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coo2.net 게시판    역사연구 (2003-11-11 13:57:22, Hit : 774, Vote : 21)


산책님께는 죄송합니다만, 본토는 대륙이 맞습니다. 백제의 초기 도읍지인 위례성일대는 대륙의 황하 화북성이고, 광동성 일대가 후대의 도읍지인 사비성, 웅진성 일대입니다. 백제의 왜국으로의 출병은 대륙에서 열도로 수십번 출병하기 힘들다 했는데, 그렇게 친다면 가야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요?

하지만 정작 가야의 본토 역시 대륙입니다. 앙자강 남쪽의 절강성 이남지대... 단지 반도에도 가야가 존재했으니 반도가야를 거쳐가는 중계지역으로 삼아 열도에 진출이 가능했죠. 백제가 열도로 진출한 것은 본토에서 직접 군사를 열도로 출병했다기 보다는 본토의 군사를 징발하여 반도 백제의 심장부에 이동시켜 반도백제의 병력과 합세하여 열도로 갔거나 자체적으로 반도백제의 병력을 출병시킨 뒤에 그 공백을 후일 대륙의 병력으로 일부 충당했다고 보는 게 더 상식 아닐까 싶습니다. 게다가 대륙의 수도에서 반도로 수도를 옮겼다는 것 부터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됩니다. 한 나라의 수도라는 건 그 성의 크기에 있어서도 거대할 뿐 아니라 천도는 나라의 중대한 사안인데 대륙에서 좁은 반도의 현 공주 일대로 옮겼다는 게 논리적으로 납득이 안되죠. 게다가 현 공주 부여 일대에는 백제의 수도라 하기에는 그 유적이나 유물이 너무나도 보잘 것 없이 적습니다. 무령왕릉이라 일컸는 것도 실은 무령왕릉이 아닌 일가 왕족의 무덤이구요. 더불어서 흑치상지가 부흥운동을 한 것은 광동성일대 백제향의 지역이니 더 그렇죠.

저로선 좀 놀라운 게 백제의 본토가 반도라고 본다는 건 준 반도사관인데 이거 뭔가 좀 말이 안되는 거 같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산책님의 견해가 누구와 일치하냐면 이도학 교수나 김성호와 흡사하거든요. 이도학 교수나 김성호도 백제가 본토 및 수도가가 반도인 것으로 보고 백제영토가 대륙에 있었던 것은 반도에서 대륙으로 진출한 것으로 보고 있는데... 평소 산책님의 글에서 많은 것을 배워갑니다만, 이건 뭔가 좀 아니다 싶어서 몇자 적습니다. 아무래도 산책님의 전공분야가 열도관련이다보니 반도를 수도가 있던 본토로 잘못보시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만.

이것은 저만의 주장이 아닌, 여러 재야사학사이트에서도 본토가 대륙이다라는 건 여러가지 증거들을 근거로 한 것이기에 드리는 말씀이니 오해가 없으셨으면 합니다. 산책님의 고견이라던지 이런 부분들은 평소 높게 삽니다만, 이번 경우는 산책님께서도 학자이기 이전에 한 사람이시기에 순간적으로 실수하신 거라고 봅니다.
사서를 보더라도 흑지상지의 부흥운동 지역은 수도와 그리 멀지않은 가까운 지역이라 적고 있습니다. 게다가 의자왕의 무덤이 북망산 일대이고 부흥운동이 일어난 지역은 대륙인데 상식적으로 반도가 수도가 될 수가 없죠.

앞으로도 이와 관련해서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한가지 덧붙이자면, 산책님의 견해대로 반도가 위례성시대 이후 중기 백제의 수도였다고 친다면, 현 강단및 일반 국사교과서에서 일컫는 수도인 현 공주, 부여 일대에서 백제왕족 및 귀족들의 무덤이 최소 수십개에서 최대 수백개도 넘게 나와야 함에도 불구하고(재위 왕들 및 왕비의 무덤만 계산하더라도) 가짜 무령왕릉 달랑 하나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다시피 인데.. 이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요. 수백개에서 수십개의 왕릉이 발견되려면 그 만큼의 땅을 점유해야 하는데 현 공주 부여의 지역크기에선 불가능합니다. 일반인의 무덤 하나가 차지하는 크기만 해도 1평이 넘는데, 왕릉이라면 그것보다 몇수십배는 더 큽니다.

참고로 제가 찾아본 백제의 수도가 언급된 글들은

율곤학회 게시판에서 웅진이란 단어로 검색했고, 지금 이곳 우리 역사의 비밀의 우리역사-백제란에서 웅진, 사비로 검색하거나 지도자료입니다.

예를들어서 백제의 중후기 수도를 반도로 비정한다면 신라와 당의 백제 공격시 상황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대륙의 당과 신라가 반도로 침공을 한다는 공식이기에 말이 안됩니다. 중후기 수도인 사비, 웅진이 반도에 있었다면 당연히 그시대의 백제 지명이 반도에 존재해야 하나 반도에는 없고 대륙엔 존재합니다.(백강, 주류성 등등) 정작 백제 멸망시 백강, 혹은 백마강의 위치는 황하 이남 안휘성 하남성 인접 지역입니다.

백제의 수도인 위례성일대는 현 하남성 일대로 확실하게 굳어진 상태이고, 비류백제의 수도인 미추홀은 광동성이나 안휘성 안읍 인근 일대로 비정됩니다.
후기 수도인 웅진, 사비에 대해서는 두가지 견해인데 광동성, 안휘성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고대사산책 (2003-11-11 15:57:43)  
강단의 반도사관은 대륙백제군조차도 인정하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5세기말의 북위와의 전투도 海戰이라고 하는 자들 있잖아요.

기마민족인 북위가 기병 수십 만을 배에 태워오다 황해에서 백제와 해전을 했다는 애들 만화보다 더 웃기는 소리를 학설이라고 하는...

근본적으로 위는 대륙 북방의 기마민족으로 배와는 사돈의 팔촌도 넘은 세력이라 양자강도 못넘어 남제를 제압을 못한 세력이지요. 강도 못넘은 세력이 바다씩이나? 말도 안되...

더구나 대륙세력이 바다를 건널 때는 반드시 산동의 동이족들의 힘을 빌렸는데 주로 등주, 래주 등지의 세력이지요. 이게 진한인들이고 요서백제 영역인데...수군을 동원할 수 있을 리가 만무하지요.

위가 바다 건너 백제를 칠 동기도 없고 능력도 없고...사실무근...

백제본국이 반도에 있었다고 하면 반도사관? 이건 아닙니다. 인식을 고치셔야 할 듯...대륙사관도 여러 가지 있을 수 있지요.

박창범 교수의 논문에서 양자강 남쪽으로 나타나는 신라를 서신라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것은 정확히 강남백제와 영역이 일치하고 가야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은 단정하기 어려워요...
고대사산책 (2003-11-11 16:01:10)  
5세기말의 백제와 위의 전투는 남제서에 나오다시피 동성대왕의 백제군과 북위와의 육전이었고 요서백제 영역에서 있었던 사건들임...
심재호 (2004-04-08 22:04:58)
그러고 보니, 역사 스페셜에서도 무령왕릉 발굴의 허점을 밝힌 방송이 나간 적이 있습니다.
[출처 배달국 http://www.baedalguk.com ]  글쓴이 : 신완순   ( 2006-10-10 22:02:25 , Hit : 891 )  
제목 : <백제의 8대 성씨>-밝혀지는 대륙백제

 (사무불통) 백제의 8대 성씨는 현재도 대륙에 있다

(운영자 주)

사무불통님이 올려주신 자료를 재편집하여 이제야 올립니다 사무불통님의 우리역사찾기에 대한 열정에 감사의 인사를 다시금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서 언)


중국정사인 수서에 보면 백제에는 아래와 같은 8개의 大성씨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한반도에는 없고 대륙에 존재하고 있다.

"백제유 대성팔씨 사씨 해씨 진씨 목씨 국씨 연씨 묘씨(혹 묘씨) 협씨"

"百濟有 大性八氏 沙氏 解氏 眞氏 木氏 國氏 燕氏 (?)씨(或 苗氏) 協氏"

→ (?) 묘씨의 묘자는 “초두”변에 “가로왈” 사용한자임

(본문) 사무불통님이 올려주신 글

<백제의 왕족인 부여(夫餘)씨는 중국절강성 유역에 존재한다>

▒ 부여(夫餘 , 혹은 夫余) 씨

백제의 왕족인 부여(夫餘 , 혹은 夫余) 씨에 관하여 알아봅니다.
부여(夫餘 , 혹은 夫余)씨는 북사(北史)에 기록된 백제 8대성 중의 하나이며 왕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 문헌기재
동한(東漢) 때 쓰여진 <풍속통의(風俗通義)>에 처음으로 보임

2. 역사적 연원
 

1) 풍속통의에 의하면 춘추시대 말 오(吳)나라 태자 부개(夫槪)가 초국(楚國)으로
    달아나고 여자(余子)가 오국에 남았는데 이에 부여씨가 됨
2) 사기 화식전(史記 貨殖傳)에 의하면 한나라 시기에 북쪽의 오환(烏桓), 부여(夫餘) 등이
    그 족명을 성으로 삼음

3. 부여씨의 지역 분포


1) 성씨고략(姓氏考略)에 의하면 부여씨는 오흥군(五興郡)에 나타나 보이는데
    오흥군은 삼국시대 보정원년(266년)에 설치되었다.
2) 지금 차이나의 절강성 임안(臨安)에서 강소성 의흥(宜興)일대
3) 이 지역은 오정(烏程)에서 다스렸는데 지금의 절강성 오흥현(吳興縣) 남쪽이다.

→ 오흥현은 지금의 절강성 호주(湖州)입니다.

절강성 호주는 상해에서 가까운 지역입니다. 왜 이 곳에 백제의 8대성 중의 하나이며
백제의 왕족인 부여씨가 많이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을까요?

이 곳이 지역상 오(吳)에 해당하는 지역이고 고구려 백제 강성시 유, 연, 제, 노, 오. 월을 평정했다는 기록으로 볼 때
이 곳은 오랜 기간 백제의 땅이 분명합니다.  위의 자료는 1995년 차이나 북경출판사에서 펴낸 중국성씨사전(中國姓氏辭典)을 참조하여 작성된 것입니다.

▒ 목(木)씨

1. 지망분포
1) <성씨고략>에 의하면 목(木)씨는 오흥군(吳興郡)에 분포되어 있음
2) 오흥군은 지금의 절강성 임안(臨安)에서 강소성 의흥(宜興)일대임

→ 백제의 유명한 인물 : 목간나(木幹那)
→ 백제 왕성인 부여(扶餘, 夫餘, 夫余)씨와 분포지역이 똑 같음

▒  추가의견(사무불통)

백제의 왕족인 부여씨는 목(木)씨와 함께 절강성 오흥군(吳興郡)일대외에 다른 지역에는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오흥군은 백제의 수도중의 하나가 아닐까 하고 조심스럽게 생각해 봅니다. 오흥군은 지금의 절강성 호주(湖州)일대의 지역으로서 차이나 5대호수 중의 하나인 태호(太湖)의 남쪽에 해당됩니다.  따라서, 백제는 대륙의 태호의 남쪽 즉 호남(湖南)에 살았기 때문에 현재 우리나라로 이주해 온 혹은 세력을 넓힌 백제에 의해서 지금의 전라도 지역을 호남으로 부르는게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개인적인 의견임) 백제의 역사가 근 700년에 이르니 충분히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 해(解)씨

1. 지망분포

1) <군망백가성>에 이르기를 해(解)씨는 평양군(平陽郡)에 분포되어 있음
2) 평양군은 지금의 산서성(山西省) 임분현(臨汾縣) 서남이다.

→ 백제의 유명한 인물 :  해례곤(解禮昆)

2. 관련지도
   (운영자 생각) 백제의 진평이군(고평/진성)과 고구려 광개토대제의 신하였던 유주자사 진의 관할하에 있던
   산서성 태원태수, 대군래사를 감안할 경우 산서성에 대한 재평가도 이루어 져야 한다
   백제의 장군 해례곤은 과연 여기출신일까 ?  만약 그렇다면 그 땅은 누구의 주강역이었을까 ?
   그것이 궁금합니다

▒ 사(沙)씨

1. 지망분포(地望分布)

1) <군망백가성(郡望百家姓)>에 이르길 사(沙)씨는 여남군(汝南郡)에 나타난다.
2) <성씨고략(姓氏考略)>에 동완(東莞), 여남(汝南)이라 했다.
3) 여남군은 한나라 고제(高帝)때 설치했으며,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중부의 상찰현(上察縣) 및 안휘성(安徽省) 회하(淮河)이북지역이다.
4) 동완군은 진(晉)무제 태시(太始) 원년(265년)에 설치되었으며
   지금의 산동성 기수(沂水), 영현(營縣)일대이며 한나라 양군(陽郡)의 구지(舊地)이다.

→ 백제의 유명한 인물 : 사법명(沙法名)

2. 관련지도

▒ 진(眞)씨

1. 역사연원

1) 백제 8대성 중의 4번째 성씨
2) 신(愼)씨가 진(眞)씨로 됨

2. 지망분포(地望分布)

1) 성씨고략에 의하면 진씨는 상곡군(上谷郡)에 보임
2) 상곡군은 현 하북성 서북부. 회래현(懷來縣) 동남일대

3. 관련지도

4. (참고) 상곡

   (중국 정사 사마천의 사기본기 원문상 탁록在 상곡) 탁록에 상곡이 있었다 그 유명한 치우천자와 제후 소전의 아들 헌원과의 “탁록전투”로 유명한 그 탁록에 상곡이 속하여 있었다는 것이다 (북경대 교재상 지도) 북경대학교 교재상에도 상곡이 탁록지역에 표기되고 있어 윗 사실을 재삼 확인해 준다

(논 점)

(1) 사서에 기록된 백제 8대 성씨가 존재하는 곳은 중국대륙
(2) 사서에 등장하는 백제 장군의 성씨도 중국대륙에는 있어도 반도에는 없다

먼저 소개하는 글은 1981년 11월26일 ~ 27일 양일간 열린 이틀간의 국회 "국사청문회"에서 고 임승국 교수님이 발표하신 국회 속기록 내용중 백제 성씨에 관한 발언 부분입니다

(임승국 교수) “백제 일곱장군의 성씨는 중국에 존재한다” 또 백제 7장군의 성씨만 훑어봐도 사학을 아는 사람은 깜짝 놀랄일이 있어요 왜 그런고 하니 백제에는 본래 8대 성씨가 있는데 중국 25사와 우리 삼국사기는 이렇게 적고 있어요
"백제유 대성팔씨 사씨 해씨 진씨 목씨 국씨 연씨 묘씨(혹 묘씨) 협씨"
"百濟有 大性八氏 沙氏 解氏 眞氏 木氏 國氏 燕氏 (?)씨(或 苗氏) 協氏"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백제 8대성씨가 현재 남북한을 통틀어 단 한 가구도 남지 않았는데 남제서 백제전의 7장군 성씨들은 대부분 유서깊은 8대성씨들이라는 사실이예요   다음은 상기한 고임승국 교수님의 발언내용을 뒷받침 하는 사서의 기록인데 중국정사인 남제서 나오는 기록을 일부 인용하여 소개합니다  

아래 원문을 보면 백제 장군의 이름이 다음과 같다

(1) 沙法名 (사법명)
(2) 贊首流 (찬수류)
(3) 解禮昆 (해례곤)
(4) 木干那 (목간나)

이 성씨들이 백제의 주류 성씨였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얼마나 남아 있는지요  이 자료를 보시는 네티즌 여러분은 이상하다는 생각이 안드시는지 궁금합니다 중국대륙에 흔한 성씨들입니다  아래 자료를 계속 보시길 바랍니다

(백제와 위나라의 전투는 대륙에서 일어난 전쟁으로 보여짐) 
(중국 정사인 25사 중)

『남제서(南齊書)』권58 동남이전(東南夷傳) 동이 백제에 나오는 기록입니다

(원문)

是歲 魏虜又發騎數十萬攻百濟 入其界

牟大遣將 沙法名 贊首流 解禮昆 木干那 率衆襲擊虜軍 大破之

(시세 위로우발기수십만공백제 입기계) (모대견장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 솔중습격로군 대파지)

(해 설)

① 이 해에 (490년 동성왕 12년)
    위나라 오랑캐가 또다시 기마병 수십만을 동원하여 백제를 공격하여 그 국경에 들어가니,

② 모대(牟大)가(백제 24대 동성왕)
    장군 사법명(沙法名)·찬수류(贊首流)·해례곤(解禮昆)·목간나(木干那)를 파견하여
    무리를 거느리고 오랑캐군을 기습, 공격하여 그들을 크게 무찔렀다.

① 이 해(是歲):남제(南齊)영명 8년, 490년, 백제동성왕 12년
② 모대:백제 제24대 동성왕(東成王)(479∼501)


(백제 7태수의 위치) (백제 태수의 이름)

- 광양태수 : 고달 → 후에 대방태수가 됨
- 조선태수 : 양무 → 후에 광릉태수가 됨 → 후임 "장색"
- 대방태수 : 고달(前 광양태수)
- 광릉태수 : 양무(前 조선태수)
- 청하태수 : 회매
- 낙랑태수 : 모견
- 성양태수 : 왕무

그런데 이 백제의 성씨 부분을 국내에서 전문적으로 연구한 자료가 없어 (사) 한배달에서 대만대교수인 진첩선씨의 글을 인용하여 “백제 8대 성씨에 대해”라는 자료를 소개하고 있는데 아래와 같습니다 이자료를 참고하시어 백제 8대성씨에 대한 의문을 풀어나가는데 도움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것을 대륙백제의 흔적이라 한다면 “무어라 하시는 분”들이 많겠지요(^.^)

(한국의 성씨 통계) 한반도에는 백제 성씨가 없다

한국의 성씨 통계를 보면  이상한 점이 발견된다  신구당서나 삼국사기에는 백제의 경우 2백 여개의 성(城)과 76만호(戶)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아래자료를 보시면 알겠지만 백제 8대성중 국(國)씨와 진(眞)씨를 제외한 6대 성씨가 한반도에는 없다  무슨이유일까 ? 그나마 남아 있는 국(國)씨와 진(眞)씨 성도 희귀성이다 가구 남아 있지를 않다
왜일까 ?

(성씨관련 순위)(관련사이트 “클릭”)
http://www.shinjongwoo.co.kr/html/area_name.html

위 자료를 보면 한국의 성씨중 100위  예(芮)씨로 1985년 조사에서는 가구수 2,574가구로 274성 중 제100위에 랭크 되어있다 백제의 8성중 단하나의 성씨도 100위 이내에 들어있지 못하다 백제의 주류성씨 였는데 말이다
그나마 8개성중 진(眞)씨가 151위, 국(國)씨가 159위로 두개가 남아있다 산동성을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남아있는 백제 8대성은 어떻게 해석해야할까 ?

(주) 상기사이트에는 안나타나나 다른 사이트에는 연(燕)씨가 104명 있는 것으로 나온다  (제일 마지막 자료 참고)

진씨 1,511명
국씨 978명
연씨 104명

“대륙백제의 흔적”은 아닐까 ?
(백제의 8대 성씨에 대해)
- 출처 : 한배달 1992년 6월호

(주의사항)

한배달은 동자료를 소개하면서 “이글은 대만학자의 글을 번역한 것으로 국내에 백제 8성에 대한 연구가 없어
게재하는바 특히 아전인수격인 논조임을 염두에 두고 읽기 바람“ 이라는 당부사항을 적시 하고 있으므로 감안하시어 보아주시길 당부합니다

(내용요약)

한배달은 결론적 부분에

백제의 8성이 우리나라엔 많지 않지만 지금의 산동성을 중심으로 대만에 더 많은 성씨가 존재한다는 것은
백제의 위치와 더불어 재삼 숙고하여야 할 문제다


라는 지적하고 있다

본문중 특이사항은 다음과 같다

(1) 사(沙)씨는 산동성과 하남성에 나온 2가지가 있다고 소개하고 있으며
(2) 협(協)씨는 음이 려(黎)라고 한 것으로 보아
     혹시 치우천자의 “구려(九黎)”와의 연관성이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3) 해(解)씨는 산서성 지명을 성씨로 만든 것이라 한다
(4) 진(眞)씨는 원래 신(愼)씨에서 바꾼 것이라 한다.

완)

(보충자료)
(성씨 자료에 나타난 국씨, 진씨, 연씨 인구수)
(출처 : "클릭“)
http://www.anyroot.com/


<진씨(眞氏)>

진씨(眞氏)는 중국(中國) 상곡(上谷)에서 계출(系出)된 성씨이며, 우리나라에서는 백제 8대 성의 하나로 알려졌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백제(百濟)고이왕(古爾王) 때 내두좌평(內頭佐平)을 지낸 진가(眞 可)라는 사람과
동성왕(東城王) 때 병관좌평(兵官佐平) 에 오른 진로(眞 老), 삼근왕(三斤王) 때의 좌평(佐平) 진남(眞 男),
아신왕(阿莘王) 때의 병관좌평(兵官佐平)에 오른 진무(眞 武), 근초고왕(近肖古王) 때 조정좌평(朝廷佐平) 을 역임한 진정(眞  淨) 등이 기록되어 있으며,

신라(新羅) 때도 진공(眞 功) 이 신문왕(神文王) 때 대아찬(大阿 )을 지냈고, 진복(眞 福)은 상대등(上大等)을 지냈다고 한다. 고려 때 와서는 925년(태조 8) 견훤(甄萱)이 진호(眞 號)를 고려에 볼모로 보낸 사실이 문헌(文獻)에 나타나 있다.

진씨(眞氏)의 본관(本貫)은 서산(西山) 단본(單本)이며,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南韓)에 총 292 가구, 1,51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人口(1985년 현재)] 1,511명이 있다.

(국씨(國氏))

국씨(國氏)의 본관은 담양(潭陽)·풍천(豊川)·현풍(玄風)·영양(英陽)·김해(金海)·대명(大明) 등이 문헌에 전해지고 있지만 시조와 연원에 대해서는 미상이다. 국씨는 본래 백제의 8대성(八大姓)인 사(沙)·연(燕)·예(예)·해(解)·진(眞)·국(國)·목(木)·백(백) 중의 하나이다.  역사상의 인물로는 백제의 대신으로 611년(무왕 12) 수(隋)나라에 들어가 공물을 바치고 고구려 정벌을 의논한 국지모(國智牟), 고려 태조 때 원외랑(員外郞)인 국현(國 ) 등이 있는데 오늘날의 국씨와의 관계는 확실하지 않다. 1930년 국세조사 당시 평남 강서군에 담양국씨(潭陽國氏) 4가구와 함남 영흥군에 풍천국씨(豊川國氏) 3가구, 함남 단천군에 전주국씨(全州國氏) 1가구가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人口(1985년 현재)] 978명이 있다.

