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명고예고편 박민영의 목욕신,정려원의 찬물 입수]

2008년 3월 SBS에서 '자명고'를 방영한다고 예고를 많아 하고 있지요. 초등학교 때 부터 무율왕
(대무신왕)의 아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에 대한 얘기를 많이 들었잖아요. 정말 애절한 사랑 이바구
는 뒤로 하고 정말 저절로 북 소리를 울리는 자명고가 있었을 까요?   그리고 역사책에서 나오는
한(漢)나라에서 설치한 낙랑군과 낙랑국은 동일한 지역 일까요?  그럼 이제 살펴봅시다. 


[출처]고대사산책
www.coo21.net  < 낙랑국과 낙랑군 > 송준희


(요 약)
삼국사기를 보면
1. 대무신왕 15년(32년) 고구려가 한반도에 있던 최씨의 낙랑국을 평정합니다
< AD 32년 : 삼국사기 - 高句麗 - 王子 好童遊於沃沮樂浪王崔理出行崔理降 >
< AD 32년 : 삼국사기 - 고구려 - 왕자 호동유어옥저락랑왕최이출행최리항 >

2. 대무신왕 20년(37년) 대륙에 있는 한의 낙랑군을 병합합니다
- 한반도의 낙랑국이 아닌것 같습니다
- 다음 내용을 보면 이해가 가실 것입니다
< AD 37년 : 삼국사기 - 高句麗 - 王襲樂浪滅之 >
< AD 37년 : 삼국사기 - 고구려 - 왕습락랑멸지 >
< AD 37년 : 삼국사기 - 신라 - 高句麗王樂浪滅之其國人五千來降 >
< AD 37년 : 삼국사기 - 신라 - 고구려왕락랑멸지기국인오천내항 >

3. 대무신왕 27년(44년) 다시 한무제가 고구려에게 빼앗긴 낙랑군을 다시 공격합니다
- 당연하겠지요 옥토를 빼았겼으니 다시 침공한 것 같습니다
< AD 44년 : 삼국사기 - 高句麗 - 漢光武帝遣兵渡海伐樂浪取其地爲郡縣>
< AD 44년 : 삼국사기 - 고구려 - 한광무제견병도해벌락랑취기지위군현>

4. 그런데 모본왕 2년 (AD 49년) 다시 고구려가 북평, 태행산맥 서쪽 태원까지 쳐들어가 응징을 합니다
< 삼국사기 - 高句麗 - 遣將急漢北平漁陽上谷太原 >
< 삼국사기 - 고구려 - 견장급한북평어양상곡태원 >

- 다음 지도를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한의 낙랑군이 한반도에 있었는데 모본왕 2년 북평, 태원을 고구려가 어떻게 평정하겠습니까 ?
현재 지도에도 지명이 남아 있습니다
중국기록에 낙랑국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한족과 낙랑국이 접촉이 없었기 때문에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야 하며 호동왕자의 낙랑국은 한낙랑군과 구별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
태행산맥을 중심으로 지나와 동이각국이 대치를 하고 있었는데 한반도를 보고 기록을 남길 수가 없었을 것 아닐까요
대무신왕의 아들인 왕자호동을 낙랑국에 보내어 "자명고각"을 찢어버린후 최리왕을 고구려에 항복하게 만들었으니 낙랑국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합니다



(본문 전문)

