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총독부박물관이 1923년 구입한 부여의 금동 얼굴상. 길이 27.4cm  오른쪽은 중국 뤼순박물관에서 발견된 것으로 얼굴이 매우 닮았고 크기슨 17.9cm 로 약간 작다.  국립중앙박물관 김민구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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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갸름하고, 찢어진 눈… 가장 오래된 韓國人 얼굴 찾았다"

  • 허윤희 문화부 기자  E-mail : ostinato@chosun.com   입력 : 2014.09.05 05:38
    美 미네소타大 김민구 교수 "2~3세기 夫餘 얼굴상 2점 확인"
    머리에 상투 튼 모양… 귓불엔 귀고리용 구멍 뚫려
부여 2~3세기 금동 얼굴 사진
부여 2~3세기 금동 얼굴. 높이 17.9㎝. /김민구 교수 제공

길고 갸름한 얼굴에 위로 쭉 찢어진 눈꼬리, 머리엔 상투를 틀고 귓불을 뚫은 중년 남성.

중국 지린성에서 출토된 한 뼘짜리 얼굴상이 고대 한국인 최고(最古)의 얼굴 조형물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김민구(37) 미국 미네소타대 미술사학과(동양미술) 조교수는 "일제강점기 지린성 지린시 동부 둥퇀산(東團山)과 마오얼산(帽兒山) 일대에서 출토된 금동 얼굴상 2점은 한민족계 고대국가인 부여(夫餘) 2~3세기의 유물"이라고 밝혔다. 최근 발간된 '미술사논단' 제38호에 수록된 '부여의 얼굴: 둥퇀-마오얼산 출토의 금동면구(金銅面具)와 그 외연(外延)'이라는 논문에서다.

김 교수는 "둥퇀-마오얼산 일대는 중국 후한(後漢) 말기 혹은 고구려계 유적일 것이라 막연히 추정했으나 중국 지린성문물고고연구소 등이 최근까지 발굴 조사한 결과 부여의 왕성지(王城址)임이 확인됐다"며 "금동 얼굴 역시 후한 말기나 훨씬 늦은 시대의 거란계 유물로 추정돼왔으나 출토지가 부여 왕성지로 확인되면서 명실공히 부여의 유물로 확인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 교수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이 일대에선 금동 얼굴이 최소 6점 발견됐다. 4점은 일찍 자취를 감췄으나 2점은 중국 뤼순박물관(추정)과 지린성박물관에 각각 전한다. 그나마 국내 학계에선 광복 이후 잊힌 유물이다. 둘 다 얼굴은 갸름하고 인상은 강렬하다 못해 기괴하다.

지린성 마오얼산에서 출토된 부여 금동얼굴. 오른쪽은 훼손 전 원형을 추정한 그림
지린성 마오얼산에서 출토된 부여 금동얼굴. 오른쪽은 훼손 전 원형을 추정한 그림. /김민구 교수 제공

이 중 둥퇀산에서 출토됐다고 전하는 얼굴상의 높이는 17.9㎝. 정수리 부분이 상투를 튼 것처럼 볼록 솟아있고, 귓불에 천공(穿孔·구멍을 뚫은 흔적)이 있어 귀고리를 착용했음을 시사하는 점 등이 고대 한민족 특유의 습속을 보여준다고 김 교수는 설명했다. 이마의 주름, 벌어진 입, 살짝 내민 혀…. 이 얼굴은 관동청박물관(현 뤼순박물관)이 1926년 발간한 소장품 도록에 사진이 처음 등장한다. 다른 한 점은 중국 고고학자 리원신(李文信·1903~1982)이 1934년 마오얼산 아래 밭에서 발굴했다. 높이 13.8㎝. 지린성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얼굴상의 용도는 뭘까. 김 교수는 “마구(馬具)나 무기 등에 장식용으로 장착됐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부여(기원전 2세기 이전~기원후 346)는 철기를 기반으로 이 지역에 최초로 고대국가를 성립한 세력이다. 이들의 문화가 이후 고구려·백제는 물론 바다 건너 왜(倭)에까지 정치·언어·이념·종교 등 다방면으로 계승됐다. 김 교수는 “따라서 이 얼굴상은 고대 한국인 자신의 모습이라 할 입체 조형 최고(最古)의 걸작”이라고 했다.

미술해부학 박사인 조용진 얼굴연구소장은 “부여족과 연관된 브리야트족의 얼굴을 조사한 적이 있는데 상당히 유사하다. 긴 얼굴에 광대뼈, 홀쭉한 뺨, 얇은 입술 등 북방계 얼굴”이라고 했다. 강인욱 경희대 교수(북방 고고학)는 “5~6세기 신라 기마인물형 토기의 얼굴과도 비슷하다. 한국인을 포함한 극동 퉁구스 계통 민족의 공통적 특징을 잘 담고 있는 전형적 북방계 얼굴”이라고 말했다.

[특별기획] 단군신화, 그리고 북방이야기

주간경향 2007.10.30뉴스메이커 747호

코리안루트 1만㎞ 대장정 
단일종족 신화 논리는 역사를 축소… ‘단군-게세르 계열’로 안목을 넓혀야

부리야트인들이 게세르가 알려진 후 1000년이 지난 것으로 추정되는 해인 1991년 이를 기념하여 셀렝게 강변 언덕에서 기념전을 열었다. <신동호 기자>

부리야트인들이 게세르가 알려진 후 1000년이 지난 것으로 추정되는 해인 1991년 이를 기념하여 셀렝게 강변 언덕에서 기념전을 열었다. <신동호 기자>

 

“우사, 풍백, 운사, 세오가 환웅을 보필하는 사신(四神)으로 설정되고, 태초의 혼돈 속에 벌어지는 선과 악의 투쟁이 현무, 백호, 청룡, 주작의 전투 장면으로 묘사된다. 농경사회의 상징으로 알려진 우사와 풍백이 실제로는 전쟁의 신이었고, 현무, 백호로 변신하여 지상의 악을 제거하는 전쟁을 벌이는 것이다.”  

