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능자가 주도한 고조선 역사

와당문화는 고조선 건국 초기부터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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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이웃추가 | 2016. 6. 26.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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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당문화는 고조선 건국 초기부터 시작되었다

 

 

Ⅰ. 서론

 

승리제단에서는 한민족의 뿌리가 이스라엘 민족이며, 고조선은 단지파가 기원전 1000년경 세운 최초의 고대국가라는 것을 계속 밝혀왔다. 그 근거로 대동강변에서 발견된 와당에 기록된 문양(文樣)이 고대 히브리어이며, 우리 민족의 풍습과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 민족의 풍습이 수십 개 동일하다는 점을 제시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우리말 속에 들어있는 히브리어를 찾아 우리가 알타이어를 사용하기 전에 히브리어를 썼었다는 점을 밝혔다.

 

​이처럼 고고학적으로 증명이 되는 유물이 있고, 문화사적으로도 인정되는 내용, 또한 언어학적으로 히브리어에서 온 우리말이 있는데도 역사학계에서는 현재까지도 이러한 사실(史實)을 외면하고 있다.

 

한민족의 뿌리가 되는 단지파가 가나안(지금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소라 성읍을 떠나 한반도까지 와서 대동강 유역에 고조선을 건립하였다고 해서, 만주지역의 홍산문명(紅山文明, 요하문명)이 고조선의 문화권에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기원전 15세기에서 13세기까지 지중해 연안에서 이집트의 청동기 문화와 블레셋의 철기 문화를 경험한 단지파가 지도자 삼손 장수를 잃고 지금의 레바논 남쪽 소라 성읍을 떠나 한반도까지 왔기 때문에, 대동강 유역에서 세워진 고조선은 이미 청동기와 철기를 결합한 우수한 문화의 터전 위에 전통적으로 이어오던 제정일치 사회를 열었던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3200년 전에 지중해 연안의 팔레스타인에서 동방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던 단지파는 알타이산맥 근교(지금의 중국 서북부)에 와서 약 200년간 우거하고 그리고 몽고(蒙古)를 거처 만주를 지나 압록강을 건너 대동강 유역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여기서 한민족의 뿌리가 되는 단지파의 이동 과정에서 중국의 주나라를 세운 주역이 단민족의 비주류로 추정되며 또한 몽골초원의 유목민이 단지파의 사람들로 구성되었음을 확연히 알 수 있다. 그리고 만주는 자연히 몽고의 단지파 사람들과 한반도 고조선의 단지파 사람들과의 가교 역할을 할 수밖에 없으며, 몽골의 단민족과 한반도의 단민족이 융화되던 그곳에서 홍산문명을 꽃피울 수 있었다.

 

본고에서는 고조선의 실체와 관련하여 와당문화를 중점으로 다루되 기존에 알려진 광범위한 학설의 언급을 피하고 독자적으로 연구한 와당문화의 기원을 밝히는 과정에서 특히 고조선 시대의 수막새에 그려진 문양 속에서 고조선 사람들의 정통 사상을 엿볼 수 있었다는 점에 큰 의의를 둔다.

 

 

Ⅱ . 본론

 

1. 연화문(蓮花紋) 수막새가 아니라 근화문(槿花紋) 수막새다

 

현재 학계에서 고구려시대 와당으로 인정되고 있는 연화문(蓮花紋) 수막새 다수가 잘못 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것은 고조선시대 사용된 근화문(槿花紋) 수막새이다. 와당문화가 한사군 시대에 중국으로부터 들어왔다고 알고 있는 기존의 학설은, 국가라는 형태로써의 고조선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한반도 초기 국가가 삼국시대부터 시작된다는 일제 강점기 일본 사학가의 편년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결과이다. 이는 고조선의 건국초기부터 찬란한 청동기와 철기문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무지의 소치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편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2333년에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오늘날 국사 교과서에서는 기원전 2000년경 내지 기원전 1500년경에 한반도의 청동기 시대가 열렸다고 한다. 그렇다면 청동기 시대에 국가가 성립되었다고 하는 것이 통설이므로 고조선의 건국원년을 고고학적 증거에 입각하여 재정립할 필요성이 있다.

 

​20세기 말에 이웃 나라인 중국이 역사학자, 고고학자, 천문학자 등 각 분야 전문가 200명을 동원하여 ‘하상주 단대공정(斷代工程)’을 시작했을 때, 중국의 학자들은 조선시대에 편찬된 동국통감에 고조선의 건국원년이 기원전 2333년이라고 기록하고 있음을 알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중국 최초의 국가 하(夏)나라의 건국연도를 기원전 2070년으로 설정하여 고조선보다 263년이나 뒤늦게 건국한 것으로 하였다. 이것은 고조선의 설립시기를 기원전 2333년으로 보지 않겠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중국 학계의 한반도 고조선 국가에 대한 관점은 “고조선은 한무제 당시 설립된 한사군(기원전 108년) 이전, 고대한반도 북부국가의 명칭이며 단군조선 및 기자, 위만조선 3개 왕조를 포함하고 있다(바이두 백과 古朝鮮)”고 본다. 세계사적으로 하나의 국가가 천 년의 역사를 존속한 예가 거의 없는데 승리제단의 조희성 총재는 “신라가 천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던 것과 같이 한민족의 최초 국가인 고조선도 중국의 한무제에 의해 멸망당하기 전까지 천 년 동안 역사를 간직했다”고 하는데, 이를 근거로 고조선의 건국원년을 기원전 1000년 전후로 추정해본다.

 

청동기 문화가 번성한 이집트에서 벽돌과 기와를 굽던 한민족의 뿌리 단지파가 기원전 1446년에 출애굽하고 그리고 가나안이었던 팔레스타인에 입성하여 약 2백년간 블레셋 민족과 대치하다가 결국 분배받은 기업을 차지하지 못하고 동쪽으로 이주하여 기원전 1000년경 대동강변에 고조선을 설립하였다. 고조선 건국 초기의 구성원들은 이미 이집트의 청동기 문명에서 습득한 1,000℃ 이상의 고온에서 벽돌과 기와를 구워내는 가마를 만들 줄 알았다. 그래서 평양 근교에서 출토되는 고조선의 초기 와당은 처음부터 정교한 문양을 새긴 특징을 보이며 수천 년의 장구한 세월 동안에도 보존될 수 있었다.

