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프리기아(B.C. 12세기 - B.C. 7세기 초)
②: 고창국 서북 동굴(6장 6절 돌궐 지조)
③: 감숙성 흑산 암각화(춘추에서 서한 초기)
④: 난하(灤河) 하류의 리지(離枝), 영지(令支) (齊 桓公: B.C. 685 - B.C. 643)
⑤: 요동(난하 지역으로 들어온 초기에 이동한 것으로 추정)
⑥: 난하에서 제 환공의 공격을 받아 시라므렌 강 유역으로 이동
⑤→⑦: 난하에서 요동으로 들어 왔던 사람들이 북으로 이동
⑥-1 →⑦: ⑥의 후예로 믿어지는 고리국(高離國)에서 남하하여 부여를 세움
⑧: 고구려, ⑨: 백제, ⑩: 가야, ⑪: 신라
(a): 돌궐 원주지

 

국회세미나 발표(2005.9.9) <한국 고대문화의 새로운 인식과 21세기 한국>

최근 중국의 역사관련 국가 공정들과 한국의 과제

우실하 ( 한국항공대학교 조교수) (홈페이지: www.gaonnuri.co.kr 이메일: woosilha@yahoo.co.kr)

 

1970년 카자흐스탄, 알마티 주에서 50km 정도 떨어진 곳에서 발굴된 사카족의 고분 (이식 쿠르간)에서 “황금인간”이 발견되었는데 그는 뾰족한 고깔모자를 쓰고 있었다. 출토된 고깔모자에는 말, 호랑이, 산양, 머리 큰 양, 사슴 등 어려 종류의 동물들이 묘사되어 있었다. 그리고 모자의 정면에는 뿔이 긴 두 마리의 산양과 나뭇잎 모양의 두 잎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이 유물들은 사카 티그라하우다인의 세계관과 특징을 잘 표현했는데 왜냐하면 발견된 고분에서 발굴된 복장, 각종 도구, 물건들에서 각종 토템의 상징물들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고분 앞에 순록의 조각상을 세우는 풍습이 있었다. 이런 종류의 순록석상은 신장 청하현 고산지대에서도 발견된 적이 있었다.           

 

       Figure. This stylised image of a deer (cervus elaphus, 고라니 Red Deer)

카자흐스탄 남부 카라타우 아파우전

 

카자흐스탄 동부 사슴 암각화

카자흐스탄 카톤카라가이 베렐지역 사카족 고분에서 출토된 (1998 ~ 2000) 금, 목재, 장식품 중 긴 뿔 사슴, 백색 야생양, 노루, 고양이 등 동물과 사슴의 정밀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슬륵트 사카족 고분에서는 노루, 독수리, 멧돼지, 야생양, 곰 등의 문양이 새겨진 장식품들이 출토되었다.

그 중에서도 긴 뿔 사슴의 모양을 가장 세밀하게 묘사해 놓았다. 이것은 이들의 토템사상이 잘 묘사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신앙체계에서 보면 “삼룩” 하늘은 드넓고 끝이 없으며 강력하기에 영혼을 주관하는 상징으로서 숭배를 했다

-퉁구스 민족과 조선민족의 설화에서의 사슴의 상징적의미

 김관웅 (연변대학교 교수)

1.  들어가는 말

2.  상징적의미 하나 – 우주의 동물로서의 사슴

3.  상징적의미 둘 – 인간의 어머니로서의 사슴

4.  상징적의미 셋 – 죽음과 재생

 

1. 들어가는 말

 

태고시절부터 만-퉁구스 제 민족의 조상들은 장백산과 흑룡강 사이의 드넓은 동북평원과 동몽골초원, 그리고 대흥안령, 소흥안령 같은 산속에서 살아왔다. 특히 대흥안령의 원시삼림속의 추운 고장에서 살아온 어원커, 어른춘, 시버, 허저족의 조상들은 사슴과 깊은 인연을 맺어왔다. 어른춘이라는 이 족명은 “순록을 부리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바로이런 까닭에 중국의 고대 사서들에서는 흥안령 일대에 사는 이런 사람들을 “사록부(使鹿部)”, 즉 “사슴을 부리는 부락”이라고 기록했다. 바로 이런 까닭에 어원커족,어른춘족, 허저족, 시버족, 녀진족, 만족 등 만-퉁구스 제 민족의 설화들에는 사슴이 많이 등장하며 따라서 이런 사슴들을 신통력을 갖고 있는 신령한 동물로 등장한다.

 

이와 아주 류사하게 조선민족의 설화에도 사슴이 자주 등장하며 또한 이런 설화중의 사슴들은 대단한 신통력을 가진 동물로 되여 있다. 이 점은 비교설화학에서만 아니라 만-퉁구스 제 민족과 조선민족의 고대 문화의 저층을 알아내고 그 원류 및 량자의 련관성을 파악하는데도 상당히 유익한 계시를 준다.

 

이 글에서는 만-퉁구스 제 민족과 조선민족의 설화에서의 사슴의 형상이 갖고 있는 상징적의미만을 탐구해보려고 한다.

 

2. 상징적의미 하나 – 우주의 동물로서의 사슴

 

이 세상의 거의 모든 종교는 모두 가장 중요한 숭배대상을 하늘에 있다고 상정하고 있다. 기독교의 하느님도 이슬람교의 알라신도 불교에서의 석가모니불도 그리고 만주족의 조상을 낳았다는 천녀도, 조선민족의 조상을 낳았다는 천제(天帝) 환인의 아들 환웅도 모두 하늘에 내려온다.

