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드라마 빛의 일기, 신사임당 27회 편이 방영되었습니다.

중종 (연산군을 몰아내고 왕에 오름)은 의성군 이겸 (송승헌 역)에게 제주도로 귀향을 명한다. 시공간을 초월하여 과거의 신사임당과 미래에서 온 서지윤이 만나서 서지윤은 신사임당에게 중국으로 밀항시켜 천축국(인도)에서 프란시스코 자비에르를 만나 실크로드를 따라 이탈리아에서 살도록 해야 한다고 당부를 한다. 그래서 신사임당은 사람을 동원해서 의성군을 중국향 배에 태우게 한다.

그러면 극에 언급된 '프란체스코 자비에르' 는 누구인가? 프란체스코 자비에르 ( Franciscus Xaverious , 1506 ~ 1552년 )는 오늘날 스페인에 해당하는 나바라 왕국 하비에르 출신의 로마 카톨릭 소속 예수회 선교회 초대 창립자이자 선교자이다.

그는 인도, 스리랑카, 몰로카스 그리고 일본에서 선교를 하였다. 프란체스고가 인도에서 선교하던 시기와 중종 재위 기간( 1506 ~1544년)이 겹치는 면은 있다. 작가의 상상력이 넘친다.

재미난 것은 피터 폴 루벤스가 그린 ' 프란체스코 자비에르의 기적' 에서 한 조선인 존재한다.

피터 폴 루벤스, 성 프란체스코 자비에르의 지적, 1617-18, 비엔나 미술관

그리고 루벤스 한점의 작품 ' 한복입은 남자 (조선남자)' 가 있다.

피터 폴 루벤스, 조선 남자 (Korean Man), 1617, 폴게티 미술관

 

다음은 해외동포신문 '이탈리아로 팔려간 조선인' 기사 내용이다.

국내최초 이탈리아로 팔려간 조선인노예 추모행사한,이태리 수교 130주년과 '프란치스코 교황 방문의 해 기념, 27일 청계천 광장

이우태 기자  |  manchu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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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3.21  16:5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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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탈리아 수교 130주년'이자 '프란체스코 교황 방문의 해'인 2014년을 맞이해 일본인에 의해 이탈리아로 팔려간 조선인 노예들을 추모하고 기념하는 행사가 국내 최초로 개최된다.

안토니오 꼬레아 기념 사업회가 주관하고 사단법인 세계와이크시티연맹이 주최하는 ▲한국·이탈리아 수교 130주년 기념 '이탈리아로 팔려간 조선인 노예 추모 행사'(안토니오 꼬레아 408)가 오는 27일 오후 2시 청계천 광장 소라탑 앞에서 개최된다.

이날 행사는 강석진(前 GE 코리아 회장, CEO 컨설팅그룹 회장)의 축사를 시작으로 '조선인 노예를 추모하는 퍼포먼스, '조선인 노예 추모 학춤공연(조계종 백성스님), 기자회견 순으로 진행되며 역사소설'안토니오 꼬레아'를 쓴 정준 씨와 '작가와의 만남'도 함께한다.

특히 미국 LA 돌비극장에서 개최된 제 8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수상한 영화 '노예12년'이 흑인 바이올린 연주자인 솔로몬 노섭의 자서전에 나오는 실화를 배경으로 제작된 것처럼, 이번 행사는 피렌체 출신의 여행가이자 토스카나 공화국의 페르디난도 1세 밑에서 공직을 맡았던 프란체스코 까를레티가 1701년 에 공식 출간한 '동서인도 여행기'에 나오는 조선인 노예 안토니오 꼬레아의 실화를 바탕으로 진행된다.

   

▲작품명 코리언 맨 - 안토니오 꼬레아

이 행사를 주관하는 안토니오 꼬레아 추모 기념 사업회는 4백년 전에 일본인에 의해 마카오 · 인도 고아항 · 유럽 대륙으로 팔려간 수많은 조선인 노예들의 존재를 국사 교과서에 수록하기 위해 현재 네이버 카페에서 백만인 서명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기념사업회는 조선인 카톨릭 순교자 124명의 복자 등극을 계기로 프란체스코 교황의 8월 방한이 확정된 금년에, 카톨릭의 조선 최초 포교의 역사가 124명의 복자들이 순교한 신유박해(1801년)가 아니라, 임진 · 정유재란(1592년~1598년) 기간에 일본 종군신부로 한반도에 처음 상륙한 스페인 라만차 지방 출신의 예수회 신부인 그레그리오 데 세스페데스 신부로 올라간다는 역사적 진실도 이 행사를 통해 새롭게 조명할 계획이다.