 

 

지붕의 기왓골 끝에 사용되었던 기와를 '수막새'라고 하는데, 이 수막새는 기원전 1000년경 대동강변에서 도래인(渡來人) 한민족이 고조선을 세울 당시 최초로 창안한 와당(瓦當)이다. 기왓집의 와당 문화는 고조선에서 중국으로 전파되었기 때문에, 중국 최초의 와당이 서주 중기(西周中期, BC 9세기중엽~ BC 771) 시대의 협서(陜西) 주원(周原) 유적지에서 소규모로 발견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기와의 사용은 대체로 한(漢)문화가 유입된 낙랑시대부터라고 추정하는 것이 오늘날 사학계의 통설인데, 이는 평양 근교에서 출토되는 고대 와당에 새겨진 문양의 기원을 제대로 알지 못한 데서 기인한다고 판단할 수 있다.

 

기원후 372년 소수림왕 때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와당에 새겨진 문양을 연꽃무늬의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해서 '연화문(蓮花紋)수막새'라고 통칭하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 이전의 고조선 시대에 제작된 원시 수막새는 무궁화 꽃씨(또는 보리씨앗)와 무궁화 잎사귀 등 무궁화와 관련된 것을 새긴 문양을 하고 있다. 고조선의 근화문(槿花紋)수막새는 무궁화 무늬를 알지 못한 삼국시대 사람들에 의해서 연꽃무늬의 수막새로 와전(訛傳)되기도 하였으며, 백제와 신라의 중흥기에 연꽃 모양을 그대로 표현하는 와당이 비로소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앞으로 고조선 수막새에 무궁화 문양을 새기게 된 동기를 자세히 언급하고자 한다.

 

 

2. 근화문(槿花文) 수막새로 볼 수밖에 없는 몇 가지 이유

 

고조선 수막새에 무궁화 문양이 새겨져 있다고 밝히면서 그 동기를 자세히 언급하고자 한다. 그 동기를 밝히기 전에 먼저 무궁화가 우리 민족에게 어떤 의미가 있으며 언제 전래되었는지 등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① 우리 민족의 상징 무궁화

 

무궁화는 우리 민족의 상징이다. 언제부터 무궁화가 우리의 상징이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무궁화에 대하여 BC 8-3세기 에 기록한 문헌이 있는 것을 볼 때 무궁화는 최소한 고조선 시대에도 우리민족에게 유의미한 꽃이었다는 것 을 알 수 있다. 춘추전국시대에 저술된 지리서(地理書)인 '산해경(山海經)’에 군자의 나라(고조선)에 훈화초(薰華草) 즉 무궁화가 있는데 아침에 피고 저녁에 진다고 기록하고 있다. 군자국(君子國)이라고 표현한 것은, 당시에 이미 고조선이 국가 형태를 갖춘 나라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논란이 있는 ‘단기고사(檀奇古史)’에는 근수(槿樹)로, ‘환단고기(桓檀古記)’에는 환화(桓花) 또는 천지화(天指化)로 표현되어 있고, 천신께 제사지내는 제단(祭壇) 둘레에 심은 것으로 보아 신성한 꽃으로 여겨졌음을 알 수 있다.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한반도를 일컬어 근역(槿域)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무궁화의 고장이라는 뜻이며, 신라시대에는 중국에 국서(國書)를 보낼 때‘신라’라는 국명 대신에 근화향(槿花鄕) 즉 무궁화 마을이라고 썼다. 또한 고려시대 이후 조선시대에는 과거(過擧)의 문무과에 급제한 사람에게 대나무 대롱 끝에 무궁화를 달아 어사관의 양쪽에 길쭉하게 끼워주었고, 궁중 연회 때 신하들이 좋은 음식을 바치며 임금의 만수무강을 빌 때, 그 신하들의 사모(紗帽)에 진찬화(進饌花)라고 하여 무궁화를 꽂았다. 이는 무궁화가 국가를 위하여 일하는 공복(公僕)이라는 의미도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전통은 현대에까지 이어져 대통령의 좌석이나 군경(軍警)의 계급장에도 무궁화가 들어있었던 것이다.

 

② 오엽화와 협력하여 신의 나라에 들어가자

 

승리제단에서는 고조선 시대 사용한 와당(사진 상단중앙) 문양에 나오는 ‘오엽화’는 무궁화라고 밝힌 바 있다.

 

 

  

 

위 문양의 해석을 신사훈 박사(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히브리어 전문가)에게 의뢰한 바 <오엽화와 협력하여 신의 나라에 들어가자>는 뜻이다. 그럼 왜 하필 ‘오엽화’가 무궁화인가. 무궁화는 꽃잎과 꽃술, 그리고 씨방에 이르기까지 5숫자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무궁화는 영생을 상징하는 꽃이요 무궁화 노래가 동요를 비롯하여 가요에도 있다. 무궁화는 글자 그대로 영원히 피는 꽃이므로 ‘영생’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우리 민족이 영생의 세계를 얼마나 고대했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③ 무궁화를 어떻게 가져왔나

 

그럼 고조선 건국 초기의 사람들은 그 당시 무궁화를 볼 수 없는 대동강 유역에 언제 어디서 무궁화 꽃씨를 가져와서 심게 되었는지 그 기원을 한민족의 이동과정에서 찾아보자. 무궁화는 학명이 Hibiscus syriacus이다. 이는 무궁화가 시리아 지방에서 자생한 꽃이라는 근거가 된다. 학명에 시리아를 적은 것은 우연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우리 민족이 이스라엘 야곱의 12지파 중 동쪽으로 사라진 단지파라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승리제단 조희성 총재의 말씀과 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다. 단지파는 블레셋 민족과 싸우던 중 기원전 1216년경에 장수 삼손을 잃고, 지금의 레바논 남쪽 소라 성읍을 떠나 동북쪽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시리아, 이라크, 이란의 북서쪽을 경유하여 카스피 해(海) 서안의 바쿠(Baku; 아제르바이잔의 수도)에 도달하였고, 바다를 만난 우리 민족은 배를 만들어 바다를 건너갈 때, 바쿠에서 무궁화(Hibiscus syriacus) 씨를 채집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바쿠는 북위 40도선에 위치하고 있지만 한겨울 평균 기온이 영상 4도로 온화하여 무궁화가 꽃필 수 있는 자연환경이 된다. 무궁화의 재배조건은 최소한 영상 몇 도가 되어야 한다.

