나타나는 가야 관련 기록을 기반으로 고고학의 연구 성과를 반영하여 가야사의 시작을 설명하는데 1~3세기의 변한을 가야사에서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놓고 크게 두 가지 견해로 나뉘어져 있다. 하나는 변한의 역사를 가야사에 포함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1~3세기는 변한의 역사이고 가야의 성립은 3세기 말 4세기 초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이다. 경북대 주보돈 교수는 전자를 전기론(前期論), 후자를 전사론(前史論)으로 명명하였다.
이 가운데 전사론은 3세기 말 4세기 초가 한국고대사 더 나아가 고대 동아시아사 전체가 커다란 정치적 변동의 시기였다는 고고학계의 견해에 동의하고 있다. 즉 부산대 신경철 교수는 가야라고 불리우는 여러 정치세력이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시기를 3세기 말 4세기 초로 보고 이를 기준으로 삼한시대와 가야시대를 구분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가야가 성립되었다는 것은 한반도 남부에서 이전의 삼한사회와 국가체의 성격, 지배권력의 강도면에서 확연히 차이가 나는 새로운 정치세력으로서 본격적인 삼국시대가 성립되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김해 대성동고분군은 가야사회 성립에 대한 획기적인 발상을 잉태하게 한 유적이라 할 수 있다. 이 고분에서 고고학자들은 무엇을 보았기에 전기론의 입장에서는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3세기 말 4세기 초의 시기를 주목하게 되었을까?
신경철 교수는 ‘3세기 말의 대변혁’이라고 표현할 만큼 한반도 남부사회를 뒤흔든 변화의 물결이 있었다고 주장하는데, 대체 그 변화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지금부터 김해 대성동고분군 발굴을 주도했던 신경철 교수의 견해를 통하여 이 시기의 정치적 변동을 추적해 보도록 한다.
3세기 말에 큰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고고학적 자료는 신라, 가야토기로 불리는 도질토기이다. 도질토기의 등장을 기점으로 하여 가야사회는 큰 변화를 보였다. 도질토기는 섭씨 1,200도 전후의 높은 온도에서 구운 환원염 소성의 단단한 토기를 말한다. 도질토기 출현 이전의 삼한시대 토기는 섭씨 700~900도 정도의 낮은 온도에서 구운 환원염 소성의 와질토기였다.
도질토기는 최근의 조사 성과에 의하면 3세기 말 낙동강하류역 김해와 부산지역에서 가장 먼저 출현하여 영남지방 각지로 퍼져 나갔다. 처음 만들어진 도질토기는 두귀달린항아리(兩耳附壺)의 형태를 하고 있다.
그런데 이 두귀달린항아리는 중국 북방에서 만들어진 독특한 토기 형태이므로 가야에서 출현한 도질토기는 이전부터 제작되고 있었던 와질토기문화를 바탕으로 하여 북방토기문화를 결합시켜 만들어낸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도질토기는 북방토기문화의 영향을 받아 출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도질토기가 한반도 남부의 어느 지역보다도 김해, 부산에서 가장 먼저 나타났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한편 이 지역에서는 도질토기와 함께 순장의 풍습도 가장 먼저 출현하였다. 순장은 주인이 죽으면 노비나 가신을 죽여서 함께 묻는 것을 말한다. 변한시대에는 한반도 남부에 이러한 풍습이 없었던 것이 3세기 말에 나타났던 것이다. 김해 대성동 29호분에서는 목걸이로 사용되었던 유리제옥류가 출토되었는데 이것이 무덤 주인공의 발치에 놓여 있었다. 이 옥류가 발견된 곳 주변에는 아무런 부장품도 놓여지지 않은 꽤 넓은 빈 공간이 있었는데 이곳이 목걸이를 착용한 사람이 안치된 곳으로 보인다. 따라서 적어도 2인 이상의 순장자가 안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또 순장에는 사람 외에 소나 말 등의 동물을 희생시키는 행위가 있는데, 대성동유적에서도 동물 순장이 확인되었다. 김해 대성동 1호분 으뜸덧널의 덧널 위에서 소의 아래턱뼈가 발견되었다.
이처럼 소나 말의 목을 베어, 머리를 덧널 위에 놓는 것은 북방유목민족의 동물 순장형태와 동일한 것으로, 김해 대성동유적의 순장은 북방의 습속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여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유수노하심(楡樹老河深)의 중간층 무덤에서도 이러한 형태의 소와 말의 순장이 확인되었다.
영남지역 고분에서는 이처럼 동물의 머리만을 잘라 매장주체부 부근에 놓은 것도 있지만, 매장주체부를 원형으로 둘러 싼 도랑(溝)에 희생시킨 말의 몸통이 발견되는 경우도 있다. 전자가 북방의 습속을 그대로 이어 받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영남지역에서 발전된 순장의 형태라고 보아도 좋을 것 같다.
