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라’의 세계-3

우리는 앞장에서 파라婆羅 또는 서파라西婆羅란 우리 지명이 지금의 보르네오 서부의 폰티아낙(중국 기록은 쿤티안坤甸) 일대와 팔라완 섬, 또 파라셀 군도와 스프라틀리 군도임을 살펴보았다.

이 중의 팔라완 섬을 포함하여 필리핀 남부 섬들과 보르네오 북부 일대는 사마족族이라 불리는 종족의 생활 터전이다. 이 장은 사마족에 대한 소개로 시작하고자 한다.

몇 년 전 일본의 각 TV방송이 앞 다투어 사마족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방영한 적이 있다. 여러 채널의 민영방송이 한 종족에 대해 집중적으로 관심을 표한 것은 필자에겐 좀 유별나게 다가왔다. 필자는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하다,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는데 그것은 두 가지 이유로 정리된다.

하나는 종족 이름이 ‘사마’라는 것과, 나머지 하나는 팔라완 섬 일대에 대량 분포하는 독무덤(옹관묘) 때문이란 것이다. 그런데 이 두 요소는 고대 일본 및 백제문화권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먼저 ‘사마’에 대해 살펴보자.
‘사마’는 섬을 뜻하는 것으로 오늘날 한국어의 ‘섬’ 및 일본어의 ‘시마’의 원형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령왕 즉위년(501년) 대목을 보면 왕의 휘諱(생전의 이름)가 사마斯摩라 되어 있는데, 일본서기에 의하면 무령왕이 섬에서 태어남으로 인해 ‘사마’라 이름 지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1971년 발굴된 무령왕릉의 묘지석에 ‘영동대장군백제사마왕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이란 글귀가 발견되어 무덤의 주인공이 무령왕이란 사실이 밝혀진 바 있다. 생전엔 사마왕으로 불리다, 사후에 무령武寧이란 존호가 붙여진 것이다.

이번엔 독무덤에 대해서 알아보자.
독자들은 전라남도 영산강 유역의 독무덤군群에 대해서 들어보았을 것이다. 흔히 아파트식 고분으로 유명한 나주 일대의 독무덤은 지금까지 우리 고대사의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어떤 사서의 기록에도 언급되지 않은 나주 고분군은 규모면에서나, 출토품에서나 경주의 신라 왕릉급 고분에 필적하여, 고분 조성의 추정시기인 4~5C 무렵에 영산강 일대에 강력한 정치세력이 존재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렇다면 이 수수께끼 고분군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독무덤 묘제는 일본에도 존재한다. 일본 규슈의 야요이 시대(BC 5C~AD 4C) 유적인 요시노가리(吉野ヶ里) 유적엔 약 3천기의 독무덤군이 발굴되었는데 한일 학계에선 그동안 영산강 유역과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논쟁을 벌여왔다. 즉 한국 학계에선 영산강 유역이 규슈에 영향을, 일본학계에선 그 반대로 규슈의 요시노가리 문화가 영산강 일대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일본 학계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저들이 내세우고 있는 임나일본부나, 삼한정벌론의 고고학적 증거라고까지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들 독무덤 묘제가 영산강 유역과 일본 규슈 일대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독무덤은 해양 문화의 묘제로서 아시아 해양의 광대한 영역에 걸쳐 분포한다.

한반도에선 영산강 일대 및 해남, 강진을 비롯하여 가야와 신라 영역이던 경상도 각지에서도 발굴되고 있다. 지난해 10월엔 경부고속철도 경주 구간 공사 중에 발굴된 초기 신라(사로신라) 시대 유적(경주시 내남면 덕천리)에선 무려 65기의 독무덤이 출토되기도 했다.

여기에다 아시아 해역으로 시야를 넓혀보면 앞장에서 다룬 인도 남부의 촐라국 영역이던 타밀나두주州와 스리랑카, 방글라데시와 태국은 물론, 나아가 란방공화국의 영토이던 보르네오 일대, 또 팔라완 섬을 비롯한 필리핀 각지와 인도네시아 열도의 전역에서 확인되고 있다.

그러므로 필자의 견해로는 한일 학계의 위 논쟁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 달리 말하자면 아시아 해양의 독무덤 자체가 한국과 일본에 존재하는 독무덤의 공통 기원이란 것이다.

주목되는 점은 한반도 독무덤이 시기적으로 크게 두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후기 유형이랄 수 있는 영산강 일대의 왕릉급 고분들엔 독무덤의 크기가 시신을 담은만큼 크며, 주로 두 개의 항아리(독)를 이어 사용한데 비해, 남해안 일대의 초기 독무덤은 시신을 담을 수 없는 작은 항아리들이 출토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초기 양식이 시신을 담은 것이 아니라, 1차 장례를 마친 후 뼈만을 추려 항아리에 안치한 2차 장례의 흔적이란 것이다. 흔히 세골장洗骨葬이라 하는 초기 양식은 앞서 말한 필리핀, 보르네오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해역의 독무덤의 일반적 형태이다. 세골장의 기원은 시신을 새에게 내맡기는 조장鳥葬 관습이 남아있는 히말라야와 서남아시아에서 기원한다.

그러므로 한반도의 독무덤은 서남아시아의 묘제인 세골장이 해양을 통해 한반도까지 전파된 후 토속묘제인 토광묘나, 목관묘, 또 목곽묘와 결합하여 영산강 일대에서 볼 수 있는 시신을 직접 담는 대형 독무덤으로 변화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여기서 다시 사마족과 팔라완 섬으로 돌아가 보자. 필자가 인터넷의 영문사이트를 통해 검색해본 ‘사마족’의 유래에 대한 내용은 간략히 이렇다.

‘바다의 부족, 기원후부터 시작되어 9C 경에 확대된 중국인 교역의 결과로 북부의 여러 섬(민다나오 남서부)에서 남(술라웨시와 보르네오 해안)으로 흩어진 종족.’

필자는 위의 내용에서 당시 교역의 주체가 중국인이라 함은 잘못되었다고 본다. 그 이유는 다른 장에서 밝힐 것이다.

어쨌든 위에서 소개한 일본방송의 사마족에 대한 관심의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사마’란 어휘에다, 사마족의 거주영역에 대량으로 존재하는 독무덤 때문이다. 참고로 필자는 Sama-란 접두어를 사용하는 지명이 사마족 분포지역의 여러 곳에 존재함을 확인한 바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인은 일본의 국가기원이 한반도에서 비롯되었다고 알고 있다. 이와 함께 일본문화의 기원 또한 고대 한반도 문화의 아류라 보고 있다. 물론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 한국과 일본 학계의 시각은 차이가 있다. 그동안 한국 학계에선 한국인과 한국문화가 북방의 시베리아에서 기원한다고 간주해 왔는데 반해, 일본 학계는 일본인과 일본문화의 기저가 남방에서 원류한다고 보아 왔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일본 학계는 그들의 문화가 북방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는 한국과는 그 기원을 달리 한다고 주장해 왔다.

우리는 우리의 그것과 모순되는 일본 학계의 주장을 애써 외면해 왔다. 단지 일본 학계의 근거 없는 강변이라고만 보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일본학계의 주장이 설득력 있는 것이라 확신한다. 그와 함께 양국 문화의 동일기원설도 사실로 인정한다.

한국과 일본의 상반된 관점에서 어떻게 동일기원설이 성립될까?