이 얼마나 재기발랄한 연출인가? 드라마 ‘태왕사신기’에서 단군신화를 보는 시각의 일부다. 물론 ‘태왕사신기’에서 단군신화를 족조신화로 축소하며, 단일 종족신화를 강조하는 것은 신화를 통한 역사 왜곡으로 비난받을 수 있고, 고조선에서 분화한 다양한 종족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심각한 문제점이 될 수 있다. 다만, 필자가 주목하는 점은 단군조선의 경제적 기초가 농경이라는 상식화된 추론이 실제로는 막연한 추정일 수 있음을 보여줄 수 있는 대목이다. 이와 유사한 얼개를 가진 북방신화인 ‘게세르’의 내용을 염두에 두고 단군신화의 얼개를 비교해보면 이러한 해석이 단순히 연출자 개인의 상상력에 불과하다고 폄훼하기 어렵다.  


단군조선 사회체제 접근 신중해야 

프롤로그와 제1, 2부를 비교해보자. 게세르 신화에서는 신화 텍스트가 지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늘 세계의 회의, 하늘신 게세르의 지상 파견, 지상의 조화 복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단군신화에서도, 지상세계의 문제와 백성들의 도탄을 목격한 환웅이 환인의 허락을 얻은 뒤 우사, 풍백, 운사를 비롯한 전쟁신 혹은 최첨단 신무기를 갖추고 하늘용사 3000명과 함께 지상강림한다. 이후 신시로 불리는 하늘 신의 직접 통치구역을 설정하고, 지상에서 인간들을 괴롭히는 악의 무리들을 제압한 뒤 지상과 우주의 조화를 복원한다. 이렇게 보면 두 신화가 닮은꼴이 아닌가? ‘불함문화론’에서 단군신화와 몽골계 부리야트인의 게세르 서사시를 유사한 내용이라고 한 육당 최남선의 말이 허언이 아니다. 


‘주곡’이라는 표현을 농경사회의 유력한 증거로 내세울 수 있으나 단군신화가 유목에 가까운 북방 종족들의 신화와 밀접한 관련성을 갖고 있다면, 조금 더 조심스러운 시각으로 단군조선의 사회경제 체제를 논할 필요가 있다. 단군신화에 농경을 상징하는 요소가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사회 전체가 농업경제를 기반으로 성립했다는 증거를 제시하기는 쉽지 않다.

 

단군 초상. 일연이 채록한 단군신화는 게세르 계열의 이야기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단군 초상. 일연이 채록한 단군신화는 게세르 계열의 이야기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어쩌면, 단군신화를 농경사회의 흔적으로 해석하는 입장이 정주민 이데올로기가 첨가된 편견일 수 있다. 유목세계에 존재하는 닮은꼴 신화들의 존재를 외면하고, ‘바람’이나 ‘비’, ‘주곡’의 요소를 농경사회의 모티프로 추론하는 데는 위험이 따른다. 단군조선의 경제 기반을 농경에 연결하는 시도는 중심에서 주변부로 밀려난 한반도의 거주자들이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장치였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이웃을 범하지 않는 평화 지향의 정주민, 백의민족 이데올로기의 강화를 위한 무의식적인 선택이었을 수 있다.

단군신화를 농경사회의 정착 과정으로 설명하는 통설과 함께 여인으로 변한 웅녀를 두고서 곰족을 부각시키며 단군조선을 곰족의 국가로 해석하는 주장 역시 절반쯤 상식으로 통한다. 하지만 정말일까? 서울대 강정원 교수는 ‘북아시아 곰 관련 의례와 관념 체계’(비교민속학회 발표문, 2007)라는 논문에서 이 같은 상식의 우상을 부분적으로 허문다. 곰 관련 샤머니즘 제의를 시베리아에서 찾기 어렵고, 곰 제의와 샤머니즘과의 관련성이 의문스러워서 단군신화와 샤머니즘의 관계를 숙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강 교수의 주장이다. 이 말은 역으로 샤머니즘과 곰 토템 사이에 역사적인 관련성이 크지 않음을 인정하면 단군신화를 샤머니즘 신화로 이해하는 데 무리가 없다로 해석될 수 있다. 실제로 시베리아 곰 의례 관련 대표적인 연구자라 할 수 있는 한스-요하힘 파프로트의 저서 ‘퉁구스족의 곰 의례‘(태학사, 2007)에는 샤머니즘과 곰을 직접 연결시키는 요소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조금 다른 시각에서 생각해보자. 웅녀는 자신의 의지로 삼칠일간의 혹독한 수련을 통해 자신이 속했던 곰족의 행태와 문화에서 벗어나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고 상정할 수 있다. 야만에서 문명으로, 곰족의 종족 이데올로기에서 홍익인간과 제세이화를 이념으로 하는 하늘세계의 보편적인 이념을 수용하는 존재로 전이한 것으로 말이다. 웅녀는 하늘 세계 이념을 공유하고 개별 종족이 아닌 보편적인 인간을 지향하는 존재로 다시 태어났다. 인간이 된 웅녀에게 곰족이나 호족은 자랑스러운 혈통이 아니라 제세이화와 홍익인간의 교화 대상이다. 단군신화가 단일종족의 족조신화라는 좁은 범주가 아니라 고대의 제국 형성과 소멸 과정을 담은 보편적인 이데올로기를 지향하고 있는 증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다종족 복합사회 성격 간과 말아야 

신화 텍스트를 살펴보면, 단군조선의 백성들이 모두 다 웅녀의 자식이거나 혹은 단군의 직접적인 후손인 것도 아니다. 단군은 이미 존재하고 있던 곰족, 호족을 비롯해서 인간이면서도 인간이 되지 못한 무리들을 인간으로 교화시켜 보편과 인간을 지향하는 다종족 이념사회인 고대 조선제국으로 나아간 것으로 보인다. 고대 한반도와 북방 거주자들은 단군조선 시대에 이미 순혈 이데올로기로 사물을 판단하지 않았음이 신화 속에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는 셈이다.

단군신화를 한민족 혹은 단일민족의 족조신화 혹은 건국신화로 보는 시각은 단군신화가 다종족 복합사회의 성격을 가진 제국의 신화인 점을 간과하게 만들고 결과적으로 단군조선에 대한 기억을 해체하며 조선의 영역과 범위를 축소하는 왜소한 접근이다. 단군을 단일종족의 족조신화나 건국신화로 주장하는 논리는 자신의 역사를 축소하는 논리를 생산해온 것이다. 신화 텍스트 속의 조선은 다종족, 다문화를 인정하고 이들을 포괄하는 새로운 이념을 공동가치로 지향하는 동아시아 고대 제국의 원형적인 성격을 드러내는데도 말이다. 신화 연구는 문학 텍스트의 세밀한 연구에서 출발해야 하고,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는 객관적인 시각을 견지할 필요가 있다.