 

온대지방에서 여름에 피는 꽃나무는 거의 없는데, 무궁화는 7∼10월에 약 100일 동안 계속하여 화려한 꽃을 피운다. 한반도에서는 제주도에서 평안남도까지 자랄 수 있지만 평안북도와 함경남도 그리고 만주에서는 자라지 못한다. 이러한 무궁화의 한반도 분포도를 염두에 두면, 고조선의 수도로 알려진 아사달(阿斯達)은 대동강 유역의 토성리(土城里)로 비정(比定)할 수 있다. 이유인즉 토성리에는 고조선 시대의 수막새가 다수 출토되고 있는데, 특히 그 수막새에 무궁화와 관련된 문양을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카스피 바다를 건넌 한민족은 동쪽으로 이동하여 중국 북부 알타이 산맥 부근에 이르러 그곳에서 일시 우거(寓居)한다는 것이 2백여 년 동안 살게 되었고, 이후 알타이 산맥을 넘어 몽고를 거쳐 만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에 도착한 후 대동강변에 고조선을 세웠던 것이다. 이때가 지금으로부터 3천여 년 전이다.

 

 

Ⅲ. 결론

 

고조선 건국 초기에 신전(神殿)을 지을 때, 지붕을 기와로 장식하였다. 당시 일반적인 주거형태는 나무나 풀로 제작한 집이었으나 신전과 관공서 등은 기와를 사용하였다. 그런데 지붕의 기왓골 끝에 사용되었던 기와, 즉 수막새는 인류 최초의 와당 건축물 양식으로 창작되어, 고조선의 수도로 비정되는 토성리에서 사용된 것이다. 기원전 1000년경 고조선의 원시 수막새에는 고조선의 나라꽃이라고 할 수 있는 무궁화를 최대한 실제 모습과 연관하여 새겨놓았다. 그런데 기원전 사오백년경의 고조선 시대의 중엽에 이르자 근화문 수막새에 새기던 무궁화 문양은 실제 모습을 그대로 구현하던 초기 문양과 다르게 단순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근화문 수막새

 

  

[그림1]의 근화문 수막새에는 고조선 초기 와당으로 무궁화 씨앗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새겨져 있다.

 

 

  

[그림2]의 근화문 수막새 역시 고조선 초기 와당으로 무궁화의 암술머리 5개를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무궁화는 꽃잎과 꽃술, 씨방 등 모두 5개로 구성되어 있다.

 

 

  

[그림3]의 근화문 수막새에는 다섯 갈래로 갈라진 잎사귀와 다섯 장인 꽃잎을 복합적으로 표현함으로써 무궁화의특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고조선의 근화문 수막새의 두드러진 특징은 수막새 중심에 일원상(一圓相)의 동심원 문양을 한결같이 고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고조선 백성들의 선조들이 섬겼던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연관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수막새 중앙에 일원상의 동심원 문양을 둔 것은 태양을 상징하였다기보다 유일신 하나님과 신(神)의 나라를 표상한 것으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천제를 지내는 제사터를 둥글게 쌓은 환구단 또는 원구단(圓丘壇)도 고조선 수막새의 동심원 기원(起源)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전능자가 주도한 고조선 역사

와당문화는 고조선 건국 초기부터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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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당문화는 고조선 건국 초기부터 시작되었다

 

 

Ⅰ. 서론

 

승리제단에서는 한민족의 뿌리가 이스라엘 민족이며, 고조선은 단지파가 기원전 1000년경 세운 최초의 고대국가라는 것을 계속 밝혀왔다. 그 근거로 대동강변에서 발견된 와당에 기록된 문양(文樣)이 고대 히브리어이며, 우리 민족의 풍습과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 민족의 풍습이 수십 개 동일하다는 점을 제시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우리말 속에 들어있는 히브리어를 찾아 우리가 알타이어를 사용하기 전에 히브리어를 썼었다는 점을 밝혔다.

 

​이처럼 고고학적으로 증명이 되는 유물이 있고, 문화사적으로도 인정되는 내용, 또한 언어학적으로 히브리어에서 온 우리말이 있는데도 역사학계에서는 현재까지도 이러한 사실(史實)을 외면하고 있다.

 

한민족의 뿌리가 되는 단지파가 가나안(지금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소라 성읍을 떠나 한반도까지 와서 대동강 유역에 고조선을 건립하였다고 해서, 만주지역의 홍산문명(紅山文明, 요하문명)이 고조선의 문화권에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기원전 15세기에서 13세기까지 지중해 연안에서 이집트의 청동기 문화와 블레셋의 철기 문화를 경험한 단지파가 지도자 삼손 장수를 잃고 지금의 레바논 남쪽 소라 성읍을 떠나 한반도까지 왔기 때문에, 대동강 유역에서 세워진 고조선은 이미 청동기와 철기를 결합한 우수한 문화의 터전 위에 전통적으로 이어오던 제정일치 사회를 열었던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3200년 전에 지중해 연안의 팔레스타인에서 동방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던 단지파는 알타이산맥 근교(지금의 중국 서북부)에 와서 약 200년간 우거하고 그리고 몽고(蒙古)를 거처 만주를 지나 압록강을 건너 대동강 유역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여기서 한민족의 뿌리가 되는 단지파의 이동 과정에서 중국의 주나라를 세운 주역이 단민족의 비주류로 추정되며 또한 몽골초원의 유목민이 단지파의 사람들로 구성되었음을 확연히 알 수 있다. 그리고 만주는 자연히 몽고의 단지파 사람들과 한반도 고조선의 단지파 사람들과의 가교 역할을 할 수밖에 없으며, 몽골의 단민족과 한반도의 단민족이 융화되던 그곳에서 홍산문명을 꽃피울 수 있었다.