그것은 한반도 문화 또한 일본과 마찬가지로 그 기저에 남방 원류의 요소를 띄고 있다는 데에 있다. 그것은 근래에 와서 집적되고 있는 연구결과들이 알려주고 있는데 신화나, 민속, 유물, 유적 등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이 중에 주목되는 부분은 독무덤의 분포지에서 공히 확인되는 문화적 요소로써 고인돌과 난생설화를 들 수 있다. 뒤에서 다시 다루겠지만 이들 요소는 앞서 말한 남부인도에서 동남아시아 해역을 거쳐 한반도에 이르기까지 독무덤과 함께 존재한다.

필자의 기억에, 1980년대 일본의 어느 학자가 ‘일본 신화와 그리스 신화의 비교연구’란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논문의 내용은 양 신화가 상호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당시 필자에게 있어서 이 주장은 단지 허무맹랑하게 다가왔을 뿐이다. 그러다 후에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에서 ‘우리문화는 중국보다 오히려 그리스와 페르시아에 더 가깝다’는 대목을 접하곤 그 논문의 내용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과 위 일본학자의 견해는 결코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다. 필자는 여기서 독자들이 알고 있을 삼국유사의 얘기 하나를 들어보겠다. 아래는 삼국유사 제2권 기이紀異편의 제48대 경문대왕에 관한 내용이다.

‘왕의 귀가 갑자기 길어져서 당나귀의 귀처럼 되었는데 왕후와 궁인들은 모두 이를 알지 못했지만 오직 복두장幞頭匠(복두는 귀인이 머리에 쓰는 관) 한 사람만은 이 일을 알고 있었으나 그는 평생 이 일을 남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 사람은 죽을 때에 도림사道林寺 대밭 속 아무도 없는 곳으로 들어가서 대를 보고 외쳤다. “우리 임금의 귀는 당나귀 귀와 같다.” 그런 후로 바람이 불면 대밭에서 같은 소리가 들려오곤 했는데 왕은 이 소리가 듣기 싫어서 대를 베어버리고 그 대신 산수유山茱萸 나무를 심었다.’

다음은 그리스 신화에서 아폴론의 벌을 받아 길어진 귀를 넓은 수건을 둘러 감추었다는 미다스 왕의 얘기이다.

‘미다스 왕의 비밀은 왕실 이발사가 갈대숲에 판 구멍에 입을 대고 속삭임으로서 바람이 불 때마다 갈대숲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소리가 흘러나와 널리 퍼지게 되었다.’

위 두 설화의 모티브는 누가 봐도 동일한 것으로 복두장과 이발사, 대밭과 갈대숲은 단지 환경의 차이일 뿐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중근동의 ‘라’와 우리의 ‘~라羅’의 상관관계를 재차 확인하며, 단재 신채호 선생의 선견지명, 그리고 일본학계의 앞선 학문적 시야를 엿볼 수 있다. 더불어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대량으로 출토된 로만글라스가 거저 우연이 아니며 고대 우리 조상들의 세계에 대한 인식 범위가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임을 알려주고 있다.

일본이란 국호는 태양(天)을 뜻하며 그들 스스로 천손족天孫族임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는 가까이는 고구려를 비롯한 한반도의 천손신앙과 밀접한 것이자, 앞서 확인했듯이 멀리는 중근동의 ‘라’에 닿아 있다.

일본 역사에 등장하는 최초의 국가인 야마타이코쿠邪馬臺國의 여왕인 히미코卑彌呼의 이름에서 이름의 의미를 확인해 보자. 卑彌呼(한국음은 비미호)란 한자漢字는 단지 일본식 한자음의 차용일 뿐, 그 뜻은 히미코란 말 자체에 있다. ‘히’는 태양을 뜻하는 ‘해’의 고대어로 오늘날 일본에선 여전히 ‘히’라고 한다. ‘미’는 ‘~의’라는 현대 일본어의 の(발음은 ‘노’)에 해당하고, ‘코’는 현대 일본어에 남아 있는 ‘코(子)’로 아들 또는 자식이란 뜻이다. 전체적으로 말하자면 히미코는 ‘태양의 자식’이란 뜻으로 훗날의 천황이란 용어에 맞닿아 있는 것이다.

위 히미코에 대한 2006.9.15자 뉴스메이커 기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기사는 히미코가 가야국 김수로왕의 딸인 묘견妙見 공주란 학계의 주장과, 히미코를 나타내는 우리식 한자음 비미호卑彌呼는 기원전 6C 남부인도의 비자야(Vijaya, 재임BC543~504)란 인물이 바다를 건너가 스리랑카에 수립한 싱할리 왕국에서 그 흔적을 찾았다는 것이다. 즉 비미호는 싱할리 왕국에서 총리를 의미하는 ‘비미호Pimiho’ 또는 ‘비미크Pimiku’에서 비롯되었다는 내용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실제 발음이 우리식 한자음(비미호-히미코는 일본식 한자음)으로 쓰인 것으로 볼 때 고대 해양문화의 주체가 누구인가 하는 점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더하여 위 기사에서 경악할 일은 가야의 여러 작은 나라를 지칭하는 가라, 안라, 다라, 고차, 자타, 산반하, 졸마, 걸찬, 사이기, 염례, 탁순, 탁기탄 등 12개 소국 이름이 비자야 왕과 타밀출신 야쇼다라Yashodhara 왕비 사이에 낳은 12자녀 이름과 일치한다는 내용이다.
12자녀의 이름을 영어로 표기하면 Kara, Anla, Tara, Kocha, Chata, Sanbanha, Cholma, Kolchan, Saigi, Yomryu, Taksun, Takkitan이다.

기사는 덧붙여 가야지역 12개 소국의 이름이 비자야 왕의 자녀 이름과 일치하는 것은 당시 가야인이 비자야 왕의 이야기를 금과옥조로 삼았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분석하고 있다.

히미코에 대한 기사의 소개는 여기서 그치고 다시 본론을 이어가자.
앞장에서 필자는 신라 관련 지명을 논하면서 남태평양의 섬나라 피지의 Sila 지명을 소개한 바 있다. Sila는 수도인 수바가 위치한 비티레부 섬의 해안가에 있는 지명이다. 지명뿐만 아니라, 원주민 이름에도 Sila가 있는데 대표적인 인물로 전 피지 행정청 수장이던 Kotobalavu Sila씨를 들 수 있다.

그런데 피지는 아시아 해역을 넘어 오세아니아에 속하는 섬나라이다. 그럼에도 피지의 Sila가 지금까지 보아온 ‘라’와 관련하여 우연이 아님은 피지보다 더 먼 곳에 위치한 뉴질랜드의 마오리족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마오리족의 태양신 또한 ‘Ra’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어찌 우연의 일치라 할 수 있겠는가?

더하여 인근의 통가(Tonga) 왕국을 보자. 국호 통가는 통가어語의 탕가야르에서 비롯되었는데 그 뜻은 태양을 의미한다. 이처럼 ‘라’ 및 태양과 관련된 지명이 인도양과 태평양의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있다.

이제 이 장의 중심 내용인 인도네시아 술라웨시 섬의 Siladen이란 지명을 소개하겠다. 아래 지도를 보자.

