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공의 고향으로 본 단군조선의 영토는? (4부)
성훈님 http://blog.joins.com/slsung 2010-05-03 21:52:58
아래 글은 본 시리즈의 (4부)입니다.
(1부) 섬서성 서안 서쪽까지 점령한 단군조선
(2부) 은나라를 멸한 주나라도 단군조선의 제후국
(3부) 낚시로 천하를 낚은 강태공의 조상은 누구인가?
병법과 권모술수에 뛰어난 강태공
(3부)에서의 내용과 같이 서백 희창(西伯 姬昌=周文王)은 위수(渭水)에서 여상(강태공)을 만나 수레에 모시고 와서는 그를 군사(軍師)로 임명하고 은나라를 뒤엎을 것을 비밀리에 의논했다. 그 때 강태공이 내놓은 계책은 주로 군사를 일으키는 것과 모략(謀略)이다. 후세 사람들이 병법과 주나라의 권모술수에 대해 말할 때 강태공을 그 시조(始祖)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동해가 고향인 강태공이 저 멀리 섬서성 서안 서쪽에 있는 위수까지 가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가 천하를 낚은 것은 강태공이 권모술수에 뛰어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것이라 하겠다. 강태공은 (3부)의 내용과 같이 미리 역관(점성술사)과 각본을 짜고 서백(西伯)이란 대어 중의 대어를 기다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얼마 후 서백 희창이 죽고 아들인 희발(姬發=武王)이 즉위했다. 강태공은 군사로서 희발을 도와 은나라를 멸하고 주나라를 일으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다. 그는 군사로서 모든 군을 장악하고는 그의 뛰어난 병법과 권모술수로 주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는다. “만약 강태공이 없었다면 주나라가 은나라를 멸할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그의 역활은 일등공신 중에서도 일등공신이었던 것이다.
9년 희발(武王)은 은나라를 멸하기 위해서는 제후들의 협조가 필요한데 과연 그들이 동참할 것인지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어 도읍인 풍읍(豊邑:낙양)에서 군사를 일으켜 맹진(盟津)으로 진격한다. 그러자 사전에 약속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맹진으로 달려오는 제후가 800명이나 되었다. 모두들 은 주왕을 칠 때라고 말하나 희발(무왕)은 “서두르지 말라. 천명은 아직 은나라를 떠나지 않았다.”하고 일단 철군을 한다.
은나라를 멸하는 희발(주무왕)
드디어 11년 희발(무왕)은 제후들을 향해 동참할 것을 재촉하고는 서백(문왕)의 위패를 받들고 스스로를 태자 발이라 칭하고는 강태공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5천의 군사를 이끌고 맹진으로 나아가자 주변의 제후들도 속속 모여 들었다. 즉 이번 출정은 명망이 높았던 문왕의 뜻이라는 것을 대외에 알리려는 것이었다.
드디어 맹진에서 동쪽으로 사(汜:사수진) 땅으로 나아가 황하를 건넌 후 북상하여 백천(휘현)까지 올라가서는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은나라의 수도인 조가(朝歌:기현)를 향해 진격하였다. 드디어 주나라와 은나라는 목야(牧野)에서 서로 대치하게 되었다. 아래는 목야전투의 중국 자료이다.
公元前1046年(一说前1057年)正月,周武王统率兵车300乘,虎贲3000人,甲士4万5千人,浩浩荡荡东进伐商。同月下旬,周军进抵孟津,在那里与反商的庸、卢、彭、 濮、蜀(均居今汉水流)、羌、微(均居今渭水流域)、"667;(居今山西省平陆南)等部落的部队会合。武王利用商地人心归周的有利形势,率本部及协同自己作战的部落军队,于正月二十八日由孟津(今河南孟州市南)冒雨迅速东进。从汜地(今河南荥阳汜水镇)渡过黄河后,兼程北上,至百泉(今河南辉县西北)折而东行,直指朝歌。周师沿途没有遇 到商军的抵抗,故开进"034;利,仅经过6天的行程,便于二月初四拂晓抵达牧野。 周军进攻的消息传至朝歌,商朝廷上下一片惊恐。商纣王无奈之中只好仓促部署防御。但此时商军主力还远在东南地区,无法立即调回。于是只好武装大批奴隶,连同守卫国都的商军共约17万人(一说70万,殊难相信),由自己率"046;,开赴牧野迎战周师。
주나라 군대가 목야로 진격할 때 백이.숙제가 나타나 주 무왕의 마차 앞으로 달려가 말고삐를 붙잡고 무왕에게 출병의 부당함을 고한다. 그러자 무왕 주위의 장수들이 백이.숙제를 죽이려고 하자 강태공이 “의인(義人)이니 살려주어라”라고 지시를 한다. 해서 백이.숙제는 목숨을 잃는 화를 면하고 그 자리를 떠나게 되었다. (백이.숙제에 대한 상세한 것은 제 6부에서 다룬다)
드디어 무왕은 목야에서 은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도읍인 조가에 입성하여 자살한 주왕의 시체에 화살 3개를 꼽고 마차에서 내려 다시 칼로 치고 황금으로 만든 도끼로 주왕의 목을 잘라 대백기의 끝에 걸었다. 다음 날 희발은 은나라의 궁전으로 들어가 즉위식을 올렸다. 희발의 쿠데타가 성공하여 은나라가 망하고 주(周)나라가 새로 탄생한 것이었다.