세기 말 영남지역에서는 이러한 순장의 풍습이 다른 고분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오로지 김해 대성동고분군과 부산 복천동고분군 단 두 곳에서만 나타난다. 이 두 고분군은 각각 낙동강하류역의 서쪽과 동쪽지역을 관할하는 지배자집단의 무덤이라는 점에서 순장은 특정 지배자집단에서만 행해진 매장의례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김해 가락국의 지배집단은 김해 대성동고분 축조집단과 부산 복천동고분 축조집단의 연합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되며, 순장자의 숫자나 부장된 유물의 질적인 면으로 보아 김해 대성동고분군 축조집단이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었다고 추측된다. 순장의 풍습은 주변지역으로 파급되어 신라의 경우에는 가야의 영향을 받아 4세기 중엽 이후부터 순장이 행해지게 되었다.
이러한 순장 풍습을 전해주었던 원류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써 ‘오르도스형 청동솥’이라고 불리는 유물이 있다. 이 솥은 북방유목민족들의 독특한 청동솥으로 김해 대성동고분군에서 2점, 김해 양동리고분군에서 1점이 출토되었다. 원래 이 솥은 북방민족들이 사용하던 취사도구의 일종인데, 북방민족은 목축을 하면서 물과 풀을 따라 옮겨 다녔기 때문에 양 귀에 끈을 꿰어 말 안장에 매달 수 있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가야지역에서 이 청동솥은 지배층만이 소유할 수 있는 대단히 귀한 물건인데 세부 형태나 제작기법이 부여의 중심지였던 중국 길림성 북부 지역 출토품과 유사하므로 그 지역에서 제작되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한편 김해 대성동 45호분에서는 큰칼을 일부러 구부려 부장시키는 사례가 발견되었고, 김해 대성동 29호분은 덧널을
불에 그을린 흔적이 남아 있다. 이러한 사례는 최근의 가야지역 발굴조사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이 무기를 의도적으로 훼손하여 무덤에 부장하거나 덧널을 불에 그을리는 행위는 흉노, 선비, 부여 등 북방유목민족의 특별한 장례행위로 이것이 도질토기의 출현, 오르도스형 청동솥의 매납과 동시에 가야의 매장의례에 행해지고 있다는 점은 주목해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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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기 말에 이와 같은 북방유목민족과 관련 있는 문물과 습속의 등장을 기점으로 가야지역에서는 철제의 갑주(甲?, 갑옷과 투구), 그리고 기마용의 말갖춤이 고분에서 출토되고 있다. 영남지역에서 발굴된 갑주로는 북방유목민족의 독특한 기마용 갑주의 영향으로 제작된 것과, 재래의 가죽이나 나무로 만든 갑옷이 모델이 된 영남지역 특유의 철제 갑옷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갑주의 원류지인 북방유목민족의 무덤에서는 철제 갑주가 출토되는 경우가 드물며 거의 가죽제 갑주가 보편적인 것에 비하여 가야지역에서는 오히려 철제 갑주의 출토량이 북방보다도 월등히 많다. 신체 보호에 보다 효율적인 철제 갑주가 다량으로 제작된 것에서 철의 왕국이라고 불릴 만한 가야지역의 왕성한 철기문화가 그 저변에 깔려 있음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기마용 말갖춤도 이 무렵 김해 대성동고분군과 부산 복천동고분군에서 가장 먼저 출현하였는데, 최근의 연구성과에 따르면 말갖춤의 직접적인 원류지도 지금의 중국 동북지방으로 판명되었다. 즉 말갖춤 가운데 재갈과 고삐는 중국 동북지역의 선비, 부여계통에서 사용하던 것으로 대표적인 북방문물이라 할 수 있다.
이 기마용 말갖춤의 등장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그 이전 시기까지의 전투형태인 보병전에서 기병전으로 전투양상이 확연히 달라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때부터 비로소 먼 거리까지 원정하여 정복전쟁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철제의 갑옷과 투구, 말갖춤의 출현은 이때부터 낙동강하류역의 가야사회가 본격적인 군대의 보유와 함께 바야흐로 전쟁의 시대에 접어들었음을 나타내는 가장 분명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고분에서 발견된 유물과 습속을 통해 볼 때 3세기 말 4세기 초에 낙동강하류역에서는 이전 시기와는 뚜렷이 구분되는 북방문물의 유입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은 묘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3세기를 전후한 영남지역의 주된 묘제는 덧널무덤(木槨墓)이었다. 덧널이라는 것은 고고학적으로는 시신과 함께 많은 부장유물이 들어갈 수 있는 규모의 매장시설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덧널무덤보다 먼저 사용되었던 널무덤은 시신만 매장할 수 있는 규모의 매장시설이므로 많은 물품을 부장할 수 없었다.
따라서 덧널이 출현하였다는 것은 이전 시기에 비해 훨씬 많은 물품을 무덤 속에 부장할 수 있는 강력한 권력을 가진 존재가 등장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때부터 계급의 분화가 더욱 현저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영남지역의 덧널무덤 가운데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은 2세기 후반의 김해 양동리 162호묘임이 최근의 발굴조사에서 확인되었다. 3세기 말 4세기 초에 접어들면서 이 덧널무덤에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즉 이전의 덧널무덤은 변한과 진한의 구별이 없이 같은 형태를 지니고 있음에 비해 이 시기에는 가야와 신라지역의 덧널무덤이 서로 현격하게 달라진 것이다.
