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와 백제의 30년전쟁 (4) / 가야의 본토수복전 2005/02/27 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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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야의 본토수복 전쟁      

서기 369년 열도의 후왕으로 부임한 무내를 회유한 가라의 근강모야신이 6만 대군을 이끌고 본토수복전을 전개하나 백제에 완패하고 열도로 철수한다.  

서기 계체기 21년 6월조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근강모야신은 6만의 대군을 이끌고 임나로 가서 신라에 패한 바 있는 남가라, 녹기탄을 다시 일으켜 세워 임나에 합하고자 하였다』

신공기 49년(서기 369년) 3월조에는 6만의 가라군이 가라본토로 진입하여 백제군과 전투를 한 기록이 다음과 같이 나온다.  

『황전별, 녹아별을 장군으로 삼았다. 구저 등과 함께 군사를 정돈해 건너가 탁순국에 이르렀다. 바야흐르 신라를 습격하려 하였다. 이때 누군가가 말하기를 "군사가 적으면 신라를 깨뜨릴 수 없다. 다시 사백, 개로를 보내 군사를 늘려줄 것을 요청해라"고 말했다. 그래서 목라근자와 사사노궤[이 두 사람은 그 성을 모르는 사람이다. 다만 목라근자만은 백제장수다]에게 명해 정병을 이끌고 사백, 개로와 함께 가게 했다. 탁순국에 모두 모여 신라를 공격하여 이겼다. 이어서 비자발, 남가라, 녹국, 안라, 다라, 탁순, 가라의 7국을 평정하였다. 거듭 군사를 이동하여 서쪽을 돌아 고해진에 이르러 남만의 침미다례를 베어[屠] 백제에 주었다. 이에 그 왕인 초고와 왕자 귀수가 역시 군사를 이끌고 와서 모였다. 비리(比利), 피중(피中), 포미지(布彌支), 반고(半古) 4읍은 절로 항복하였다. 이리하여 백제왕 부자, 황전별, 목라근자 등이 같이 의류촌(意流村/지금 州流須祇라 한다)에서 만났다. 서로 보고 기뻐했다. 두터운 예로써 보냈다. 천웅장언만 백제왕과 더불어 백제국에 이르러 피지산(피支山)에 올라 맹세했다. 또 고사산(古沙山)에 올라 반석 위에 같이 앉았다. 그때 백제왕이 맹세하여 말하기를 "만일 풀을 깔고 앉으면 불에 탈 우려가 있고 또 나무를 잡고 앉으면 물에 떠내려갈 우려가 있다. 고로 반석에 앉아서 맹세하면 오래도록 썩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금후 천추만세에 끊임없고 다함없이 항상 서번을 칭하며 춘추조공 하리다"라고 하였다. 천웅장언을 데리고 수도[都下]에 이르러 후하게 예우를 더하고 구저 등을 딸려보냈다』

백제와 가라의 결전

백제가 서기 367년에 가라를 병탄한 후 서기 368년에 경진주신이 도왜하여 출운에서 대기귀신으로부터 국양을 받아내고 이듬해 서기 369년에 무내를 후왕으로 파견하자 가라는 무내를 회유한 후 연합으로 백제에 다시 대항하여 본토수복을 위한 결전을 하게 된 것이다. 본국을 빼앗긴 후 2년만인 서기 369년 3월에 근강모야신이 6만의 대군을 이끌고 가라본토 수복을 위해 진입하자 백제는 다시 남해안 가라칠국을 완전히 격파하고 빼앗은 사건이다.              
     
등장인물  

우선 이 전역에 등장하는 인물을 보면 황전별, 녹아별, 구저, 사백, 개로, 목라근자, 사사노궤, 초고왕, 귀수왕자, 천웅장언 등이다. 이들이 실사상 각각 누구인지를 비정하는 것이 실사를 바로 해석하는 지름길이다.  

황전별은 응신

황전별, 녹아별이 나오는데 이 인물들은 가야측이다. 황전별은 '아라다와께'라고 읽는데 '아라[荒]'>'阿羅'이고 '田'은 응신의 화풍시호 예전별명에서 딴 연결고리다. '別'은 존칭이다. 성씨록을 찾아보면 아래와 같이 나온다.  

