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大韓)의 기원, 한후(韓侯)
大韓民國, 三韓(진한(辰韓), 마한(馬韓), 변한(弁韓))
시경(詩經) ‘한혁(韓奕)’편과 동한(東漢)시대의 왕부(王符)의 잠부론(潛夫論)에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전국시대(戰國時代) 서주(西周) 왕실과 동성인 희성(姬姓)으로서 한(韓)나라의 제후였던
환숙(桓叔)의 후손과 관련된 성씨는 “모두가 희성(姬姓)의 후예로서 한씨(韓氏)이다. 옛날 (서)주의 선왕(宣王) 때에 또한 한후(韓侯)가 있었으니 그 나라는 연(燕)나라에서 가까웠다” 고 하였다.
옛 시경(詩經)에 “넓고 넓은 한성(韓城)은 연나라 군사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고 하였다. 그 후에 (한후(韓侯)) 한국(韓國)의 서쪽에서도 성(姓)을 한(韓)이라고 하였는데 (한국(韓國)이) 위만(衛滿)에게 공벌(攻伐)받아 바다로 옮겨가 살았다”고 했다.
“此皆韓後姬姓也. 中亦有對韓侯的記載: ‘昔周宣王亦有韓侯, 其國也近燕, 故《詩》云: 普彼韓城, 燕師所完. 其後韓西亦姓韓, 爲衛滿所伐, 遷居海中.” [ 한왕부저(漢王符著) 잠부론(潛夫論) ]
한후(韓侯)는 후대의 진(晋)나라에서 분리된 전국시대의 한(韓)나라와는 다르다.
주평왕(周平王) 14년 (기원전 757년)에 진(晉)이 (한후(韓侯)의) 한국(韓國)을 멸망하였다.
平王十四年 晉人滅韓. [ 금본죽서기년(今本竹書紀年) ]
시경(詩經) 한혁(韓奕)편 ‘韓西’ 에 대한 해석을 살펴보겠습니다.
1. 이병도(李丙燾), 한서(韓西)는 ‘한동(韓東)’의 오기 라고 했다. 한후(韓侯) 한국(韓國)과
조선(朝鮮)의 한씨(韓氏)를 다르게 인식함
2. 윤내현(尹乃鉉), 한서(韓西)는 ‘고조선 한국’의 서쪽에 있던 기자조선
3. 조선후기 실학자 한치윤(韓致奫 ; 1765~18140), ‘한후(韓侯) 한국(韓國)’이 위만에게
공벌당해 바다로 옮겨갔다.
4. 잠부론전교정(潛夫論錢校正)의 해당 주에서는 “한서(韓西)는 조선(朝鮮)의 오기다.“
라고 했다. [ 청대(淸代) 왕계배(汪繼培) ]
5. 주선왕(周宣王) 때의 한국이 동천하여 조선(朝鮮)을 이루고 조선왕을 위만에게 공벌당해
남천하고 삼한을 형성했다. [ 명대(明代) 곽조경(郭造卿) ]
정형진 선생은 “적어도 기원전 756년 이후 기자(箕子)가 서로부터 왔다 해도 왕통이 기자(箕子)에서 한국(韓國)의 한씨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한(大韓)의 한(韓)이라고 부르는 동북아시아에서의 뿌리이고 진한(辰韓), 마한(馬韓), 변한(弁韓)으로 한(韓)을 붙이게 되었다.” 라고 강조한다. 한(韓, 三韓)은 바로 단군조선이 해체된 이후 그 후예들에 의해서 다스려진 나라였다.
역사학자인 동빈(東濱) 김상기(金庠基, 1901∼1977)는 ‘시경(詩經)’ 한혁(韓奕)편에 나오는 한국(韓國)은 처음에 섬서성(陝西省) 한성현(韓城縣)에 있다가 하북성(河北省) 고안현(固安县)으로 이동했고 다시 만주와 한반도로 이동했다고 주장했다.
하북성(河北省) 랑방시(廊坊市) 고안현(固安县) 대한채촌(大韓寨村) 입구
북경(北京)에서 남동쪽으로 40km 즘에 하북성(河北省) 랑방시(廊坊市) 고안현(固安县) 대한채촌(大韓寨村)있다. 대한채(大韓寨)는 다른 말로 하면 '대한성(大韓城)'인데 한성(韓城)이 토성으로 남아있다. 이 마을은 회족(回族)들만이 집단을 이뤄 살고 있는데 인구는 약 1,300여 명쯤 되고 이들 회족들은 아직도 한족과 통혼을 잘 하지 않는다고 한다.
지역으로 관련있어 보이는 선우(鮮于)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968년 역사학자 천판(陳槃)이 펴낸 ‘춘추대사표열국작성급존멸선이(春秋大事表列國爵姓及存滅선異)’라는 책이었다. 기존 사서를 근거로 중국 중원에 산재했던 춘추시대 170여 소국의 역사를 비정한 역사책인데, 바로 선우라는 항목이 있다.
“선우(鮮于) 일명 중산(中山)이라 한다. 회남자(淮南子)는 우(虞)는 혹 우(于)라 했다. 선우(鮮于)는 그 선조가 자성인데(其先子姓), 기자는 조선에 봉하고(以箕子封朝鮮), 기자의 둘째 아들은 우(于; 핑산(平山) 추정)에 봉했다. 여기서 자손들은 조선의 선(鮮)과 봉지 우(于)를 따서 선우(鮮于)씨라 했다. (子孫因合 ‘鮮于’爲氏)”
1973년 5월 “최근 천진(天津) 무청현(武淸縣) 고촌(高村)에서 동한(東漢)시대의 선우황(鮮于璜) 비석(碑石)이 발굴되었다. 비석은 높이 2.45m, 폭 81㎝, 두께 12㎝ 되었다.
비문(碑文)에는 전서(篆書)로 연희 8년 (환제 연희延熹 8년 ; AD 165년)과 상단에 ‘한나라의 안문태수 고 선우황비(漢故雁門太守鮮于璜碑)’ 그리고 “(선우)의 이름은 황이며, 자는 백겸인데, 그 조상은 은나라 기자(箕子)의 후예에서 나왔다.(君諱璜 字伯謙 其先祖出于殷箕子之苗裔~)” 라고 했다.”
중국 역사학자 리쉐친(李學勤)은
“최근 톈진(天津) 우칭셴(武淸縣) 가오춘(高村)에서 발굴된 선우황(鮮于황)비는 ‘선우씨는 상나라 기자(箕子)의 후예다’(鮮于氏系商箕子後裔)라고 했다.”
선우(鮮于)는 은(상)의 후예=기자(箕子)의 후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