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자료로 정리해본 한국 고대사 http://blog.naver.com/casahoo/20001665463
나주의 옹관묘집단
한반도의 영산강유역에 옹관묘집단의 유적이 나주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이 집단이 가야이며 백제와 관계를 알아봅니다
*나주지역의 고분은 백제의 고분양식과는 다른 고분
사진- 영산강유역의 옹관묘
그런데 대륙의 대릉하 대성자(大城子)유지에서 옹관묘가 발견되는데 한반도 영산강유역의 옹관묘제와 관련이 있으며 나주의 신촌리고분에서 옹관과 토기, 유리구슬, 청동환이 출토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무덤형식은 일본열도의 후나야마, 이나리야마와 암호산과 비슷하고 원통형 외관의 토기부장품도 일본열도의 하나와무덤의 토기와 차이가 없으며 야마토정권의 고분하고도 비슷합니다.
야마토는 가야 수로왕의 왕자와 공주가 세운 정권이고 응신과 아라사가 세운 대화왕조에 연결되며 일본열도에서도 인정하는 대화왕조(열도가야-왜 5왕)는 가야왕조이며 왕의 성씨가 김씨라고 일본열도의 <성씨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한 출토된 유물에서 왕을 상징하는 환두대도, 금동관, 금동신이 출토되어 단순한 세력이 아니었고 대륙의 절강지역에서 이주해온 세력으로 백제가 한반도로 이주하여 남진하기 전까지 한반도의 남부(영산강과 김해)를 장악하고 있던 가야연맹 입니다.
참고- 대륙의 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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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신촌리 9호분은 가야식 옹관묘이며 형식은 전방후원분보다 빠르고 이곳이 발라국(發羅國) 또는 보라국(保羅國)으로 불렸던 가야연맹의 일원이었던 것으로 보고 있으며 한반도의 입점리고분도 가야왕족으로 백제왕이 된 인물의 묘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주 보라는 옛 글에서는 ㅂ+아래아+ㄹ,라> 발라(發羅)이다.)
입점리고분이 발견된 웅포 역시 공주와 마찬가지로 곰나루인데 <일본서기>'웅신기'에도 말다왕(末多王)이 구마나리(久麻那利)에 도읍을 한 것으로 되어 있고 웅포의 고분축조 연대가 사마왕능보다 앞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입점리고분의 구조는 공주 송산리고분과 비슷하고 출토유물에서 금동관과 금동모, 금동신발은 나주의 신촌리고분 출토품과 비슷한데 일본열도의 구주 후나야마고분에서도 나오고 있어 문화의 일본열도 전파를 뒷받침할 자료로 평가하고 있다.
가야왕족의 고분군에서 나주 신촌리고분이 가장 빠르고 구주 암호산고분이 370년대이며 후나야마고분은 380년대 것을 8세기에 이장 증축한 것이다.
그 다음이 입점리고분인데 이것이 <여지승람>에는 말통대왕(末通大王)의 능으로 기록되어 있고 또는 무강왕(武康王)의 능이라고도 불리고 있으며 이나리야마고분이 가장 나중의 것으로 봅니다.
일본열도의 암호산고분은 동성왕의 고조부 가야왕 아라사의 능이며 후나야마고분은 동성왕의 증조부이며 아라사의 장자 대언명의 능이고 이나리야마고분은 대언명의 9세손 이나리의 능입니다.
<일본서기>'신공기'
[비자발, 남가라, 훼국, 안라, 다라, 탁순, 가라의 7국을 평정하였다. 이에 군대를 서쪽으로 돌아 고해진에 이르러 남만의 침미다례를 도륙하여 백제에 내려주었다. 이에 그 왕 초고 및 왕자 귀수 역시 군대를 이끌고 와서 모였다]
[그때 비리, 벽중, 포미, 지반, 고사읍이 자연 항복하였다. 이에 백제왕 부자 및 아라다와케, 목라근자등이 함께 의류촌에서 만나 서로 기쁨을 나누었다. 예를 두텁게 하여 보냈다. 오직 치쿠마나카히코가 백제왕과 함께 백제국에 이르러 벽지산에 올라 맹세하였다]
기록의 주체가 일본열도(왜)로 되어 있으나 침미다례를 남만으로 표기하는 것으로 보아 백제로 보아야 합니다.
