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가야의 이즈모[出雲] 제철단지 개척사
아라가야왕 소잔명존의 출운제철단지 개척설화와 신라 거타지설화가 유사점이 있어, 반도의 설화를 수집하여 기·기 분식에 활용한 사례로 보여 대비를 해본 것이고 아라가야가 개척한 열도 제일의 제철단지인 시마네[島根]의 이즈모[出雲]가 실사상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중점적으로 분석하여 그 역사적인 비중을 알아보고자 하였다.


《소잔명존과 거타지설화 비교》

일본서기 신대기 상 8단 본문을 보면 소잔명존(素잔鳴尊)의 출운지방 개척을 설화로 꾸민 것이 있다. 이 내용과 유사 기이상에 나오는 신라 거타지(居陀知)설화가 유사점이 있으므로 비교해 보면


【설화 본문】


〔소잔명존 설화〕

서기 신대기 상 8단 본문

『이때 소잔명존이 하늘에서 내려와 출운국의 파천 상류에 도착했다. 이때 강 상류에서 우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그래서 소리를 찾아 가보니 노인과 노파가 가운데 한 소녀[童女]를 두고 어루만지며 울고 있었다. 소잔명존이 "그대들은 누구며 무엇 때문에 이렇게 우는가"하자 대답하기를 "나는 국신입니다. 이름은 각마유이고 아내이름은 수마유입니다. 이 아이는 딸인데 이름은 기도전희입니다. 우는 이유는, 전에는 딸이 여덟이나 있었는데 해마다 팔기대사에게 잡아먹혔습니다. 지금은 이 아이가 잡아먹힐 차례입니다. 면할 길이 없어 슬퍼서입니다"했다. 소잔명존이 "만약 그렇게 되지 않으면 이 아이를 내게 주겠는가"라고 하자 "말씀대로 바치겠습니다"했다. 소잔명존이 잠간 동안에 기도전희를 탕진조즐로 만들어 머리에 꽂았다. 그리고 각마유와 수마유에게 팔온주를 빚게 하고 아울러 방 여덟 간을 만들어 방마다 술통을 하나씩 놓고 술을 가득 붓고 기다리고 있었다. 때가 되니 과연 대사가 나타났다. 머리와 꼬리가 각각 여덟이었다. 눈은 붉은 장 같았다[赤酸醬. 등에 송백이 나고 여덟 언덕 여덟 골짜기에 뻗쳤다. 술을 보더니 통마다 머리를 디밀고 술을 마시고 취해서 잤다. 이때 소잔명존이 차고 있던 십악검을 뽑아 그 뱀을 마디마디 잘랐다. 꼬리에 이르러 칼날이 조금 상했다. 그래서 그 꼬리를 갈라서 열어보니 칼이 한 자루 있었다. 이것이 소위 초치검이다[이설에 말하기를 원래 이름은 천총운검인데 대사가 사는 곳 위에는 언제나 구름이 있었기 때문인가. 일본무황자 때에 이름을 바꿔 초치검이라 했다]. 소잔명존이 "이것은 신검이다. 내가 어찌 사사로이 하겠는가"라고 하며 천신에게 헌상하였다. 그 후 혼인할 곳을 찾아갔다. 드디어 출운의 청지(淸地/스가)에 이르렀다. 그래서 "내 마음이 청청(淸淸)하도다"라고 하였다[그리하여 지금 이곳을 청(淸)이라 한다]. 거기에 궁을 지었다. [이설에 말하기를 그때 무소잔명존(武素잔鳴尊)이 노래를 불렀다. "팔운이 피어오르는, 출운의 팔중원이여, 처를 지키는 팔중원을 만들자, 그런 팔중원을"]. 거기서 서로 합하여 아들 대기귀신을 낳았다. 그리고 "내 아이의 궁의 우두머리는 각마유와 수마유다"라고 했다. 그래서 두 신에게 이름을 도전궁주신이라 했다. 그리고 나서 소잔명존은 드디어 근국으로 갔다』


〔거타지설화〕

유사 기이2 진성여대왕과 거타지조에 보면

『진성여왕 때 아찬 양패는 왕의 계자였다. 당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백제의 해적들이 진도(津島)에서 길을 막는다는 말을 듣고 활 잘 쏘는 사람 50명을 뽑아 따르게 했다. 배가 곡도(鵠島/骨大島)에서 풍랑이 크게 일어 10여 일을 머무르게 되었다. 양패공은 걱정하여 사인에게 점을 치게 했다. "섬에 신지(神池)가 있으니 거기에 제사를 지내면 좋겠습니다"했다. 이에 못 위에 제물을 차려놓자 못물이 한 길이나 넘게 솟구치고 그날 밤 꿈에 노인이 나타나 "활 잘 쏘는 사람을 하나 남겨두면 순풍을 얻을 것이오"하자 양패공이 잠에서 깨어 좌우에 일을 묻기를 "누구를 남겨두면 좋겠소"했다. 여러 사람이 " 나무조각 50개에 이름을 써서 가라앉히는 제비를 뽑읍시다"했다. 공이 이에 따르니 군사 중에 거타지가 있어 이름이 물에 가라앉았다. 그리하여 거타지가 남게 되고 바람이 일어 배는 막힘 없이 나아갔다. 거타지가 섬에 서서 걱정을 하는데 노인이 못에서 나타나 "나는 서해약(=海神)이오. 중 하나가 해가 뜰 때면 하늘에서 내려와 다라니를 암송하면서 이 못을 세 번 돌면 우리 부부와 자손들이 물 위에 뜨게 되오. 그러면 중은 내 자손들의 간을 빼먹는 것이오. 그래서 다 먹고 오직 우리 부부와 딸 하나만 남아 있을 뿐이오. 내일 아침에 중이 또 필히 올 테니 그대가 활로 쏘아 주시오"라고 했다. 거타지는 "활 쏘는 일이라면 제가 잘하는 것이니 말씀대로 하겠습니다"했다. 노인은 고맙다하고 사라졌다. 거타지는 숨어서 엎드려 기다렸다. 다음날 아침에 동쪽에서 해가 뜨니 과연 중이 와서 전처럼 주문을 외우면서 늙은 용의 간을 빼먹으려 하였다. 이때 거타지가 활을 쏘아 중을 맞히니 곧 늙은 여우로 변해 땅에 떨어져 죽었다. 이에 노인이 나와 "공의 덕으로 내 성명(性命)을 보전하게 되었으니 내 딸아이를 아내로 삼으시오"라고 사례했다. 거타지는 "제게 주시고 저버리지 않으신다면 바라던 바입니다"했다. 노인은 그 딸을 한 가지 꽃으로 변하게 하여 거타지의 품속에 넣어주고 두 용에게 명하여 거타지를 모시고 사신의 배를 호위해서 당나라에 들어가도록 했다. 당인들은 신라사신의 배를 용이 호위하는 것을 보고 황제에게 보고하니 황제가 "신라의 사신은 필시 비상한 사람일 것이다"하고는 뭇 신하들의 윗자리에 앉히고 금과 비단을 후하게 주었다. 본국에 돌아온 거타지는 꽃을 여자로 변하게 해 함께 살았다』


【설화비교】

비교를 해보면 괴물에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을, 괴물을 처치하고 구해주는 줄거리들이 비슷하다.

〔최초 출발지〕

소잔은 하늘[天]에서 내려왔다. 거타는 신라다.

