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수(金喆壽 1896~1977, 독립운동가, 정치가), 양산의 독립운동가
김철수는 1896년 5월 4일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상삼리 328번지에서 김상형(金商炯)의 2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상삼마을은 상북면 소재지 석계와 양산천을 마주하고 있는 작은 마을이다. 상삼마을에서 1km 떨어진 좌삼마을은 대한제국 1907년 의병장 서병희(徐炳熙 1867~1907)의 고향이고 김철수의 집 가까이 의병장 김병희(金柄熙 1851~1908)의 집이 있다.
1907년 6월 11일 서병희 부대의 도주를 위해 김병희와 아들 교상(敎相 1872~1908)은 자기 집 사병(포수 의병) 50여명과 일본군 50여명(제14연대 의병토벌부대)과 40분이 넘게 교전해 14명을 사살(또는 중상)한다. 하지만 김병희, 교상 부자는 1908년 6월 체포된 후, 철사줄로 손바닥을 뚫어 묶인 채로 끌려 다녔다. 일본군은 갖은 고문을 한 뒤, 하북면 소재지인 성천마을 앞 현재 통도사 자비도량 근처 소나무에 3일간 매달아 주민들이 보도록 한다. 김교상은 20일 후 상북면 대석골에서, 김병희는 이틀 후인 22일 양산 통도사 앞산에서 57세와 36세에 각각 총살했다. 시신은 하북 상감마을의 우동신(㝢東臣)과 통도사 구하(九河 天輔, 1872∼1965) 스님이 수습했다고 한다. 김병희 후손 김중경(金重經 1934~ )은 양산 오경농장을 일구었다.
김철수(金喆壽 1896~1977)는 어린 시절 기장에 살던 매형인 박인표(朴仁杓, ~1920, 독립운동가)가 경영한 기장의 진명학교(進明學校)를 2년 다니다가 부모가 부산부 동래군 좌이면(左耳面) 구포동(龜浦洞) 28통8호로 이사하자, 구포 구명학교(龜明學校; 당시 1년제, 현 구포초등학교)에 옮겨 1909년 2회로 졸업하였다. 부산상업학교(구 부산상업고등학교, 현 개성고등학교)로 진학하여 1913년 2회 졸업하고, 7월 일본 도쿄 게이오대학(慶應大學) 이재과(理財科)에 입학하였다.
유학 시절 조선학회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조선학회는 1915년 12월 29일64)에 신익희( 申翼熙 1894~1956, 상해 임시정부 국무위원), 윤현진( 尹顯振 1892~1921, 양산 상북면 소토리 출신, 상해 임시정부 재무위원장), 이광수 (李光秀 1873~1953, 1892~ 1950, 2.8독립선언서 작성, 소설가, 친일 변절자), 김양수( 金良洙 1896~1969, 언론인, 독립운동가), 장덕수( 張德洙 1894~1947, 정치인, 언론인, 친일 변절자), 정노식( 鄭魯湜, 1891년~1965,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 판소리 연구가), 최두선( 崔斗善 1894~1794, 교육가, 정치인) 등 11인이 발기인이 되어 조직되었으며 1919년 1월 임원은 이사 김철수, 회계 김도연, 서기 전영택이었다. 이 중 김철수는 장덕수, 정노식 등과 2·8독립운동 후 조선에 귀국한 후 청년운동을 벌일 때에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세계 제1차대전 종전과 전후처리 과정에서 미국 윌슨 대통령은 약소민족의 민족자결주의를 강조했다. 당시 재일 유학생들 사이에서 파리강화회의에 일제 식민지통치를 반대하고 민족자결을 요구하는 의사를 반영하기 위한 거족적인 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1919년 2월 8일 조선청년독립단의 ‘2.8독립선언’의 11명 대표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김철수는 참여했다. 만세운동은 동경 유학생의 거의 전부를 망라한 약 600명이 참가했다. 이 날 김철수는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관 내에 난입하여 운동을 제지하는 일경과 충돌하여 부상을 당한 채 구속되었다.
이 사건으로 김철수는 1919년 6월 26일 대심원(大審院)에서 불온문서( 2.8독립선언서)를 인쇄 배포한 출판법 위반으로 9개월 금고형에 처해져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복역했다. 『매일신보』 1920년 2월 14일자에 의하면 이종근과 김상덕은 1920년 2월 9일 출옥했고 최팔용, 김도연, 김철수, 백관수, 윤창석, 송계백, 최근우, 서춘은 3월 26일에 출옥한다고 보도했다.
게이오기주쿠총람(慶應義塾總覽, 1918)에 의하면 김철수는 1918년에 이재과(理財科) 2학년 C조에 재학 중이었는데 독립운동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퇴학처분을 받았다. 1920년 3월 9일 출옥하여 4월 2일 부산으로 돌아왔다. 이 무렵 고려상회를 경영하고 있던 박인표가 갑자기 사망하여, 이를 정리하고 고향의 전답을 팔아 부산상사라는 무역회사를 열고 민족 자본 육성에 힘을 기울였다.
1920년 7월 15일 양산청년회의 창립을 주도하고 초대 회장에 선출되어 계몽 강연에 분주하였다. 1922년 조선청년전국연합회 대회에서 사회주의 계열 김약수 파와 민족주의 계열 장덕수 파간의 분쟁이 일어났고, 김철수는 이들을 중재하는 역할을 하고자 분투했다. 김철수가 의장에 선출되어 회의를 진행한 결과, 위원장에 정노식, 부위원장에 김철수가 선출되었다. 다음해부터 3년간 김철수는 위원장직을 맡았다.
1923년에는 조선물산장려회에 참여하여 경리부원이 되었다. 이에 조선청년연합회 및 조선물산장려회가 주최하는 순회강연에 강사로 참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4년 무렵 안재홍(安在鴻)의 권유로 시대일보사의 경제부장을 맡았고, 1927년 동아일보 양산지국이 신설되고 기자로 활동한다.
1928년 3월 19일 신간회 양산지회 창립총회가 양산청년동맹회관에서 양산청년동맹 회원들과 양산유지 등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었고 준비위원 측, 김철수의 열열한 개회사가 있었고 전혁(全爀, 전병건全秉健 1899~ 1950)의 경과보고 후 임시집행부로 의장 금석호(琴錫浩), 부의장 김철수, 동 서기 김기오(金琪午 1900~1955, 대한교과서 사장), 강재호(姜在鎬, 1901~1986)가 선출되었다.
김철수가 전국적으로 활동할 때 양산 3.1만세운동 주역인 전병건(전혁)과 함께 신학업(申學業, 1901~1975, 사회운동가), 신영업((申榮業 1899~?, 신학업의 형, 언론인), 김기오(훗날 대한교과서주식회사 사장, 현대문학 창간), 이동계(李東桂, 이동개李同介 1910~1955, 언양 소년단 격문사건 연루자) 언양 출신들이 양산의 청년ㆍ농민ㆍ사회운동에 참여한다.
1936년 이후 일제의 감시와 협박으로 더 이상 활동이 어려워지자 양산에서 은둔 생활을 하였다. 그는 일제의 압박을 당하여 정미소 운영이 곤란해져 마침내 정미소 문을 닫게 되었고 양산을 떠나 상북면 석계리에 은거하여 야산을 개간하며 지냈지만 1941년 일본경찰은 그를 울산군 삼산동 울산비행장 옆 보급물자 창고인 남산동굴에 강제징용으로 보내 노역하게 하고 그 가족의 거주를 제한하는 파렴치한 짓을 일제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