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동설화
삼국유사의 백제 서동설화는 동성대왕의 익산천도와 관련된 것으로 5세기말인데 그와 관련된 유적, 유물들이 7세기 무왕대의 것이라는 설이 아직도 통하고 있는 것 같다. 삼국유사 기이2 무왕조의 설화는 아래와 같다.
『제30대 무왕의 이름은 장(璋)이다. 어머니가 과부[寡]로서 경(京)의 남쪽 못 가에 집을 짓고 살다가 못의 용과 통하여 낳았는데 어릴 때 이름은 서동으로 재주와 도량이 헤아리기 어려웠다. 늘 산마[薯여]를 캐서 파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으므로 사람들이 그 때문에 이름으로 삼았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 선화(善花/일명 善化)가 아름답기 비할 데가 없다는 말을 듣고 머리를 깎고 서울로 가서 마을의 뭇 아이들에게 마를 먹이니 뭇 아이들이 친해져서 따르게 되었다. 이에 노래를 지어 아이들을 꾀어 부르게 하니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정을 통하고 서동방을 밤에 몰래 안고 잔다"라고 불렀다. 동요가 서울에 가득 퍼져 대궐 안까지 들리자 백관들이 극력 간해서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을 보내게 되어 곧 떠나려 할 때 왕후가 순금 한 말을 주어 보냈다. 공주가 귀양지에 이를 때쯤 도중에 서동이 나와 공주에게 절하면서 곁에서 지키며 가겠다고 했다. 공주는 그가 비록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지만 짝으로 믿고 기뻐했다. 이리하여 같이 가면서 몰래 정을 통했다. 그 뒤에 서동의 이름을 알았고 노래가 맞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함께 백제로 와서 모후가 준 금을 내놓고 살아갈 계획을 의논하려하자 서동이 크게 웃으며 "이게 무슨 물건이오"라고 하자 공주가 "이건 황금인데 백년 동안 부를 누릴 것이오"라고 답하자 서동은 "내가 어릴 때부터 마를 캐던 땅에 흙더미처럼 쌓아 두었소"라고 했다. 공주는 듣고 크게 놀라면서 "그것은 천하의 지극한 보물이니 그대가 지금 그 금이 있는 곳을 알면 그 보물을 부모님이 계신 대궐로 실어보내면 어떻겠소"라고 하자 서동이 "좋소"라고 했다. 그래서 금을 모아 산더미[丘陵]처럼 쌓아놓고 용화산 사자사의 지명법사에게 가서 금을 실어보낼 계책을 물어보니 법사가 "내가 신력(神力)으로 보낼 수 있으니 금을 가지고 오시오"라고 했다. 공주가 글을 적어 금과 함께 사자사 앞에 두었다. 법사는 신력으로 하룻밤 새에 그 금을 신라 궁중으로 실어보내자 진평왕은 그 신통한 변화를 이상히 여겨 더욱 존경하여 항상 편지를 보내 안부를 물었다. 서동은 이로 말미암아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 하루는 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가려고 용화산 밑 큰 못 가에 이르니 미륵삼존이 못 속에서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절을 했다. 부인이 왕에게 이르기를 "모름지기 이 곳에 큰 절을 지어 주십시오. 굳은 소원입니다"라고 했다. 왕이 허락했다. 지명법사에게 가서 못을 메울 일을 물으니 신비스러운 힘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헐어 못을 메우고 평지를 만들었다. 여기에 미륵삼존의 상을 만들고 회전(會殿)과 탑과 낭무(廊무)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국사(國史)에서는 왕흥사라 했다]라 했다. 진평왕이 많은[百] 장인[工]을 보내 도왔는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절이 있다[三國史에는 법왕의 아들이라 했으나 여기선 과부[獨女]의 아들이라 하니 자세히 알 수 없다].』
실사적인 해석
달라진 왕통
「과부의 아들」이라 한 것은 기존의 왕통과는 다른 왕통이라는 뜻이다. 무왕이라고 나오는 인물은 무왕이 아니라 동성대왕이고 가야왕족이다. 기존의 백제 부여씨와는 다른 김씨인 것이다. 과부라고 표현한 것이 아버지를 모른다는 뜻이고 백제 부여씨가 아니라는 것을 은유한 것이다. 이것도 유사저자가 실사를 알았다는 근거가 된다. 단순히 설화를 채록한 것이 아니고 실사는 절사하고 그 대신 의도적으로 설화를 지어 넣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서기 무열기 7년 4월조에 무령왕이 아들 사아군을 열도에 후왕으로 보내면서 「먼저 조공사로 간 마나군은 백제국주의 골족이 아닙니다[前進調使麻那君者 非百濟國主之骨族也]」라는 구절과 같은 의미인 것이다. 마나군은 먼저 후왕으로 있던 동성대왕의 아들이다. 일본서기 흠명기 15년 2월조에는 열도에 후왕으로 간 동성대왕의 아들 둘이 교대하는 기사가 실려 있는데 동성자언과 동성자막고다. 東城子가 글자 그대로 동성대왕의 아들임을 알려주는 키워드다.