 

 왜 인류는 이토록 하늘을 숭배하면서 자기들이 가장 숭배하는 대상이 하늘에 있다고 생각했을까?

 

고대 동양인들은 우주공간의 방위를 “륙합(六合)”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이른바 “륙합”이란 동(东), 서(西), 남(南), 북(北)과 상(上), 하(下) 이 여섯개 방위로 이루어진 공간, 즉 우주를 뜻하는 게념이였다. 그런데 동, 서, 남, 북은 사람들이 모두 갈수 있고 또그래서 알수 있는 공간이며, 또한 하(下) 역시 인간이 발을 딛고 있는 땅이니 매일마다 접촉하는 공간이다. 유독 상(上) , 즉 상천(上天)만은 날개가 없는 인간으로서는 바라볼는 있어도 닿을수 없는 공간이다. 바로 이런 까닭에 하늘은 가장 신비롭고 따라서 가장 상상력을 동원하여 거짓말을 꾸며낼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상상력을 동원하여 종교를 만들어냈고, 예호와요 알라요 환인이요 하는 등등의 수많은 각이한 천신(天神), 즉 하늘신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땅에서 사는 사람들은 이런 각이한 하늘신들을 만들어 내여 숭앙하는 이상  또한 이런 하늘에서 산다는 하늘신들과 소통을 해야만 했다. 그런데 날개도 없고 비행기도 없는 옛날에 사람들은 땅과 하늘사이를 련결해주고 소통시켜주는 그 어떤 대상을 상정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인간들에 의해 선택된 산, 나무, 동물 등 다양한 자연대상들이 있었는데, 그중에는 사슴이란 이 동물도 들어있었다. 특히 만-퉁구스 제 민족과 조선민족의 설화에서 시슴은 바로 땅에서 사는 인간과 하늘에 있다는 천신 사이를 련셜시켜주고 소통시켜주는 가장 중요한 매개자로 등장한다.

 

그 첫번째 사례를 어른춘족의 신화를 통해 보기로 한다.

 

신령스러운 사슴 한마리가 아아한 흥안령 산정우에 누워있는데 그 사슴의 머리에 돋은 뿔은 어찌가 굵고 긴지 구중천에까지 뻗어올라갔다. 그리하여 어른춘사람들은 그 사슴의 뿔을 타고 하늘에 올라가 하늘신 은두리(恩都力)를 배알하면서 자기들이 행복을 삶을 살수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고 한다.

 

두번째 어원커족의 “하늘과 소통한 신령스러운 사슴(神鹿通天)”이라는신화를  보기로 한다.

 

사슴은 원래 천상의 동물이였다. 사슴에게는 다리 여섯개가 달렸기에 하늘에서 날아다녔다. 후에 천신으로부터 노여움을 사서 지상에 쫓겨내려와 사람들과 같이 살게 되였으나 사슴은 원래 천상의 동물인지라 하늘에 날아오를수 있었다고 한다.

 

세번째 사례를 시버족의 “시리엄마의 전설(喜利妈妈的传说)”에서 보기로 한다.

 

사슴은 원래 천상계의 동물이였다. 후에 천신의 은덕으로 땅우에도 사슴이 살게 되였다. 어느해 왕가물이 들어 시리엄마가 수많은 잡귀신에게 빌어보았으나 모두 효험이 없자 태양을 쏴서 떨궈버리려고 하였다. 이때 커다란 말사슴을 탄 백발이 성성한 로인이 태양을 쏘지 못하게 말리면서 하느님의 뜻을 전달하였다. 로인은 하느님의 뜻을 전달하고는 그 말사슴을 타고 하늘로 날아올라가 버렸다. 후에 시리엄마는 백학과 까치의 도움을 받아 하늘에 올라가 하느님을 만난다. 그런데 알고보니 하느님의 가장 사랑하는 좌기(坐骑)는 바로  말사슴이였다. 하느님은 시리엄마의 정성에 감동되여 왕가물을 퇴치하는 방도를 알려주며 그녀는 지상에 내려와 하느님이  알려준 방도로 왕가물을 퇴치한다.

 

네번째 사례는 만족의 “매화록(梅花鹿)”을 통해 보기로 한다.

 

얼룩 반점이 박인 매화록은 천상계에서 땅에 내려온 동물이다. 만족이 녀진이라고 불렸을 때 아갑이라는 사냥군이 늑대의 주둥이에서 그 매화록을 구해주었다. 상처가 아물자 그 매화록은 아갑의 운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천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아갑과 결혼하였다고 한다.

 

아래에서는 조선민족과 관련이 있는 고구려의 주몽전설을 통해 사슴이 하늘과 소통하는 신통력이 있는 동물이라고 생각했던 고구려인들의 관념을 보기로 한다.

 

주몽은 비류국을 정복하기 전에 흰 사슴 한 마리를 나무에 거꾸로 매달아 놓았다. 그 흰 사슴이 구슬프게 울어대는 소리가 하늘에 전해졌고, 또 그래서 하느님은 련속 보름이상이나 장마비를 퍼부어 비류국을 온통 물속에 잠기에 함으로써 고구려가 손쉽게 비류국을 멸망시키게 된다.

 

이를테면 한국 경북 고령에서 발굴된 고분에서 나온 사슴뿔은 당시에 록각숭배가 행하여 졌음을 시사해주며, 따라서 사슴의 뿔을 본 뜬 후세의 신라 황금 왕관을 통해서도 이러한 록각숭배의 전통이 맥맥이 이어져 내려왔음을 확인할수 있다.

 

고려시기의 리제현의 《력옹패설》의 기록에는 고려 때의 문신 서희(徐熙, 943년- ?)의 조부 서신일(徐申日)의 이야기가 수록되여 있다.