즉 2세기 후반에서 3세기 후반까지는 덧널무덤의 무덤구덩이가 폭과 길이의 비율이 2:3 정도 되는 폭이 넓은 덧널무덤[Ⅰ류덧널무덤]을 공통으로 채용하고 있었는데, 3세기 말이 되면 김해와 부산을 주축으로 하는 가야지역은 폭넓은 덧널무덤[Ⅱ류덧널무덤]을 그대로 채용하고 있음에 비해, 경주를 중심으로 하는 신라지역은 폭과 길이의 비율이 1:3~5 정도의 폭이 좁은 덧널무덤을 축조하였다.
이처럼 이 시기에 공동의 묘제로 사용되었던 덧널무덤이 갑자기 분화된 것은 이때부터 양 지역이 이전 시기와는 다른 정치적 환경에 직면했다고 설명할 수는 없을까? 이것은 철제 갑옷과 투구, 철갑으로 무장한 기병을 보유한 집단이 낙동강하류역에 등장한 데 따른 경주를 중심으로 한 지역의 위기의식에서 비롯된 현상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즉 가야지역의 급격한 정세변화가 진한사회에도 영향을 미쳐 사로국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화를 촉진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한편 낙동강하류역의 덧널무덤도 Ⅰ류덧널무덤과 Ⅱ류덧한다널무덤을 비교하면 무덤구덩이의 평면 특징은 같지만 내용은 현저하게 차이가 난다. 즉 Ⅱ류덧널무덤은 Ⅰ류덧널무덤에는 없었던 순장의 습속이라든가 부장품을 후하게 넣는 후장(厚葬) 등 무덤의 내용에는 차별성을 보이고 있다. 또 Ⅰ류덧널무덤에는 부장유물의 배치가 무덤주인공의 허리쪽 말하자면 덧널의 한쪽길이를 따라 일렬로 되어 있던 것이 Ⅱ류덧널무덤에는 무덤주인공의 발치 아래쪽으로 배치되는 변화를 보였다.그런데 Ⅱ류덧널무덤을 축조하면서 앞시기의 무덤을 파괴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왜 그랬을까? 무덤을 축조할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해서였을까?
이 시기에 생산력의 증대와 더불어 인구가 증가하면서 가용할 수 있는 토지가 부족하였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연구자도 있다. 또 일본 야요이시대에 친족관계에 있는 피장자들을 매장할 때 독무덤(甕棺墓)을 중복하여 만드는 경우도 있으므로 중복된 덧널무덤의 주인공들은 친족이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연구자도 있다.
그러나 앞 시기 무덤을 파괴하는 현상이 그 전에는 이 지역에 전혀 보이지 않았던 점, 북방문물과 습속이 이 지역에 유입됨과 동시에 앞 시기 무덤에 대한 파괴행위가 행해지고 있다는 점, Ⅱ류덧널무덤이 앞 시기 무덤의 바닥까지 철저하게 파괴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는 점에서 무덤주인공들을 혈연적인 관계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러한 현상은 Ⅱ류덧널무덤을 축조하였던 집단이 앞 시기의 무덤을 의도적으로 파괴하고 그들 집단의 무덤을 조성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앞 시기의 체제와 관념을 완전히 부정하는 행위로 볼 수 있다. 이런 모습에서 우리는 3세기 말 낙동강하류역에 이전의 무덤을 파괴하면서 기존의 정치체제마저도 부정할 수 있는 북방문물과 관련을 가진 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된다.
이상과 같은 북방문물과 습속, 그리고 영남지역 묘제에서 추정되는 낙동강하류역과 경주지역과의 정치적 긴장관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먼저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북방문화가 전파된 것이 아니겠는가 라는 추정이다. 하지만 단순한 문화의 전파라면 도질토기의 발생이나 순장의 습속이 우선 북부지역으로부터 차츰 남하하는 현상이 보여야 할 것인데, 한반도의 동남단인 낙동강하류역에서 가장 먼저 출현하였다는 점이 문제이다.
이들 북방문화를 문헌에 보이는 3세기 말 진한과 서진의 교섭 기록을 중시하여 교역의 산물로 보려는 견해도 있다. 그런데 기록대로라면 이러한 북방문화가 어느 곳보다도 진한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경주에서 가장 먼저 자리를 잡는 것이 당연할 텐데 실제로는 낙동강하류역에서 가장 먼저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납득할 수 있는 의견이 아니다. 더욱이 북방문화가 등장하는 시점에 낙동강하류역과 경주지역의 묘제에 차이가 생겼다는 점에서도 단순한 교역론으로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3세기 말 낙동강하류역에 나타난 이동 제반현상은 북방문화를 소유한 특정주민의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즉 도질토기, 청동솥, 갑옷과 투구, 말갖춤 등 북방문물만의 유입이라면 북방문화의 전파 내지는 교역으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문물과 동시에 순장, 무기의 훼손, 덧널을 불에 그을리는 행위 등 북방의 습속까지 나타나고 있는 점은 이러한 습속이 몸에 배인 종족이 이 지역에 이주했을 경우에만 가능한 현상인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당시 상황에서 어떤 종족이 이 지역으로 들어왔을까? 김해 대성동고분군에서 확인되는 현상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종족은 바로 부여족이다. 또 하나 그런 추정의 근거가 되는 것이 중국측 기록이다. 중국의 『진서(晋書)』동이열전(東夷列傳) 부여국조(夫餘國條)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무제 때에는 자주 와서 조공을 바쳤는데, 태강 6년(285)에 이르러 모용외의 습격을 받아 패하여 왕 의려는 자살하고, 그의 자제들은 옥저로 달아나 목숨을 보전하였다. 무제는 그들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부여왕이 대대로 충성과 효도를 지키다가 몹쓸 오랑캐에게 멸망되었음을 매우 가엾게 생각하노라. 만약 그의 유족으로서 나라를 회복할 만한 사람이 있으면 마땅히 방책을 강구하여 나라를 세울 수 있도록 하게 하라.”