지난 호에서 언급한 바대로 바이칼 샤먼 발렌친은 게세르 신화와 닮은꼴인 단군신화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이제 단군과 게세르의 닮은꼴 이야기가 탄생된 경위를 따져봐야 한다. 바이칼 샤먼인 발렌친뿐 아니라 다수의 몽골계 연구자들이 게세르 계열 이야기의 몽골 기원설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표 2〉는 게세르 계열의 이야기에 대한 일반적인 분류의 예다. 담딩수렝은 동북아시아의 특이한 영웅 서사시인 게세르 계열 이야기의 모티프가 ‘티베트→몽골→바이칼 지역 부리야트’의 방향으로 전파가 이루어졌다는 전파론을 주장했고, 발렌친을 비롯한 일단의 연구자들은 몽골인들의 게세르 이야기가 주변 지역 거주자들의 장가르 서사시, 마아다이카라, 단군신화와 같은 유사한 신화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는 영향설을 펴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신화세계에서 기원설과 전파의 방향을 논하는 것은 그다지 생산적이지 않다. 비교 연구를 통해 게세르 계열 이야기들의 기원을 밝히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전파의 방향을 논하는 것조차 객관적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단군신화 채록이 500여 년 앞서 

‘게세르 판본 연구’(비교민속학, 2007)에서 필자가 언급한 바와 같이 전파설의 말단에 있는 부리야트 게세르 신화가 내용상으로는 오히려 신화 공간을 간직하고 있는 고본이고, 육당이 몽골이나 티베트가 아닌 부리야트 게세르 신화를 단군신화와 연결했던 사실을 보면 전파의 경로 추적은 지난한 작업이 아닐 수 없다. 

 

부리야트역사발물관에 전시된 출판 연도로는 가장 오래된 부리야트어 게세르 판본. <신동호 기자>

게세르 계열 이야기의 발생을 해명하는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 이야기 채록 시기를 비교해보는 것은 무척 흥미로운 일이부리야트역사발물관에 전시된 출판 연도로는 가장 오래된 부리야트어 게세르 판본. <신동호 기자> 다. 문헌에 의한 고증은 이야기의 존재 시기에 대한 객관적인 근거기 때문이다.

북방민족들에게서 전해오는 게세르 신화들 가운데 가장 이른 채록본으로는 ‘1716년 베이징 판본’을 손꼽을 수 있다. 만주족의 족조신화를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를 타고 몽골의 게세르 서사시가 베이징에서 1716년 목판 출간된 것으로 추정된다. ‘1716년 베이징 판본’ 채록 이전에 티베트 지역에서 이미 1600년대 초에 게세르 계열의 서사시가 존재했고, 채록되었다는 보고가 있지만, 실제로 티베트 고본은 모두 소실되어 남아 있는 판본을 찾을 길이 없다. 1830년대에 몽골어로 기록된 ‘링 게세르(Geser of Ling) 판본’을 티베트 고본의 몽골어 번역본으로 추정하는 학자들이 있어 티베트 고본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신화적인 시공을 고스란히 갖고 있는 부리야트 게세르 판본들 역시 그 각본들의 수가 100여 개가 넘지만 대부분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에 채록된 것이다. 알타이의 ‘마아다이카라’와 칼묵인들의 ‘장가르’ 역시 18세기 이후 채록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13세기에 일연선사가 기록한 ‘단군신화’는 단군-게세르 이야기 계열에서 가장 오래된 채록본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단군신화를 채록한 이후 무려 500여 년이 지난 뒤에야 이와 유사한 얼개를 가진 게세르 신화와 서사시들이 몽골 등지에서 채록되기 시작한 것을 보면, 단군을 게세르 계열 이야기로 설명하기보다, 게세르 이야기들을 단군신화 계열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역사적·고고학적인 사실뿐 아니라 신화적인 내용까지 북방을 비롯한 다른 지역의 유사한 사례와 비교해서 전파론과 영향설의 잣대로 해석하는 방법론이 과연 옳은가? 게세르 계열의 이야기를 ‘단군-게세르 계열’로 부르는 것이 마땅해보인다. 

13세기는 몽골제국이 성립하는 단계이며 한반도가 몽골에 무릎을 꿇고, 몽골과 고려의 연합군의 일본열도 공략 시도가 있던 격변의 시기였고, 이를 감안하여 단군신화를 일연선사에 의한 위작일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국난에 직면해서 민족주의에 호소하는 신화 활용 전략이 구사된다는 설명인데, 국난을 초래한 몽골에 대항하기 위해 몽골계 신화를 모방해서 한반도의 신화를 창작했다는 주장에는 어폐가 있어 보인다.  

일연선사는 단군신화가 본인의 창작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구전되는 이야기의 채록이라고 분명하게 밝혔다. 오늘날 단군신화와 유사한 얼개를 가진 신화적인 서사들이 동북아시아의 각 지역에서 서로 다른 명칭을 가지고 발견되는 것을 보면, 유사한 이야기들이 일연 이전에도 지역과 종족에 따라 독특한 판본 형태로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야기의 전파 방향이야 확인할 길이 없으나, 단군신화는 ‘단군-게세르 계열 이야기’들의 존재를 13세기 이전으로 추정할 수 있는 문헌 증거라고 할 수 있다.
 