서기 무열기 4년 시세조에 백제신찬이란 사서를 들먹이며 인용해놓은 동성대왕 암살기사가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백제 말다왕이 무도하여 백성에게 포학[暴虐]한 짓을 하였다. 드디어 국인이 제거하고 도왕을 세웠다. 이를 무령왕이라 한다[백제신찬에 말하였다. 말다왕이 무도하여 백성에게 포학하게 하였다. 국인이 함께 제거하였다. 무령왕이 섰다. 휘는 斯摩王이다. 이는 곤지왕자의 아들이다. 즉 말다왕의 이모형이다. 곤지가 왜로 가다가 축자도에 이르렀을 때 사마왕을 낳았다...(중략)...지금 생각해보니 도왕은 개로왕의 아들이다. 말다왕은 곤지왕의 아들이다. 이를 이모형이라 함은 미상이다』
'백제신찬'이란 사서가 있었는지도 알 수 없지만 위의 내용을 보면 동성대왕이 부여씨가 아니라는 것을 계속 말을 빙빙 돌려서 얼버무리고 있는 것이다. 부여씨라면 이렇게 오락가락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또 무령왕의 휘를 '사마왕'이라 했다는 것은 이 휘가 6세기 당대의 휘가 아니라는 근거가 된다. 사마라는 휘는 서기저자들이 지은 무령왕출생설화에서 島君>島王이란 별명을 이두식으로 바꾼 것이고 휘를 단순히 '사마'라고 하지 않고 '사마왕'이라고 기록했는데 이것은 이 휘가 분식명이라는 것을 알려주려고 의도적으로 그렇게 기술한 것으로 판단된다. 왜냐하면 휘에 '王'자를 붙이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서기 웅략기 23년(서기 531년) 4월조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나온다.
『백제 문근왕이 훙했다. 천왕은 곤지왕의 다섯 아들 중 둘째인 말다왕이 젊고 총명하여 불러들여 친히 머리와 얼굴을 쓰다듬으며 은근히 타이르고 그 나라의 왕으로 시켰다. 그리하여 병기를 주고 축자국의 군사 5백인을 딸려 호위시켜 나라에 보냈다. 이를 동성왕이라 한다. 이해 백제의 조공이 어느 해보다도 많았다. 축자의 안치신, 마사신 등이 수군을 이끌고 고려를 쳤다』
문근왕=(문주왕+삼근왕)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재위기간이 합쳐도 5년밖에 안되니 짧다고 합성이름을 쓴 것인지 아니면 "문주왕의 아들 근왕"이라는 뜻으로 보인다. 斤은 近과 같아 '큰 大'의 이두로 보면 문주의 장남으로 보인다.
곤지왕은 부여씨가 아니고 가야왕족 대반씨다. 쯔꾸시[築紫]는 구주로서 가야인들의 기반이 확고한 곳이다. 고대에는 구주가 가야땅이었던 것이다. 동성대왕은 그곳의 군대를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켜 왕위에 올랐다. 「말다왕이 어려서부터 총명해서 칙하여 궁중에 불렀다. 친히 머리를 쓰다듬으며 은근히 타일러 그 나라의 왕으로 하였다」라는 것은 웅략이 응신을 재등재한 인물이므로 그 형의 증손자를 기특해한 것이다.
飛鳥戶造; 出自百濟國主比有王男 琨伎王也(하내국제번)
飛鳥戶造; 百濟國末多王之後也(하내국제번)
비유왕의 아들 곤기왕이 곤지왕이며 사기 문주기 3년조의 내신좌평 昆支와 동일인물이다. 말다왕은 동성대왕의 별칭이며 말다는 가야왕족들 수직돌림자 '마다'계열 이칭 중의 하나다.