 

본고에서는 고조선의 실체와 관련하여 와당문화를 중점으로 다루되 기존에 알려진 광범위한 학설의 언급을 피하고 독자적으로 연구한 와당문화의 기원을 밝히는 과정에서 특히 고조선 시대의 수막새에 그려진 문양 속에서 고조선 사람들의 정통 사상을 엿볼 수 있었다는 점에 큰 의의를 둔다.

 

 

Ⅱ . 본론

 

1. 연화문(蓮花紋) 수막새가 아니라 근화문(槿花紋) 수막새다

 

현재 학계에서 고구려시대 와당으로 인정되고 있는 연화문(蓮花紋) 수막새 다수가 잘못 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것은 고조선시대 사용된 근화문(槿花紋) 수막새이다. 와당문화가 한사군 시대에 중국으로부터 들어왔다고 알고 있는 기존의 학설은, 국가라는 형태로써의 고조선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한반도 초기 국가가 삼국시대부터 시작된다는 일제 강점기 일본 사학가의 편년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결과이다. 이는 고조선의 건국초기부터 찬란한 청동기와 철기문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무지의 소치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편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2333년에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오늘날 국사 교과서에서는 기원전 2000년경 내지 기원전 1500년경에 한반도의 청동기 시대가 열렸다고 한다. 그렇다면 청동기 시대에 국가가 성립되었다고 하는 것이 통설이므로 고조선의 건국원년을 고고학적 증거에 입각하여 재정립할 필요성이 있다.

 

​20세기 말에 이웃 나라인 중국이 역사학자, 고고학자, 천문학자 등 각 분야 전문가 200명을 동원하여 ‘하상주 단대공정(斷代工程)’을 시작했을 때, 중국의 학자들은 조선시대에 편찬된 동국통감에 고조선의 건국원년이 기원전 2333년이라고 기록하고 있음을 알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중국 최초의 국가 하(夏)나라의 건국연도를 기원전 2070년으로 설정하여 고조선보다 263년이나 뒤늦게 건국한 것으로 하였다. 이것은 고조선의 설립시기를 기원전 2333년으로 보지 않겠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중국 학계의 한반도 고조선 국가에 대한 관점은 “고조선은 한무제 당시 설립된 한사군(기원전 108년) 이전, 고대한반도 북부국가의 명칭이며 단군조선 및 기자, 위만조선 3개 왕조를 포함하고 있다(바이두 백과 古朝鮮)”고 본다. 세계사적으로 하나의 국가가 천 년의 역사를 존속한 예가 거의 없는데 승리제단의 조희성 총재는 “신라가 천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던 것과 같이 한민족의 최초 국가인 고조선도 중국의 한무제에 의해 멸망당하기 전까지 천 년 동안 역사를 간직했다”고 하는데, 이를 근거로 고조선의 건국원년을 기원전 1000년 전후로 추정해본다.

 

청동기 문화가 번성한 이집트에서 벽돌과 기와를 굽던 한민족의 뿌리 단지파가 기원전 1446년에 출애굽하고 그리고 가나안이었던 팔레스타인에 입성하여 약 2백년간 블레셋 민족과 대치하다가 결국 분배받은 기업을 차지하지 못하고 동쪽으로 이주하여 기원전 1000년경 대동강변에 고조선을 설립하였다. 고조선 건국 초기의 구성원들은 이미 이집트의 청동기 문명에서 습득한 1,000℃ 이상의 고온에서 벽돌과 기와를 구워내는 가마를 만들 줄 알았다. 그래서 평양 근교에서 출토되는 고조선의 초기 와당은 처음부터 정교한 문양을 새긴 특징을 보이며 수천 년의 장구한 세월 동안에도 보존될 수 있었다.

 

 

지붕의 기왓골 끝에 사용되었던 기와를 '수막새'라고 하는데, 이 수막새는 기원전 1000년경 대동강변에서 도래인(渡來人) 한민족이 고조선을 세울 당시 최초로 창안한 와당(瓦當)이다. 기왓집의 와당 문화는 고조선에서 중국으로 전파되었기 때문에, 중국 최초의 와당이 서주 중기(西周中期, BC 9세기중엽~ BC 771) 시대의 협서(陜西) 주원(周原) 유적지에서 소규모로 발견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기와의 사용은 대체로 한(漢)문화가 유입된 낙랑시대부터라고 추정하는 것이 오늘날 사학계의 통설인데, 이는 평양 근교에서 출토되는 고대 와당에 새겨진 문양의 기원을 제대로 알지 못한 데서 기인한다고 판단할 수 있다.

 

기원후 372년 소수림왕 때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와당에 새겨진 문양을 연꽃무늬의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해서 '연화문(蓮花紋)수막새'라고 통칭하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 이전의 고조선 시대에 제작된 원시 수막새는 무궁화 꽃씨(또는 보리씨앗)와 무궁화 잎사귀 등 무궁화와 관련된 것을 새긴 문양을 하고 있다. 고조선의 근화문(槿花紋)수막새는 무궁화 무늬를 알지 못한 삼국시대 사람들에 의해서 연꽃무늬의 수막새로 와전(訛傳)되기도 하였으며, 백제와 신라의 중흥기에 연꽃 모양을 그대로 표현하는 와당이 비로소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앞으로 고조선 수막새에 무궁화 문양을 새기게 된 동기를 자세히 언급하고자 한다.