<연씨(燕氏)>

연씨(燕氏)는 원래 중국(中國) 범양(范陽)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주(周)나라 때 공자(孔子)의 제자(弟子)인 연 급(燕 伋)의 후손이 나라 이름을 성(姓)으로 삼은 것이 시초가 되었다.   우리 나라 연씨(燕氏)는 백제(百濟)의 8대성(姓)으로 손꼽혔으며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성왕(聖王) 때 병관좌평(兵官佐平)을 지낸 연 실(燕 實) 등 연씨(燕氏)가 나오지만 시조 및 연원(淵源)은 알 수 없다.

본관(本貫)은 정주(定州) 외에 영평(永平)·전주(全州)·평주(平州 : 평산의 별호)·곡산(谷山)·덕원(德原)·장곡(長谷) 등이 문헌에 나타나 있다. 1930년도 국세조사 당시 정평(定平)·영흥(永興)·이원(利原) 등 이북에 22가구가 있었고 남한에 3가구가 살고 있었으며,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南韓)에 총 26가구, 10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人口(1985년 현재)] 104명이 있다.

-> 백제의 8대 대성이라 하였는데 200여개의 성터와 76만호의 인구중 대부분을 차지하던 8대 성씨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 어디가 백제 본토인가 ?

출처 : [기타] http://cafe.naver.com/historoom.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140

잊혀진 제국-중국과 일본을 다스렸던 비류백제 
boolingoo
2008.10.01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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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고대사중 대륙백제와 한반도 웅진을 중심으로 한 비류백제, 광개토대왕의 침입으로 인한 일본으로 간 백제를 통한 한·일고대 관계의 올바른 역사전개를 모색해 보고자 한다(2003. 9.30 성균관대학교 600주년 기념관에서 개최한 교육인적자원부 후원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민족사학자들의 견해와 기존 국내사학자들과의 역사이론을 비교함).


◇ 비류백제 이야기 (1)

고대 백제의 기원

먼저 우리가 아는 백제에 대한 기본 상식은 먼저 시조가 온조이고 한반도 내에서 마한이 변한 세력으로서 고이왕 때 정치제도를 본격적으로 갖추었고, 근초고왕 때 최대영역 판도를 얻었으며, 침류왕 때 불교가 들어왔고 수도가 한성에서 공주로 옮겨진 후 부여로 천도되었으며 의자왕 때 나당 연합군에 의해서 멸망(AD 660년)되었다는 정도뿐이다.
그러나 고대 백제는 한반도 한성부근에서 호남지역까지 있었던 그런 간단한 작은 지역국가가 아니라, AD 4세기말에는 중국대륙 옛 요서 지방부터 남으로 양자강 연안까지 해안지역(대륙백제)과 한반도 지역(반도백제) 그리고 왜열도 근기지역(열도백제)을 본체로 하여 해외의 22개 담로국을 갖춘 동방의 로마제국 같은 대해상 국가였기에 연구해보면 볼수록 그 국가 실체가 무궁무진한 신비의 국가인 것이다. 그러나 국내 사학계에서는 일본이 만든 반도사관에 의거, 한반도 한강을 중심으로 한 서남부 지역의 백제만을 신봉한다.
백제의 기원을 알기 위해서는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이름 고추모)의 행각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고추모(高鄒牟)는 동부여의 금와왕을 피해 졸본 부여로 피해오는데 그곳에서 있었던 우이국(宇台國) 족장의 미망인 소서노(召西奴)를 만나 결혼하게 되고 아들 온조(溫祖)를 낳게 된다. 한편 소서노는 전남편 우이(優台)로부터 얻었던 온조의 이복형 비류(沸流)와 함께 고추모를 도와 고구려를 건국하게 된다(BC 58년). 고구려 건국후 동부여 시절에 결혼하였던 예부인과 아들 유리가 고구려로 찾아오자 소서노의 재력과 세력으로 건국하였던 고추모는 자신의 새로운 세력을 구축하기 위하여 동부여에서 찾아온 유리를 태자로 책봉하게 된다.
한편 고추모가 유리태자를 책봉하자 그의 사후 신변의 위협을 느낀 소서노와 비류, 온조형제는 그곳을 떠나 남쪽으로 피해 달아나 현 중국 난하 서쪽 발해만 내륙지역(옛 대방고지)에서 어머니 소서노와 장남 비류를 중심으로 남부여족과 함께 초기 형태의 백제국 어라하(於羅瑕)나라를 이룩하게 된다(BC 18년경).

비류백제의 탄생

중국대륙 대방지역에서 건국이후 인접한 낙랑군 말갈국의 계속된 압력으로 비류와 온조형제 및 남부여족 계통 100개 가문은 선단으로 발해만을 떠나 한반도 서해안 지역의 미추홀로 오게 되었다. 이때부터 백가가 바다를 건너왔다는 백가제해(百家濟海)의 뜻에서 국호를 백제라고 칭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한반도에 온 후 평야지역에서 안정적인 정착을 원했던 온조계 해(解)씨 세력들은 형 비류계와 갈라져서 백가의 1/10을 이끌고 나가 온조 십제(十濟)국으로 분국하고, 반면 비류계 진(眞)씨 세력들은 한반도 남부로 그 세력을 확장하면서 목지국 등 토착 마한세력을 정복하고 웅진(현 공주)지역을 중심으로 비류백제국을 탄생시킨다. 그런데 여기서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이라는 책을 쓴 김성호 선생은 대륙백제계가 한반도로 들어와 비류백제국을 세운 것이 AD 18년경으로 본 반면, 백제와 대화일본의 기원을 저술 한 홍원탁 선생은 비류계와 온조계가 왕위 주도권을 하던 중 온조계 제13대 근초고왕이 비류계 선왕 제12대 계왕을 처치하였을 때 계왕 후손 비류계가 AD 370년경을 전후로 하여 한반도 웅진지역과 왜열도로 진출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아무튼 고대 백제는 처음부터 한반도가 아닌 중국 대수지역에서 최초로 건국이 되었다가, 우리가 아는 온조백제 외에 성씨가 다른 비류백제가 동시에 같이 존재하였는데 후에 언급하겠지만 이 비류 백제계가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벌로 AD 4C말 왜열도로 달아나 일본의 고대국가(야마토 왜, 大和倭)의 기원이 되게 된다. 즉 비류 백제는 일본으로 간 백제의 통칭이 되며 소위 일본에서 불리는 백제의 명칭 구다라(久多良)의 시원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비류 백제의 역사가 우리교과서에서 슬며시 빠지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일제 식민지 시절 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에서 황국 식민사관으로 우리 역사를 왜곡할 때, 일본국 생성의 근원이 되는 비류백제의 역사를 은폐하게 되었고 삼국사기에서도 온조백제 위주로 서술되어 있는 관계로 일본인 사학자에게서 배운 친일 식민사관 학자들이 해방후 국내 강단 사학계를 장악한 상황에서 식민사관이 이들에 의해 수정없이 보급되어 이처럼 비류백제의 역사가 우리의 잃어버린 역사중 하나가 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추가로 알아야 하는 고대 백제의 성씨관계를 살펴보면, 고추모가 북부여 시조 해모수의 후손이므로 온조계는 해(解)씨, 고(高)씨, 부여(夫餘)씨등의 왕씨성을 가졌으나 이복형 비류는 소서노의 전남편 우이의 아들인 고로 위(倭)족 계통인 진(眞)씨, 모(牟)씨, 우(優)씨등을 사용하게 되었다.



먼저 우리가 교과서에서 온조백제의 역사만 배우고 국내 사학계에서도 비류백제를 초기에 망한 것으로 보아 온조백제만 인정하는 이유는 고려 인종때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록을 바탕으로 한다. 여기서는 비류와 온조가 한반도 미추홀에 와서 비류백제와 온조십제로 분국을 하는데 비류가 미추홀 지역에 살다가 갑자기 바닷물이 짠 것을 비관하여 자살한 것으로 기록하여 의문을 남기고 이후 온조계가 비류계 세력을 흡수하여 백제를 하나로 계승시킨 것으로 서술된다. 허지만 그 서술 배경을 잘 살펴보면 삼국사기를 편찬할 시기(AD 1145년경)에는 비류백제계가 왜열도로 들어가서 야마토왜(AD 400년경)를 거쳐 일본국(AD 670년)으로 변신된 지 이미 수백년이 흐른 뒤였기 때문에 한반도에 남아 있었던 온조백제 위주로 서술할 수 밖에 없었고 신라 경주출신이었던 그의 역사관은 신라를 삼국 통일의 주역으로 보아 그 정통성을 인정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동방의 대해상국가를 이룩했지만 일본으로 간 비류백제의 역사는 자연 그 흔적과 지문만 남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민족 사학계에서는 위와 같은 논쟁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알아보아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민족 사학계에서는 비류와 온조계를 모두 인정하는 반면에 왕권의 형성지배구조와 왕국 위치에 대한 추정에 있어서만은 약간의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첫번째 주장은 한성근처의 온조십제는 웅진(현 공주)을 중심으로 한 비류백제의 담로국(擔魯國)으로서 존재하였고 AD 1C∼AD 4C말까지 2개의 국가가 한반도에 동시에 존재하다가 비류백제계가 고구려의 침입으로 왜열도로 망명하게 되자 AD 5C초부터 온조 백제 하나만 한반도에 남아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두번째 주장은 만일 비류백제가 위의 주장대로 한반도에 온조와 별도로 함께 있었다면 온조계처럼 역대왕의 계보 즉 왕력이 있어야 할 터인데 어떤 역사기록에도 남아 있지 않은 점에 기인하여 하나의 백제왕국에서 두개의 세력이 왕권을 잡기 위해 주도권 다툼을 하면서 비류계와 온조계가 순위를 바꿔가며 서로 왕권을 나눠 차지했다는 주장이다(도표 참조------고딕).
마지막 논쟁은 왕국의 위치문제로서 온조백제 수도 한성(漢城)은 지금의 서울 부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원래 옛 백제가 도읍했던 중국 요서 발해만 내륙의 대수지역에 위치했던 장소를 나타내는 것인데 식민사학자들이 삼국사기의 기록을 반도사관에 의거 잘못 해석한 데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입장이다. 즉 원래 백제왕국이 처음부터 의자왕 때까지 대륙에만 있었다는 설과 AD 4C말경 근초고왕이 대륙백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비류계 세력을 한반도 서남지역 및 왜열도로 진출하게 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그 근거로서 만일 기존 주장대로 한성백제가 한반도의 서울근교에 있었다면 공주천도(AD 475) 전까지 거의 500년간 존속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서울 인근에서 백제 토성들은 일부 보이지만 역대 한성백제계 왕릉과 유물들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는 고고학적 사실을 제시한다.
이런 여러 주장들을 밝히기 위해서는 최근 발견된 공주 수촌리 백제 고분군에서 나온 금동관등 유물에 대한 탄소연대 측정등 과학적 조사가 필수적이라고 생각되며 대륙백제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도 중국측 학자와의 학술대회를 통한 문제제기와 중국측 사료조사 및 유물 합동 탐사등의 작업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백제의 해외진출과
해상강국 위상확립

초기 온조 비류계와 공존
근초고왕 시 왜열도 정벌

국내 교과서에는 제8대 고이왕(AD 234∼286)에 이르러 본격적인 정치 체계를 갖추었다고 기술되어 있는데 이는 초기 온조계 왕권이 비류계 세력과 함께 유지되다가 제7대 사반왕 때 비류계 고이왕이 왕권을 찬탈한 후 최초로 양세력이 통합된 정권이 탄생했을 가능성을 시사해 주고 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큐슈등 왜열도 남부 지역은 먼저 고대 가야계 세력이 들어가 지배하였고 AD 2C부터는 백제계도 진출하기 시작하였는데 고이왕 시절에는 안정된 정권을 바탕으로 해외 진출이 가속화되어 먼저 왜열도 큐슈지역에 있던 야마타이(邪馬台)국의 신공황후(이름 히미꼬, 卑彌乎)가 자신과 결혼한 현지 백제계 왜왕 중애왕을 독살하자 이를 응징하기 위하여 목라근자 장군을 파견하여 히미꼬의 복속을 받아온다. 이어서 AD 246년 위나라 장수 관구검이 고구려 동천왕을 쳐 환도성이 함락되자 좌장 진충을 요서 지역으로 보내 관구검의 후미를 쳐서 이를 제압한 뒤 발해만 지역 대방군의 기리영을 공격하여 태수 궁준을 제거함으로써 중국의 대방지역을 중심으로 한 대륙 재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한다. 또한 AD 4C초에는 고구려와의 동시 협동 공격으로 고구려의 낙랑군 병합과 함께 백제는 그 남쪽 대방군 지역을 흡수했을 뿐만 아니라 양쯔강 유역에도 백제 자치지역인 광릉군과 성양군을 설치하여 해상 무역의 발판을 구축하게 된다.
백제의 최전성기 제13대 근초고왕(AD 346∼375) 말기에는 태자 근구수와 함께 현 난하 서쪽의 요서지역과 북경지역까지 장악하여 요서군, 진평군등 백제군을 설치한 후 주세력권에 두었고 이곳으로부터 남쪽으로 중국 동진(晋)과 결전을 벌여 이미 구축한 양쯔강 상해부근의 기존세력 지역까지 서로 연결하는 성과를 얻었으며 고구려의 요동 지역 일부와 한반도 서북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니 황해를 백제내해로 하는 말발굽형의 강대한 국가를 이루어 놓았다(그림 참조----). 또한 근초고왕은 처남 조정 좌평 진정의 건의를 받아들여서 비류계 제12대 계왕의 친손 응신(應神, 이름 호무다)에게 명하여 신공황후의 야마타이 정부가 망한 후 당시 100여년간 주도 세력 없이 힘의 공백이 생긴 왜열도를 정벌하게 만들어 백제계 세력을 다시 한번 재구축 한다.
이리하여 백제의 영토는 AD 4C말에는 중국 해안의 대륙 백제와 한반도의 본백제, 일본의 근기지역까지의 왜백제등 3개 지역을 본체로 하여 태국, 캄보디아, 베트남등 동남아시아 지역까지 이르는 해외 22개의 담로국을 보유한 동아시아의 거대한 해상제국을 이루게 되었다.

2004. 10. 08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온조백제(북부여 해씨) 비류백제(졸본부여 진씨, 모씨)
解氏계 眞氏계
제1대 온조왕, 제2대 다루왕, 제3대 기루왕 제8대 고이왕, 제9대 책계왕
제4대 개루왕, 제5대 초고왕, 제6대 구수왕 제10대 분서왕, 제11대 비류왕
제7대 사반왕, 제13대 근초고왕, 제14대 근구수왕 제12대 계왕
제15대 침류왕, 제16대 진사왕, 제17대 아신왕
제18대 전지왕, 제19대 구미신왕 牟氏계(공주 천도)
제22대 문주왕, 제23대 삼근왕
餘氏계 온조백제(남부여 부여씨) 제24대 동성왕
제20대 비유왕, 제21대 개로왕, 제25대 무령왕

餘氏계 남부여(부여 천도)
제26대 성왕, 제27대 위덕왕, 제28대 혜왕
제29대 법왕, 제30대 무왕, 제31대 의자왕




[광개토대왕 비문에 나타난 역사]

광개토대왕 비문은 AD 4C말에서 5C초까지의 고대역사, 즉 고구려와 백제관계 및 한일 고대사를 조명할 수 있는 결정적인 역사비밀을 담고 있다.
이 기념비는 1880년 압록강 연변에서 개간을 하던 중국 농민에 의해서 처음 발견되었는데 비의 높이는 6.4m이고 비문은 총 1775자가 새겨져 있는데 그 내용은 고구려 장수왕이 선왕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AD 414년에 건립했다는 것으로 현재 중국 집안 현에 보관되어 있다.
일제시절 관동군 참모본부 소속 관서국에서는 첩보원을 만주전역에 파견해 이 비를 찾으려 혈안이 되었던 중 우연히 발견되자 관서국 소속 사꼬오 중위에 의해 비문탁본이 만들어져 처음 공개되자 광개토 대왕의 공적이 만천하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명치 17년, 1884년에는 일본의 조선침략의 명분을 찾고 합리화하고자 관동군에 의해 비문 내용이 재해석되었고 재일 사학자 이진희 선생은 1972년에 이 비문이 관동군에 의해 탁본을 뜨는 과정에서 글자에 회칠을 하여 변조되거나 조작되었다고 주장, 한일 사학계에 큰 파문을 던졌다.
그러면 비문에 나오는 기사를 통해 숨겨진 역사를 살펴보면 먼저 고구려군이 국경남쪽 백제 18성을 공취했다(功取壹八城)는 기록이 보인다.
이는 광개토대왕이 AD 391년 즉위부터 시작된 백제 공략 기사로써 18성에는 백제수군의 요충지였던 관미성(關彌城)도 포함되어있는데 국내 사학계에서는 한반도에 있었던 백제만을 상정하여 이들 여러 성들이 한강좌측 서해안의 성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지만, 필자는 근초고왕 때의 요서백제 세력을 고려해 볼 때 발해만 내륙의 난하 및 대수(帶水)지역의 성들을 전략상 먼저 공략한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참고로 이 비문에는 왜(倭)라는 문자가 자주 나오는 데 이는 웅진에 있다가 왜열도로 달아난 나라 백제(대화왜) 세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비문에는 영락 6년(AD 396년) 병신년에 왕이 친히 수군을 이끌고 잔국을 토벌하였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는 요서백제 제압 후 수군을 통해 황해를 건너 한반도 서해안 지역의 58개성을 탈취한 기사로 여기에는 비류백제의 수도 웅진 거발성(居拔城)도 포함된다.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伐<殘國>...
이어서 비류백제의 도성(웅진 거발성) 친후에도 백제 잔병이 불복하고 감히 나와서 계속 항거하자 대왕은 아리수(한강)을 건너 성(북한산성 추정)을 포위하여 백잔주(온조계 아신왕)의 항복을 받고 아신왕이 이제부터 영원히 노객이 되겠다는 기록이 나온다.
逼其國城 不服義 敢出迎戰.... 渡阿利水 遣自迫城...<百殘>主困逼...獻出男女生口一千人
細布千匹... 從今以後 永爲奴客
위 비문을 보면 백제는 하나뿐이라는 선입관을 벗어나게 하는 잔국(殘國)과 백잔(百殘)이라는 두 단어가 나오는 데 본 연구회가 개최한 고대 한일관계 학술회의에서 김성호 선생은 <잔국>- 웅진에 있다가 고구려에 의해 토벌되어 일본으로 사라진 비류계 백제, <백잔>- AD 396년에 고구려에 항복하여 한반도에 생존한 온조계 백제라고 설명하여 2개의 백제를 의미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비류계 응신 천황의 비밀]

일본서기에는 최초의 일본고대국가인 야마토왜(大和倭)를 세운 천황으로 응신(應神)이 나타나는 데 앞서 근초고왕 때 비류계 선왕 계왕의 후손으로 칠지도를 받고 한반도와 왜열도로 진출했다는 수수께끼 인물로서 이름에 神자가 붙은 것으로 볼 때 왜열도로 도래한 한국계 지도자라는 것은 확실하다.
우리 민족 사학계에서는 응신이 근초고왕의 명령으로 왜열도 정벌후 전남 영암지역에서 비류 백제계 현지 담로왕으로 있다가 AD 390년 웅진에서 어라하 천황으로 즉위하였으며 광개토대왕이 위 비문에서 보듯이 AD 396년 웅진성을 토벌할 때 그곳에 있었던 응신이 자신이 개척한 당시 백제의 식민지인 왜열도의 난파지역(현 오오사카) 대별국(大別國)으로 도피, 그 후 나라지역에 망명정부(나라백제)를 세우게 된다.
그러나 일본측에서는 망명사실을 감추기 위하여 앞서 신공황후가 세운 야마타이국이 멸망하는 년도(AD 269년)에 연결시켜 응신을 신공황후의 아들로 편입시켰고 AD 270년에 일본에서 왕위에 오른 것으로 역사를 왜곡했다. 다시 말해서 실제 응신 원년(AD 390년)보다 120년 앞선 인물로 조작함으로써 광개토대왕에게 패하여 왜열도로 도망간 사실을 감추려 하였다.

고대한일관계 학술회의 논문집(2003. 9. 30, 성균관대 600주년 기념관, 교육인적자원부 후원)

한편 대조선 제국사를 그린 김산호 선생은 응신을 일본에 천자문을 전달 가르쳐 준 왕인(王仁)박사와 동일한 인물로 보았으며 (일본서기에는 응신을 AD 270년대 사람으로 왜곡하였고 AD 405년에 도왜한 왕인을 학자로 서술하여 서로 다른 인물로 만들고 있다) 두 사람의 일본식 발음이 크다(大), 많다(多), 높다(高)는 의미의 오오진으로 똑같이 읽혀진다고 주장하고 있다

[광개토대왕과 응신천황의 대결]

고구려와 백제는 같은 부여족 계통의 형제국으로 서로 화평을 유지해 오다가 AD 4C초 발해만 완충지역인 낙랑군과 대방군이 각각 두 나라에 의해서 병합되자 요서지역에서 양국의 국경이 접해지는 상황에서 자연히 국경분쟁에 노출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AD 371년 고구려 고국원왕이 요서백제를 선제 공격하였다가 오히려 패수 근처에서 백제복병에게 기습을 당해 퇴각하다가 북평양성에서 죽는 사건이 발생하자 양국의 관계는 험악하게 되었고 마침내 양국은 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대격돌을 벌이는 시대가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그 후 AD 390년 웅진백제에서는 응신이 천황으로 즉위하였고 불과 1년 후에는 고구려에서 광개토대왕이 태열제 보위에 등극하게 되자 동시기에 두 정치적 영웅의 출현은 악화된 양국 외교상황에서 서로간의 충돌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한편 근초고왕이후로 백제는 대해양 제국의 최 전성기를 맞고 있던 중 변방의 신라만이 조공관계를 거부하므로 웅진백제의 응신왕이 신라정벌을 선언하자 당시 신라 내물 마립간은 고구려에 실성태자를 질자로 보내 군사동맹을 맺고 구원을 요청하자 외교적 명분을 얻은 젊은 패기의 광개토대왕은 조부 고국원왕의 복수도 겸하여 백제와의 한판 승부를 시도한다.
영민한 광개토대왕은 최근 백제와의 전투에서 고전한 이유가 요서백제와 한반도 백제가 고구려 양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고구려가 어느 한 방향으로 공격하면 반대쪽에서 협공을 받을 수 있는 지형적 불리함과 수군의 상대적 열세 때문이라고 판단되자 먼저 AD 392년 요서지역 백제수군의 중심지인 관미성에 대한 기습공격을 감행하고 20여일 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함락시킨다. 이로써 동양 최대의 막강한 수군력을 지녔던 대륙백제는 황해 제해권을 상실하고 그 세력도 황하 산동반도 이남으로 물러나게 된다. 그 후 광개토대왕은 관미성에서 4년 간 수군양성 및 군선제조를 하게 한 뒤 비문에 나타난 대로 AD 396년 병신년 9월 대왕자신이 직접 수군을 통솔한 채 해상 침투작전을 과감히 전개한다.
여기서 우리는 약관 20세 초반의 어린 광개토대왕의 전술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대왕은 육군 보기군으로 하여금 한반도 하평양을 거쳐 한강 이북으로 위장 공격케 하여 백제군으로 하여금 한강 북방으로 전병력을 전진 배치하게 유도한 후 실제로 대왕자신은 수군 약 이만명을 특공대로 조직하여 일부는 황해를 건너 한강 서해안 경기만과 아산만 지역으로 해상 상륙작전을 시도하고 웅진 거발성을 직접 공략한다.
이는 성동격서(聲東擊西)의 위장전술로 백제군이 전혀 예상치 못한 수군을 동원한 절묘한 승부로서 대왕의 신출귀몰한 용병술에 허를 찔린 역전의 노장 응신도 반격을 포기하고 당시 비류백제계의 세력이 있었던 왜열도 나라지역으로 도피하여 나라백제 망명정부를 수립한다(그림 참조).
광개토대왕은 응신의 추격을 포기하고 부대를 보기군으로 재편성한 후 공격방향을 웅진 거발성에서 북한산성으로 돌려 온조계 아신왕을 계속해서 공격한다. 한편 응신의 패주소식을 전해들은 백제군들은 전의를 상실한 채 천황의 뒤를 따라 왜열도로 도망가는 형편이었으므로 아신왕은 군신들과 함께 성문을 열고 나와서 항복을 한다.
이에 대왕은 아신왕의 화친을 받아들이고 남녀포로 일천명과 세마 일천필 등 전쟁배상금을 받은 후 개선하자 그 결과 동아시아의 패권은 백제에서 고구려로 다시 넘어오게 되었다.