군사수 500인은 대폭 줄인 것이다. 열도에서 500명으로 백제에 와서 쿠데타에 성공할 수 없다. 열도를 이미 장악하고 반도로 왔기 때문에 상당한 대군이 왔을 것으로 본다. 최소 1만 명 이상의 가야계 정예철갑기병 정도라야 쿠데타가 가능하다고 본다. 쿠데타군이 기병이라는 것은 기동성이 뛰어나지 않으면 전격적인 작전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전에 응신과 아신의 밀약에 의한 백제·왜의 분립관계가 깨지고 통합왕국을 열었던 것이다. 이때가 기원 이후만 보면 우리민족 사상 초유의 대제국을 이룬 순간인 것이다. 대륙의 두 백제군과 열도와 백제본국을 합친 것이다. 당대 아시아의 최강자로서 어쩌면 당시 동서양을 통털어 제일의 대제국이었을 수도 있다.
「이해 백제의 조공이 어느 해보다도 많았다[是歲 百濟調賦 益於常例]」라고 하는 것도 우회표현이다. 가야왕족이지만 백제왕이 되자 백제왕족들이 전부 도리 없이 복종했다는 뜻이다. 그것은 동성대왕을 등재한 서명기에서 신수도를 건설하는데 건설본부장인 大匠을 왕인(=귀수대왕)의 후손인 서직현(書直縣)이 하고 있는 것, '남제서' 백제전에서 보다시피 대륙백제군에 발령낸 태수들 명단에 보면 백제왕족 夫餘氏들이 다수인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동성대왕은 열도출신
「남쪽 못 가에 집을 짓고 살다가...」라는 것이 열도출신임을 은유한 것이다. 무령왕출생설화에 나오다시피 곤지왕의 중자로서 열도의 대화왕조 출신이다. 「남쪽 못 가」가 열도를 가리키고 경(京)이 백제를 가리킨다. 축소비유한 것이다.
동성대왕은 가야왕족
「용과 관계하여 낳았다」는 것은 출신성분이 왕족이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동성대왕은 가야의 아라사등의 고손자이자 아라사등의 장남인 예진별명의 증손자다. 용은 왕을 뜻하기도 하지만 가야왕족을 해신(=龍)이라고도 하므로 가야왕족이라는 의미다. 성씨록에 보면 아래와 같이 나온다.
大伴造; 出自任那國主龍主王孫 佐利王也(대화국제번)
'가나[任那]국주'로서 성씨록에서 유일하게 '용 龍'자가 들어간 용주왕이 나온다. 또 용은 해신으로서 신대기부터 이자나기노미꼬또[伊장諾尊]가 물에서 몸을 씻고 낳은 아이가 와다쯔미[少童]로 나오고 같은 발음으로 와다쯔미[綿積]라고 성씨록에 나오는데 아래와 같다.
安曇連; 綿積神命兒 穗高見命之後也(하내국지기)
安曇宿니; 海神綿積豊玉彦神子 穗高見命之後也(우경지기)
출신성분 분류에서 神別 중에 유일하게 지기(地祇)는 아라사등의 삼자로서 대화왕조 2대왕인 진언밖에 없다. 아즈미[安曇]도 아즈마[東]와 같은 '아침'이라는 뜻을 가진 우리말 고어로서 가라의 이칭 신라의 新이기도 하고 성씨 김(金)이기도 하고 新羅와 金城은 같은 뜻이므로 금(金)이기도 한 것이다. 가야왕족인 것이다. 분명히 해신 와다쯔미[綿積]라고 나온다. 서양신화의 포세이돈이나 넵튠 같은 해신이다.
벽田首; 出自任那國主都奴加阿羅지등也(대화국제번) (지등=志, 等)
쯔누가아라시또[都奴加阿羅지등]가 아라가야왕 아라시또[阿羅斯等]이자 고노마다간기[己能末多干岐]인 것이다. '가나[任那]국주'다. 위의 성씨록 '대반조'조의 나온 '사이[佐利]'왕이 바로 이 인물들의 성씨가 김씨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ㅅ+아래아)이>(사이, 소이)>새[新], 쇠[金]가 되고 새[新]도 新羅가 金城이므로 결국은 금(金)과 김(金)은 같은 것이다. 이것도 '으'와 '이'가 교체되어 쓰이는 음운현상을 보면 원래가 같은 것이다.
