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皐陶)의 후예(後裔).

고요(皐陶)에게는 맏아들 백익(伯益)과 둘째 아들 중견(仲甄)이 있었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진본기(秦本紀)에 의하면, 고요(皐陶)의 맏아들 백익(伯益)은 영성(嬴姓)의 시조이자 진(秦)나라 진족(秦族)의 선조이다. 그는 백예(伯翳, 柏翳, 伯鷖), 백익(柏益), 화익(化益)이라고도 하며, 비(費,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임기시臨沂市 비현費縣)땅에 봉해졌기 때문에 대비(大費) 또는 비후(費侯)라고도 한다. 또한 은본기(殷本紀)에 의하면, 그는 상(商)나라 상족(商族)의 선조이다. 하본기(夏本紀)와 오제본기(五帝本紀)에도 우(禹)의 치수사업을 도운 익(益)이라는 인물로 등장하고 있다.


 

고요(皐陶)의 맏아들 백익(伯益)은 순(舜)임금 때에, 순(舜)임금의 축마관(畜馬官)이 되어 순(舜)임금을 위해 말을 길렀고, 우(禹)의 치수사업(治水事業)을 도와서 많은 공을 세웠다. 그래서 순(舜)임금은 그를 영(嬴=언偃, 산동성山東省 곡부시曲阜市를 중심으로 하여, 제령시濟寧市태안시(太安市), 래무시萊蕪市 등의 지역 일대) 땅에 봉하고 영성(嬴姓)을 사성(賜姓)하였다. 영성(嬴城)의 고지(故地)는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래무시(萊蕪市) 양리진(羊里鎭) 성자현촌(城子縣村)에 있다. 그는 산동성(山東省) 일조지역(日照地域)에서 주로 활동했는데, 산동성(山東省) 일조시(日照市) 동항구(東港區) 도락진(濤雒鎭) 천태산(天台山)에는 백익(伯益)의 대왕릉(大王陵)이 있다.


 

산동성(山東省) 일조시(日照市) 천태산(天台山)

백익(伯益)은 대렴(大廉 -진秦 · 조趙씨의 조상)과 약목(若木 -서徐 · 황黃 · 마馬씨의 조상) 두 아들을 낳았다.

백익(伯益)의 후예로서, 영성(嬴姓) 14성씨(姓氏)는 조(趙), 황(黃), 서(徐), 마(馬), 양(梁), 종(鍾), 진(秦), 강(江), 갈(葛), 비(費), 구(瞿), 곡(谷), 렴(廉), 무(繆)이다.

우(禹)임금은 고요(皐陶)를 고성(皐城, 지금의 안휘성安徽省 육안시六安市 지역)에 봉하였다. 고성(皐城)은 언성(偃姓)부족의 활동무대이자 거주지였다. 오늘날 중국의 고씨(皐氏)들은 모두 자신의 조상을 고요(皐陶)로 여기고 있다. 고요(皐陶)는 말년에도 우(禹)임금을 도와서 그의 영도사무(領導事務)를 처리하였다. 우(禹)임금은 다음 제위(帝位)를 고요(皐陶)에게 선양하려 하였는데 그가 먼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그의 아들 백익(伯益)을 후계자로 삼았다. 그리고 우(禹)임금은 고요(皐陶)의 후손들을 영(英, 호북성湖北省 영산현英山縣)과 육(六, 안휘성安徽省 육안시六安市) 땅에 봉하였다. 우(禹)임금은 동방을 순시하다 회계(會稽)에서 백익(伯益)에게 제위(帝位)를 물려주고 죽었다. 그러나 비록 권력은 백익(伯益)에게 있었지만 우(禹)임금의 상(喪)이 끝나자 그는 우(禹)임금의 아들 계(啓)에게 제위(帝位)를 양보하고 기산(箕山) 남쪽에서 살았다. 이로써 계(啓)가 제위(帝位)에 올라 최초의 부자세습제인 하(夏)왕조가 시작되었다.