백제가 한반도에서 세력을 확장하던 시기에 영산강의 옹관묘집단이 어떤식으로 백제에 편입되는지 고분양식의 변화를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백제본기'
[마한에 사신을 보내어 천도를 고하고 강역을 확장하였는데 북은 패하에 이르고 남은 웅천에 한하며 서는 대해에 이르고 동은 주양에 이르렀다]
이 기록은 근초고왕의 기록으로 근초고왕은 고해진을 점령한 후에 영산강세력(가야)과 강역을 정하고 노령산맥을 기준으로 이북은 백제가 이남은 영산강세력이 자치권을 행사한 것으로 백제의 삼족토기가 노령산맥을 넘지 못했다.
이유는 백제가 해상교통의 요지인 고해진을 점령하므로 영산강세력을 간접적으로 지배하면서 나주의 농업과 수산물의 경제적 이득을 취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백제가 고구려에 패배하면서 영산강세력과 통합하게 되는데 백제사에 갑자기 나오는 '8성대족'이 바로 영산강세력이고 가야계왕족인 동성왕시대에 영산강세력이 백제의 중앙 정치제도에 '8성대족'으로 완전히 편입됩니다.
지도- 가야의 영토
<삼국사기>의 '왜'라는 기록도 가야이며 <일본서기>에는 임나가야, 대가야, 금가야. 아라가야라는 기록이 있는데 당시 일본열도에는 '왜'도 없고 일본도 없었습니다.
'왜'라고 불린 세력은 한반도에서 백제에 밀려 일본열도로 진출한 가야였고 한반도의 가야는 4세기까지 호남과 영남지역을 지배하고 있었으며 일본열도로 진출한 후에는 구주, 본주의 서쪽이 가야의 영토로 백제와 가야가 연합체로 성장합니다.
<삼국사기>의 백제기록에서 '8성대족'이라는 집단이 영산강유역의 가야세력으로 <성씨록>에서도 백제의 진씨(眞氏)와 가야의 김씨(金氏)가 나오고 백제의 담로제라는 것이 가야의 왕자, 공주의 분봉제와도 비슷합니다.
그러므로 전북 익산의 입점리고분과 영산강유역의 나주 신촌리고분 유물이 흡사하고 일본의 구주 후나야마, 이나리야마고분 유물과도 비슷합니다.
후나야마고분은 동성왕의 증조부의 능이라고 <일본서기>와 <성씨록>에도 나오고 이나리야마고분의 주인공도 동성왕의 선조로 모두 가야왕 아라사의 장자 예진의 후손입니다.
*<성씨록>- '이나리'는 동성왕 증조부의 후손으로 기록됨
그리고 가야가 대륙에서 한반도로 들어온 백제에게 밀리기 전에는 경기, 충청도 가야의 영토로 보입니다.
그것은 가야의 성씨가 '김(金)'이고 철의 생산지이므로 '쇠(金)'자가 증명하듯 '빛땅'계열 지명들이 있는데 미추홀, 완산, 완주, 광산, 비사벌, 비자발, 삼량화, 추량화, 삼랑진, 밀양, 추화 등 충남부터 호남, 영남에 그런 지명이 있으며 이런 지명들은 특정한 부족만이 쓰는 겁니다.
참고- 가야계열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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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비류계는 고구려(광개토왕)에게 패하여 일본열도로 이주하면서 가야와 일본열도에서 세력다툼을 하게 되고 백제의 온조계는 호남과 영남을 빼앗는데 <일본서기>'응신기'에 백제의 비류계 아신왕과 가야계 응신의 연합군에게 백제의 온조계 진사왕이 구원에서 전사하고 그 아들 권속들이 대거 일본열도로 망명합니다.
참고- 고대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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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 비류계 아신왕과 가야계 응신이 백제와 일본열도를 분리하여 한반도는 백제의 땅이 되고 일본열도는 가야가 대화왕조를 세우고 구주, 본주 서쪽지역을 차지하여 100년 이상 유지하다가 동성왕이후 가야의 김씨가 쇠퇴하고 백제의 부여씨(무령왕)가 일본열도도 장악합니다.
<삼국사기>에는 30년후에 서라벌신라에 가야의 영토가 넘어갔다고 되어 있는데 거짓기록으로 무령왕때부터 일본열도가 백제의 완벽한 속국이 되었는데 그 중간거점인 김해의 가야를 서라벌신라가 차지했다면 일본열도에 다니기가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산강고분의 변화를 보면 3세기부터 고분이 거대화되었고 이후 6세기부터는 옹관묘가 점차 소멸되고 나주 흥덕리에서 은제관식이 매장되어 있는 횡혈식 석실분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한반도의 가야가 백제에게 흡수된 것입니다.
결국 백제에 흡수된 가야연맹(영산강과 김해)은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백제와 공동으로 지배하면서 성장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