< 양민종/ 부산대 러시아어문학과 교수·신화학>

발해고구려학회

http://www.palhae.org/gnubrd4/bbs/board.php?bo_table=pds2&wr_id=201&page=6 

 

고대 한국인들과 사얀-알타이 민족들 간의 민족 문화적 관계에 대하여-Abaev N. Viacheslavo -

 

고대 한국인들과 사얀-알타이 민족들 간의 민족 문화적 관계에 대하여 


                            Abaev N. Viacheslavovitch(러시아 투바대학)
                                               
                                                               
원(原)몽골인들의 기원에 관한 문제는 고대 한국민족의 기원과 함께 사얀-알타이 민족그룹의 이동, 주변 민족들 간의 영향력 행사등과 맞물려 아주 중요한 주제이다. 이 민족간의 이동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행해졌고, 동쪽 아무르강 연안, 만주지역, 그리고 한반도에까지 그 여파가 미쳤고, 동쪽으로 이동하는 이러한 과정 속에 현대 몽골어와 부리야트어가 만들어지게까지 될 정도였다.(빅토로바, 1958)

 
원몽골어와 고대 투르크 언어들은 흉노의 언어를 바탕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바이다. 사얀-알타이 지역 동부의 산악-타이가지역에서 이 두 언어의 모태가 형성되어 점차로 동부 사얀에서 아무르강 상류까지, 몽골 알타이를 지나 현재의 중국 신강지역을 따라 남쪽의 황해까지 이르렀다. 물론 이러한 언어의 흐름은 서기 전 3세기 경 고대 흉노의 거대한 유목제국의 형성과 관련이 있다.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고대 중국문헌에 나오는 여러 흉노어의 관련 단어들은 많은 연구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일본인 학자 시라토리 꾸라끼띠는 흉노어는 투르크어계통에 속한다고 주장했다.(시라토리, 1970, 4권, 1-8쪽) 그러나 람스테트는 흉노의 언어에서 아직 몽골어와 투르크어로 갈라지지 않은 상태인 알타이어계통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하였다.(람스테트, 1937, 81-91쪽) 이에 러시아 학자인 L.N. 구밀레프는 흉노의 언어는 투르크어계통이라고 굳게 확신하였다.(구밀레프, 1960, 48-49쪽) 하지만 L. 라게티같은 학자는 이러한 논의들에 대해 가급적 언급을 피하며 신중하게 접근할 것을 요구했다.(라게티, 1950, 141-149쪽)

여러 연구결과에 따르면, 흉노 언어의 기원은 우랄언어들이고 특히 그중에서도 핀-위구르어, 사모예드어, 케트어같은 고아시아어일 것이라는 의견이 옳다고 본다. 또한 고대 투르크어와 몽골어의 구분은 우랄 인접지역 숲 속에 살던 민족들이 사얀-알타이, 남우랄 지역 그리고 이 후 중앙아시아 숲-스텝과 대유라시아 평원으로 이동함에 따라 생겨났다는 주장도 옳다고 본다. 이와 같은 민족들의 이동은 결국 우랄-알타이계 민족들과 스키타이같은 이란계 민족들, 아리아인이라 부르는 인도-유럽계 민족들 간의 적극적인 상호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민족간의 만남들은 왜 투르크-몽골어 언어요소 안에 이란 언어적인 요소가 포함되어있으며, 더 나아가 한국어안에 우랄어, 특히 핀-위구르어의 요소들이 있는지를 설명해줄 수 있는지 보여준다.

대부분의 몽골학 연구자들은 몽골어는 궁극적으로 고대 투르크어, 더 정확히 말하자면 중앙아시아의 동쪽과 퉁구스-만주부족의 영향을 받은 극동지역의 우랄-알타이어를 근간으로 형성되고 분화되었다고 여긴다. 그와 동시에 고대한국어가 주요한 영향을 끼친다. 특히 한국어의 영향으로 투르크-몽골계 민족들의 정치문화에 대한 중요한 단어가 만들어진다. 사얀-알타이어어의 '사까(    )'와 '한(  )'과 어근에서 같이 하는 '까간(      또는 '한')'이란 단어가 이것이다. 이 단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어원 설명이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첫 번째 설명은 스키토-시베리아의 민족문화에서 찾을 수 있다. 즉, 당시 사람들이 숭배했던, 예를 들어 사코-스키타이와 투르크-몽골계 부족들에게 신화적인 조상 할머니인 '알란-호아(알란호)'같은 순록이나 사슴 토템에서 나왔다는 의견이다. 두 번째 설명은 다음과 같다. '까-간(뚜바어로 '하안')'은 '피'를 뜻한다. 이 피는 단순한 피가 아닌 '혈통'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왕족의 피란 뜻이다. '까간'은 한편으로는 사코-스키타이인들이 '항금뿔을 가진 순록의 산' 알타이와 관련이 있다.

'위서(魏書)' 41장에 따르면 중국 대륙에 뚜파(Tufa)족은 '남양'왕조를 세웠고, 또바(Toba)족은 북위(386-534년)를 세웠는데, 이들은 서로 가까운 친척부족이라고 써있다. 또한 위서에는 또바, 썅비(      ), 쥬잔(    ) 그리고 아바르(오브르이)족과 현대 헝가리인들의 조상이라고 생각되는 쥬잔족들과의 관계도 무척 친밀했다고 밝히고 있다.(따스낀, 47,48쪽) 러시아 문헌에는 쥬잔(중국어로는 쥬앙)의 일부가 서쪽으로 즉 유럽으로 아바르라는 이름으로 현재 헝가리의 빤노니 지방을 정복했다고 한다.

 이 아바르인들은 결국 헝가리민족을 형성했으며, 또한 알타이(우랄) 언어요소도 전파시켰다. 이러한 언어적 요소가 이런식으로 한국어에도 전해졌을 가능성이 있다.(빅토로바, 1980, 131쪽)

 
흥미로운 것은 야쿠트어에서 '또파(Topa)'는 '순록'을 뜻한다. 하지만 일반적인 투르크-몽골어에서는 또파란 '고개', '산정상'을 뜻한다. 이는 민족명인 '뚜바(띄바)'가 우랄어계통에서 '울창한 숲으로 덮힌 고원'이란 어원을 갖는 것과 관련이 있다. 민족명이 가지는 어원적 의미는 지명(地名)뿐만 아니라 인명(人名)과도 관련이 있다.

 예를 들어 칭기스칸의 조상중 하나이자 몇몇 전설에 따르면 아무르 유역에 살고 항상 물고기 껍데기로 만든 옷을 입었다던 도부메르겐은 개인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주변 민족명, 지명이 관련이 있다고 여긴다.