고요(皐陶)가 순(舜)임금을 도와 활약한 지역은, 하(夏), 상(商), 주(周)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이르기까지, 모두 예로부터 고요(皋陶)의 후예(後裔)들이 세운 진국(秦國), 조국(趙國), 강국(江國), 황국(黄國), 서국(徐國), 비국(費國), 언국(偃國), 영국(英國), 육안국(六安國), 소국(萧國), 완국(阮國), 양국(梁國), 거국(莒國) 등(等) 영성제후국(嬴姓諸侯國)들이 자리했던 곳이다.

​고요(皐陶)의 후예(後裔)로 상(商, 기원전 1600년경~1046년경)나라 상족(商族)들은 스스로를 하늘의 자손(天孫)으로 생각했다. 특히 상(商)나라 제왕(帝王)들은 하늘의 아들(천자天子)로 여겨졌다. 그들 상(商)나라 제왕(帝王)들은 모계혈통(母系血統)으론 영성(嬴姓)이었으나 처음부터 부계혈통(父系血統)의 자씨(子氏)를 썼고 훗날에는 자씨(子氏)가 성(姓)이 되었다. 상족(商族)의 뛰어난 인물들은 노자(老子), 장자(莊子), 공자(孔子), 맹자(孟子) 등과 같이 전통적으로 아들 자(子)를 써서 일컬었다.

당시에 상족(商族)이 숭배하였던 신(神)은 제(帝)였다. 상(商)나라 사람들은 상제(上帝)가 우주의 지배자이며 그의 의지에 따라 모든 미래가 결정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왕이 죽으면 제(帝)가 된다고 믿었다. 왕은 제(帝)와 교통할 수 있는 유일한 제사장으로서 제(帝)에 대한 숭배 의식을 주도하였다. 제(帝)는 혈통적인 의미가 담겨 있어서, 같은 제(帝)를 숭배하는 씨족끼리 연합하여 한 국가를 이루었다.

제왕(帝王)은 하늘을 대신하여 세상을 통치하는 신(神, 上帝-하느님 )의 아들(天子)이었다. 상(商)나라는 정치와 종교가 일치된 제정일치(祭政一致)의 신권정치(神權政治) 국가였다. 상(商)나라는 제왕(帝王)의 통치와 관련된 다양한 사안들, 즉 조상신 숭배나 자연신에 대한 제사의 여부, 전쟁의 가부, 농사의 풍흉, 바람과 비의 유무, 수렵이나 재해의 유무 등을 신(神-上帝)의 뜻을 묻는 점(占)을 쳐서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신정정치(神政政治)가 이루어졌다. 청동기는 바로 이러한 신정적(神政的) 권위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왕권의 신정적(神政的) 권위는 점차 쇠퇴하였고, 결국 세속적(世俗的) 권위가 강화되면서 상(商)나라는 몰락하였다.

그러나 상왕조(商王朝)는 망했지만 상족(商族)이 모두 몰락한 것은 아니었다. 주(周) 무왕(武王)은 주왕(紂王)의 아들인 무경(武庚)을 상(商)나라의 옛 땅에 봉했다. 그러나 무경(武庚)은 무왕(武王)이 죽자 무왕(武王)의 형제인 관숙(管叔), 채숙(蔡叔), 곽숙(霍叔)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지만 실패하여 주살당했다. 그 후, 무경(武庚)의 백부 미자계(微子啟, 주왕紂王의 이복형)가 송(宋=상구商丘, 지금의 허난성 상추시)에 봉해져 상왕조(商王朝)의 제사를 이었다.

하지만 미자계(微子啟)는 갑자기 죽었다. 그의 동생 미중연(微仲衍)이 대신하여 왕위에 올랐다. 이후 송(宋)나라 왕계는 미중연(微仲衍)의 자손들이 이어 갔다. 공자(孔子)는 미중연(微仲衍)의 후손이다. 미중연(微仲衍)은 나라의 부흥에 힘써 송(宋)나라가 주(周)나라 제후국들 틈바구니에서 성장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송(宋)나라는 전국시대(戰國時代) 기원전 286년, 제(齊)나라 · 위(魏)나라 · 초(楚)나라가 연합하여 쳐들어와 영토가 분할되고 멸망하였다.