2004. 10. 18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광개토대왕에게 패해 웅진에서 탈출한 응신 천황 및 그의 망명집단 세력들과 이들을 뒤쫓
아가는 백제 신군(神軍)의 대 선단들은 왜열도로 향해 가서 큐슈 서북단 지역 축자(筑紫, 현 기타큐슈)에 도착하였다. 당시 큐슈에는 신공왕후가 세웠던 야마타이(邪馬台)정부가 망한 후
일정한 주도 세력이 100여 년간 존재하지 않다가 근초고왕 때 비류계 응신(이름 호무다, 譽
田)을 왜열도로 보내어 재 정벌하게 하여 그 기반을 이미 구축한 바 있었기에 대소 1000여
척의 응신의 선단이 AD 396년 12월 북큐슈 쓰쿠시(筑紫) 지역에 도착하자 가야계 임나(加
那), 야뫼도(山門), 웅습(熊襲)등 주변국들이 조공을 보내 알현하였다.
AD 397년 정월 응신 일행은 북큐슈를 떠나 日向國(현 미야자키현)을 거쳐 기내(畿內, 오오사카)지역에 도착한 후 백제 담로 통치지역이었던 하내왕조 대별국(大別國)으로 들어가 임시정부를 세웠다가 몇 년후 이웃 나라(奈良)지역으로 이주하여 나라백제 망명정부를 선언하게 된다(AD 400년경).
응신은 이곳 나라 망명정부로부터 백제의 모든 담로국을 친정한다고 통보하니 천황의 어명을 받은 주위 담로왕들은 앞으로의 정책방향을 알고자 사신들을 파견하였다. 이때 그 중에는 멀리 한반도 백잔국에서 온 사신도 있었는데 백잔 아신왕이 광개토대왕과 군신관계 맹
약을 맺은 사실을 뒤늦게 안 응신이 이는 정치적 배신행위라고 백잔국 사신을 크게 문책하
자 아신왕의 항복은 천황의 망명소식과 더불어 백제군의 사기저하로 패색이 짙어지자 성(城)과 백성을 구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사실을 강변하면서 형제국 관계 복원을 간청하였다. 이것이 광개토대왕 비문(영락 9년 조)에 있는 백잔이 맹세를 위반하고 왜와 화통했다(百殘違誓與倭和通)는 역사적 사실을 가리킨다. 그러자 나라백제의 응신 천황은 양국의 정치적 연합관계가 회복되기 위하여 아신왕의 친자를 볼모로 나라백제에 보낼 것을 요구하자 AD 397년 5월 백잔 아신왕은 자신의 아들 전지 태자를 질자로 보내는 대신 한반도 내의 옛 백제 땅-침 미다례(현 제주), 현남(차령 산맥 이남), 지침(차령 산맥 서쪽), 곡나(산동 대륙 백제 지역), 동한지지(현 경남 해안)를 할양 받게 된다. 그 후 백제 계 양국간의 화평 관계는 태자를 포함한 왕의 친인척들을 질자로 보내면서 이백여 년 간 지속된다

나라(奈良) 백제
응신(應神)의 대반격

한편 나라백제는 동쪽의 강력한 하이 족과 큐슈 남동쪽 일향국 세력을 제압하고 명실공히
왜열도의 주인이 되었다. AD 403년 당시 백제 유민의 도왜 책임자 궁월군(弓月君)이 나라 천황궁에 건너와 약120현민(대략 일만오천명 규모)이 신라 정부의 다물 임나(부산) 항구 폐쇄로 억류되어 포로 된 채 왜열도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고 보고하자 임나 항구를 신라에게 넘겨 준 고구려에 대해 응징하고자 총동원령을 내려 공격을 감행하였다(AD 404년, 갑진왜란).
즉 나라백제와 백잔국, 그리고 대륙백제 등은 대연합 수군을 결성하여 과거 광개토대왕이 웅진 거발성을 친 것과 같이 응신의 직접 지휘아래 요동의 북평양(요동반도의 현 요양으로 추정, 여기서 고조선의 왕검성인 옛 평양은 난하 북동쪽 현 승덕지역 추정, 북한의 평양은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정책 때 설치한 예비수도 하평양을 지칭-이처럼 역사적 시기를 달리하여 평양의 위치가 변천하였으나 국내 사학계는 일제의 반도사관에 의거 북한의 평양만 인정)을 기습하였다. 그러나 400여척 규모의 대연합 수군이 발해만을 통과하여 패수(현 태자하로 추정, 일부 학자는 발해만 지역 현 난하로 비정하기도 하지만 국내식민사학자 경우는 북한의 대동강으로 확정)로 진입하였을 때에는 이미 백제의 전령선을 납포하여 공격 첩보를 알아낸 고구려 군이 미리 군선을 연결하여 대기하고 있다가 공격을 퍼부어 백제 연합 선단을 괴멸시켰다.
응신은 북 평양성 공격의 실패로 웅진으로의 복귀가 실질 상 어려워지자 AD 405년 나라백제에서 야마토 왜(大和倭, Daiwa)로 국명을 바꾸게 되고 이것이 일본의 고대국가의 기원이 된다.
고구려 원정이 실패로 끝나자 이번에는 다물 임나항에 있는 백제계 120 현민을 데려오기 위하여 응신은 AD 405년 4월 궁월군에게 병사를 주어 신라 계림근처에 있는 명활산성을 기습하여 처음에는 신라군에 의해 격퇴되었으나 동년 8월, 목도 숙미와 전 숙미 장군을 이만명의 특공대와 함께 파견하여 임나항 탈환을 위한 신라와의 명활성 전투를 다시 전개하였
다.
신라 실성왕은 전세의 불리함을 알고 응신의 야마토 왜와 평화협정을 맺은 후, 임나항을
백제유민의 도왜 출항기지로 내어주고 백제유민 인솔 책임자 습진언(襲津彦)을 풀어주었으며 선왕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未斯欣) 왕자를 오히려 질자로 보내게 된다.
이처럼 임나항은 당시 야마토 왜와 웅진지역과의 정치 교류를 잇는 사활적 이해관계가 있는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신라는 야마토 왜의 임나항에 대한 결연한 탈환의지를 알고 이를 내어 주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이것이 한일 고대 역사의 의문인 임나일본부의 진상인 것이다.
야마토 왜의 응신은 AD 407년 고구려에 대한 복수를 다시 감행한다. 이번에는 기병 속공전으로 전술을 바꾸어 요동반도의 비사성(현 대련)을 집결지로 하여 요동반도를 타고 올라 광개토 대왕이 있는 국내황성으로 급습하여 대왕을 사로잡는 과감한 작전을 세우게 된다.
야마토 왜 일만명, 백잔국 일만명, 대륙백제 일만명으로 차출된 연합 기병대를 구성한 후 신라 명활산성 전투의 명장 목도 숙미를 상장군으로 삼아 지휘 통솔케 하여 비사성을 출발, 황성으로 가기 위해 태산(현 안산)을 넘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고구려의 오만 보기 군과 정면 충돌하였으나 연합기병대의 지휘 혼선으로 참패하였고 요동반도의 백제세력을 거의 잃게
되었다

왜(倭)의 실체와
야마토왜(大和倭)의 발전

우리가 흔히 왜(倭)라는 한자를 옥편에서 찾아 읽을 때 ‘위와 왜’의 두가지 발음이 있음을 알수 있다. 우리가 흔히 일본인을 왜놈이라고 멸칭할 때 쓰이는 왜는 작고 왜소할 矮를 말하는 것으로 倭와는 다른 의미이다. 즉 倭를 ‘위’로 읽을 때에는 위(上)라는 의미로 위족(倭族)이란 자신들이 속한 부족이름을 영광스럽게 표현하는 호칭이다. 여기서 학술대회 김산호 선생에 의하면 일본으로 간 비류 백제계가 야마토 倭로 자신의 국명을 붙인 것은 그 실체가 우리말로는 상족(上族)을 나타내는 것으로 순박하고 고귀한 민족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 倭가 일본에서의 발음은 야마토로도 읽혀져 신성한 태양의 터전이라 간주되었고 달리 다이와(大和)라고 읽혀지기도 한다.
한편 야마토 왜의 응신은 광개토 대왕과의 거듭된 전쟁에서 패하게 되자 웅진 수복의 꿈을 접어두고 나라에 강원궁을 지어 비류 백제계의 확고한 정권을 세우게 되었고 이후 나라를 중심으로 한 아스카(飛鳥)문화가 발전하여 백제 천황가의 전통을 계승시켜 나가게 된다. 응신 천황은 AD 410년경까지 남쪽으로 큐슈 일향(현 미야자키 현)으로부터 북쪽 센다이(仙台)까지 대장정 끝에 왜 열도를 평정하여 국가를 확고하게 정착시킨다. 그 후 AD 425년 야마토 왜의 응신은 송나라로부터 안동대장군 왜국 왕으로 인정받아 왜 열도에 대한 종주권을 국제적으로 승인 받는다. 이처럼 비류 백제계로부터 형성된 천황가는 AD 660년 나당 연합국에 의해 반도에 있던 백제세력이 멸망하자 나당 연합국의 왜열도 침입을 막기위해 백제와의 정치적 연관성을 끊기 위해 AD 670년 천지(天智) 천황이 倭에서 국호를 日本으로 바꾸어 새로운 국가로 변신을 도모하게 된다.
따라서 현재 동북공정 작업으로 고구려를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역사 왜곡하여 남북 통일 후 옛 고구려 영토에 대한 우리의 고토 회복주장을 사전에 막고 자신의 영토로 확보하려는 영원한 이민족 중국의 패권(覇權)주의에 대항하기 위하여서는, 고대 한일관계의 역사적 근원과 양국 민족의 동질성을 밝혀 장래 통일 한국과 일본 양국이 정치적 연합국가 재구축을 시도함으로써 21C 새로운 국가전략을 수립하는 것이 절실한 시점에 와 있다.

〈다음호에 계속됩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사라지고 태자 거련(巨連)이 제20대 태열제 장수대왕(AD 413-491)에 오르게 되었다. 선왕 때 항복하여 한반도에 살아남았던 온조계 백잔국이 군신맹약을 어기고 야마토왜(大和倭)와 다시 연합하여 고구려에 대항해오자 장수대왕은 백잔을 응징하고자 AD 427년 수도를 황성에서 북한의 하평양으로 옮긴 후, 남진 정책을 계속하여 추진하였다.
한편 백잔에서는 아신왕이 죽고 그사이 왜에 볼모로 갔다가 돌아 온 전지왕에 이어, 구이신왕, 비유왕이 거쳐갔고 제21대 개로왕(AD 455-475)이 통치하고 있는 시절에는 온조계 해(解)씨와 비류계 진(眞)씨의 세력이 약해지고 개로왕의 이름 부여경(扶餘慶)에서 엿볼 수 있듯이 부여씨로 세력 교체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고구려가 보낸 첩자 중 도림의 계략에 빠진 개로왕은 궁궐을 수축하고 국고를 탕진하여 국정이 피폐해지자 장수대왕은 백제 정벌의 호기를 잡게된다. 또한 개로왕의 실정으로 당시 상좌평 문주(文周)와 목협만치(木協滿致) 장군이 결탁하여 군부를 장악하고 정권 탈취를 모의하는 혼란한 상황에 이르자 세력의 열세를 느낀 개로왕은 대륙백제 상곡지방 주둔 현지 사령관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AD 461년 대화왜에 질자로 보내져 있던 아우 곤지(昆支)를 급히 부르게 된다. 그러나 이미 중신들의 반역 모의를 분쇄할 만한 왕권을 상실한 개로왕은 자기아이를 임신한 젊은 후궁을 곤지에게 맡겨 대화왜에 보내 이 상황을 전하게 한다. 곤지는 첩으로 얻은 개로의 후궁과 더불어 왜열도에 들어가던 중 북큐슈 축자 앞 각라도에서 폭풍을 만나 섬에서 후궁이 후일 무령왕이 될 아이를 분만하게 되자(AD 462년) 왜열도에서 자신의 양아들로 키우게 된다(삼국사기에는 대화왜의 실재를 부인하기 위해 분만된 아이가 산모와 한반도로 되돌아와 산 것으로 서술).
한편 고구려 장수대왕의 공격이 임박한 것을 예감한 개로왕은 반대세력인 상좌평 문주와 목협만치 장군을 신라로 보내 구원병을 청하게 하고 조미걸취 장군도 비류계 웅진으로 파견하여 현지 담로왕들의 지원을 요청한다. 드디어AD 475년 장수대왕은 백제 정벌을 단행하여 먼저 아차산성을 차지한 후 한강(아리수)을 건너 북성(현 몽촌토성 추정)을 포위하여 초토화시킨다.
남한산성을 달아나던 개로왕은 자기에게 불만을 품고 고구려에 투항한 백제계 장수인 고이만년과 재증걸루에게 붙잡혀 아차성으로 끌려가 비참한 죽음을 당한다. 이로써 BC 7년에 시조 온조대왕이 세운 한성백제는 통산 20대 왕조, 482년만에 역사에서 사라지는 것으로 보는 것이 민족사학계의 정설이다.
반면 국내 사학계에서는 혈통이 달랐던 문주를 개로왕의 아들로 둔갑시킨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거, 온조 백제 왕국이 계속 존재한 것으로 보나 실은 문주는 역성혁명으로 왕위를 찬탈한 모(牟)씨 성을 가진 새로운 인물이었다(이는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이 한반도에 잔존한 온조계 백제 위주로 만세일계를 만들려고 했던 의도적인 역사서술이었다).
상좌평 문주와 목협만치는 신라의 원병 결정이 늦어져 뒤늦게 일만명의 구원병과 함께 올라 왔으나 이미 왕과 자식들은 모두 죽었고 한성은 폐허로 변하여 있자 과거 비류백제의 수도였고 도성과 진(眞)씨계 담로 지지세력이 있던 공주로 천도하게 된다.
공주에 온 문주왕은 개로왕의 후계자가 없음을 알고 자신이 왕위에 올랐으나 대화왜 정부는 그의 왕위를 인정하지 않았고 대신 곤지를 신왕으로 삼아 공주로 보내었다. 허지만 문주왕이 왕위 양도를 거절하고 곤지를 내신좌평으로 삼자 곤지는 당시 병관좌평 해구(解仇)와 힘을 합하여 문주왕을 제거하려 하였지만 오히려 이들 세력에게 밀리자 곤지와 목협만치는 AD 476년 왜열도 나라로 망명한다(여기서 삼국사기는 곤지의 사망으로 서술). 이번에는 병관좌평 해구가 문주를 왕위 찬탈의 이유로 살해한 후 자신이 한성백제를 재건하려 하였으나 진씨계 담로세력 진남(眞男), 진노(眞老)등은 일단 문주의 어린 아들 삼근왕을 세운 후 해구세력을 토벌하고 삼근왕마저 제거하였다.
그런 후 진노 장군은 대화왜 정부에게 왕위 계승자를 요청하자 대화왜 응략천황(곤지와 동일인물이라 주장하는 설도 있음)은 곤지의 둘째아들(모대 牟大-남제서, 말다 末多-일본서기)을 왕으로 결정하여 AD 479년 4월, 왜열도 나라에서 공주로 보내는데 이가 곧 제24대 동성왕(AD 479-501)이다(삼국사기에서는 동성왕의 출신에 대한 자세한 언급 없이 갑자기 삼근왕 다음으로 나타나는 데 이는 대화왜와의 관계를 끊고 온조계 위주로 만들려는 또다른 시도를 엿볼 수 있다).

왜열도 대화왜서 온
두명의 백제 왕들

동성왕의 대륙백제 경영과
무령왕(武寧王)의 북방정책

웅진에서 젊은 나이로 즉위한 동성왕은 초기 곤지의 섭정 하에 있었으나 점차 군왕의 위엄을 갖추고 독자적 정치를 하게된다. 국내적으로는 AD 487년 임나항의 담로왕 기생반숙미가 삼한왕을 자칭하면서 백제의 군량 수송을 방해하고 보급품을 횡령하자 동성왕은 고이해 장군을 파견하여 그 세력을 토벌하고 임나항의 지배권을 확보함으로써 자유 이민항으로서 기능을 회복시켰고 신라, 가야와 군사동맹을 결성하여 고구려의 남진정책에 대항하였다.
한편 국제적으로는 AD 488년 중국 하북성 일부, 산동반도 지역의 백제 세력에 대한 북위(선비족 탁발씨가 AD 386년에 세운 국가)의 공격이후 498년까지 10년동안 총 다섯 번에 걸친 대외적 전쟁을 모두 승리로 이끌어 북위에게 넘어간 옛 요서 백제 영토를 수복하였다.
당시 국제정세는 고구려와 북위가 북부동맹을, 대화왜·백제·남제가 남부동맹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AD 488년 북위의 침입을 막기위해 동성왕 자신이 산동반도 수도 내주( 州, 현 옌타이)로 직접 가서 격퇴하였다. 그런데 동성왕에 패한 북위가 AD 489년 외교상 적대국 관계였던 남제와 정치우호 조약을 맺자 백제와 남제와의 동맹관계는 균열이 생기게 되었고 국제 외교상의 변화에서 AD 490년 북위의 고조는 보기군 10만명을 동원하여 하북성 지역의 백제군을 공격해왔다.
동성왕은 장군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 등을 파견하여 북위 군대를 크게 격파한다. 이 당시 동성왕의 북위군 격퇴 기사가 남제서(백제전)에 <경오년 위나라 군대를 밤에 공격하니 북위군이 무너져 총퇴각하였고 백제군이 적을 뒤쫓아 마구 무찌르고 목을 베니 적의 시체가 들판에 가득하고 피가 온땅에 붉게 물들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去庚午年... 領軍逆討 宵襲霆擊 匈梨張惶 崩若海湯 乘奔追   屍丹野
한편 남제는 왕위찬탈 등 내부혼란으로 국력이 약화되자 백제는 남제에 대한 지배적인 외교자세를 갖고 AD 495년 남제에 외교표문을 보내 과거 AD 490년의 북위 전쟁을 재확인하면서 당시 전쟁승리 유공자들에 대한 작위를 하사하고 대륙백제 각 영지에 백제 직할 태수를 임명한 사실을 통보한다(그림참조--------고딕).
경오년 전쟁에서 패한 북위는 AD 493년 문제때 수도를 평성에서 낙양으로 천도하자 백제는 산동반도와 회수이북 제남지역에 강력한 세력을 대륙백제 멸망시까지 70여년간 유지하게 된다. 그후 계속해서 북위는 각각 AD 494년, AD 497년, AD 498년 대군을 동원하여 백제에 전쟁을 걸어왔으나 백제와 남제 연합군에 참패하게되자 제남 회수지역을 백제에게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한편 북위와의 전쟁으로 인해 동성왕이 공주를 오랫동안 떠나있으면서 AD 500년 산동 내주에 임류각 궁궐을 짓고 통치하게되자 공주 왕실과 토착 담로세력들은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위해 위사좌평 겸 가림성주였던 백가( 可)를 동성왕에게 보내어 대왕이 공주로 되돌아 와 통치해 줄 것을 간청했으나 임류각의 호화로운 생활에 젖어있던 대왕이 이를 거절하였다. 이때 백가가 공주의 통치를 자신에게 맡겨 달라고 하자 대왕이 대노하여 백가를 죽이려하니 백가는 돌연 자객으로 변해 대왕을 시해하고 만다. 이로써 근초고왕에 이어 중국대륙 내에 광대한 백제식민지를 건설한 동북아의 영웅 동성대왕은 AD 501년 12월 어이없게 자신의 신하의 칼에 맞고 죽는 어이없는 최후를 맞게 되었다(동성대왕의 왕릉은 현재 산동반도 내주부근에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대왕의 피살소식이 공주와 나라에 전달되자 대화왜에서는 곤지의 양아들 무령왕을 후임왕으로 임명하여 백제에 새로운 왕으로 보내게된다(삼국사기에서는 이복 형제간인데도 불구하고 무령왕을 동성왕의 차남으로 기록하여 부자지간으로 왕위 계승한 것으로 기록).
대왕을 죽인 백가가 무령왕의 취임을 거부하고 반란을 도모하자 무령왕은 우두성 성주 해명을 시켜 이들 세력을 물리쳐 죽이고 공주에서 제25대 신왕(AD 462-523)으로 등극하게 된다.
무령왕은 AD 502년 달솔 우영(優永)을 보내 고구려에게 빼앗긴 수곡성를 탈취하여 북방의 영토를 황해도까지 넓혔고 AD 503년, AD 506년 고구려와 말갈족의 연합군을 연속으로 격퇴하였으며, 섭라(섬진강 주변의 가야땅)를 놓고 벌인 고구려와의 전투에서도 승리하였다.
대화왜와 친밀한 관계를 위해 나라에서 어린 시절 곤지 밑에서 형제같이 자란 이복 동생 계체(繼體)천황에게 AD 503년 백동 200관으로 만든 청동경을 보냈고 AD 507년 자신의 딸 수백향(手白香)을 천황의 왕후로 삼으니 대화왜는 웅진백제의 부마국이 되었다(그래서 AD523년 62세로 무령왕이 붕어했을 때 대화왜의 계체천황은 이를 몹시 애도하여 금송으로 특별히 만든 관을 보내 왔던 것이다-국립 공주박물관 소장).
한편 섭라에 대한 가야와의 영유권 분쟁이 국제화되자 AD 513년 왜에 사신을 파견하여 왜조정을 설득시켜 섬진강 무역중심지 섭라에 대한 백제의 주권을 인정받는다. 한편 당시 공주에는 천황계 진씨들이 대거 왜열도로 이민해가고 있었기 때문에 졸본부여계 대신 남부여계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어서 무령왕은 AD 509년 백제유민 보호정책을 펼쳐 도왜 이민을 제한하여 인구감소를 막았고 임나지역에서 유랑하고 있는 백제유민들을 백제 본관지에 재편입시켜 귀향조치 하였다.
이로써 왜열도에서 온 두명의 왕들은 백제를 강국으로 일으킨 치세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아 남제에서는 동성왕을 진동(鎭東)대장군 백제왕으로, 양나라에서는 무령왕을 영동(寧東)대장군 백제왕으로 불려졌던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됩니다〉

