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공의 고향으로 본 단군조선의 영토는? (4부)

성훈님 http://blog.joins.com/slsung   2010-05-03 21:52:58

아래 글은 본 시리즈의 (4부)입니다.
(1부) 섬서성 서안 서쪽까지 점령한 단군조선
(2부) 은나라를 멸한 주나라도 단군조선의 제후국
(3부) 낚시로 천하를 낚은 강태공의 조상은 누구인가?


병법과 권모술수에 뛰어난 강태공

(3부)에서의 내용과 같이 서백 희창(西伯 姬昌=周文王)은 위수(渭水)에서 여상(강태공)을 만나 수레에 모시고 와서는 그를 군사(軍師)로 임명하고 은나라를 뒤엎을 것을 비밀리에 의논했다. 그 때 강태공이 내놓은 계책은 주로 군사를 일으키는 것과 모략(謀略)이다. 후세 사람들이 병법과 주나라의 권모술수에 대해 말할 때 강태공을 그 시조(始祖)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동해가 고향인 강태공이 저 멀리 섬서성 서안 서쪽에 있는 위수까지 가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가 천하를 낚은 것은 강태공이 권모술수에 뛰어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것이라 하겠다. 강태공은 (3부)의 내용과 같이 미리 역관(점성술사)과 각본을 짜고 서백(西伯)이란 대어 중의 대어를 기다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얼마 후 서백 희창이 죽고 아들인 희발(姬發=武王)이 즉위했다. 강태공은 군사로서 희발을 도와 은나라를 멸하고 주나라를 일으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다. 그는 군사로서 모든 군을 장악하고는 그의 뛰어난 병법과 권모술수로 주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는다. “만약 강태공이 없었다면 주나라가 은나라를 멸할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그의 역활은 일등공신 중에서도 일등공신이었던 것이다. 

9년 희발(武王)은 은나라를 멸하기 위해서는 제후들의 협조가 필요한데 과연 그들이 동참할 것인지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어 도읍인 풍읍(豊邑:낙양)에서 군사를 일으켜 맹진(盟津)으로 진격한다. 그러자 사전에 약속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맹진으로 달려오는 제후가 800명이나 되었다. 모두들 은 주왕을 칠 때라고 말하나 희발(무왕)은 “서두르지 말라. 천명은 아직 은나라를 떠나지 않았다.”하고 일단 철군을 한다. 

은나라를 멸하는 희발(주무왕) 

드디어 11년 희발(무왕)은 제후들을 향해 동참할 것을 재촉하고는 서백(문왕)의 위패를 받들고 스스로를 태자 발이라 칭하고는 강태공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5천의 군사를 이끌고 맹진으로 나아가자 주변의 제후들도 속속 모여 들었다. 즉 이번 출정은 명망이 높았던 문왕의 뜻이라는 것을 대외에 알리려는 것이었다.

드디어 맹진에서 동쪽으로 사(汜:사수진) 땅으로 나아가 황하를 건넌 후 북상하여 백천(휘현)까지 올라가서는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은나라의 수도인 조가(朝歌:기현)를 향해 진격하였다. 드디어 주나라와 은나라는 목야(牧野)에서 서로 대치하게 되었다. 아래는 목야전투의 중국 자료이다.

公元前1046年(一说前1057年)正月,周武王统率兵车300乘,虎贲3000人,甲士4万5千人,浩浩荡荡东进伐商。同月下旬,周军进抵孟津,在那里与反商的庸、卢、彭、 濮、蜀(均居今汉水流)、羌、微(均居今渭水流域)、"667;(居今山西省平陆南)等部落的部队会合。武王利用商地人心归周的有利形势,率本部及协同自己作战的部落军队,于正月二十八日由孟津(今河南孟州市南)冒雨迅速东进。从汜地(今河南荥阳汜水镇)渡过黄河后,兼程北上,至百泉(今河南辉县西北)折而东行,直指朝歌。周师沿途没有遇 到商军的抵抗,故开进"034;利,仅经过6天的行程,便于二月初四拂晓抵达牧野。 周军进攻的消息传至朝歌,商朝廷上下一片惊恐。商纣王无奈之中只好仓促部署防御。但此时商军主力还远在东南地区,无法立即调回。于是只好武装大批奴隶,连同守卫国都的商军共约17万人(一说70万,殊难相信),由自己率"046;,开赴牧野迎战周师。
 