​한편, 고요(皐陶)의 후예(後裔)가 세운 상(商)나라가 주(周)나라에 의해 망하자 그 후손들은 강회(江淮) 사이에 흩어져 살면서 언성(偃姓)집단을 형성하여 영(英) · 육(六) · 군서(群舒) 등과 같은 소국(小國)을 이루어 춘추시대에까지 이르렀다.

<사기(史記) 진기세가(陳杞世家)>에 영국(英國) · 육국(六國)으로 기록되어 있고, <초세가(楚世家)>에 영국(英國) · 요국(蓼國) · 군서(群舒)로 기록되어 있으며, <좌전(左傳) 문십이년(文十二年)>에 「群舒叛楚 군서(群舒)가 초(楚)를 배반했다. 正義曰:[世本]언성(偃姓). 서용(舒庸), 서요(舒蓼), 서구(舒鳩), 서용(舒龍), 서포(舒鮑), 서공(舒龔). 以其非一, 故言屬以包之 그것으로 말하자면 무리에 속한 것으로서 하나가 아니다.」 등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소국(小國)들은 춘추시대에 강대국 초(楚)나라 목왕(穆王)에 의해 모두 멸망하였다. 그러나 고요(皐陶)의 후예(後裔)가 세운 진(秦)나라가 더 큰 강대국이 되어 초(楚)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 대륙을 통일하여 최초의 중앙집권(中央集權)적인 단일국가(單一國家)를 세웠다. 고요(皐陶)의 후예(後裔)가 세운 대표적인 나라는 고대(古代)에는 상(商)나라와 진(秦)나라, 그 이후로는 당(唐)나라와 송(宋)나라, 그리고 금(金)나라와 그 후예가 세운 청(淸)나라, 그리고 조선(朝鮮) 등이 있다.

기원전 900년 즈음, 주(周)나라 제8대 효왕(孝王)은 고대의 정치가 고요(皋陶)의 후예(後裔)인 비자(非子)가 말(馬)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공적을 올리자 그에게 선조의 영성(嬴姓)을 사성(賜姓)하고 진읍(秦邑) 땅을 봉지(封地)로 줌으로써 그 지배권을 인정받아 진(秦)나라가 시작되었다. 국호(國號) 진(秦)나라는 선조(先祖) 때부터 살아온 서수(西垂 :진읍秦邑 :지금의 감숙성甘肅省 천수시天水市 청수현淸水縣)의 땅을 봉지(封地)로 받아서 비자(非子)와 그의 후손 진족(秦族)들이 형성한 진읍(秦邑)이라는 명칭(名稱)에서 비롯된 것이다.

기원전 770년 유왕(幽王)의 난리 때, 견융(犬戎)이 주(周)나라의 도읍인 호경(鎬京)에 쳐들어오자 진(秦)나라의 양공(襄公)은 주(周)나라를 구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가서 힘껏 싸워 주(周)왕실에 공을 세웠다. 이때 견융족(犬戎族)이 유왕(幽王)을 시해(弑害)하자 그의 아들 평왕(平王)은 견융(犬戎)의 위협에 도성을 동쪽의 낙읍(駱邑)으로 천도하는데 진(秦)나라 양공(襄公)이 다시 군사를 동원하여 호위하였다. 이에 평왕(平王)이 그 공에 보답하기 위해 진(秦)나라 양공(襄公)을 제후(諸侯)에 봉하고 주(周)나라의 옛 땅인 기산(岐山) 서쪽 지역의 땅을 모두 진(秦)나라에 주었다. 이로써 진(秦)나라는 주(周)나라의 제후국(諸侯國) 반열에 올랐다.

진(秦)나라의 국력은 기원전 4세기 쯤 전국시대 때 상앙(商鞅, 기원전 395년?~338년)이 행한 강력한 법치에 따른 개혁에 의해 급속도로 강성해졌다.