 

 

 

“대륙백제의 몰락은 백제인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성왕은 이같은 상황을 타개하고 공주 토착세력들의 견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수도를 부여로 옮기고 국호도 남부여로 바꾸었다”

“금동 용봉 봉래산 대향로는 위덕 태자가 신라 관산성(현 옥천 부군)을 공격하다 신라군의 기습을 받아 전사한 선왕 성왕을 추모하기 위해 속죄의식으로 만들어 바친 향로”

AD 523년 무령왕이 붕어한 후 공주에서는 강력한 지도력을 갖춘 군주를 잃어 점차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옛 졸본부여 비류백제계 진씨 세력들은 무리를 지어 왜열도 대화왜로 이민을 계속하였고 공주의 토착인구는 계속 줄어가고 있었다.
무령왕의 아들 성왕이 신왕으로 즉위할 즈음에는 이제 공주에 남았던 주력 세력들은 남부여계 족속으로 대화왜의 지명을 받은 비류계 진씨 왕이나 온조계 해씨 왕들을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이 못되었다. 또한 임나지역 4현의 영유권 문제로 가야의 구형왕은 혼인 정책을 써서 백제와 등을 지고 신라와 정치적 제휴를 하자 백제, 대화왜, 가야의 삼국 혈맹관계는 점차 무너지고 있었다.
더욱이 고구려는 백제를 응징하기 위하여 군사적 압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신라는 이와 같은 정치적 역학관계를 이용하여 영토확장의 기회를 포착하려고 하였다.
이런 와중에서 남부여계 신세력파인 제26대 성왕(AD 523-554)이 등장하여 대륙백제의 영토를 확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이에 고구려군이 AD 523년 8월에 수만의 군사를 이끌고 대륙백제를 선제 공격해 왔을 때 좌장 지충에게 기병 일만명을 주어 패수에서 고구려 군사를 격퇴시키게 하였다. 그렇지만 AD 529년 고구려 안장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대륙백제의 북쪽 요새인 혈성을 함락시켜 버렸고 그 이후 3년간 백제의 대륙군은 고구려 군에게 계속 밀리다가 결국 AD 532년 대륙백제군의 대패로 대륙 기지를 거의 상실하는 위기에 이른다.
대륙백제의 몰락은 백제인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성왕은 이같은 상황을 타개하고 흐트러진 민심을 새롭게 하면서 또한 공주의 기존 토착세력들의 견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AD 538년(성왕 16년) 수도를 부여 사비성으로 옮기고 국호도 남부여로 과감히 바꾸었다. 이는 향후 남부여국이 백제가 부여의 후예라는 점을 천명하고 고구려가 차지한 부여의 옛 영토를 되찾겠다는 북진정책을 표명한 것이었으며 한편으로는 왜열도 대화왜와는 직접적인 정치간섭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정치 노선을 갖추고 국정을 주도해 나가겠다는 상징적인 의미도 있었다. AD 541년 대화왜에서 임나항을 임나일본부(그 당시 일본이라는 국호가 성립되기 전이었으므로 후에 일본서기를 개작할 때 일본을 추가해서 쓴 것으로 추정)로 승격시키고 길비신(吉備臣)을 초대 장관으로 파견하여 당시 임나항에 주둔하고 있던 남부여국 군령성주에게 임나항 관할권을 되돌려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남부여 측은 대화왜 정부에 뜻을 따를 의사가 없어 양자간 협상이 어렵게 진행되었으나 마침내 AD 544년 남부여국의 의사가 잘 반영되어 합의가 성립되었다. 즉 임나항의 통치권을 종전대로 남부여 측이 담당하고 낙동강 하류지역 신라와 안라(현 함안)간에 위치한 6성에 남부여군이 배치되는 대신에 임나항의 왜국 이민선의 출입을 보장하고 대화왜에서 파견된 임나 주둔군 500명에 대한 군사 보급을 남부여 측이 맡기로 하자 대화왜 정부는 길비신 등 파견 신하들을 즉시 왜국으로 소환하였다. 허지만 임나 지역을 놓고 주변국 신라, 가야, 대화왜의 정치 외교적 공방과 대립으로 성왕의 북진계획은 미뤄지고 있었는데 AD 548년 정월 고구려가 동예족을 앞세우고 한강 북쪽 독산성을 공격해 오자 신라군의 이사부 장군의 도움을 받아 겨우 패퇴시켰다.
3년 뒤 AD 551년 당시에는 고구려가 돌궐족의 침입으로 신성과 백암성이 포위되었고 도성이 위협받는 상황이어서 이때를 노려 성왕이 직접 수만 병력을 이끌고 신라 가야의 연합군과 합세하여 고구려가 장악하고 있던 한성 지역을 쳐서 되찾았고 양군의 전투 공방 끝에 이들 백제군은 고구려의 하평양(대동강 유역)까지 진격하여 6개의 군을 회복하고 신라는 한강유역과 죽령 북방의 10개의 군을 얻는 큰 성과를 얻게 되었다.

신라의 융성(AD 553년)과
가야·임나의 멸망(AD 562년)

정치적 불안을 느낀 백제인들의 왜열도 이민이 본격화되자 남부여국은 갈수록 국력이 약화되었고 돌궐군이 물러난 후 고구려가 전열을 정비하고 영토 회복전을 개시하자 이런 국제정치 분위기를 타고 신라 진흥왕은 오히려 고구려와 손을 잡고 남부여에 도전하고 나섰다. AD 553년 조국애로 가득찬 화랑군을 앞세워 신라 진흥왕은 한강 유역 이북의 백제영토를 공략하여 이를 탈취하니 옛 신라 서라벌 고토를 약 1500년 만에 되찾게 되었다.
신라 세력의 약진에 남부여 성왕은 AD 553년 자신의 공주를 진흥왕과 결혼시켜 동맹을 맺고 신라와 굴욕적인 화친관계를 도모하였으나 진흥왕이 배신하여 고구려와 군사적 동조관계를 맺고 남부여국의 동북부 지방을 침탈하였다. 결국 성왕은 AD 554년 대화왜의 파병 지원을 받아 신라에게 빼앗긴 땅을 되찾기 위해 장군 가량(加良)을 대동하고 신라의 관산성(현 옥천 부근)을 직접 공격하다가 신라군의 기습을 받아 오히려 전사하고 말았다.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민족 사학자가 주장하는 사실을 살펴보아야 할 것은 일본 나라현 호오류우지(法隆寺) 본존 동원(東院) 몽전(夢殿)의 구세관음 비불상(救世觀音 秘佛像)이 현재 알려진 대로 가공인물인 쇼오토쿠 태자(聖德太子)의 상이 아니라 백제 성왕의 얼굴과 몸을 표현했다는 것으로, 이는 신라 전투에 선봉에 선 태자가 신라 김무력 장군에게 포위되자 아들을 구원하려고 몸소 군사를 이끌고 오다가 아깝게 전사한 성왕을 추모하기 위하여 그 아들 위덕(威德)태자가 선친을 애도하면서 만든 등신불이라고 역설한다.
또한 불상과 함께 위덕 태자는 선왕을 추모하는 속죄의식으로 향로를 만들어 바치는 데 이것이 1993년 12월 부여 능산리 고분 옆 절터에서 발굴된 금동 용봉 봉래산 대향로라는 주장으로써 우리는 이들 예술작품에서 웅혼한 백제 문화의 멋과 향기를 맛볼 수 있다.
한편 기세가 오른 신라군은 AD 555년 남쪽의 가야동맹을 와해시킨 후 AD 562년 고령에 있는 대가야마저 물리쳐 통합 귀속시켰고 같은 해 계속해서 임나항을 공격하여 이를 봉쇄하자 이로써 임나항은 응신 천황 도왜(AD 396년)이후 160여년 만에 왜열도 이민 출항기지로서의 역할이 막을 내리게 되었다. 한편 가야연맹 세력도 멸망하자 가야인들은 백제인과 마찬가지로 선주세력이 있던 왜열도로 탈출해 나가니 왜열도에서 아야(安羅)씨를 이루었고 고대 백제인들과 함께 일본고대사 형성에 중대한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다.

대륙백제의 멸망(AD 576년)

졸본부여계 웅진백제가 점차 한반도의 남부여국과 왜열도의 대화왜 정부로 양분되고 성왕 사후 걸출한 지도자가 나타나지 않은 채 백제세력이 약화되자 고구려의 평원왕은 이 기회를 타고 AD 572년 사위 바보 온달장군을 보내 대륙백제를 공격하게 한다.
온달장군이 이끄는 고구려 군이 요서 지역의 갈석산을 빼앗고 요충지 유림관(현 북경 근처)마저 토벌하니 BC 18년에 세웠던 발해만 지역(옛 대방고지)의 고대 백제 영토는 약 590년만에 고구려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이어서 AD 576년 북제의 종주국 역할을 했던 대륙 백제가 고구려에게 일방적으로 무너지자 이웃에 있던 북주의 무제는 이때를 노려 북제의 서경, 진주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그러나 한반도 남부여국에서는 이 사실을 알고도 집권을 놓고 잔존 졸본부여계 진씨와 남부여족간의 내부갈등과 신라와의 전투에서 국력이 소진되어 대륙백제를 구원할 군사를 파견할 능력을 상실하였다. 북주의 무제가 계속하여 북제의 왕성인 업성을 공격하자 드디어 북제는 항복하여 북주와 통합되었다.
북주 무제는 이제 한반도 백제 세력이 더 이상 대륙백제에 대하여 관여할 힘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산동반도에 있는 백제 식민지 세력마저 격파하자 이로써 남부여국은 대륙백제 관할 발해만 지역과 산동반도 모든 지역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런 후 양자강 상하구에 위치했던 남쪽의 백제 식민지 성양군, 광릉군 역시 북쪽의 요서군, 진평군 백제 식민지의 상실로 이들과 서로 고립되어 분리되자 중국 남쪽에 위치한 진(陳)이 쳐들어와 이들마저 병합되자 대륙에 있었던 백제 식민지 세력은 모두 멸망하게 되었다.(그림참조---------)
중국 통전(通典)에서는 대륙백제에 대해 <성밖의 백제 잔류민들은 차츰 모든 기력을 잃고 돌궐족이나 말갈족으로 투항해 흩어졌으며 대륙백제의 왕 부여숭과 부여씨 군장들은 멸망해 버린 옛 영토로 돌아갈 수 없어서 모두 소멸되고 말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다음호에 계속됩니다----〉

※지난 699호 ‘비류백제의 실체를 찾아⑤’ 내용중 3단 상단부 ‘응락천황은 곤지의 둘째아들인…’은 ‘웅락천황’의 오기였기에 바로잡습니다. 또 4단 하단 ‘백가( 可)를 동성왕에게 보내어…’의 공란 한자는 ‘초두 밑에 흰백’이었으나 편집상 오류로 누락되었음을 알립니다.




“당태종과 신라 김춘추는 양국 군사동맹을 맺은 후 남부여부터 침공한후 고구려를 공격하기로 전격 합의하였다. 그러나 나당 동맹의 대가도 수월치 않아 신라는 독립적인 연호를 포기하고…”

“김유신 장군은 뇌물로 매수한 남부여 좌평 임자를 통해 무녀 금화를 의자왕에게 접근시키는데 성공하자 왕은 그녀의 점술에 어리석게도 속아넘어가 충신 성충과 윤충형제를 감옥에 가두고…”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가야연맹까지 붕괴시킨 신라의 국력이 급상승하게 되자 남부여에서는 무왕과 신라 선화 공주사이에서 태어나 왕위에 오른 제31대 의자왕(AD 641-660)때에 이르러 동서전쟁으로 격화된 선왕의 한을 풀어드리고자 즉위 후 AD 642년 상좌평 부여 성충(成忠)과 가잠성(현 괴산) 성주 계백(階伯) 장군을 소집하여 먼저 신라 제1의 요충지 대야성(현 합천)을 빼앗은 후 계속하여 옛 가야 영토였던 지역의 40여 개의 성과 식읍 들을 차례로 점령하였다.
이 사건으로 신라의 김춘추는 의자왕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어 고구려의 태대막리지 연개소문을 찾았고 이때 마침 남부여에서도 신라침공의 배경을 외교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성충을 고구려에 보낸지라 삼국간 외교 회담이 열리게 되었다.
신라 측은 남부여가 탈취해 간 영토의 즉각 반환을 요청하였으나 남부여 측은 점령한 곳이 본래 백제의 속국인 가야연맹의 땅으로 신라가 훔쳐간 것을 다시 되찾은 것뿐이라고 주장하면서 맞서게 되어 회담은 결렬되었다.
이에 연개소문은 두 나라가 영토 분쟁을 그치고 오히려 삼국이 대동단결하여 중원의 중화족을 정벌하여 영토를 공평히 나누어 갖자고 주장하니 신라 김춘추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탈출 귀환하였고 반면에 남부여 성충은 고구려와 외교적으로 화친하는데 성공하였다.
한편 앞서 남부여의 무왕은 자신의 딸 보황녀(扶餘寶, 의자왕의 친누이))를 대화왜 서명(舒明, 조메이) 천황에게 시집보내어 양국간 혈연 관계를 유지한 바 있었는데 AD 641년 서명이 갑자기 죽자 황후 보황녀가 즉위하게 되니 이가 황극(皇極) 여왕이었다.
또한 의자왕의 친동생 경황자(扶餘輕)는 당시 남부여국의 일본 외교대표부 역할을 했던 일궁부(日宮部)의 현지 장관을 맡고 있었다. 그후 의자왕은 일궁부 경황자를 나라(奈良)로 보내 친누님되는 황극 여왕을 보필하게 하고 그 대신 아들 풍장(扶餘豊璋)을 일궁부의 군(君)으로 임명하여 파견하여 양국의 외교관계를 강화하였다(도표 참조--------).
한편 대화왜에서는 천황은 상징적 대표 인물이고 정치 실권은 대신이 갖고 있었는데, 백제계 목협만치(곤지와 함께 도왜한 백제 장군)의 대화왜 후손으로 창씨 개명한 소아가(蘇我家)가 막강한 세력을 쥐고 있어 천황가를 위협하고 있었다.
황극여왕은 아들 중대형(中大兄, 후에 천지 천황으로 등극)을 통해 신라계 겸자련(鎌子連)과 의논하여 소아가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신라 김춘추가 구원병을 파견하도록 요청하였다. 신라 김춘추는 남부여의 왜열도 배후세력을 치고 신라의 지지세력을 구축하기 위해 대해인(大海人)장군을 원정군 대장으로 출병시켜 왜열도 신라지역인 단마(但馬, 현 도톳리 현)에 상륙시킨 후 일명 새잡기(鳥取)작전을 벌여 예상을 깨고 일궁부 풍장군의 아스카군을 누르고 아스카에 무혈입성 하게 된다.
AD 649년 신라 대해인은 먼저 소아입록(蘇我入鹿) 대신을 제거하고 황극 여왕 대신에 경황자를 새로운 효덕(孝德)천황으로 세우고 수도를 난파(難波, 나니와 현 오오사카)로 옮기고 대해인의 자문을 받아 신라식 정치제도와 연호를 사용하는 대화개신(大和改新)을 단행하였다.

나당 연합군의
남부여 침공

남부여와 신라가 서로 물고 물리는 전투를 계속하던 AD 648년, 신라 김춘추는 왜국에서 신라 세력을 구축한 후 본격적인 남부여국 공략을 위해 직접 당나라 장안성으로 들어가 당태종을 만난다.
당태종은 이미 AD 645년 고구려군에게 안시성 전투에서 참패를 당한 후 장안성까지 추적한 연개소문 장군에게 항복을 한 상태여서(한단고기 태백일사의 고구려 본기- 이 전투로 당나라는 외교적으로 고구려의 속국임을 인정) 신라 일행을 군왕으로 예우 영접함으로써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하였다.
당태종과 신라 김춘추는 양국 군사 동맹을 맺은 후 먼저 남부여부터 침공한 후 고구려를 공격하기로 전격 합의하였다. 그러나 나당 동맹의 대가도 수월하지 않아 신라는 독립적인 연호를 포기하고 당의 연호 영휘(永徽)를 사용하기로 하였고 신라 관원들의 복식도 당의 복식을 따라 입기로 정했으니 이는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에도 당이 한반도를 지배하려는 술책이 이미 노출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AD 649년 남부여 사비성에서는 나당 동맹 회담의 결과를 주시하면서 먼저 일궁부 자신의 아들 풍장이 주축이 된 백제세력은 백치(白雉, 흰꿩) 반정을 통해 신라세력을 기반으로 오른 친동생 효덕 천황을 폐위케 하였고, 수도를 아스카로 옮겨 친누이 보황녀를 다시 제명(齊明)여왕으로 복위시켰다.
이어서 신라 김춘추가 고구려 포위망을 뚫고 무사히 탈출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의자왕은 나당 연합군이 쳐들어오기 전에 계백 장군에게 전 부여군을 동원시켜 좌장 은상(殷相)으로 하여금 신라를 공격하게 하였다. 초기 신라군의 전력열세로 남부여군에게 서부 전선의 석토성 등 7개 주요한 요새들이 함락되자 신라도 왜열도 파견 조취군 중에서 대해인 별동군만 남기고 모두 불러들여 긴급 대항하는 처지였다.
남부여국의 압도적인 승세 속에서 양국의 정치적 변화가 생겼으니 AD 654년 신라에서는 태자시절부터 국제적 외교 감각과 경험을 갖춘 김춘추가 태종 무열왕으로 등장하여 처남인 김유신을 서불한(舒弗翰, 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병권을 장악하자 정권이 안정된 반면에 남부여국 의자왕은 남부여 야마토 왜의 연합이 회복되고 신라에 대한 초창기 공격의 승리로 신라성 30여개를 탈취하자 전승 무드와 자만에 젖어 태자 부여효(扶餘孝)를 위해 태자궁을 짓고 대왕포(낙화암 근처)에 망해정을 설치하여 주색 가무에 빠지자 부여성은 환락과 사치에 빠져 국가 기강이 문란하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신라 김유신 장군은 뇌물로 매수한 남부여 좌평 임자(任子)를 통해 무녀 금화를 의자왕에게 접근시키는 데 성공하자 왕은 그녀의 점술에 어리석게도 속아넘어가 충신 성충(成忠)과 윤충(允忠) 형제를 감옥에 가두고 좌평 흥수(興首)마저 귀양보냈으며 군신인 서부은솔 복신(福信)마저 파면시키게 된다.
신라 무열왕은 반간계가 성공하자 김유신 장군을 불러 군사 총동원령을 내리고 한편 태자 법민(法民)을 당나라로 보내 당고종의 왕비 측전무후에게 접근시켜 동맹군 파병을 요청하게 한다(AD 659년).
당고종은 고구려와 백제를 동시에 공략하기로 정하고 북방군은 설필하력이 고구려를, 남방군은 소정방이 신라군과 연합하여 남부여를 각각 치기로 결의하였다.
드디어 AD 660년 3월 신라 왕자 김인문과 당장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 13만명이 덕물도(현 덕적도)에 도착하자 태자 법민이 군선 100척을 거느리고 맞았고 양군 연합군은 남부여국을 수륙 양면으로 침략하였다.
신라의 대각간 김유신은 5만명의 군사로 대야성을 출발하여 탄현(현 보은 근처)을 통과 부여 사비성으로 공격하고 있었고 태자 법민은 당군과 함께 기벌포(백마강 입구 서천)로 진격, 저항없이 상륙하였다.
탄현과 기벌포를 사수하라는 충신 성충은 이미 죽었고 남부여군의 사기가 떨어진 상태에서 노장 좌평 의직(義直)만이 수군으로 백강의 입구를 막으려 했으나 중과부적으로 돌파 당하게 되었다. 또한 탄현을 아무 저항없이 넘은 제2군 김유신 5만 군사는 계백 장군의 5천 결사대의 항전으로 황산벌에서 고전하였으나 어린 화랑 반굴과 관창의 희생으로 극적인 승리를 하게 되었다.
한편 김유신이 싸우고 있는 동안 제 1군 신라 법민 태자와 당군 우군 지휘관 김인문의 연합군은 부여 사비성을 이미 함락하였으니 의자왕의 개인적 어리석은 독단과 정치적 방심이 국가 멸망의 화를 부른 것이었다.
한편 의자왕이 태자 부여효와 함께 부여성과 백성을 버리고 다급하게 웅진성으로 도피하자 왕자 부여태와 부여융이 항전없이 항복하였고 간신 임자가 보낸 군사에 의해 의자왕과 태자일행도 곰나루산성에서 달아나다 사로잡히자 당나라 소정방은 백제 재건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해서 김춘추와 김유신의 허락을 받아 왕과 태자, 왕족, 신하, 장령등 93명을 포함 1만2807명의 백제인 포로들을 당의 수도 장안으로 압송하였다.
그리고 남부여에는 당장 유인원과 당군 1만명, 신라 왕자 김인태와 신라군 7000명으로 구성된 웅진 도독부를 세워 성을 관리하게 하니 이로써 남부여 세력은 왜열도의 백제 세력만 남기고 소멸하게 되었다.(AD 660년)


〈다음호에 계속됩니다〉

 

 