 

서신일은 일찍 사냥군에게 쫓기는 사슴 한 마리를 구해준 적이 있었다. 그날 밤 천상의 신이 그의 꿈에 나타나 “자네가 구해준 그 사슴은 나의 아들이네. 나는 당신의 자손들이 세세대대로 재상의 자리에 오르도록 도와주겠네.” 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그리하여 서신일의 아들을 이어서 손자인 서희가 재상이 되였고 서희의 아들들인 서눌(徐讷), 서유걸(徐惟杰) 역시 재상 자리에 올랐고 서눌의 딸은 현종의 비가 되여 외척가문의 하나로 떵떵거리면서 살았다. 이것이 다 천신의 아들이 사슴을 구해준 덕분이라는것이다.

 

함경북도 두만강 하류의 경원, 경흥 등 지방에서 전승되여 온 “전백록(全百禄)”역시 우의 서희 관련 전설과 비슷한 시슴의 보은담이다.

 

함경도 경원군에 채씨라는 녀인이 전씨가문에 시집을 갔다. 하루는 채씨가 집안에서 베틀에 앉자 베를 짜고 있는데, 흰 사슴 한마리가 마당안으로들어서고 멀리서 사냥군이 뒤쫓아오고 있었다. 채씨는 그 상처를 입은 사슴을 숨겨주고 상처에 약을 발라주어 목숨을 구해주었다. 이 일이 있은 후 하루는 그 흰 사슴이 꿈에 나타나서 “전번에 저의 목숨을 살려준 은혜 너무나 감사합니다. 그 하해같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저는 당신이 옥동자를 낳을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후에 채씨는 과연 태기가 있었고 달이 차서 정말로 금덩이 같은 옥동자를 낳았다. 부부는 이것이 모두 흰 사슴의 덕분이라고 여기고  아기의 이름을 전백록(全白鹿)이라고 지었으며 장성해서는 동음이어로 바꾸어 전백록(全百禄)이라고 고쳤다. 전백록은 후에 “리괄의 란”을 평정하는데 대공을 세웠고 무관으로 큰 벼슬을 지내게 되였다.[1] 

 

조선민족의 유명한 민담 “나무꾼과 선녀”에 나오는 사슴 역시 천상계의 소식을 손금 보듯이 다 알고 있는 신통력을 갖고 있다. 이를테면 하늘에서 선녀들이 어디에, 어때에 내린다는것이라든가, 하늘에서 신선들이 물을 길어 느라고 지상의 내려보내는 두레박이 언제, 어디에 내려오는가 등등 하늘의 상황을 속속들이 꿰뚫어 보고 있다.

 

총적으로 사슴은 단군신화에 나오는 신단수(神檀树) 같은 우주의 나무나 아사달 같은 산처럼 하늘로 오르는 사닥다리 같은 기능을 갖고있으며 하늘의 소식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는바 만-퉁구스 제 민족과 조선민족의 관념속에서 사슴은 우주의 동물이였다.

 

3.상징적의미 둘 – 인간의 어머니로서의 사슴

 

사슴은 만-퉁구스 제 민족이 숭배했던 토템중의 하나였다. 그것은 사슴은 그들이 수렵생활에서 가장 많이 포획하고 길들이고 또한 식용, 약용으로 삼는 동물이였고 따라서 사슴은 마치도 마를줄 모르는 어머니의 젖줄기마냥 이런 수렵족들을 루루 수천년 먹이고 키워왔기 때문이라고 사료된다.

 

첫번째 사례를 만족의 “흰 사슴 엄마(白鹿额娘)”를 통해 보기로 한다.

 

한 사냥군이 늘그막에 아들을 얻었지만 마누라가 급병으로 죽자 아기는 젖을 먹을수 없었다. 그 사냥군은 백발이 성성한 한 로파의 말대로 산에 가서 늑대에게 물려 각일각 죽게 된 흰 사슴을 구해가지고 집으로 안고 온다. 이때로부터 그 흰 사슴은 자기의 젖으로 아기를 키웠을 뿐만 아니라 그 애가 어른이 되자 창업을 하고 가정을 이루어 살아가게 도와준다. 그런데 며느리로 들어온 새 색시는 흰 사슴 엄마를 박대하기 시작한다. 이에 분개한 젊은 사냥군은 흰 사슴 엄마와 함께 산속에 들어가 흰 사슴 엄마가 늙어 죽을 때까지 효성을 다하여 봉양한다. 옛날 녀진족과 만족은 사슴이 자기네 족속을 먹어살린다고 생각하면서 특히 흰 사슴을 “엄마(额娘)”라고 불렀다.

 

둘째 사례는 고구려의 “록족부인(鹿足夫人)”을 통해 보기로 한다.

 

산속에 은거해 사는 한 선비의 집에 사냥군에게 쫓긴 암사슴이 들어왔는데, 이 암사슴은 그 선비의 오줌을 핥아먹고 태기가 있더니 딸을 낳는다. 그 딸은 천하 미인으로 자라났으며 후에는 왕비가 되였다. 발자국마다 꽃을 피워 1000송이의 련꽃을 만들었다. 이것을 모든 짐승의 간(肝)과 함께 상자에 넣어 물에 띄웠고 그 상자는 물길을 따라 중국에 닿았다. 중국인들이 두껑을 여니 간과 련꽃은 1000명의 아이들로 화해 있었다. 이들이 장성하여 군사가 되여 고구려를 침입했다. 그러자 그들의 어머니 격인 사슴의 딸 록족부인이 동쪽의 500명 군사에게 동쪽의 젖을 먹이고 서쪽의 500명 군사에게는 서쪽의 젖을 먹여 모자(母子)임을 확인시켰다. 그래서 500명은 중국으로 되돌아 가고 500명은 고구려에 남으니 형제 국가로서 싸움이 없었다.