止美連; 尋來津公同祖 豊城入彦命之後也 四世孫 荒田別命男 田道公被遣 百濟國 娶止美邑吳女 生男持君 三世孫熊 次新羅等...
           (이하생략)...(河內國皇別)    

풍성입언명의 4세손 황전별의 아들 다지[田道]도 나오는데 '다지'도 응신이다. 지군(持君)이란 이름에서 모지[持]는 가야왕족 수직돌림자 무쯔[牟都/六], 무지[貴], 마다[末多/派/岐/股], 모도[本], 마도[薯童/末通], 모다[牟大] 등과 같은 '마다'계열 이름이다.      

출신국명 시라기[新羅] 바로 이름으로도 쓰고 있다. 풍성입언명은 가야가 개척한 구주북부 풍국(=후꾸오까현 일대)의 이름을 키워드로 하여 지은 아라사등의 이칭이다. 풍국을 개척한 인물이라는 의미에서 풍성을 붙인 것이다.    

응신과의 대수차이는 두 이름이 서기기사에 등장하는 연대를 감안하여 늘린 것이다. '마다'계열 이칭 무지[貴]가 들어간 이름을 성씨록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
  
荒荒公; 任那國 豊貴王 之後也(攝津國諸蕃)

아라아라[荒荒]>阿羅阿羅이고 아라라[荒荒]로 읽어도 阿羅羅가 되어 마찬가지다. 임나가 아라가야와 동체임을 말해주기도 하는 것이다. 그들의 국호 '시라기'를 성씨로 삼은 경우를 하나 더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新良貴; 彦波염武노자草葺不合尊男 稻飯命之後也 是出於新良國 卽位國主 稻飯命出於新羅國王者祖合(右京皇別)  

시라기[新良貴]라는 성씨의 조는 언파염무노자초즙불합존이라는 긴 이름은 가지고 있는데 통상 줄여서 언파불합존이라고 부르는 신무의 父다.      

도반명은 신무의 형이고 신무가 응신(=예전)이므로 그 형 예진별명인 것이다. 도반명이 시라기.노.구니[新良國/新羅國] 출신이고 신라국주도 했다고 하는데 이 신라는 구주 서남단에 있던 천일창의 신라국을 가리키기도 하고 그들의 본국 아라가야의 고명 아시라[阿尸良]>新羅를 가리키기도 하는 것이다. 천일창이 응신이고 그들 부자·형제들이 개척한 고대국가이기 때문이다.      

도미.노.무라지[止美連]조의 '심래진공'을 성씨록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  
       
廣來津公; 上毛野朝臣同祖 豊城入彦命之後也(河內國皇別)      
廣來津公; 下養公同祖 豊城入彦命四世孫 大荒田別命之後也(大和國皇別)    

성씨록 주에 '광(廣)'이 '심(尋)'으로 기재된 저본도 있다하므로 '광래진공'은 위의 '도미.노.무라지[止美連]'조의 '심래진공'과 동일한 성씨다. 대황전별의 후손이라고 되어 있는데 황전별인 응신(=예전별명)을 기준으로 그 형 예진별명에게 '큰 大'자를 붙인 것이다. 조가 같다는 '상모야'를 찾아보면 아래와 같이 나온다.      

上毛野朝臣; 下毛野朝臣同祖 豊城入彦命五世孫 多奇波世君之後也 大泊瀨幼武天皇(諡雄略)御世 努賀君男百尊...(중략)...百尊男德尊 孫斯羅...(이하생략)...(左京皇別)    

풍성입언명의 5세손으로 나오는 다까하세[多奇波世]가 응신의 형 예진별명이다. 위의 '광래진공'조에서는 4세손으로 나왔으나 서기기사에 등장하는 연대를 감안하여 대수를 조정한 것이다.        