남부여 다물군의 주역은 무왕의 조카인 임존성 성주 부여복신(扶餘福信)과 서부달솔 흑치상지(黑齒常之) 장군이었다. AD 661년 다물군은 진현성 탈환을 시작으로 하여 웅진 도독부 유인원 부대의 일부를 포위하여 전멸시켰고 승병장 도침(道琛)은 백마강 근방 주류성을 점령하여 부여 사비성과 웅진성 사이의 바닷길을 봉쇄했다.
이에 복신 장군은 주류성(周留城)을 임시 수도로 받아 잔존 성주들을 총집결시켜 우장군에 복신, 좌장군에 도침을 임명하여 다물군의 조직을 재정비했고 대화왜와 탐라 담로국에 원군을 요청했다.
한편 의자왕의 패배 소식과 당나라 포로로 끌려간 사실이 아스카 정부에 알려지자 제명여왕(의자왕의 누이)은 남부여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즉시 수도를 아스카에서 큐슈 나대진(나노쓰, 현 후쿠오카)으로 천도하여 아들 중대형 왕자와 신라계 겸자련에게 군선제조와 출병준비를 진행시켰다. AD 661년 복신 장군의 다물군이 왜 구원병과 함께 사비성을 총공격하였을 무렵 신라 무열왕도 이런 치열한 전투에 직접 가담하였다가 금마군(현 전북 익산)에서 전사하였고 또한 다물군을 지원하던 야마토 왜의 제명여왕도 백제 복국을 유언으로 남기고 지병으로 별세했다.
복신은 남부여 전역을 다물군이 거의 확보하게 되자 나라를 통솔 할 왕이 없음을 인식하고 사신을 왜열도 나대진으로 파견하여 의자왕의 아들 일궁부의 풍장이 신왕으로 오기를 요청하였다. 이에 일궁부의 풍장 군은 여왕의 뜻을 좇아 동생 부여용(扶餘勇)을 야마토에 남겨 자신을 지원하게 한 후 남부여국을 재건할 목적으로 군선 170척과 군사 17000명을 이끌고 남부여 국왕으로 다물군을 지휘하기 위해 귀국하게 된다.
한편 남부여 복신 장군의 다물군이 웅진성 좌우 칠갑산과 계룡산을 탈취하고 당군을 역포위하자 당장 유인원은 고립무원 상태에서 당 고종에게 구원병을 요청하니 이후 당군의 증원군이 제3차에 걸쳐 도착하여 웅진 도독부 구출 작전을 벌이게 되었다.
왜열도에서 귀국한 풍장은 왕위에 올랐으나 현지 사정에 어둡고 다물군의 장수들이 복신 장군의 명령에 따라 이제껏 영토회복 다물전쟁을 해 온 탓으로 풍장 왕의 군 지휘권이 확립되지 않자 왕권을 확보하려는 풍장 왕과 군권을 유지하려는 복신사이는 점차 금이 가고 있었다. 더욱이 모든 다물군의 신망을 받고있던 복신을 시샘하던 도침이 풍장 왕에게 붙어 그를 견제하자 복신은 곰나루성의 유인원과 밀통하고 있다고 의심하던 차에 도침을 반역혐의로 몰아 풍장 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참형에 처한다.
이런 불안한 정국 상황에서 AD 663년 큐슈 나대진을 출발한 군선 400척, 정병 2만7000명으로 구성된 야마토 원군이 도착하자 풍장 왕의 입지는 강화돼 이제 복신 장군을 다물군의 일선 지휘에서 후퇴시키려 하자 복신이 왕명을 거부하고 다물군을 계속해서 이끌려고 하니 풍장 왕은 복신 장군을 마침내 제거하게 된다. 이는 역사의 아이로니(IRONY)로써 풍장 왕을 남부여 왕으로 초청하신 분이 복신 인데 내부 지휘권의 다툼으로 인하여 거꾸로 풍장 왕이 복신을 죽이는 참변이 일어나게 되었다.
부여성 탈환을 눈앞에 두고 다 이긴 전쟁에서 일사불란하던 다물군의 단합은 깨지고 엄청난 전력의 손실을 초래하였으니 이처럼 남부여 자체의 갈등과 분열로 다물 부흥운동이 다시 자멸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또한 왜열도에서 온 풍장 왕이 등장한 소식을 들은 당고종은 이에 맞서기 위해 장안으로 데려 간 태자 부여융을 웅진 대도독 부여왕으로 임명하여 원군 27000명을 이끄는 손인사 장군과 함께 다시 보내자 남부여군들은 어느 편을 자신의 왕으로 모실 것인지 내부분열이 되어 정치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그때 풍장 왕이 복신 장군을 죽인 것에 배신감을 느끼면서 갈팡질팡하던 흑치상지 장군과 그 부하 장수들도 부여융이 상륙하자 전병력과 자기 관할 200여성을 들어 부여융 왕에게 바쳐 항복하였다. 게다가 이들이 서로 합세하여 AD 663년 8월 다물군의 본부 주류성을 총공격하니 성내 다물군은 흑치 장군의 이탈로 우왕좌왕하다가 마침내 항복하게 되었다.
이에 열세에 놓인 풍장 왕은 야마토 수군 400척을 출동시켜 백마강에서 당 수군 170척과 맛 싸우게 하였으나 급조된 야마토 군선들은 자신들의 것보다 거의 10배나 큰 당의 군선에게 화공으로 무참히 깨지고 4번에 걸친 해상전투에서 전멸 당하게 되는데 이것이 소위 일본서기에 나오는 백촌강(白村江) 해전이다.
주류성 항복에 이어 임존성에 주둔한 다물군의 남은 군대와 야마토 육군마저 당군의 포위속에 모두 전멸되자 3년 간 이어진 백제의 다물 전쟁은 끝나게 되었고 이로써 남부여국은 역사 속으로 영원히 사라지게 되었다(AD 663년).

야마토 왜(大和倭)
일본국 변신

남부여국의 광복을 위해 다물 전쟁을 지원했던 대화왜의 부여용과 제명여왕의 중대형 황자는 다물군이 항복하고 백촌강 전투에서 야마토 군마저 패배하여 나라를 잃어버리게 되자 이제는 남부여를 지원한 대가로 나당 연합군이 이를 응징하기 위해 왜열도까지 공격할 것이 예상되었다. 이에 대마도, 일기도, 북 큐슈 축자 지역에 백제식 산성을 쌓고 방어군을 두어 나당 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하였고 한편으로는 정치적으로 이를 해결하기 위한 외교노력도 병행하게 된다.
본국 백제가 이제 망하고 없으므로 왜열도 정부라도 살리기 위해서는 백제와의 정치적 연관성을 정리하고 왜열도 내에 새로운 국가의 실체(Identity)를 이룩하는 것이 시급한 국가정책으로 대두됐다.
그리하여 AD 668년 내란을 딛고 어렵게 천지 천황에 오른 중대형은 국가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신라계 구세력의 대표적 인물인 대해인과 겸자련을 중용하였으며 AD 670년에는 국명을 백제인들이 왜지를 늘 불러 온 대로 ‘해뜨는 땅’, 일본(日本)이라 정하여 새로운 나라를 탄생시키게 된다.
결국 일본이란 국호의 채택은 외교적으로 더 이상 한반도의 백제 연고권을 주장하지 않고 별개의 나라로 살아 남겠다는 정치적 선언이었고 이를 위해 AD 671년에는 전승국 신라와 당나라에 대하여 비단, 명주, 가죽 등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고 전후 처리가 일단락 되었다.
그 후 일본에 와 있는 한반도 출신 가야인, 백제인, 신라인, 고구려인 등 여러 지역 출신들의 인화(人和)와 공동체 의식을 심어주기 위해 그들의 본토 출신지와 정치적 관계를 조명할 수 있는 모든 과거 역사기록을 없애기 위하여 즉 일본과 한반도 역사와의 연결고리를 끊기 위하여 새로운 역사 국서를 기술하게 되는데 AD 720년까지 고사기, 일본서기를 완성시키게 된다.
특히 백제서기를 변조시킨 일본서기는 백제에서 온 초기 기록을 전부 말살하고 일본이 마치 처음부터 왜열도에서 독자적으로 생긴 국가인 것같이 위장하기 위하여 일본국이 하늘에서 천손이 강림하여 생성된 나라라고 서술하여 고대 한일 관계를 말살하고 새로운 신민(神民)사상의 역사관으로 대체한 최초의 역사 왜곡이었다.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 후 AD720년 일본서기를 편찬하면서 한반도와의 관계를 삭제하고 왜열도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것이 일본이라고 주장하면서 과거 일본의 모체가 되었던 비류 백제계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던 사실만은 마치 자신의 역사인양 편입시켜 서술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일본의 탄생이 원래부터 왜열도에서 일어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일본서기는 천손강림 설이나 고대 왕명 및 왕력의 연도 조작을 통하여 한반도에서 건너온 사실을 철저히 배제하면서도, 동일한 국가세력이었던 비류 백제가 역사적 시기만 달리하여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던 사실만을 일본의 역사로 유리하게 채택하는 이중적인 역사왜곡을 하였던 것이다.
이를 일본식 역사해석으로 본다면 한반도 남부를 정복하러 왜열도에서 일본세력이 서진(西進)해온 것으로 보아야 하며 따라서 고대 한일관계의 역사전개 방향을 정반대로 해석하게 된 것이다.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고 주장하는 일본의 소위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설은 작은 의미로는 임나항(부산)에 대한 지배사실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실은 AD 4C까지 한반도에 있었던 비류백제의 가야, 임나등 한반도 남부에 대한 지배역사를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반도 남부는 한반도와 왜열도에서 서로 지배하였다고 주장되는 동일한 지역 즉 서로 다른 역사 시기를 두고 공통으로 겹쳐지는(overlapping) 역사의 현장이 된 것이다.
따라서 국내 사학계가 비류백제 등 고대 한국인들의 왜열도 진출을 밝히지 못하고 한반도 내에서 마한이 변한 것이 백제이고 한반도 안에서만 생성 원인을 설명하려는 기존 역사관을 계속 유지하면서, 동시에 왜열도에서 고대 한국인의 영향 없이 저절로 일본이 형성되었다고 주장하는 일본 사학계의 입장을 현재처럼 수용한다면, (다시 말해 고대 한일양국이 지역적으로 분리된 채 서로 아무런 정치적 연관 없이 독자적인 국가세력으로 각각 발전하였다는 종래의 학설을 그대로 유지한다면), 한일 양국 간의 역사적 마찰과 정치적 분쟁이 언제 또 일어날지 모르며 아마도 불행한 과거가 앞으로 계속 되풀이될지 모른다.
이러한 예는 과거 19C말∼20C초 일본 정치가의 정한론 및 고토회복 주장, 일본 역사학계의 내선일체, 대동아 공영권 등 식민지 지배이론으로 합리화되었던 것이고 한일 간의 불행한 정치 관계를 낳았던 이론적 근거가 되었던 것이다. 또한 몇 년 전 일본 역사 교과서 파동도 이러한 일제시절의 군국주의와 침략주의의 부활의지로 볼 수 있으며 일본을 재무장하려는 맥락의 일환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현재 동북공정을 통한 중국의 역사 왜곡 작업도 한국 등 주변국에 대한 영토 침탈을 합리화하려는 사전적 역사이론 작업의 술책이라고 볼 수 있다. 즉 고구려사를 중국사로 일단 편입해 놓으면 장차 북한 정권이 붕괴 시 북한 지역도 과거 고구려 영토에 포함되었던 것을 감안하여 중국의 고토로 주장할 수 있는 역사적 근거를 남겨두는 동시에 정치 외교적으로 자동 개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치밀하게 준비해 놓은 국가 전략의 한 수단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금번 역사 기고를 통해 기존 한국의 사학계가 고대사의 경우 이를테면 한일 간의 역사 전개가 한반도에서 왜열도로 진행되었다는 역사이론에 대한 한가지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아직도 일제가 심어 논 식민사관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점을 일반 독자들에게 문제 제기하여 경종을 울리고 싶었고 한편으로는 과거 비류백제의 역사 현장에 있는 공주주민에게 고대 한일관계에 대한 명확한 역사적 진실을 알리고 싶은 진정한 의도도 있었다.
끝으로 북한의 파탄과 핵 개발로 인해 한반도 정세가 주변국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상황이 급변할 수 있는 또 다른 위기 국면에 빠진 이때 우리의 잃어버린 고대 역사상에 있었던 여러 가지 경우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을 지닌 분석과 점검을 통해 유연한 대책과 해법을 찾아내어 주변국과의 외교 협력관계를 적절하게 이루어 냄으로써 21C 우리나라를 세계의 유력한 국가의 하나로 부상시켜야만 할 것이다.

<끝>

출처 : [기타] http://cafe.naver.com/historoom.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140

잊혀진 제국-중국과 일본을 다스렸던 비류백제 
boolingoo
2008.10.01 01:07


조회 1,648

잃어버린 고대사중 대륙백제와 한반도 웅진을 중심으로 한 비류백제, 광개토대왕의 침입으로 인한 일본으로 간 백제를 통한 한·일고대 관계의 올바른 역사전개를 모색해 보고자 한다(2003. 9.30 성균관대학교 600주년 기념관에서 개최한 교육인적자원부 후원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민족사학자들의 견해와 기존 국내사학자들과의 역사이론을 비교함).


◇ 비류백제 이야기 (1)

고대 백제의 기원

먼저 우리가 아는 백제에 대한 기본 상식은 먼저 시조가 온조이고 한반도 내에서 마한이 변한 세력으로서 고이왕 때 정치제도를 본격적으로 갖추었고, 근초고왕 때 최대영역 판도를 얻었으며, 침류왕 때 불교가 들어왔고 수도가 한성에서 공주로 옮겨진 후 부여로 천도되었으며 의자왕 때 나당 연합군에 의해서 멸망(AD 660년)되었다는 정도뿐이다.
그러나 고대 백제는 한반도 한성부근에서 호남지역까지 있었던 그런 간단한 작은 지역국가가 아니라, AD 4세기말에는 중국대륙 옛 요서 지방부터 남으로 양자강 연안까지 해안지역(대륙백제)과 한반도 지역(반도백제) 그리고 왜열도 근기지역(열도백제)을 본체로 하여 해외의 22개 담로국을 갖춘 동방의 로마제국 같은 대해상 국가였기에 연구해보면 볼수록 그 국가 실체가 무궁무진한 신비의 국가인 것이다. 그러나 국내 사학계에서는 일본이 만든 반도사관에 의거, 한반도 한강을 중심으로 한 서남부 지역의 백제만을 신봉한다.
백제의 기원을 알기 위해서는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이름 고추모)의 행각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고추모(高鄒牟)는 동부여의 금와왕을 피해 졸본 부여로 피해오는데 그곳에서 있었던 우이국(宇台國) 족장의 미망인 소서노(召西奴)를 만나 결혼하게 되고 아들 온조(溫祖)를 낳게 된다. 한편 소서노는 전남편 우이(優台)로부터 얻었던 온조의 이복형 비류(沸流)와 함께 고추모를 도와 고구려를 건국하게 된다(BC 58년). 고구려 건국후 동부여 시절에 결혼하였던 예부인과 아들 유리가 고구려로 찾아오자 소서노의 재력과 세력으로 건국하였던 고추모는 자신의 새로운 세력을 구축하기 위하여 동부여에서 찾아온 유리를 태자로 책봉하게 된다.
한편 고추모가 유리태자를 책봉하자 그의 사후 신변의 위협을 느낀 소서노와 비류, 온조형제는 그곳을 떠나 남쪽으로 피해 달아나 현 중국 난하 서쪽 발해만 내륙지역(옛 대방고지)에서 어머니 소서노와 장남 비류를 중심으로 남부여족과 함께 초기 형태의 백제국 어라하(於羅瑕)나라를 이룩하게 된다(BC 18년경).

비류백제의 탄생

중국대륙 대방지역에서 건국이후 인접한 낙랑군 말갈국의 계속된 압력으로 비류와 온조형제 및 남부여족 계통 100개 가문은 선단으로 발해만을 떠나 한반도 서해안 지역의 미추홀로 오게 되었다. 이때부터 백가가 바다를 건너왔다는 백가제해(百家濟海)의 뜻에서 국호를 백제라고 칭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한반도에 온 후 평야지역에서 안정적인 정착을 원했던 온조계 해(解)씨 세력들은 형 비류계와 갈라져서 백가의 1/10을 이끌고 나가 온조 십제(十濟)국으로 분국하고, 반면 비류계 진(眞)씨 세력들은 한반도 남부로 그 세력을 확장하면서 목지국 등 토착 마한세력을 정복하고 웅진(현 공주)지역을 중심으로 비류백제국을 탄생시킨다. 그런데 여기서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이라는 책을 쓴 김성호 선생은 대륙백제계가 한반도로 들어와 비류백제국을 세운 것이 AD 18년경으로 본 반면, 백제와 대화일본의 기원을 저술 한 홍원탁 선생은 비류계와 온조계가 왕위 주도권을 하던 중 온조계 제13대 근초고왕이 비류계 선왕 제12대 계왕을 처치하였을 때 계왕 후손 비류계가 AD 370년경을 전후로 하여 한반도 웅진지역과 왜열도로 진출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아무튼 고대 백제는 처음부터 한반도가 아닌 중국 대수지역에서 최초로 건국이 되었다가, 우리가 아는 온조백제 외에 성씨가 다른 비류백제가 동시에 같이 존재하였는데 후에 언급하겠지만 이 비류 백제계가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벌로 AD 4C말 왜열도로 달아나 일본의 고대국가(야마토 왜, 大和倭)의 기원이 되게 된다. 즉 비류 백제는 일본으로 간 백제의 통칭이 되며 소위 일본에서 불리는 백제의 명칭 구다라(久多良)의 시원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비류 백제의 역사가 우리교과서에서 슬며시 빠지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일제 식민지 시절 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에서 황국 식민사관으로 우리 역사를 왜곡할 때, 일본국 생성의 근원이 되는 비류백제의 역사를 은폐하게 되었고 삼국사기에서도 온조백제 위주로 서술되어 있는 관계로 일본인 사학자에게서 배운 친일 식민사관 학자들이 해방후 국내 강단 사학계를 장악한 상황에서 식민사관이 이들에 의해 수정없이 보급되어 이처럼 비류백제의 역사가 우리의 잃어버린 역사중 하나가 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추가로 알아야 하는 고대 백제의 성씨관계를 살펴보면, 고추모가 북부여 시조 해모수의 후손이므로 온조계는 해(解)씨, 고(高)씨, 부여(夫餘)씨등의 왕씨성을 가졌으나 이복형 비류는 소서노의 전남편 우이의 아들인 고로 위(倭)족 계통인 진(眞)씨, 모(牟)씨, 우(優)씨등을 사용하게 되었다.



먼저 우리가 교과서에서 온조백제의 역사만 배우고 국내 사학계에서도 비류백제를 초기에 망한 것으로 보아 온조백제만 인정하는 이유는 고려 인종때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록을 바탕으로 한다. 여기서는 비류와 온조가 한반도 미추홀에 와서 비류백제와 온조십제로 분국을 하는데 비류가 미추홀 지역에 살다가 갑자기 바닷물이 짠 것을 비관하여 자살한 것으로 기록하여 의문을 남기고 이후 온조계가 비류계 세력을 흡수하여 백제를 하나로 계승시킨 것으로 서술된다. 허지만 그 서술 배경을 잘 살펴보면 삼국사기를 편찬할 시기(AD 1145년경)에는 비류백제계가 왜열도로 들어가서 야마토왜(AD 400년경)를 거쳐 일본국(AD 670년)으로 변신된 지 이미 수백년이 흐른 뒤였기 때문에 한반도에 남아 있었던 온조백제 위주로 서술할 수 밖에 없었고 신라 경주출신이었던 그의 역사관은 신라를 삼국 통일의 주역으로 보아 그 정통성을 인정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동방의 대해상국가를 이룩했지만 일본으로 간 비류백제의 역사는 자연 그 흔적과 지문만 남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민족 사학계에서는 위와 같은 논쟁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알아보아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민족 사학계에서는 비류와 온조계를 모두 인정하는 반면에 왕권의 형성지배구조와 왕국 위치에 대한 추정에 있어서만은 약간의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첫번째 주장은 한성근처의 온조십제는 웅진(현 공주)을 중심으로 한 비류백제의 담로국(擔魯國)으로서 존재하였고 AD 1C∼AD 4C말까지 2개의 국가가 한반도에 동시에 존재하다가 비류백제계가 고구려의 침입으로 왜열도로 망명하게 되자 AD 5C초부터 온조 백제 하나만 한반도에 남아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두번째 주장은 만일 비류백제가 위의 주장대로 한반도에 온조와 별도로 함께 있었다면 온조계처럼 역대왕의 계보 즉 왕력이 있어야 할 터인데 어떤 역사기록에도 남아 있지 않은 점에 기인하여 하나의 백제왕국에서 두개의 세력이 왕권을 잡기 위해 주도권 다툼을 하면서 비류계와 온조계가 순위를 바꿔가며 서로 왕권을 나눠 차지했다는 주장이다(도표 참조------고딕).
마지막 논쟁은 왕국의 위치문제로서 온조백제 수도 한성(漢城)은 지금의 서울 부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원래 옛 백제가 도읍했던 중국 요서 발해만 내륙의 대수지역에 위치했던 장소를 나타내는 것인데 식민사학자들이 삼국사기의 기록을 반도사관에 의거 잘못 해석한 데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입장이다. 즉 원래 백제왕국이 처음부터 의자왕 때까지 대륙에만 있었다는 설과 AD 4C말경 근초고왕이 대륙백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비류계 세력을 한반도 서남지역 및 왜열도로 진출하게 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그 근거로서 만일 기존 주장대로 한성백제가 한반도의 서울근교에 있었다면 공주천도(AD 475) 전까지 거의 500년간 존속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서울 인근에서 백제 토성들은 일부 보이지만 역대 한성백제계 왕릉과 유물들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는 고고학적 사실을 제시한다.
이런 여러 주장들을 밝히기 위해서는 최근 발견된 공주 수촌리 백제 고분군에서 나온 금동관등 유물에 대한 탄소연대 측정등 과학적 조사가 필수적이라고 생각되며 대륙백제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도 중국측 학자와의 학술대회를 통한 문제제기와 중국측 사료조사 및 유물 합동 탐사등의 작업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백제의 해외진출과
해상강국 위상확립

초기 온조 비류계와 공존
근초고왕 시 왜열도 정벌

국내 교과서에는 제8대 고이왕(AD 234∼286)에 이르러 본격적인 정치 체계를 갖추었다고 기술되어 있는데 이는 초기 온조계 왕권이 비류계 세력과 함께 유지되다가 제7대 사반왕 때 비류계 고이왕이 왕권을 찬탈한 후 최초로 양세력이 통합된 정권이 탄생했을 가능성을 시사해 주고 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큐슈등 왜열도 남부 지역은 먼저 고대 가야계 세력이 들어가 지배하였고 AD 2C부터는 백제계도 진출하기 시작하였는데 고이왕 시절에는 안정된 정권을 바탕으로 해외 진출이 가속화되어 먼저 왜열도 큐슈지역에 있던 야마타이(邪馬台)국의 신공황후(이름 히미꼬, 卑彌乎)가 자신과 결혼한 현지 백제계 왜왕 중애왕을 독살하자 이를 응징하기 위하여 목라근자 장군을 파견하여 히미꼬의 복속을 받아온다. 이어서 AD 246년 위나라 장수 관구검이 고구려 동천왕을 쳐 환도성이 함락되자 좌장 진충을 요서 지역으로 보내 관구검의 후미를 쳐서 이를 제압한 뒤 발해만 지역 대방군의 기리영을 공격하여 태수 궁준을 제거함으로써 중국의 대방지역을 중심으로 한 대륙 재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한다. 또한 AD 4C초에는 고구려와의 동시 협동 공격으로 고구려의 낙랑군 병합과 함께 백제는 그 남쪽 대방군 지역을 흡수했을 뿐만 아니라 양쯔강 유역에도 백제 자치지역인 광릉군과 성양군을 설치하여 해상 무역의 발판을 구축하게 된다.
백제의 최전성기 제13대 근초고왕(AD 346∼375) 말기에는 태자 근구수와 함께 현 난하 서쪽의 요서지역과 북경지역까지 장악하여 요서군, 진평군등 백제군을 설치한 후 주세력권에 두었고 이곳으로부터 남쪽으로 중국 동진(晋)과 결전을 벌여 이미 구축한 양쯔강 상해부근의 기존세력 지역까지 서로 연결하는 성과를 얻었으며 고구려의 요동 지역 일부와 한반도 서북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니 황해를 백제내해로 하는 말발굽형의 강대한 국가를 이루어 놓았다(그림 참조----). 또한 근초고왕은 처남 조정 좌평 진정의 건의를 받아들여서 비류계 제12대 계왕의 친손 응신(應神, 이름 호무다)에게 명하여 신공황후의 야마타이 정부가 망한 후 당시 100여년간 주도 세력 없이 힘의 공백이 생긴 왜열도를 정벌하게 만들어 백제계 세력을 다시 한번 재구축 한다.
이리하여 백제의 영토는 AD 4C말에는 중국 해안의 대륙 백제와 한반도의 본백제, 일본의 근기지역까지의 왜백제등 3개 지역을 본체로 하여 태국, 캄보디아, 베트남등 동남아시아 지역까지 이르는 해외 22개의 담로국을 보유한 동아시아의 거대한 해상제국을 이루게 되었다.