 

이 이야기는 사슴을 자기의 어머니로 생각했던 고구려인들의 토템관념이 두드러지게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 평안도 지역에는 전설 “열두삼천리벌”이 오래동안 널리 전승되여 왔다.

 

고구려 시대의 한 왕비의 두 발은 사슴의 발족을 닮았기에 다들 그 왕비를 록족부인(鹿足夫人)이라고 불렀다. 어느 해 이 왕비는 사슴발족 같은 두 발을 가진 사내애를 12명이나 낳았다. 록족부인은 자기의 젖으로 이 열두명의 아들들을 키웠다. 그런데 이 열두명의 아들들은 소시적에 엄마의 말을 귀전으로 흘리고는 신발을 벗고 다녔다. 록족부인은 부득이 이 열두명의 아들들을 돌로 만든 함에 넣어 강물에 뛰워 보냈다. 중국에 닿은 이들은 장성하여 저마다 3천명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고구려 안주를 침공하여 왔다. 이들과 대치하고 있던 12명의 아들들을 보고 록족부인은 “너희들의 발은 필시 사슴의 발족을 닮았을것이다”라고 소리쳤다. 12명의 아들들이 아닌 척 하자 록족부인은 자기의 젖통을 꾹 눌렀다. 젖꼭지에서는 열두 젖줄기가 분수처럼 솟아오르더니 면바로 열두 아들들의 입안으로 날아들어갔다. 이리하여 록족부인은 열두 장군과 모자관계를 확정지었다. 그때로부터 록족부인의 아들들인 열두 장군들이 진을 치고 있었던 고장을 “열두 삼천리 벌”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와 류사한 이야기들은 허저족, 어원커족의 설화들에서도 자주 볼수 있다.

 

총적으로 만-퉁구스  제민족과 조선민족의 설화들에서 암사슴은 흔히 인간의 어머니로 등장한다. 이는 이들이 원시시대에 사슴을 토템으로 하였음을 시사해 준다.

 

4.상징적의미 셋 – 죽음과 재생

 

고대 만 – 퉁구스 제 민족과 조선민족의 조상들 속에서는 록각(鹿角)숭배가 행해졌다.

 

록각숭배는 곧 사슴숭배로 이어져 내려왔다. 죽은 이의 부장품으로서의 사슴뿔은 수사슴이 누리는 남권의 상징이자 가부장 및 공동체 우두머리의 상징이기도 했다. 만-퉁구스 제민족의 신라 샤만들이 머리우에 사슴뿔 모자를 쓰고, 신라 초기의 황금 왕관이 사슴뿔을 본뜬것은 바로 이런 록각숭배의 반영이라고 볼수 있다.

 

죽은 이의 부장품이라는것을 감안하면 사슴뿔과 사슴은 또한 영생 또는 재생을 상징한다고도 볼수 있다. 사슴이 후세에 와서 십장생의 하나로 된 근원이 무엇인가에 대해 시사하는바가 크다. 그리고 만 – 퉁구스 제 민족과 조선민족이 사슴뿔인 록용을 인삼과 함께 명약재중의 명약재로 귀중하게 여겨온 근원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시사하는바가 역시 크다. 물론 록용은 확실히 약효가 있지만 록용에 대한 미신이 그처럼 대단했던것은 만 – 퉁구스 제 민족과 조선민족의 뿌리 깊은 류감사유(类感思维)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그런데 옛날에 만 – 퉁구스 제 민족과 조선민족이 사슴을 영생이나 재생의 상징으로 간주한 원인은 대관절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사슴을 대지의 동물로, 우주의 동물로 믿었기 때문이다. 사슴뿔은 나무가지 모양을 하고 있고, 봄철에 돋아나 자라면서 딱딱한 각질로 되였가 그 이듬해 초봄이 되면 떨어진다. 그리고 다시 뿔이 돋는다. 이러한 순환기능과 나무를 머리에 돋게 하여 키울수 있는 능력을 지닌 동물은 사슴뿐이다. 따라서  사슴은 대지의 동물, 우주의 동물로 여겨졌다고 할수있다.

 

춘하추동 계절의 순화과 궤를 같이하여 해마다 떨어짐(죽음)과 거듭남(재생)을 되풀이하는 이 사슴뿔은 만 – 퉁구스 제 민족과 조선민족에게 있어서 영생력, 즉 죽음에 의해 중단되면서도 거듭 재생을 누리는 영생력 자체로 간주될수 있었던것이다.

 

이런 면에서 사슴은 겨울에 죽은듯이 동면했다가 봄이면 다시 살아나는 곰과 더불어 가장 전형적인“죽음과 재생(death and rebirth)”의 신화적원형으로 되였던이다.

 

신라의 왕관이 사슴의 뿔을 본뜬것은 바로

 

                            2008년 4월 25일 연길에서

스키타이 민족과 한민족의 관계(펌)

그리스인들이 스키타이 페르시아인들은 사카라고 불렀는데, 넓은 의미로는 유라시아 대륙에서 활동하던 백인종 유목민족(페르시아계 유목인과 같은 의미) 전체를 통칭하며, 좁은 의미로는 페르시아 다리우스왕이 그리이스와 전쟁을 벌였던 스키타이 국가를 말하는데, 대개 스키타이 위치는 크림반도를 포함한 흑해 북부 초원지대이며, 넓게는 동경 30도 선상의 우크라이나 북부의 중심에 있는 키예프(Kiev)에서부터 동경 60도 선상의 우즈베케스탄 서북부의 끝에 있는 아랄(Aral)해[咸海]까지에 걸쳐 활동하였다.