역시 후손 중에 국호를 이름으로 삼은 시라기[斯羅]가 있다. 斯羅가 新羅인 것이다. 이 가미쯔게노[上毛野], 시모쯔게노[下毛野] 성씨가 바로 계체기 21년 6월조의 근강모야신(=아라사등)의 후손인 것이다. 노[野]를 누[野], 나[野]로 읽는 경우도 있다. 상모야와 조가 같은 주길씨를 찾아보면 아래와 같이 나온다.  

住吉朝臣; 上毛野同祖 豊城入彦命五世孫 多奇波世君之後也(左京皇別)    

스미요시[住吉]는 가야계 성씨이자 지명이다. (*1)주길신사는 가야 응신의 삼형제와 신공을 제신으로 모신 신사다. 서기 이중전기에서 태자(=초고대왕)를 화공으로 전사시키는 주길중황자가 있는데 이 인물은 주길신사의 남신 셋 중에서 '가운데[仲]'란 뜻이고 아라사등의 중자인 것이다. 그래서 이칭에 '仲/中'자가 종종 따라다니는데 황극기의 中大兄도 응신이다.  

다까하세[多奇波世]는 다까하세[竹葉瀨/竹合]라고도 하는데 다까[多奇/竹]는 다께[武/建]와 같아 장남을 나타내는 접두어로 쓰이고 있는 것이고 여기서도 보면 원래는 다께[竹/武/建]이던 것을 다까[竹/多奇]로도 발음하므로 열도어에서 '에'와 '애'는 구분이 되지 않아 때로는 (*2)'아'로도 발음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데라스[天照]가 아마다라시[天足/天帶]로 발음되는 것도 같은 경우인데 이 경우는 '으'가 '이'와 교체되어 쓰이는 현상도 동시에 볼 수 있다.

(*1) 위치에 대한 설이 두 가지가 있는데 1) '和名抄'에 「攝津國·兎原郡·住吉鄕(현 神戶市 東灘區 住吉)」이라고도 하고 또 하나는 2) '화명초'에 「섭진국·주길군(현 大阪市 住吉區)으로 현 住吉大社('연희신명식'의 섭진국 주길군 住吉坐神社)가 있는 곳」이라 한다. 주길대사는 大阪市 住吉區 住吉町에 있고 서향이다. 本殿은 동편 안쪽 제1전으로부터 전방으로 순서대로 제2전, 제3전이 있고 제3전의 남쪽에 제4전이 있다. '住吉大社神代記'에 의하면 제신은 제1전은 표통남, 제2전은 중통남, 제3전은 저통남, 제4전은 姬神의 궁으로 氣長足姬皇后로 되어 있다.  

(*2) 邪馬臺는 '야마다이'로 발음하는 것이 아니고 '야마다'로 발음해야 하며 이것이 후대에 서기에서 열도를 지칭하는 말로써 야마다[山田]로도 표기되고 야마도[倭/大倭/和/大和/日本/大日本/東]로도 쓰이게 된 것이다. (ㄷ+아래아)>(다, 도)로 갈라졌다. 말하자면 '야마또'의 어원은 야마다[邪馬臺]인 것이다.    

녹아별은 무내숙니

가가.노.와께[鹿我別]는 무내숙니다. 무내의 이칭에 이가가[伊賀我], 이가가[伊香我], 히가가[日香蚊] 등이 있는데 같은 돌림자를 쓰고 있다. '가가'라는 발음이다.

穗積朝臣; 石上同祖 神饒速日命五世孫 伊香色雄命之後也(左京天神)
穗積臣;    伊香賀色雄男 大水口宿니之後也(左京天神)
采女朝臣; 石上朝臣同祖 神饒速日命六世孫 大水口宿니之後也(右京天神)
佐爲連;    速日命六世孫 伊香我色乎命之後也(左京天神)

신요속일명에서 神과 命은 존칭이고 요[饒]는 요[餘]와 발음이 같고 글자모양이 거의 같은 것을 이용하여 살짝 바꾼 것이고 "요[饒]>요[餘]씨 성의, 이름에 '速'자 들어간 왕[日]"이란 뜻으로 백제 초고대왕이다. 이것이 신공기 46년조부터 55년조까지 등장하는 초고왕의 다른 표기 速古王과 '速'자를 키워드로 하여 연결되는 것이다.      