기념사업회는 또 408년 전인 1606년 7월 12일에 프란체스코 까를레티와 함께 이탈리아 피렌체에 도착한 조선인 노예 안토니오 꼬레아의 기구하지만 박진감 넘치는 삶을 새롭게 스토리텔링해서, 조선 선비의 문화와 역사를 해외에 널리 알리는 다양한 한류문화콘텐츠 (뮤지컬,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컴퓨터 게임) 로 발전시킬 계획이다.

이와함께 2013년에 경상북도와 경주시가 실크로드의 도시 이스탄불에서 개최한 경주 세계문화 엑스포의 총감독이였던 표재순 배재대학교 한류문화사업대학원 석좌교수는 역사소설'안토니오 꼬레아'정준 작가와 함께 뮤지컬 기획을 준비하고 있다.

   
까를레티의 책 사진
일본인이 저지른 또 하나의 만행으로 기록될 조선 노예무역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까를레티의 유일한 저서인'동서인도 여행기'가 세상에 알려진 것도 대단히 드라마틱하다. 성공회 제 3대 조선교구장 이었던 트롤로프 신부는 동양문화 연구자로 명성을 떨치던 학자였는데, 그는 1만권이나 되는 조선 관련 문헌들을 소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대단히 불행하게도 그는 1930년 11월에 일본 고베항 인근 해상에서 발생한 선박충돌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 후 일본의 역사학자인 야마구치 박사가 경성의 정동교회에 방치되어있던 1만권의 문서들을 열람하게 되는데, 그 중에서 ‘란디스 문고’를 보게 된다.

이 문고는 1890년부터 10년 동안 인천에 체류했던 성공회 신자이자 의사였던 란디스 박사가 수집한 동양에 관한 유럽인의 연구자료를 모은 것이다.

야마구치 박사는 이 문고 속에서 이탈리아 피렌체 출신의 프란체스코 까를레티가 저술한 '동서인도 여행기'를 발견한다!

1932년 야마구치 박사는 자신의 논문 “임란중 포로의 행방 - 조선인 노예 매매의 예”에서 이탈리아로 팔려간 조선인 노예 안토니오 꼬레아의 존재에 대해 최초로 발표한다.

그런데 1932년 3월 경성 성공회 아뇰드 신부가 고인이 된 트롤로프 주교가 소장하고 있던 '동서인도 여행기'를 번역한 조선인 노예 안토니오 꼬레아에 관한 내용이, '일본 아시아 학회지'에 공식 발표된다.

   
사찰학춤 추는 백성스님 사진
이 처럼 일본역사학자와 성공회의 서양인 신부에 의해 자칫 역사 속에 영원히 묻힐 뻔한 일본인이 자행한 또 하나의 만행인 조선인 노예무역의 실체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이러한 내용은 1965년 진단학회에서 발행한 '한국사-근세후기 편'128쪽과 498쪽에 기록 되었다.

또한 이탈리아에서 발간한'동서인도 여행기'는 1964년에 미국에서 '나의 세계 일주기'란 제목으로 영문으로 출판되었다.

조선인 노예 안토니오 꼬레아의 존재를 최초로 발표한 일본 야마구치 박사는 자신의 논문에서, ‘조선의 해안가 마을에서 엄청난 수의 부녀자와 아이들과 늙은 남녀들이 일본에서 노예가 되어 헐값으로 팔려가는’ 비극적 상황에 대해 언급했다.

그리고 안토니오 꼬레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상세히 발표했다.