 

 

2. 근화문(槿花文) 수막새로 볼 수밖에 없는 몇 가지 이유

 

고조선 수막새에 무궁화 문양이 새겨져 있다고 밝히면서 그 동기를 자세히 언급하고자 한다. 그 동기를 밝히기 전에 먼저 무궁화가 우리 민족에게 어떤 의미가 있으며 언제 전래되었는지 등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① 우리 민족의 상징 무궁화

 

무궁화는 우리 민족의 상징이다. 언제부터 무궁화가 우리의 상징이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무궁화에 대하여 BC 8-3세기 에 기록한 문헌이 있는 것을 볼 때 무궁화는 최소한 고조선 시대에도 우리민족에게 유의미한 꽃이었다는 것 을 알 수 있다. 춘추전국시대에 저술된 지리서(地理書)인 '산해경(山海經)’에 군자의 나라(고조선)에 훈화초(薰華草) 즉 무궁화가 있는데 아침에 피고 저녁에 진다고 기록하고 있다. 군자국(君子國)이라고 표현한 것은, 당시에 이미 고조선이 국가 형태를 갖춘 나라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논란이 있는 ‘단기고사(檀奇古史)’에는 근수(槿樹)로, ‘환단고기(桓檀古記)’에는 환화(桓花) 또는 천지화(天指化)로 표현되어 있고, 천신께 제사지내는 제단(祭壇) 둘레에 심은 것으로 보아 신성한 꽃으로 여겨졌음을 알 수 있다.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한반도를 일컬어 근역(槿域)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무궁화의 고장이라는 뜻이며, 신라시대에는 중국에 국서(國書)를 보낼 때‘신라’라는 국명 대신에 근화향(槿花鄕) 즉 무궁화 마을이라고 썼다. 또한 고려시대 이후 조선시대에는 과거(過擧)의 문무과에 급제한 사람에게 대나무 대롱 끝에 무궁화를 달아 어사관의 양쪽에 길쭉하게 끼워주었고, 궁중 연회 때 신하들이 좋은 음식을 바치며 임금의 만수무강을 빌 때, 그 신하들의 사모(紗帽)에 진찬화(進饌花)라고 하여 무궁화를 꽂았다. 이는 무궁화가 국가를 위하여 일하는 공복(公僕)이라는 의미도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전통은 현대에까지 이어져 대통령의 좌석이나 군경(軍警)의 계급장에도 무궁화가 들어있었던 것이다.

 

② 오엽화와 협력하여 신의 나라에 들어가자

 

승리제단에서는 고조선 시대 사용한 와당(사진 상단중앙) 문양에 나오는 ‘오엽화’는 무궁화라고 밝힌 바 있다.

 

 

  

 

위 문양의 해석을 신사훈 박사(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히브리어 전문가)에게 의뢰한 바 <오엽화와 협력하여 신의 나라에 들어가자>는 뜻이다. 그럼 왜 하필 ‘오엽화’가 무궁화인가. 무궁화는 꽃잎과 꽃술, 그리고 씨방에 이르기까지 5숫자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무궁화는 영생을 상징하는 꽃이요 무궁화 노래가 동요를 비롯하여 가요에도 있다. 무궁화는 글자 그대로 영원히 피는 꽃이므로 ‘영생’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우리 민족이 영생의 세계를 얼마나 고대했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③ 무궁화를 어떻게 가져왔나

 

그럼 고조선 건국 초기의 사람들은 그 당시 무궁화를 볼 수 없는 대동강 유역에 언제 어디서 무궁화 꽃씨를 가져와서 심게 되었는지 그 기원을 한민족의 이동과정에서 찾아보자. 무궁화는 학명이 Hibiscus syriacus이다. 이는 무궁화가 시리아 지방에서 자생한 꽃이라는 근거가 된다. 학명에 시리아를 적은 것은 우연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우리 민족이 이스라엘 야곱의 12지파 중 동쪽으로 사라진 단지파라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승리제단 조희성 총재의 말씀과 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다. 단지파는 블레셋 민족과 싸우던 중 기원전 1216년경에 장수 삼손을 잃고, 지금의 레바논 남쪽 소라 성읍을 떠나 동북쪽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시리아, 이라크, 이란의 북서쪽을 경유하여 카스피 해(海) 서안의 바쿠(Baku; 아제르바이잔의 수도)에 도달하였고, 바다를 만난 우리 민족은 배를 만들어 바다를 건너갈 때, 바쿠에서 무궁화(Hibiscus syriacus) 씨를 채집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바쿠는 북위 40도선에 위치하고 있지만 한겨울 평균 기온이 영상 4도로 온화하여 무궁화가 꽃필 수 있는 자연환경이 된다. 무궁화의 재배조건은 최소한 영상 몇 도가 되어야 한다.

 

온대지방에서 여름에 피는 꽃나무는 거의 없는데, 무궁화는 7∼10월에 약 100일 동안 계속하여 화려한 꽃을 피운다. 한반도에서는 제주도에서 평안남도까지 자랄 수 있지만 평안북도와 함경남도 그리고 만주에서는 자라지 못한다. 이러한 무궁화의 한반도 분포도를 염두에 두면, 고조선의 수도로 알려진 아사달(阿斯達)은 대동강 유역의 토성리(土城里)로 비정(比定)할 수 있다. 이유인즉 토성리에는 고조선 시대의 수막새가 다수 출토되고 있는데, 특히 그 수막새에 무궁화와 관련된 문양을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카스피 바다를 건넌 한민족은 동쪽으로 이동하여 중국 북부 알타이 산맥 부근에 이르러 그곳에서 일시 우거(寓居)한다는 것이 2백여 년 동안 살게 되었고, 이후 알타이 산맥을 넘어 몽고를 거쳐 만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에 도착한 후 대동강변에 고조선을 세웠던 것이다. 이때가 지금으로부터 3천여 년 전이다.