강태공이 제후로 봉해진 제(齊) 땅은 어디인가?
주나라 탄생의 일등공신인 강태공은 제(齊) 지방의 영구(營丘) 땅을 다스리는 제후로 봉해진다. 무왕의 동생인 주공 단에게는 곡부(曲阜)에 봉하고 노(魯)라고 했고, 소공 석은 연(燕)에, 동생인 숙선에게는 관(管)에, 동생 숙도를 채(蔡)에 봉하고 그밖에 각자의 공적에 따라 봉지를 주고 제후로 삼았다.
제후에게 하사하는 봉지는 통상 약 사방 100 ~ 200 리가량의 땅이었다. 당시 주나라의 전체 강역이 천리가 넘지 않았으므로 중국에서 주장하는 지금의 산동성에 노나라와 제나라가 있었고, 하북성 북경 근처에 연나라가 있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 하겠다. 노, 제, 연나라는 모두 하남성 황하 주변의 일개 군(郡) 정도의 영토였으리라.
강태공이 영구 땅에 도착할 무렵 느닷없이 래후(萊候)의 군사들이 공격을 해왔다. 상호간에 영구 땅을 차지하려는 공방전이 벌어진다. 그 원인은 당시 낙양에 있던 주나라가 은나라를 평정했을 뿐이지 멀리 떨어진 곳까지는 통치권이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래(萊)란 영구 땅 주변에 사는 만족(蠻族)이라고 <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래후를 물리치고 영구에 부임한 강태공은 정치 제도를 가다듬는데 있어 그 고장의 풍습을 귀히 여겼고 예절을 간소화 시켰다. 또한 상공업을 장려하여 고장 특산물인 소금과 생선으로 상업을 크게 일으키니 수많은 백성들이 제나라로 모여들어 강국으로 뻗어나가 춘추.전국 시대를 풍미하는 제나라의 기반을 확실히 다져놓는다.
우리는 이렇게 강태공으로부터 시작된 제나라가 산동성에 있었고 도읍은 임치(臨淄)로 알고 있으며, 위에서 언급된 래(萊) 땅을 지금의 산동성 래주(萊州)로 알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래주는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하기 위해 수군을 출발시킨 곳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그런 래주가 과연 어디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강태공의 고향인 동해(東海)는 어디인가?
래주가 어디인지 알아보려면 강태공의 고향이 어디인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사마천이 쓴 <사기>에 따르면, “태공망 여상은 동쪽 끝 해안지대의 사람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강태공의 고향이 동해(황해) 바닷가로 알고 있다. 특히 산동성과 접해있는 강소성 연운항 근처에 동해(東海)라는 시가 있어 그쪽 출신으로 알기 쉽다.
중국은 산동성의 도읍인 제남(濟南)시와 임치(臨淄)시에 강태공의 가짜 묘를 만들어 놓고 산동성이 제(齊)나라 땅이었다고 알리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한 역사왜곡으로 산동성은 제나라 땅이 아니라 바로 단군조선의 땅이었다. 이를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을 뿐이다. 과연 그런지 지금부터 알아보기로 하겠다.
강태공의 고향을 중국 인터넷 백과사전으로 찾아보면 아래와 같이 나온다.