〔활동지역〕

소잔은 열도의 시마네[島根]현 이즈모[出雲]국 파천상류다. 거타는 남해항로 도중에 있는 진도 부근 곡도(鵠島)다. 소잔의 경우도 일종의 경유지이고 거타도 경유지다.

〔활동대상〕

소잔은 거대한 뱀[八岐大蛇]이다. 거타는 늙은 여우가 중으로 변신한 것이다.

〔대상물의 위력이나 성격〕

소잔의 경우 등에 소나무가 날 정도의 거대한 괴물이고 여덟 언덕 여덟 골짜기 사이에서 나왔다고 할 정도로 거대하다. 실제는 비유를 한 것이지 실물이 아니다. 등에 소나무가 났다거나 언덕, 골짜기란 말에서 산이라는 것을 암시해주고 있다. 거타는 늙은 여우가 중으로 변신하여 다라니주문을 외울 정도로 영력을 가진 괴물이다. 흔히 여우가 사람을 많이 잡아먹으면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전설이 많은데 그런 사고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괴물의 활동〕

소잔의 경우는 노부부의 딸을 1년에 하나씩 잡아먹는 것이고 거타의 경우는 해뜨는 날 매일 서해약(西海若/海神) 가족 하나의 간을 빼먹고 죽이는 것이다.

〔구해준 사람〕

소잔은 각마유, 수마유, 그 딸 셋이고 거타도 서해약 부부 둘과 그 딸까지 셋이다.

〔괴물 처치방법〕

소잔은 대사를 술에 취하게 한 후 잠든 사이에 칼로 벤다. 거타는 활로 쏘아 맞혀 죽인다.

〔활동 후 얻은 것〕

소잔은 노부부의 딸 기도전희를 얻었고 적극적으로 달라고 하여 조건부로 얻었다. 또 청지(淸地)라는 새로운 땅을 얻게 된다. 거타는 활동 후에 딸을 주는 것을 받았고 소극적이다. 반면에 사신길에 호위하는 용의 도움으로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었다는 점이 다르다.

〔딸의 변신〕

소잔은 자신이 빗으로 변하게 해서 머리에 꽂았다. 거타는 서해약이 꽃가지로 변하게 하여 품에 넣어 주었다. 소잔이 적극적이고 거타는 수동적이다.

〔활동계기〕

소잔은 설화상에서는 나오지 않으나 신대기 앞부분을 보면 신들에게 미움받고 천조대신과 서약을 하고 자신이 원해서 내려온다. 거타는 활을 잘 쏘는 덕에 사신일행에 뽑혀서 가게 되었고 제비에 뽑히는 바람에 행운을 차지하게 되었다. 또 그 전에 서해약이 거타일행이 오는 것을 알고 풍랑을 일으켜 곡도에서 머물게 하고 한 사람을 뽑아달라고 하는 것이다. 역시 거타지는 수동적으로 묘사되어있다.

〔최종도착지〕

소잔은 근국(根國)으로 간다. 거타는 신라로 돌아온다.

〔딸과 혼인〕

둘 다 혼인은 하나 소잔은 아들을 낳고 거타는 결혼 이후는 안나온다.

〔연대비교〕

위의 설화 두 가지의 연대를 비교해 보면 소잔은 서기를 편찬할 시점에 수많은 신화·설화 들을 수집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기·기를 분식하는 과정에서 만든 설화이고 거타지설화는 신라 진성여왕대에 만들어진 것이 유사에 채록된 것으로 보이므로 사서를 저술한 시점은 서기가 빠르지만 설화생성연대는 거타지의 경우가 빠른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거타지설화를 기·기 저자가 수집하여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소잔명존의 적극성과 거타지의 소극성〕

소잔명존은 대체로 적극적, 능동적으로 활동하고 거타지는 소극적, 수동적으로 활동하는데 이 두 인물의 활동상의 이런 차이는 소잔의 경우는 신천지개척을 나선 인물로서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고 거타지의 경우는 신하의 입장으로서 대체로 소극적으로 그려지지 않을 수 없다고 본다. 결국은 두 인물의 신분과 입장차이에서 나타나는 필연적인 결과로 보인다. 소잔은 개척자의 입장이고 거타는 발탁되는 입장인 것이다.

〔거타지 설화의 실사상의 모델〕

설화의 주인공인 거타지는 실사상의 모델이 누구인지는 알기 어려우나 사기 신라본기의 진성왕조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감안하고 9년조, 10년조, 11년조 기사가 설화와의 분위기와 유사한 점이 있어 거타지는 헌강왕의 서자이자 진성왕의 위를 이어 효공왕이 된 요(嶢)가 아닌가 짐작된다.

신화·설화에서 여성은 영토를 은유하고 여자를 받았다는 것은 그 영토에 대한 통치권을 은유할 경우가 많은데 거타지가 처녀를 받았다는 것은 곧 왕이 된 것과 결부시켜 해석할 수 있고 원래 왕위계승서열과는 약간 거리가 있는 서자였지만 자질이 출중하여 왕이 된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그런 측면에서 진성왕 9년조에서는 그(=嶢)를 두고 "장체모괴걸(長體貌魁傑)"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성장하자 체격과 풍모가 헌걸차고 빼어났다"는 뜻이다.

또 사기나 유사의 기술태도, 즉 왕실내분이나 쿠데타 등은 대부분의 경우 직필하지 않고 설화 등으로 처리하거나 비교적 정상적인 승계로 분식하였는데 석탈해설화, 동성대왕의 서동설화, 고이왕이나 진사왕, 아신왕, 비유왕, 무령왕 등은 전부 쿠데타로 집권한 것으로 판단되고, 고구려의 경우도 안원왕은 쿠데타, 양원왕은 왕자의 난으로 집권했는데 정상적인 승계로 되어 있는 것을 보면 거타지의 경우도 진성왕에 대한 쿠데타로 집권한 것을 분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가기도 한다.


【소잔명존설화의 실사적인 해석】


〔소잔명존은 누구인가?〕

스사노오노미꼬또[素盞鳴尊]아라가야왕 아라사등이고 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 2년조에 나오는 백제의 좌평 진정(眞淨)이고 고사기 신대기 대국주신조에 나오는 오호아나무지노가미[大穴牟遲神]이며 한편으로는 기·기상에서 반정(磐井) 등 많은 이칭을 가지고 활약하는 인물이다. 시대적으로는 4세기 중반인 서기 340년대부터 350년대 정도로 본다. 백제의 근초고대왕 재위 전반기 정도인 것이다.