2004. 10. 08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온조백제(북부여 해씨) 비류백제(졸본부여 진씨, 모씨)
解氏계 眞氏계
제1대 온조왕, 제2대 다루왕, 제3대 기루왕 제8대 고이왕, 제9대 책계왕
제4대 개루왕, 제5대 초고왕, 제6대 구수왕 제10대 분서왕, 제11대 비류왕
제7대 사반왕, 제13대 근초고왕, 제14대 근구수왕 제12대 계왕
제15대 침류왕, 제16대 진사왕, 제17대 아신왕
제18대 전지왕, 제19대 구미신왕 牟氏계(공주 천도)
제22대 문주왕, 제23대 삼근왕
餘氏계 온조백제(남부여 부여씨) 제24대 동성왕
제20대 비유왕, 제21대 개로왕, 제25대 무령왕

餘氏계 남부여(부여 천도)
제26대 성왕, 제27대 위덕왕, 제28대 혜왕
제29대 법왕, 제30대 무왕, 제31대 의자왕




[광개토대왕 비문에 나타난 역사]

광개토대왕 비문은 AD 4C말에서 5C초까지의 고대역사, 즉 고구려와 백제관계 및 한일 고대사를 조명할 수 있는 결정적인 역사비밀을 담고 있다.
이 기념비는 1880년 압록강 연변에서 개간을 하던 중국 농민에 의해서 처음 발견되었는데 비의 높이는 6.4m이고 비문은 총 1775자가 새겨져 있는데 그 내용은 고구려 장수왕이 선왕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AD 414년에 건립했다는 것으로 현재 중국 집안 현에 보관되어 있다.
일제시절 관동군 참모본부 소속 관서국에서는 첩보원을 만주전역에 파견해 이 비를 찾으려 혈안이 되었던 중 우연히 발견되자 관서국 소속 사꼬오 중위에 의해 비문탁본이 만들어져 처음 공개되자 광개토 대왕의 공적이 만천하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명치 17년, 1884년에는 일본의 조선침략의 명분을 찾고 합리화하고자 관동군에 의해 비문 내용이 재해석되었고 재일 사학자 이진희 선생은 1972년에 이 비문이 관동군에 의해 탁본을 뜨는 과정에서 글자에 회칠을 하여 변조되거나 조작되었다고 주장, 한일 사학계에 큰 파문을 던졌다.
그러면 비문에 나오는 기사를 통해 숨겨진 역사를 살펴보면 먼저 고구려군이 국경남쪽 백제 18성을 공취했다(功取壹八城)는 기록이 보인다.
이는 광개토대왕이 AD 391년 즉위부터 시작된 백제 공략 기사로써 18성에는 백제수군의 요충지였던 관미성(關彌城)도 포함되어있는데 국내 사학계에서는 한반도에 있었던 백제만을 상정하여 이들 여러 성들이 한강좌측 서해안의 성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지만, 필자는 근초고왕 때의 요서백제 세력을 고려해 볼 때 발해만 내륙의 난하 및 대수(帶水)지역의 성들을 전략상 먼저 공략한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참고로 이 비문에는 왜(倭)라는 문자가 자주 나오는 데 이는 웅진에 있다가 왜열도로 달아난 나라 백제(대화왜) 세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비문에는 영락 6년(AD 396년) 병신년에 왕이 친히 수군을 이끌고 잔국을 토벌하였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는 요서백제 제압 후 수군을 통해 황해를 건너 한반도 서해안 지역의 58개성을 탈취한 기사로 여기에는 비류백제의 수도 웅진 거발성(居拔城)도 포함된다.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伐<殘國>...
이어서 비류백제의 도성(웅진 거발성) 친후에도 백제 잔병이 불복하고 감히 나와서 계속 항거하자 대왕은 아리수(한강)을 건너 성(북한산성 추정)을 포위하여 백잔주(온조계 아신왕)의 항복을 받고 아신왕이 이제부터 영원히 노객이 되겠다는 기록이 나온다.
逼其國城 不服義 敢出迎戰.... 渡阿利水 遣自迫城...<百殘>主困逼...獻出男女生口一千人
細布千匹... 從今以後 永爲奴客
위 비문을 보면 백제는 하나뿐이라는 선입관을 벗어나게 하는 잔국(殘國)과 백잔(百殘)이라는 두 단어가 나오는 데 본 연구회가 개최한 고대 한일관계 학술회의에서 김성호 선생은 <잔국>- 웅진에 있다가 고구려에 의해 토벌되어 일본으로 사라진 비류계 백제, <백잔>- AD 396년에 고구려에 항복하여 한반도에 생존한 온조계 백제라고 설명하여 2개의 백제를 의미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비류계 응신 천황의 비밀]

일본서기에는 최초의 일본고대국가인 야마토왜(大和倭)를 세운 천황으로 응신(應神)이 나타나는 데 앞서 근초고왕 때 비류계 선왕 계왕의 후손으로 칠지도를 받고 한반도와 왜열도로 진출했다는 수수께끼 인물로서 이름에 神자가 붙은 것으로 볼 때 왜열도로 도래한 한국계 지도자라는 것은 확실하다.
우리 민족 사학계에서는 응신이 근초고왕의 명령으로 왜열도 정벌후 전남 영암지역에서 비류 백제계 현지 담로왕으로 있다가 AD 390년 웅진에서 어라하 천황으로 즉위하였으며 광개토대왕이 위 비문에서 보듯이 AD 396년 웅진성을 토벌할 때 그곳에 있었던 응신이 자신이 개척한 당시 백제의 식민지인 왜열도의 난파지역(현 오오사카) 대별국(大別國)으로 도피, 그 후 나라지역에 망명정부(나라백제)를 세우게 된다.
그러나 일본측에서는 망명사실을 감추기 위하여 앞서 신공황후가 세운 야마타이국이 멸망하는 년도(AD 269년)에 연결시켜 응신을 신공황후의 아들로 편입시켰고 AD 270년에 일본에서 왕위에 오른 것으로 역사를 왜곡했다. 다시 말해서 실제 응신 원년(AD 390년)보다 120년 앞선 인물로 조작함으로써 광개토대왕에게 패하여 왜열도로 도망간 사실을 감추려 하였다.

고대한일관계 학술회의 논문집(2003. 9. 30, 성균관대 600주년 기념관, 교육인적자원부 후원)

한편 대조선 제국사를 그린 김산호 선생은 응신을 일본에 천자문을 전달 가르쳐 준 왕인(王仁)박사와 동일한 인물로 보았으며 (일본서기에는 응신을 AD 270년대 사람으로 왜곡하였고 AD 405년에 도왜한 왕인을 학자로 서술하여 서로 다른 인물로 만들고 있다) 두 사람의 일본식 발음이 크다(大), 많다(多), 높다(高)는 의미의 오오진으로 똑같이 읽혀진다고 주장하고 있다

[광개토대왕과 응신천황의 대결]

고구려와 백제는 같은 부여족 계통의 형제국으로 서로 화평을 유지해 오다가 AD 4C초 발해만 완충지역인 낙랑군과 대방군이 각각 두 나라에 의해서 병합되자 요서지역에서 양국의 국경이 접해지는 상황에서 자연히 국경분쟁에 노출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AD 371년 고구려 고국원왕이 요서백제를 선제 공격하였다가 오히려 패수 근처에서 백제복병에게 기습을 당해 퇴각하다가 북평양성에서 죽는 사건이 발생하자 양국의 관계는 험악하게 되었고 마침내 양국은 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대격돌을 벌이는 시대가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그 후 AD 390년 웅진백제에서는 응신이 천황으로 즉위하였고 불과 1년 후에는 고구려에서 광개토대왕이 태열제 보위에 등극하게 되자 동시기에 두 정치적 영웅의 출현은 악화된 양국 외교상황에서 서로간의 충돌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한편 근초고왕이후로 백제는 대해양 제국의 최 전성기를 맞고 있던 중 변방의 신라만이 조공관계를 거부하므로 웅진백제의 응신왕이 신라정벌을 선언하자 당시 신라 내물 마립간은 고구려에 실성태자를 질자로 보내 군사동맹을 맺고 구원을 요청하자 외교적 명분을 얻은 젊은 패기의 광개토대왕은 조부 고국원왕의 복수도 겸하여 백제와의 한판 승부를 시도한다.
영민한 광개토대왕은 최근 백제와의 전투에서 고전한 이유가 요서백제와 한반도 백제가 고구려 양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고구려가 어느 한 방향으로 공격하면 반대쪽에서 협공을 받을 수 있는 지형적 불리함과 수군의 상대적 열세 때문이라고 판단되자 먼저 AD 392년 요서지역 백제수군의 중심지인 관미성에 대한 기습공격을 감행하고 20여일 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함락시킨다. 이로써 동양 최대의 막강한 수군력을 지녔던 대륙백제는 황해 제해권을 상실하고 그 세력도 황하 산동반도 이남으로 물러나게 된다. 그 후 광개토대왕은 관미성에서 4년 간 수군양성 및 군선제조를 하게 한 뒤 비문에 나타난 대로 AD 396년 병신년 9월 대왕자신이 직접 수군을 통솔한 채 해상 침투작전을 과감히 전개한다.
여기서 우리는 약관 20세 초반의 어린 광개토대왕의 전술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대왕은 육군 보기군으로 하여금 한반도 하평양을 거쳐 한강 이북으로 위장 공격케 하여 백제군으로 하여금 한강 북방으로 전병력을 전진 배치하게 유도한 후 실제로 대왕자신은 수군 약 이만명을 특공대로 조직하여 일부는 황해를 건너 한강 서해안 경기만과 아산만 지역으로 해상 상륙작전을 시도하고 웅진 거발성을 직접 공략한다.
이는 성동격서(聲東擊西)의 위장전술로 백제군이 전혀 예상치 못한 수군을 동원한 절묘한 승부로서 대왕의 신출귀몰한 용병술에 허를 찔린 역전의 노장 응신도 반격을 포기하고 당시 비류백제계의 세력이 있었던 왜열도 나라지역으로 도피하여 나라백제 망명정부를 수립한다(그림 참조).
광개토대왕은 응신의 추격을 포기하고 부대를 보기군으로 재편성한 후 공격방향을 웅진 거발성에서 북한산성으로 돌려 온조계 아신왕을 계속해서 공격한다. 한편 응신의 패주소식을 전해들은 백제군들은 전의를 상실한 채 천황의 뒤를 따라 왜열도로 도망가는 형편이었으므로 아신왕은 군신들과 함께 성문을 열고 나와서 항복을 한다.
이에 대왕은 아신왕의 화친을 받아들이고 남녀포로 일천명과 세마 일천필 등 전쟁배상금을 받은 후 개선하자 그 결과 동아시아의 패권은 백제에서 고구려로 다시 넘어오게 되었다.

2004. 10. 18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광개토대왕에게 패해 웅진에서 탈출한 응신 천황 및 그의 망명집단 세력들과 이들을 뒤쫓
아가는 백제 신군(神軍)의 대 선단들은 왜열도로 향해 가서 큐슈 서북단 지역 축자(筑紫, 현 기타큐슈)에 도착하였다. 당시 큐슈에는 신공왕후가 세웠던 야마타이(邪馬台)정부가 망한 후
일정한 주도 세력이 100여 년간 존재하지 않다가 근초고왕 때 비류계 응신(이름 호무다, 譽
田)을 왜열도로 보내어 재 정벌하게 하여 그 기반을 이미 구축한 바 있었기에 대소 1000여
척의 응신의 선단이 AD 396년 12월 북큐슈 쓰쿠시(筑紫) 지역에 도착하자 가야계 임나(加
那), 야뫼도(山門), 웅습(熊襲)등 주변국들이 조공을 보내 알현하였다.
AD 397년 정월 응신 일행은 북큐슈를 떠나 日向國(현 미야자키현)을 거쳐 기내(畿內, 오오사카)지역에 도착한 후 백제 담로 통치지역이었던 하내왕조 대별국(大別國)으로 들어가 임시정부를 세웠다가 몇 년후 이웃 나라(奈良)지역으로 이주하여 나라백제 망명정부를 선언하게 된다(AD 400년경).
응신은 이곳 나라 망명정부로부터 백제의 모든 담로국을 친정한다고 통보하니 천황의 어명을 받은 주위 담로왕들은 앞으로의 정책방향을 알고자 사신들을 파견하였다. 이때 그 중에는 멀리 한반도 백잔국에서 온 사신도 있었는데 백잔 아신왕이 광개토대왕과 군신관계 맹
약을 맺은 사실을 뒤늦게 안 응신이 이는 정치적 배신행위라고 백잔국 사신을 크게 문책하
자 아신왕의 항복은 천황의 망명소식과 더불어 백제군의 사기저하로 패색이 짙어지자 성(城)과 백성을 구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사실을 강변하면서 형제국 관계 복원을 간청하였다. 이것이 광개토대왕 비문(영락 9년 조)에 있는 백잔이 맹세를 위반하고 왜와 화통했다(百殘違誓與倭和通)는 역사적 사실을 가리킨다. 그러자 나라백제의 응신 천황은 양국의 정치적 연합관계가 회복되기 위하여 아신왕의 친자를 볼모로 나라백제에 보낼 것을 요구하자 AD 397년 5월 백잔 아신왕은 자신의 아들 전지 태자를 질자로 보내는 대신 한반도 내의 옛 백제 땅-침 미다례(현 제주), 현남(차령 산맥 이남), 지침(차령 산맥 서쪽), 곡나(산동 대륙 백제 지역), 동한지지(현 경남 해안)를 할양 받게 된다. 그 후 백제 계 양국간의 화평 관계는 태자를 포함한 왕의 친인척들을 질자로 보내면서 이백여 년 간 지속된다

나라(奈良) 백제
응신(應神)의 대반격

한편 나라백제는 동쪽의 강력한 하이 족과 큐슈 남동쪽 일향국 세력을 제압하고 명실공히
왜열도의 주인이 되었다. AD 403년 당시 백제 유민의 도왜 책임자 궁월군(弓月君)이 나라 천황궁에 건너와 약120현민(대략 일만오천명 규모)이 신라 정부의 다물 임나(부산) 항구 폐쇄로 억류되어 포로 된 채 왜열도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고 보고하자 임나 항구를 신라에게 넘겨 준 고구려에 대해 응징하고자 총동원령을 내려 공격을 감행하였다(AD 404년, 갑진왜란).
즉 나라백제와 백잔국, 그리고 대륙백제 등은 대연합 수군을 결성하여 과거 광개토대왕이 웅진 거발성을 친 것과 같이 응신의 직접 지휘아래 요동의 북평양(요동반도의 현 요양으로 추정, 여기서 고조선의 왕검성인 옛 평양은 난하 북동쪽 현 승덕지역 추정, 북한의 평양은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정책 때 설치한 예비수도 하평양을 지칭-이처럼 역사적 시기를 달리하여 평양의 위치가 변천하였으나 국내 사학계는 일제의 반도사관에 의거 북한의 평양만 인정)을 기습하였다. 그러나 400여척 규모의 대연합 수군이 발해만을 통과하여 패수(현 태자하로 추정, 일부 학자는 발해만 지역 현 난하로 비정하기도 하지만 국내식민사학자 경우는 북한의 대동강으로 확정)로 진입하였을 때에는 이미 백제의 전령선을 납포하여 공격 첩보를 알아낸 고구려 군이 미리 군선을 연결하여 대기하고 있다가 공격을 퍼부어 백제 연합 선단을 괴멸시켰다.
응신은 북 평양성 공격의 실패로 웅진으로의 복귀가 실질 상 어려워지자 AD 405년 나라백제에서 야마토 왜(大和倭, Daiwa)로 국명을 바꾸게 되고 이것이 일본의 고대국가의 기원이 된다.
고구려 원정이 실패로 끝나자 이번에는 다물 임나항에 있는 백제계 120 현민을 데려오기 위하여 응신은 AD 405년 4월 궁월군에게 병사를 주어 신라 계림근처에 있는 명활산성을 기습하여 처음에는 신라군에 의해 격퇴되었으나 동년 8월, 목도 숙미와 전 숙미 장군을 이만명의 특공대와 함께 파견하여 임나항 탈환을 위한 신라와의 명활성 전투를 다시 전개하였
다.
신라 실성왕은 전세의 불리함을 알고 응신의 야마토 왜와 평화협정을 맺은 후, 임나항을
백제유민의 도왜 출항기지로 내어주고 백제유민 인솔 책임자 습진언(襲津彦)을 풀어주었으며 선왕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未斯欣) 왕자를 오히려 질자로 보내게 된다.
이처럼 임나항은 당시 야마토 왜와 웅진지역과의 정치 교류를 잇는 사활적 이해관계가 있는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신라는 야마토 왜의 임나항에 대한 결연한 탈환의지를 알고 이를 내어 주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이것이 한일 고대 역사의 의문인 임나일본부의 진상인 것이다.
야마토 왜의 응신은 AD 407년 고구려에 대한 복수를 다시 감행한다. 이번에는 기병 속공전으로 전술을 바꾸어 요동반도의 비사성(현 대련)을 집결지로 하여 요동반도를 타고 올라 광개토 대왕이 있는 국내황성으로 급습하여 대왕을 사로잡는 과감한 작전을 세우게 된다.
야마토 왜 일만명, 백잔국 일만명, 대륙백제 일만명으로 차출된 연합 기병대를 구성한 후 신라 명활산성 전투의 명장 목도 숙미를 상장군으로 삼아 지휘 통솔케 하여 비사성을 출발, 황성으로 가기 위해 태산(현 안산)을 넘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고구려의 오만 보기 군과 정면 충돌하였으나 연합기병대의 지휘 혼선으로 참패하였고 요동반도의 백제세력을 거의 잃게
되었다

왜(倭)의 실체와
야마토왜(大和倭)의 발전

우리가 흔히 왜(倭)라는 한자를 옥편에서 찾아 읽을 때 ‘위와 왜’의 두가지 발음이 있음을 알수 있다. 우리가 흔히 일본인을 왜놈이라고 멸칭할 때 쓰이는 왜는 작고 왜소할 矮를 말하는 것으로 倭와는 다른 의미이다. 즉 倭를 ‘위’로 읽을 때에는 위(上)라는 의미로 위족(倭族)이란 자신들이 속한 부족이름을 영광스럽게 표현하는 호칭이다. 여기서 학술대회 김산호 선생에 의하면 일본으로 간 비류 백제계가 야마토 倭로 자신의 국명을 붙인 것은 그 실체가 우리말로는 상족(上族)을 나타내는 것으로 순박하고 고귀한 민족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 倭가 일본에서의 발음은 야마토로도 읽혀져 신성한 태양의 터전이라 간주되었고 달리 다이와(大和)라고 읽혀지기도 한다.
한편 야마토 왜의 응신은 광개토 대왕과의 거듭된 전쟁에서 패하게 되자 웅진 수복의 꿈을 접어두고 나라에 강원궁을 지어 비류 백제계의 확고한 정권을 세우게 되었고 이후 나라를 중심으로 한 아스카(飛鳥)문화가 발전하여 백제 천황가의 전통을 계승시켜 나가게 된다. 응신 천황은 AD 410년경까지 남쪽으로 큐슈 일향(현 미야자키 현)으로부터 북쪽 센다이(仙台)까지 대장정 끝에 왜 열도를 평정하여 국가를 확고하게 정착시킨다. 그 후 AD 425년 야마토 왜의 응신은 송나라로부터 안동대장군 왜국 왕으로 인정받아 왜 열도에 대한 종주권을 국제적으로 승인 받는다. 이처럼 비류 백제계로부터 형성된 천황가는 AD 660년 나당 연합국에 의해 반도에 있던 백제세력이 멸망하자 나당 연합국의 왜열도 침입을 막기위해 백제와의 정치적 연관성을 끊기 위해 AD 670년 천지(天智) 천황이 倭에서 국호를 日本으로 바꾸어 새로운 국가로 변신을 도모하게 된다.
따라서 현재 동북공정 작업으로 고구려를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역사 왜곡하여 남북 통일 후 옛 고구려 영토에 대한 우리의 고토 회복주장을 사전에 막고 자신의 영토로 확보하려는 영원한 이민족 중국의 패권(覇權)주의에 대항하기 위하여서는, 고대 한일관계의 역사적 근원과 양국 민족의 동질성을 밝혀 장래 통일 한국과 일본 양국이 정치적 연합국가 재구축을 시도함으로써 21C 새로운 국가전략을 수립하는 것이 절실한 시점에 와 있다.

