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문왕과 미다스왕,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이야기 (2/2)

퍼옴 "지평선의순례자 | 2008.05.19 02:09 "

고대 근동 이야기
경문왕과 미다스왕,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이야기 (2/2)
2007/05/27 오 전 12:29 | 고대 근동 이야기

미다스(Midas) 왕(王)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미다스 왕은
어떤 왕이며 프리기아(Phrygia) 는 어떤 나라인지 이야기하는 것이 더 재미있을 것
같으므로 그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다.

 

1. 히타이트(Hittite) 제국(帝國)의 멸망(滅亡) (약 1200 BC)

1200 BC 년 경에 일어난 고대사(古代史) 최대(最大)의 수수께끼 중 하나인 고대국가
(古代國家)
들의 갑작스런 몰락(沒落)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자.

청동기(靑銅器) 시대 말, 철기(鐵器) 시대로 접어들 무렵에 지중해 동쪽의 고대 국가들이

갑자기 잿더미가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히타아트, 미케네, 필로스, 트로이, 우가리트, 알라시아(키프로스) 등 지중해(地中海)
연안(沿岸)의 고대 국가들이 갑자기 무너진다.

이후 그리스에 첫 도시국가가 생기고 문자(文字)로 기록(記錄)을 남기기 시작하는
800 BC 년 까지를 암흑시대(暗黑時代, Dark Age)라고 부른다.

암흑시대(暗黑時代, Dark Age)는 서양(西洋)의 관점에서 편의상(便宜上) 붙인 명칭이다.

앗시리아나 아집트는 멸망하지 않았으니 엄밀히 따지면 암흑시대(暗黑時代)는 아니다.

2. 무쉬키(Mushki) - 프리기아(Phrygia)의 등장 (1160 BC)

그리스인들이 프리기아(Phrygia)라고 부르는 나라가 앗시리아의 기록에는 무쉬키(Mushki)
로 적혀있다.

히타이트가 멸망한 후 1160 BC 년에 무쉬키(Mushki) 라는 나라가 대군(大軍)을 이끌고

앗시리아의 알지(Alzi) 와 푸루후지(Puruhuzzi) 를 공격한다.

50년 후 앗시리아의 티글라트-필레세르1세(Tiglath-Pileser I)가 반격(反擊)하여
무쉬키를 몰아낸다.

히타이트가 강성(强盛)했을 때 앗시리아는 이류국가(二流國家) 수준이었으나,

히타이트 말기(末期)부터 군사강국(軍事强國)으로 발돋움하다가 히타이트가 멸망한 후에는
지금의 터키인 아나톨리아 지역(地域)으로 진출을 꾀하게 된다.

 

히타이트 멸망 후 히타이트의 유민(遺民)들은 말라티아(Malatya), 타발(Tabal),
쿠에(Que),
카르케미시(Carchemish) 등에 독립된 소국(小國)을 세우지만 점증(漸增)하는
앗시리아의 위협(威脅)에 직면(直面)하게 된다.


이들은 앗시라아에 정복(征服)당해 공물(供物)을 바치기도 하고, 앗시라아의 지배(支配)가
느슨해지거나 폭정(暴政)이 심해지면 반란(反亂)을 꾀하기도 했다.

무쉬키(Mushki) 도 이들과 같이 앗시리아에 대적(對敵)하는 나라 중 하나였다. 

하지만 무쉬키는 히타이트의 유민(遺民)들이 세운 나라는 아니고 히타이트 멸망을 전후
하여 이 지역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세운 나라

3. 미다스 왕의 등장 (718 BC)

718 BC 년에 프리기아(Phrygia)의 미다스(Midas) 왕으로 추정(推定)되는 무쉬키(Mushki)의

미타(Mita) 왕이 등장한다.

미타(Mita) 왕은 타발(Tabal), 카르케미시(Carchemish) 등과 연합하여 앗시리아에
대적(對敵)해 싸운 것으로 앗시리아의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 

그런데 709 BC 년에 무쉬키(Mushki)의 미타(Mita)왕은 갑자기 앗시리아에 호의적(好意的)

으로 나온다.