"나는 12스키우드 (30엔)에 조선인 5명을 매입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영세를 주고 인도 고아항까지 가서 4명을 풀어주었다. 그러나 한 사람은 피렌체까지 함께 왔으며, 그는 지금 로마에 살고 있는데 이름은 안토니오 꼬레아 이다"

그런데 1987년 영국 크리스티 경매장에 유럽의 명성 높은 궁중화가인 피터 폴 루벤스가 그린 채색 드로잉화에 주인공으로 나오는 인물이 4백년 전에 유럽에 살던 조선인으로 밝혀져 큰 화제가 되었다!

이 초상화가 최초 출품될 때 제목은 고대 태국의 관리를 의미하는 '샴 대사'였다. 그러나 한국의 복식 전문가들이 초상화의 주인공이 머리에 쓴 모자가 ‘망건’이고 의상은 조선시대 무인들의 평상복인 ‘철릭’이라는 사실을 고증하면서, 그림 제목이 '한복입은 남자'로 바뀌었다.

이 후, 이 초상화를 드로잉 경매 사상 최고가로 매입한 미국의 석유재벌인 폴게티 가문에서 LA의 폴게티 박물관에 소장할 때, 그림의 제목을 '코리언 맨-안토니오 꼬레아'로 최종 확정했다! 이러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한국인들은 프란체스코 까를레티의 저서에 나오는 안토니오 꼬레아의 초상화를 직접 보는 감격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1980년 대 말에 KBS-TV 유럽 특파원 이성수PD에 의해 이탈리아 남북 칼라브리아 지방의 알비라는 산간마을에서 “안토니오 꼬레아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이탈리아 사람들을 극적으로 취재하게 된다.

이성수PD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단숨에 취재하러간 그곳은 은회색 올리브 숲이 우거진 실라(Sila)산 기슭에 자리 잡은 조그만 알비(Albi)마을이다.

꼬레아 집성촌인 그 마을에는 많은 꼬레아들이 참여하는 ‘울리보 실라노’라는 문화단체가 있었다. 문화단체의 회원으로 활동하는 꼬레아들은 알비시에 건의하여 받은 예산으로 한국을 상징하는 태극기를 주제로 하는 ‘꼬레아 광장’을 만들고, 한국 여성과 이탈리아 여성이 서로 손을 잡고 있는 ‘만남의 탑’도 세웠다.

그리고 그들은 한국인처럼 매운 음식을 즐겨먹고 올리브나 오이 등을 소금물에 절여 돌로 보관하는 독특한 식습관과, 해마다 연말에서 신년사이에 약 열흘 남짓동안 한국의 정월대보름 풍습과 비슷한 커다한 모닥불을 피워놓고 밤낮으로 그 주위를 돌며 잡귀를 쫓는 놀이를 하는 것을 대단히 자랑스러워했다.

이탈리아 남부지방의 산간오지에 사는 이탈리아인들이 스스로 “안토니오 꼬레아의 후손”이라는 믿음을 굳게 안고 살고 있는 모습은 한국인들에게 대단히 큰 충격과 감동을 주었다.

이처럼 프란체스코 까를레티의 저서 '동서인도 여행기', 임진·정유재란 때 일본과 조선을 왕래한 예수회 신부인 세스페데스 신부와 프로이스 신부의 증언과 바티칸에 보낸 편지, 유럽의 유명한 궁중화가인 피터 폴 루벤스의 채색 드로잉 초상화'코리언 맨 - 안토니오 꼬레아', 이탈리아 알비시에 있는 꼬레아 집성촌의 존재 등을 통해 4백여년 전에 일본인이 자행한 '조선인 노예 무역'의 실체가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최근 모 드라마 '신사임당, 빛의 일기' 가 신사임당 주인공으로 이영애씨로 하여 방영되고 있더래요.  5만원 권 지폐에 신사임당이 들어가 있습니다.

 많이 들어봤는데 과연 신사임당에 대해 한번 자세히 살펴보더래요.

신사임당申師任堂 에서 사임당은 호인데 이름은 신인선(師任堂申仁善)이다.

사임당은 중국 은나라 걸왕을 폐하고 주나라를 건국한 문왕의 어머니 태임을 흠모하여 자신의 호로 삼인데 조선시대에는 자칫 역모로도 3족이 멸할 수 있십더.