스키 타이란 말의 어원은 ‘사슴’이다. 나중에 ‘사슴’에 대한 설명은 자세히 하기로 하고 낙빈기의 금문에서 자신의 문장을 ‘사슴’으로 그린 자가 누구인지를 찾아보았다.

소호금천씨(함)의 딸 문文과 전욱고양씨 사이에서 태어난 자가 중여곤(곤곤)인데 그의 문장기호가 바로 사슴이다. 전욱고양씨의 아버지가 ‘창의’인데 이 역시 천자가 되지 못한 사람이다.

다시 ‘스키타이’의 어원에 대하여 알아보자. 스키타이의 한국어는 ‘색 탁’이다. ‘색, 탁은 고 와 동일한 뜻으로 성城이라는뜻이었다. 즉 스키타이는 동일한 뜻을 두 번 겹쳐서 부르는 이름이다. ‘색’은 북방에서 ‘새끼’라는 뜻으로 ‘스키’ ‘사키’등으로 되었다.

즉 고구려가 세워질 당시 고구려는 먼저 있던 나라인 ‘고구리’ ‘색구리’ ‘탁구리’ 또는 ‘색리국’ ‘탁리국’ ‘고리국’을 이어 받았다고 하는데 이는 세 나라가 아니라 같은 나라를 부르는 이름이다. 즉 색, 탁, 고는 같은 뜻이다. 고등의 손자가 색부루 단군이다. 색부루 단군의 후손들은 모두 고씨를 성씨로 썼다. 그러므로 고, 색, 탁은 같은 성씨이다.

스키타이의 상징은 사슴뿔이라고 이미 말씀드렸다. 신라의 금관은 바로 사슴뿔의 형상이며 금관을 만든 민족은 오직 삼국과 아프가니스탄 밖에는 없다. 즉 페르시아 위 쪽에 있던 민족이 한반도로 이주해온 것이다. 백제의 칠지도도 역시 사슴뿔의 형상이다. 그러면 사슴의 그림이 엄청많이 등장하여야만 할 것 아닌가? 몽골의 알타이 지방에 가 보면 온통 천지가 사슴그림이다. 알타이라는 말 자체가 황금인데, ‘알타이’ 역시 ‘스키타이’와 같은 뜻이다. 즉 ‘아리+타이’로 구성된 단어이다.

알타이 지방 순록 암각화

색의 페르시아나 인도식발음이 ‘샤카’이다. 즉 ‘석가모니’에서 ‘석가’는 ‘샤카’를 한문식으로다시 옮겨 쓴 것이다. 그러므로 샤카족은 모두 고구려의 ‘고’씨를 부르는 말이다. 이 고씨들을 ‘마馬’라고도 부른 것이다. 그래서 고구려는 5개의 씨족으로 구성되었는데 가장 으뜸인 종족이 마가이다. 즉 마가馬加가 바로 고씨인 것이다. ‘마가’가 변하여 ‘마기’가 되었고 그것을 스페인어로는 ‘마고’라고 한다. ‘마기’는 페르시아에서 배화교의 승려를 부르는 말이다.

좌우간 스키타이 족은 말을 타고 활을 쏘는 부족이며 최초에 철기를 다루던 부족이다. 세계사에서는 힛타이트족이 최초로 철기를 발명한 부족이라고 하는데 사실 힛타이트 족은 스키타이족으로부터 갈려져나간 부족이다.

스키타이족의 다른 이름이 ‘샤카’족 인데 일본어로 ‘시카’는 ‘사슴’을 뜻한다. BC 2000년경에 ‘아’가 ‘이’로 바뀌는 음운현상이 있었다. 이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바로 ‘샤카’가 ‘시카’로 바뀐 것이다.

치우는 여신으로 이집트의 ‘이시스’이며 이가 곧 ‘아르테미스’이며 또는 ‘페르세포네’ 로마에서는 ‘코레’라는 여신이라고 이미 말씀드렸다. 페르세포네의 상징동물은 맷돼지이며, 가끔은 곰으로도 나타난다. 그런데 아르테미스 여신이 가장 좋아하는 동물이 바로 ‘사슴’이며 그녀는 ‘사슴’의 보호자를 자처하고 나선다. 몽골 암각화 전문연구가인 김호석박사와 예서원의 최삼주 실장이 알타이지방에 가서 실제로 찍은 사진들이다. 아래 호랑이처럼 보이는 동물은사실 맷돼지이다. 맷돼지는 치우의 상징이므로 사슴 그림을 끄릴때면 항상 같이 등장하는 것이다.

8 세기 기원전 스키타이인(Scythai, 그리스 Σκύθαι). )들은 인도·이란 계통의 유목민족이다. 종족의 명칭도 ‘스쿠타(skuta-)’라는 고대 이란어에서 나왔으며, 이는 오늘날 영어에서 ‘shooter’와 동일한 어원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한다. 스키타이는 ‘궁사’를 뜻하는 셈이었다. 스키타이, 사하, 선 모두 암 순록 투르크어 사가이온(Сагаион) 과 다루르어 수간(Sugan) 어원으로 부터 왔다.

Scythia, Saxa, and the Sǒn-Xian[Seon] (鮮: Soyon) all originate from the word for female reindeer—'Сагаион' in Turkish and 'Sugan' in Dagur.