주무왕진군로.jpg
▲  당시 주나라의 도읍은 낙양.  맹진-->사수진-->휘현-->은나라의 도읍인 기현으로 갔다. 목야는 기현 서쪽 교외에 있다.  위휘현은 강태공의 고향으로 제나라 땅이 된다.  위휘현 근처에 제나라의 도읍인 영구와 임치가 있다.  즉 주나라는 발해(대야택)을 넘지 못했다.  소정방이 백제를 멸하기 위해 떠난 래주는 하남성 위휘현 아래 황하변이다.

주나라 군대가 목야로 진격할 때 백이.숙제가 나타나 주 무왕의 마차 앞으로 달려가 말고삐를 붙잡고 무왕에게 출병의 부당함을 고한다. 그러자 무왕 주위의 장수들이 백이.숙제를 죽이려고 하자 강태공이 “의인(義人)이니 살려주어라”라고 지시를 한다. 해서 백이.숙제는 목숨을 잃는 화를 면하고 그 자리를 떠나게 되었다. (백이.숙제에 대한 상세한 것은 제 6부에서 다룬다)

드디어 무왕은 목야에서 은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도읍인 조가에 입성하여 자살한 주왕의 시체에 화살 3개를 꼽고 마차에서 내려 다시 칼로 치고 황금으로 만든 도끼로 주왕의 목을 잘라 대백기의 끝에 걸었다. 다음 날 희발은 은나라의 궁전으로 들어가 즉위식을 올렸다. 희발의 쿠데타가 성공하여 은나라가 망하고 주(周)나라가 새로 탄생한 것이었다. 

강태공이 제후로 봉해진 제(齊) 땅은 어디인가? 

주나라 탄생의 일등공신인 강태공은 제(齊) 지방의 영구(營丘) 땅을 다스리는 제후로 봉해진다. 무왕의 동생인 주공 단에게는 곡부(曲阜)에 봉하고 노(魯)라고 했고, 소공 석은 연(燕)에, 동생인 숙선에게는 관(管)에, 동생 숙도를 채(蔡)에 봉하고 그밖에 각자의 공적에 따라 봉지를 주고 제후로 삼았다.

제후에게 하사하는 봉지는 통상 약 사방 100 ~ 200 리가량의 땅이었다. 당시 주나라의 전체 강역이 천리가 넘지 않았으므로 중국에서 주장하는 지금의 산동성에 노나라와 제나라가 있었고, 하북성 북경 근처에 연나라가 있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 하겠다. 노, 제, 연나라는 모두 하남성 황하 주변의 일개 군(郡) 정도의 영토였으리라.

노,연,제의 위치이동.gif
▲  제, 노, 연이 하남성에 있었다고 고백한 중국지도. 중국은 역사왜곡을 위해 제나라와 노나라를 산동성으로, 연나라를 북경으로 옮긴다. 그러나 실제로는 산동성과 하북성과 산서성은 단군조선의 영토였다.  

강태공이 영구 땅에 도착할 무렵 느닷없이 래후(萊候)의 군사들이 공격을 해왔다. 상호간에 영구 땅을 차지하려는 공방전이 벌어진다. 그 원인은 당시 낙양에 있던 주나라가 은나라를 평정했을 뿐이지 멀리 떨어진 곳까지는 통치권이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래(萊)란 영구 땅 주변에 사는 만족(蠻族)이라고 <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래후를 물리치고 영구에 부임한 강태공은 정치 제도를 가다듬는데 있어 그 고장의 풍습을 귀히 여겼고 예절을 간소화 시켰다. 또한 상공업을 장려하여 고장 특산물인 소금과 생선으로 상업을 크게 일으키니 수많은 백성들이 제나라로 모여들어 강국으로 뻗어나가 춘추.전국 시대를 풍미하는 제나라의 기반을 확실히 다져놓는다.