   
  ▲ <지도1> 술라웨시 섬의 마나도 위치. [자료사진 - 서현우]  
 
   
  ▲ <지도2> 술라웨시 섬. [자료사진 - 서현우]  
 
   
  ▲ <지도3> 마나도 만과 Siladen 섬. [자료사진 - 서현우]  
 
위 술라웨시 섬은 보르네오 섬 동쪽에 위치한 인도네시아 령으로 거의 한반도 면적만큼의 넓이를 가진 큰 섬이다. 포르투갈 식민지 시대에 술라웨시는 셀레베스Celebes로 와전된 까닭에 현재도 셀레베스라 일컬어지기도 하나, 정식 이름은 어디까지나 술라웨시이다. 그런데 술라웨시는 ‘술라’와 ‘웨시’의 합성어이다.

이 글을 쓰기까지 필자가 국내의 인도네시아 관련 학자 몇 명에게 확인을 시도했으나, 지명의 유래에 대해선 알 수 없었지만, 필자의 판단으론 ‘술라’ 또한 분명 ‘~라’ 지명의 하나이다. 어쨌든 이 술라웨시 섬의 북부 마나도 일대는 필자가 보기엔 분명 옛 우리 해양사의 무대인데. 아래의 내용은 필자가 확인한 근거들이다.

첫째, 위 지도에 보이는 Siladen 섬을 들 수 있다. 영어식으로 ‘실라덴’으로 읽혀지나, 이 역시 술라웨시를 셀레베스라 부른 포르투갈인에 의한 것으로 현지인들은 ‘실라단’ 또는 ‘실라당’에 가깝게 발음한다. 필자는 이 ‘실라단’이나 ‘실라당’이 ‘신라땅’으로 연상되는 것 같아 무척 흥미롭게 느껴진다.

<지도3>에 보이는 사각형으로 둘러쳐진 섬이 부나켄 섬으로 위 지도 상에선 나타나지 않지만 섬의 남쪽 해안에 휴양지로 유명한 셀라셀라Selasela가 있다. 이 셀라셀라 또한 포르투갈식 표기로 필자는 원래 ‘실라실라’란 발음의 변형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어쨌든 위 Siladen 섬은 스킨스쿠버 장소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곳인데 지도 상에 보이는 실라덴포인트Siladenpoint가 그 중심이다.

둘째, 마나도 일대의 주민의 인종 구성과 문화적 특성이다. 현지를 여행해 본 사람은 알고 있겠지만 특이하게도 마나도 지역의 주민들은 대다수가 외모 상으로 우리와 전혀 구별이 되지 않는 극동계 인종이다. 당연 남아시아 인종에서 볼 수 없는 몽골반점이 나타나고, 부계로 이어지는 Y-염색체가 한반도의 우리와 친연성을 지닌다.

또한 이 지역의 주민들은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개방적인 문화를 지니고 있는데다, 포르투갈 식민지의 영향으로 대다수가 기독교를 믿고 있다. 이 지역은 인구의 90%가 넘게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인도네시아에서 유독 기독교 세력이 강해 현재 종교분쟁으로 가끔 뉴스의 국제 면에 등장하기도 한다.

술라웨시 북부 일대는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포르투갈 식민지에 편입된 곳인데, 그 이유는 지리적 위치 때문이다. 즉 이곳 자체가 향로 산지이자, 동쪽에 위치한 향로제도로 유명했던 말루쿠 제도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지였다.

문화적 요인으로 살펴보면 우리와 같이 매운 음식을 선호하고, 정월대보름을 기리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목되는 것은 고인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고인돌의 존재는 이곳이 보다 이른 시기에 아시아 해양사의 무대였다는 반증이다.

셋째, 필자에게 가장 흥미로운 것으로 이곳 일대 미나하사 족에 전승되고 있는 ‘선녀와 나무꾼’에 관한 전승이다. 다소 길지만 아래의 인용문을 보자.

‘옛날 옛적 어느 호젓한 산골짜기에 조그만 연못이 있었다.
달 밝은 밤이면 이 연못에 어여쁜 아홉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을 하고 춤을 추며 놀았다. 그리고 새벽이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
이 아름다운 선녀들이 노는 것을 근처 숲속에서 숨을 삼켜가며 황홀한 심정으로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인근 마을에 사는 떠꺼머리총각 나무꾼. 하룻밤은 이 나무꾼 총각이 중대한 결심을 한다.
그는 선녀들이 목욕을 하며 노는 사이 살금살금 기어가 선녀 옷 하나를 감춘다. 목욕을 끝낸 선녀들이 옷을 찾아 입는데 한 선녀의 옷이 없다. 결국 여덟 선녀는 다시 하늘로 올라갔지만 옷을 잃어버린 선녀는 하늘로 올라가지 못한다. 그때 나무꾼이 나타나서 혼자 남아 어찌할 바 모르는 선녀를 위로하고 자기집으로 데려가서 아내로 삼는다.
세월이 흘러 어느 날 나무꾼은 자초지종을 고백하고 감추어둔 옷을 자기의 아내가 된 선녀에게 되돌려준다. 그런데 아내는 옷을 입자마자 하늘로 올라가버렸다. 나무꾼은 매일같이 괴로워하며 연못 주위를 배회하지만 한번 하늘로 올라가버린 자기의 아내를 찾을 수가 없었다.
어느 날 나무꾼의 아내였던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다보다가 자기의 남편이었던 나무꾼의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는 마침내 동료 선녀들과 함께 그 연못으로 다시 내려온다. 그리고 연못 주위에 지쳐 쓰러진 나무꾼을 일으켜 함께 하늘로 올라간다.’

위 설화는 지금은 고인이 된 태국 치앙라이 대학의 교수이자, 문화탐험가였던 김병호 선생의 탐사기 ‘우리문화 대탐험(황금가지 출판, 1997)’의 인도네시아 마나도 탐사기에서 인용한 것이다.
금강산을 무대로 한 우리의 그것과 완벽히 일치하는 내용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넷째, 위 미나하사 족의 언어에 있다. 이 또한 김병호 선생이 채집한 것으로서 미나하사 족의 언어 중에서 발견한 기본 어휘를 살펴보자. 미나하사 족은 1인칭 대명사를 ‘냐’, 2인칭대명사를 ‘니’라 한다. 이 또한 의미심장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남아시아 일대의 문화를 탐방해오던 김병호 선생은 오로지 ‘선녀와 나무꾼’ 설화의 확인을 위해 마나도를 방문하느라, 짧은 일정으로 마나도 일대를 심층 취재하진 못했다. 앞으로 우리 학계에서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미나하사 족은 또한 우리와 같은 묘비석을 갖는 무덤양식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지도를 통해 확인하면 술라웨시 북부 지역은 극동과 호주 대륙을 직선(가장 단거리)으로 잇는 중간지역에 위치해 있다. 필자가 앞서 언급한 중국 수당隋唐 시대의 사서에서 캥거루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점으로 볼 때 이미 우리의 삼국시대 이전부터 극동과 호주는 바닷길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술라웨시 북부는 그 교통의 거점이며, 위에서 확인한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해양항해의 중심 주체는 중국의 한족이 아니라, 우리 민족이었음이 분명하다.