〔출운에 온 목적〕

출운에 온 목적은 신천지개척이고 출운은 고대 열도에서 제일 질 좋은 사철광산지역으로 최고의 제철단지였다. 지금의 시마네[島根]현 출운으로서 이곳에서 나는 철을 바탕으로 질 좋은 병기와 농기를 생산하는 것이 열도에 고대국가를 건설하는 지름길이었기 때문이다. 이 소잔명존의 팔기대사 설화도 <백제에 의한 왜국통치 삼백년사/윤영식/98∼102p>에 잘 해설되어 있는데 거기에 인용된 출운이란 지방의 성격을 나타내는 글을 인용해보면

『이즈모의 시마네현에 安來라는 곳이 있다. 현지에서는 '야스기'라고 하는데 이 '야스기'라는 것도 출운의 현지인 말로는 "편안하게 사람들이 도래하여 와서 산 땅이란 데서 安來라는 지명이 붙여졌다"고 한다. 그거야 어찌되었든 安來에는 화동기념관이 있다. 이 '和'라는 것은 日本을 가리키는 和로서 히다찌제작소가 지금도 그곳에 철강을 만드는 대공장을 가지고 있는데, 그 공장이 철생산을 기념하여 만든 철박물관인 것이다. 中國산맥에서 채취된 사철로 철을 만들었다. 그것은 고대부터의 일이지만 지금까지도 그곳에는 대단히 질이 좋은 사철이 채취되고 있다. 그 사철로 만든 철강이 일본에서 가장 좋다. 가장 좋은 철이 이곳에서 생산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화동기념관에 가서 보면 철이 도래하여 온 철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출운에 상륙하였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사철에서 철이 될 때까지의 과정을 따라서 찍은 사진도 있고 여러 가지 모형도 있어 아주 알기 쉽게 되어있다. 그것을 보면 고대에 사철로부터 철을 획득한 집단은 대단한 힘을 가진 주도세력이었음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된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원자력에 필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했으리라는 것을 깊이 느꼈는데 출운과 신라와는 철에 의한 연관성이 대단히 짙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간단히 말하면 출운의 고대 유적은 거의 신라계이다. 이 신라와의 관계가 아주 상세히 쓰여진 것으로 水野裕氏의 '고대의 출운'이란 책이 있다. 이를 읽어보면 잘 알 수 있는데, 고대 출운의 주인공이라 해도 좋을 須佐之男命(素盞鳴尊을 말함)은 신라의 도래인이 그들의 조신으로서 받들어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고 분명히 쓰고 있다. 그래서 지금 일본에는 스사노오노미꼬또[須佐之男命]를 제신으로 한 신사만도 8천쯤이 되는데 출운에는 스사족[須佐族]이라 한 집단도 있었다고 쓰여 있다<고대일조관계사입문/김달수/筑摩書房/18p>』라고 나온다.

아라가야왕 소잔명존이 출운의 제철단지를 개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 나오는 신라도 아라가야의 고칭 아시라[阿尸良]=신라(新羅)를 지칭하는 것이다. 경주신라는 제철과는 거리가 먼 나라였다.

〔하늘[天]이란?〕

백제 또는 한반도 전체를 말하기도 한다.

〔각마유·수마유는 출운지역의 원주민〕

원주민이라고 해서 반드시 열도원주민이라고는 볼 수 없다. 반도에서 기원전부터 수없이 건너갔기 때문이다. 시마네현은 구주 북부와 마찬가지로 반도에서도 가장 가까운 곳이다. 이들도 반도에서 선진농업기술을 가지고 건너간 반도출신일 가능성이 많다. '다리 脚', '순 手'를 이름에 쓰고 있어 피지배층임을 짐작할 수 있다.

〔기도전희(奇稻田姬)〕

이름 그 자체를 보더라도 아주 비옥한 전답(田畓)을 상징하는 이름이다. 사람이 아니다. 새로 개척한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은유한 것이다. 도전(稻田)은 논[畓]을 뜻하는 말이다. 奇는 신령스럽다는 뜻이다.

〔탕진조즐〕

빗[櫛]으로 표현하기는 했어도 탕이란 것이 제철용탕을 말하므로 제철용구의 일종으로 보이고 예컨대 용탕(熔湯)의 위에 뜨는 찌꺼기, 불순물을 걷어내는 도구로 보인다.

〔팔온주〕

여덟 번 깨물은 술이라고 하는데 불순물을 걸러내기 위해 여러 단계의 야철공정을 거친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온=酉+(日 밑에 그릇 皿)

〔사스기[假기]〕

제철로를 설치한 공장과 단조하는 대장간, 주조하는 주물공장으로 보면 된다. 가기(假기)의 기( ) 자를 보면 재주 기(技) 자가 들어있다. 즉 '재주[技術]가 발휘되는 집'이란 뜻이니 바로 요즘말로 공장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술통이 곧 제철도가니인 셈이다. 기·기를 읽다보면 절묘한 은유·비유·상징들이 수없이 등장하는데 한편으로는 그 속에 한자를 파자(破字)를 해봐야 그 뜻이 명확히 드러나는 경우도 있을 정도다. 위의 기( ) 자도 그 중의 하나다. 돌집 엄(엄) 밑에 재주 技

〔팔기대사(八岐大蛇)〕

출운의 질 좋은 노천사철광산에서 흘러내리는 산화철 녹물을 말하는 것이다. 이 녹물이 연례적으로 우기만 되면 농사를 지을 수 없을 정도로 농토를 황폐화시켰기 때문에 딸을 낳자마자 대사에게 잡아먹혔다고 표현한 것이다. 이 녹[청=金+靑]으로 인한 피해는 철광석의 품위(=평균함량)가 높을수록 심해진다.

"등에 소나무가 나고 여덟 언덕 여덟 골짜기"란 말에서 보듯이 팔은 성수(聖數)이긴 하지만 대사란 것이 노천철광산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고사기/강담사학술문고/次田眞幸/2000년/上/104p>에 보면 팔기대사를 두고

「대사의 꼬리에서 초치검이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는 히노가와[肥河]의 상류일대가 우수한 사철산지고 비하(肥河) 유역에서 검(劍)이 단조된 것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대사의 배[腹]가 언제나 피에 진물러 있었다고 하는 것도 비하의 철을 함유한 붉은 물이 흘러드는 모양으로 볼 수도 있다」라고 나오는데 정확한 지적으로 본다.

〔천총운검(天叢雲劒)〕

갖고 있던 십악검(十握劒)으로 뱀의 꼬리를 자르다가 칼날이 빠졌는데 보니 뱀의 꼬리에서 칼 한 자루가 나왔다는 것은 출운에서 만든 칼이 더 좋은 칼이라는 뜻이다. 출운의 사철 질이 그만큼 좋았다는 말이다. 반도의 가라지역도 기원전부터 유명한 철산지였지만 그곳에서 만든 가라사히[韓鋤], 아라사히[추正]보다 출운의 철이 질이 좋았다는 의미다. 추(추)는 사슴 녹(鹿) 자가 석 자다. <일본서기/암파문고/2000년/권1/96p>에는 아라마사[추正]라고 읽고 있으나 사히[正]로 음독해야하고 반도어 '(ㅅ+아래아)이[金]'에서 나온 말이고 칼[刀]을 의미할 때가 많다.

천총운검은 나중에 천신에게 바치는데 백제왕실에 헌상한 것이다. 천신은 백제왕실에서 파견한 경진주신(經津主神/근구수왕)이고 항복하고 나라를 바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것이 지금도 일본왕실에 전승되고 있는 삼종신기(三種神器) 중의 하나다.

〔구름[雲]이란?〕

출운이나 천총운검의 '구름 운(雲)'은 사실은 구름이 아니고 제철단지에서 나오는 연기였던 것이다. 제철용 숯을 굽는 연기를 구름이라고 한 것이다.

〔스가[淸地]란?〕

이것은 소잔명존의 땅이라는 뜻이다. 청(淸)이 소잔의 이칭으로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소잔의 백제이름은 진정(眞淨)으로 청(淸)과 정(淨)은 통하는 말이다. 또 반정(磐井)으로도 나오는데 역시 우물 정(井)도 같이 통하는 말이다.