'좌위련'조를 보면 그냥 '속일명'이라고도 기재하고 있다. 이가시고오[伊香色雄]나 이가가시고오[伊香賀色雄/伊香我色乎]는 전부 동일인물이며 한자가 달라지거나 글자가 한 자 빠져도 계보를 보면 동일인임을 알 수 있다. 바로 이 이름에서 중간에 '가가'란 발음을 따서 지은 이칭이 녹아별인데 別은 존칭이고 가가[鹿我]인 것이다.        

또 이 이름에 든 '사슴 녹(鹿)'자는 이 인물의 또 다른 이칭 소가이루까[蘇我入鹿]와도 연결되는 것이다. 원래는 3세손 즉 손자이지만 요속일과 서기기사에 등장하는 연대차를 고려하여 대수를 적당히 늘린 것이다.

이 '가가'란 발음을 키워드 삼아 만들어 쓴 사례를 하나 더 보면 서기 신대기 하9단 천손강림장 본문에 경진주신이 무옹퇴신과 함께 열도로 건너가 대기귀신과 그 아들 사대주신으로부터 나라를 이양 받는 내용이 나오고 그 말미에 있는 이설에 보면 경진주신에게 끝까지 저항하는 성신 '가가세오[香香背男]'가 나오는데 이 인물도 무내숙니라는 것은 앞에서 이미 밝힌 바 있다.  
                                  
구저는 귀수태자  

구저가 귀수태자라는 것도 이미 앞에서 밝힌 바 있다.  '오랠 久', '근본 저'인데 이 이름의 뜻은 "영원한[久] 시조님[저]"이라는 뜻이다. 시호 "고귀하신[貴] 시조님[首]"과 같은 격이다. 지금 이 기사에서는 일인이역하고 있는 것이다.          

목라근자=천웅장언=침류왕

모꾸라곤시[木羅斤資]는 침류왕이다. 모꾸라[木羅]=마꾸라[枕]이기 때문이다. 곤시[斤資]>곤시[近子]>太子인 것이다. 천웅장언도 침류왕인데 이름 침류에서 나가스[流]의 발음을 따고 존칭 '별 彦'을 붙여 서기 신무전기에 등장하는 이칭 나가스.네.히꼬[長髓彦]를 짓고 여기서 다시 '스[隨]'를 뺀 나머지로 나가히꼬[長彦]를 만든 것이다.
천웅의 千도 사실은 天인데 같은 음의 글자로 바꾼 것이고 熊은 '크다'는 뜻이다. 천웅장언은 "백제의 큰 장언"이라는 뜻이다. 역시 일인이역을 하고 있다.

관련 당사국  

이 전역에 등장하는 국명을 열거해 보면 서기를 쓴 주체인 일본 그리고 백제, 신라 그리고 소국이름으로 비자발, 남가라, 녹국, 안라, 다라, 탁순, 가라, 침미다례가 있고 소읍으로 비리, 피중, 포미지, 반고 등 네 개가 있고 지명으로 고해진, 의류촌(=주류수기), 피지산, 고사산 등이 나온다.

일본

일본은 이 당시에 없었다. 8세기에 서기를 지으면서 기원전 7세기부터 있었던 것처럼 꾸민 것일 뿐이다.
열도 최초의 통일왕조는 가라의 응신이 서기 390년에 세운 대화왕조이기 때문이다. 그 21년 전인 지금은 일본도 왜도 없다. 다만 그 이전에 있던 열도의 소국들을 일러 대륙사서 등에서 일반적으로 왜라고 칭하고 있었을 뿐이다. 이를테면 비미호의 야마다도 왜국이라 했고 그 후 응신이 세운 대화왕조도 왜라고 불렀던 것이다.    

신라  

이 신라는 아라가라의 고명 아시라[阿尸良]를 한역한
것으로 경주신라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가라의 이칭 신라를 이용하여 마치 적대국인 것처럼 꾸미고 가라 연합체 내의 소국들 이름을 열거하며 줄줄이 정벌한 것처럼 이중구조로 기술해둔 것뿐이다.  