근거를 더한다면 술라웨시와, 보르네오, 필리핀 남부 해역에 걸쳐 있는 지명 중엔 분명한 우리의 지명이 산재해 있다는 점이다. 필자가 확인한 지명만으로도 다물란Damulaan과 다무로그Damurog 등 담로계 지명과, 실라브Silab, 실라고Silago, 실라그Silag 등 신라계 지명이 각기 수십 군데 존재한다. 아래는 필리핀 술루제도의 지도이다.
   
  ▲ <지도4> 술루제도(붉은 색 표기). [자료사진 - 서현우]  
 
술루제도는 팔라완 섬에서 마나도를 잇는 바다의 중간 지역에 위치한다. 필자는 술루Sulu란 말이 술라의 변형이라 생각하는데 어쨌든 술루제도의 홀로 섬이란 이름의 섬을 소개해 본다.

영어식 표기론 Jolo라 하고 실제 발음은 ‘홀로’이다. 홀로 섬엔 최대종족인 타우수그 족과 바자우 족, 시나마 족이 거주하는데 타우수그 족은 필리핀 무슬림의 최대 종족으로 12~13C에 민다나오 북부에서 이주해온 종족이고, 바자우 족은 사마 족 계통의 종족이다.

여기서 흥미 있는 점은 사마.바자우 족의 언어의 방언인 바랑깅지어語로 ‘홀로’는 ‘심심한’, 또는 ‘외로운’이란 뜻을 갖고 있다고 한다. 우리말의 홀로와 같은 뜻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다 홀로 섬엔 Silat란 지명이 있어 더욱 흥미롭게 다가온다.

다음 장에선 무대를 한반도와 중국 대륙으로 옮기기로 하고 이 장을 마친다.

. ‘라’의 세계 -1

우리 역사의 고대국가 신라新羅. 그 신라를 실제 발음으론 ‘실라’라고 발음한다. 우리는 앞장에서 신라와 같은 발음을 지닌 Silla나 Sila(또는 Silah)가 동남아시아와 아라비아, 지중해 연안에서 지명으로서, 또 언어의 어휘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와 일본, 중국의 사서들엔 신라와 같이 ‘~라羅’로 끝나는 옛 지명들을 무수히 발견할 수 있다. 신라 외에 삼국의 사서들에 나타나는 ‘~라’ 지명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다라多羅, 탁라托羅, 탐라耽羅, 담라憺羅, 섭라涉羅, 가라加羅, 아라阿羅, 안라安羅, 아슬라阿瑟羅, 보라保羅, 발라發羅, 말라末羅. 담모라聃牟羅, 탐부라耽浮蘿, 섬라暹羅 등’

위 지명들 중 탁라, 탐라, 담라, 섭라, 담모라, 탐부라는 오늘날 학계의 정설로서 모두 제주도를 일컫는 것이라 하지만, 탐라 외엔 정확히 그렇다고 장담할 수 없다. 여러 이견이 있기 때문이다. 일각에선 섭라涉羅는 현재 오키나와 섬을 포함하는 류쿠 열도라 보기도 하고, 또 원광대학교 소진철 교수의 견해에 의하면 담모라聃牟羅는 지금의 타이완 섬으로, 당시 백제의 속국이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정확한 위치 비정이 어려운 것은 사료의 부족과 함께, 위 지명들이 조선시대에선 거의 사라졌기 때문이다. 기껏 제주도를 탐라라 병행하여 부른 것을 제외하곤 말이다.
그런데 위 지명들 중 맨 마지막의 섬라暹羅는 논란의 여지없이 오늘날의 태국을 뜻한다. 논란의 여지가 없는 이유는 섬라가 조선왕조실록에 수차례 등장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까지 태국을 일컫는 지명이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처음에 한국인 대부분의 인식이 그렇듯이 섬라가 중국을 통해 들어온 지명이라 보았다. 그러다 하나의 의문이 떠올랐다. 의문은 바로 섬라의 ‘라羅’ 지명에서였다. 비록 섬라가 중국을 통해 들어온 지명일지 모른다 하더라도, ‘라’는 위에서 보았듯이 우리 동이계 지명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명의 유래가 중국이 아니라, 우리로부터 비롯되었는 게 아닌가?

필자는 지금까지 3차례에 걸쳐 태국을 다녀오면서, 태국의 지명들에 ‘~부리’란 지명이 허다함을 알고 있다. 칸차나부리란 도시의 이름도 그렇고, 펫차부리란 방콕의 거리 이름도 그렇다. 현재 태국엔 ‘~부리’란 지명이 무수히 많다.

지난해에 타계한 문화탐험가이자, 태국 치앙라이 주립대학 교수를 역임한 김병호 선생은 태국의 ‘부리’가 백제의 지명과 연관 있음을 주장한 바 있다. 백제의 부리 지명은 도읍지 소부리所夫里(사비)를 비롯, 고사부리古沙夫里, 미동부리未冬夫里, 모량부리牟陽夫里 등이 있다.

김병호 선생은 백제의 ‘부리’가 신라에선 ‘벌’로 변화되었다며, 그 예로 서라벌을 들기도 했다. 그런데 그의 견해 중 놀라운 것은 이 ‘부리’, ‘벌’이 아프가니스탄의 수도인 카불과 터키의 이스탄불에서의 ‘불’과도 언어적 친연성을 가지고 있다고 본 데에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스탄불의 옛 이름인 콘스탄티노플과 영국의 리버풀 등의 ‘플’이나 ‘풀’ 등과도 연결된다고 본 점이다.

필자에게 김병호 선생의 견해는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다. 일찍이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우리문화가 중국보다 오히려 그리스나, 페르시아에 더 가깝다고 주장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 필자는 단재 선생의 주장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스나 페르시아는 우리와 인종적으로부터 다르다는 단순한 사고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던 필자는 삼국유사에서 중근동 아라비아 세계의 언어학적 증거를 발견하곤, 단재 선생의 선견지명에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삼국유사의 언어학적 증거는 바로 신라향가 처용가에 보이는 ‘라후덕羅候德’이란 글귀이다. 라후덕의 ‘라羅’는 태양(햇님)을, 후候는 제후나, 후작에서와 같은 존칭의 뜻을, 덕德은 은혜나, 덕택을 의미하는 것으로, 전체적인 뜻은 ‘태양의 은덕’이란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바로 태양을 뜻하는 ‘라羅’이다.

독자들은 고대 이집트에서 태양신을 ‘라Ra’라고 일컬었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뿐만이 아니다. 중근동 지방에서 ‘라’는 태양신뿐만 아니라, 신성하거나, 존귀함을 뜻하기도 한다.
이슬람교의 유일신 ‘알라(Al-Rah)'를 보자. Al은 단지 정관사일 뿐, 신을 뜻하는 말은 바로 Rah이다. 또 이슬람 역법을 ’히쥬라‘라 칭하는 것이나, 성지인 메카 방향을 가리키는 말인 ’키브라‘의 ’라‘도 모두 그런 의미를 갖고 있다.

