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호(東胡)와 퉁구스(Tungus)의 연관성3 - 연燕나라 장수 진개秦開와의 전쟁
고조선과 주변 유목민족 간의 관계가 궁금했는데 상세하게 설명한 글이 있어서 소개하고자 합니다.
출처 : 참桓역사신문
저자 : 정길선 박사
일본 도쿄대학 역사문화학 터키·이슬람 문화사 전공.
러시아 모스크바 대학 Aspirant, Candidante, Doctor과정 학위 및 수료.
불가리아 소피아 대학 Research Professor.
유라시아 고고인류학 연구소 Research Professor.
1.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나타난 동호(東胡)의 역사와 연燕나라 장수 진개秦開와의 전쟁
요녕성에서 하북성 북부까지 진출한 동호는 산서성 이북까지 세력을 확장하였고 융족과 결탁해 조趙, 위魏, 연燕, 진秦 나라의 국경지대를 약탈을 계획하게 되는데 융족을 주로 위나라와 진나라를 동호는 연나라와 조나라 국경에 대한 대대적인 약탈을 감행했다.
이후 부여가 세력이 막강해지면서 해모수가 말년에 남하했고 부여의 약진으로 인해 동호의 세력은 절반으로 축소되었다. 이는 해부루가 동쪽 가섭원으로 천도하기 전까지 부여의 세력은 북변지역에 걸쳐있었다. 조, 위, 연, 진라라의 국경은 부여의 공격을 주로 받았고 부여와 동호, 융족들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장성長城을 축조하게 된다.
연나라 장군 진개秦開가 소왕昭王의 명을 받아 장성을 넘어 동호를 공격하게 되는데 동호의 약탈에 대한 대응책인 것으로 해석된다. 진개의 공격에 대한 기록은 여러 사서에서 언급되고 있는데 대표적인 기록이 [위략魏略] 과 [사기史記] 흉노열전匈奴列傳의 기록으로 볼수 있다. 그러나 [위략魏略]의 경우, [삼국지三國志] <위치魏志 – 동이전東夷傳> 이 [위략魏略]을 인용하여 해당사료가 나타난 것과 [위략魏略] 원문의 기록이 약간 다르다.
진개의 기록에 대한 대표적인 두 사서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연이 동으로 취지이천리하였다. 燕取地, 二千里的, 兩個人東”
“ 위략에 이르길 …(중략)… 연燕이 이에 장군 진개秦開를 보내어 그 서 방西方을 공취하여서 2천여리 땅을 취하여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러 경계를 하였으니 조선朝鮮이 약해지기에 이르렀다. 연燕에 현명한 장수賢將 진개秦開가 있어 ,호胡에 인질로 잡혀있었는데 호胡는 그를 깊이 신임하자 연燕으로 돌아와서 동호東胡를 불의에 엄습하여 격파해 달아나게 하여서 동호東胡가 천여리를 믈러서게 하였다.
형가荊軻가 더불어 진왕秦王을 죽이고자 한 진무양秦舞陽이란 자가 개開의 후손이다. 연燕은 조양造陽으로부터 양평襄平에 이르는 장성長城을 쌓았고 상곡上谷, 어양漁陽, 우북평右北平, 요서遼西, 요동군遼東郡을 세워 이로서 호胡를 막았다.
[위략魏略]과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 동이전東夷傳>의 경우를 비교해 보면 사료가 삼국지 위지 – 동이전 의 내용이 훨씬 더 상세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 조선朝鮮이라는 단서도 추가했다. 그러나 [사기史記] 흉노열전匈奴列傳 에는 동호東胡로 표기되어 있다.
얼필 해당 두 사료만 보면 고조선과 동호는 동일국가 개념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위 두 사료만 비교해서 고조선 = 동호는 상당히 설득력이 떨어진다.
2. 연나라 진개 공격 기록에 대한 논란과 우려
[위략魏略]과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 동이전東夷傳>, [사기史記] <흉노열전匈奴列傳> 의 기록 중에서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은 진개의 공격에 의해서 2천여리의 영토를 잃은 것과 천여리의 영토를 잃은 부분의 진위여부와 해당 지역의 위치 여부이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의 경우, 전한前漢시기 서술된 사료이고 진수의 [삼국지三國志]는 삼국이 통일된 이후 진晋나라 시기에 서술된 사료이다. [사기史記]가 [삼국지三國志]보다 서술된 시기가 200년 이상을 앞서 있고 [사기史記]에 기록된 천여리가 [삼국지三國志]와 [위략魏略]에 나타난 2천여리라고 기롤되어 있는 것은 후대에 의한 가필이라 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2천여리와 천여리의 차이 못않게 중요한 것은 그 위치이다.
현재 중국사학계나 한국의 강단사학계에서 지정해 놓은 연나라의 위치는 하북성河北省이고 요하遼河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연나라의 수도는 계薊로 오늘날의 베이징北京이라 보편적으로 비정되어 있다. 그래서 북경을 오랜 기간 동안 연나라의 수도인 연경燕京이라 칭해왔다.
연나라의 국경의 시작을 요하로 판단한다면 진개가 흭득한 영토인 1~2천리는 청천강이나 대동강까지 능히 넘어갈 수 있지만 난하나 영정하를 연나라 경계로 놓고 판단한다면 압록강 인근까지 축소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