〈다음호에 계속됩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사라지고 태자 거련(巨連)이 제20대 태열제 장수대왕(AD 413-491)에 오르게 되었다. 선왕 때 항복하여 한반도에 살아남았던 온조계 백잔국이 군신맹약을 어기고 야마토왜(大和倭)와 다시 연합하여 고구려에 대항해오자 장수대왕은 백잔을 응징하고자 AD 427년 수도를 황성에서 북한의 하평양으로 옮긴 후, 남진 정책을 계속하여 추진하였다.
한편 백잔에서는 아신왕이 죽고 그사이 왜에 볼모로 갔다가 돌아 온 전지왕에 이어, 구이신왕, 비유왕이 거쳐갔고 제21대 개로왕(AD 455-475)이 통치하고 있는 시절에는 온조계 해(解)씨와 비류계 진(眞)씨의 세력이 약해지고 개로왕의 이름 부여경(扶餘慶)에서 엿볼 수 있듯이 부여씨로 세력 교체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고구려가 보낸 첩자 중 도림의 계략에 빠진 개로왕은 궁궐을 수축하고 국고를 탕진하여 국정이 피폐해지자 장수대왕은 백제 정벌의 호기를 잡게된다. 또한 개로왕의 실정으로 당시 상좌평 문주(文周)와 목협만치(木協滿致) 장군이 결탁하여 군부를 장악하고 정권 탈취를 모의하는 혼란한 상황에 이르자 세력의 열세를 느낀 개로왕은 대륙백제 상곡지방 주둔 현지 사령관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AD 461년 대화왜에 질자로 보내져 있던 아우 곤지(昆支)를 급히 부르게 된다. 그러나 이미 중신들의 반역 모의를 분쇄할 만한 왕권을 상실한 개로왕은 자기아이를 임신한 젊은 후궁을 곤지에게 맡겨 대화왜에 보내 이 상황을 전하게 한다. 곤지는 첩으로 얻은 개로의 후궁과 더불어 왜열도에 들어가던 중 북큐슈 축자 앞 각라도에서 폭풍을 만나 섬에서 후궁이 후일 무령왕이 될 아이를 분만하게 되자(AD 462년) 왜열도에서 자신의 양아들로 키우게 된다(삼국사기에는 대화왜의 실재를 부인하기 위해 분만된 아이가 산모와 한반도로 되돌아와 산 것으로 서술).
한편 고구려 장수대왕의 공격이 임박한 것을 예감한 개로왕은 반대세력인 상좌평 문주와 목협만치 장군을 신라로 보내 구원병을 청하게 하고 조미걸취 장군도 비류계 웅진으로 파견하여 현지 담로왕들의 지원을 요청한다. 드디어AD 475년 장수대왕은 백제 정벌을 단행하여 먼저 아차산성을 차지한 후 한강(아리수)을 건너 북성(현 몽촌토성 추정)을 포위하여 초토화시킨다.
남한산성을 달아나던 개로왕은 자기에게 불만을 품고 고구려에 투항한 백제계 장수인 고이만년과 재증걸루에게 붙잡혀 아차성으로 끌려가 비참한 죽음을 당한다. 이로써 BC 7년에 시조 온조대왕이 세운 한성백제는 통산 20대 왕조, 482년만에 역사에서 사라지는 것으로 보는 것이 민족사학계의 정설이다.
반면 국내 사학계에서는 혈통이 달랐던 문주를 개로왕의 아들로 둔갑시킨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거, 온조 백제 왕국이 계속 존재한 것으로 보나 실은 문주는 역성혁명으로 왕위를 찬탈한 모(牟)씨 성을 가진 새로운 인물이었다(이는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이 한반도에 잔존한 온조계 백제 위주로 만세일계를 만들려고 했던 의도적인 역사서술이었다).
상좌평 문주와 목협만치는 신라의 원병 결정이 늦어져 뒤늦게 일만명의 구원병과 함께 올라 왔으나 이미 왕과 자식들은 모두 죽었고 한성은 폐허로 변하여 있자 과거 비류백제의 수도였고 도성과 진(眞)씨계 담로 지지세력이 있던 공주로 천도하게 된다.
공주에 온 문주왕은 개로왕의 후계자가 없음을 알고 자신이 왕위에 올랐으나 대화왜 정부는 그의 왕위를 인정하지 않았고 대신 곤지를 신왕으로 삼아 공주로 보내었다. 허지만 문주왕이 왕위 양도를 거절하고 곤지를 내신좌평으로 삼자 곤지는 당시 병관좌평 해구(解仇)와 힘을 합하여 문주왕을 제거하려 하였지만 오히려 이들 세력에게 밀리자 곤지와 목협만치는 AD 476년 왜열도 나라로 망명한다(여기서 삼국사기는 곤지의 사망으로 서술). 이번에는 병관좌평 해구가 문주를 왕위 찬탈의 이유로 살해한 후 자신이 한성백제를 재건하려 하였으나 진씨계 담로세력 진남(眞男), 진노(眞老)등은 일단 문주의 어린 아들 삼근왕을 세운 후 해구세력을 토벌하고 삼근왕마저 제거하였다.
그런 후 진노 장군은 대화왜 정부에게 왕위 계승자를 요청하자 대화왜 응략천황(곤지와 동일인물이라 주장하는 설도 있음)은 곤지의 둘째아들(모대 牟大-남제서, 말다 末多-일본서기)을 왕으로 결정하여 AD 479년 4월, 왜열도 나라에서 공주로 보내는데 이가 곧 제24대 동성왕(AD 479-501)이다(삼국사기에서는 동성왕의 출신에 대한 자세한 언급 없이 갑자기 삼근왕 다음으로 나타나는 데 이는 대화왜와의 관계를 끊고 온조계 위주로 만들려는 또다른 시도를 엿볼 수 있다).

왜열도 대화왜서 온
두명의 백제 왕들

동성왕의 대륙백제 경영과
무령왕(武寧王)의 북방정책

웅진에서 젊은 나이로 즉위한 동성왕은 초기 곤지의 섭정 하에 있었으나 점차 군왕의 위엄을 갖추고 독자적 정치를 하게된다. 국내적으로는 AD 487년 임나항의 담로왕 기생반숙미가 삼한왕을 자칭하면서 백제의 군량 수송을 방해하고 보급품을 횡령하자 동성왕은 고이해 장군을 파견하여 그 세력을 토벌하고 임나항의 지배권을 확보함으로써 자유 이민항으로서 기능을 회복시켰고 신라, 가야와 군사동맹을 결성하여 고구려의 남진정책에 대항하였다.
한편 국제적으로는 AD 488년 중국 하북성 일부, 산동반도 지역의 백제 세력에 대한 북위(선비족 탁발씨가 AD 386년에 세운 국가)의 공격이후 498년까지 10년동안 총 다섯 번에 걸친 대외적 전쟁을 모두 승리로 이끌어 북위에게 넘어간 옛 요서 백제 영토를 수복하였다.
당시 국제정세는 고구려와 북위가 북부동맹을, 대화왜·백제·남제가 남부동맹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AD 488년 북위의 침입을 막기위해 동성왕 자신이 산동반도 수도 내주( 州, 현 옌타이)로 직접 가서 격퇴하였다. 그런데 동성왕에 패한 북위가 AD 489년 외교상 적대국 관계였던 남제와 정치우호 조약을 맺자 백제와 남제와의 동맹관계는 균열이 생기게 되었고 국제 외교상의 변화에서 AD 490년 북위의 고조는 보기군 10만명을 동원하여 하북성 지역의 백제군을 공격해왔다.
동성왕은 장군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 등을 파견하여 북위 군대를 크게 격파한다. 이 당시 동성왕의 북위군 격퇴 기사가 남제서(백제전)에 <경오년 위나라 군대를 밤에 공격하니 북위군이 무너져 총퇴각하였고 백제군이 적을 뒤쫓아 마구 무찌르고 목을 베니 적의 시체가 들판에 가득하고 피가 온땅에 붉게 물들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去庚午年... 領軍逆討 宵襲霆擊 匈梨張惶 崩若海湯 乘奔追   屍丹野
한편 남제는 왕위찬탈 등 내부혼란으로 국력이 약화되자 백제는 남제에 대한 지배적인 외교자세를 갖고 AD 495년 남제에 외교표문을 보내 과거 AD 490년의 북위 전쟁을 재확인하면서 당시 전쟁승리 유공자들에 대한 작위를 하사하고 대륙백제 각 영지에 백제 직할 태수를 임명한 사실을 통보한다(그림참조--------고딕).
경오년 전쟁에서 패한 북위는 AD 493년 문제때 수도를 평성에서 낙양으로 천도하자 백제는 산동반도와 회수이북 제남지역에 강력한 세력을 대륙백제 멸망시까지 70여년간 유지하게 된다. 그후 계속해서 북위는 각각 AD 494년, AD 497년, AD 498년 대군을 동원하여 백제에 전쟁을 걸어왔으나 백제와 남제 연합군에 참패하게되자 제남 회수지역을 백제에게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한편 북위와의 전쟁으로 인해 동성왕이 공주를 오랫동안 떠나있으면서 AD 500년 산동 내주에 임류각 궁궐을 짓고 통치하게되자 공주 왕실과 토착 담로세력들은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위해 위사좌평 겸 가림성주였던 백가( 可)를 동성왕에게 보내어 대왕이 공주로 되돌아 와 통치해 줄 것을 간청했으나 임류각의 호화로운 생활에 젖어있던 대왕이 이를 거절하였다. 이때 백가가 공주의 통치를 자신에게 맡겨 달라고 하자 대왕이 대노하여 백가를 죽이려하니 백가는 돌연 자객으로 변해 대왕을 시해하고 만다. 이로써 근초고왕에 이어 중국대륙 내에 광대한 백제식민지를 건설한 동북아의 영웅 동성대왕은 AD 501년 12월 어이없게 자신의 신하의 칼에 맞고 죽는 어이없는 최후를 맞게 되었다(동성대왕의 왕릉은 현재 산동반도 내주부근에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대왕의 피살소식이 공주와 나라에 전달되자 대화왜에서는 곤지의 양아들 무령왕을 후임왕으로 임명하여 백제에 새로운 왕으로 보내게된다(삼국사기에서는 이복 형제간인데도 불구하고 무령왕을 동성왕의 차남으로 기록하여 부자지간으로 왕위 계승한 것으로 기록).
대왕을 죽인 백가가 무령왕의 취임을 거부하고 반란을 도모하자 무령왕은 우두성 성주 해명을 시켜 이들 세력을 물리쳐 죽이고 공주에서 제25대 신왕(AD 462-523)으로 등극하게 된다.
무령왕은 AD 502년 달솔 우영(優永)을 보내 고구려에게 빼앗긴 수곡성를 탈취하여 북방의 영토를 황해도까지 넓혔고 AD 503년, AD 506년 고구려와 말갈족의 연합군을 연속으로 격퇴하였으며, 섭라(섬진강 주변의 가야땅)를 놓고 벌인 고구려와의 전투에서도 승리하였다.
대화왜와 친밀한 관계를 위해 나라에서 어린 시절 곤지 밑에서 형제같이 자란 이복 동생 계체(繼體)천황에게 AD 503년 백동 200관으로 만든 청동경을 보냈고 AD 507년 자신의 딸 수백향(手白香)을 천황의 왕후로 삼으니 대화왜는 웅진백제의 부마국이 되었다(그래서 AD523년 62세로 무령왕이 붕어했을 때 대화왜의 계체천황은 이를 몹시 애도하여 금송으로 특별히 만든 관을 보내 왔던 것이다-국립 공주박물관 소장).
한편 섭라에 대한 가야와의 영유권 분쟁이 국제화되자 AD 513년 왜에 사신을 파견하여 왜조정을 설득시켜 섬진강 무역중심지 섭라에 대한 백제의 주권을 인정받는다. 한편 당시 공주에는 천황계 진씨들이 대거 왜열도로 이민해가고 있었기 때문에 졸본부여계 대신 남부여계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어서 무령왕은 AD 509년 백제유민 보호정책을 펼쳐 도왜 이민을 제한하여 인구감소를 막았고 임나지역에서 유랑하고 있는 백제유민들을 백제 본관지에 재편입시켜 귀향조치 하였다.
이로써 왜열도에서 온 두명의 왕들은 백제를 강국으로 일으킨 치세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아 남제에서는 동성왕을 진동(鎭東)대장군 백제왕으로, 양나라에서는 무령왕을 영동(寧東)대장군 백제왕으로 불려졌던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됩니다〉

 

 

 

“대륙백제의 몰락은 백제인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성왕은 이같은 상황을 타개하고 공주 토착세력들의 견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수도를 부여로 옮기고 국호도 남부여로 바꾸었다”

“금동 용봉 봉래산 대향로는 위덕 태자가 신라 관산성(현 옥천 부군)을 공격하다 신라군의 기습을 받아 전사한 선왕 성왕을 추모하기 위해 속죄의식으로 만들어 바친 향로”

AD 523년 무령왕이 붕어한 후 공주에서는 강력한 지도력을 갖춘 군주를 잃어 점차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옛 졸본부여 비류백제계 진씨 세력들은 무리를 지어 왜열도 대화왜로 이민을 계속하였고 공주의 토착인구는 계속 줄어가고 있었다.
무령왕의 아들 성왕이 신왕으로 즉위할 즈음에는 이제 공주에 남았던 주력 세력들은 남부여계 족속으로 대화왜의 지명을 받은 비류계 진씨 왕이나 온조계 해씨 왕들을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이 못되었다. 또한 임나지역 4현의 영유권 문제로 가야의 구형왕은 혼인 정책을 써서 백제와 등을 지고 신라와 정치적 제휴를 하자 백제, 대화왜, 가야의 삼국 혈맹관계는 점차 무너지고 있었다.
더욱이 고구려는 백제를 응징하기 위하여 군사적 압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신라는 이와 같은 정치적 역학관계를 이용하여 영토확장의 기회를 포착하려고 하였다.
이런 와중에서 남부여계 신세력파인 제26대 성왕(AD 523-554)이 등장하여 대륙백제의 영토를 확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이에 고구려군이 AD 523년 8월에 수만의 군사를 이끌고 대륙백제를 선제 공격해 왔을 때 좌장 지충에게 기병 일만명을 주어 패수에서 고구려 군사를 격퇴시키게 하였다. 그렇지만 AD 529년 고구려 안장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대륙백제의 북쪽 요새인 혈성을 함락시켜 버렸고 그 이후 3년간 백제의 대륙군은 고구려 군에게 계속 밀리다가 결국 AD 532년 대륙백제군의 대패로 대륙 기지를 거의 상실하는 위기에 이른다.
대륙백제의 몰락은 백제인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성왕은 이같은 상황을 타개하고 흐트러진 민심을 새롭게 하면서 또한 공주의 기존 토착세력들의 견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AD 538년(성왕 16년) 수도를 부여 사비성으로 옮기고 국호도 남부여로 과감히 바꾸었다. 이는 향후 남부여국이 백제가 부여의 후예라는 점을 천명하고 고구려가 차지한 부여의 옛 영토를 되찾겠다는 북진정책을 표명한 것이었으며 한편으로는 왜열도 대화왜와는 직접적인 정치간섭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정치 노선을 갖추고 국정을 주도해 나가겠다는 상징적인 의미도 있었다. AD 541년 대화왜에서 임나항을 임나일본부(그 당시 일본이라는 국호가 성립되기 전이었으므로 후에 일본서기를 개작할 때 일본을 추가해서 쓴 것으로 추정)로 승격시키고 길비신(吉備臣)을 초대 장관으로 파견하여 당시 임나항에 주둔하고 있던 남부여국 군령성주에게 임나항 관할권을 되돌려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남부여 측은 대화왜 정부에 뜻을 따를 의사가 없어 양자간 협상이 어렵게 진행되었으나 마침내 AD 544년 남부여국의 의사가 잘 반영되어 합의가 성립되었다. 즉 임나항의 통치권을 종전대로 남부여 측이 담당하고 낙동강 하류지역 신라와 안라(현 함안)간에 위치한 6성에 남부여군이 배치되는 대신에 임나항의 왜국 이민선의 출입을 보장하고 대화왜에서 파견된 임나 주둔군 500명에 대한 군사 보급을 남부여 측이 맡기로 하자 대화왜 정부는 길비신 등 파견 신하들을 즉시 왜국으로 소환하였다. 허지만 임나 지역을 놓고 주변국 신라, 가야, 대화왜의 정치 외교적 공방과 대립으로 성왕의 북진계획은 미뤄지고 있었는데 AD 548년 정월 고구려가 동예족을 앞세우고 한강 북쪽 독산성을 공격해 오자 신라군의 이사부 장군의 도움을 받아 겨우 패퇴시켰다.
3년 뒤 AD 551년 당시에는 고구려가 돌궐족의 침입으로 신성과 백암성이 포위되었고 도성이 위협받는 상황이어서 이때를 노려 성왕이 직접 수만 병력을 이끌고 신라 가야의 연합군과 합세하여 고구려가 장악하고 있던 한성 지역을 쳐서 되찾았고 양군의 전투 공방 끝에 이들 백제군은 고구려의 하평양(대동강 유역)까지 진격하여 6개의 군을 회복하고 신라는 한강유역과 죽령 북방의 10개의 군을 얻는 큰 성과를 얻게 되었다.

신라의 융성(AD 553년)과
가야·임나의 멸망(AD 562년)

정치적 불안을 느낀 백제인들의 왜열도 이민이 본격화되자 남부여국은 갈수록 국력이 약화되었고 돌궐군이 물러난 후 고구려가 전열을 정비하고 영토 회복전을 개시하자 이런 국제정치 분위기를 타고 신라 진흥왕은 오히려 고구려와 손을 잡고 남부여에 도전하고 나섰다. AD 553년 조국애로 가득찬 화랑군을 앞세워 신라 진흥왕은 한강 유역 이북의 백제영토를 공략하여 이를 탈취하니 옛 신라 서라벌 고토를 약 1500년 만에 되찾게 되었다.
신라 세력의 약진에 남부여 성왕은 AD 553년 자신의 공주를 진흥왕과 결혼시켜 동맹을 맺고 신라와 굴욕적인 화친관계를 도모하였으나 진흥왕이 배신하여 고구려와 군사적 동조관계를 맺고 남부여국의 동북부 지방을 침탈하였다. 결국 성왕은 AD 554년 대화왜의 파병 지원을 받아 신라에게 빼앗긴 땅을 되찾기 위해 장군 가량(加良)을 대동하고 신라의 관산성(현 옥천 부근)을 직접 공격하다가 신라군의 기습을 받아 오히려 전사하고 말았다.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민족 사학자가 주장하는 사실을 살펴보아야 할 것은 일본 나라현 호오류우지(法隆寺) 본존 동원(東院) 몽전(夢殿)의 구세관음 비불상(救世觀音 秘佛像)이 현재 알려진 대로 가공인물인 쇼오토쿠 태자(聖德太子)의 상이 아니라 백제 성왕의 얼굴과 몸을 표현했다는 것으로, 이는 신라 전투에 선봉에 선 태자가 신라 김무력 장군에게 포위되자 아들을 구원하려고 몸소 군사를 이끌고 오다가 아깝게 전사한 성왕을 추모하기 위하여 그 아들 위덕(威德)태자가 선친을 애도하면서 만든 등신불이라고 역설한다.
또한 불상과 함께 위덕 태자는 선왕을 추모하는 속죄의식으로 향로를 만들어 바치는 데 이것이 1993년 12월 부여 능산리 고분 옆 절터에서 발굴된 금동 용봉 봉래산 대향로라는 주장으로써 우리는 이들 예술작품에서 웅혼한 백제 문화의 멋과 향기를 맛볼 수 있다.
한편 기세가 오른 신라군은 AD 555년 남쪽의 가야동맹을 와해시킨 후 AD 562년 고령에 있는 대가야마저 물리쳐 통합 귀속시켰고 같은 해 계속해서 임나항을 공격하여 이를 봉쇄하자 이로써 임나항은 응신 천황 도왜(AD 396년)이후 160여년 만에 왜열도 이민 출항기지로서의 역할이 막을 내리게 되었다. 한편 가야연맹 세력도 멸망하자 가야인들은 백제인과 마찬가지로 선주세력이 있던 왜열도로 탈출해 나가니 왜열도에서 아야(安羅)씨를 이루었고 고대 백제인들과 함께 일본고대사 형성에 중대한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다.

대륙백제의 멸망(AD 576년)

졸본부여계 웅진백제가 점차 한반도의 남부여국과 왜열도의 대화왜 정부로 양분되고 성왕 사후 걸출한 지도자가 나타나지 않은 채 백제세력이 약화되자 고구려의 평원왕은 이 기회를 타고 AD 572년 사위 바보 온달장군을 보내 대륙백제를 공격하게 한다.
온달장군이 이끄는 고구려 군이 요서 지역의 갈석산을 빼앗고 요충지 유림관(현 북경 근처)마저 토벌하니 BC 18년에 세웠던 발해만 지역(옛 대방고지)의 고대 백제 영토는 약 590년만에 고구려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이어서 AD 576년 북제의 종주국 역할을 했던 대륙 백제가 고구려에게 일방적으로 무너지자 이웃에 있던 북주의 무제는 이때를 노려 북제의 서경, 진주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그러나 한반도 남부여국에서는 이 사실을 알고도 집권을 놓고 잔존 졸본부여계 진씨와 남부여족간의 내부갈등과 신라와의 전투에서 국력이 소진되어 대륙백제를 구원할 군사를 파견할 능력을 상실하였다. 북주의 무제가 계속하여 북제의 왕성인 업성을 공격하자 드디어 북제는 항복하여 북주와 통합되었다.
북주 무제는 이제 한반도 백제 세력이 더 이상 대륙백제에 대하여 관여할 힘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산동반도에 있는 백제 식민지 세력마저 격파하자 이로써 남부여국은 대륙백제 관할 발해만 지역과 산동반도 모든 지역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런 후 양자강 상하구에 위치했던 남쪽의 백제 식민지 성양군, 광릉군 역시 북쪽의 요서군, 진평군 백제 식민지의 상실로 이들과 서로 고립되어 분리되자 중국 남쪽에 위치한 진(陳)이 쳐들어와 이들마저 병합되자 대륙에 있었던 백제 식민지 세력은 모두 멸망하게 되었다.(그림참조---------)
중국 통전(通典)에서는 대륙백제에 대해 <성밖의 백제 잔류민들은 차츰 모든 기력을 잃고 돌궐족이나 말갈족으로 투항해 흩어졌으며 대륙백제의 왕 부여숭과 부여씨 군장들은 멸망해 버린 옛 영토로 돌아갈 수 없어서 모두 소멸되고 말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다음호에 계속됩니다----〉

※지난 699호 ‘비류백제의 실체를 찾아⑤’ 내용중 3단 상단부 ‘응락천황은 곤지의 둘째아들인…’은 ‘웅락천황’의 오기였기에 바로잡습니다. 또 4단 하단 ‘백가( 可)를 동성왕에게 보내어…’의 공란 한자는 ‘초두 밑에 흰백’이었으나 편집상 오류로 누락되었음을 알립니다.