기원전 3세기 후반, 진(秦)나라는 진시황제(秦始皇帝)에 의해 전국(戰國)를 통일하여 중국 역사상 최초의 단일국가(單一國家)를 건설하였다. 기원전 247년에 즉위한 진(秦)나라 왕 영정(嬴政)은, 이사(李斯)를 승상에 임명하고 국력 증강에 노력하였다. 진(秦)나라는 무역을 증대시켰고, 농업을 발전시켰으며 치안을 강화했다. 이는 토지 지주제를 폐지했기 때문인데, 이로써 중앙정부가 국민들을 직접 통치할 수 있었다. 이는 만리장성(萬里長城)과 같은 대형 공사들을 할 수 있게 된 토대가 되었다.

진(秦)나라는 국력이 약했던 주(周)나라를 시작으로 하여, 마지막으로는 최대의 적인 초(楚)나라를 멸망시켰다. 진(秦)나라 왕 영정(嬴政)은 기원전 221년에 중원을 통일한 후, 스스로를 시황제(始皇帝-첫 황제)라 칭했다. 이 황제(皇帝)라는 칭호는, 전설상의 삼황오제(三皇五帝)에서 따온 것이다.

진(秦)나라는 화폐와 도량형의 통일, 군현제의 실시 등 많은 개혁을 단행했다. 군사력 역시 발전하여, 전술이나 무기, 운송체계 등이 발전하게 되었다. 또한 문자의 통일을 위해 분서갱유(焚書坑儒)와 같은 일도 벌였다. 통일 전 북방의 각 나라가 흉노 등 북방 민족의 침략에 대비하여 독자적으로 만들고 있었던 장성(長城)을 정비해 만리장성(萬里長城)을 건설했다. 시황제(始皇帝)는 흉노의 침략이 일어나자 다시 북쪽을 공격함으로써 백성들에게 입혀지는 피해를 최소화시켰다. 게다가 남쪽으로도 원정대를 보내서, 현재의 베트남 북부까지 영토를 넓혔다. 이 때, 남방에는 남해, 상, 계림의 세 개의 군이 놓였다. 이것은, 중국 왕조에 의한 남방 지배의 시작이기도 하다.

그러나 만리장성(萬里長城)의 건설 등 가혹한 노동과 극도의 법치주의 통치로 인하여 국민의 고통이 커져갔다. 그래서 진(秦)나라는 군사력은 강성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기원전 210년, 진시황(秦始皇)이 사망한 뒤 그의 아들이 두 번째 황제 자리에 올랐으나, 신하들은 그를 이용해 권력을 휘두르며 서로 싸웠다. 그래서 몇 년 후 백성들에 의해 반란이 일어나 결국 나라가 망하였다.

진(秦)나라는 중국대륙의 역사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이후 진(秦)이라는 이름이 유럽에까지 알려져 오늘날의 중국을 China라고 부르게 되었다. 만약 진(秦)나라가 전국(戰國)을 통일하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중국은 존재하지 않고 유럽과 같이 여러 나라로 나뉘어 발전했을 것이다.

한편, 고요(皐陶)의 둘째 아들 중견(仲甄)은 중언(仲偃)으로도 불렸는데, 거듭 언(偃)이 성(姓)이 되었다. 언(偃) 성(姓)은 고요(皐陶)를 조상으로 받들고 성(姓)으로 씨(氏)를 삼았다. 그의 후예(後裔)는 역우(歷虞), 하(夏), 상(商) 26세 기간에 이관(理官)이 되었다. 후손에게 대대로 대리(大理)라는 관직을 세습하였는데, 상대(商代)에 이르러 당시의 관습에 따라 관직명(官職名)으로 성씨(姓氏)를 삼아 이씨(理氏)라 하였다.

청(淸)의 유학자 진가모(秦嘉謨)가 편집한 「세본(世本)」에 의거해 상고해 보면, 고리(古理), 리(里), 이(李) 3자(三字)는 함께 통한다.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에 고요(皐陶)가 "대리(大理)"가 되었다 기재하였고, 「관자법법(管子法法)」에 기재하기를, 고요(皐陶)가 "이(理)"가 되었다 하고, 「사기(史記) 위세가(魏世家)」에는 "이극(李克)"이라 기재되어 있고, 「한시외전(韓詩外傳)」에는 "이극(里克)"으로 기재되어 있다.