더하여 ’라‘는 대지大地라는 뜻도 갖고 있어, 우리와 ’~라‘와 같이 여러 지명에서 쓰이고 있다.
우리가 흔히 사하라 사막이라 부르는 ‘사하라The Sahara’를 예로 들어 보자. 사하라는 영어식 발음이고, 원음은 첫음절에 엑센트가 놓인 ‘사라Sahra’인데 사막, 또는 불모지, 황무지란 뜻이다. 더하여 중세 유럽인들이 아라비아의 여러 나라들을 통칭하여 사라센 제국諸國이라 했을 때의 사라센은 바로 사막의 사람들을 뜻했다. 이 이외에도 이라크 최대의 항구도시 ‘바스라’나, 이슬람교의 한 종파인 시아파의 성지로 유명한 ‘카르바라’, 몽골제국 일칸국의 수도였던 아제르바이잔의 ‘마가라’ 등 오늘날 중근동 지방엔 무수한 ‘라’ 지명이 산재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니, 중근동의 ‘라’가 태양을 뜻함과 동시에 대지를 뜻하는 지명으로 사용되고 있다니? 그것은 우리 고대사에 보이는 무수한 ‘~라’와 처용가에서 나타나는 ‘라후덕’의 ‘라’와 일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근동과 한반도가 고대의 어느 시기에 관련성을 맺고 있었다는 말인가? 더불어 처용가로 유명한 처용은 학계에서조차 아라비아나, 페르시아 출신이라 추정하고 있는 인물이다. 필자는 이 점에 주목했다. 그래서 인도양과 동남아시아 세계에서 ‘라’ 관련 지명을 조사해 보았다.

그 결과 무수한 ‘~라’들이 존재했거나, 존재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첫 번째로 발견한 곳은 남부 인도였다. 남부 인도의 고대국가 ‘촐라’와 ‘체라’가 필자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각기 인도 반도 남쪽 끝의 동과 서의 해안에 나란히 자리잡은 촐라국과 체라국은 모두 해양국가였다. 이들 국가는 기원 전 2~3C의 어느 시기부터 기원후 10C가 넘기까지 오랜 세월 동안 왕국을 유지했는데, 특히 촐라국은 한때 강력한 해군력을 기반으로 멀리 중근동에서부터 동남아시아에 이르는 인도양의 광활한 지역에 걸쳐 해상무역권을 장악한 국가였다. 촐라는 자신들을 ‘태양국’이라 칭했는데, 이 사실에서 우리는 촐라의 ‘라’가 인도 지역 내에서 유래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 촐라와 체라 왕국 지도. [자료사진-서현우]  
 
위 지도상의 촐라와 체라가 위치한 인도 남부는 오늘날 주로 타밀족의 분포지역이다. 타밀족은 그 옛날의 드라비다 족에서 갈라진 일파인데, 드라비다 족은 오늘날 인도인의 주류를 이루는 아리아인이 인도 대륙에 진출하기 전, 인도의 선주민으로서 인더스와 하라파의 위대한 문명의 주인공들로 알려져 있다.

오늘날 약 5천만 명에 육박하는 타밀족 중의 일부가 스리랑카에 2백6십여만 명이 존재한다. 그곳의 타밀족은 소수민족으로 스리랑카 사회의 주류인 아리안계 싱할리족에 대항하여 분리운동을 전개하고 있음은 잘 알려져 있다. 유명한 게릴라 조직 타밀호랑이가 그들이다.

필자가 여기서 타밀족을 자세히 소개하는 이유는 최근 대두되기 시작한 타밀문화와 우리문화의 상호관련성 때문이다.

일찍부터 인도문화와 우리문화의 관련성이 제기되어 왔지만 그동안 크게 주목을 끌지는 못했다.
그 중 한국어와 인도 드라비다어와의 친연성을 최초로 제기한 사람은 공교롭게도 구한 말 미국인 선교사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 1863~1949)로, 그는 자신의 저작 '조선어와 인도 드리비다어의 비교문법’(1905)과 ‘The passing of Korea’(1906)에서 40여개의 어휘를 비교하여 그 유사성을 지적하면서, 한국어와 만주어의 유사성은 한때 가까웠지만, 한국어와 드리비다어는 아직도 친족관계를 지니고 있다고 지적했다.

고대 드라비다어는 현재 4종류의 언어로 파생되어 발전해 왔는데, 타밀어, 말라얄람어, 텔루구어, 칸나다어가 그것이다. 이 중의 타밀어와 텔루구어는 과거 촐라국의 언어로서 오늘날 인도 타밀나두주州에서, 말라얄람어는 체라국의 언어로서 오늘날 케랄라 주州에서 사용되고 있다.

우리와 고대문화를 공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일본에선 1970년대부터 ‘드라비다어와 일본어’ 또는 ‘타밀어와 일본어’ 등을 중심으로 한 연구가 진행되어 일본어와의 유사성을 밝혀왔다. 그런데 아래에서 보듯이 한국어와 타밀어의 관계가 일본어와 타밀어와의 관계보다 훨씬 친연성이 높다.

한국어 타밀어 일본어
엄마     엄마    하하
아빠     아빠    치치
나        나      와따시
너        니      아나따
하나     아나   히토추
둘(두)  두      후타추
셋        셋       미추

한국어:                      타밀어:
나는 너와 한국에 왔다. 나누 닝가룸 한국 완돔
나는 그런 것 모른다.    나누 그런 거 모린다.


위의 비교표는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이렇게 놀라운 유사성은 과거 우리 조상들과 타밀인이 상당한 기간 접촉을 했다는 언어학적 증거이다. 이외에 두 언어간엔 유사한 어휘가 셀 수 없이 많지만 여기선 생략하기로 하고, 최근에 언론을 통해 알려진 내용을 소개해 본다.

아래는 지난해 캐나다 토론토 대학의 남아시아 연구센터와 토론토의 타밀인협회, 등이 자료들을 추적한 결과를 근거로 한, ‘신라4대왕 석탈해는 인도인’(뉴스메이커, 2006.8.11)이란 제하의 기사를 간략히 정리한 것이다.

석탈해昔脫解: 자신을 “숯과 숯돌을 사용하는 대장장이 집안 출신”이라 함.
성씨 석(Sok): 타밀어로 대장장이란 뜻의 ‘석갈린감(Sokalinggam)'의 줄인 말. 석갈린감이나, 줄임 말의 석 또는 ’석가(Soka)' 등은 현재도 타밀인의 남자 이름으로 남아 있음.
탈해(Talhe): 타밀어로 ‘머리’, ‘우루머리’, ‘꼭대기’를 의미하는 ‘탈에(Tale)'나, ’탈아이(Talai)'와 거의 일치.
단야구鍛冶具: ‘대장간 도구’란 뜻인데, 당시 타밀어의 ‘단야구(Dhanyaku)’와 발음이 와벽히 일치.
니사금尼師今: ‘임금’의 어원. 타밀어의 ‘니사금(Nisagum)’으로, 일반적인 왕보다 상위 개념의 황제나, 대왕을 뜻함.
대보大輔: 석탈해가 처음 맡은 국무총리 격의 벼슬이름. 타밀어에서 ‘신의 다음 자리’, 또는 ‘막강한 사람’이란 뜻의 ‘데보(Devo, 남성)’와 ‘데비(Devi, 여성)’에서 비롯됨.


위에 실은 내용은 지명 관계상 극히 일부일 뿐이다.
두어 가지 덧붙인다면, 석탈해가 자신의 출신지를 다파나국多婆那國이라 하였는데, 다파나는 산스크리트어와 고대 타밀어로 태양을 뜻하는 다파나(Tapana) 또는 다파난(Tapanan)과 일치해 다파나국은 ‘태양국’, 즉 당시 타밀인의 촐라왕국임을 말하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석탈해가 가져온 동물 뿔로 만든 술잔인 각배角杯인데, 각배는 지중해 연안의 그리스와 서아시아의 페르시아(이란),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발생한 것으로, 그동안 우리 학계에선 중앙아시아를 거쳐 전해진 것이라 보았지만, 정작 고구려나 백제에선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바다를 통해 신라에 전해진 것을 알리고 있다.