(원문) “姜太公故里,位于河南省新乡卫辉市西北十二公里处。公元前1210年农历八月初三,姜太公诞生于卫辉太公泉镇吕村。据《竹书纪年》上说,姜太公仙逝于“周康王六年”十月二十日。终年一百三十九岁。葬于卫辉太公泉。至今太公泉境内还保留着许多姜太公的历史遗迹,其中较为著名的有:姜太公墓、姜太公祠、姜太公庙、姜太公吕望表等。”
(번역) “강태공의 고향은 하남성 신향시 위휘현 서북 12Km에 있다. B.C 1210년 음력 8월 초삼일 위휘현 태공천진 여촌에서 태어났다. <죽서기년>에 따르면, 강태공의 서거는 주 강왕 6년 10월 20일로 139세였다. 장례는 위휘현 태공촌에서 치렀다. 지금의 태공촌 경내에는 강태공묘, 강태공 사당, 강태공여망표 등이 있다.”
사마천이 쓴 <사기>의 기록에는 “강태공은 동해(東海) 출신”이라고 간단히 기록되어 있다. 그런 강태공의 고향이 하남성 신향시 위휘현이므로 그 근처에서 바다로 불릴 수 있는 곳은 대야택(발해) 밖에 없다. 즉 고대 중국의 동해는 바로 산동성과 하남성 경계에 있는 대야택 즉 발해(渤海)였다. 당시 <사기>에 기록된 제나라의 동쪽 경계는 동해 즉 발해(대야택)로 황하변 하남성이 주나라의 주 무대였던 것이다. (발해가 어디인가는 아래 자료 참조)
제목: 발해를 지명조작하여 역사를 왜곡한 중국
http://www.hinews.asia/sub_read.html?uid=288§ion=sc5§ion2=
사마천의 <사기>에는 또 이런 기록이 있다. 주 무왕의 아들인 성왕(成王)이 아직 어릴 때 주위에서 주나라에게 반기를 들자 성왕은 강태공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린다. “동쪽 동해(東海)로부터 서쪽 황하(黃河)까지 남쪽 목릉(穆陵)으로부터 북쪽의 무태(无棣)까지 이 모든 지역의 제후들은 각자의 소신대로 반란군을 정벌해도 좋다.”즉 주나라의 동.서.남.븍 강역이 어디인지 보이는 대목이다.
여기서의 동해는 바로 강태공의 고향인 하남성 위휘현인 것이다. 따라서 제나라의 도읍인 영구나 임치는 바로 위휘현 서쪽에 있었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소정방이 수군을 출발시켰다는 래주도 위휘현 서쪽 가까운 황하변에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그런 제나라가 산동성에 있었다는 것은 명백한 역사왜곡 임을 알아야 한다.
맹자는 “하나라 뒤의 은나라 주나라가 융성했을 때의 강역도 일천리가 넘지 않았다.(夏后殷周之盛地未過千里者也) ”고 말해 제나라의 종주국인 주나라도 그 영토가 천리를 넘지 못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당시 종주국인 주나라의 도읍은 하남성 낙양이었다. 어떻게 하남성 동쪽 끝인 대야택 건너의 산동성이 제나라의 영토가 될 수 있으리오!
황하 주변 하남성은 주나라의 강역이고, 산동성은 바로 단군조선의 땅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하남성의 북쪽인 산서성은 당시 백이.숙제의 나라인 고죽국이 있던 곳이므로 단군조선의 강역이었던 것이다. 중국에서는 고죽국을 은나라의 제후국이라 말하고 있으나 그건 어불성설로 고죽국은 명백한 단군조선의 제후국이었던 것이다.
<단군세기>에 따르면, “22세 색불루단군 때인 B.C 1266년 람국(藍國)이 매우 강성하여 고죽군(孤竹君)과 더불어 여러 적들을 쫓고 남으로 이동하니 은나라 땅과 가까웠다. 이에 병사를 나눠 진격하여 빈.기(邠岐)에 웅거하도록 하면서 나라를 여(黎)라 칭하고 서융과 함께 은나라 제후들 사이를 차지하고 있도록 하였으니 황제의 교화가 멀리 항산(恒山) 이남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기록되어 있어 그 근거가 된다.
또한 36세 매륵단군 때인 "B.C 653년 병력을 보내 수유(須臾)의 군대와 함께 연나라를 정벌하였다. 이를 연(燕)나라 사람이 제(齊)나라에 알리니 제나라가 고죽(孤竹)에 쳐들어 왔는데 이기지 못하고 화해를 구걸하고는 물러갔다."는 기록이 있어 고죽국과 연.제나라는 매우 가깝게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고죽국은 단군조선의 남쪽에 있었던 것이다.