<고사기/강담사학술문고/次田眞幸/2000년/上/103p>에 보면

「島根縣 大原郡 大東町 須賀의 땅. 여기에 須佐之男命과 稻田比賣命을 제사지내는 須賀社가 있다」고 한다.

스가[淸地]=스가[須賀], 스사노오노미꼬또[素잔鳴尊]=스사노오노미꼬또[須佐之男命], 구시이나다히메[奇稻田姬]=이나다히메노미꼬또[稻田比賣命]다. 신령스럽다는 뜻의 구시[奇]는 미꼬또[命]와 대응되는 존칭이고 히메[姬]와 히메[比賣]는 같다. 사실은 이것도 8세기 이후에 여기에 심은 내용이다. 기도전희란 이름도 기·기 저자들이 지은 이름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아니고 의인화된 땅을 지칭한다.

사기에 나오는 진정(眞淨)이란 이름에서 정(淨)도 기·기에 나오는 청(淸), 정(井)과 발음과 의미가 통하는 말로 바꾸어 실은 것으로 보인다.

〔청(淸)은 소잔명존의 이칭〕

소잔이 아라사등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기·기저자들은 "내 마음이 청청(淸淸)하도다"라는 노래까지 지어서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이게 기·기상에서 암시를 해주는 전형적인 기법이다. 물론 이 말에도 중의적인 의미가 들어있기는 하다. 백제의 그늘로부터 벗어나서 독립왕국을 건설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는 감상도 들어있는 말이다. 그런데 소잔이 청(淸)이라고 알려주는 기사가 이설1에 바로 나온다.

「소잔명존이 도전궁주 책협지팔개이의 딸 도전원(稻田媛)을 보고 기어호(=침소)를 세워 낳은 아들을 스가[淸]의 탕산주(湯山主) 3명 협루언팔도소(狹漏彦八島篠)라 불렀다」라고 하여 소잔(素盞)이 청(淸)이고 그 아들이 셋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도전원이 기도전희를 말하는데 사실은 땅을 차지한 것을 은유한 것이다.

〔소잔명존의 세 아들〕

판경언팔도수명(坂輕彦 八島 手命), 협루언팔도야(狹漏彦 八島 野)라고도 한다고 되어있다.
사루히꼬[狹漏彦]=사루히꼬[坂輕彦]는 장자 예진별명(譽津別命)이다. 야시마[八島]는 응신이고 예전별명(譽田別命)이다. 야시마[八島]란 "대팔주(大八洲)를 최초로 통일한 인물"이란 뜻으로 붙인 이름이다. 야시마[八島]=야시마[八洲]다.      소(篠)=수명(手命)=야(野)로 아라사등의 셋째 아들 진언(珍彦)이다. 소(篠)는 '시노'라고 읽고 '소죽(小竹)'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도 암호다. 죽(竹)은 그 훈이 '대'로서 이것으로 큰 대(大) 대신에 쓴다. 다께[武]와 다께[竹]도 발음이 같은데 뜻이 '크다[大]'로 쓰인다. 소죽(小竹)은 치무(稚武)와 뜻이 같다.

가야왕족의 백제에서의 성씨 진(眞)은 열도발음으로는 신[眞]이 되는데 받침 없이 읽어서 시노[眞]가 될 수 있다. 일인들은 사까가루[坂輕]라고 읽고 있으나 사루[坂輕]라고 읽어야 한다. 이것이 신대기 하 9단 천손강림조에서는 바로 사루[원/원田彦神]로 나오고 천손강림신화를 인대기에서는 일본무존(=구수대왕)이 축자평정하는 것으로 분식해 놓았는데 서기 경행기 18년 7월조에는 사루[猿/猿大海]로 기록하고 있다. 사루[坂輕]에서 발음을 따고 대(大)는 장자라는 뜻이고 해(海)는 가야계를 나타내는 해신(海神)에서 딴 것이다. 이름이 '사루'라는 가야왕실의 장자집안인물이라는 의미다. 원=猿에서 오른 쪽의 袁 대신에 爰이 있는 글자인데 뜻과 음이 같다.

〔파천과 가애천은 발원지가 동일〕

이설2에 보면 출운의 파천 상류를 안예국의 가애천(可愛川) 상류라고 말을 돌려놓았다. 강은 다르지만 지도를 보더라도 두 강의 발원지는 동일한 지역이다. 파=대 竹 변 밑에 (其+皮)

〔초치검은 천총운검〕

서기 신대기 상 8단 이설2에 보면 초치검은 미장국의 오탕시촌에 있고 열전(熱田)의 축부(祝部)가 관장하는 신이라고 한다. 뱀을 벤 칼 추정(추正)은 '아라사이'라고 하며 '아라가야의 쇠[金]'라는 뜻이고 석상에 있다고 되어있다. 석상은 근초고대왕을 모신, 나라현 천리시의 석상신궁(石上神宮)을 말한다. 아라가야왕 소잔명존(=眞淨)이 만든 칼이 백제왕실의 신보가 된 것이다. 가라나 백제는 칼을 신보로 하는 전통이 있었던 것이다. 치=초 두 변 밑에 꿩 치(雉)

〔팔운(八雲)이 피어오르는 출운〕

역동적으로 돌아가는 출운의 제철단지를 나타내는 말이고 출운의 팔중원(八重垣)이란 출운을 단단히 확보하여 열도개척의 전진기지로 삼자고 다짐하는 말이다. 말하자면 출운은 그 당시로는 더할 수 없는 병기기지에, 기도전희로 상징되는 병참기지 기능을 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八은 성수다.

〔처를 가두는 팔중원(八重垣)〕

처를 가두는 팔중원이란 말은 지킨다, 보호한다는 의미로서 처는 결혼을 한 사람이므로 열도통치권를 말한다. 즉 백제로부터 독립된 열도왕국을 꿈꾸는 노래인 것이다. 그래서 더욱더 출운을 단단히 개발하고 지키자는 의지를 표현한 노래인 것이다. 팔중의 울타리[垣]를 말한다.

소잔명존=대기귀신〕

소잔명존이 본문에서는 대기귀신(大己貴神)을 낳고 있고 이설1에서는 5세손이 대국주신(大國主神)이라고 나와 있는데 소잔명존 본인이다. 대기(大己)는 발음이 '오호아나'로서 '대아나(大阿那)' 또는 '대안(大安)'의 다른 표기이고 '대가라'를 말한다. '대가야의 귀한 신'이라는 뜻이다. 고사기에서는 대혈모지신(大穴牟遲神)으로 나온다. 대기(大己)와 대혈(大穴)이 발음이 같고 무지[貴]와 무지[牟遲]가 같다. 이설2에서는 소잔의 6세손이 대기귀명(大己貴命)이라고 나온다. 아들인 대기귀신과 6세손인 대기귀명이 동일인인 것이다. 대수 자체는 대개가 이런 식으로 신대기에서부터 분식하여 홀리고 있다. 사실은 전부 본인이다. 대수만 늘려놓은 것이다.

<백제에 의한 애국통치삼백년사/윤영식/102p>에 보면 「그의 異名도 좋은 쇠[鐵]를 뜻하는 백철(白鐵), 즉 素쇠, 素잔(스사)로 짓고서...」라고 나오는데 일리 있는 해석이다. 잔(盞)인데 밑의 그릇 명(皿)을 뺀 약자 형태로 전(箋-대 竹 변)으로도 쓰인다.