스키타이 나 사이 XIYA 사람, 고대 페르시아 바다 호 해시의 키프로스의 키프로스면을 마시고, 키프로스에 뾰족한 모자를 쓰고, 사카 (Saka, SECK 사람들)라고 ; 아슈쿠자이(Ashkuzai), 페르시아와 고대 인도라는 고대 아시리아는 "플러그"또는 "사카"라고, "한", 사카, Skuthoi 또는 Sacae 라는 고대 그리스, 중국 "역사 기록"이라고 기원전 3 세기, 중앙 아시아, 인도 - 유럽 언어 가족의 동부이란 유목민의 남부 러시아 초원에 위치 - 뾰족한 모자 키프로스 또는 Sakya이라고 사람들

유태인 아쉬케나지(Ashkenaz)는 스키타이와 어원이 같습니다. 유태인은 오히려 유태인이 스키타이인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그 근거지는 아르메니아입니다. 독일에 대한 중세 히브리어 이름이 아쉬케나즈이고, 라인강 유태인 공동체 이름입니다.  거란 키타이(Khitai)도 동일 어원이라는 견해가 있다.

1969~1970년에는 카자흐스탄의 알마티라는 도시에서 멀지않은 이식 쿨 호수 부근에서 기원전 5~4세기에 속하는 다수의 고분이 발견되었고 여기서 소위 ‘황금인간’으로 알려진 유해가 발굴되었다. 이런 이름이 붙여지게 된 것은 신장 165㎝로 추정되는 청년이 입고 있던 황금으로 된 의상 때문이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4개의 화살이 꽂혀 있는 장식을 한 모자이다. 고대 페르시아 자료에는 ‘사카 티그라하우다(Saka Tigrahauda)'라는 종족이 언급되어 있는데, ‘티그라’는 화살을, ‘하우다’는 모자를 뜻하며, ‘사카’는 ‘스키타이’와 동일한 어원을 갖는 종족명칭이다. 따라서 그것은 ‘화살 같은 모자를 쓴 사카족’을 뜻한다고 할 수 있으니, ‘황금인간’은 바로 이 종족에 속한 귀족청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민족의 기원과 역사에 관해서 가장 상세한 기록을 남긴 인물은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역사가인 헤로도투스였다. 그는 ‘역사’라는 책에서 스키타이의 기원에 대해 몇 가지 설화를 전하면서 자신이 보기에 가장 신빙성이 있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소개하였다. 그들은 원래 아락세스강(오늘날의 볼가강) 동쪽에 살던 민족이었는데, 마사게태라는 민족의 공격을 받게 되자 서쪽으로 도망쳐 강을 건너서 흑해 북안(北岸·북쪽 해안)의 원주민 킴메르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킴메르인들이 카프카스 산맥을 넘어 남쪽으로 도망치자 스키타이는 그들을 추격하기 시작했는데, 그만 도중에 길을 잘못 들어서 근동(近東) 지방으로 내려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스키타이에 관한 최초의 기록도 당시 근동의 강국이었던 아시리아의 설형문자 점토판에서 발견된다. 즉 이슈파카이 왕이 이끄는 아슈쿠자이라는 집단이 아시리아의 왕 에사르핫돈(기원전 680~669년)과 전투를 하여 패배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여기서 아슈쿠자이가 스키타이를 지칭한다는 데에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당시 근동 지역에는 아시리아, 메디아, 우라르투 등 여러 세력들이 각축을 벌여 정치적으로 극도의 혼란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무대에 출현한 스키타이는 이들 국가와 때로는 연맹하고 때로는 적대하면서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이슈파카이의 아들인 파르타투아는 과거의 적이었던 에사르핫돈과 혼인동맹을 맺게 되었는데, 후일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가 메디아에 의해 포위 공격당할 때 그의 아들이 스키타이의 왕이 되어 원군을 이끌고 와서 메디아를 격파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 뒤 스키타이는 이집트 원정에 나서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거쳐 남진했는데, 겁을 먹은 이집트의 파라오가 직접 선물을 갖고 올라와 스키타이의 국왕 마디에스에게 바치고 화평을 맺었다. 헤로도투스에 의하면 스키타이는 이처럼 28년 동안 중근동 각지를 호령하면서 여러 민족으로부터 조공을 받기도 하고 약탈을 자행하기도 했지만, 메디아의 국왕 퀴악사레스가 그들을 연회에 초대하여 술에 잔뜩 취하게 한 뒤 몰살시켜 버림으로써 그들의 패권은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고 한다.

사르마티아족에 흡수되었고 또 동쪽의 한 갈개는 파르티아와 대월지(大月地) 를 건설했습니다. 알란족 또는 라제스족으로 불렸고 로마 용병으로 활약했했고 코가서스 지역에 정착한 알란족의 후예로 오세트인으로 전해지고 있으면 파키스탄 및 아프카니스탄에 사는 파슈툰족의 동쪽에 이란계 백인의 후손이라 합니다. 백인 투르크인의 원조다.