<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강태공의 고향으로 본 고대 중국의 영토는 황하변 하남성 주변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의 산서성과 하북성 그리고 산동성과 섬서성 서안까지 하남성을 제외한 전 중국 대륙이 단군조선의 강역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단군조선의 강역은 세월에 따라 위축된 적도 있었으나 거의 그대로 이어져 후대에 고구려.백제.신라의 강역이 되는 것이다.
이렇듯 위대하고 장엄했던 단군조선과 삼국의 영토를 만주와 한반도 일대로만 국한하는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반도사관의 이론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이론이라 하겠다. 식민사학자들이 이 땅에서 박멸되는 날이 어서 빨리 와야 우리의 장엄했던 역사가 화려하게 부활될 것이다. 그래야 중국의 지명조작을 통한 역사왜곡을 엄중하게 질책할 것이 아니겠는가!
이어지는 (6부)에서는 진시황 만리장성의 비밀이 밝혀집니다.
(1부) 섬서성 서안 서쪽까지 점령한 단군조선
(2부) 은나라를 멸한 주나라도 단군조선의 제후국
(3부) 낚시로 천하를 낚은 강태공의 조상은 누구인가?
병법과 권모술수에 뛰어난 강태공
(3부)에서의 내용과 같이 서백 희창(西伯 姬昌=周文王)은 위수(渭水)에서 여상(강태공)을 만나 수레에 모시고 와서는 그를 군사(軍師)로 임명하고 은나라를 뒤엎을 것을 비밀리에 의논했다. 그 때 강태공이 내놓은 계책은 주로 군사를 일으키는 것과 모략(謀略)이다. 후세 사람들이 병법과 주나라의 권모술수에 대해 말할 때 강태공을 그 시조(始祖)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동해가 고향인 강태공이 저 멀리 섬서성 서안 서쪽에 있는 위수까지 가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가 천하를 낚은 것은 강태공이 권모술수에 뛰어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것이라 하겠다. 강태공은 (3부)의 내용과 같이 미리 역관(점성술사)과 각본을 짜고 서백(西伯)이란 대어 중의 대어를 기다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얼마 후 서백 희창이 죽고 아들인 희발(姬發=武王)이 즉위했다. 강태공은 군사로서 희발을 도와 은나라를 멸하고 주나라를 일으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다. 그는 군사로서 모든 군을 장악하고는 그의 뛰어난 병법과 권모술수로 주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는다. “만약 강태공이 없었다면 주나라가 은나라를 멸할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그의 역활은 일등공신 중에서도 일등공신이었던 것이다.
9년 희발(武王)은 은나라를 멸하기 위해서는 제후들의 협조가 필요한데 과연 그들이 동참할 것인지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어 도읍인 풍읍(豊邑:낙양)에서 군사를 일으켜 맹진(盟津)으로 진격한다. 그러자 사전에 약속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맹진으로 달려오는 제후가 800명이나 되었다. 모두들 은 주왕을 칠 때라고 말하나 희발(무왕)은 “서두르지 말라. 천명은 아직 은나라를 떠나지 않았다.”하고 일단 철군을 한다.
은나라를 멸하는 희발(주무왕)
드디어 11년 희발(무왕)은 제후들을 향해 동참할 것을 재촉하고는 서백(문왕)의 위패를 받들고 스스로를 태자 발이라 칭하고는 강태공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5천의 군사를 이끌고 맹진으로 나아가자 주변의 제후들도 속속 모여 들었다. 즉 이번 출정은 명망이 높았던 문왕의 뜻이라는 것을 대외에 알리려는 것이었다.
드디어 맹진에서 동쪽으로 사(汜:사수진) 땅으로 나아가 황하를 건넌 후 북상하여 백천(휘현)까지 올라가서는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은나라의 수도인 조가(朝歌:기현)를 향해 진격하였다. 드디어 주나라와 은나라는 목야(牧野)에서 서로 대치하게 되었다. 아래는 목야전투의 중국 자료이다.
