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 칸민족의 아버지, 단석괴
선비족은 삼한 조선의 비왕족으로서 종족명의 원음은 사비(sabi)인데 그 뜻은 신서(神瑞), 길상(吉祥)을 뜻한다고 하고, 선비는 그 음을 한자로 적은 것이라고 한다. 그들의 말은 몽골어, 거란어, 부여어의 요소가 많고 본질적으로 우리 삼한 조선의 일파이다. |
선비 칸민족의 아버지, 단석괴
선비족은 삼한 조선의 비왕족으로서 종족명의 원음은 사비(sabi)인데 그 뜻은 신서(神瑞), 길상(吉祥)을 뜻한다고 하고, 선비는 그 음을 한자로 적은 것이라고 한다. 그들의 말은 몽골어, 거란어, 부여어의 요소가 많고 본질적으로 우리 삼한 조선의 일파이다. |
선비(鮮卑) 유래는 허리띠 바클에서 왔네
초기철기시대부터 삼국시대 초기에 걸쳐서
널리 사용된 가죽이나 천 소재의 된 띠를 매기 위해 양끝에서 서로 끼워 맞추는 고리.
‘대구(帶鉤)’라고도 한다. 허리띠 부속용구이다. 본래 중국에는 대(帶)라는 허리띠가 있었으나 전국시대에 북방민족과의 교섭이 심화됨에 따라 호복(胡服)과 함께 중국에 전래되었다.분포는 오르도스(Ordos)지방의 청동기시대 문화에 많이 나타나고, 시베리아·동러시아·남러시아에까지 확대되어 있다.
띠고리에 동물 의장(意匠)이 빈번하게 사용된 점은 북방 유목민족이 즐겨 사용하던 동기와 연결된다. 원래는 교구(鉸具)와 함께 마구(馬具)의 일종이었다.
전국시대에 산시(山西)·허베이(河北)의 북경(北境)지역에 자리잡고 있었던 조(趙)의 무령왕(武靈王)이 호복을 장려한 기사가 ≪사기 史記≫ 권43 조세가(趙世家)에 보인다. 이와 관련된 기사로 ≪전국책 戰國策≫ 조책무령왕조(趙策武靈王條)에 “주소(周紹)라는 신하에게 호복·
의관·구대(具帶)와 함께 황금사비(黃金師比)를 하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사비(師比)’라는 말은 ≪사기≫ 흉노전(匈奴傳)의 서비(胥紕), ≪전한서 前漢書≫ 흉노전의 서비(犀毗)·선비(鮮卑)와 같은 뜻으로서 북방호족의 띠고리를 가리키는 말이며, 위의 기록으로 보아 호복과 같이 착용된 혁대금구였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띠고리의 구조는 모두 같아 한 쪽 뒷면에 큰 단추모양의 돌기(突起)된 부분이 있어 혁대의 한 끝에 끼워 고정하고, 다른 한 끝을 휘게 만들어 혁대의 구멍에 걸도록 되어 있다.
착용방법은 허난(河南) 진춘(金村)에서 출토된 청동제 인물상(人物像)에서 볼 수 있다. 제작재료는 동제품이 가장 많고 철제가 그 다음이며, 드물게 금 또는 은제품도 있다. 금속제품 이외에 옥제(玉製)·패제(貝製)·파리제(玻璃製)도 있다. 표면장식을 금·은·옥·청석(靑石) 등으로 상감(象嵌)한 것이 있고 금으로 도금한 것도 보이는데, 실용품 이상의 호화스러운 유물도 있다.
크기는 다양해 크게는 30㎝에서 작게는 2, 3㎝에 이르는 것도 있다. 형태도 거문고형[琴形]·막대형[棒形]·용트림형[絡龍形]·수저형[匙形]·새형[鳥形]·비파형(琵琶形)·호랑이형[虎形]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중국 초기의 띠고리 유물로는 춘추시대의 중기∼말기로 추정되는 뤄양(洛陽) 중저우로(中州路)의 동주(東周)묘 출토품이 있다. 간단한 돌출무늬가 있다. 그 후 띠고리는 전국시대의 중기∼후기에 크게 성행해 형태나 크기가 다양해지고 한대(漢代)에도 계속 사용되었으나 화려한 것이 줄어들었다. 후한(後漢) 이후로 내려오면서 제작이 그치고 대신 교구가 널리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대량으로 발견된 곳은 허난성(河南省) 정저우(鄭州) 얼리강(二里岡)의 전국묘지 212호로, 여기에서는 62개의 청동제와 52개의 철제 띠고리가 발견되었다.