우리는 이렇게 강태공으로부터 시작된 제나라가 산동성에 있었고 도읍은 임치(臨淄)로 알고 있으며, 위에서 언급된 래(萊) 땅을 지금의 산동성 래주(萊州)로 알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래주는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하기 위해 수군을 출발시킨 곳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그런 래주가 과연 어디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임치제유적.jpg
▲  산동성 임치 주변에 만들어 놓은 제나라 고도 영구의 유적은 가짜이다. 제나라 유적이 산동성에 있다는 것은 명백한 역사왜곡이다.

강태공의 고향인 동해(東海)는 어디인가? 

래주가 어디인지 알아보려면 강태공의 고향이 어디인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사마천이 쓴 <사기>에 따르면, “태공망 여상은 동쪽 끝 해안지대의 사람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강태공의 고향이 동해(황해) 바닷가로 알고 있다. 특히 산동성과 접해있는 강소성 연운항 근처에 동해(東海)라는 시가 있어 그쪽 출신으로 알기 쉽다.

중국은 산동성의 도읍인 제남(濟南)시와 임치(臨淄)시에 강태공의 가짜 묘를 만들어 놓고 산동성이 제(齊)나라 땅이었다고 알리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한 역사왜곡으로 산동성은 제나라 땅이 아니라 바로 단군조선의 땅이었다. 이를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을 뿐이다. 과연 그런지 지금부터 알아보기로 하겠다.

임치강태공묘.jpg
▲  중국은 강태공의 묘를 산동성 임치와 제남에 만들어 놓았다. 이 묘는 100% 가짜이다.

강태공의 고향을 중국 인터넷 백과사전으로 찾아보면 아래와 같이 나온다.
(원문) “姜太公故里,位于河南省新乡卫辉市西北十二公里处。公元前1210年农历八月初三,姜太公诞生于卫辉太公泉镇吕村。据《竹书纪年》上说,姜太公仙逝于“周康王六年”十月二十日。终年一百三十九岁。葬于卫辉太公泉。至今太公泉境内还保留着许多姜太公的历史遗迹,其中较为著名的有:姜太公墓、姜太公祠、姜太公庙、姜太公吕望表等。”

(번역) “강태공의 고향은 하남성 신향시 위휘현 서북 12Km에 있다. B.C 1210년 음력 8월 초삼일 위휘현 태공천진 여촌에서 태어났다. <죽서기년>에 따르면, 강태공의 서거는 주 강왕 6년 10월 20일로 139세였다. 장례는 위휘현 태공촌에서 치렀다. 지금의 태공촌 경내에는 강태공묘, 강태공 사당, 강태공여망표 등이 있다.”
 
위휘태공묘.jpg
▲   강태공의 고향인 하남성 신향시 위휘현에 있는 강태공의 진짜 묘.
사마천이 쓴 <사기>의 기록에는 “강태공은 동해(東海) 출신”이라고 간단히 기록되어 있다. 그런 강태공의 고향이 하남성 신향시 위휘현이므로 그 근처에서 바다로 불릴 수 있는 곳은 대야택(발해) 밖에 없다. 즉 고대 중국의 동해는 바로 산동성과 하남성 경계에 있는 대야택 즉 발해(渤海)였다. 당시 <사기>에 기록된 제나라의 동쪽 경계는 동해 즉 발해(대야택)로 황하변 하남성이 주나라의 주 무대였던 것이다.  (발해가 어디인가는 아래 자료 참조)
 