당(唐, 618년~907년)나라 현종(玄宗) 이융기(李隆基, 685~762년)는 이씨(李氏)의 혈연시조가 고요(皐陶)라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여 천보(天寶)2년(743년)에 그를 ‘덕명황제(德明皇帝)’로 추봉하였다. 당고조 이연(唐高祖 李淵, 566년~635년)이 세운 당(唐)나라는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력을 자랑할 정도로 매우 번영했고, 정치, 경제와 문화 등 다방면적으로 완벽히 발달된 제국이었다. 현재까지도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대제국으로 평가받는다.

서기 960년, 고요(皐陶)의 후예(後裔) 송태조(宋太祖) 조광윤(趙匡胤, 927년~976년)이 오대십국시대(五代十國時代, 907년~960년)에 오대 최후의 왕조 후주(後周, 951년~960년)로부터 선양을 받아 개봉(開封,카이펑)에 도읍하여 세운 송(宋, 960년~1279년)나라는 예술, 사상 및 각종 실용기술의 발달이 두드러져, 문화적으로 풍요로웠다. 제지, 인쇄기술의 향상과 시민경제의 발흥으로 인해 이때까지 일부 관료, 귀족에게 독점되던 문학, 미술, 음악, 사상 등이 시민 사이에서도 활발하게 발전했다.









http://m.blog.naver.com/neveera/220618978171 2016. 2. 5. 6:53

고요(皐陶)는 누구인가? 

고요(皋陶,皐陶)는 요(堯)·순(舜)시대의 인물로 구요(咎繇)라고도 한다. 는 요(陶, 공자의 고향인 산동성山東省 곡부曲阜 지역, 소호少昊의 터)라는 지역에서 태어났고, 훗날 우(禹)임금이 그를 고(皐, 皐城 -지금의 안휘성安徽省 육안시六安市 지역)라는 땅에 봉(封)하였다. 그래서 그를 고요(皋陶,皐陶)라 한다. 그의 선조(先祖)는 새(현조玄鳥)를 토템으로 하는 동이족(東夷族)으로, 그는 동이족(東夷族)의 수령(首領, 우두머리)이었다. 진씨족보(秦氏族譜)에 의하면, 그는 황제(黃帝)의 증손 제곡(帝嚳) 고신씨(高辛氏)의 넷째 아들로서, 요(堯)임금, 순(舜)임금 때에 팔원(八元)의 한 사람인 계중(季仲)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부계(父系)로는 요(堯)임금과 같은 혈통(血統)이고 모계(母系)로는 순(舜)임금과 같은 혈통(血統)이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은본기(殷本紀)에 의하면, 그는 순(舜)임금에 의해 사도(司徒)로 임명되었으며, 형벌(刑罰)로서 오형(五刑)을 제정(制定)하였고 백성들에게 오교(五教)를 겸하여 가르쳤으며, 우(禹)의 치수사업을 도운 상(商)나라 상족(商族)의 시조 설(契)이라는 인물로 등장하고 있다. 또한 진본기(秦本紀)에는, 진(秦)나라 진족(秦族)의 시조인 대업(大業)이라는 인물로도 등장하고 있다. 그의 활동 근거지는 엄(奄=偃, ()은 영(嬴)을 굴린(轉) 소리(音)이다.)이었다. 지금의 산서성(山西省) 홍동현(洪洞縣) 감정진(甘亭鎭) 사사촌(士師村)에 고요(臯陶)의 고리(故里)가 있고, 지금의 안휘성(安徽省) 수현(壽縣) 육안시(六安市) 소재지 동쪽 이십리포(二十里鋪) 소묘촌(小廟村)에 고요(皋陶)의 고묘(古墓)가 있다. 

  

고요(皋陶)는 진씨족보(秦氏族譜)에 의하면, 팔원(八元)의 한 사람인 계중(季仲)이라는 인물로 젊어서부터 요(堯)임금에게 중용되었는데, 형정(刑政)을 주관하는 사(士, 사사士師, 대리관大理官, 구주목九州牧 사법장관司法長官)에 임명됐으며, 구관(九官)의 한 사람으로서 요(堯)임금을 계승한 순(舜)임금을 보좌하면서 큰 치적을 남긴 명신(名臣)이다.