앗시리아에 의해 폐위(廢位)되었던 타발(Tabal)의 전왕(前王) 우리키(Urikki)

앗시리아의 또다른 적대국이었던 우라르투(Urartu)와 동맹(同盟)을 맺기 위해
사신(使臣)을 파견한다.


사신(使臣)들이 무쉬키(Mushki) 영토(領土)를 지날 때 이들은 미타(Mita) 왕의 군사들에게

체포(逮捕)되어 앗시리아로 넘겨진다. 

앗시리아의 오랜 적국(敵國)이었던 무쉬키가 앗시리아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態度)를

갖게 만든 요인은 무엇일까

4. 킴메리아(Cimmeria) 인의 등장과 미다스 왕의 죽음 (714 BC, 696BC)

714 BC 년에 킴메리아인이라 불리는 한 무리의 호전적(好戰的)인 민족(民族)이 코카사스
산맥(山脈)를 넘어 우라르투(Urartu)까지 내려왔다가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흑해(黑海)
남쪽 해안을 타고 이동하여 시노페(Sinope) 부근에 근거지(根據地)를 마련한 다음
타발(Tabal)까지 진격하는 일이 일어난다.

킴메리아인들은 무쉬키(Mushki)를 압박(壓迫)했는데 미타(Mita)왕은 앗시리아와 킴메리아
동시에 대적(對敵)할 수 없었으므로 앗시리아와 동맹(同盟)을 원했던 것이다. 

705 BC 년에 앗시리아의 사르곤2세(Sargon II)는 군대(軍隊)를 이끌고 타발(Tabal) 지역의
군주(君主)들 중 하나였던 고르디아스(Gordias) 왕과 전쟁(戰爭)을 벌인다.

이때 무쉬키는 앗시리아의 동맹국(同盟國)이었기 때문에 무쉬키 군(軍)도 같이

원정(遠征)을 간 것으로 보인다. 

앗시리아-무쉬키 동맹군(同盟軍)은 대패(大敗)하고 사르곤2세는 전사(戰死)한다.

사르곤2세의 아들인 센나케립(Sennacherib, 704-681 BC)이 앗시리아의 왕이 되고,
무쉬키의 미타(Mita) 왕은 앗시리아의 모든 기록물(記錄物)에서 사라진다.


고고학자(考古學者)들 중 일부는 미타(Mita) 왕이 가까스로 전쟁터를 빠져나온 다음

살아남은 군사(軍士)들을 이끌고 서쪽으로 향하는 옛길을 따라 중앙 아나톨리아 지역을

가로지른 후 그리스 문명권(文明圈)에서 "프리기아의 미다스 왕"으로 다시 나타났다고

본다.

이때 그리스는 미케네 멸망(滅亡) 이후 시작된 400 년 동안의 암흑시대(暗黑時代)를 빠져 나오던 참이었다. 

프리기아(Phrygia)의 서울인 고르디온(Gordion)의 유물(遺物)을 조사(調査)하면
BC 8 세기까지는 서부(西部) 아나톨리아 양식(樣式)의 유물이 발견되다가, BC 8 세기

이후 지층(地層)에서는 동부(東部) 아나톨리아 양식의 유물이 다량으로 발견된다.


이것은 동부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고르디온(Gordion)으로 이동

했다는 증거다.


이후 미다스(Midas) 왕(王)은 어떻게 됐을까? 

696 BC 년에 킴메리아인들이 프리기아의 서울인 고르디온(Gordion)으로 쳐들어 온다.
킴메리아인과 맞서 싸우지만 전세(戰勢)가 불리해지자 미다스 왕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리고 프리기아(Phrygia)는 역사(歷史)에서 사라진다.
이후 서부(西部) 아나톨리아의 주도권(主導權)을 잡은 나라는 리디아(Lydia) 이다.


5. 프리기아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헤로도토스의 "역사 제2권"을 보면 프리기아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적혀 있다.