제목: 발해를 지명조작하여 역사를 왜곡한 중국
http://www.hinews.asia/sub_read.html?uid=288§ion=sc5§ion2=
발해 지명이동.jpg
▲  하남성과 산동성의 경계였던 발해(=동해)는 역사왜곡을 위해 지명이동되었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또 이런 기록이 있다. 주 무왕의 아들인 성왕(成王)이 아직 어릴 때 주위에서 주나라에게 반기를 들자 성왕은 강태공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린다. “동쪽 동해(東海)로부터 서쪽 황하(黃河)까지 남쪽 목릉(穆陵)으로부터 북쪽의 무태(无棣)까지 이 모든 지역의 제후들은 각자의 소신대로 반란군을 정벌해도 좋다.”즉 주나라의 동.서.남.븍 강역이 어디인지 보이는 대목이다.

여기서의 동해는 바로 강태공의 고향인 하남성 위휘현인 것이다. 따라서 제나라의 도읍인 영구나 임치는 바로 위휘현 서쪽에 있었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소정방이 수군을 출발시켰다는 래주도 위휘현 서쪽 가까운 황하변에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그런 제나라가 산동성에 있었다는 것은 명백한 역사왜곡 임을 알아야 한다.

맹자는 하나라 뒤의 은나라 주나라가 융성했을 때의 강역도 일천리가 넘지 않았다.(夏后殷周之盛地未過千里者也)고 말해 제나라의 종주국인 주나라도 그 영토가 천리를 넘지 못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당시 종주국인 주나라의 도읍은 하남성 낙양이었다. 어떻게 하남성 동쪽 끝인 대야택 건너의 산동성이 제나라의 영토가 될 수 있으리오!

황하 주변 하남성은 주나라의 강역이고, 산동성은 바로 단군조선의 땅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하남성의 북쪽인 산서성은 당시 백이.숙제의 나라인 고죽국이 있던 곳이므로 단군조선의 강역이었던 것이다. 중국에서는 고죽국을 은나라의 제후국이라 말하고 있으나 그건 어불성설로 고죽국은 명백한 단군조선의 제후국이었던 것이다.

<단군세기>에 따르면, “22세 색불루단군 때인 B.C 1266년 람국(藍國)이 매우 강성하여 고죽군(孤竹君)과 더불어 여러 적들을 쫓고 남으로 이동하니 은나라 땅과 가까웠다. 이에 병사를 나눠 진격하여 빈.기(邠岐)에 웅거하도록 하면서 나라를 여(黎)라 칭하고 서융과 함께 은나라 제후들 사이를 차지하고 있도록 하였으니 황제의 교화가 멀리 항산(恒山) 이남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기록되어 있어 그 근거가 된다.

또한 36세 매륵단군 때인 "B.C 653년 병력을 보내 수유(須臾)의 군대와 함께 연나라를 정벌하였다. 이를 연(燕)나라 사람이 제(齊)나라에 알리니 제나라가 고죽(孤竹)에 쳐들어 왔는데 이기지 못하고 화해를 구걸하고는 물러갔다."는 기록이 있어 고죽국과 연.제나라는 매우 가깝게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고죽국은 단군조선의 남쪽에 있었던 것이다.
 
하대형세도.jpg
▲  북경대학교재에 있는 하나라 형세도는 하남성 일대이다. 하나라에 이어 은나라와 주나라도 이 형세도와 비슷하다.  하남성 이외의 사방은 모두 단군조선의 땅이다.

<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강태공의 고향으로 본 고대 중국의 영토는 황하변 하남성 주변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의 산서성과 하북성 그리고 산동성과 섬서성 서안까지 하남성을 제외한 전 중국 대륙이 단군조선의 강역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단군조선의 강역은 세월에 따라 위축된 적도 있었으나 거의 그대로 이어져 후대에 고구려.백제.신라의 강역이 되는 것이다. 