이 소잔명존이 최초에 열도로 건너간 곳은 신대기에 보면 구주쪽으로 나온다. 신대기 상8단 이설4에

「소잔명존의 소행이 무상하였다. 그래서 여러 신이 천좌치호를 과하고 쫓아내었다. 이때 소잔명존은 아들 오십맹신을 데리고 신라국으로 내려가 소시모리[曾尸茂梨]라는 곳에 있었다. 그런데 말을 하기를 "이 땅은 내가 살고 싶지 않다"라고 하고는 진흙으로 배를 만들어 타고 동쪽으로 가서 출운의 파천 상류에 있는 조상봉(鳥上峰)으로 갔다」라고 나오는데 백제의 많은 신들로부터 박해받고 열도로 건너온 것인데 먼저 구주로 갔다가 출운으로 다시 건너간 것이다.

신라국이란?〕

구주 서남부에 아구네[阿久根]와 누마[野間]반도를 연결하는 지역에 가라가 개척한 신라라는 나라가 있었다. 이것도 원래 본국인 아라가야의 고명 신라(新羅/阿尸良) 그대로인 것이다. 아라사등의 중자 천일창이 개척한 나라다. 그리고 그 동쪽에 인접하여 웅습국(熊襲國)이 있었다. 이 웅습국이 바로 반도어로 '큰 소의 나라'라는 뜻을 가지는 가야가 개척한 소국이다. 구마소노구니[熊襲國]에서 '구마[熊]'는 반도어 '크다'의 명사형 '큼'이 원순모음화현상을 일으켜 '쿰(굼)'이 되고 다시 받침 없이 명사형어미를 붙여 발음하여 "쿠마(구마)'가 된 것이다. 소[襲]는 반도어 소[牛]를 열도발음으로 치환하여 이두표기한 말이다.

〔소시모리는 어디?〕

열도어 소[曾]는 역시 반도어 소[牛]를 달리 표기한 것이고 '시'는 사이시옷이고 모리[茂梨]는 머리[頭]를 달리 표기한 것이다. 열도어에는 '어' 발음이 없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오'로 발음하고 표기된다. 즉 원래는 '쇠머리'라는 뜻이고 신라국과 웅습국의 사이를 말하는 것으로 두 나라를 동시에 지칭하는 구주남부의 지명으로 판단된다.

〔출운은 열도제일의 철산지〕

그런데 이곳을 살 곳이 아니라고 하고 출운으로 건너간 것은 역시 출운의 사철광산을 개발하여 제철단지를 만들어 열도경략의 전초기지로 삼겠다는 전략적인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시마네[島根]의 출운이란 지명에서 볼 때 "(열)島 (개척의) 根(본)"이란 뜻이다.

〔천좌치호(千座置戶)〕

어떤 형벌인지는 알 수 없으나 신대기의 분위기를 볼 때 백제의 좌평이었던 진정이 자꾸 열도로 가기를 원했지만 '가야영역만 다스려라'는 뜻이 아닌가 생각된다. 직역하면 "천년 동안 집에만 앉아 있어라"라는 뜻으로 보이고 일종의 연금(軟禁)과 같은 상태로 비유한 것이다. 백제의 좌평이란 사실은 가야사·백제사를 개작하여 기·기를 분식한 결과이고 원래는 아니었다고 본다. 백제가 가라를 침탈하여 후국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소잔명존(=아라사등)이 출운을 개척하고 이어서 구주까지 개척하여 아들들을 왕으로 봉하고 대국으로 발돋움하기 직전에 백제가 본격적으로 가야를 정복하고 열도에 무내숙이를 후왕(侯王)으로 임명하여 보낸 것이다. 출운을 개척해 놓은 후에 다시 근국으로 갔다는 것이 위에 나왔다. 여기서 말하는 근국(根國)은 구주의 서남부에 있는 아구네[阿久根]를 말한다. 실사상의 연대를 보면 이 일들은 서기 4세기중반에서 5세기초반에 걸쳐 일어난 일들을 신화화한 것이다. 진흙배란 보잘것없다는 뜻으로 비하하여 표현한 것이다.

〔도리가미[鳥上]=도리가미[鳥神]〕

조상봉에서 도리가미[鳥上]란 말은 도리가미[鳥神]라는 뜻으로서 기·기상에서 무내숙이를 새[鳥]로 은유하고 있으므로 무내를 가리키는 말이다. 무내는 출운국조(出雲國造)이기도 하고 출운대신(出雲大神)이라고도 한다. 이 출운국이 서기 신공기 62년 시세조에는 신라(=가라)의 미인으로 의인화하여 은유되어 나온다. 미인 둘 중 하나가 바로 이 출운국을 지칭하는 것이다.

* 위의 설화는 일본열도를 처음으로 대규모로 본격개척한 시발이 되는 사건으로서 그것도 바로 우수한 농기구와 병기를 생산하는 제철단지라는 것은 동북아 제일가는 제철왕국이었던 가야다운 일이기도 하고 고대에 있어 중차대한 전략적인 발상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이 정도 되니 그곳을 "(열)島 (개척의) 根(본)"=島根이라는 이름까지 붙이게 된 것이다.
안라국의 역사와 문화

조원영 / 합천박물관 학예사, 문화재감정위원

 

1.명칭 유래

안라국(安羅國)은 현재 함안군 일대에 있었던 가야제국의 한 국가였다. 옛 문헌에서 안라국에 대한 국명(國名)을 살펴보면 다양한 형태로 보이고 있다. 『삼국사기』지리지에는 아시량국(阿尸良國)과 아나가야(阿那加耶)라는 국명으로, 물계자전에는 아라국(阿羅國)으로, 『삼국유사』오가야조에는 아라가야(阿羅伽耶)로, 『일본서기』에서는 안라(安羅)와 아라(阿羅)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지금까지는 주로 ‘아라가야’라는 명칭을 사용하여 왔으나, 이 용어는 가야가 존재했던 당시의 국명이 아니라 신라말 고려초에 만들어진 조어(造語)이므로 적당하지 않다. ‘아시량(阿尸良)’의 ‘시(尸)’는 옛말의 사이시옷을 표기한 것이므로 아시량은 곧 ‘아ㅅ라’를 표기한 것이며, 이것은 아나, 또는 아라로도 쓰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아시량, 아나, 아라, 안라 등은 모두 ‘아ㅅ라’라는 나라 이름을 뜻하며, 현대음을 기준으로 하여 볼 때 사이시옷은 ‘ㄹ’받침의 음가를 나타내는 것이므로 ‘아ㅅ라’는 ‘알라’로 읽을 수 있다. 이와 가장 가까운 것이 ‘안라’이므로 함안지역 가야국의 국명은 ‘안라’ 또는 ‘안라국’으로 사용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2.지리적인 위치와 대외무역
 
안라국은 삼한시대 변진(弁辰)의 한 국가인 안야국(安邪國)이 성장 발전하여 성립되었다. 함안군의 지형을 살펴 보면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은 분지이다. 남동쪽으로 해발 500~700m 정도의 산들로 창원, 마산, 진주와 경계를 이루며, 북서쪽으로는 낙동강과 남강이 합류하는 남쪽에 위치하고 있어 이들 강으로 창녕, 의령과 각각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지형 조건은 외부로부터의 방어에 유리했을 것이다.