절세의 영걸
「재주와 도량이 헤아리기 어려웠다」라는 말은 위의 서기 인용기사에 나오는 그대로다. 실사적으로도 절세의 영걸로 분석된다. '남제서'나 '자치통감' 같은 대륙측 기록을 보더라도 북위의 수십 만 대군을 연전연파할 정도로 당대 아시아에서 대적할 상대가 없었던 최고의 영웅이었다. 서기 무열전기 11월조에도 「希世之雄」 > "희세의 영웅"이라고 부르고 있다.
산마[薯여]는 실사와의 연결고리
「산마[薯여]를 캐서 파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다」는 말은 설화상에서 중요한 키워드이자 실사와의 연결고리다. 이것은 서기에도 키워드로 나온다. 동성대왕을 등재한 서기 무열기 3년 10월조에 「사람의 생손톱을 뽑고서 (그 손으로) 마[暑預]를 캐게 했다」라고 나온다. 열도어로 이모[暑預]는 이모[薯]와 같다. '이모'는 세 가지 뜻이 있다. 쟈가이모(=감자), 사쯔마이모(=고구마), 이모(=마) 등이다. 이 기사는 서기저자들이 폄하한 위사로서 이런 일은 없었다고 본다. 다만 기사 속에 이 인물이 누구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키워드로 심어놓은 것일 뿐이다.
바로 여기서 마동[薯童]이 나온 것이다. 이 서동의 '이모[薯]'는 같은 발음의 '이모[妹]'로 동성대왕의 왕권장악을 은유한 설화가 서기 인덕전기에도 나온다. 대화왕조에서 왕을 배출한 아라사등의 세 아들집안을 비유한 설화인데 「본변은 기미[君]를 생각하고 말변은 이모[妹]를 생각한다」라고 나오는데 기미[君]는 초대왜왕인 응신을 가리키고 이모[妹]는 아라사등의 장자 예진의 증손자인 동성대왕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이모[妹]'가 열도어로 음도 같은 무열기의 '이모[暑預]'이자 서동설화의 '이모[薯여]'이며 서동의 '이모[薯]'인 것이다. 이 모두가 치밀한 기획, 각본에 의한 작품들인 것이다.
일연이 마동[薯童]이란 이름을 설화에 지어 넣은 것도 서기 무열기 3년 10월조의 기사를 보고 주인공 이름을 가야왕족 수직돌림자 '마다'계열 이칭의 하나로 변조하여 이름을 짓고 설화를 꾸민 것인데 이런 실사를 다 알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고려시대만 해도 고려인들은 고대사의 실상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다는 근거다. 이런 것을 보면 사서에 실린 신화·설화들이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를 단순히 채록해서 실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쉬이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설화를 보고 '이야기꾼'이니 뭐니 하는 용어를 만들어 설명하는 것은, 현대의 학자들이 고대인의 발상이나 실사와는 얼마나 거리가 먼가 하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 "가야왕족 수직돌림자 '마다'계열 이칭" 참조
신라왕은 소지왕
「진평왕의 셋째공주 선화(善花)」라고 했는데 동성대왕 재위시의 신라왕은 진평왕이 아니고 소지왕이다. 소지왕의 딸과 결혼한 것이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것이 사기에는 동성대왕이 신라왕족인 이찬 비지(比智)의 딸과 결혼했다고 나오는데 소지왕의 이칭을 비처(毗處)라고 하여 비지와 음이 거의 같고 소지왕의 왕비이름이 선혜(善兮)부인이라고 하여 공주이름 선화와 흡사하다.
설화 속의 선화, 비지 등 이런 이름들은 삼국사기의 선혜, 비처 등의 이름들을 일연이 보고서 연결고리로 삼아 지어 붙인 것이다. 이 역시 설화는 자연발생이 아니라 사서저자들이 실사는 절사하고 그 대신 작위적으로 신화나 설화로 꾸며 실은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외교에도 능란
「경(京)으로 가서 아이들에게 마를 먹이고 친해졌다」는 것은 외교에 능하고 신라에 도움을 줬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도 존경을 받을 정도라는 말이다. 또 '남제서'를 보더라도 군사, 외교적으로 탁월했음을 단번에 알 수 있다 하겠다. 이런 외교도 역시 힘을 바탕으로 한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 京은 신라를 가리키는 것이고 앞의 京은 백제를 가리키는 것이다.