근동을 떠난 스키타이인들은 다시 카프카스 산맥을 넘어서 흑해 북안의 초원으로 돌아갔다. 헤로도투스는 이들이 북방으로 귀환한 뒤 일어난 흥미로운 사건에 대해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스키타이인들이 근동을 원정하는 동안 부인들이 현지의 노예들과 관계를 맺어 낳은 자식들이 귀환한 옛 주인에게 예속되기를 거부했고, 양측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스키타이인들은 그들을 제압할 수 없었다. 그런데 노예들을 상대할 때는 칼이나 활이 아니라 채찍을 써야 한다는 누군가의 제안을 받아들여 채찍을 휘둘렀더니 겁을 먹고 다시 복종했다고 한다. 이 설화는 스키타이인들이 흑해 북안 즉 돈강과 다뉴브강 사이의 초원지역을 점령하고 국가를 건설할 때 군사적 정복과 함께 현지 주민과의 민족적 혼합도 동시에 일어났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흑해 북쪽 해안을 근거로 건설된 스키타이 국가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우선 ‘왕족 스키타이’라는 집단인데 최고의 지배층을 이루었고, 그 다음에는 일반 유목민으로 구성된 ‘유목 스키타이',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피정복민 ‘농경 스키타이’가 있었다. 이러한 복합적 구조는 스키타이 국가가 결코 단일한 종족이 아니라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이질적인 다양한 부족들의 결합체였음을 말해준다.

흑해 북안으로 돌아온 스키타이는 기원전 6세기 말 페르시아 제국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냄으로써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다리우스 대제는 80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스키타이를 잡기 위해서 초원을 헤맸으나 종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절망에 빠진 그는 스키타이인들에게 사람을 보내 비겁하게 도망만 다니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나와서 싸우자는 전갈을 보냈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우리는 도망다니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생활방식이 원래 그렇다”는 조롱 섞인 답신뿐이었다. 식량이 고갈된 페르시아군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스키타이는 초원에 물이 귀하므로 그들이 물이 있는 곳을 따라 퇴각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맹추격을 시작했으나, 페르시아인들은 초원의 지리에 어두워 물도 없는 엉뚱한 길로 가는 바람에 전멸 위기에서 벗어나 구사일생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고 한다.

외부의 위협을 극복하고 성취한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추진된 그리스와의 교역은 스키타이 국가에 경제적 번영을 가져다 주기에 충분했다. 스키타이의 발전과 번영은 그들이 남긴 고분에서 발견된 출토물이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다. 흔히 ‘쿠르간’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고분들은 흙과 돌로 쌓여진 작은 언덕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규모가 큰 것은 높이 20m에 이르며 그 아래에는 목곽분이 안치되어 있었다. 이들 스키타이 고분들은 특히 쿠반 반도(켈레르메스, 코스트롬스카야)와 크리미야 반도(쿨 오바, 체르톰리크, 솔로하)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어, 그곳이 스키타이 국가의 핵심적인 중심지였음을 말해준다. 유물 중에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것이 특히 많아서 스키타이 귀족들의 재화와 부의 규모를 추측케 할 뿐만 아니라, 스키타이 특유의 문화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학자들은 흔히 스키타이 문화의 3대 요소로 마구, 무기, 동물양식을 드는데, 이 가운데 특히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 동물양식이다. 이같은 스키타이 동물양식이 어디에서 기원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세 가지 학설이 대립되어 왔다. 하나는 남러시아 자생설이고, 또 하나는 서아시아 기원설이며, 마지막으로 중앙아시아 기원설이 있다. 스키타이의 유물들을 보면 남러시아나 서아시아의 영향을 부인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1970년대 전반 남시베리아의 투바공화국에 위치한 아르잔이라는 곳에서 직경 120m에 달하는 거대한 고분이 발견되었고, 거기서 출토된 유물들은 결정적으로 중앙아시아 기원설의 손을 들어주었다. 탄소 연대측정 결과 지금까지 발견된 어떤 동물양식의 유물들보다 시기가 빠른 기원전 9세기 중후반으로 판명된 이 고분에서 후일 스키타이 동물양식의 중요한 요소를 분명히 갖고 있는 유물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스키타이 국가의 중심지는 흑해 북안이었다. 그러나 동물양식을 특징으로 하는 고대 유목문화는 유라시아 초원에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있었고, 이는 고고학적인 발굴을 통해서 확인된다. 1940년대 후반 알타이 고산지대의 파지리크라는 곳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학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 고분은 땅을 파서 시신이 담긴 목곽(木槨)을 안치하고 그 위에 돌을 쌓아올린 소위 적석목곽분의 구조를 지녔다. 적석총의 특징을 지닌 신라시대 고분들과의 유사성 때문에 우리나라 학자들에게도 큰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파지리크 고분은 이미 오래전에 도굴되었지만, 묘실 안팎으로 스며든 이슬과 빗물이 결빙되어 고분 전체가 일종의 냉장고가 되어버려, 그 속에 있던 시신과 많은 부장품들이 전혀 부식되지 않은 채로 발견되었다.

미라 처리되어 실로 꿰맨 흔적이 보이는 시신의 피부에는 동물양식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고, 손가락 끝으로 눌러보면 피부가 들어갔다가 다시 나올 정도로 보존이 잘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 밖에 순장된 말들과 거기에 씌웠던 말가면이 나왔고, 목제품·펠트·직물 등에도 스키타이 특유의 양식들이 보였다. 특히 흥미로운 사실은 헤로도투스가 묘사한 바와 같이 제사의식을 행할 때 대마초를 흡입하는 데에 사용하는 도구들이 그대로 발견되어, 그의 기록이 얼마나 정확하고 신빙성이 있는가 하는 점을 확인시켜 주었다. 뿐만 아니라 페르시아에서 직조된 카펫, 중국에서 만들어진 청동거울 등도 발견되어 광범위한 교역의 존재도 짐작케 한다.