 

 

Ⅲ. 결론

 

고조선 건국 초기에 신전(神殿)을 지을 때, 지붕을 기와로 장식하였다. 당시 일반적인 주거형태는 나무나 풀로 제작한 집이었으나 신전과 관공서 등은 기와를 사용하였다. 그런데 지붕의 기왓골 끝에 사용되었던 기와, 즉 수막새는 인류 최초의 와당 건축물 양식으로 창작되어, 고조선의 수도로 비정되는 토성리에서 사용된 것이다. 기원전 1000년경 고조선의 원시 수막새에는 고조선의 나라꽃이라고 할 수 있는 무궁화를 최대한 실제 모습과 연관하여 새겨놓았다. 그런데 기원전 사오백년경의 고조선 시대의 중엽에 이르자 근화문 수막새에 새기던 무궁화 문양은 실제 모습을 그대로 구현하던 초기 문양과 다르게 단순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근화문 수막새

 

  

[그림1]의 근화문 수막새에는 고조선 초기 와당으로 무궁화 씨앗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새겨져 있다.

 

 

  

[그림2]의 근화문 수막새 역시 고조선 초기 와당으로 무궁화의 암술머리 5개를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무궁화는 꽃잎과 꽃술, 씨방 등 모두 5개로 구성되어 있다.

 

 

  

[그림3]의 근화문 수막새에는 다섯 갈래로 갈라진 잎사귀와 다섯 장인 꽃잎을 복합적으로 표현함으로써 무궁화의특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고조선의 근화문 수막새의 두드러진 특징은 수막새 중심에 일원상(一圓相)의 동심원 문양을 한결같이 고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고조선 백성들의 선조들이 섬겼던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연관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수막새 중앙에 일원상의 동심원 문양을 둔 것은 태양을 상징하였다기보다 유일신 하나님과 신(神)의 나라를 표상한 것으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천제를 지내는 제사터를 둥글게 쌓은 환구단 또는 원구단(圓丘壇)도 고조선 수막새의 동심원 기원(起源)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전능자가 주도한 고조선 역사

와당문화는 고조선 건국 초기부터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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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이웃추가 | 2016. 6. 26.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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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당문화는 고조선 건국 초기부터 시작되었다

 

 

Ⅰ. 서론

 

승리제단에서는 한민족의 뿌리가 이스라엘 민족이며, 고조선은 단지파가 기원전 1000년경 세운 최초의 고대국가라는 것을 계속 밝혀왔다. 그 근거로 대동강변에서 발견된 와당에 기록된 문양(文樣)이 고대 히브리어이며, 우리 민족의 풍습과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 민족의 풍습이 수십 개 동일하다는 점을 제시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우리말 속에 들어있는 히브리어를 찾아 우리가 알타이어를 사용하기 전에 히브리어를 썼었다는 점을 밝혔다.

 

​이처럼 고고학적으로 증명이 되는 유물이 있고, 문화사적으로도 인정되는 내용, 또한 언어학적으로 히브리어에서 온 우리말이 있는데도 역사학계에서는 현재까지도 이러한 사실(史實)을 외면하고 있다.

 

한민족의 뿌리가 되는 단지파가 가나안(지금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소라 성읍을 떠나 한반도까지 와서 대동강 유역에 고조선을 건립하였다고 해서, 만주지역의 홍산문명(紅山文明, 요하문명)이 고조선의 문화권에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기원전 15세기에서 13세기까지 지중해 연안에서 이집트의 청동기 문화와 블레셋의 철기 문화를 경험한 단지파가 지도자 삼손 장수를 잃고 지금의 레바논 남쪽 소라 성읍을 떠나 한반도까지 왔기 때문에, 대동강 유역에서 세워진 고조선은 이미 청동기와 철기를 결합한 우수한 문화의 터전 위에 전통적으로 이어오던 제정일치 사회를 열었던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3200년 전에 지중해 연안의 팔레스타인에서 동방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던 단지파는 알타이산맥 근교(지금의 중국 서북부)에 와서 약 200년간 우거하고 그리고 몽고(蒙古)를 거처 만주를 지나 압록강을 건너 대동강 유역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여기서 한민족의 뿌리가 되는 단지파의 이동 과정에서 중국의 주나라를 세운 주역이 단민족의 비주류로 추정되며 또한 몽골초원의 유목민이 단지파의 사람들로 구성되었음을 확연히 알 수 있다. 그리고 만주는 자연히 몽고의 단지파 사람들과 한반도 고조선의 단지파 사람들과의 가교 역할을 할 수밖에 없으며, 몽골의 단민족과 한반도의 단민족이 융화되던 그곳에서 홍산문명을 꽃피울 수 있었다.

 

본고에서는 고조선의 실체와 관련하여 와당문화를 중점으로 다루되 기존에 알려진 광범위한 학설의 언급을 피하고 독자적으로 연구한 와당문화의 기원을 밝히는 과정에서 특히 고조선 시대의 수막새에 그려진 문양 속에서 고조선 사람들의 정통 사상을 엿볼 수 있었다는 점에 큰 의의를 둔다.

 

 

Ⅱ . 본론

 

1. 연화문(蓮花紋) 수막새가 아니라 근화문(槿花紋) 수막새다

 

현재 학계에서 고구려시대 와당으로 인정되고 있는 연화문(蓮花紋) 수막새 다수가 잘못 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것은 고조선시대 사용된 근화문(槿花紋) 수막새이다. 와당문화가 한사군 시대에 중국으로부터 들어왔다고 알고 있는 기존의 학설은, 국가라는 형태로써의 고조선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한반도 초기 국가가 삼국시대부터 시작된다는 일제 강점기 일본 사학가의 편년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결과이다. 이는 고조선의 건국초기부터 찬란한 청동기와 철기문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무지의 소치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편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2333년에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오늘날 국사 교과서에서는 기원전 2000년경 내지 기원전 1500년경에 한반도의 청동기 시대가 열렸다고 한다. 그렇다면 청동기 시대에 국가가 성립되었다고 하는 것이 통설이므로 고조선의 건국원년을 고고학적 증거에 입각하여 재정립할 필요성이 있다.