이에 유사가 보고하기를 “호동이교위인 선우영이 부여를 구원하지 않아서 기민하게 대응할 기회를 놓쳤습니다”고 하였다. 조서를 내려 선우영을 파면시키고 하감으로 교체하였다.
이듬해에 부여후왕 의라는 하감에게 사자를 파견하여, 현재 남은 무리를 이끌고 돌아가서 다시 옛 나라를 회복하기를 원하며 원조를 요청하였다. 하감은 전열을 정비하고 독우 가침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호송하게 하였다. 모용외 또한 그들을 길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나, 가침이 모용외와 싸워 크게 깨뜨리니, 모용외의 군대는 물러가고 의라는 나라를 회복하였다.
→ 武帝時 頻來朝貢 至太康六年 爲慕容所襲破其王依慮自殺 子弟走保沃沮 帝爲下詔曰 夫餘王世守忠孝 爲惡虜所滅 甚愍念之 若其遺類足以復國者 當爲之方計 使得存立 有司奏護東夷校尉鮮于不救夫餘 失於機略詔免 以何龕代之 明年 夫餘後王依羅遣詣龕 求率見人還復舊國 仍請援 龕上列 遣督郵賈沈以兵送之 又要之於路 沈與戰 大敗之 衆退 羅得復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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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에 따르면 모용외의 습격을 받아 부여 왕은 자살하고 자제들은 옥저로 피신하였으며, 이듬해 부여후왕이 진나라의 도움을 받아 나라를 회복하였다는 것이다. 옥저로 갔다는 국왕의 자제들은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사실은 전하지 않는다. 이들 집단이 옥저를 출발하여 동해안 루트를 따라서 낙동강하류역에 와서 정착하였을 것이다.
바로 이 집단이 기존의 재지지배층을 교체하면서 김해 대성동고분을 축조한 세력이었으며 가락국을 성립시킨 주체였다. 따라서 가락국은 부여의 국가, 사회시스템을 그대로 옮겨온 집단에 의해 이루어졌으므로 국가 성립부터 강력한 국가시스템과 기마군단 등 군대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3세기 말 4세기 초에 북방 부여족의 일부가 남하하여 낙동강하류역을 정복하였다는 신경철 교수의 이른바 ‘부여족 남하설’은 역사적 사실의 여부는 논외로 하더라도 가야의 성립, 더 넓게는 삼국의 성립시기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동안 공백상태에 있던 4세기대의 가야사를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주목해야 할 견해이다.
『삼국사기』에 전하는 가야 관계기록은 212년(신라본기 내해왕 17년조)의 기록 이후 481년(신라 소지왕 3년조) 다시 그 모습을 보일 때까지 무려 269년 동안의 기록이 없는 상태이다. 광개토왕릉비문 400년 경자년조에는 ‘임나가라’라는 명칭으로 가야관계기록이 전하며, 중국 남북조시대 남제(南齊)의 역사를 기록한 『남제서』에는 가라 국왕 하지(荷知)가 중국 남제에 사신을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어 5세기대의 가야는 상당한 힘을 가진 정치집단으로 역사무대에서 활동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지만 3세기 말부터 4세기대는 우리의 역사에서 가야를 찾아 볼 수 없다. 이러한 기록의 공백과 함께 그 동안의 옛 가야지역 발굴조사 또한 5세기대 이후의 유적에 집중되어 있어 4세기대의 가야사는 알 수 없는 시간으로 남아 있었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면 부여족 남하설은 가야사에 있어서 잃어버린 4세기대를 복원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다만 이것이 역사적 사실로 증명될 수 있을지는 다각도로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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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떻게 한반도 남부에서 지배세력의 재편이라는 큰 변화를 가져왔던 사건이 『삼국사기』와 같은 문헌기록에는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았을까? 물론 이러한 일들은 역사속에서 비일비재하게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몇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 당시 부여인들이 문자에 큰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하는 점이다. 앞의 기록에서 보듯이 중국과 우호적인 관계로 교류를 했으므로 문자를 사용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농경정착민들과 달리 이동성이 강한 그들의 성격상 기록의 보존에 대해서는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또 하나는 기록으로 남았다 하더라도 그들의 활동이 원래의 모습과 다르게 표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즉 낙동강하류역에 들어온 이 집단은 피정복자들의 눈에는 침입자들로 비춰졌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들은 기존의 토착민들과 동화하면서 정착하였을 것이므로 후에 그들의 역사를 기록할 때 자신들을 정복자로 기록하지는 않았을 것이며, 신화 등의 형식으로 표현했을 것임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누군가에 의해 침입을 받았다는 기록이 없다는 사실은 정복했던 당사자가 그 후의 역사 전개과정에서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현재 우리들에게 가야에 대한 역사를 전해주는 자료는 고려시대에 편찬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있지만 이것은 3세기 말에 비해 훨씬 이후에 만들어진 책이다. 더구나 『삼국사기』처럼 신라 중심적인 편찬 자세를 취한 기록에서 가야의 구체적인 정황이 제대로 반영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런 측면들을 고려해보면 부여족 남하와 관련된 기록이 전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한편 부여족 남하설은 한국판 기마민족설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1940년대 일본의 동양사학자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에 의해 제기되었고, 1970년대 미국의 동양학자 레드야드교수에 의해 보완된 ‘기마민족설’은 ‘일본열도 내 기마민족 정복왕조론’의 약칭으로 고대 일본이 동북아시아 계통의 외래 기마민족에 의해 정복당했다고 보는 학설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서기 3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중국 북방의 오호민족(五胡民族)이 중국의 화북지방으로 이동할 무렵, 고구려와 가까운 퉁구스 계통의 북방 기마민족의 일부가 새로운 무기와 말을 가지고 한반도로 남하하여 한반도 남부의 구야국을 중심으로 한 변한지역을 정복하였다고 한다.