 
위에 잠깐 서술한 쥬잔족은 사얀의 지명 그리고 사까의 민족명과 관련이 있다. 어근들을 풀어보면 쥬잔족은 '순록의 민족'이란 뜻을 가지고 있고, 사얀은 '사까의 민족들'이란 뜻이 나온다. 그런데 사까 자체도 순록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쥬잔, 사얀, 사까는 같은 뜻의 말인 것이다.


서부 부리야트의 '뚠까(    )'라는 지명도 주목할 만하다. 이곳은 몽골비사에 나오는 '뚠까이뜨(      )'를 연상시키는 현대 뚜바의 성씨(姓氏)인 '돈각(      )'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N.P. 샤스찌나는 '뚠까이뜨'의 어원은 'tongho', 즉 '숲'이라는 뜻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B.I. 따따린쪠프는 뚠까이뜨와 돈각, 뚠까는 발음만이 비슷하게 들릴 뿐, 실제 뜻은 다르다고 주장하였다. 더 나아가 그는 돈각은 뚜바어의 동사 '둔'이 중심어이며 이 말은 투르크어의 '똔'인데 이것은 '얼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따따린쪠프의 의견으로 뚠까의 어원을 살피기는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이와 발음상 비슷한 단어들이 도처에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시베리아에 있는 한 민족인 '퉁구스(      )', 강이름인 '퉁구스카', 이루쿠츠크에 있는 큰'퉁구스'강 그리고 '썅비'와 같이 흉노의 붕괴이후 등장했으며 러시아 학자들이 고몽골인들로 생각하는 중국의 민족지적 개념인 '둥후(    )'와 뚜바의 돈각과의 관계는 설명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른바 '썅비'는 몽골인들의 직접적인 조상들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주채혁 교수에 의하면 '썅비'는 고대 한국의 민족이자 정치체인 '조선'의 원류라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썅비'의 어원을 제공한 성스러운 산 '썅비샨(        )'과 '달라이-노드(    -  )'호수는 흥미롭다. 신당서(新唐書)에 의하면 달라이-노르 호수는 당시 '쮸이룽(        )'이라고 불렀고, 현대에는 '훌룽(      )', '꿀룽(      )', '훌룽-부이르(      -    )'라고 부른다. 주채혁 교수에 따르면 '다쌴비샨(            )'은 이 호수에서 멀리 떨어져있지 않으며, 대흥안령 산맥 북서쪽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한다. V.S. 따스낀은 호수는 아르군(    )강과 연결되어있으며 현대 지도에는 표시되어있지 않지만 달라이-노르 호수를 끼고 흐른다고 한다.(따스낀, 363쪽, № 8)

시라또리를 위시하여 일련의 부리야트 학자들은 이 아르군 강을 전설적인 '에르구네-쿤(      -  )'으로 여긴다. 하지만 좀더 연구해본 결과 필자는 에르구네-쿤이 두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 번째가 뚜바남쪽에 있는 웁스-후르 호수와 떼스-헴강이다. 두 번째 에르구네-쿤은 아르군 상류와 대흥안령산맥이다. 이 두 곳이 몽골인들과 동(東)우량하이인들의 역사적 고향인 것이다.
한국-투르크-몽골의 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민족 단어중 하나인 '함(  )'은 학자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이 말은 사얀-알타이 민족들에게 '샤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L.K. 헤르쩩은 '함'의 어원에 대해 두 가지의 흥미로운 설명을 하고 있다. '함'은 고아시아 사얀-알타이어에서 '강(江)'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는 '헴(  )'에서 온 말이라고 주장한다. 한국어의 '강(江)'은 헴-함을 거쳐 강이라는 발음을 가졌을 것이다. 또 다른 그의 이설은 '함'은 '까간'처럼 '혈통'이란 뜻이 있다고 한다. 필자의 견해에 따르면 부르한과 텡그리라는 종교관을 가진 사얀-알타이 민족들의 샤머니즘의 요소들은 타이가지대 시베리아와 극동에 사는 유목민들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얀의 동쪽과 동북쪽에서 고대 투르크인들과 고대 몽골인들과 더불어 살던 퉁구스-만주 민족들과의 접촉과 상호관계는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동아시아에서 두드러진다. 그래서 성산(聖山)의 하나인 '우환(      , 중국어로 '치산')에 살던 '둔후(    )'족의 지역상황에 특별한 관심이 쏠린다. 따스낀에 따르면 우환산맥에서 '우환'족이 이름을 얻었을 것이라 하는데, 이 산맥은 중국인 판이에 따르면 랴오뚱에서 북서쪽으로 수천마일 떨어져 있다고 한다.(따스낀, 6-7쪽) 따스낀은 이 산맥이 아무르 상류 쪽일 것이라고 단정했는데, 필자가 보기에는 최근까지 에벤끼족이 살았던 부리야트 공화국의 끼진긴스끄 아이막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몽골어에서 '붉다'라는 뜻의 '울라간(      , 또는 '울란(    )', 중국어의 '치산'도 '붉은 산'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에서 어원을 찾으려는 시도는 무척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부리야트의 지명들은 투르크어나 에벤키어 또는 고아시아어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우환이라는 민족명칭에서 퉁구스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우환산에 대해 고대문헌에서는 '오관(ogwan)'이라고 표현을 했다. 이것은 아마도 트랜스바이칼지역에 살았을 퉁구스부족 '우왕(    , 또는 '구이(  )', 갸이(  )')'와 명칭이 유사하다.(바인슈쩨인, 1972, 119쪽) 당서(唐書)에 보면 '우왕'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써있다. "...그들에게는 양과 말이 없다.