 

​20세기 말에 이웃 나라인 중국이 역사학자, 고고학자, 천문학자 등 각 분야 전문가 200명을 동원하여 ‘하상주 단대공정(斷代工程)’을 시작했을 때, 중국의 학자들은 조선시대에 편찬된 동국통감에 고조선의 건국원년이 기원전 2333년이라고 기록하고 있음을 알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중국 최초의 국가 하(夏)나라의 건국연도를 기원전 2070년으로 설정하여 고조선보다 263년이나 뒤늦게 건국한 것으로 하였다. 이것은 고조선의 설립시기를 기원전 2333년으로 보지 않겠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중국 학계의 한반도 고조선 국가에 대한 관점은 “고조선은 한무제 당시 설립된 한사군(기원전 108년) 이전, 고대한반도 북부국가의 명칭이며 단군조선 및 기자, 위만조선 3개 왕조를 포함하고 있다(바이두 백과 古朝鮮)”고 본다. 세계사적으로 하나의 국가가 천 년의 역사를 존속한 예가 거의 없는데 승리제단의 조희성 총재는 “신라가 천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던 것과 같이 한민족의 최초 국가인 고조선도 중국의 한무제에 의해 멸망당하기 전까지 천 년 동안 역사를 간직했다”고 하는데, 이를 근거로 고조선의 건국원년을 기원전 1000년 전후로 추정해본다.

 

청동기 문화가 번성한 이집트에서 벽돌과 기와를 굽던 한민족의 뿌리 단지파가 기원전 1446년에 출애굽하고 그리고 가나안이었던 팔레스타인에 입성하여 약 2백년간 블레셋 민족과 대치하다가 결국 분배받은 기업을 차지하지 못하고 동쪽으로 이주하여 기원전 1000년경 대동강변에 고조선을 설립하였다. 고조선 건국 초기의 구성원들은 이미 이집트의 청동기 문명에서 습득한 1,000℃ 이상의 고온에서 벽돌과 기와를 구워내는 가마를 만들 줄 알았다. 그래서 평양 근교에서 출토되는 고조선의 초기 와당은 처음부터 정교한 문양을 새긴 특징을 보이며 수천 년의 장구한 세월 동안에도 보존될 수 있었다.

 

 

지붕의 기왓골 끝에 사용되었던 기와를 '수막새'라고 하는데, 이 수막새는 기원전 1000년경 대동강변에서 도래인(渡來人) 한민족이 고조선을 세울 당시 최초로 창안한 와당(瓦當)이다. 기왓집의 와당 문화는 고조선에서 중국으로 전파되었기 때문에, 중국 최초의 와당이 서주 중기(西周中期, BC 9세기중엽~ BC 771) 시대의 협서(陜西) 주원(周原) 유적지에서 소규모로 발견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기와의 사용은 대체로 한(漢)문화가 유입된 낙랑시대부터라고 추정하는 것이 오늘날 사학계의 통설인데, 이는 평양 근교에서 출토되는 고대 와당에 새겨진 문양의 기원을 제대로 알지 못한 데서 기인한다고 판단할 수 있다.

 

기원후 372년 소수림왕 때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와당에 새겨진 문양을 연꽃무늬의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해서 '연화문(蓮花紋)수막새'라고 통칭하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 이전의 고조선 시대에 제작된 원시 수막새는 무궁화 꽃씨(또는 보리씨앗)와 무궁화 잎사귀 등 무궁화와 관련된 것을 새긴 문양을 하고 있다. 고조선의 근화문(槿花紋)수막새는 무궁화 무늬를 알지 못한 삼국시대 사람들에 의해서 연꽃무늬의 수막새로 와전(訛傳)되기도 하였으며, 백제와 신라의 중흥기에 연꽃 모양을 그대로 표현하는 와당이 비로소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앞으로 고조선 수막새에 무궁화 문양을 새기게 된 동기를 자세히 언급하고자 한다.

 

 

2. 근화문(槿花文) 수막새로 볼 수밖에 없는 몇 가지 이유

 

고조선 수막새에 무궁화 문양이 새겨져 있다고 밝히면서 그 동기를 자세히 언급하고자 한다. 그 동기를 밝히기 전에 먼저 무궁화가 우리 민족에게 어떤 의미가 있으며 언제 전래되었는지 등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① 우리 민족의 상징 무궁화

 

무궁화는 우리 민족의 상징이다. 언제부터 무궁화가 우리의 상징이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무궁화에 대하여 BC 8-3세기 에 기록한 문헌이 있는 것을 볼 때 무궁화는 최소한 고조선 시대에도 우리민족에게 유의미한 꽃이었다는 것 을 알 수 있다. 춘추전국시대에 저술된 지리서(地理書)인 '산해경(山海經)’에 군자의 나라(고조선)에 훈화초(薰華草) 즉 무궁화가 있는데 아침에 피고 저녁에 진다고 기록하고 있다. 군자국(君子國)이라고 표현한 것은, 당시에 이미 고조선이 국가 형태를 갖춘 나라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논란이 있는 ‘단기고사(檀奇古史)’에는 근수(槿樹)로, ‘환단고기(桓檀古記)’에는 환화(桓花) 또는 천지화(天指化)로 표현되어 있고, 천신께 제사지내는 제단(祭壇) 둘레에 심은 것으로 보아 신성한 꽃으로 여겨졌음을 알 수 있다.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한반도를 일컬어 근역(槿域)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무궁화의 고장이라는 뜻이며, 신라시대에는 중국에 국서(國書)를 보낼 때‘신라’라는 국명 대신에 근화향(槿花鄕) 즉 무궁화 마을이라고 썼다. 또한 고려시대 이후 조선시대에는 과거(過擧)의 문무과에 급제한 사람에게 대나무 대롱 끝에 무궁화를 달아 어사관의 양쪽에 길쭉하게 끼워주었고, 궁중 연회 때 신하들이 좋은 음식을 바치며 임금의 만수무강을 빌 때, 그 신하들의 사모(紗帽)에 진찬화(進饌花)라고 하여 무궁화를 꽂았다. 이는 무궁화가 국가를 위하여 일하는 공복(公僕)이라는 의미도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전통은 현대에까지 이어져 대통령의 좌석이나 군경(軍警)의 계급장에도 무궁화가 들어있었던 것이다.