< 낙랑의 진실 - 낙랑은 어디에 있었는 가 ? >

낙랑에 대한 정확한 해답이 될 수는 없겠지만 그 당시 주변국의 정황을 추적해보면 그 위치를 알수가 있다
부족한 내용이지만 낙랑의 해법에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중국사서는 한의 낙랑군 만을 기록하고 있고 기존학자들은 한의 낙랑군과 최씨의 낙랑국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유일하게 삼국사기 만이 양자를 구분하여 기록하고 있으며, 삼국유사는 낙랑국을 기록하면서 내용은 낙랑군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통상 낙랑이라면 한무제가 세운 낙랑군을 생각하게 되나 그 통치자는 왕이 아닌 태수로 되어있다
그러나 태수가 아닌 왕으로 나오는 낙랑왕 최리, 최숭에 대한 기록이 삼국사기에 있으며 이사실은 중국사서에는 전혀 그기록을 찾을 수가 없는 우리 독자의 기록이다
우리 학자들은 아직도 왕의 낙랑국과 태수의 낙랑군을 구별하지 못하고 혼돈하고 있는 바, 이는 삼국사기의 사료로서의 가치를 부정하고 멸시하는 데서 오는 까닭인 것 같다
그러나 일제의 더러운 역사말살정책에 의하여 유일하게 남겨진 정사 삼국사기와 광개토대왕비문, 중국정사만을 비교검토 하여도 우리역사의 맥은 자연스럽게 풀린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아야 할 것이다
낙랑국에 대한 기록은 북부여기와 삼국사기에 공통적으로 기록되어있다
북부여기에 있는 최숭왕은 BC 195년이고 삼국사기에 있는 최리왕은 AD32의 내용이다
즉 낙랑왕국은 고구려에 병합될 때까지(AD32년 : 삼국사기) 적어도 200년이상 존재한 나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는 낙랑국이라는 제목을 적어놓고 낙랑군의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1. 최씨의 낙랑국과 한의 낙랑국의 위치도


낙랑군은 왕호를 사용한 적이 없고 위만조선 패망후 설치되었으며 수많은 전쟁을 치룬 지역이었다
또한 최씨성을 가진 태수는 하나도 없고 전부 왕씨 또는 유씨로 분명 왕의 낙랑국과는 다른 태수의 낙랑군이었던 것이다

2. 낙랑군은 대방과 같은 지역에 있었고 낙랑국은 옥저와 같은 지역에 있었다
낙랑군은 위만조선, 한사군, 창해군, 초기백제 300년대신라의 위치를 알수 있는 지명이며 낙랑국은 한반도의 기원전후의 역사, 한반도가 언제 高句麗에 병합되었는가를 알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지명이다
< 濊北與高句麗沃沮南與辰韓接東窮大海西至樂浪 (후한서85) >
< 예북여고구려옥저남여진한접동궁대해서지락랑 (후한서85) >

3. 낙랑국과 낙랑군 비교표


4. 낙랑국의 위치
낙랑국은 옥저의 주변국가이던가 아니면 낙랑국내에 옥저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낙랑국은 고구려 동쪽에 위치했고 낙랑군의 고구려의 서남쪽에 위치해 있었다고 여러 중국사서에서 확인되고 있다
따라서 낙랑군은 창해군의 서쪽, 즉 북평의 서쪽(고죽국-낙랑군-북평)으로써 현 중국의 하북성과 산동성으로 추정되며 낙랑국은 만주의 동부와 한반도로 추정된다
낙랑국은 북부여기와 삼국사기에만 기록이 확인되고 중국사서나 기타 사서에서 전혀 그 기록을 발견할 수 가 없다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한 부분임에는 틀림없다 하겠다

4. 낙랑국의 변천 (한반도 전체가 낙랑국 → 고구려干地 → 반도신라의 역사를 가지었다)
BC 195년 ~ AD 32년 : 최씨의 낙랑국
AD 32년 ~ AD503년 : 고구려干 (고구려 지배하에 있음, 광개토대왕 비문)
AD 503년 ~ AD936년 : AD503년 고구려干 으로부터 독립하여 국호를 신라로 정함 (진흥왕 순수비)

5. 낙랑군의 변천 (한, 고구려, 백제, 신라가 번갈아 가면서 점령한 땅이었음)
- BC 108년 ~ AD 37년 : 한
- AD 37년 ~ AD 44년 : 고구려 복속
- AD 44년 ~ AD219년 : 한
- AD 219년 ~ AD265년 : 위
- AD 300년 ~ : 대륙신라
- AD 391년 ~ : 고구려
- AD 450년경 ~ : 백제
대무신왕 15년(32년) 최씨의 낙랑국을 평정(한반도)하며
< AD 32년 : 삼국사기 - 高句麗 - 王子 好童遊於沃沮樂浪王崔理出行崔理降 >
대무신왕 20년(37년) 한의 낙랑군을 병합합니다
< AD 37년 : 삼국사기 - 高句麗 - 王襲樂浪滅之 >
< AD 37년 : 삼국사기 - 신라 - 高句麗王樂浪滅之其國人五千來降 >
대무신왕 27년(44년) 다시 한무제가 빼앗긴 낙랑군을 다시 공격합니다
< AD 44년 : 삼국사기 - 高句麗 - 漢光武帝遣兵渡海伐樂浪取其地爲郡縣>
모본왕 2년 (AD 49년)
< 삼국사기 - 高句麗 - 遣將急漢北平漁陽上谷太原 >
만일 한의 낙랑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면 모본왕 2년 북평, 태원을 고구려가 어떻게 평정하겠는가 ?
이지명은 현재 북경 서쪽에 있습니다(중국 송나라 고지도 우적도 + 현재중국지도)
중국기록에 낙랑국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한족과 낙랑국이 접촉이 없었기 때문에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야 하며 호동왕자의 낙랑국은 한낙랑군과 구별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
대무신왕의 아들인 왕자호동을 낙랑국에 보내어 "자명고각"을 찢어버린후 최리왕을 고구려에 항복하게 만들었으니 낙랑국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합니다