대신 순록을 가축처럼 기른다. 이끼를 먹이고 수레를 끌게 한다."(비츄린, 1950, 1권, 350쪽) 여기서 수레란 순록이 끄는 썰매를 말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7세기에 쓰여진 이 기록의 신뢰성에 대해 바이슈쩨인은 순록업의 기원문제에 대해 언급하면서 "만약 순록업을 주로하는 삶의 양태를 안다면, 순록이 끄는 썰매에 대해 의심할 바 없다."라고 하였다.(바인슈쩨인, 1972, 120쪽) 여기서 하나 덧붙인다면 우환과 둔후가 고대 몽골인들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따스낀은 다른 문헌을 토대로 우환을 우왕으로 읽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따스낀, 7-9, 483쪽)

신빙성에 다소 문제는 있지만 좀 더 오래된 중국 문헌에는 북아시아의 동부지역에서 5세기말에도 순록업이 행해졌다는 기록이 나온다. 499년에 쓰여진 중국 문헌 '난시(      )'에는 '푸산(    )'에 있는 어떤 국가에서는 사람들이 순록에 썰매를 매서 다니며, 순록의 젖으로 꾸므이스를 만든다고 쓰여져 있다.(비츄린, 1950, 2권, 47쪽)

많은 사얀-알타이 민족들, 예를 들어 동뚜바의 또드진, 그들의 친척관계인 또팔라르 그리고 다르하뜨, 쏘이요트인들은 사모예드인들의 후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순록 썰매를 끌고 다니며, 순록업을 퉁구스인들보다 먼저 했을 것이다. 또한 우랄-알타이계열 민족들뿐만 아니라 이란어를 사용하는 민족들을 만났을 것이다. 문헌을 보면 순록업은 사얀지방에서 먼지 시작되었고, 여기서부터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간 것을 볼 수 있다.(바인슈쩨인, 1991, 292쪽) 바인슈쩨인은 고고학자 B.A. 슈람꼬의 툰드라지대 민족에겨서 볼 수 있는 순록썰매에 쓰는 용구와 유사한 것이 스키타이에도 서기전 4세기에 존재했을 것이라는 의견(슈람꼬, 1988, 233-237쪽)에 반박하였다.

바인슈쩨인은 사얀지역에서 순록을 기르기 시작한 최초의 시기를 기원전 1000년경으로 보고 있다. 그는 이러한 순록업의 시작은 스텝지역에서 밀려들어온 목축업을 하는 민족들이 타이가 지역에서 사냥을 하던 사모예드계 부족들에게 영향을 주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바인슈쩨인, 1991, 291쪽) 다시 말해 사얀지역의 순록업은 목축업자, 정확히 말하면, 말을 기르던 민족의 영향을 받아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V.K. 다르쟈와 O.K. 슈의라빠를 위시한 뚜바 연구자들은 바인슈쩨인과 다른 의견을 낸다. 그들은 순록업과 목축업은 우랄-알타이와 사얀의 산악-타이가에서 거의 동시에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 순록업과 목축업은 숲과 숲-스텝의 사냥꾼들과 어부들의, 채취경제에서 농업단계로 넘어가 태평양 연안지역까지 진출 할 수 있었던 사람들의 문화-경제생활의 총체에서 시작되었다고 여긴다. 동시에 그들은 기존의 목축업의 방법들을 잊어가면서 전문적이 순록업을 하게 되었고 그들의 활동범위는 숲 툰드라 지역과 유라시아 북부의 툰드라 평원까지 넓어졌다.
사얀지역의 순록업은 산악 타이가 지역에서 순록업이 더 이상 팽창할 수 없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 안에 사얀에서 동쪽으로 사는 민족, 특히 트랜스 바이칼지역의 에벤키에게 순록업을 전달하였다. 이러한 결과로 비교적 최근까지 퉁구스인들을 '말(馬) 퉁구스인'과 '순록 퉁구스인'으로 나누어 불렀다.
필자의 견해로는 유라시아의 유목문명 현상은 목축업의 과정에서 형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타이가 사냥꾼들의 농업, 목축업, 순록업 등 생업문화의 총체적인 결과로 인해, 또는 숲과 스텝 부족들의 민족문화적 협동관계의 결과로 형성되었다. 자연적으로 옛날에 어느 정도 목축업과 말 사육을 번갈아 했던 민족들은 조금씩이나마 농업도 하면서 유라시아 대 평원 전지역에 급격히 퍼져나갔다. 더불어 순록업자들, 예를 들어 사얀인들은 스키타이, 흉노 등 스텝제국들이 형성되기 전에 일찌감치 동쪽과 남동쪽으로 이동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그들의 순록업과 이동이 일찍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유적지는 물론이거니와 정착민들(중국인들)의 문헌에서도 이들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기 힘들다.

바인슈쩨인에 따르면 퉁구스의 순록업은 서기 무렵에 시작되었다. 그리고 서기 일천년 중반 무렵 그들의 순록업에 대한 내용이 중국문헌에 등장한다.(바인슈쩨인, 1972, 120쪽) 그러나 이것을 믿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첫째로 중국문헌 자체의 신뢰성이다. 생활상의 묘사, 민족의 특징에 대한 묘사는 다른 스텝지역의 유목민에 더 가깝게 기술했고, 산악타이가지대에 대한 많은 부분이 빠져있다. 둘째로 순록에 얹는 안장은 나무와 가죽으로 만들어졌으며 그것은 고고학적 유물로 남기에는 오래 보존되지 않는다. 셋째 순록은 안장없이 탈 수 있다. 특히 키가 작은 퉁구스인과 청소년들은 안장을 사용하지 않았다. 뚜바-또드진인들은 겨울에 순록에게 썰매를 매어 짐을 옮기게는 하였지만, 사람들은 스키를 탔다. 스키가 순록보다 더 빠르기 때문이었다.

사얀-알타인들과 고대 한국인들과의 민족문화 관계에 대한 보충자료들은 흉노와의 부족구성의 문제와 그들의 종교-신화적 분석, 고대 한국인들과의 신화계보의 비교를 하게 한다. 많은 연구자들은 중국에서는 흉노의 왕족을 '후양(    )'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주목한다. 하지만 문제는 '후양'으로 발음되고 씌여지게 된 납득할만한 근거를 중국문헌에서 찾을 수 없다. 흉노, 투르크, 몽골의 신화와 전설은 기본적인 세부사항은 서로 일치한다. 몽골의 왕족 칭기스칸 보르드쥐긴의 신화적 조상은 '끼얀(    )'이며, 이 가문의 증조부는 '끼야트(    )'인 것에서 앞의 '후양'의 어원에 대한 의문을 풀 수가 있다. 다른 한편 끼얀은 이란의 왕족 '케이아니드'와 관계가 있다. 또한 늑대의 자궁에서 또는 산의 동굴, 계곡(세 가지 다 신화적 사고에서는 같은 것이다.)에서 출생한 고대 위구르민족의 엘리트층과도 관계가 있다. 위구르의 '위(  )'는 '산에 있는 동굴'을 뜻한다.