 

② 오엽화와 협력하여 신의 나라에 들어가자

 

승리제단에서는 고조선 시대 사용한 와당(사진 상단중앙) 문양에 나오는 ‘오엽화’는 무궁화라고 밝힌 바 있다.

 

 

  

 

위 문양의 해석을 신사훈 박사(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히브리어 전문가)에게 의뢰한 바 <오엽화와 협력하여 신의 나라에 들어가자>는 뜻이다. 그럼 왜 하필 ‘오엽화’가 무궁화인가. 무궁화는 꽃잎과 꽃술, 그리고 씨방에 이르기까지 5숫자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무궁화는 영생을 상징하는 꽃이요 무궁화 노래가 동요를 비롯하여 가요에도 있다. 무궁화는 글자 그대로 영원히 피는 꽃이므로 ‘영생’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우리 민족이 영생의 세계를 얼마나 고대했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③ 무궁화를 어떻게 가져왔나

 

그럼 고조선 건국 초기의 사람들은 그 당시 무궁화를 볼 수 없는 대동강 유역에 언제 어디서 무궁화 꽃씨를 가져와서 심게 되었는지 그 기원을 한민족의 이동과정에서 찾아보자. 무궁화는 학명이 Hibiscus syriacus이다. 이는 무궁화가 시리아 지방에서 자생한 꽃이라는 근거가 된다. 학명에 시리아를 적은 것은 우연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우리 민족이 이스라엘 야곱의 12지파 중 동쪽으로 사라진 단지파라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승리제단 조희성 총재의 말씀과 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다. 단지파는 블레셋 민족과 싸우던 중 기원전 1216년경에 장수 삼손을 잃고, 지금의 레바논 남쪽 소라 성읍을 떠나 동북쪽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시리아, 이라크, 이란의 북서쪽을 경유하여 카스피 해(海) 서안의 바쿠(Baku; 아제르바이잔의 수도)에 도달하였고, 바다를 만난 우리 민족은 배를 만들어 바다를 건너갈 때, 바쿠에서 무궁화(Hibiscus syriacus) 씨를 채집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바쿠는 북위 40도선에 위치하고 있지만 한겨울 평균 기온이 영상 4도로 온화하여 무궁화가 꽃필 수 있는 자연환경이 된다. 무궁화의 재배조건은 최소한 영상 몇 도가 되어야 한다.

 

온대지방에서 여름에 피는 꽃나무는 거의 없는데, 무궁화는 7∼10월에 약 100일 동안 계속하여 화려한 꽃을 피운다. 한반도에서는 제주도에서 평안남도까지 자랄 수 있지만 평안북도와 함경남도 그리고 만주에서는 자라지 못한다. 이러한 무궁화의 한반도 분포도를 염두에 두면, 고조선의 수도로 알려진 아사달(阿斯達)은 대동강 유역의 토성리(土城里)로 비정(比定)할 수 있다. 이유인즉 토성리에는 고조선 시대의 수막새가 다수 출토되고 있는데, 특히 그 수막새에 무궁화와 관련된 문양을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카스피 바다를 건넌 한민족은 동쪽으로 이동하여 중국 북부 알타이 산맥 부근에 이르러 그곳에서 일시 우거(寓居)한다는 것이 2백여 년 동안 살게 되었고, 이후 알타이 산맥을 넘어 몽고를 거쳐 만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에 도착한 후 대동강변에 고조선을 세웠던 것이다. 이때가 지금으로부터 3천여 년 전이다.

 

 

Ⅲ. 결론

 

고조선 건국 초기에 신전(神殿)을 지을 때, 지붕을 기와로 장식하였다. 당시 일반적인 주거형태는 나무나 풀로 제작한 집이었으나 신전과 관공서 등은 기와를 사용하였다. 그런데 지붕의 기왓골 끝에 사용되었던 기와, 즉 수막새는 인류 최초의 와당 건축물 양식으로 창작되어, 고조선의 수도로 비정되는 토성리에서 사용된 것이다. 기원전 1000년경 고조선의 원시 수막새에는 고조선의 나라꽃이라고 할 수 있는 무궁화를 최대한 실제 모습과 연관하여 새겨놓았다. 그런데 기원전 사오백년경의 고조선 시대의 중엽에 이르자 근화문 수막새에 새기던 무궁화 문양은 실제 모습을 그대로 구현하던 초기 문양과 다르게 단순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근화문 수막새

 

  

[그림1]의 근화문 수막새에는 고조선 초기 와당으로 무궁화 씨앗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새겨져 있다.

 

 

  

[그림2]의 근화문 수막새 역시 고조선 초기 와당으로 무궁화의 암술머리 5개를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무궁화는 꽃잎과 꽃술, 씨방 등 모두 5개로 구성되어 있다.

 

 

  

[그림3]의 근화문 수막새에는 다섯 갈래로 갈라진 잎사귀와 다섯 장인 꽃잎을 복합적으로 표현함으로써 무궁화의특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고조선의 근화문 수막새의 두드러진 특징은 수막새 중심에 일원상(一圓相)의 동심원 문양을 한결같이 고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고조선 백성들의 선조들이 섬겼던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연관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수막새 중앙에 일원상의 동심원 문양을 둔 것은 태양을 상징하였다기보다 유일신 하나님과 신(神)의 나라를 표상한 것으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천제를 지내는 제사터를 둥글게 쌓은 환구단 또는 원구단(圓丘壇)도 고조선 수막새의 동심원 기원(起源)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고대 히브리어 와당.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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