함안군 일대에는 많은 지역에서 지석묘(支石墓)가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청동기시대 이미 이 지역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함안지역의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평지와 구릉지의 경사면을 개간하여 농경을 하면서 차츰 성장하여 기원 전후시기 안야국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삼국지』위서 동이전에 의하면 안야국은 구야국과 함께 변한제국 중에서는 중국 군현과 교섭하면서 중국에 잘 알려진 유력한 정치집단이었다. 안야국의 인구는 『삼국지』의 기록에 의거해 보면 4~5천호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국의 구조는 대개 국읍(國邑)과 읍락(邑落)으로 구성되는데, 안야국의 국읍은 청동기시대의 유적과 변한시대의 널무덤[木棺墓] 유적, 5세기대 이후 대형고분군이 밀집되어 있는 가야읍 일대였을 가능성이 높다.

안야국의 정치적 발전이 가능했던 것은 농업생산력, 교역에 유리한 조건 등이었다. 즉 남쪽의 산지에서 발원한 계곡의 물을 이용한 계곡 사이의 평야들과 남강, 낙동강의 배후 저습지를 이용한 농경이 안야국의 경제적 기반이었다. 그리고 강을 이용한 교통로 확보와 교통의 요충지로서 차지할 수 있는 경제적 이익 등도 안라국의 성장 기반이었을 것이다.

삼한의 여러 나라들은 일찍부터 중국 군현 및 인근 국가들과 교역을 하고 있었으며, 그 증거로 중국계 유물과 왜계 유물이 조사되고 있다. 함안지역에서도 가야읍 사내리에서 전한경(前漢鏡)을 모방한 소형방제경(小型倣製鏡)이 출토되었다. 이로 미루어 보면 안야국도 인근 변한제국이나 진한 및 마한제국, 한의 군현, 중국, 왜 등과 교역관계를 맺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야국의 대외교역로는 대체로 진동만으로 통하는 교통로와 마산만으로 통하는 교통로를 이용하여 해로로 진출하였을 것이다.

안야국이 성장할 수 있었던 조건 중에 자원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을 것이다. 식량 이외에 철, 수산자원 등이 중요한 자원이었을 것이다. 현재 함안지역에는 황철광인 제1군북광산이 있고, 동광(銅鑛)의 산출지로는 함안광산과 군북광산이 있다. 동광의 산출지에는 황철광이 함께 산출되고 있어 동광의 개발과 함께 철광석도 채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안야국 당시에도 이러한 자원을 이용하여 주변지역과 교역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3.안라국 성장기

안야국이 성장하여 안라국이 된 시기는 대체로 변한에서 가야로 변하는 3세기 말 4세기 초 무렵으로 추정된다. 즉 이 시기 낙동강 서남부지역은 고고학적 유물, 유적의 양상이 이전의 시기와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3세기 말 고식도질토기(古式陶質土器)의 출현과 딸린덧널[副槨]을 가진 대형덧널무덤(大型木槨墓)의 등장, 4세기대 이후 지배자의 무덤에 나타나는 철소재(鐵素材)의 다량 부장, 철제갑주(鐵製甲冑)의 출현, 철제농기구의 발전에 따른 농업생산력의 발전 등의 현상은 가야사회로의 이행을 알려주는 중요한 증거이다.

이것은 문헌기록에는 전하지 않지만 3세기 말 김해 가락국에서부터 나타난 큰 정치적인 변화가 인근 가야제국으로 파급된 결과로 볼 수 있다. 완만한 발전을 보이던 안야국도 낙동강하류역의 정치적 변동에 연동하여 안라국으로 재편된 것으로 파악된다. 4세기대 이후 함안지역에서 김해 가락국뿐만 아니라 신라계 및 왜계 등 외래계 토기문화의 양상이 다양하게 보이는 것은 안라국으로의 전환과정에서 보다 넓은 교역망을 갖추고 비약적으로 성장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4세기대 이후 안라국의 실재를 잘 보여주는 것은 광개토대왕비문이다. 광개토대왕비문 경자년(400) 기록에는 왜가 신라를 침입하자 신라는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였고 이에 고구려는 5만의 군대를 파견하여 신라를 구원하였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에 ‘안라인수병(安羅人 戍兵)’이라는 단어가 세 차례 나타나고 있다. ‘안라인수병’을 이해하는 입장은 다양하므로 여기에서의 안라가 함안의 안라국을 지칭하는 지에 대해서는 좀 더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안라인수병에 대한 해석 여부를 떠나서 당시 안라가 고구려 남정군과의 전쟁에 참여했다는 것은 사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연구자들은 당시 고구려의 남정을 고구려-신라 연합과 백제-왜-가야 연합의 대립으로 설정하고 있으며, 고구려-신라 연합군의 승리로 김해 가락국이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고 본다. 전기가야연맹의 일원이었던 안라국은 가락국, 왜와 공동으로 고구려와 맞서 싸웠지만 실제 전투는 김해 일대에서 펼쳐졌으며 안라국은 국읍을 비롯한 중심부가 직접적인 전쟁터가 되지 않았으므로 전쟁의 피해는 한결 적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고구려 남정 이후에도 자신의 국력을 유지하면서 기존의 전기가야연맹에 참여하였던 가야제국에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점은 안라국의 발전 모습을 보여주는 도항리·말산리 고분군은 안라국의 영역 확대를 보여주는 독자적 토기양식인 불꽃무늬토기[火焰文土器]의 확산에서 증명되고 있다.


안라국의 권역

그렇다면 안라국의 권역은 어느 정도였을까? 사실 안라국의 지방통치체제나 영역 확대를 보여 주는 기록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영역이나 국왕의 통치 범위를 설정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함안지역에 현존하는 성곽의 분포와 고고자료의 검토를 통하여 대략의 정치권역을 설정할 수 있을 뿐이다. 함안분지를 둘러싼 산 위에는 어느 시기에 축조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산성이 다수 분포하고 있다. 안라국은 인접한 국가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산성을 축조했을 것으로 생각되므로 이러한 산성의 분포에 따라 안라국의 지배력이 어디까지 미쳤는지 추정할 수 있다.

안라국의 북쪽에는 낙동강, 남강이 있어 자연적인 방어수단이 되었다. 서쪽에는 방어산성이 있는데, 이곳은 백제의 진출을 막기 위한 방어시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남쪽에 있는 여항산성과 파산봉수는 안라국이 남쪽 해안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통로이자 동시에 남해안을 통한 외적을 침입을 대비한 시설물로 보인다.

또 대현관문은 함안군 여항면과 마산시 진북면의 경계지역에 있는데 진동만으로 연결되는 길이 나 있는 것으로 보아 안라국의 중요한 경계지역이었을 것이다. 동쪽에 있는 포덕산성은 마산疎♧¯ 방면과 통하는 유일한 통로이므로 그 북쪽에 있는 성지봉산성, 검단산성, 성산성, 안곡산성, 칠원산성과 연결되어 서쪽으로 진출하려는 신라에 대비한 방어를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성곽의 배치로 볼 때 안라국의 권역은 칠원의 일부지역을 포함하는 지금의 함안군 일대였다.

5세기대 함안의 대표적인 토기인 불꽃무늬토기의 분포를 통해서도 안라국의 지배권역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이 토기가 조사되는 지역은 함안분지내의 도항리·말산리 고분군을 비롯하여 외곽지대에는 칠원면 오곡리유적, 마산시 현동유적, 창원시 도계동유적, 의령 예둔리유적, 유곡리고분군, 봉두리고분군, 진북 대평리고분군, 진양 압사리유적 등이다.