또 『삼국지』위서 동이전 한조에 보이는 삼한세력의 연맹장인 진왕(辰王)은 이 남하한 퉁구스계 족속의 지배자였다는 것이다. 이들 기마민족은 4세기 초에 이르러 바다를 건너 북큐슈 츠쿠시(筑紫) 지방에 도착하여 토착세력을 정복하여 왜·한 연합왕국을 건설하였다. 이후 4세기 말경에는 다시 키나이(畿內)로 진출하여 야마토정권을 수립하게 되었는데, 전자를 제1차 건국으로, 후자를 제2차 건국으로 보았다.
이 가설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애초부터 한국사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사에 대입하게 되면 일본열도내 세력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고 있었다고 보는 점에서 기존의 ‘임나일본부설’과 같은 관점이라는 것이다. 즉 야마토 정권을 세운 기마민족은 원래의 근거지였던 한반도 남부 지역을 여전히 지배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 때문에 특정 종족의 이동과 국가 건설이라는 동일한 관점에서 출발한 부여족 남하설이 기마민족설의 재판이 아닐까 라는 부정적인 시각도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여족 남하설은 이러한 기마민족설을 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역사를 보는 관점에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에가미 나미오는 일본열도를 정복한 기마민족이 일본열도로 건너가기 전의 근거지였던 한반도 남부지역을 여전히 지배하고 있었다고 파악한 데 비하여 신경철 교수는 이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김해 대성동고분군에서 출토된 왜계(倭系) 유물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기마민족설을 그대로 따른다면 이 유물들은 왜에 의한 가야 지배와 관련지어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김해 대성동고분군의 유물 출토양상은 당시 가락국이 왜보다는 훨씬 선진지역이었음을 보여주며, 이 지역이 왜에게 선진문화의 전달창구로서의 역할을 한 것을 증명해준다.
김해 대성동고분군에서 출토된 파형동기(巴形銅器), 통형동기(筒形銅器), 벽옥제품(碧玉製品)들은 일본 고분시대 전기 수장들의 특수물품으로 왜의 수장이 가야의 철을 중심으로 한 선진문물을 수입하기 위해 일종의 성의 표시로 바친 교역품의 일부로 파악된다. 특히 그 동안 일본에서만 출토되던 통형동기와 같은 유물은 그 원류가 가야쪽에 있었을 가능성도 엿보인다. 이러한 점은 기마민족설에서 말하는 왜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가설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부여족 남하설은 앞으로도 많은 검토와 연구가 축적되어야 하는 현재진행형의 학설이다. 이를테면 3세기 말 4세기 초에 별다른 지배층의 교체 없이도 경주지역은 덧널무덤의 평면형태가 변화하고 있으나 특정종족의 정복이 수반되었음에도 선행 무덤의 파괴는 있었지만 이전 시기와 동일한 무덤형태를 고수했던 것에 대한 해명이 필요할 것이다. 또 선행 무덤의 파괴를 과연 정복의 결과로 단정지을 수 있는 것인지도 검토해 보아야 한다.
김해 대성동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에 대해서도 심도있는 연구가 진행되어 단순한 북방문물의 전파 및 교섭의 산물이 아니라 북방민족의 직접적인 이동의 결과라는 것을 보다 더 명쾌하게 밝혀 주어야 할 것이다.
부여족 남하설이 당시의 역사적 사실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문헌에서 외면당한 3세기 말 4세기대 가야를 역사의 전면에 부각시켰다는 점만으로도 이 학설은 대단한 가치를 지닌다.