이렇듯 위대하고 장엄했던 단군조선과 삼국의 영토를 만주와 한반도 일대로만 국한하는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반도사관의 이론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이론이라 하겠다. 식민사학자들이 이 땅에서 박멸되는 날이 어서 빨리 와야 우리의 장엄했던 역사가 화려하게 부활될 것이다. 그래야 중국의 지명조작을 통한 역사왜곡을 엄중하게 질책할 것이 아니겠는가!

 
이어지는 (6부)에서는 진시황 만리장성의 비밀이 밝혀집니다.

칭기즈칸, 발해공주를사랑했다? - 서울신문(2010.10.13)

조회 수 7785 추천 수 0 2011.01.20 18:11:10

칭기즈칸, 발해공주를사랑했다?

서울신문 | 입력 2010.10.13 02:26 | 누가 봤을까?

  [서울신문]칭기즈칸발해 공주와 사랑에 빠졌다?

오는 25일부터 타이완 타이베이에서 한국학중앙연구원(원장 김정배)이 주최하는 '제5회 세계한국학대회'에서 몽골학자가 발표할 논문의 주제다.

자미얀 바투르 몽골 국립대 교수는 16~17세기에 기록된 몽골 문헌 '백사'(白史·White His tory), '황금사략'(黃史略·Precious Sum mary) 등에서 한국을 언급한 것을 따로 떼내 정리한 논문을 발표한다. 13세기 때의 일이 16~17세기에야 기록된 것은 그나마 중심을 잡아주던 쿠빌라이칸(훗날 원나라 시조가 되는 칭기즈칸의 손자)이 죽은 뒤 한동안 몽골제국이 큰 혼란에 빠졌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들 기록은 몽골 제국을 구성하는 5가지 색깔을 언급하면서 한국을 흰색으로 규정한다. '백의 민족'을 떠올리면 된다. 몽골은 푸른색, 중국은 붉은색, 티베트는 검은색, 투르크는 노란색을 배정받았다. '한국의 코끼리 산'에 대한 언급도 있다. 몽골인 입장에서 코끼리 등짝처럼 높고 옆으로 길게 퍼진 하얀 산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두말할 것 없이 '백두'(白頭)산을 뜻한다.

기록에 따르면 칭기즈칸은 태양이 떠오르는 곳으로 진격해 '솔롱고스 메르키드족'을 위협, 여러 노획물을 손에 넣는다. 노획물 중에는 메르키드족의 왕인 다이르 우순 칸의 딸 쿨란도 포함돼 있었다. 칭기즈칸은 완승을 거뒀음에도 3년이 지나도록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쿨란이 너무 어여쁜 새 부인이어서다. 그러나 칭기즈칸의 부인 부르테 역시 통이 컸다. 질투나 시기보다는 류트(기타처럼 생긴 유목민의 현악기) 연주에 능한 신하를 보내 칭기즈칸을 점잖게 타일렀고, 부끄러움을 느낀 칭기즈칸은 스스로 되돌아 온다.

칭기즈칸의 초기 행적은 대체적으로 몽골족 내부의 주도권 잡기 싸움으로 이해된다. 이에 근거해 대부분의 중국 학자들은 다이르 우순 칸과 쿨란 공주를 다구르족, 그러니까 몽골족의 다른 갈래 정도로 파악한다. 그러나 몽골 학자인 바투르 교수는 이런 관점이 틀렸다고 주장한다. 다이르 우순 칸과 쿨란 공주는 명백히 한국 사람이라는 것이다.

바투르 교수가 그 근거로 제시하는 이유는 이렇다. "13세기 이래 솔롱고스(Solongos), 혹은 솔랑가(Solanga)는 몽골에서 한국을 가리키는 단어로 고정됐다. 이는 몽골이 다이르 우순 칸과 쿨란 공주를 바로 한국의 왕이자 한국의 공주로 이해했다는 방증이다. 따라서 이 왕과 공주를 다구르족으로 파악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번역(misinterpretation)이거나 조작(falsification)된 것이다."