그는 법리(法理)에 통달하여 법(法)을 세우고 형벌(刑罰)을 제정(制定)하였으며, 옥(獄)을 만들었다고 한다. 순(舜)임금은 그를 사도(司徒)로 임명하였다. 그는 형벌(刑罰)로서 오형(五刑)과 교육(敎育)을 겸하여, 요구부의(要求父義), 모자(母慈), 형우(兄友), 제공(弟恭), 자효(子孝) 등의 오교(五教)를 가르쳤다고 전해진다.

그의 가르침은 상고시기(上古時期)부터 하(夏) · 상(商) · 주(周)를 거쳐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이르기까지 그의 후손들에 의해 면면(綿綿)히 이어져 중국문명(中國文明)의 토대(土臺)가 되었다. 특히 그의 사상은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의 도가사상(道家思想)과 공자(孔子)와 맹자(孟子)의 유가사상(儒家思想) 그리고 순자(荀子)로 이어지는 법가사상(法家思想)으로 발전하여 이후 중국의 정치(政治), 경제(經濟), 사회(社會), 문화(文化) 등의 각 분야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고요(皐陶)는 법(法)과 덕(德)으로 백성들을 다스린 상고시기(上古時期)의 위대한 사상가(思想家), 교육자(敎育者), 정치가(政治家)였다. 사학계(史學界)와 사법계(司法界)에서는 그를 중국의 사법비조(司法鼻祖)로 간주한다. 그는 요(堯) · 순(舜) · 우(禹)임금과 함께 ‘상고사성(上古四聖)’이라 일컬어(칭稱해)지고 있다.

고요(皐陶)에 관한 기록은 사기《史記》, 좌전《左傳》, 수경주《水經注》, 괄지지《括地誌》, 상서《尚書- 우서(虞書) -皋陶篇》,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 등의 사서(史書)에 상세(詳細)하게 기재(記載)되어 있다. 그 중 중국 역사서의 시초로 불리는 ‘서(書)’(상서尙書 또는 서경書經)의 첫 편 ‘우서(虞書)’ 제4 ‘고요모(皐陶謨)’가 원전이다. 사기(史記)의 ‘하본기(夏本紀)’는 고요모(皐陶謨)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사기(史記) 하본기(夏本紀)>에는 순(舜)임금과 더불어 우(禹)와 함께 통치의 요체에 관해 진지하게 담론하는 고요(皐陶)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기원전 2,000년 즈음, 순(舜)임금이 신하의 팔로어십(followership)을 전제로 한 리더십(Leadership)을 거론하자 고요(皐陶)는 ‘진실한 리더십(Leadership) 없이는 팔로어십(followership)도 없다’는 말로 대답한다. 그는 법도(法度)를 준수하고 현명한 판단력으로 비전과 이상을 제시하는 바람직한 리더상을 주문했다. 그리고 고요(皐陶)는 리더(Leader)가 갖춰야 할 자질로 ‘구덕론(九德論)’을 제시한다. 구덕(九德)은 리더(Leader)의 자질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모든 유형의 리더십(Leadership)을 정의할 정도로 논리가 정교하다. 이는 오늘날 리더십(Leadership) 이론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참신하다. 그는 세계 최초의 리더십(Leadership) 전문가라 할 수 있다.

순(舜)임금은 고요(皐陶)를 최고의 현신(賢臣)으로 여겼다. 그래서 그는 순(舜)임금이 즉위한 후에도 계속 중용되었다. 그는 대리직(大理職 - 士, 이관理官, 사법장관司法長官)에 있어 천하의 죄악을 잘 평정하였으므로 사람들은 편안히 살면서 즐겁게 직업에 종사했다고 한다. 그는 천하를 다스리려면 반드시 ‘인간을 아는 것(知人)과 백성을 편안(安民)하게 하는 통치'의 큰 틀을 제시하여 우(禹) 못지않은 공을 세웠으나 백성들 사이에서 우(禹)의 위신을 크게 세우는데 힘을 다했다. 순(舜)임금이 죽자 그는 직접 나서 우(禹)를 제위(帝位)에 올렸다. 우(禹)임금은 그의 유능함을 인정하여 후계자로 선정하고 아울러 정무를 처리할 권력까지 주었으나 제위(帝位)를 승계받지 못하고 먼저 죽었다.