흥미로운 것은 한국의 북부 지역에서 조상의 탄생신화의 장소는 동굴이나 산의 협곡과 관련이 있으며, 남부 지역은 궤짝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알려진 대로 동굴과 궤짝은 유라시아지역에서 세상을 태어나게 한 '우주의 알'을 뜻한다. 그러나 사얀-알타이와 중앙아시아에 사는 민족들처럼 한국인들에게도 우주알로부터의 세상의 창조라는 고대의 모티브는 인성을 가진 조상의 출현까지만 통용되었다. 주몽의 탄생설화를 보면, "알을 깨자 그가 거기서 나왔다. 갓 태어난 아이는 완성된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쟈르일가시노바, 1972, 86쪽) 한국신화에서 문화영웅 또는 조상들은 하늘에 존재한다. 하지만 그들의 탄생은 거의 땅에서 이루어진다. 예를 들면 단군은 태백산에서, 김수로는 구지봉에서, 김알지는 금산주변의 처녀림에서 태어났다.
지배자들의 이름은 흉노의 지배 부족과 사얀-알타이 부족들 간의 민족적 관계를 가리킨다. 고대 중국역사서에 따르면 흉노의 강력한 중앙정부체제는 서기전 209년 아버지 뚜만을 죽이고 권력을 찬탈한 모대(마오둥)와 관련이 있다. 모대의 군대는 서기전 201년까지 10년 가까이 중국문헌에 동쪽에 사는 오랑캐라는 뜻의 '동호'부족을 압박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모대란 이름은 뚜만(    )이라는 이름처럼 고대 사얀-알타이의 부족인 '마아드이(    )'부족과 관련이 있는 씨족명이다. 뚜만도 뚜마뜨(    )부족과 관련이 있다. 뚜마뜨 족은 사얀-알타이 지역과 중앙아시아의 '뚜바스(    )', '또바(    )', '떼파(    )', '찌파(    )', '뚜판(      )'족의 시족 공동체이다. 이 씨족명은 한국 북부에 있는 한자로는 '대지의 문'이란 뜻이 있는 '두만강'의 명칭과 관련이 있다.

한국과의 유사점은 더 제시할 수 있다. 뚜바의 뚜마뜨는 마찬가지로 '호르-뚜마뜨(  -    )'로도 불리었다. '호르'는 하나의 큰 민족집단을 이루는데, 이 '호르'를 어근으로 하여 고대 사얀-알타이(알타이, 뚜바, 하카시아)민족들을 '호오라이(      )', '혼고라이(        )', '우량하이(      )'로 불렀다. 필자의 견해로는 고대한국의 '고려(고구려)'도 '호르'를 어근으로 하여 만들어진 말이라고 생각한다.

고구려의 전설에는 강물의 신의 딸로부터 태어난 주몽이 시조라고 한다. "아주 오랜 옛날 주몽왕이 나라를 세웠다. 그는 북부여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강물의 신의 딸이다."라고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자를가시노바, 1972, 86쪽) 주몽에 대한 신화 속에 서술된 고구려 사람들과 북쪽의 부여 사람들과의 관계는 그들의 문화와 삶에 대해 서술한 부분에서 찾을 수 있다. '상고지'의 필자는 "동방의 오랑캐들의 전설에 따르면 그들(고구려인들)은 부여에 뿌리를 둔 한 분파이다. 그들의 언어는 서로 거의 같다."(끄류꼬프, 64쪽) 고구려 민족의 역사에 대해 연구를 한 R.SH. 자를가시노바는 이러한 상황은 북쪽의 퉁구스-만주족이 고구려 문화원류에 여러 요소를 가미하게 한 증거라고 주장했다. 주몽에 관한 신화는 고대 한국인들과 사얀-알타이 민족들과의 민족문화상의 유사성을 보여준다. 특히 헤로도투스에 의해 스키타이로 잘못 알려졌고, 흉노의 융기와 함께 동아시아에서 흑해연안까지 주름잡았던 '싹'족의 신화와 유사하다. 서기전 2000년말부터 1000년 초까지 치끼, 구르이, 뗄레족과 다른 이란어계통의 언어를 사용하는 부족들, 위그로-핀어를 사용하는 부족들, 고대 투르크 민족들은 서로 연합하여 강력한 부족 연합체를 형성하였다. 그들은 강력한 씨족 연합체를 형성했다. 이들은 끊이지 않는 이동과 전쟁 속에서 멀게는 중앙아시아의 동쪽과 남쪽까지 침투하였다. 중국문헌에 의하면 이들을 '치디(    )'라고 불렀는데, '붉은 오랑캐'라는 뜻이다. 아마도 이들이 인종적으로 백인에 가깝다보니 더 붉게 보여서 그렇게 부른 것으로 여긴다. '붉다'라는데서 알수 있듯 붉은 색은 스키타이인들, 다시말해 귀족들인 전사집단의 특별한 상징이다.