더욱이 가야라는 국가의 성립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였고, 지배세력의 성격을 명확히 함으로써 가야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을 제고시켰으며, 북방민족의 정치적 변동을 한반도 남부사회와 연결하여 가야사를 동아시아 고대사의 흐름 속에서 살펴 볼 수 있는 큰 틀을 제시하였다. 또한 제2의 임나일본부설이라 할 수 있는 기마민족설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면서 오히려 가락국에 대한 왜의 문화적 종속성을 실증적인 자료를 통해 보여줌으로써 왜곡된 임나일본부설을 불식시켰다.
1990년 김해 대성동의 얕은 언덕에서 1700여년 만에 찬란한 햇빛 속에 드러난 무덤들은 이처럼 그들의 자태만으로도 잊혀진 가야의 역동적인 역사를 우리들에게 조용히 일깨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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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프레시안 [김운회의 '새로 쓰는 한일고대사'] <23> 압록강을 건너 한강으로
기사입력 2008-10-24 오전 8:09:56
부여계가 한반도로 이주했다는 사실에 대하여 한국의 사학계는 부정으로 일관하고 있지만 부여계의 남하에 대한 연구는 일본에서는 상당히 진행되었고 거의 통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일본의 학계에서는 대체로 『삼국사기』의 기록 가운데 신라의 경우 내물왕(356~402), 백제의 경우 근초고왕(346~375), 고구려는 태조왕(53~146) 이전은 전설시대라고 하여 인정하지 않습니다.
일본 연구의 큰 흐름은 만주 지역에서 모용씨(慕容氏)에 의해 크게 격파된 부여계가 옥저쪽으로 피난 갔다가 대방으로 진출하여 백제를 건국했거나 한반도의 한족(韓族)과 연합하여 고대국가 백제를 건설했다는 논리인데 일본에서는 거의 정설로 되어있습니다.
이나바 이와끼치에 따르면, 285년 경 선비족 모용씨(慕容氏)의 공격을 받은 부여의 잔여 세력들이 동옥저로 피난하여 정착했다가 4세기초 대방 땅으로 들어가서 백제를 건국한 것이라고 추정하였습니다. 이나바이와끼치는 그 근거 가운데 하나로 위례성(慰禮城)을 들면서 위례라는 말이 만주어의 우라(江城)에서 나온 말이 아닌가 추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분석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고이왕 즉 부여왕 울구태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대방을 무조건 황해도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이 당시는 고이왕(234~286) 말년에 해당하는데 고이왕은 대방 땅으로 들어가서 백제를 건국한 것이 아니라 이전에 대방 땅에서 요동부여(또는 남부여)를 건설했다가 공손씨(公孫氏)의 몰락과 함께 한반도 쪽으로 남하해갔다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합니다. 설령 이 때 사용된 대방이 황해도라고 한다면 그것의 원인은 모용씨의 공격을 받아서라기보다는 이전에 위나라 명제(明帝)의 명을 받은 사마의와 관구검에 의한 공손씨(公孫氏) 토벌이 그 이유라는 것입니다.
부여계의 역사에 대해 가장 주목할 만한 견해는 일본사학계에서 만주사에 대한 토대를 구축했던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입니다. 시라토리 구라키치는 대표적인 식민사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시라토리는 4세기 초 동북아시아에서는 고구려가 낙랑과 대방에서 한족(漢族)을 몰아내었고 전연을 건설한 모용씨(慕容氏)가 크게 성장하여 주변을 압박한 사실에 주목합니다. 이 과정에서 부여계가 대이동을 했으며, 이 대이동으로 한반도에서도 씨족제도(clan system)에 기반 했던 백제(伯濟)가 고대국가 백제(百濟)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4세기 초까지만 해도 한반도의 백제를 포함한 삼한은 씨족제도 수준에 불과했는데 부여계의 대이동에 의해 고대국가로 탈바꿈했다는 말입니다.
285년 모용씨에 의해 큰 타격을 받은 부여왕가의 일족이 옥저(현재의 함흥 지역)로 피난 갔다가 313년 대방군이 축출되자 주변의 예맥과 함께 서진하여 대방을 점령하기 위해 국제전쟁에 참가하던 가운데 한반도에서 북상한 강력한 세력인 백제의 걸사(乞師)의 요청을 받고 이들을 구원하고 연합하여 통일국가로 백제를 형성하였다고 시라토리구라키치는 주장합니다. 당시 새로운 국가는 부여족에 의해 장악되어 지배층을 형성하게 되었고 삼한의 한족(韓族)들은 피지배층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평화적인 정권교체는 백제라는 나라이름을 그대로 유지한 것이 주요한 예가 된다고 합니다.
전체적으로 타당한 듯 보입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당시 한강유역의 백제(伯濟)를 과대평가했다는 것과 부여계의 이동을 대방군의 점령이라는 사건과 연계를 시킨 것입니다. 즉 시라토리의 분석의 문제점은 당시 삼한 지역에서 절대강자였던 백제가 부여족과 연합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백제라는 존재가 드러나지 않으며 백제가 설령 있었다고 하더라도 수많은 소국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고 그 이름 또한 백제(伯濟)로 기록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한반도의 미약한 소국들 가운데 절대 강자는 오히려 만주에서 이동한 부여계입니다. 그들은 한 때 공손연과 더불어 중원을 도모했던 사람들이고 『후한서』와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들 요동지역의 부여계는 당시로서는 고대국가로서도 대규모인 2만여명 이상의 군대를 동원할 수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즉 『삼국사기』(태조대왕 69)에는 "부여왕의 아들 위구태가 군사 2만을 이끌고 한나라 군대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하니) 고구려가 대패하였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시라토리구라키치의 분석은 대륙의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한반도 남부의 정치세력들이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고 본 것도 문제입니다. 뿐만 아니라 고이왕 계열의 부여계의 남하는 공손연의 몰락과 관계된 것이지 모용씨와 관계있다고 보기는 어렵지요. 더구나 대방군의 점령(245)과 연계시키는 것도 잘못입니다. 시기적으로 너무 늦게 일어난 일이라 맞지 않습니다.