서동요는 제라동맹 협상을 의미
여기 나오는 서동요 자체는 설화 속의 일부분이다. 풀이하자면 「선화공주가 남몰래 정을 통하고 서동방을 밤에 몰래 안고 잔다」라는 구절에서 신라와 백제가 제라동맹을 위한 "협상을 비밀리에 추진했다"는 정도로 풀 수 있다. 그 전까지 신라는 광개토대왕 이래로 고구려에 신속했다는 것이 정설인데 신라가 백제와 손을 잡는다는 것은 고구려에 등을 돌리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비밀리에 추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혼인의 의미
기·기상에서 볼 때 여자를 대부분의 경우 영토를 은유하고 여성과 결혼하는 남성은 영토에 대한 통치권을 가지는 것으로 나타내고 있지만 이 경우는 실사로 보인다. 만약에 영토에 대한 통치권으로 은유하여 썼다면 문제는 전혀 달라진다. 신라가 그 전 90년 간 고구려에 대해 했던 것처럼 백제에 신속(臣屬)했다는 뜻으로 풀이되기 때문이다. 동성대왕이나 그 당시의 백제의 능력으로 볼 때 그러고도 남을 일이지만 이를 뒷받침할 만한 다른 근거를 찾기가 어려우므로 일단은 백제가 우위를 가진 동맹관계로 보인다.
제라동맹성립
백관들이 간해서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 보낸다는 것은 백제의 동성대왕이 신라를 회유했을 테고 신라의 백관들은 처음엔 백제와의 화친을 반대했을 가능성이 있다. 즉 고구려와 화친하고 백제는 멀리하자는 등의 정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시점은 고구려 장수왕 말기다. 결국은 혼인을 하게 되는데 이것은 두 나라의 동맹이 성립되었음을 의미한다.
사기는 부여를 말갈이라고 비칭
그런데 동성대왕 즉위하자마자 전격적으로 동맹관계가 이루어진 증거가 사기 소지기 3년조에 나오는데 고구려와 말갈의 침입이 있을 때 「...我軍與百濟加耶援兵 分道禦之 賊敗退...」 > 「...우리 군이 백제·가야의 구원병과 함께 길을 나누어 막았다. 적은 패하여 물러났다...」라고 하였는데 사기의 이 말갈기사는 당시의 판도를 볼 때 반도서남부의 백제, 동남부의 신라, 서북의 고구려를 상정하면 동북 즉 지금의 함경도지역 외에는 달리 상정할 데가 없는데 만약에 그렇다면 동부여의 후예로서 고려시대에는 사실상 여진이라 불린 세력이다.
그런데 고려인들은 이들의 조상들에게 시대를 소급해서 말갈이라고 부른 것으로 보인다. 사실이지 고구려가 지금의 함경도지역에 있는 말갈과 연합했다는 것도 어찌 보면 터무니없는 발상이다. 반도의 북부 중앙을 척추처럼 남북으로 세로지른 험한 산맥을 넘어 무슨 연합을 하고 할 것이 있겠는가. 고려인들이 의도적으로 꾸민 것으로 보인다.
제라동맹에 가야군 등장
특이하게도 가야의 구원병이 나오는 것도 역시 동성대왕의 군대인 것이다. 백제왕권을 장악하러 데리고 들어갔던 열도의 가야계 정예병으로 구성된 친위대거나 가야본토의 병력일 것이다. 이 내용이 위에 인용한 웅략기 23년 시세조의 「축자의 안치신(安致臣)과 마사신(馬飼臣)등이 수군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쳤다」라는 내용과 약간의 시차는 있으나 바로 대응되는 것이다.
소지왕과의 묘한 인연
동성대왕과 소지왕은 특이하게도 즉위연도가 같다. 몰년도 1년 차이다. 묘한 인연이다. 동성대왕 즉위 서기 479년, 무령왕에게 암살 당한 것이 501년이다. 소지왕은 즉위 서기 479년, 몰년이 500년이다.
고구려에 본때를 보이다
구주의 군사가 고구려를 쳤다는 것은 4세기말 이후 약 90년 간 백제는 영락대왕과 장수왕에게 자주 시달렸기 때문에 동성대왕은 즉위하자마자 구주의 가야계 정예기병을 이끌고 본때를 보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고구려와의 충돌은 서기기록상 웅략 23년이 동성왕 원년으로 되어있고 사기에는 소지왕 3년으로 나와 기록이 2년 차이가 있지만 같은 내용으로 보인다.