다른 몽골 문헌에서는 이 시기 역사를 기록하면서 솔롱고스 메르키드족의 왕 이름을 '부크 차간 칸'이라 적었다. 바투르 교수는 "부크 혹은 부카이는 몽골 말로 늑대를 높여 이르는 것으로 몽골이 흔히 옛 발해 지역에 살던 유목민을 부를 때 쓰던 말"이라면서 "따라서 쿨란 공주의 아버지, 즉 다이르 우순 칸과 (문헌에 기록된) 부크 차간 칸은 동일 인물"이라고 주장한다. 발해가 나라 자체는 926년에 망했어도 그 후손들은 계속 남아 명맥을 이었다는 게 바투르 교수의 설명이다.

한족이 통상 다른 민족을 낮춰 부르기 위해 동물 이름을 넣었다면, 몽골족은 유목민답게 그 지역을 상징하는 동물 이름을 갖다 붙이는 경우가 많았다. 메르키드(Merkid)가 몽골의 메르겐(Mergen), 신라의 마립간(麻立干)과 동일 계통의 단어로 활을 잘 다루는 종족을 뜻한다는 해석이 존재하는 점을 감안하면 바투르 교수의 주장에 설득력이 실린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국내 언어학자들 사이에서 '솔롱고스'가 '무지개가 뜨는 나라'가 아니라는 해석이 있다는 점도 주목된다. 몽골어 계통에서 '솔로고'(sologo)는 삵이나 담비 같은 짐승을 뜻한다. 만주어 솔로히(solohi)는 족제비를 뜻한다. 발해가 늑대로 상징됐다면, 비슷한 원리로 '솔롱고스 메르키드'란 '삵이나 담비처럼 날래고 활 잘 쏘는 종족'을 부른 명칭일 수 있다는 얘기다. 이렇게 보면 결국 쿨란 공주는 우리나라 발해말갈의 후손인 셈이다.

학술대회에는 이 논문을 포함, 25개국 180여편의 논문이 발표될 예정이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No.113  |  조회수 :433  I  자은 최두환 (2008-08-20 21:17:33.0) http://cafe.daum.net/chosunsa 
씰크 로드는 아시아 조선의 길


누군가 지은 책이《씰크 로드는 신라인의 길》이라고 한 것을 보았다.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 절판이 된지도 오래되었음을 듣기도 하였다. 그런데 과연 그 길이 누구의 길일까?
씰크 로드(Silk Road)라는 말은 옛날부터 있었던 말이 아니다. 아주 근래의 일이다.《씰크 로드학》이라는 책을 지은 사람의 글을 보면, 독일 지리학자 리히트호펜(K. von Richthofen: 1833-1905)이《China》(Berlin, 1877)를 지은 데서 비롯되었다고 하는데, 1877년이면 지금부터 130년 전의 일이다. 그런데 정작 그는 그 책을 짓는데 1877년부터 1912년까지라고 했으니, 그가 죽고 난 뒤 5년만에 출간된 셈이다.[정수일,『씰크로드학』(창작과 비평사, 2001), p. 28]

그럼에도 불구하고 1877년에 지었다는 것은 그가 1866년까지 중국을 답사한 뒤라는 말에 무게를 두었을 뿐이지, 정작 그가 저술한 해와는 다르다. 그러니 이 책이 1877년에 편찬되었다면, 거짓이고, 1912년에 그의 손으로 편찬되었다면 귀신이 만든 셈이다. 참 알 수 없는 일이다.어쨌든 그 책에 "자이덴슈트라쎄(Seidenstrasse)"라는 말에서 "Silk road"라는 말이 생겨났smsepm 우리말로 대개 "비단길"이라고 한다. 그러나 "비단"은 "緋緞"이니, 순수 한글로는 "깁"이므로 "깁길"이라고 해야《한글맞춤법》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죽도록《한글맞춤법》의 덫에 갇히어야 하나보다.
무엇이 옳은 지도 말못하고....
그러나 이 "깁길"이야말로 "자이덴슈트라쎄"처럼 부자연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오아시스로(Oasis Road)"라고도 하는 말이 더 친근하게 들리는 것은 왜 그럴까? 이 "씰크로드"는 "동서 문명 교류 교통로"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그 범위는 동쪽의 일본렬도 경도·나라에서부터 서쪽의 이탈리아 베네찌아·메시나까지 북위 35도±12도의 범위를 한없이 오고갔다.