필자는 위의 견해들을 지지한다. 더불어 바다야말로 당시엔 육지에 비할 수 없는 문명교류의 고속도로였다고 확신한다. 누가 봐도 위의 증거들은 그것에 대한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이다.
필연적으로 독자들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지난해에 국내에 알려진 캐나다 타밀협회의 연구 성과들엔 석탈해 관련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가야 허황후의 출신지가 기존에 의견이 분분하던 인도 북부의 아유타가 아니라, 촐라국 영토에 위치한 ‘아요디야 쿠빰’이란 것과, 박혁거세를 옹립한 신라 6촌장 모두가 타밀문화와 관련이 있다는 등인데, 여기선 그러한 내용이 있다는 사실만 간략히 전한다.

이제 여기서 우리 민족의 기원을 유추해 보기 위해 현대 과학의 성과에 눈을 돌려 보자. 우리는 앞 장에서 인간 유전자 중의 가장 한국적 특징을 지녔다는 조직적합성 항원체 HLA-B 59의 분포 영역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한국인에 고유한 유전자이므로, 극소수 스페인인을 제외하곤 유럽에선 전무하다고 할 수 있는 이 유전자가 인도의 일부에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드라비다계 인도인과 우리는 문화만이 아니라, 유전적으로도 관련이 있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다음은 지난 해 동아일보(2006.7.21)에 소개된 단국대학교 김욱 교수의 연구결과로, ‘한국인, 아버지는 농사꾼, 어머니는 기마민족’이란 제하의 기사를 정리한 것이다.

‘남성염색체(Y염색체) 분석결과 한국인 남성은 농경민족에게 많이 나타나는 ’M122‘와 ’SRY465‘라는 남방계통 고유의 유전자를 가진 비율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Y염색체는 부계로만 유전되고 다른 염색체와는 섞이지 않기 때문에 순수 ’부계‘ 조상을 찾는 수단으로 활용된다.

모계의 경우 몽골과 중국 중북부 등 동북아시아에 분포하는 북방계 성향이 뚜렷하다. 미토콘도리아 DNA 조사결과 한국인의 60% 가량은 북방계 모계혈통을 따른다. 한반도로 이동한 북방계 민족과 남방에서 유입된 민족이 섞이면서 오늘날의 한국민족을 형성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앞서의 HLA-B 59와, 위의 연구결과에서 우리 민족의 뿌리가 50% 이상 그 기원이 남방과 관련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므로 바다의 한국사는 우리 민족의 기원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이 장의 마지막으로 인도양의 또 하나의 ‘~라’ 지명을 소개하고자 한다. 중국의 고지도에서 마라碼羅라고 기록된 오늘날의 몰디브 섬이 그것이다.

그런데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몰디브 섬이, 동북아 한자문화권의 어떤 기록에도 나타나지 않는 촐라와 체라와는 달리, 마라라고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필자의 판단에 이 점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 그 이유는 바로 마라碼羅에서의 ‘라羅’의 발음에 있다.

우리가 중근동의 여러 지명에서 확인한 현지 발음의 ‘라’를 중국어로선 결코 ‘羅’라 기록할 수 없다. 왜냐하면 羅는 보통어인 북경어론 ‘루어’라 발음되고, 또 광동어에선 ‘로’로 발음되기 때문이다.
오로지 오늘날의 한국인만이 羅를 정확히 ‘라’라고 발음하고 있다. 앞에서 확인한 태양을 뜻하는 처용가의 ‘라후덕’의 라는 역시 태양을 뜻하는 중근동의 ‘라’와 완벽히 일치하는 발음이 아닌가?

뒤에서 다루겠지만 중국 한족漢族은 결코 해상민족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중국의 옛 문헌에 나타나는 ‘~羅’ 지명은 기실 중국 한족 고유의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민족의 해상활동의 성과를 반영한 것이란 사실이다.

한 가지 덧붙여, 백제가 망한 후, 왜국이던 일본이 백제로부터 자립했음을 나타내기 위해 국호를 태양을 상징하는 일본日本이라 제정한 것과, 역사서인 고사기古事紀와 일본서기日本書紀를 편찬하면서 자신들의 기원을 천손족天孫族의 하강에서라고 한 것은 ‘라’와 태양과의 상관관계로 볼 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본다.

알다시피, 고대 일본은 야요이 시기 한반도에서 건너간 집단에 의해 역사가 시작되었고, 실상 우리와 동일한 민족적 기원을 두고 있음이 아닌가? 그 사실은 오늘날의 유전자가 말해주고 있다.

일본의 고대 수도의 하나인 ‘나라’ 역시 필자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나라’는 오늘날의 한국어로 국가를 뜻하는 보통명사이다. 그런데 필자는 이 ‘나라’의 기원이 원래 모국을 뜻하는 ‘나의 라’에서 기원한 것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나의 라’에서 ‘나’는 언어의 변천에서 가장 보수적인 인칭대명사이다. 고대에도 ‘나’는 1인칭 대명사로 쓰여 진 데다, 더불어 ‘나’에다 지명이나, 국호에 쓰이는 ‘라’가 붙은 걸로 보아, ‘나라’의 기원이 모국을 뜻했을 가능성이 한층 크게 느껴진다.

어쨌든 우리의 지명인 ‘~羅’는 아시아 바다의 여타 곳곳에서 발견되는 데, 다음 장에서 살펴보자.

2. '라'의 세계 -2 <서현우의 바다의 한국사 9>

우리는 앞장에서 우리 역사에 나타나는 무수한 ‘~라’ 지명이 중근동과 관계가 있음을 여러 사례를 통해 확인해 보았다.

이집트의 태양신 라(Ra)와 이슬람교의 유일신 알라(Al-Rah), 또 술탄협의체를 칭하는 ‘슈라’ 등에서 알 수 있는 신성함이나, 존귀함의 뜻에다, 우리의 ‘~라’와 같이 여러 지명에서 사용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더하여 근래에 와서 남부인도의 문화와 우리문화의 친연성이 거듭 확인되고 있음에 따라, 남부인도의 고대국가 촐라국과 체라국의 국호에 따른 ‘~라’가 우리의 지명 ‘~라’와의 관련성이 있음에 주목하게 되었다.

특히 중국고지도상의 마라碼羅(오늘날의 몰디브 섬)를 통해 ‘~라羅’라는 우리의 한자음 표기가 실제의 발음을 반영하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장에선 이러한 ‘~라’ 지명이 한반도에 이르기까지의 동남아시아에 남긴 여러 자취를 확인해 보기로 하자.

우리는 앞장에서 오늘날의 태국이 우리역사에선 섬라暹羅라 지칭했음을 확인했다. 그런데 이 섬라란 지명이 정확히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확실치 않다. 단지 명사明史에서 초대황제 홍무제(주원장) 시기에 섬라가 최초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 시기부터 쓰였음은 분명하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섬라暹羅란 지명이 비록 중국의 사서에 시기적으로 앞서 나타나긴 하지만, ‘라羅’에서 알 수 있듯이 지명의 유래는 우리의 것이란 사실이다.