이집트의 파라오 "프삼메티코스"가 세상에서 가장 오래 된 민족을 알아내기 위해

갓 태어난 두 아이를 뽑아 양치기에게 맡기고 인적(人迹)이 없는 곳에서 키우되
한 마디 말도 하지 못하게 했다.

아이들이 말을 할 시기가 됐을 때 처음으로 하는 말을 조사하여 세상에서 가장 오래 된

민족을 찾으려는 의도였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직접 인용한다. 

  명령 받은 대로 행한 지 2 년이 된 어느 날 양치기가 오두막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두 쌍둥이 아이가 손을 뻗으며 그에게 달려들면서 "베코스"라고
 
말했다.

  양치기가 그 말을 듣고서도 처음에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두막으로 가 아이들을 돌보아줄 때마다 계속 그 말을 듣게되자,
  양치기는 마침내 이것을 왕에게 보고하고 왕의 명령에 따라 아이들을 왕 앞으로
  데려왔다.

  왕도 직접 자기 귀로 그 말을 듣고 "베코스"라는 말이 어느 나라 말인지
  조사해 보도록 했다.

  그 결과 프리기아어로 빵을 "베코스"라 함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헤로도토스 역사 제 2 권, 박광순 역, 범우사>

프리기아인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민족이라고 그리스인들은 정말로 믿었을까?

이집트인, 앗시리아인, 미케네인이 프리기아인 보다 더 오래된 민족인데 말이다.


 

6. 남은 이야기
20세기 중반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의 고고인류학 팀이 터키의 야시휘육크(Yassihoyuk)
(프리기아의 서울 고르디온으로 추정) 에서 미다스 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무덤

발굴한다.


작은 언덕 모양인데 지름이 300 미터, 높이가 47 미터인 원뿔 모양의 무덤이다.
이 무덤이 미다스 왕의 무덤이 아니라 아버지인 고르디우스 왕의 무덤이라는 설도 있다.

 

무덤 안에는 각종 진귀(珍貴)한 물건들이 많이 발견됐는데, 이것이 미다스 왕의 황금손

이야기를 낳은 것이 아닌가 추정(推定)하는 사람들이 있다. 

당나귀 이야기는 어떻게 된 것일까?
프리기아는 그리스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부유(富裕)한 미다스 왕을 깍아 내리기 위해

그리스인들이 일부러 만들어낸 이야기라는 주장을 펴는 사람들이 있다

위키피디아를 검색(檢索)해 보니 사라 모리스(
Sarah Morris)라는 학자(學者)

새로운 주장을 펼쳤는데 "당나귀 귀" 청동기 시대 () 신성(神性) 신체적

특징으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자세한 내용이 없어서 이상 적지 못하겠다.


미다스
왕은 황금손이나 당나귀 이야기에 나오는 어리석은 임금이 아니다.

밀려드는
야만족(野蠻族) 킴메리아인 대항해 싸웠고 생존을 위해 앗시리아에 대한

적의(敵意) 버리고 동맹(同盟) 맺은 사람이다

전쟁에서
대패하자 살아남은 병사들을 이끌고 서쪽으로 이동하여 역사에 화려하게

재등장한다

킴메리아인의
재침입으로 그들과 전쟁을 벌이지만 싸움에서 지고 이상 희망이

없자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극적인 삶을 마감한다

그가
살아온 역정(歷程) 동화(童話) 보다 재미있지 않은가?