즉 극동-아시아의 끝에서 극서-아시아의 끝 터키의 이스탄불을 지나 동부유럽의 끝 지중해 이탈리아까지 1만4700㎞, 중국 장안에서는 1만2000㎞를 비단·자기·차·향료 등을 갖다 날랐다. 이것이 동서문물교류의 장이란다.씰크로드는 "비단의 유럽수출에서 비롯된 일방적 對-서방 수출에서 유래되었다"고[위의 책, p. 36] 하지만, 그 의미에 지금 딴지를 걸어본다.
왜냐하면 [아시아]=[조선]이라는 개념이
새로운 패러다임의 력사관이 대두되었기 때문이다.이 지리적 범위의 중심은 두말할 것 없이 중앙-아시아이다.

다음의 사료를 보자.

(1) 大秦國 一名犁 , 以在海西, 亦云海西國, 地方數千里, 在四百餘城.[후한서권88 서역전76]
[대진국은 리건이라고도 하는데, 해서 지역에 있으며, 해서국이라고도 한다. 땅은 사방 수천리이며, 400여 고을이 있다.]

우리는 대진국(大秦國)을 로마(Rome)라고 하지만, 바다의 서쪽에 있기 때문에 '해서국(海西國)'이라고 한다고 했다.로마가 지중해 북쪽 해안에 있지, 바다의 서쪽[海西]라고 볼 수 없다. 이 바다[海]라는 것이 에게해(Aegean Sea)라면 몰라도. 그래도 바로 그 서쪽엔 그리스[희랍]이 있으니 뭔가 어울리지 않는다. 이 "바다"란 결코 "에게해"도, "지중해"도 아니며, 그냥 "해[太陽]"과 같은 "천자"가 있는 지역, 즉 "중국"이란 의미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대진국을 알기 위해서는 다른 지명 하나를 더 알아야 하는데, 조지국(條支國)이 있다. 이곳을 대개 "시리아(Syria)"라고 보지만, 그 지역은 사실 아라비아반도를 설명한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그 지명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잇다.

(2) 條支國 臨西海, 海水曲環其南及東北, 三面路絶, 唯西北隅通陸道.
      土地暑濕, 出師子犀牛封牛孔雀大雀, 大雀其卵如壅.[위의 책]
[조지국은 서해에 닿았는데, 바닷물이 그 남쪽과 동북쪽을 둘러져 있어 3면으로 길이 끊어져 있고, 오로지 서북쪽 모퉁이로만 육로가 나 있다. 토지는 무덥고 습기가 많으며, 사자(獅子)·무소[犀牛]·낙타[封牛]·공작(孔雀)·타조[大雀]가 있으며, 타조는 그 알이 옹기만하다.]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서북쪽만이 육로로 트인 곳은 곧 아라비아 반도 전체가 매우 적격이다. 이보다 더 설득력 있는 글은 없을 것이다.
서-아시아에는 사자(獅子)가 있고, 또 무소, 즉 코뿔소가 있고, 낙타 등등이 있다고 했다. 낙타를 타고 고구려·백제·신라를 누비며 싸웠던 력사적 사실을 여기서 새롭게 음미해보자. 느낌이 새로워질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뒤에 적힌 글을 보면, 안식국과 대진국과의 관계이다.
(3) 自安息西行三千四百里至阿蠻國. 從阿蠻西行三千六百里至斯賓國. 
      從斯賓國南行度河, 又西南至于羅國九百六十里, 安息西界極矣.
     自此南乘海,   乃通大秦.
[위의 책]

[안식국에서 서쪽으로 3400리 가면 아만국에 이른다. 아만국에서 서쪽으로 3600리 가면 사빈국에 이른다. 사빈국에서 남쪽으로 강을 건너고, 또 서남으로는 우라국 960리에 이르는데, 안식국의 서쪽 경계의 끝이다. 이 남쪽에서 배를 타고 가면 대진(大秦)에 이른다.]