사법연수원 법관연수소 앞에 서 있는 상상속의 동물 해태(海陀). 해치(獬豸)라고도 한다. 부정을 저지르거나 거짓말하는 사람은 저 뿔로 받아버릴 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해태(海陀)는 중국 한나라의 왕충이 지은 사상서 논형(論衡)에 선악을 아는 외뿔짐승의 양(羊)이라 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고요(皐陶)는 일종의 특이한 외뿔 짐승인 해태(海陀)를 길렀는데, 그는 선악의 진위(眞僞)를 가릴 때 이 짐승을 이용했다고 한다. 그는 시비선악(是非善惡)을 잘 가리는 바로 이 신령한 짐승(독각기수獨角奇獸)에 힘입어 옥리(獄理)를 판단하여 형옥(刑獄)을 다스렸다 한다.

사기에서는 진시황제秦始皇帝 영정嬴政진 장양왕의 아들로 출생하였을 때 성을 조()로 하였다고 하며, 13세에 진왕이 되었다고 합니다. 송나라 때 쓰여진 ‘百家姓’에는 “중국 山西省 聞喜縣 裴氏 中國封建社會史上 盛名 久著 一大世家. 始祖 나라 始祖 非子 後孫으로서 非子 支孫 해져 하여 이로 하였다. 나라 僖王 六世孫 解邑君 해져 그대로 하고 하여 하였다. 裴氏 하여 하여 ,河東燕京西涼等地 分居하였다,譜系 源流 하면 모두 聞喜 裴氏에서 나와, 天下 없다는 있다”라고 하여 산서 문희(문경)의 배씨의 기원을 말하면서 진의 시조 비자(非子)의 후손에서 배씨성이 유래함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사기 진본기에서 “非子 犬丘 하면서 가축을 좋아해 하여 불렸다” 하는데, “비자는 주나라 효왕 때 主馬 되어 말을 크게 번식하니 땅에 읍을 하여 부용으로 삼고 영씨(嬴氏)의 제사를 다시 잇게 하여 秦嬴이라 한 바 이로 非子 나라의 시조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또 진시황을 여불위의 아들이라 하여 여() ()이 진시황의 원 핏줄이라는 설도 있는데여씨는 원래 주나라 무왕이 강태공망을 여()에 봉하고 호를 여상(呂尙)이라 함으로써 그 후손이 여씨라고 하였으며 여불위가 그 후손이기도 합니다.

 

진시황은 성씨가 영(), ()라는 두 성을 가졌으며 또 여()가 혈통이라는 이설이 존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영과 조, 배씨는 그 뿌리가 비자를 시조로 하는 분파된 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진본기(秦本紀)

 

순임금이 요성(姚姓)의 옥녀(玉女)를 대비에게 주어 부인으로 삼게 했다. 조유()를 하사 받은 대비(大費)는 순임금 곁에 있으면서 날짐승과 들짐승들을 조련하며 도왔다. 많은 날짐승과 들짐승들이 대비의 말을 알아들었다. 이가 백예(伯翳). 순임금이 백예에게 영씨(嬴氏) 성을 하사했다.

 

대비가 아들 둘을 낳았다. 장자는 대렴(大廉)이라 했는데 조속씨(鳥俗氏)의 선조가 되었으며 차자는 약목(若木)으로써 비씨(費氏)의 선조가 되었다. 약목의 현손 중에 비창(費昌)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 자손들 중 일부는 중국(中國)에 살았고 일부는 이적(夷狄)의 땅에 살았다. 하조(夏朝)의 걸왕(桀王) 때 비창은 하나라를 떠나 상나라에 귀의하여 탕()임금을 위해 수레를 몰고 출전하여 명조(鳴條)의 땅에서 걸왕과 싸워 이겼다. 또한 맹희(孟戱)와 중연(中衍) 대렴의 현손이다. 그들은 새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나 사람의 말을 했다.