분포지역으로 보아 당시 안라국의 영역은 함안을 중심에 두고 서쪽의 진주 일부지역, 북동쪽의 창원 일부지역, 서북쪽의 의령 일부지역, 남동쪽으로는 마산의 진동지역 등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권역이 멸망기까지 그대로 유지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6세기대에 이르면 백제, 신라의 가야지역 진출로 인하여 권역의 축소 가능성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6세기대 안라국은 남부 가야제국을 주도해 가면서 동쪽과 서쪽에서 잠식해 들어오는 백제와 신라에 대하여 군사적 또는 외교적으로 대항하였으며, 왜 세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가야제국의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한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문헌자료에서 엿볼 수 있다.


6세기 안락국 대외관계 문헌
6세기의 사정을 기록하고 있는 『일본서기』계체(繼體)·흠명기(欽明紀)에는 가야지역을 둘러싼 주변국들, 즉 고구려, 백제, 신라, 왜 등 여러 나라가 서로 각축을 벌이는 모습들이 비교적 풍부하게 실려 있다. 그러나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없는 많은 위험이 내포되어 있어 철저한 사료 비판을 해야 한다. 이 시기 역사 자료들이 대부분 백제삼서(百濟三書)를 바탕으로 구성되었지만 8세기 일본의 고대 천황주의사관에 의해 왜곡 윤색되었기 때문이다. 학자들의 대체적인 동의를 얻고 있는 내용 가운데 안라를 중심으로 하는 대외관계의 동향을 살펴보면 크게 3시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백제가 기문[전북 남원], 대사[경남 하동]지역으로 진출하는 시기로써, 기문을 상실한 가라국은 백제에 대립하여 신라와 결혼동맹(522~529년)을 체결하였다. 안라국은 백제의 기문지역 진출에 대해서 묵인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가라와 반목하였다. 이러한 가야제국의 갈등을 틈타서 신라는 가야지역의 도가(刀伽)·고파(古跛)·포나모라(布那牟羅) 3성을 함락시킨 후 또한 북쪽 경계의 5성을 함락시키면서 차츰 가야지역을 잠식해갔다. 이 시기에 안라는 백제와는 친선관계를 유지하고 신라와는 적대적인 경향을 보였다.

제2기는 백제가 기문·대사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신라가 낙동강 서남부지역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안라의 외교적 역할이 두드러진 시기이다. 529년 안라가 주도한 고당회의(高堂會議)-이하 안라회의-는 백제와 신라의 가야지역 진출에 대하여 가야지역의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한 방책으로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 안라는 의도적으로 백제를 배제하였다. 즉 백제가 안라회의에 참여하였으나, 백제의 대표는 고당에 오르지도 못하였다. 이는 백제가 대사지역으로 진출함에 따라 남강을 거슬러 올라와 안라지역을 잠식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나온 대처였을 것으로 보인다. 신라도 낮은 관등의 관리를 파견하였으므로 안라회의 자체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는 안라의 성장을 대외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한편 안라회의가 성공하지 못함에 따라 백제와 신라는 가야지역으로의 진출을 계속하였다. 백제는 하동에서 함안 사이의 지역에 걸탁성(乞城)을 축조하였고, 신라는 남가라, 탁기탄 지역을 멸망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안라는 안라일본부(安羅日本府, 안라에 파견된 왜의 사신)를 이용하여 안라의 독자성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즉 백제의 안라에 대한 진출을 저지하기 위하여 신라와 외교적 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신라와의 외교활동을 주도한 것이 일본부였던 것은 안라가 백제와의 정면충돌을 피하고자 했던 것에 원인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안라의 외교정책에 대하여 백제의 성왕(成王)은 이미 멸망한 남가라·탁기탄·탁순의 재건이라는 명분으로 두 차례에 걸친 사비회의를 개최하였지만, 안라를 비롯한 가야제국은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이는 백제가 계속적으로 가야지역에 군령성주(郡令城主)를 두어 안라지역으로의 진출의도를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신라 또한 안라지역으로의 진출을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안라의 외교정책은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이렇게 되자 안라는 고구려와 밀통하여(548년) 백제를 견제하고자 하였다. 안라의 요청에 따라 고구려는 백제를 침공하였으나 신라가 백제를 구원하여 고구려가 전쟁에서 패함으로써 안라의 의도는 무산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는 안라와 백제의 사이가 매우 소원한 관계로 변하였으며, 상대적으로 신라와는 우호적인 관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제3기는 안라 주도의 외교적 활동이 성공을 거두지 못함에 따라 안라가 다시 친백제적인 성향으로 전환했던 시기이다. 안라가 다시 백제와 화친하면서 안라는 백제와 신라가 충돌하였던 관산성전투(554년)에 참여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 전쟁에 참여하였던 가야의 군대가 2만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보아 안라국은 이 전쟁에 국운을 걸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백제와 가야의 연합군이 신라에 패배하였고 가야제국은 차례차례 신라의 영역으로 편입되어 갔을 것이다. 그러므로 안라 멸망의 결정적 계기는 관산성전투의 패배였다고 할 수 있다.

신라는 관산성전투 이후 가야지역에 대한 본격적인 진출을 시작하였다. 555년 비사벌(比斯伐, 창녕)에 완산주(完山州)를 설치하고, 557년에는 감문주(甘文州, 김천)를 설치하였으며, 561년에 창녕 순수비(巡狩碑)를 건립하였던 것은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안라국이 멸망했던 때는 언제쯤일까? 『일본서기』흠명기 22년(561)조에 보이는 “신라가 561년 아라(阿羅) 파사산에 성을 축조하여 일본에 대비했다”는 내용에서 안라국의 멸망을 추정할 수 있다. 아라는 곧 안라국이며, 파사산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함안군 산천(山川)조 및 봉수(烽燧)조에 나오는 ‘파산(巴山)’으로 비정할 수 있다.