가야군이 주도
안치신의 아나[安]는 가야인임을 암시하고 아라가야장수다. 마사신은 말먹이는 사람이 아니고 막강한 가야의 기병대장이다. 침류왕을 등재한 효덕전기에 보면 대반장덕련이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가야왕족의 성씨인 대반씨에 字가 馬飼라고 나온다. 역시 가야인이고 기병대장이다. 長德이란 장자집안 인물이라는 뜻이고 동성대왕의 증조부인 예진별명이 장자였으므로 동성대왕의 집안인물인 것이다. 동성대왕을 등재한 서기 흠명기 4년 12월조에 보면 집안인물 중에 東城道天이란 이름도 보인다.
돈독한 제라동맹
사기 소지기 3년, 6년, 16년, 17년조에 백제와 신라가 동맹하여 고구려군을 막아내고 있다. 돈독한 제라동맹이다. 이런 경우는 사국시대에 이 때 뿐이었다. 이런 것도 동성대왕이 명군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시야가 확 트인 영웅이었다.
金
공주가 가지고 온 금은 한 말이지만 서동의 금은 산더미[丘陵] 같았다는 말도 신라가 제라동맹으로 얻은 것이 훨씬 많았다는 말이다. 가야가 장악하고 있는 열도라는 든든한 배경이 있었으니 그럴 만도 한 것이다. 제라동맹으로 인한 양국의 "동맹의 이점"을 은유한 것이다.
백제불교 초전은 신라에서
용화산의 사자사 지명법사가 나오는데 백제에 침류왕대에 불교가 들어왔다는 설은 사실이 아니다. 동성대왕 불교기사는 사실로 보이고 동성대왕대에 경주신라로부터 들어온 것으로 본다. 동성대왕은 불교와 유달리 관련이 많다. 선화공주와 결혼한 것은 사기기록에 따르면 동성대왕 15년이므로 서기로 493년 정도다. 이후에 익산에 새로 수도를 건설하면서 신라의 지원을 받아 미륵사를 지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사기의 침류왕 불교도입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서기에 침류왕을 등재한 효덕기 대화5년 3월조에 침류왕이 진사군과 가야군에 협공 당하여 자결하는 장면에서 절을 짓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내용이 위사임을 알고서도 옮겨 쓴 것이기 때문이다. 서기저자들이 만든 분식명을 가려보았다는 것은 일본고대사서의 이면실사를 다 파악했다는 뜻이다. 이 기사에서 침류와 진사는 일인다역인데 효덕천황·소아창산전대신·이리도덕 등은 침류왕이고, 소아일향신(=身刺)·물부이전조염은 진사왕이고, 황태자(=천지)·대반박련·삼국공마려·수적교신·목신마려 등은 가야측이다.
"해를 향하여[日向]"란 뜻을 가진 진사왕의 이칭은 "왕[日]을 바라보고 살아라"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인데 말을 바꾸면 진사왕은 원래 왕위계승서열에서 벗어난 인물이란 뜻이다. 또 이복형인 침류왕의 시신을 팔단을 냈다고 하여 이름을 지어도 "몸을 베다[身刺]"라고 짓고 있는 것이다. 물부는 초고대왕을 조로 하는 성씨이고 二田이란 나라를 둘로 만든 인물이란 뜻으로 붙인 것이다. 진사왕 때문에 대화왕조가 성립된 것을 의미한다.
유사 흥법 아도기라편에 보면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다.
『21대 비처왕(毗處王) 때에 이르러 아도화상(我道和尙)이 있어 시자 세 사람과 더불어 모례의 집에 왔는데 모습이 묵호자와 비슷했다. 몇 해를 살다가 병 없이 죽었고 그 시자 세 사람은 머물러 살면서 경과 율을 강독하니 종종 신봉하는 사람이 생겼다[주에 이르기를 "본비와 여러 전기와는 사실이 다르다"라고 했다. 또 '고승전'에는 "서축인이다"라고 했고 혹은 "오나라에서 왔다"라고 했다]. 아도본비를 상고해 보면 아도는 고려사람이다...』
고려는 고구려고 서축은 인도를 이른다. 그런데 유사 흥법 순도조려편에 아도(阿道)가 동진(東晉)에서 고구려에 건너온 것은 서기 374년으로 되어있다. 동성대왕의 혼인시점과 시차가 정확히 햇수로 120년이나 벌어진다. 전혀 다른 인물이다. 분명히 비처왕은 소지왕의 이칭인데 위의 유사이야기는 신라가 백제에 불교를 전해준 것이 와전되었거나 왜곡하여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본비와 여러 전기의 내용이 다르다고 한 것도 이상하다. 다르다는 내용 자체는 기록하지 않고 다르다는 말만 하고 있는 것이다. 吳나라라는 말도 사기에 나오는 마라난타의 동진(東晉)을 의식하여 쓴 것으로 판단된다. 사기기사 때문에 실사를 그대로 기록하지는 못하고 빙빙 돌려서 알아보기 어렵게 기록한 것이다.