 

상나라의 임금 태무(太戊)5)가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들에게 말을 몰고 달리게 하고 점을 쳐보게 하였다. 점괘가 길하게 나오자 그들에게 임금의 수레를 모는 어자(御者)를 시키고 여인을 구해주어 부인으로 삼게 하였다. 상나라의 태무 임금 이후로 중연의 후손들은 대를 이어 공을 세우고 은()나라를 도왔다. 영씨(嬴氏)들은 자기들의 이름을 스스로 빛나게 만들어 마침내 제후의 대열에 설 수 있었다.

 

중연의 현손 중에 중휼(中潏)이라고 있었다. 그들은 서융(西戎)의 땅에 살면서 서수(西垂)6)의 땅을 지켰다. 중휼이 비렴(非廉)을 낳고 비렴은 오래(惡來)를 낳았다. 오래는 힘이 장사였고 비렴은 달리기를 잘하였다. 부자가 재능과 용력을 갖추어 은나라의 주왕(紂王)을 섬겼다.

 

오래혁(惡來革)은 비렴의 아들이었는데 일찍 죽었다. 오래혁(惡來革)은 여방(女防)이라는 아들을 두었다. 여방은 방고(旁皐)를 낳고 방고(旁皐)는 태궤(太几)를 낳고 태궤는 대락(大駱)을 낳았다. 대락은 다시 비자(非子)를 낳았다.

 

주무왕이 주왕을 토벌할 때 오래를 같이 잡아서 죽였다. 그때 비렴은 주왕을 위하여 북방에 사자로 나가 있었다. 비렴이 북방에서 임무를 행하고 돌아왔으나 주왕이 이미 죽어 보고할 사람이 없자 곽태산(霍太山)7)에 제단을 쌓고 자기가 다녀온 일을 고하였다. 그때 비렴은 석관(石棺)을 하나 얻었다. 그 석관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었다.

『상제께서는 처보(處父-비렴의 자)로 하여금 은나라가 입은 재난을 피하게 하시고 석관을 내려 그 종족을 번성하게 하려고 함이라!

비렴이 죽자 그를 곽태산에 장사 지냈다.

 

비렴의 막내아들에 계승(季勝)이라고 있었다. 계승이 맹증(孟增)을 낳았다. 맹증은 주성왕(周成王)의 총애를 받았다. 이가 택고랑(宅皐狼)8)이다. 고랑(皐狼)이 형보(衡父)를 낳고 형보(衡父)는 조보(造父)를 낳았다. 조보는 수레를 잘 몰아 주목왕(周穆王)의 총애를 받았다. 목왕은 이름이 적기(赤驥), 도려(盜驪), 화류(), 록이(騄耳)등 여덟 마리의 명마9)를 얻어 사마(駟馬)로 삼아 서쪽으로 순수(巡狩)를 나가 그 즐거움에 돌아올 줄 몰랐다. ()나라10)의 언왕(偃王)11)이 란을 일으키자 조보(造父)가 목왕을 위해 수레를 번개 같이 몰아 삽시간에 주나라로 돌아 올 수 있었다. 주목왕은 하루에 천리를 달려 주나라에 돌아와 서()나라의 란을 진압했다. 목왕이 조보를 조성(趙城)12)에 봉했다. 비렴(非廉)이 계승(季勝)을 낳은 이후로5세인 조보(造父) 때에 이르러 조성(趙城)에 모여서 살게 되었으며 후에 진문공(晉文公)을 따라 유랑하다가 당진(唐晉)의 대부가 된 조쇠(趙衰)가 그의 후손이며 다시 조쇠의 자손들은 당진을 삼분한 조나라의 선조가 되었다.

 

비자가 견구(犬丘)에 살면서 말을 기르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말을 잘 길렀다. 견구에 살던 사람들이 주효왕(周孝王)에게 비자(非子)에 대한 말을 전하자 효왕이 불러 그에게 견수()와 위수(渭水) 사이의 땅에서 말을 기르도록 명했다. 말은 크게 번식하였다효왕이 비자를 대락(大駱)의 후계로 삼으려고 하였다. 조보가 주왕의 총애를 받아 조성에 봉해 졌기 때문에 모두가 조성(趙城)에서 살게 되었고 성씨를 조()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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