소국들  

비자발(比自발)>비지발>빚발로 표기할 수 있고 뜻은 '빛벌/빛땅'이고 지금의 경남 창녕으로 비정된다. 다른 표기로 비사벌(比斯伐)>비시벌>빗벌로 표기되고 뜻도 동일하다. 이것을 보면 '빛[光]'의 사국시대 고어형태[音]는, 단독으로 발음될 경우 현대어 '빛'과 음가가 같은 '빚', '빗'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시[斯]와 지[自]는 현대어에서 사이시옷(사이지옷)이라 할 수 있다. (발=火+本)  

남가라는 김해 정도로 보이며 사기 김유신열전에서 유신비(庾信碑)를 인용한 문구에도 금관가야를 南加耶라고 부르고 있다. 안라는 창원·함안 정도로, 다라는 합천으로 비정할 수 있을 것 같다. 가라는 소가야로 보면 고성 정도일 것 같다.       

합천은 고명이 대야(大耶) 또는 대량(大良)인데 야(耶)=라(羅)=라[良]이고 '大'는 복모음이 없는 열도어로 음독하여 '다'로 읽혔고 '多'로 표기될 수 있으므로 多羅=大耶로 본다. 기타 침미다례는 제주도고 녹국과 탁순은 불명이다. 사실 이런 소국들 이름도 아라가야, 금관가야(=임나), 대가라(고령이 아님)가 전부 동체였음을 감안하면 자잘하게 찢어서 이야기를 꾸민 것을 알 수 있다.

침미다례(枕彌多禮)의 경우는 최초 훈독 '(ㅌ+아래아+ㅁ)[枕]'이 음독 '침[枕]'으로 바뀌고 다시 글자모양이 흡사하고 음이 같은 침[침]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침=心 방변+枕-木)  

그런데 최초 발음 '탐/톰'을 유지하려는 기분으로 발음하면 '미' 발음이 자연스럽게 첨가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즉 원래는 '탐다례', '톰다례'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톰/탐[枕]은 '토막'의 뜻이므로 '토막땅'이라고 할 수 있고 '섬[島]'과 같은 의미인 것 같다.        

또 훈독 (ㅌ+아래아+ㅁ)[枕]>(톰, 탐)으로부터 한자가 탐[耽]으로 바뀌어 탐라[耽羅]로 쓰인 것 같다. 여기서 다시 '탐모라', '담모라', '다모라'라는 음이 나올 수 있다.    

백제와 가야 사이에 가야본토를 두고 일대결전을 벌인 것을 마치 왜와 백제의 연합이 경주신라를 격파하고 그 땅을 빼앗아 백제에 준 것처럼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정작 결과를 보면 그 빼앗긴 영역이 전부 가야영역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겉보기 문장만 보아도 이런 것은 경주신라와 아무런 관계가 없고 여기서 말하는 신라가 가라임을 알 수 있게 되어 있다.

또 고령에 있던 대가야를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한 나라였던 것으로 보인다. 여지승람 고령현조에서 2가야였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고 후대에 신라에 투항한 시기나 인물도 다른 것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입장을 뒤집어 기술

백제가 가야에게서 빼앗은 것을 마치 왜가 신라로부터 빼앗아 백제에게 준 것처럼 입장을 뒤집어서 기록한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신공이란 인물은 실사상 가야왕족을 모델로 하여 꾸며진 인물이므로 이 경우는 백제를 낮춘다든가 적으로 한다든가 하여 입장을 거꾸로 기록해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천황이 백제왕족으로 비정되는 인물일 때는 가야가 적으로 등장하곤 한다. 이런 것은 일본서기 기술기법의 일종이다.    

주류수기

州流須祇는 뒤의 '수기'란 말이 문제다. 주류수기가 반도어, 열도어 복합어이기 때문이다. 須祇는 발음이 '스기'로서 '스기[城]'와 같다. 즉 州流城으로서 이것이 뒷날 백제부흥운동에 나오는 주유성(州柔城/周留城)인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실사가 아니고 상징적인 분식기사이기 때문이다.        
기타 지명들도 불명인데 일일이 비정한다는 것 자체도 사실은 별로 의미 없는 일이다. 인물도, 국명, 지명도 전부 꾸며져 있고 사건의 성격도 뒤틀려 있기 때문이다.          