섬라는 흔히들 태국의 옛 이름 시암Siam(또는 샴)의 음역이라 한다. 필자의 견해 또한 이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필자의 관심은 Siam의 음역을 暹羅란 한자어로 나타낸 점에 있다. 오늘날 정확한 유래는 확인할 수 없지만 학계에선 Siam의 유래를 대략 ‘흑인의 나라’란 설과, ‘나무에 뒤덮인 산, 즉 흑산黑山의 나라’란 설로 나누고 있다. 그런데 섬라에서의 섬暹의 뜻은 ‘햇살이 치미다’, ‘해가 돋다’이다. 즉 섬라暹羅는 글자 그대로의 의미론 ‘햇살 돋는 땅’으로 시암Siam의 본래 뜻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여기서 필자는 두 가지의 의미를 발견한다. 하나는 삼국유사에 보이는 ‘아침의 땅’이란 뜻의 ‘아사달’을, 또 그것과 연관되는 태양국 ‘촐라’와 일본이란 국호를, 또 하나는 섬라와 신라의 중국 보통어 발음상의 유사성이다. 중국 보통어 발음으로 섬라暹羅는 시엔루어(xian-luό)이고, 신라新羅는 신루어(xin-luό)로 매우 흡사하다. 그런데 오늘날의 중국에서 사용되는 언어의 종류는 무려 57여종이다. 이 중에서 우리의 언어와 친연성이 깊다는 절강이나, 복건에서 사용되는 언어 중에는 위 섬라와 신라가 완전히 동일한 발음으로 읽히는 언어가 있을 가능성도 있다. 이 점은 필자가 앞으로 확인해 나갈 일이다.

기록으로 볼 때 태국인(타이인)이 정착한 태국 땅에 중국 대륙인이 대거 이주했을 때는 명나라 개국 직후이다. 뒤에서 다루겠지만 명나라의 개국과 동시에 초대황제 주원장은 중국역사상 가장 강고한 해금정책을 실시했는데 이에 반발한 해상세력이 대거 대륙을 탈출하면서 태국 땅에까지 이른 까닭이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하에서 섬라란 지명이 명사明史에 최초로 기록된 것으로 볼 때, 섬라란 지명은 늦어도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라 볼 수도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주지해야할 점은 앞서 살펴본 오늘날 태국에 남아 있는 ‘부리’란 백제의 지명과, 태국의 신라 관련 지명이다. 아직 필자가 그 기원을 확인하진 못했지만 방콕 인근에만도 안그 실라 사원(Wat Ang Sila)이 있다.

더하여 타이인이 오늘날의 태국 땅에 정착한지는 9C 이후부터란 사실이다. 타이인의 유래는 오늘날 학계에서 두 가지 학설로 나뉘어져 있다. 하나는 티벳 고원에서 유래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양자강 이남에서 남하하였다는 것인데 현재까지 어느 것도 확실하지 않다.

어쨌든 백제의 지명인 ‘부리’는 타이인이 오늘날의 태국 땅에 이주하기 시작한 9C 이전의 지명이 아닌가? 게다가 신라 관련 지명마저 남아 있다. 그렇다면 타이인의 이주 이전에 백제의 해상력과, 신라선단의 활동영역이 오늘날의 태국 땅에까지 미쳤다는 말이 된다.

이러한 점은 단순히 가설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상당수 독자들은 백제의 담로계 지명이 동남아시아 일대와 스리랑카와 인도 동쪽에 분포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더하여 필자는 앞장에서 스리랑카에 신라 관련 지명이 3곳이나 있다고 밝혔다. 이 담로계 지명과 신라 관련 지도는 방글라데시에서도 발견된다. 이와 함께 독자들은 이제 한반도와 태국 사이의 또 다른 ‘~라’ 지명의 확인을 통해 고대 우리 해양사에 대한 확신을 더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태국의 섬라를 지나 말레이 반도로 시선을 돌려보자. 말레이시아의 수도 콸라룸푸르는 콸라Kuala와 룸푸르Lumpur란 두 어휘의 합성어이다. 말레이시아어로 콸라(영어식 발음으론 쿠알라)는 해구海口란 뜻이고, 룸푸르는 진흙이란 뜻이다. 이로서 우리는 ‘콸라’가 바다와 관련 있음을 알 수 있다.

독자들은 아라비안나이트의 신밧드의 모험을 알고 있을 것이다. 신밧드가 4번 째 여행 중에 도착한 ‘카라’는 콸라룸푸르 북서쪽에 위치한 현재의 페낭Penang이다. 최근에 필자가 본 일본의 해양서적엔 여전히 그곳이 ‘카라’라 표기되어 있다.

이제 콸라룸푸르와 카라가 위치한 말라카 해협을 지나 남중국해로 접어들어 보자.

독자들은 백제의 부흥운동을 이끈 무장이자, 백제의 유민으로 당나라에서 무공을 세운 흑치상지 장군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다. 아래는 1929년 중국에서 발견된 그의 묘비명의 일부이다.

‘부군府君은 이름이 상지常之이고 자字는 항원恒元으로 백제인百濟人이다. 그 조상은 부여夫餘씨로부터 나왔는데 흑치黑齒에 봉해졌기 때문에 자손들이 이를 씨氏로 삼았다.’

위의 내용은 상당수 독자들엔 익히 알려져 있을 것이다. 내용의 핵심은 흑치상지가 본래 부여상지였는데 흑치지역에 봉해져 흑치를 성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여기서 문제는 바로 흑치 지역이 어디인가 하는 것이다.

오늘날 학계에서 흑치지역을 둘러싼 여러 주장이 제기되어 왔는데 그 중에서도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중국의 학자 량자빈梁嘉彬 등이 제기한 ‘필리핀’ 설이다. 이 주장은 저명한 백제사학자 이도학 박사에 의해 수용되었고, 최근에 이르러 필리핀 혹은 보르네오일 것으로 일반화되고 있다.

위 주장이 사실이라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동안 우리가 배워온 역사에서 백제는 삼국 중 가장 허약한 나라였다. 그러던 것이 근래에 학계에서 수용되기 시작한 일본의 국가기원으로서의 백제와, 또 그 강역에 대한 위의 이러한 견해들은 우리로 하여금 백제사에 대한 인식의 대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어쨌든 필자에겐 흑치 지역에 대한 위의 견해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그 이유는 필리핀이나, 보르네오 또한 우리의 ‘~라’ 지명의 무대였기 때문이다. 이제 그 점에 대해 논의해 보자.

자, 이제 우리들의 관심을 동남아시아의 보르네오 섬으로 돌려보자.

   
  ▲ 칼리만탄(보르네오) 섬 지도 [자료사진 - 서현우]  
 
보르네오 섬은 세계에서 3번째로 큰 섬으로 전체 면적의 70% 영역의 남부지역이 인도네시아령이고, 나머지 북부는 대부분이 말레이시아령을 이루는 가운데 작은 면적의 보르네이 왕국이 말레이시아령에 둘러싸여 있다. 보르네오란 이름은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에 네덜란드인에 의해 붙여진 이름이며, 현재 인도네시아에선 칼리만탄이라 불리고 있다.

필자가 여기서 칼리만탄을 소개하는 이유는 우리 역사와 관련되는 몇 가지 문제 때문이다.