모용씨의 타격으로 부여계가 궤멸한 것은 285년으로 이 때는 고이왕(234~286)이 서거한 시기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북사』등에는 구태(고이왕)라는 분이 백제의 건국시조로 나타나는데 그러면 도대체 언제 백제를 건국하여 발전시킵니까? 고이왕이 한반도로 내려오기 전에 백제는 없었지요. 한반도에는 수십개의 소국들이 난립하는 가운데 이름없는 백제(伯濟)만이 있을 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부분은 바로 246년(고이왕 12년에 해당) 위나라와 고구려의 요동전쟁입니다. 이 전쟁으로 고구려는 엄청난 타격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전쟁의 후반부에서 고구려는 유격전술과 탁월한 전투의지로 위군을 결국 몰아냅니다. 이 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이 전쟁이 종결되어 압록강에서 요하지역까지는 상당한 힘(Power)의 공백상태가 나타나게 됩니다. 바로 이 때문에 한반도 남부로 내려간 부여계는 상당한 시간적 여유를 벌게 된 것으로 봐야 합니다. 이 시기 부여계의 적은 위나라와 고구려였습니다. 고이왕의 부여계는 상대적으로 약화된 틈을 최대한 활용한 것입니다. 또 다른 수혜자는 선비계의 모용씨입니다. 즉 위-고구려 전쟁으로 양국이 모두 타격을 받은 사이에 모용씨는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부여계는 각종 체제정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임나일본부설을 제창하여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것을 주장한 스에마쓰 카즈요시(末松保和)는 만주에서 크게 침공을 받고 고립된 부여계가 옥저지역(현재의 함경도 지역)을 거쳐 마한(馬韓)의 여러 나라 가운데 하나인 백제(伯濟) 지역으로 남하하여 머무르다가 마한을 통일하였고 이 과정에서 350년경 백제를 건국하게 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 견해의 문제점은 부여계의 이동이 3차에 걸쳐서 일어난 점을 간과하고 있으며 『북사』,『주서(周書)』,『수서(隋書)』등에 명백히 구태(仇台)가 백제를 건설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를 무시한 것입니다.
이상과 같이 일본의 백제 건국에 대한 인식은 주로 만주에서 모용씨(慕容氏)의 세력이 강성해지자 이에 쫓겨서 옥저 지역(함경도)으로 피신하였다가 한강유역으로 남하하여 백제국을 건설하였다는 것이 주된 논리입니다. 이것은 일본사학계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또 백제가 건국된 시기는 모용씨가 제국을 선포한 시기(352년)와 백제가 중국에 조공을 시작한 때(372년) 사이에 백제의 건국이 이뤄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즈노유(水野祐) 교수는 "백제의 건국연대는 4세기 전기 근초고왕이 즉위한 346년경이며, 신라의 건국도 356년 경"이라고 주장합니다. 일본의 사학계는 고구려가 강성해지고 그 세력이 남하하면서 생긴 위기감이나 압박이 백제와 신라의 건국을 촉진하였다는 식으로 분석하는 경우가 많지요. 예를 들면, 이노우에 미쓰사다(井上光貞) 교수는 "고구려의 남하에 자극되어 늦어도 4세기 중엽에는 백제, 신라 등의 국가가 형성되었다."라고 하고 우에다마사아키(上田正昭) 교수는 "4세기 초 고구려의 강대화는 조선 남부의 정치세력에도 변동을 주어 제 한국의 지역통합을 자극하여 마한의 통일에 의한 백제왕국의 출현, 사로국을 중심으로 한 신라왕국의 건설 등이 그 구체화된 현상"이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사카모토요시타네(坂元義種) 교수는 "370년에 마한에 백제가, 진한에 신라가 대두하였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상과 같은 일본사학계의 분석은 한국사학계와 마찬가지로 관념 속에 탁상에서 논의한 것입니다. 고구려의 남하는 백제의 건국과정과는 실제로는 아무런 상관이 없지요. 고구려의 남하는 오히려 열도부여의 건설을 촉진한 것입니다. 반도부여는 부여계의 이동에 의해 생긴 세력이지 고구려의 남하에 자극을 받아서 생긴 제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종합적으로 볼 때 일본사학계 논리의 문제점은 ① 백제의 시작을 근초고왕을 기점으로 한다는 점, ② 부여가 한반도와의 연계를 가진 시기를 근초고왕 이후로 보고 있다는 점, ③ 모용씨 이전의 변화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으며 고이왕계가 한반도 방면으로 남하해 온 점을 무시하고 있다는 점, ④ 일본의 건국과 관련하여 백제의 범위를 지나치게 축소하고 있다는 점 등을 지적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일본 사학계의 연구태도의 이상한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일본 사학계에서는 백제의 기점을 고이왕으로 보면 안된다는 절박함이 있다는 얘깁니다. 부여계의 남하가 열도부여의 야마토 왕조를 건국한 사실에 대해서 이들은 이미 다 아는 것으로 판단되는데, 백제의 시작을 굳이 근초고왕으로 본다는 것은 열도부여가 반도부여(백제)를 거점으로 하여 성립되었다는 점을 부정하기 위한 방편으로 생각됩니다.