백제 우위의 동맹
진평왕이 서동을 존경하고 항상 안부편지를 보냈다는 것은 동성대왕의 뛰어남을 말하는 것이고 신라보다는 백제가 역시 월등히 우위였던 것이다.
설화 속의 설화
왕이 어느 날 왕비와 함께 사자사에 가려다가 용화산 밑 큰 못 가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나 수레를 멈추고 절을 하고 왕비가 그곳에 큰 절을 세워달라고 하자 세운 것이 미륵사다. 이 이야기는 설화 속의 또 하나의 설화다. 미륵삼존의 상을 만들고 회전(會殿)과 탑과 낭무(廊무)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미륵사라 했다. 이 회전과 낭무는 유적발굴에서도 확인된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런 경우도 또 우리기록이 정확하다고 할 것이다. 기록은 정확한데 해석을 잘못하고 있으니 문제인 것이다. 익산의 웅포, 왕궁리 유적은 7세기 무왕의 유적이 아니다. 이것은 동성대왕이 5세기말에 신라의 도움으로 불교를 처음으로 받아들인 것을 설화로 꾸민 것이다.
동성대왕을 등재한 서기 흠명기 6년 9월조에 아래와 같은 기사가 있다.
『이 달 백제가 장육(丈六)의 불상을 만들었다. 원문(願文)을 지어 이르기를 "듣건대 장육의 불상을 만들면 공덕이 심대하다. 지금 삼가 만들었다. 이 공덕으로 원컨대 천황이 훌륭한 덕을 얻어 천황이 다스리는 나라가 모두 복과 도움을 얻을 지어다. 또 원컨대 천하의 일체중생이 다 해탈을 얻을 지어다. 그래서 만들었노라"』
이 기사도 동성대왕의 미륵사와 관련한 내용을 달리 처리한 것이다. 동성대왕을 등재한 서기 무열기가 8년으로 끝나고 있고 흠명기 6년조에 위의 내용이 나오므로 단순히 봐도 동성대왕 14년 정도면 서기 492년 정도로 시기도 비슷하게 맞아떨어진다. 그런데 불상은 백제가 만들었는데 원문에 천황의 덕을 칭송하고 복을 빌고 있으니 흠명천황이 사실은 백제왕이라는 것을 은근히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열도에 불교전파
일본의 불교초전은 백제가 5세기말 동성대왕대에 신라로부터 받아들인 것을 무령왕을 거쳐 성왕대에 당시 백제의 후국이던 열도에 전해준 것으로 본다. 백제가 신라로부터 받아들인 지 수십 년 후라면 시간적으로도 지극히 자연스러운 과정이 된다.
일본서기에도 흠명기 13년 10월조에 「百濟聖明王 遣西部姬氏達率怒唎斯致契等 獻釋迦佛金銅像一軀·幡蓋若干·經論若干卷 別表 讚流通禮拜功德云 是法於諸法中 最爲殊勝 難解難入 周公·孔子 尙不能知 此法能生無量無邊福德果報..........」라고 나와 이것이 실사로 판단된다. 연대는, 흠명 13년이라면 서기로 551년이지만 실사상으로는 성왕이 즉위한 서기 523년부터 약 10년쯤 지난 530년대부터 550년대 정도로 추정된다.
※ 백제 서동설화는 위와 같이 열도출신인 가야계 동성대왕의 1. 익산천도, 2. 제라동맹, 3. 경주신라로부터의 백제불교초전 등을 설화와 노래로 꾸민 것이다. 사서의 기록도 아직 제대로 해독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유사의 잘못된 기록을 믿고 7세기 무왕이 남긴 유적, 유물이라고 믿고 있으니 문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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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다 돌림자
- 서동설화 동성대왕은 가야왕족이다. 2009.02.16
서동설화 동성대왕은 가야왕족이다.
2009. 2. 16. 2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