6. 沃沮 동쪽에 최씨 樂浪國이 있을 때 高句麗 濊의 서쪽에는 유헌, 왕조, 왕준의 樂浪太守가 있었다.
그러나 낙랑국은 BC 195년에도 있었기 때문에 한의 낙랑군보다 약 100년전에 이미 존재하였다.

7. 太守의 낙랑은 BC108년부터 漢에 의하여 쓰여지고 漢, 高句麗, 魏, 百濟등 漢族과 東夷가 두루 사용하였다.
'史記'에서 '唐書'까지 長安中心의 기록과 동이의 '삼국사기'에 공통적으로 기록되고 있다.

8. BC195年은 고리(高麗고려,高黎고리)의 해모수(解慕漱), 한(韓)의 기자(箕丕), 위만(衛滿)조선, 낙랑국(樂浪國)의 최숭(崔崇) 등으로 다분화되어 있던 시대로 분명히 한(漢)이 낙랑군(樂浪郡)을 설치하기 이미 90년이전에 이미 낙랑국이 국호로써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왕(王)은 바로 나라의 통치자였던 것이다

< 낙랑에 관한 기록들 >
- BC 195년 : 북부여기 - 낙랑국 - 王 崔崇
- BC 169년 : 북부여기 - 낙랑왕 - 王 崔崇
- BC 108년 : 사기한서 - 漢 - 置樂浪郡
- BC 28년 : 삼국사기 - 신라 - 樂浪人將兵來侵
- BC 20년 : 삼국사기 - 신라 - 人民敬讓自辰韓遺民以至卞韓, 樂浪倭人無不畏懷
- BC 18년 : 삼국사기 - 백제 - 帶方故地
- BC 11년 : 삼국사기 - 백제 - 樂浪太守使古曰
- BC 8년 : 삼국사기 - 백제 - 樂浪使靺鞨襲破甁山柵
- BC 6년 : 삼국사기 - 백제 - 國家東有樂浪
- BC 2년 : 삼국사기 - 백제 - 樂浪來侵焚慰禮城
- BC 1년 : 삼국사기 - 백제 - 王慾襲樂浪牛豆山城
- AD 4년 : 삼국사기 - 신라 - 樂浪兵至圍金城數重賊俄而退歸
- AD 14년 : 삼국사기 - 신라 - 樂浪謂內虛來攻金城甚急
- AD 30년 : 후한서 - 漢 - 樂浪人王調殺郡守劉憲自稱樂浪太守居郡不服
- AD 30년 : 후한서 - 漢 - 遣樂浪太守王尊擊之郡吏殺調降
- AD 32년 : 삼국사기 - 高句麗 - 王子 好童遊於沃沮樂浪王崔理出行崔理降
- AD 36년 : 삼국사기 - 신라 - 樂浪犯北邊攻陷朶山城
- AD 37년 : 삼국사기 - 高句麗 - 王襲樂浪滅之
- AD 37년 : 삼국사기 - 신라 - 高句麗王樂浪滅之其國人五千來降
- AD 44년 : 삼국사기 - 高句麗 - 漢光武帝遣兵渡海伐樂浪取其地爲郡縣
- AD 47년 : 삼국사기 - 高句麗 - 蠶友落部大家載升等一萬餘家至樂浪投降
- AD 49년 : 삼국사기 - 高句麗 - 遣將急漢北平漁陽上谷太原
- AD 300년 : 삼국사기 - 신라 - 樂浪帶方歸屬
- AD 313년 : 삼국사기 - 高句麗 - 樂浪侵
- 4세기 : 남제서 - 百濟 - 樂浪太守

(참고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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