다시 말해서 설령 야마토 왕조가 근초고왕 또는 개로왕의 후손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는 점이 궁극적으로 알려진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열도에 도달한 시기를 근초고왕대로 잡게 되면, 한반도는 부여계가 단지 지나쳐가는 장소에 불과하게 된다는 논리지요. 즉 부여계는 만주에서 열도로 이동하여 일본을 건설을 하였는데 한반도 지역의 반도부여의 거점이나 지원은 불필요했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열도를 장악한 부여계가 군대를 돌려 한반도를 식민지화할 수 있었다는 논리를 만들어가는 작업이지요.
하나의 제대로 된 증거도 없이 백제가 한강에서 자생하여 거대 제국을 만들었다는 한국의 사학계만큼이나 한심한 것이 일본의 사학계입니다. 이들은 서로를 식민지화하려고 안달이 난 사람들 같습니다. 한국은 일본을 무조건 백제의 식민지라고 합니다. 반대로 일본은 한국이 일본의 오랜 식민지였다고 합니다.
일본의 연구 가운데 고이왕에 주목한 경우도 있기는 합니다. 예컨대 오카다 히데히로(岡田英弘)는 『주서(周書)』와 『수서(隋書)』의 기록(구태라는 자가 있어 대방의 고지에 백제를 세웠다)들을 근거로 하여 백제의 건국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미천왕은 사마염의 서진(西晉)이 무너지고 모용씨가 중국의 군현을 압박함으로써 요서지역의 힘의 공백 상태가 초래되었는데 고구려의 미천왕(300~331)은 이런 정세를 활용하여 낙랑과 대방을 합병합니다. 이후 미천왕은 구태(仇台)라는 인물을 대방의 고지에 파견하여 군사령관으로 삼았는데 구태는 주로 중국인 주민들을 관리하는 직책이었다고 합니다. 그후 342년 전연(모용씨)의 공격을 받아 고구려가 큰 타격을 입었을 때 구태는 자립하여 백제를 건국하였다는 것입니다.
오카다 히데히로의 견해는 지금까지 살펴 본대로 구태에 대한 분석이 잘못되었습니다. 즉 오카다히데히로의 견해는 ① 구태를 미천왕 당시의 인물로 추정한 점(사실은 부여왕 울구태), ② 구태가 새로운 점령지의 군사령관으로 파견되었다는 근거를 알 수가 없다는 점, ③ 모용씨의 성장으로 요동·요서 지역이 사실상 전쟁터가 되어있는데 그 와중에서 백제를 건국하였다는 점 등의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백제의 건국에 있어서 구태의 역할을 강조하였지만 전체적으로 억측에 가까운 견해가 되고 말았습니다.
부여계의 남하에 대한 일본의 여러 연구들은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 '부여족 남하설'과 '기마민족 신라정복설' 등으로 더욱 체계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부여족 남하설의 내용은 부여족이 김해 지역을 점령하고 금관가야를 건국했다는 것인데 그 근거는 대성동고분군과 동래의 복천동 고분군 가운데 3세기말에서 5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구릉 정상부의 목곽묘라는 것입니다. 이 지역들은 구야국과 독로국의 중심 지역인데 3세기 말부터 도질 토기의 출현과 함께 북방의 유목민족 특유의 유물과 습속들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특히 대성동 유적과 양동리 유적에서 출토된 오로도스형 동복(양쪽에 끈을 매달 수 있는 이동식 솥)은 부여의 중심지였던 길림성 북부지역의 출토품과 유사하다고 합니다. 물론 그 근거는 285년 모용선비의 공격으로 부여가 사실상 와해되고 그 일파가 장백산맥을 넘어 북옥저(현재의 두만강 하류 지역)로 이동했다가 다시 동해안 해로를 통해 김해지역에 정착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마민족 신라정복설'의 주된 내용은 3세기말부터 4세기 초 사이에 동아시아 기마민족의 대이동의 와중에서 그 일부가 신라 쪽으로 내려왔다는 것입니다. 이 이론은 신라의 적석목곽분(금관총, 천마총 등)이 유독 경주 분지에만 나타난다는 점에 주목한 것입니다. 적석목곽분은 주로 중앙아시아에 널리 분포되어있는 것으로 유목민족들의 대표적인 무덤양식입니다. 그런데 이 적석목곽분이 4세기 초에서부터 6세기 초까지 느닷없이 경주를 중심으로 조성되었고 그 주인공은 왕족과 귀족들이었으며 이 고분에서 출토되는 부장품이 대부분 북방계의 유물이라는 점 등을 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