[참고한 책]
- The Hittites and their comtemporaries in Asia Minor (J.G. Macqueen)
- Cultural Atlas of Mesopotamia (Michael Roaf)
- Ancient Iraq (Georges Roux)

부여의 출자에 대한 <삼국지 한전>분석 (5부)
 
심제 이진우 박사 기사입력  2015/01/20 [17:40]
Ⅳ.부여의 출자(出自)에 대한 삼국지 韓傳 분석

   부여(夫餘)와 관련된 언어학적 관련성 즉 파생 국가명과 지명 등을 이루는 한국어가 고대 어떤 언어로 부터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한 연관성은 이미 2장에서 검토하였고 그 결과 한국고어는 전반적으로 터키어의 영향이 컸음을 설명하였다. 부여라는 국가명은 앞부분 음가인 부리(不而,夫里) 혹은 비리(沸利)등의 발음군과 뒷부분 음가인 령지(令支), 이지(離支)라는 발음군의 연결체임을 알 수 있는데, 이를 합하면 불리지(弗離支) 혹은 비리지(不離支)등으로 읽을 수 있다.

이것 또한 백제의 비류(沸流)나 가야(伽倻)등이 부여의 어원에서 파생된 언어임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언어 분석 결과와 사서의 기록에 의하여 기원전 6C이전에 이미 동북아시아에 진출한 터키계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에 관한 강길운의 한국고어 연구를 기초로 고대음가를 제공한 집단에 대한 실마리를  『삼국지』한전에서 발견할 수 있다.

『三國志』韓傳 - 韓在帶方之南,東西以海為限,南與倭接,方可四千里.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韓.辰韓者,古之辰國也.馬韓在西.其民土著,種植,知蠶桑,作緜布.各有長帥,大者自名為臣智,其次為邑借,散在山海間,無城郭.(臣雲新國등.. 중략)凡五十餘國. 大國萬餘家,小國數千家,總十餘萬戶.辰王治月支國.`”臣智或加優呼臣雲遣支報安邪踧支濆臣離兒不例拘邪秦支廉之號”.其官有魏率善,邑君,歸義侯,中郎將,都尉,伯長.

이는 언어적으로 부여(夫餘)와 진(辰)은 터키계언어를 이해하였다는 사실에 기반 하며 그러한 사실을 추정할 수 있는 내용이 다음과 같음을 볼 수 있다.
“臣智或加優呼臣雲遣支報安邪踧支濆臣離兒不例拘邪秦支廉之號”

상기 문장에 대한 선행 연구자들의 해석으로“신지에게는 간혹 우대하는 신운견지보(臣雲遣支報) 안야축지(安邪踧支) 분신리아불례(濆臣離兒不例) 구아진지렴(拘邪秦支廉之號)의 칭호를 더하기도 한다”라고 하였고, 이 구절의 해석은 대체로 이병도의 설을 따른다 하였는데 부여 출자에 대한 인식부족과 문장의 난해성으로 인하여 아직도 더 연구가 필요하다고 한바, 최근의 해석 시도로서 정형진은 문장의 띄어 읽기 변화를 통해“신운국의 견지보, 안야국의 축지, 분신국의 리아, 부례구야의 진지렴“으로 해석하고, 특히 부례구야(不例拘邪)를 프리기아로 해석하여 신채호가 주장한 불리지국(弗離支國), 불령지(弗令支)에 대응한다고 보았다.
 