반석 위에 앉은 의미

그런데 위의 신공 49년조 기사 속에는 일본왕실의 중요한 비밀이 하나 들어있다.

『唯千熊長彦與百濟王 至于百濟國 登피支山盟之 復登古沙山 共居磐石上 時百濟王盟之曰 若敷草爲坐 恐見火燒 且取木爲坐 恐爲水流 故居磐石而盟者 示長遠之不朽者也 是以 自今以後 千秋萬歲 無絶無窮...』        

『천웅장언만 백제왕과 더불어 백제국에 이르러 피지산(피支山)에 올라 맹세했다. 또 고사산에 올라 반석 위에 함께 앉았다. 그때 백제왕이 맹세하여 말하기를 "만일 풀을 깔고 앉으면 불에 탈 우려가 있고 또 나무를 잡고 앉으면 물에 떠내려갈 우려가 있다. 고로 반석에 앉아서 맹세하면 오래도록 썩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금후 천추만세에 끊임없고 다함없이...』  

석상에 앉은 왕실의 황조신

지금 이 문장에 등장한 인물은 단 둘이다. 천웅장언과 초고왕인데 각각 침류왕과 초고대왕이다. 그런데 이 두 인물이 어디에 앉았는가? 「共居磐石上」 > 「함께 磐石上에 앉았다」 > "(초고대왕과 침류왕이) 함께 (磐)石上에 앉았다" > "(초고대왕과 침류왕이) 함께 石上神宮에 鎭坐했다」라는 암호가 들어있는 것이다.          

석상신궁의 제신은 셋이다 주제신은 초고대왕이고 나머지 둘은 귀수대왕과 침류왕이다. 일본왕실의 세 황조신인 것이다.  

또 서기 이중전기를 보면 태자가 화공을 당하여 쫓기다가 石上·振의 神宮에 진좌하는 사건이 기술되어 있는데 「太子便居於石上振神宮」> 「태자는 石上 후루[振]의 神宮에 편히 머물렀다」라고 나오고 이 태자가 곧 신공기에서 "(磐)石上에 앉은 백제 초고왕"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이중천황은 초고대왕을 등재한 인물인 것이다. 후루[振]는 석상의 지명인데 후루[布留/布瑠]라고도 한다. 그것도 신공기에서 「居磐石上」, 이중기에서 「居於石上振神宮」이라 하여 동사도 같은 '居'자를 쓰고 있는 것이다.  

왕실의 영원무궁을 기원

또 「示長遠之不朽者」, 「千秋萬歲 無絶無窮」 두 구절은 인현천황의 화풍시호 "億計>億年之大計"에 해당하는 의미인 것이다.      
인현천황의 이름에 島稚子, 大石尊이 있고 모든 천황 중에서 유일하게 諱가 있다[大脚, 大爲라고도 한다]. 일본왕실의 시조이기 때문이다. 도치자는 이장낙존과의 연결고리이고 大石이 석상신궁과의 연결고리다.     

오호시[大脚], 오호스[大爲]라고 읽고 있는데 '이'와 '으'는 교체되어 쓰이므로 결국은 한자만 달랐지 오호시[大石]와 음도 같다. 또 오호아시[大脚]로도 읽을 수 있어 '큰 아침'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때 아침은 아스까[飛鳥]를 가리키며 이 '새[鳥]'는 '흰깃큰수리[羽白熊鷲]', 白鳥, 봉황새[鸞]로 은유된 귀수대왕인 것이고 백제왕으로서는 아신왕의 직계손인 무령왕에 해당되고 아신왕의 사서상의 모든 이칭은 '아침'에 해당되는 고어 '아시', '아지'로 조어되어 있다.    

이런 모든 일련의 연결고리들은 8세기초 당대의 열도에서 한다하는 가야·백제의 대문인들이 수십 명이 모여 수십 년을 걸려서 치밀하게 짜 맞춘 것들이지 우연의 일치가 결코 아닌 것이다.      