公元前1046年(一说前1057年)正月,周武王统率兵车300乘,虎贲3000人,甲士4万5千人,浩浩荡荡东进伐商。同月下旬,周军进抵孟津,在那里与反商的庸、卢、彭、 濮、蜀(均居今汉水流)、羌、微(均居今渭水流域)、"667;(居今山西省平陆南)等部落的部队会合。武王利用商地人心归周的有利形势,率本部及协同自己作战的部落军队,于正月二十八日由孟津(今河南孟州市南)冒雨迅速东进。从汜地(今河南荥阳汜水镇)渡过黄河后,兼程北上,至百泉(今河南辉县西北)折而东行,直指朝歌。周师沿途没有遇 到商军的抵抗,故开进"034;利,仅经过6天的行程,便于二月初四拂晓抵达牧野。 周军进攻的消息传至朝歌,商朝廷上下一片惊恐。商纣王无奈之中只好仓促部署防御。但此时商军主力还远在东南地区,无法立即调回。于是只好武装大批奴隶,连同守卫国都的商军共约17万人(一说70万,殊难相信),由自己率"046;,开赴牧野迎战周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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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나라 군대가 목야로 진격할 때 백이.숙제가 나타나 주 무왕의 마차 앞으로 달려가 말고삐를 붙잡고 무왕에게 출병의 부당함을 고한다. 그러자 무왕 주위의 장수들이 백이.숙제를 죽이려고 하자 강태공이 “의인(義人)이니 살려주어라”라고 지시를 한다. 해서 백이.숙제는 목숨을 잃는 화를 면하고 그 자리를 떠나게 되었다. (백이.숙제에 대한 상세한 것은 제 6부에서 다룬다)
드디어 무왕은 목야에서 은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도읍인 조가에 입성하여 자살한 주왕의 시체에 화살 3개를 꼽고 마차에서 내려 다시 칼로 치고 황금으로 만든 도끼로 주왕의 목을 잘라 대백기의 끝에 걸었다. 다음 날 희발은 은나라의 궁전으로 들어가 즉위식을 올렸다. 희발의 쿠데타가 성공하여 은나라가 망하고 주(周)나라가 새로 탄생한 것이었다.
강태공이 제후로 봉해진 제(齊) 땅은 어디인가?
주나라 탄생의 일등공신인 강태공은 제(齊) 지방의 영구(營丘) 땅을 다스리는 제후로 봉해진다. 무왕의 동생인 주공 단에게는 곡부(曲阜)에 봉하고 노(魯)라고 했고, 소공 석은 연(燕)에, 동생인 숙선에게는 관(管)에, 동생 숙도를 채(蔡)에 봉하고 그밖에 각자의 공적에 따라 봉지를 주고 제후로 삼았다.
제후에게 하사하는 봉지는 통상 약 사방 100 ~ 200 리가량의 땅이었다. 당시 주나라의 전체 강역이 천리가 넘지 않았으므로 중국에서 주장하는 지금의 산동성에 노나라와 제나라가 있었고, 하북성 북경 근처에 연나라가 있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 하겠다. 노, 제, 연나라는 모두 하남성 황하 주변의 일개 군(郡) 정도의 영토였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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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공이 영구 땅에 도착할 무렵 느닷없이 래후(萊候)의 군사들이 공격을 해왔다. 상호간에 영구 땅을 차지하려는 공방전이 벌어진다. 그 원인은 당시 낙양에 있던 주나라가 은나라를 평정했을 뿐이지 멀리 떨어진 곳까지는 통치권이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래(萊)란 영구 땅 주변에 사는 만족(蠻族)이라고 <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래후를 물리치고 영구에 부임한 강태공은 정치 제도를 가다듬는데 있어 그 고장의 풍습을 귀히 여겼고 예절을 간소화 시켰다. 또한 상공업을 장려하여 고장 특산물인 소금과 생선으로 상업을 크게 일으키니 수많은 백성들이 제나라로 모여들어 강국으로 뻗어나가 춘추.전국 시대를 풍미하는 제나라의 기반을 확실히 다져놓는다.
우리는 이렇게 강태공으로부터 시작된 제나라가 산동성에 있었고 도읍은 임치(臨淄)로 알고 있으며, 위에서 언급된 래(萊) 땅을 지금의 산동성 래주(萊州)로 알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래주는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하기 위해 수군을 출발시킨 곳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그런 래주가 과연 어디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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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공의 고향인 동해(東海)는 어디인가?
래주가 어디인지 알아보려면 강태공의 고향이 어디인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사마천이 쓴 <사기>에 따르면, “태공망 여상은 동쪽 끝 해안지대의 사람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강태공의 고향이 동해(황해) 바닷가로 알고 있다. 특히 산동성과 접해있는 강소성 연운항 근처에 동해(東海)라는 시가 있어 그쪽 출신으로 알기 쉽다.
중국은 산동성의 도읍인 제남(濟南)시와 임치(臨淄)시에 강태공의 가짜 묘를 만들어 놓고 산동성이 제(齊)나라 땅이었다고 알리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한 역사왜곡으로 산동성은 제나라 땅이 아니라 바로 단군조선의 땅이었다. 이를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을 뿐이다. 과연 그런지 지금부터 알아보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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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공의 고향을 중국 인터넷 백과사전으로 찾아보면 아래와 같이 나온다.