흑해 연안의 스키타이인들의 종교에 대해 헤로도투스는 그들이 강물의 신을 숭배하고 제물을 바친다고 하였다. 뚜바어로 '아릭-부가(    -    )', '깊은 곳의 지배자'란 이름을 가진 전설적인 왕 '아르폭싸이(        )'는 싸코-스키타이의 한 씨족장으로 여겨지는 것은 이 제의의 의미를 나타낸다. 이와 동시에 물에 대한 제의는 대지의 여신이며, 가정의 화로를 지켜주면, 산의 주인이자, 산의 동굴에서 왕권에 대한 상징물을 씨족장들에게 선사하는 '따비띠(      )'에게 바치는 제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산에 있는 동굴은 강과 마찬가지로 신성한 '대지의 문'의 역할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지의 문'인 두만강은 이러한 종교-신화적인 관념들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념은 부족명칭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데, '헴-칙(  -  )'은 '강에 사는 치키인들', '또바(    )'는 '땅의 주인', '또곤(    )'은 '대지'란 뜻이 있따. 아마도 뚜바나 티벳이란 명칭도 위와 같은 명칭들이 확대되어 만들어진 것이다. 여하간 주몽이라는 이름도 이러한 음운학적 토대에서 만들어진 이름일 것이다.
요점을 정리해보면 뚜바의 사키-치키들은 케렉수르문화와 황금뿔을 가진 성스러운 순록이 그려져 있는 '순록돌(사슴돌)'의 문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문화의 확대는 직접적으로 한반도에 미치지는 않았다. 그래서 가정해 보건데, 첫째, 이 문화의 영향은 간접적으로 사얀-알타이 사얀-알타이 부족들, 즉 처음에는 사키-치키인들을 통해, 그 다음에는 흉노제국에 의해 실행되었을 것이다. 둘째, 흉노가 원몽골인들과의 협력관계의 과정에서 둔후를 정복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한국의 신화는 사얀-알타이 민족들과 직접적인 관계에 대한 몇 가지 관념을 보여준다. 대표적인 것이 단군신화이다. 신화 속에서 곰은 고대 한국인들의 국가인 조선의 시조로써 여겨진다. 곰에 대한 신성함은 사얀-알타이민족들에게의 성산(聖山)제의와 볼 수 있다. 사얀-알타이와 중앙아시에서는 신성한 산을 '하의라칸(        )'이라고 부른다. 이는 '곰산'이란 뜻이다.
구조와 내용에서 단군 신화는 고대 한국인들과 사얀-알타이 민족간의 밀접한 관계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특히 그것은 최고 권력과 또한 거기에 걸맞는 상징이 천상의 최고신으로부터 집권부족의 대표자에게 직접 전달되는 정치문화의 계승과 관련된 전통에서 주로 볼 수 있다. '뗀리 굿(        )' - '하늘의 신', '하늘의 아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이 말은 흉노의 지배자에 대한 형용구와 직함이다. 흉노라는 명칭에도 고대 위구르어로 '하늘의 태양'이라는 뜻의 '꾼 뗀리(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단군'이란 이름도 단순한 이름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추측하기에는 '하늘의 신-태양'이라고 여겨진다.
이런식으로 흉노가 고대 한국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을 증명되었다. 또한 반대로 고대 한국에서 흉노로의 영향은 이른바 '호르'라 불리는 사얀-알타이민족의 하위 민족에 의해 이루어졌다. '호르'란 말은 고대 고려(고구려)라는 말로 변해갔다. '호르'의 다른 명칭인 '훈고라이(        )'는 '훈가르(      , 헝가리)' 등이 되었다.

흉노는 십중팔구 스텝과 숲-스텝을 휘젖고 다녔을 것이다. 흉노의 구성원에는 우랄-알타이계의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둔후족(썅비족)은 주채혁교수의 의견대로 이끼의 길을 따라 산악-타이가지대를 타고 동쪽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퉁구스-만주인들에 동화해가면서 흉노보다 먼저 아무르강 연안지역, 소흥안령산맥, 대흥안령산맥, 만주, 한반도에 도달했다.
주채혁교수의 사얀-알타이인들과 고대 한국인들간의 혈통적 연관성에 대한 결론은 러시아의 유전학자 자하로프와 뚜바 국립대 도르쥬교수가 한국인과 뚜바의 소얀, 끄르그이스 성씨 사람들의 머리털 100개를 가지고 실험을 해서 입증하고자 하였다. 자하로프 박사는 이러한 미토콘드리아 DNA검사는 그 DNA자체가 모계라인을 따라 전달되기 때문에 아직 결론을 내리기에는 이르다고 하였다. 아직까지 분자검사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확실한 결과를 위한 남성의 유전자라 할 수 있는 Y-염색체 검사도 불가피하다. 지금까지의 결과로는 자하로프 교수의 말에 의하면 한국인은 유전적으로 북부 중국인과 비슷하다고 한다. 하지만 북부 중국인들은 흉노, 투르크, 고 몽골인 등이 서로 동화되어 만들어진 민족이다.
아직까지 DNA의 핵타입에 대해서 컴퓨터를 이용한 분석이 완료되지는 않았지만 사얀-알타이에서 남자들이 이주해왔다는 설도 입증될 것으로 보인다. 뚜바 신문 '에피르(    )'에 이것과 관련해서 논문을 투고하면서 따찌아나 우이눅-오올이 독일에서 한 실험에 대해서도 서술을 하였다. 이것은 야쿠트인들의 유전자를 조사한 내용인데, 야쿠트인, 부리야트인, 몽골인과 일본인의 유전자가 비슷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 내용은 필자가 주장하는 바와도 일치한다. 먼저 야쿠트인과 부리야트인들은 사얀-알타이지역에 기원을 두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알타이인, 뚜바인, 하카시아인들은 일본인들의 조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일본인들의 조상은 한반도를 통해 일본 열도에 들어갔다고 본다.

한편 뚜바인들의 유전자를 조사해보면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조상도 사얀-알타이에서 기원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그들은 고아시아 민족들이 순록업을 본격적으로 하기 전에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주채혁교수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말을 키우는데 능했을 뿐만 아니라 순록업도 잘 행했다고 한다. 필자는 이 이론에 동의하면서 덧붙인다면, 사얀-알타이에 살던 사모예드인과 위구르-핀 민족들은 순록업을 먼저 고대 투르크인들에게 전했을 것이며, 그 다음에는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사는 퉁구스-만주인들과 원몽골인들에게 전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다시 한번 강조할 것은 민족과 국가를 형성하는 씨족의 그룹은 유라시아의 다른 민족들처럼 목축을 하는 전사, 전사귀족, 사제였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이 민족형성그룹들은 고대 중국, 특히 '중원(中原)'에 사는 사람들과는 아무 직접적인 관계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정치권력은 비록 후대에 들어 중국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궁극적으로 중국인들의 이주에 의해 형성되거나 하지는 않았다. 한국 고대 문화형성에 있어서 중국 본토에서 도망 온 기자(      )같은 사람들은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중국측 사료에서도 이들은 그저 '오랑캐국'의 '오랑캐'들 틈에서 잠시 쉴 곳이 필요했을 뿐이다. 되레 반대로 남만주지역에 거주했던 한국인들이 흉노에 의해 중국 본토로 들어가 흉노, 썅비, 고대 투르크, 고대 몽골인들처럼 중국인들의 인종적, 민족적 원류를 갖추는데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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