사임당 가게도

 

 

아바이 신명화(申命和)는 장인 이사온(李思溫)과 기묘사화에 참여하였고 관직을 단념하고 강릉 향리에 은거하였다.  기묘사화는 살짝 알아보겠습니다.

 

http://blog.naver.com/apforhis  2006.10.12

기묘사화, 기묘명현 己卯名賢

 

기묘사화는 중종 때에 일어난 사화입니다.

연산군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중종은 새로운 정치를 구현하고자 조광조를 위시한 신진사람을 대거 등용합니다. 그래서 현량과를 실시하고 소격서를 폐지하는 등의 개혁정치를 시도합니다만 그들의 사상자체는 너무 급진적이었는지 기존의 훈구파 (중종등극의 공신들)들의 반감을 사게됩니다. 그러던 중 연산군의 폐위와 중종등극에 관한 공신록에서 훈구파 자신들의 공훈이 대거 삭제되자 반감이 극에 다다른 훈구대신 남곤, 심정 등에 의해 탁핸되어 조광조를 위시한 신진사림들은 우배 또는 사사되기에 이릅니다. 이것을 기묘사화라고 하는데 이때 기존의 훈구세력에게 희생된 신진사림들을 일컫어 바로 기묘명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사임당의 아버지였던 신명화도 이 신진 사림들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었으나 정국에 적극 참여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한 이유로 원래는 기묘명현의 한 사람으로 처벌받았어야 했으나 정상참작이 되어 화를 면한 것입니다.

 

아바이 신명화(申命和)는 평산 신씨 시조 신숭겸의 19대손이다.

고조부 신개 세종대왕와 재위 시 위의정과 좌의정을 지냈다.

증조부 신자승 성균관 대사성은 태종의 딸 정선공주와 남이 장군사이에서 태어난 큰딸과 혼인했다. 조부 신숙권은 영월군수를 역임했다.

아버지 신명화는 41살에 소과에 응시하여 진사가 되었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임진왜란 충주 탄금대에서 전사한 신립은 그의 9촌 조카였고, 대한민국의 정치인 해공 신익희 14대 방손이 된다.

 

신사임당 신인선의 외가는 용인 이씨 집안이다.

세조 때의 원종공신(原從功臣) 이유약(李有若)의 손자인 이사온(李思溫)

이씨의 증조부 최치운은 세종대왕 재위시 이조참판을 지냈으며, 조부 최응현은 형조참판을 지냈다.   강릉 오죽헌을 지은 사람이 용인 이씨의 외조부 최치운이며, 최치운은 아들 최응현에게 최응현은 사위 (용인 이씨) 이사온에게, 이사온은 사위 신명화에게 주었다.

 

신사임당의 남편 이원수는 덕수 이씨로 사대부 집안이었다.

덕수 이씨 이기, 이행 형제의 조카인 이원수 당시 이원수는 이렇다 할 관직도 없었고,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두 당숙이 영의정좌의정 등을 역임한 고관이었지만 그의 집안은 가난했다. 이원수는 돈령부사 이명진의 4대손으로 할아버지 이의석최만리의 사위로 현감을 지냈고, 증조부 이추는 대제학 윤회의 사위로 군수를 역임한 바 있다.

 

신사임당의 자년 5남3년인데 그 중에  첫째 이선, 둘째 이번, 셋째 아들 대학자이자 정치인으로 이이, 넷째 문인 화가로  이우, 다섯째 이번, 문인화가 딸 이매창이 있다. 

 

아버지 신명화(申命和)공의 집은 한성(漢城)이었고 어머니 이()씨의 친정은 강릉 북평촌이다. 어머니 이씨는 외조부 생원(生員) 이사온(李思溫)과 외조모 최()씨 사이에서 난 무남 독녀라 항상 친정 부모를 모시고 강릉에서 살았기 때문에 사임당(師任堂)도 어려서 늘 어머니의 친정인 북평촌에서 살며 외조부의 교훈과 어머니의 훈도 아래서 자랐다. 안견(安堅=세종 때 사람)의 화풍을 본받아 산수 포도 풀벌레 등 여러 가지 그림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동시대의 여성으로는 문정왕후, 정난정, 황진이 등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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