   본 연구자는 선행연구에 대해 보완된 의견을 제시하고자 한다. 『삼국지』한전 내용에서 “진한(辰韓)은 고진국(古辰國)이라 하였고, 옛 진왕은 월지국(月支國)을 다스린다”는 내용에 대해 기존 연구자들은 『삼국지』에서 표기된 월지국과 달리 『위략』과 『후한서』의 내용을 들어 월지국을 목지국(目支國)의 오기로 주장하는데 대해서 연구자는 동의하기가 힘들다. 여기서 월지국은 고진국(古辰國)과 정치적으로 연결된 국가로 추정되며, 시기적으로 진국(辰國)이라는 존재를 기술한 『삼국지』  저술시기보다 수세기 전인 기원전 3세기 이전에 동음(同音)의 흉노풍속을 가진 강력했던 국가 월지(月氏)가 존재했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목(目)은 월(月)의 오기로 보아 연구자는 이 월지국을 다스리는 왕을 고진왕(古辰王)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본문에 출현한 직급 신지(臣智)는 삼한의 수장을 일컫는 뜻으로 상기 문장에 대한 새로운 해석 시도로 연구자는 “臣智或加優呼, 臣雲遣支, 報安邪踧支, 濆臣離兒,不例拘邪秦支廉,之號”로 읽으려 하며, 이를 해석하면 “신지 혹은 가우라고 부르는데, 신운국의 견지, 보안야국의 축지, 분신국의 리아, 부례구야의 진지렴”으로 해석된다. 진국(辰國)의 언어가 부여를 비롯한 고대 터키계어 음가와 관련 있으므로 『삼국지』가 쓰여진 3세기 이전의 국가이름과 지역을 고찰하면 『한전』에 기록된 신운국, 보안야국, 분신국, 부례구야국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문장에 열거된 신지(臣智) 혹은 가우라 부르는 나라와 수장 이름의 음가를 알기 위해 기원전·후로 터키어와 관련된 어원을 사용했을 나라들의 명칭을 고대 아나톨리아에 위치했던 프리기아(Phrygia)가 부례구야(不例拘邪),불리지(弗離支)로, 폰투스(Pontus)가 보안야(報安邪)로, 카파도키아(Cappadocia)가 가독(加毒)등으로 대응된다고 볼 수 있다.

한국어 기원추적에 대한 강길운의 주장을 기반으로 할 때, 위만조선의 대신들이 백성들을 이끌고 망명한 진왕(辰王)이 이끄는 고진국(古辰國)이 터키계어를 사용했고 또한 월지국(月支國)을 다스리는 기록은 시기상으로 기원전 3세기경에 감숙성과 영하성에 존재하다 기원전 2세기말 흉노에게 패한 후 박트리아 지방으로 서천(西遷)한 월지(月氏國)로 대응될 수 있다고 본다. 이와 관련하여 『사기』흉노열전에 의하면 월지는 기원전174년 흉노의 노상선우에 의해서 궤멸적 타격을 입고 서쪽으로 이동하며, 그 지역에 존재하던 대하국(大夏,박트리아)을 공격하여 속국으로 삼았다.

또한 『사기』대완열전에 따르면 월지 또한 흉노와 습속이 같다고 하였으며, 고진국(古辰國) 또한 지역적으로 월지가 있었던 지역과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고 가정하면, 이미 소아시아 지역에서 기원전 7C초까지 존재하다 먼저 동진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철기문화와 흉노습속을 가진 부례구야(不例拘邪, Phrygia)의 영향 하에 있다가 이후 동진(東進)하여 진한(辰韓)이란 이름으로 낙랑지(樂浪地)에 도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1세기 그리스 지리학자 스트라본은 『지리지』에서 그리스, 박트리아 왕들의 세력 반대편에 Phrynoi(흉노)와 Seres(비단, 중국)이 있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부례구야(不例拘邪,Phrygia)는 진국보다 시기적으로 먼저 동진하여 활동한 사실이 기원전 6세기 이전 기록인 『관자』등에서 발(發)로 확인되는 것으로 보인다. Phrynoi의 등장 기록과 관련하여 삼국지『한전』의 기사를 연구한 자료에는 흉노라는 단순설명으로 후속 연구 없이 그친 것은 흉노사 연구에 매우 아쉬운 점이라고 할 수 있다.
 
  『후한서』 등에는 부여와 진번 그리고 고구려를 흉노라 칭했고 흉노와 습속이 같다고 하였던바, 부여와 흉노,고구려와 관련된 특이할 만한 습속으로 형사취수제 (Lavir-ate Marrage)를 꼽을 수 있다. 이 제도는 유목민족 원래 혈족의 재산이 족외로 유출을 방지하고 혈족이 형수를 부양하는 의미가 있다. 이와 같은 흉노계열의 문화인 형사취수제의 전통을 이어가고 터키계 언어를 구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부례구야(不例拘邪,Phrygia)와 월지(月支)족의 동진 과정의 중간 기점에 중앙아시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현대까지 그 습속이 남아있는 카자크스탄(Kazakhstan)을 눈여겨볼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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