귀수대왕을 등재한 민달기 31년 7월조에 錦部首大石이란 인물이 나오는데 초고대왕임을 알려주기 위한 합성이름이다.    

錦部首; 神饒速日命十二世孫 物部目大連之後也(山城國天神)  
錦部連; 三善宿니同祖 百濟國速古大王之後也(河內國諸蕃)  

신요속일명에서 '신'과 '명'은 존칭이고 이름만은 요속일인데 "요[饒]>요[餘]씨 성의, 이름에 '速'자 들어간 왕[日]"이란 뜻으로 지은 이름이고 같은 금부씨의 조인 백제국 속고대왕을 가리키는 것이다. 금부수대석은 錦部首라는 성씨와 인현천황의 이름 大石尊을 따서 지은 초고대왕의 이칭인 것이다.    

위와 같은 분위기를 반영한 신의 이름에 국상입존이 있다. 서기 신대기 상1단에 등장하는 황조신 國常立尊의 이름 속에 들어있는 '도꼬시(나)에[常/長/永久]'는 왕실이 영원하기를 기원하는 의미가 담긴 이름이다. 도꼬[床]와도 음이 같아 磐石 같은 床石과도 의미가 통한다. 암석은 고래로 십장생에도 들어있듯이 영구, 영원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다. 결국 '국상입존'이란 이름을 뜻으로 풀면 "나라를 반석 같이 단단히 세운 신"이라는 뜻으로서 다름 아닌 일본왕실의 시조 초고대왕인 것이다.      

백제의 열도정복을 위한 사전정지작업

초고대왕이 손자인 천웅장언(=침류) 앞에서 천추만세 서번을 칭하고 춘추로 조공을 하겠다고 맹세를 했다고 분식을 해놓았다. 가라칠국평정은 백제가 열도를 가야로부터 접수하기 위해서 세 차례에 걸쳐 가야본국을 침탈했으나 가야가 6만의 대군을 이끌고 본국을 탈환하러 열도에서 반도로 진입하여 가라본토를 사이에 두고 일대결전을 벌인 것이었고 이것은 백제가 열도를 가야로부터 빼앗기 위한 사전정지작업 성격이었다.        

이 전투에서 가라가 완패하고 응신이 열도로 철수하는 장면이 신공기 50년 2월조의 다음과 같은 기사다. 「荒田別等還之」 > 「황전별 등이 돌아왔다」.      

이 이후부터는 전장이 열도로 바뀐다. 가라 본국은 이때 망해버린 것이고 그 주력은 새로 개척한 열도에서 백제로부터 독립된 왕국건설을 꿈꾸고 있고 백제는 그마저 빼앗으려고 열도로 건너가 계속해서 가야군과 전투를 벌이는 것이 이때부터 20년 간이나 더 지속되는 것이다.  

같은 시기의 사기기록        

서기 369년은 사기 근초고기 24년에 해당하는데 아래와 같은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9월) 고구려왕 사유가 보기 2만을 이끌고 치양에 와서 주둔하면서 민가를 침탈했다. 왕이 태자에게 군사를 주어 보내 치양에 이르러 급습을 해 깨뜨리고 5천 명의 포로를 잡았다. 그 포로와 노획한 것을 장졸들에게 나누어주었다. (11월) 한수의 남에서 군사를 크게 사열했다. 기치는 모두 황색을 썼다』    

군대사열이란 큰 전투를 우회표현하는 분식일 수 있고 황색기라는 것이 대륙식으로 하자면 천자가 사용하는 색깔이라는 해석도 있는데 사기저자들이 그런 의미로 썼다면 바로 이 해에 만든 칠지도에서 보다시피 (백제왕 대왕> 백제태자 왜왕> 백제세손 왜후왕)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해준다고도 볼 수 있다. 대왕은 천자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고국원왕 39년인데 백제기사와 아귀를 맞추어 썼기 때문에 "군사 2만을 보내 남으로 백제를 쳤으나 치양에서 패배했다"고 나오고 신라는 내물왕 14년인데 기사가 없다. 가야와 백제의 실사는 "고려인은 옛날부터 고려땅에서만 살았다"라는 반도사관에 입각하여 완전히 절사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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