한반도에서 출토되는 띠고리는 한나라에서 수입된 순수한 중국식과 한반도에서 번안, 한국화한 한국식 띠고리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중국식은 평양 왕광묘(王光墓 : 정백리 127호), 채협총(彩篋塚 : 남정리 16호), 석암리(石巖里) 194호분, 대동강면 제9호분, 전(傳)대동강변 출토품 등 낙랑 유적에서 주로 발견되고 있다.
평안남도 대동군 용악면 상리(上里)의 널무덤[土壙墓], 평안북도 위원군 숭정면 용연동 등 한반도의 초기철기시대 유적에서도 나온다.
분포는 평양을 중심으로 평안북도·평안남도에 집중되어 있다. 형식은 동물의장이 보이는 용연동 출토품을 제외하고는 모두 거문고형이거나 막대형이다. 재료로는 낙랑 채협총 출토품 1점이 은제품인 것 외에는 모두 동제품이다. 크기는 12.2∼17.9㎝ 정도의 크기이다.
한반도에서 중국식 띠고리가 발견되는 유적의 연대는 위원 용연동 유적을 상한(上限)으로 잡을 수 있다. 출토유물로 보아 요령성(遼寧省) 무순(撫順)의 연화보(蓮花堡) 유적과 성격이 같다.
용연동 유적의 연대는 연화보 유적의 연대를 고려해 서한(西漢)초인 서기전 2세기로 비정할 수 있다. 하한은 낙랑유적이나 태성리유적을 근거로 하여 서기전후까지 내려올 수 있다.
한국식 띠고리는 영천 어은동 출토의 호형·마형을 비롯해 구미의 초기 삼국시대 고분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는 마형도 있다. 그 밖에 출토지를 알 수 없는 호형·마형들이 많이 있다.
어은동 출토의 띠고리는 이제까지 중국식에서 보이지 않던 고리[鐶]가 완전하게 남아 있어 그 착장방법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중국식에 원래부터 이런 고리가 없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은동 출토품 중에는 순수한 한나라식 유물과 한반도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한대의 본뜬거울[倣製鏡], 북방유목민족의 영향으로 보이는 동물의장과 장식품 등이 풍부하게 발견되었다. 어은동의 띠고리는 형태나 무늬 수법으로 보아 한반도에서 보이는 다른 호형·마형 띠고리의 조형(祖形)으로 볼 수 있을 만큼 우수한 조각품이다. 기하학적인 무늬나 동물의장은 스키타이 청동기문화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일찍부터 한반도에 들어왔던 중국식 띠고리의 형식에 스키타이 양식의 동물의장을 응용해 새로운 형식의 한국식 띠고리가 완성되었고, 그 양식이 시대가 내려오는 초기 삼국시대 고분에까지 계속되어 나타나는 것 같다.
따라서 한국식 띠고리는 어은동 유적의 연대인 서기전후경에 시작되어 초기삼국시대 고분에까지 사용된 듯하다. 일본의 경우는 고분시대의 고분에서 마형띠고리가 나온 예가 있다.
시라토리 쿠라키치(白鳥庫吉) 교수는 사비(Sabi)라는 만주어가 "상서(祥瑞)롭다"는 의미이므로 기린과 같은 성스러운 동물일 가능성이 크다고 했습니다만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교수는『유라시아 고대북방문화』에서 가죽 허리띠에 붙어있는 동물모양의 버클의 음역에 불과하다고 고증하였습니다.
중국 인터넷에서 선비족에 대한 내용입니다.
鮮卑”作為一個部落集團的名稱,約始見於東漢。
선비는 일개 부락집단의 명칭이고 동한으로 시작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