하나는 칼리만탄 섬의 서부도시, 폰티아낙Pontianak 일대가 20C 전반기까지 중국에서 서파라西婆羅라 불렸다는 점이다. 서파라西婆羅라면 우리의 지명이 아닌가?

   
  ▲ 서파라(서부칼리만탄) 지도. [자료사진 - 서현우]  
 
독자들은 혹시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인 란방蘭芳(란팡)공화국에 대해 들어보았는가? 1777년, 미국 독립선언이 발표된 그 이듬해에 칼리만탄의 서파라에선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인 란방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초대 대총장(대통령 격)을 역임한 라방백羅芳伯(뤄팡보, 1738~1796)에 의해 시작되어 1884년 네덜란드에 의해 동인도 식민지에 병합되기까지 107년의 역사를 이은 공화국이었다.

란방공화국의 수도는 폰티아낙 인근의, 세계에서 4번째로 긴 강이라는 카푸아스 강 연안의 도시 만도르Mandor(중국에선 동만률東萬律)이고, 주민 구성은 중국에서 이주한 객가客家인들로 이뤄졌다 하여, 학계에선 객가공화국, 혹은 화교공화국으로 알려져 있다.
(객가客家: 북경어 커자, 객가어 학가로 발음. 유명한 객가인 싱가포르의 이광요 전 총리의 조부와 증조부는 란방공화국 출신으로 알려져 있음)

이 란방공화국이 유명해진 것은 1961년 홍콩에서 출판되어 국제학술계에 파문을 낳은 홍콩역사학자 라향림羅香林의 저서 ‘서파라주 라방백 등이 건립한 공화국에 대한 고찰’이란 저서 때문이었다. 그러다 지난 2005년 인도네시아 출생의 화교 전기 작가인 장영화張永和, 장개원張開源 공저의 ‘라방백전’이 인도네시아에서 출간된 바 있다.

그런데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위 저술에도 언급된 바, 중국인들에게 있어서 서부칼리만탄 일대를 서파라란 지칭과 함께 파라이婆羅夷라고도 불렀다는 점이다. 파라이라면 파라에다, 동이족의 이夷를 말함이 아닌가?

더하여 필자는 란방공화국을 건립한 라방백羅芳伯의 본명은 방백芳栢인데, 새로운 성씨 라羅는 파라의 ‘라’에서, 이름은 본래의 방백芳栢의 백栢에서 존칭을 나타내는 백伯으로 바꿔 방백芳伯이라 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 란방공화국의 란방蘭芳은 네덜란드의 음역인 화란和蘭의 ‘란’과, 본래 성씨인 방芳의 조합이었다.
(인도네시아를 식민지배한 네덜란드는 당시 서부칼리만탄의 영유권을 주장하던 중이었음)

서파라西婆羅와 파라이婆羅夷라?
이에 자극받아 필자는 서부 칼리만탄 폰티아낙 일대의 문화에 대해 조사해 보았다. 그러자, 의미 있는 발견들이 뒤따랐다. 난생설화, 옹관묘(독무덤), 홍살문 등은 모두 우리 문화와 연결되는 요소들이었다. 또 이 지역에 거주하는 종족인 다약족은 외모상으로 우리 한국인과 별반 차이를 느낄 수 없다고 한다. 여기에다, 란방공화국의 수도였던 만도르 인근의 시다스Sidas에서 삼바스Sambas에 이르는 지역엔 현재까지 기원이 확인되지 않은 왕묘급 고분군이 존재하고 있다고 한다.

더불어 빠뜨릴 수 없는 또 한 가지는 이 지역이 백제의 담로계 지명으로 불렸다는 점이다. 중세 중국의 항해서書 ‘순풍상송順風相送’에는 ‘오서浯嶼(복건성)에서 제갈담남諸葛擔藍(칼리만탄 남부)까지의 항로에 담물란주부淡勿蘭州府가 있다’고 하였는데, 중국의 학자 시앙따(向達향달) 씨 등은 담물란주부를 서파라로 비정한 바 있다. 담물란주부의 담물이 바로 백제의 담로계 지명인 것이다.

이상에서와 같이 서부 칼리만탄 지역은 분명한 우리 해양사의 무대이다. 중국의 기록에 나타나는 파라이婆羅夷란 동이계 지명과, 또 담물淡勿이란 백제의 지명은 단지 우리와 문화적 친연성을 지닌 인도의 촐라, 체라와는 달리 우리 민족사의 영역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여기서 독자들은 한 가지 의문을 가질 것이다. ‘파라’가 아닌 ‘서西파라’라면 혹시 東파라 등의 또 다른 파라가 있는 것이 아닌가에 대한 궁금증을 말이다. 이 궁금증에 대한 필자의 대답은 ‘그렇다’이다.

이제 또 다른 ‘파라’를 찾아가 보자. 독자들은 아래 지도에서 팔라완 섬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팔라완 섬 지도. [자료사진 - 서현우]  
 
위 지도엔 필리핀 루손 남부에서 보르네오(칼리만탄) 섬 북쪽으로 길게 잇는 띠 모양의 섬이 보인다. 바로 팔라완Palawan 섬이다. 이 팔라완 지명의 유래에 대해선 4가지 설이 존재하지만 아직까지 명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 그 4가지 설은 다음과 같다.

1. 팔 라오 유: 중국어로 ‘아름다운 항구’란 뜻.
2. 팔라완스: 인도어로 ‘영토’란 뜻.
3. 팔와: 원주민이 부르는 식물 이름에서 유래한다는 설.
4. 파라구아의 변형: 스페인어에서 ‘접힌 우산 모양’에서 유래한다는 설. (남아메리카의 파라과이는 여기서 유래)

독자들은 어느 설이 가장 가깝다고 생각하는가?

필자의 생각엔 그 어느 것도 아니다. 그 이유는 팔라완이 실제론 서파라의 파라와 관계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다음의 남중국해 지도를 통해 판단의 근거를 들어보겠다.

   
  ▲ 파라셀 군도, 스프라틀리 군도, 팔라완 섬 지도. [자료사진 - 서현우]  
 
지도상엔 위아래로 두 개의 사각형이 둘러져 있는데 위의 것은 파라셀(Paracel) 군도이고, 아래의 것은 스프라틀리(Spratly) 군도이다. 이들은 흔히 서사군도西沙群島와 남사군도南沙群島로 더 알려져 있으며 현재 국제적으로 영유권 분쟁 상태에 놓여 있다. 그런데 이들 섬의 명칭 또한 팔라완과 마찬가지로 유래가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면 여기서 이들 섬의 이름을 한번 나열해 보자.
- 파라셀, 스프라틀리, 팔라완.-

무엇인가 공통성이 발견되지 않는가? 필자는 이들 고유명사가 모두 ‘파라’와 관계가 있다고 판단한다. 즉 파라셀에서 파라를, 스프라틀리에서 서파라를, 팔라완에서 파라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필자가 확신하건대 스프라틀리의 어근語根인 ‘스프라’는 분명 ‘서파라’의 변형이며, 팔라완의 ‘팔라’ 또한 ‘파라’의 변형이다. 여기서 팔라완의 ‘완’은 장담할 순 없지만 만灣을 말하는 게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臺灣(대만)을 타이완이라 발음하듯이 말이다. 이 점에 대한 판단은 독자들의 몫으로 돌리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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