스키타이 동물양식의 특징은 중앙아시아를 거쳐 더 서쪽의 몽골리아 초원으로까지 확산되었다. 1924년 울란바토르 북방 80㎞에 위치한 노인 울라 고분은 동방의 유목민족인 흉노인들의 것으로, 여기서 나온 다량의 부장품 가운데 그리핀이 순록을 공격하는 모양이 수놓인 카펫이 발견되었다. 중국에서 만들어진 직물이나 칠기 등이 다수 있고 그 중에는 전한 건평5년(기원전 2년)의 명문(銘文)을 갖고 있는 것도 있는데, 이는 흉노가 한나라와 조공 관계를 통해서 상당량의 물품들을 입수했기 때문일 것이다. 스키타이 문화의 영향은 고비사막 남쪽의 내몽골 지역에서도 강하게 발견되고 있다. 흔히 ‘오르도스 청동기’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초원 청동기 제품들 중에는 맹수가 초식동물을 덮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기원 전 7~1세기 스키타이 세계의 문화

족/문화명

지역

정치, 문화

사르마타이

스키타이 동쪽에 위치

남우랄지방과 우랄강 동쪽 스탶지역

*알타이 산맥에서 카자흐스탄의 스탶국가와 중앙아시아 지역에 이들과 밀접하게 관련있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생활과 경제상황이 스키타이와 비슷하며 집을 갖지 않고 마차생활을 한다.

-스키타이를 공격하고 동쪽으로부터 내습한 阿蘭인에 의해 민족적 쇠망을 가져온다.

-무기, 마구, 의장이 스키타이와 유사

-전기 : 스키타이 색채가 엷어지면서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 영향이 많이 나타난다.   페르시아식의 동물문, 괴수문과 함께 기하문이 유행, 말기에 가서는 그리스로마, 게르만과의 접촉을 통해 보석상감세공을 발달시킨다.   스키타이 동물의장과 오리엔트의 괴수의장이 결합되어 사르마타이 미술 특유의 동물투쟁문, 괴수문 등의 황금식판을 만들어낸다.

-중기 : 정치, 군사적으로 크게 연맹하여 중장비 기마전술을 채용하면서 번성.   후기에는 부족중의 하나인 아란이 사르마티아를 대표

塞, 烏孫

중앙아시아 동부

-二枝式말재갈, 새모양의 교구, 스키타이풍의 山羊形이나 態形의 飾具, 단추 등의 청동기, 청동제, 철제, 골제로 된 兩翼 내지 삼각鏃, 목제의 장족, 각종 珠類

-페르가나 지방 : 제사용으로 보이는 동물형 장식이 붙은 소반, 솥 등의 청동기 출토

-세가지 지방적 특색

*천산 : 남시베리아의 문화의 양향이 오래 지속

*페르가나 : 남방 아나우 문화와의 혼합

*시르 다리아 : 맛사게타이, 사르마타이 문화의 영향

⇒오손, 큐샨, 康居로 나뉨

오손은 유목적 전통을 잘 유지, 스키타이적 남시베리아와 관련 깊다.

쿠샨은 농경적 환경 속에서 발전

강거는 정주와 유목으로 나뉘어져 정주자는 아랄해 동안의 맛사게타이, 사르마타이 등과 혼합되며 한편, 색의 전통을 갖는 사람들은 중부 카자흐스탄에서 유목을 계속했다.

타가르문화

남시베리아 미누신스크분지

-카라수크 문화 계승 : 카라수크 문화에서 갖가지 동물표현이 이루어져, 타가르문화에 이르러 현저히 발달.

-흑해연안의 스키타이 문화와 가장 유사

분묘양식과 부장품을 가지고 3기로 나뉜다.

*제 2기 : 동물의장이 많이 나타난다.   특히 산양, 사슴 등의 동물이 透彫나 입체상으로 표현되어 무기들을 장식한 예가 많다.   스키타이식 靑銅鍑 제작

*제 3기 : 철기제작 일반화.   스키타이 전기 이지식 말재갈 등 마구나 동물의장의 청동식판 등 스키타이풍 기마문화 번성

마이밀문화

 

알타이 산지의 타갈 문화와 거의 같은 시기에 성립

타갈 문화와 동류의 문화, 약간의 지방색을 띤다.

스키타이풍 유목기마민의 문화-청동제 단검, 장검, 圓鏡, 이지식말재갈, 동물의장

파지릭문화(전5~4세기)

알타이 산지

死者의 문신 : 공상적인 괴수문-스키타이 장례의식을 방영

묘실내에 대마의 열매를 넣은 청동향로 발견

애마의 부장-몽고마, 서방산의 밤색털인 아리아말

정령(전3~5세기)

바이칼호 남쪽에서 예니세이강 상류(북외몽고)

고분에서 스키타이식 삼익족, 삼각족, 鍑, 이지식말재갈, 칼, 스키타이풍의 동물의장 출토

중국문화의 영향-왕의 장신구, 전한의 화폐, 銅印

수원청동기문화(전5~전2세기)

남몽고의 오르도스

유목기마민족의 색채가 극히 강하게 나타남

-전5~전2세기:스키타이식 복, 아키타케스형 단검, 이지시 말재갈, 동복, 스키타이식 동물의장 식판, 칼, 투구, 갑옷, 馬面

-동물문은 스키타이 영향을 받은 흉노문화

타쉬투크문화(전1~5세기)

미누신스크 지방

타가르문화 후에 일어난 문화

타가르문화를 기반으로 중국의 하문화, 몽고의 흉노문화의 영향으로 성립

사자의 얼굴에서 떠내는 가면:백색인종과 황색인종의 혼혈형을 보여주고 있다. 분묘 부장품에서 보면, 지배층은 유목기마민이고 피지배층은 농경민족.

전 1세기경의 한 대 유적이 발견-문화교류

일찍 청동가공 기술발달-동물상를 예술적 사실적으로 표현한 무기나 장식품은 스키타이, 사르마타이 양식과 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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