(원문) “姜太公故里,位于河南省新乡卫辉市西北十二公里处。公元前1210年农历八月初三,姜太公诞生于卫辉太公泉镇吕村。据《竹书纪年》上说,姜太公仙逝于“周康王六年”十月二十日。终年一百三十九岁。葬于卫辉太公泉。至今太公泉境内还保留着许多姜太公的历史遗迹,其中较为著名的有:姜太公墓、姜太公祠、姜太公庙、姜太公吕望表等。”
(번역) “강태공의 고향은 하남성 신향시 위휘현 서북 12Km에 있다. B.C 1210년 음력 8월 초삼일 위휘현 태공천진 여촌에서 태어났다. <죽서기년>에 따르면, 강태공의 서거는 주 강왕 6년 10월 20일로 139세였다. 장례는 위휘현 태공촌에서 치렀다. 지금의 태공촌 경내에는 강태공묘, 강태공 사당, 강태공여망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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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발해를 지명조작하여 역사를 왜곡한 중국
http://www.hinews.asia/sub_read.html?uid=288§ion=sc5§ion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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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의 동해는 바로 강태공의 고향인 하남성 위휘현인 것이다. 따라서 제나라의 도읍인 영구나 임치는 바로 위휘현 서쪽에 있었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소정방이 수군을 출발시켰다는 래주도 위휘현 서쪽 가까운 황하변에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그런 제나라가 산동성에 있었다는 것은 명백한 역사왜곡 임을 알아야 한다.
맹자는 “하나라 뒤의 은나라 주나라가 융성했을 때의 강역도 일천리가 넘지 않았다.(夏后殷周之盛地未過千里者也) ”고 말해 제나라의 종주국인 주나라도 그 영토가 천리를 넘지 못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당시 종주국인 주나라의 도읍은 하남성 낙양이었다. 어떻게 하남성 동쪽 끝인 대야택 건너의 산동성이 제나라의 영토가 될 수 있으리오!
황하 주변 하남성은 주나라의 강역이고, 산동성은 바로 단군조선의 땅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하남성의 북쪽인 산서성은 당시 백이.숙제의 나라인 고죽국이 있던 곳이므로 단군조선의 강역이었던 것이다. 중국에서는 고죽국을 은나라의 제후국이라 말하고 있으나 그건 어불성설로 고죽국은 명백한 단군조선의 제후국이었던 것이다.
<단군세기>에 따르면, “22세 색불루단군 때인 B.C 1266년 람국(藍國)이 매우 강성하여 고죽군(孤竹君)과 더불어 여러 적들을 쫓고 남으로 이동하니 은나라 땅과 가까웠다. 이에 병사를 나눠 진격하여 빈.기(邠岐)에 웅거하도록 하면서 나라를 여(黎)라 칭하고 서융과 함께 은나라 제후들 사이를 차지하고 있도록 하였으니 황제의 교화가 멀리 항산(恒山) 이남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기록되어 있어 그 근거가 된다.
또한 36세 매륵단군 때인 "B.C 653년 병력을 보내 수유(須臾)의 군대와 함께 연나라를 정벌하였다. 이를 연(燕)나라 사람이 제(齊)나라에 알리니 제나라가 고죽(孤竹)에 쳐들어 왔는데 이기지 못하고 화해를 구걸하고는 물러갔다."는 기록이 있어 고죽국과 연.제나라는 매우 가깝게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고죽국은 단군조선의 남쪽에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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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강태공의 고향으로 본 고대 중국의 영토는 황하변 하남성 주변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의 산서성과 하북성 그리고 산동성과 섬서성 서안까지 하남성을 제외한 전 중국 대륙이 단군조선의 강역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단군조선의 강역은 세월에 따라 위축된 적도 있었으나 거의 그대로 이어져 후대에 고구려.백제.신라의 강역이 되는 것이다.
이렇듯 위대하고 장엄했던 단군조선과 삼국의 영토를 만주와 한반도 일대로만 국한하는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반도사관의 이론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이론이라 하겠다. 식민사학자들이 이 땅에서 박멸되는 날이 어서 빨리 와야 우리의 장엄했던 역사가 화려하게 부활될 것이다. 그래야 중국의 지명조작을 통한 역사왜곡을 엄중하게 질책할 것이 아니겠는가!
이어지는 (6부)에서는 진시황 만리장성의 비밀이 밝혀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