파산은 지금의 봉화산으로서 봉수대는 안라국이 해안으로 진출하는 루트인 진동지역과 함안의 경계지역에 있으며, 봉화산 북쪽 최고봉상에 위치하여 남으로 진해만(진동만)과 북쪽으로는 함안 일대를 비롯하여 낙동강과 남강 너머 의령까지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입지를 가지고 있다. 이렇듯 파산은 안라국의 중요전략기지였을 것이므로 이 지역에 신라가 성을 쌓았다는 것은 이미 안라가 신라에 의해 복속되었음을 전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또한 『일본서기』흠명기 23年(562)조에 “어떤 책에는 21년(560)에 임나가 멸망했다”라는 기록을 참조해 본다면 안라의 멸망시기는 560년에서 561년 사이로 볼 수 있다. 특히 안라는 가야제국의 중심국 가운데 하나였으므로 이러한 안라국의 멸망을 전하는 기록이 실재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안라국의 멸망은 560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안라국의 흔적은 현재 함안군 가야읍의 말산리와 도항리에 말이산고분군이라는 대형무덤들로 남아 있다. 이 유적은 1917년 일본인 이마니시 류[今西龍]에 의해 말이산34호분(현재 4호분), 말이산5호분(현재 25호분) 등이 발굴조사 된 후 처음으로 학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1986년 국립창원대학교박물관에 의해서 도항리14-1호, 14-2호가 조사되었다. 이 2기의 대형무덤은 도항리고분군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였으며 또한 함안지역에서 광복 후 처음으로 우리나라 연구자에 의한 발굴조사라는 데 큰 의의가 있다. 그러다가 1991년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가 도항리35호분과 그 주변지역을 발굴조사하여 청동기시대 고인돌 8기와 집자리 1동을 확인하였다. 이로써 도항리 일대가 선사시대부터 인간 삶의 터전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다음해에는 가야읍 아파트 공사 중에 발견된 초대형 덧널무덤인 ‘마갑총(馬甲塚)’을 통해 5세기 전·중반 안라국 지배층 고분문화의 성격과 양상 규명 및 안라국 철기문화의 우수성을 알 수 있었다. 이 고분은 길이 6.9m, 너비 2.8m, 깊이 1.1m의 긴 타원형의 묘광내에 판재상의 목재로 짠 덧널이 설치된 대형의 덧널무덤이다. 유구의 북쪽 벽은 굴착공사로 인하여 파괴된 상태였지만, 중앙에 매장된 무덤주인공의 흔적과 그 좌우에 가지런한 상태로 놓인 말갑옷은 그 동안 영남의 각 지역에서 확인된 것에 비하여 부장상태가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어서 이 유구의 명칭을 마갑총으로 정하게 된 것이다. 이 무덤에서는 말갑옷 뿐만 아니라 말의 얼굴을 덮어 보호하는 말머리가리개[馬冑]의 조각으로 추정되는 여러 점의 판상철편도 확인되었다.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에서는 도항리·말산리 고분군의 정확한 성격 규명을 위해 1992~1996년까지 5차례의 연차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 결과 고총고분인 5호분, 8호분, 15호분 등과 널무덤 20여기, 덧널무덤 20여기, 구덩식돌덧널무덤 10여기, 돌방무덤 3기 등이 확인되었다. 이를 통해 당시 안라국 지배층의 무덤 변천과정과 당시 안라국의 사회상을 알 수 있는 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다.

1997~1998년에는 도항리와 말산리 일대의 도로 확장공사 및 단독주택 신축공사로 인하여 발굴조사가 필요하게 되자 경남고고학연구소에 의해 모두 5차례의 시굴 및 발굴조사가 실시되어 널무덤 38기, 독무덤 3기, 덧널무덤 37기, 구덩식돌덧널무덤 4기가 조사되었다. 또한 2002년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에서는 말산리의 건물 신축공사 도중 발견된 돌덧널 길이 8.65m, 너비 1.65m의 초대형 구덩식돌덧널무덤 1기를 조사하였다.

이러한 발굴조사 결과 이 유적에 고분이 조성되기 시작한 것은 삼한시대부터였음을 알 수 있었으며 이 시기의 유물들은 구릉의 북쪽에서 출토, 채집되었다. 이 구릉에 원형 봉토분이 발생한 시기는 5세기 초경으로 추정된다. 대형 봉토분들은 입지상 좋은 지점에 위치하면서 구릉의 북쪽에서부터 점차적으로 조성된 경향을 보이며, 대형분의 사이와 구릉의 사면에는 중·소형분이 분포한다. 유적의 연대는 삼한시대에서 6세기까지이다.

이제 안라국 사람들이 남긴 유물을 살펴 보자. 먼저 안라국의 토기에 대해 살펴 보면 대체로 4세기 전반부터 고식도질토기가 생산되었는데 굽다리접시, 짧은목항아리, 화로모양그릇받침, 손잡이잔 등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특히 4세기대에 안라국 토기를 대표할 수 있는 工자형굽다리접시는, 전반에는 굽다리가 길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차츰 짧아지면서 5세기대의 불꽃무늬굽다리접시와 그 계통이 연결된다.

5세기대에는 앞 시기의 토기보다 그 형태와 종류가 더 다양하고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며, 무덤에 부장되는 양도 많아졌다. 이 시기 안라국을 대표할 수 있는 토기는 굽다리에 불꽃모양의 투창이 뚫려 있는 불꽃무늬굽다리접시를 비롯하여 삼각형투창굽다리접시, 긴목항아리 등이 있다. 이외에도 수레바퀴모양토기, 등잔형토기, 종형토기도 제작되었다.

6세기에 접어들면서 굽다리접시와 뚜껑 등의 토기류는 그 형태가 조잡해지고 규모가 작아졌다. 굽다리접시는 굽다리가 짧아지고, 손잡이가 붙은 것도 나타났다. 또한 이 시기에는 고령계, 경주계, 창녕계의 토기가 유입되어 안라국 토기문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안라국의 무기를 살펴 보면 공격용무기로는 고리자루큰칼[環頭大刀], 화살촉 및 화살통, 투겁창[鐵鉾] 등이 있고, 방어용무기는 투구와 갑옷 등이 조사되었다. 의례용도구들도 출토되었는데, 덩이쇠, 미늘쇠, 점치는 뼈[卜骨] 등이다. 안라국의 말갖춤은 고구려와 백제의 말갖춤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 제작·사용되었으며 신라의 말갖춤이 장식성이 강하고 화려함에 비해 실용적인 것이 특징이다. 말안장가리개[鞍橋], 발걸이[鐙子], 말띠드리개[杏葉], 재갈[轡] 등이 출토되었다.

안라국의 장신구는 주로 유리, 옥, 수정, 마노, 비취 등을 이용하여 귀걸이, 반지, 목걸이 등으로 이용하였다. 또 생산도구로는 도끼, 낫, 쇠스랑, 괭이, 가래 등이 출토되었고, 그 외에도 실을 뽑을 때 사용하는 가락바퀴 등이 주로 발견되고 있다.

함안지역에서 출토되는 각종 유물 가운데는 주변의 가야 여러나라, 또는 백제와 신라, 일본 등지에서 제작되어 이 지역의 무덤에 매납된 것으로 추정되는 외래계 유물이 다수 확인되고 있다. 이 자료들은 토기가 대부분으로서 굽다리접시, 뚜껑, 항아리 등이 주류를 이룬다. 주로 5세기 중·후반대에는 창녕의 비사벌, 김해의 남가라계의 유물들이 주류를 이루고,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에는 백제와 신라, 고령의 가라국과 고성의 고자국 유물들이 주류를 이룬다. 이러한 유물들은 각 시대별로 안라국의 대외교류관계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한편 안라국의 국읍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왕궁지에 대한 기록은 조선시대의 기록인 『함주지(咸州誌)』에 비교적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즉 가야국의 옛터는 부존정(扶尊亭)의 북쪽에 있다고 했는데, 그 기록으로 보아 부존정은 지금의 가야동 쾌안 뒷산(해발 79m)으로 추정된다. 가야동이 안라국의 왕궁지로 추정되는 이유는 문헌기록도 있지만 초석, 우물, 토축흔적 등의 고고학적 유적과 더불어 내성과 외성의 2중 구조로 된 봉산산성이 배후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도읍지가 대부분 2중성의 구조로 된 것과 일치한다.

또한 주변 여러 지역에서 신읍(臣邑, 신하들의 생활주거지), 선왕동(先旺洞, 은퇴한 노왕이나 안라국 멸망 이후 왕족이 모여 살던 곳), 궁뒤(왕궁지의 뒤편) 등과 같은 왕궁지와 관련된 지명이 전하고 있다. 비록 전해지는 지명이긴 하지만 옛 안라국의 영화를 알려주는 왕궁을 추정하는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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