“당태종과 신라 김춘추는 양국 군사동맹을 맺은 후 남부여부터 침공한후 고구려를 공격하기로 전격 합의하였다. 그러나 나당 동맹의 대가도 수월치 않아 신라는 독립적인 연호를 포기하고…”

“김유신 장군은 뇌물로 매수한 남부여 좌평 임자를 통해 무녀 금화를 의자왕에게 접근시키는데 성공하자 왕은 그녀의 점술에 어리석게도 속아넘어가 충신 성충과 윤충형제를 감옥에 가두고…”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가야연맹까지 붕괴시킨 신라의 국력이 급상승하게 되자 남부여에서는 무왕과 신라 선화 공주사이에서 태어나 왕위에 오른 제31대 의자왕(AD 641-660)때에 이르러 동서전쟁으로 격화된 선왕의 한을 풀어드리고자 즉위 후 AD 642년 상좌평 부여 성충(成忠)과 가잠성(현 괴산) 성주 계백(階伯) 장군을 소집하여 먼저 신라 제1의 요충지 대야성(현 합천)을 빼앗은 후 계속하여 옛 가야 영토였던 지역의 40여 개의 성과 식읍 들을 차례로 점령하였다.
이 사건으로 신라의 김춘추는 의자왕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어 고구려의 태대막리지 연개소문을 찾았고 이때 마침 남부여에서도 신라침공의 배경을 외교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성충을 고구려에 보낸지라 삼국간 외교 회담이 열리게 되었다.
신라 측은 남부여가 탈취해 간 영토의 즉각 반환을 요청하였으나 남부여 측은 점령한 곳이 본래 백제의 속국인 가야연맹의 땅으로 신라가 훔쳐간 것을 다시 되찾은 것뿐이라고 주장하면서 맞서게 되어 회담은 결렬되었다.
이에 연개소문은 두 나라가 영토 분쟁을 그치고 오히려 삼국이 대동단결하여 중원의 중화족을 정벌하여 영토를 공평히 나누어 갖자고 주장하니 신라 김춘추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탈출 귀환하였고 반면에 남부여 성충은 고구려와 외교적으로 화친하는데 성공하였다.
한편 앞서 남부여의 무왕은 자신의 딸 보황녀(扶餘寶, 의자왕의 친누이))를 대화왜 서명(舒明, 조메이) 천황에게 시집보내어 양국간 혈연 관계를 유지한 바 있었는데 AD 641년 서명이 갑자기 죽자 황후 보황녀가 즉위하게 되니 이가 황극(皇極) 여왕이었다.
또한 의자왕의 친동생 경황자(扶餘輕)는 당시 남부여국의 일본 외교대표부 역할을 했던 일궁부(日宮部)의 현지 장관을 맡고 있었다. 그후 의자왕은 일궁부 경황자를 나라(奈良)로 보내 친누님되는 황극 여왕을 보필하게 하고 그 대신 아들 풍장(扶餘豊璋)을 일궁부의 군(君)으로 임명하여 파견하여 양국의 외교관계를 강화하였다(도표 참조--------).
한편 대화왜에서는 천황은 상징적 대표 인물이고 정치 실권은 대신이 갖고 있었는데, 백제계 목협만치(곤지와 함께 도왜한 백제 장군)의 대화왜 후손으로 창씨 개명한 소아가(蘇我家)가 막강한 세력을 쥐고 있어 천황가를 위협하고 있었다.
황극여왕은 아들 중대형(中大兄, 후에 천지 천황으로 등극)을 통해 신라계 겸자련(鎌子連)과 의논하여 소아가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신라 김춘추가 구원병을 파견하도록 요청하였다. 신라 김춘추는 남부여의 왜열도 배후세력을 치고 신라의 지지세력을 구축하기 위해 대해인(大海人)장군을 원정군 대장으로 출병시켜 왜열도 신라지역인 단마(但馬, 현 도톳리 현)에 상륙시킨 후 일명 새잡기(鳥取)작전을 벌여 예상을 깨고 일궁부 풍장군의 아스카군을 누르고 아스카에 무혈입성 하게 된다.
AD 649년 신라 대해인은 먼저 소아입록(蘇我入鹿) 대신을 제거하고 황극 여왕 대신에 경황자를 새로운 효덕(孝德)천황으로 세우고 수도를 난파(難波, 나니와 현 오오사카)로 옮기고 대해인의 자문을 받아 신라식 정치제도와 연호를 사용하는 대화개신(大和改新)을 단행하였다.

나당 연합군의
남부여 침공

남부여와 신라가 서로 물고 물리는 전투를 계속하던 AD 648년, 신라 김춘추는 왜국에서 신라 세력을 구축한 후 본격적인 남부여국 공략을 위해 직접 당나라 장안성으로 들어가 당태종을 만난다.
당태종은 이미 AD 645년 고구려군에게 안시성 전투에서 참패를 당한 후 장안성까지 추적한 연개소문 장군에게 항복을 한 상태여서(한단고기 태백일사의 고구려 본기- 이 전투로 당나라는 외교적으로 고구려의 속국임을 인정) 신라 일행을 군왕으로 예우 영접함으로써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하였다.
당태종과 신라 김춘추는 양국 군사 동맹을 맺은 후 먼저 남부여부터 침공한 후 고구려를 공격하기로 전격 합의하였다. 그러나 나당 동맹의 대가도 수월하지 않아 신라는 독립적인 연호를 포기하고 당의 연호 영휘(永徽)를 사용하기로 하였고 신라 관원들의 복식도 당의 복식을 따라 입기로 정했으니 이는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에도 당이 한반도를 지배하려는 술책이 이미 노출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AD 649년 남부여 사비성에서는 나당 동맹 회담의 결과를 주시하면서 먼저 일궁부 자신의 아들 풍장이 주축이 된 백제세력은 백치(白雉, 흰꿩) 반정을 통해 신라세력을 기반으로 오른 친동생 효덕 천황을 폐위케 하였고, 수도를 아스카로 옮겨 친누이 보황녀를 다시 제명(齊明)여왕으로 복위시켰다.
이어서 신라 김춘추가 고구려 포위망을 뚫고 무사히 탈출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의자왕은 나당 연합군이 쳐들어오기 전에 계백 장군에게 전 부여군을 동원시켜 좌장 은상(殷相)으로 하여금 신라를 공격하게 하였다. 초기 신라군의 전력열세로 남부여군에게 서부 전선의 석토성 등 7개 주요한 요새들이 함락되자 신라도 왜열도 파견 조취군 중에서 대해인 별동군만 남기고 모두 불러들여 긴급 대항하는 처지였다.
남부여국의 압도적인 승세 속에서 양국의 정치적 변화가 생겼으니 AD 654년 신라에서는 태자시절부터 국제적 외교 감각과 경험을 갖춘 김춘추가 태종 무열왕으로 등장하여 처남인 김유신을 서불한(舒弗翰, 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병권을 장악하자 정권이 안정된 반면에 남부여국 의자왕은 남부여 야마토 왜의 연합이 회복되고 신라에 대한 초창기 공격의 승리로 신라성 30여개를 탈취하자 전승 무드와 자만에 젖어 태자 부여효(扶餘孝)를 위해 태자궁을 짓고 대왕포(낙화암 근처)에 망해정을 설치하여 주색 가무에 빠지자 부여성은 환락과 사치에 빠져 국가 기강이 문란하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신라 김유신 장군은 뇌물로 매수한 남부여 좌평 임자(任子)를 통해 무녀 금화를 의자왕에게 접근시키는 데 성공하자 왕은 그녀의 점술에 어리석게도 속아넘어가 충신 성충(成忠)과 윤충(允忠) 형제를 감옥에 가두고 좌평 흥수(興首)마저 귀양보냈으며 군신인 서부은솔 복신(福信)마저 파면시키게 된다.
신라 무열왕은 반간계가 성공하자 김유신 장군을 불러 군사 총동원령을 내리고 한편 태자 법민(法民)을 당나라로 보내 당고종의 왕비 측전무후에게 접근시켜 동맹군 파병을 요청하게 한다(AD 659년).
당고종은 고구려와 백제를 동시에 공략하기로 정하고 북방군은 설필하력이 고구려를, 남방군은 소정방이 신라군과 연합하여 남부여를 각각 치기로 결의하였다.
드디어 AD 660년 3월 신라 왕자 김인문과 당장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 13만명이 덕물도(현 덕적도)에 도착하자 태자 법민이 군선 100척을 거느리고 맞았고 양군 연합군은 남부여국을 수륙 양면으로 침략하였다.
신라의 대각간 김유신은 5만명의 군사로 대야성을 출발하여 탄현(현 보은 근처)을 통과 부여 사비성으로 공격하고 있었고 태자 법민은 당군과 함께 기벌포(백마강 입구 서천)로 진격, 저항없이 상륙하였다.
탄현과 기벌포를 사수하라는 충신 성충은 이미 죽었고 남부여군의 사기가 떨어진 상태에서 노장 좌평 의직(義直)만이 수군으로 백강의 입구를 막으려 했으나 중과부적으로 돌파 당하게 되었다. 또한 탄현을 아무 저항없이 넘은 제2군 김유신 5만 군사는 계백 장군의 5천 결사대의 항전으로 황산벌에서 고전하였으나 어린 화랑 반굴과 관창의 희생으로 극적인 승리를 하게 되었다.
한편 김유신이 싸우고 있는 동안 제 1군 신라 법민 태자와 당군 우군 지휘관 김인문의 연합군은 부여 사비성을 이미 함락하였으니 의자왕의 개인적 어리석은 독단과 정치적 방심이 국가 멸망의 화를 부른 것이었다.
한편 의자왕이 태자 부여효와 함께 부여성과 백성을 버리고 다급하게 웅진성으로 도피하자 왕자 부여태와 부여융이 항전없이 항복하였고 간신 임자가 보낸 군사에 의해 의자왕과 태자일행도 곰나루산성에서 달아나다 사로잡히자 당나라 소정방은 백제 재건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해서 김춘추와 김유신의 허락을 받아 왕과 태자, 왕족, 신하, 장령등 93명을 포함 1만2807명의 백제인 포로들을 당의 수도 장안으로 압송하였다.
그리고 남부여에는 당장 유인원과 당군 1만명, 신라 왕자 김인태와 신라군 7000명으로 구성된 웅진 도독부를 세워 성을 관리하게 하니 이로써 남부여 세력은 왜열도의 백제 세력만 남기고 소멸하게 되었다.(AD 660년)


〈다음호에 계속됩니다〉

 

 

남부여 다물군의 주역은 무왕의 조카인 임존성 성주 부여복신(扶餘福信)과 서부달솔 흑치상지(黑齒常之) 장군이었다. AD 661년 다물군은 진현성 탈환을 시작으로 하여 웅진 도독부 유인원 부대의 일부를 포위하여 전멸시켰고 승병장 도침(道琛)은 백마강 근방 주류성을 점령하여 부여 사비성과 웅진성 사이의 바닷길을 봉쇄했다.
이에 복신 장군은 주류성(周留城)을 임시 수도로 받아 잔존 성주들을 총집결시켜 우장군에 복신, 좌장군에 도침을 임명하여 다물군의 조직을 재정비했고 대화왜와 탐라 담로국에 원군을 요청했다.
한편 의자왕의 패배 소식과 당나라 포로로 끌려간 사실이 아스카 정부에 알려지자 제명여왕(의자왕의 누이)은 남부여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즉시 수도를 아스카에서 큐슈 나대진(나노쓰, 현 후쿠오카)으로 천도하여 아들 중대형 왕자와 신라계 겸자련에게 군선제조와 출병준비를 진행시켰다. AD 661년 복신 장군의 다물군이 왜 구원병과 함께 사비성을 총공격하였을 무렵 신라 무열왕도 이런 치열한 전투에 직접 가담하였다가 금마군(현 전북 익산)에서 전사하였고 또한 다물군을 지원하던 야마토 왜의 제명여왕도 백제 복국을 유언으로 남기고 지병으로 별세했다.
복신은 남부여 전역을 다물군이 거의 확보하게 되자 나라를 통솔 할 왕이 없음을 인식하고 사신을 왜열도 나대진으로 파견하여 의자왕의 아들 일궁부의 풍장이 신왕으로 오기를 요청하였다. 이에 일궁부의 풍장 군은 여왕의 뜻을 좇아 동생 부여용(扶餘勇)을 야마토에 남겨 자신을 지원하게 한 후 남부여국을 재건할 목적으로 군선 170척과 군사 17000명을 이끌고 남부여 국왕으로 다물군을 지휘하기 위해 귀국하게 된다.
한편 남부여 복신 장군의 다물군이 웅진성 좌우 칠갑산과 계룡산을 탈취하고 당군을 역포위하자 당장 유인원은 고립무원 상태에서 당 고종에게 구원병을 요청하니 이후 당군의 증원군이 제3차에 걸쳐 도착하여 웅진 도독부 구출 작전을 벌이게 되었다.
왜열도에서 귀국한 풍장은 왕위에 올랐으나 현지 사정에 어둡고 다물군의 장수들이 복신 장군의 명령에 따라 이제껏 영토회복 다물전쟁을 해 온 탓으로 풍장 왕의 군 지휘권이 확립되지 않자 왕권을 확보하려는 풍장 왕과 군권을 유지하려는 복신사이는 점차 금이 가고 있었다. 더욱이 모든 다물군의 신망을 받고있던 복신을 시샘하던 도침이 풍장 왕에게 붙어 그를 견제하자 복신은 곰나루성의 유인원과 밀통하고 있다고 의심하던 차에 도침을 반역혐의로 몰아 풍장 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참형에 처한다.
이런 불안한 정국 상황에서 AD 663년 큐슈 나대진을 출발한 군선 400척, 정병 2만7000명으로 구성된 야마토 원군이 도착하자 풍장 왕의 입지는 강화돼 이제 복신 장군을 다물군의 일선 지휘에서 후퇴시키려 하자 복신이 왕명을 거부하고 다물군을 계속해서 이끌려고 하니 풍장 왕은 복신 장군을 마침내 제거하게 된다. 이는 역사의 아이로니(IRONY)로써 풍장 왕을 남부여 왕으로 초청하신 분이 복신 인데 내부 지휘권의 다툼으로 인하여 거꾸로 풍장 왕이 복신을 죽이는 참변이 일어나게 되었다.
부여성 탈환을 눈앞에 두고 다 이긴 전쟁에서 일사불란하던 다물군의 단합은 깨지고 엄청난 전력의 손실을 초래하였으니 이처럼 남부여 자체의 갈등과 분열로 다물 부흥운동이 다시 자멸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또한 왜열도에서 온 풍장 왕이 등장한 소식을 들은 당고종은 이에 맞서기 위해 장안으로 데려 간 태자 부여융을 웅진 대도독 부여왕으로 임명하여 원군 27000명을 이끄는 손인사 장군과 함께 다시 보내자 남부여군들은 어느 편을 자신의 왕으로 모실 것인지 내부분열이 되어 정치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그때 풍장 왕이 복신 장군을 죽인 것에 배신감을 느끼면서 갈팡질팡하던 흑치상지 장군과 그 부하 장수들도 부여융이 상륙하자 전병력과 자기 관할 200여성을 들어 부여융 왕에게 바쳐 항복하였다. 게다가 이들이 서로 합세하여 AD 663년 8월 다물군의 본부 주류성을 총공격하니 성내 다물군은 흑치 장군의 이탈로 우왕좌왕하다가 마침내 항복하게 되었다.
이에 열세에 놓인 풍장 왕은 야마토 수군 400척을 출동시켜 백마강에서 당 수군 170척과 맛 싸우게 하였으나 급조된 야마토 군선들은 자신들의 것보다 거의 10배나 큰 당의 군선에게 화공으로 무참히 깨지고 4번에 걸친 해상전투에서 전멸 당하게 되는데 이것이 소위 일본서기에 나오는 백촌강(白村江) 해전이다.
주류성 항복에 이어 임존성에 주둔한 다물군의 남은 군대와 야마토 육군마저 당군의 포위속에 모두 전멸되자 3년 간 이어진 백제의 다물 전쟁은 끝나게 되었고 이로써 남부여국은 역사 속으로 영원히 사라지게 되었다(AD 663년).

야마토 왜(大和倭)
일본국 변신

남부여국의 광복을 위해 다물 전쟁을 지원했던 대화왜의 부여용과 제명여왕의 중대형 황자는 다물군이 항복하고 백촌강 전투에서 야마토 군마저 패배하여 나라를 잃어버리게 되자 이제는 남부여를 지원한 대가로 나당 연합군이 이를 응징하기 위해 왜열도까지 공격할 것이 예상되었다. 이에 대마도, 일기도, 북 큐슈 축자 지역에 백제식 산성을 쌓고 방어군을 두어 나당 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하였고 한편으로는 정치적으로 이를 해결하기 위한 외교노력도 병행하게 된다.
본국 백제가 이제 망하고 없으므로 왜열도 정부라도 살리기 위해서는 백제와의 정치적 연관성을 정리하고 왜열도 내에 새로운 국가의 실체(Identity)를 이룩하는 것이 시급한 국가정책으로 대두됐다.
그리하여 AD 668년 내란을 딛고 어렵게 천지 천황에 오른 중대형은 국가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신라계 구세력의 대표적 인물인 대해인과 겸자련을 중용하였으며 AD 670년에는 국명을 백제인들이 왜지를 늘 불러 온 대로 ‘해뜨는 땅’, 일본(日本)이라 정하여 새로운 나라를 탄생시키게 된다.
결국 일본이란 국호의 채택은 외교적으로 더 이상 한반도의 백제 연고권을 주장하지 않고 별개의 나라로 살아 남겠다는 정치적 선언이었고 이를 위해 AD 671년에는 전승국 신라와 당나라에 대하여 비단, 명주, 가죽 등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고 전후 처리가 일단락 되었다.
그 후 일본에 와 있는 한반도 출신 가야인, 백제인, 신라인, 고구려인 등 여러 지역 출신들의 인화(人和)와 공동체 의식을 심어주기 위해 그들의 본토 출신지와 정치적 관계를 조명할 수 있는 모든 과거 역사기록을 없애기 위하여 즉 일본과 한반도 역사와의 연결고리를 끊기 위하여 새로운 역사 국서를 기술하게 되는데 AD 720년까지 고사기, 일본서기를 완성시키게 된다.
특히 백제서기를 변조시킨 일본서기는 백제에서 온 초기 기록을 전부 말살하고 일본이 마치 처음부터 왜열도에서 독자적으로 생긴 국가인 것같이 위장하기 위하여 일본국이 하늘에서 천손이 강림하여 생성된 나라라고 서술하여 고대 한일 관계를 말살하고 새로운 신민(神民)사상의 역사관으로 대체한 최초의 역사 왜곡이었다.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 후 AD720년 일본서기를 편찬하면서 한반도와의 관계를 삭제하고 왜열도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것이 일본이라고 주장하면서 과거 일본의 모체가 되었던 비류 백제계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던 사실만은 마치 자신의 역사인양 편입시켜 서술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일본의 탄생이 원래부터 왜열도에서 일어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일본서기는 천손강림 설이나 고대 왕명 및 왕력의 연도 조작을 통하여 한반도에서 건너온 사실을 철저히 배제하면서도, 동일한 국가세력이었던 비류 백제가 역사적 시기만 달리하여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던 사실만을 일본의 역사로 유리하게 채택하는 이중적인 역사왜곡을 하였던 것이다.
이를 일본식 역사해석으로 본다면 한반도 남부를 정복하러 왜열도에서 일본세력이 서진(西進)해온 것으로 보아야 하며 따라서 고대 한일관계의 역사전개 방향을 정반대로 해석하게 된 것이다.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고 주장하는 일본의 소위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설은 작은 의미로는 임나항(부산)에 대한 지배사실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실은 AD 4C까지 한반도에 있었던 비류백제의 가야, 임나등 한반도 남부에 대한 지배역사를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반도 남부는 한반도와 왜열도에서 서로 지배하였다고 주장되는 동일한 지역 즉 서로 다른 역사 시기를 두고 공통으로 겹쳐지는(overlapping) 역사의 현장이 된 것이다.
따라서 국내 사학계가 비류백제 등 고대 한국인들의 왜열도 진출을 밝히지 못하고 한반도 내에서 마한이 변한 것이 백제이고 한반도 안에서만 생성 원인을 설명하려는 기존 역사관을 계속 유지하면서, 동시에 왜열도에서 고대 한국인의 영향 없이 저절로 일본이 형성되었다고 주장하는 일본 사학계의 입장을 현재처럼 수용한다면, (다시 말해 고대 한일양국이 지역적으로 분리된 채 서로 아무런 정치적 연관 없이 독자적인 국가세력으로 각각 발전하였다는 종래의 학설을 그대로 유지한다면), 한일 양국 간의 역사적 마찰과 정치적 분쟁이 언제 또 일어날지 모르며 아마도 불행한 과거가 앞으로 계속 되풀이될지 모른다.
이러한 예는 과거 19C말∼20C초 일본 정치가의 정한론 및 고토회복 주장, 일본 역사학계의 내선일체, 대동아 공영권 등 식민지 지배이론으로 합리화되었던 것이고 한일 간의 불행한 정치 관계를 낳았던 이론적 근거가 되었던 것이다. 또한 몇 년 전 일본 역사 교과서 파동도 이러한 일제시절의 군국주의와 침략주의의 부활의지로 볼 수 있으며 일본을 재무장하려는 맥락의 일환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현재 동북공정을 통한 중국의 역사 왜곡 작업도 한국 등 주변국에 대한 영토 침탈을 합리화하려는 사전적 역사이론 작업의 술책이라고 볼 수 있다. 즉 고구려사를 중국사로 일단 편입해 놓으면 장차 북한 정권이 붕괴 시 북한 지역도 과거 고구려 영토에 포함되었던 것을 감안하여 중국의 고토로 주장할 수 있는 역사적 근거를 남겨두는 동시에 정치 외교적으로 자동 개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치밀하게 준비해 놓은 국가 전략의 한 수단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금번 역사 기고를 통해 기존 한국의 사학계가 고대사의 경우 이를테면 한일 간의 역사 전개가 한반도에서 왜열도로 진행되었다는 역사이론에 대한 한가지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아직도 일제가 심어 논 식민사관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점을 일반 독자들에게 문제 제기하여 경종을 울리고 싶었고 한편으로는 과거 비류백제의 역사 현장에 있는 공주주민에게 고대 한일관계에 대한 명확한 역사적 진실을 알리고 싶은 진정한 의도도 있었다.
끝으로 북한의 파탄과 핵 개발로 인해 한반도 정세가 주변국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상황이 급변할 수 있는 또 다른 위기 국면에 빠진 이때 우리의 잃어버린 고대 역사상에 있었던 여러 가지 경우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을 지닌 분석과 점검을 통해 유연한 대책과 해법을 찾아내어 주변국과의 외교 협력관계를 적절하게 이루어 냄으로써 21C 우리나라를 세계의 유력한 국가의 하나로 부상시켜야만 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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