3400리는 1285.2㎞, 3600리는 1360.8㎞인데, 이들 나라들이 어디에 있는 것이든 이 거리를 서쪽 끝에서 동쪽으로 재어보면, 이 거리만 더하여 보면, 2646㎞는 레바논에서부터 아프가니스탄 중심지까지의 거리이다.

매우 먼 거리이므로, 안식국이 페르시아의 중심지라고 보면 그 대진국이 어디에 있어야 할까?
정말로 우리는 저 "대진국"이 로마라고 할 수 있을까? 다른 사료를 보자.

(4) 拂凜國一名大秦, 在西海之上, 東南與波斯接, 地方萬餘里,
      列城四百, 邑居連屬.[舊唐書권198 列傳148 西戎]
[불름국은 일명 대진국이라고 하는데 서해에 있고, 동남쪽에는 페르시아와 붙어 있으며, 땅은 사방 1만리 남짓하고, 여러 고을이 400개인데, 고을들이 쭉 붙어있다.]

이 불름국이 대진국이라고 했으며, 위의 (1)에서 400고을과 같은 규모이니, 같은 지역을 말하고 있다. 그러니 이 불름국을 "동-로마"라고 해석하고 있는 것이 끝내 처음의 "로마"라는 것과 같은 지역임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이탈리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아예 흑해(黑海: Black Sea)가 있는 서-아시아의 지역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동-로마를 아시아의 서쪽에 잇는 것으로 해석되어 있는 것이 그 이전의 시기나 그 뒤로도 같은 지역의 이름이지, 이탈리아라는 로마와는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大秦"은 "로마"가 아닌 것이며, 동-지중해를 낀 극서-아시아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불름"이란 글자는 한자로는 아무런 뜻이 없다. [fulin]으로 소리나는 이 지역은 옛날의 "Phrygia"[프리기아] 지역인 것으로 보아, 이곳은 북부여와 해부루가 가섭원(Caspian)으로 옮겼던 곳과 연계해보면, "夫餘/扶餘"[부여]의 땅이 된다. 그러면 "부여"는 "프리기아"지역이고, 곧 "불름"이라는 "대진"지역인 것이다. 불름(佛倫 : Frum)

이 "대진(大秦)"과 같은 소리의 나라가 "大震"인데, 이것이 대조영이 나라를 세운 "발해(渤海)"의 다른 이름이다. 이 발해가 전에 언급한 바가 잇듯이 곧 "Black Sea"[黑海]인 것이다.
이 발해라는 나라는 "키타이[契丹]"이니, "말갈(靺鞨)"과 인접해 있고, 고구려의 후예라고 하는데, 사실 그들 키타이니, 말갈의 같은 부류이기도 하다.그러면 씰크로드가 이탈리아까지의 이동이 아니라, 장안[長安: 西安]에서부터 아시아의 서쪽 끝까지이며, 이것은 곧 유럽과의 동서문명의 교통로가 아니라, 아시아 조선 사람들의 길이었다. 물론 한반도와 일본 렬도와의 교류가 있었다는 것에는 유물·유적의 유무와 더불어 사료에 의하여 좀더 살펴보아야 할 문제이다.

어쨌든 씰크로드는 중앙-아시아, 즉 중원에서 동쪽으로
극동-아시아까지, 서쪽으로 극서-아시아까지의 북위 35도±12도를 중심으로 조선 제후국들의 상인들과 사신들이 많이도 오갔던 문화교통로였고, 대진=大秦=大震=渤海(발해)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좀더 덧붙이자면, 발해라는 이름은 대조영이 건국하기 이전부터 있었던 이름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