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지(月支)가 우지 (禺知 또는 禺支)와 소리가 비슷해 월지(月支)가 춘추전국시대에 존재하였다는견해가 있다.

 

[오다니 나카오의 대월지에서 발췌]

 

일본 에가미 나미오, 마츠오 하사오, 구와하라 지츠조 역사가 있다. 그리스 로마의 프톨에마이오수가 서술한 카시(Casii)의 나라 이름은 Quasch 에서 유래하며 우지(禺支)와 동일한 이름으로 보았다. 기원자 200년경 그리스, 박트리아왕들이 세력을 뻗치려고 했던 동방의 프루노이(Phrynoi)와 세레스(Seres)가 나란히 기록되어 있는데 전자를 흉노, 후자를 비단민족을 뜨하므로 우지(禺支)라고 보는게 타당하다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우지도도(禺氏 騊駼)” [일주서(逸周書)], “우씨의 옥(禺氏之玉)”[관자(菅子)], “화씨의 벽(和氏之璧) 등에 나오는 우씨(禺氏)”화씨(和氏)” 와 음이 비슷한 월씨(月氏)가 춘추전국시대에 존재하였다. 고고학적인 발국 성과를 기초로 문화적인 면에서 기원자 4~3세기경 몽골 초원, 중국 서부에서 아무다리아 지역까지 퍼져 있었던 이란 계통인 사카 유목민 집단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月氏的“”字或作“”,破音字。《文解字》中“()”是形似而不同的两个部首,但常被混淆。中國大陸新版的《海》“月支”音改“越”。“月氏”在先秦史籍中早就见诸记载,即《逸周》和《管子》中所记载的“禺氏禺、月是同一来语音的不同译写,不应当读为“肉”。中華民國育部國語辭典中,月氏亦讀「ㄩㄝˋ 」(Yuèzhī)。但兼收「ㄖㄡˋ 」(Ròuzhī)、「ㄖㄨˋ 」(Rùzhī)兩種讀音。(위키백과, 基百科)

 

중국 위키백과를 보면, 월지(月氏)의 ‘月’자 혹 독으로 쓰는 ‘肉’은 破音字(한 글자가 두가지 이상으로 발음이 되는 글자)이다. 설문해자에서 ‘月’은 ‘肉()’과 같다고 한다. 흉노를 훈육이라고도 하고 수유, 슝노 등등 여러 유사한 이칭이 있는 것처럼 유----월 등의 음은 모두 흉노와 관련된 스키타이에 대한 명칭에서 나오는 것이다. ‘중국대륙신판의 《海》에 월지는 독음을 월()로 고쳤다’고 한다.

월지를 이르는 禺知、禺支 라고도 기록된, 외래어를 음으로 기록한 것도 북방흉노를 칭하는 말이라고 하는 누지(Nuzi)와 같은 소리이며, 월지 우지 누지 등이 큰 범주에서 통칭적으로 모두 흉노를 이르는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월지(月氏)족이 인도-유럽어족이라고 보고있고 고문헌의 토하리인(Tocharians)과 같거나 긴밀힌 연결된 종족으로 믿고 있다. 중앙 아시아 연구가인 르네 그루쎄(René Grousset)는 당시 중국 문헌과 서방 측의 자료를 종합해보면 월지는 토하리인과 함께 인도-스키타이의 일종이라고 주장한다. 한 예로 당시 그리스의 역사가 프톨레미는 월지의 영역을 토가라(Thogara)로 기록해 두었다. 또한 그리스 지리학자 스트라본은 박트리아의 침략 민족을 토하로이(Tokharoi)라고 부르고 있다. 이 때는 월지가 대하를 정복하고 대월지를 세운 때와 일치하고 있다. 한편 르네 그루쎄에 따르면 감숙성에 남아있던 소월지는 이우 쿠차와 연관이 있다. 이들은 당나라에 정복될 때까지 실크로드 지역 최동부의 인도유럽어족 국가로 남아 있었다.

고대 중앙 아시아 역사 연구가 아데시 카타리야 (Adesh Katariya)가 쓴 월지족 (소제: 구자라 Gujars)의 기원의 내용에서 일부 발췌하여 번역한 내용입니다. 전체 내용은 아래 사이트에서 볼 수 있습니다.  http://www.slideshare.net/adesh1986/origin-of-yuezhi-tribe

 

마누법전(Manu Smriti)에 따르면 토처(Tocher, 월지 月支 Yuezhi) 는 아리안 부족이고 왕국은 인도의 북서쪽에 위치해 있고 달 근원 (찬드라 밴시 Chandra Vanshi) 아리안이다중국에서는 토하라인(Tocharian)은 월지로 언급되었고 달 종족  ( Yue = Moon ), = Family 종족)을 의미한다. 토하라어가 산스크리트어(Sankrit)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토하라인이 아리아 기원 민족이이었다는 것이다. 원 토하라인(Tocharian) 또는 툭하라인(Tukhara) 은 이란계 박트리아인이었고 그것은 이란은 고대시대에 인도의 일부분이었기 때문에 이란 박테리아 쪽으로 이주한 아리아인의 아리아 언어였다.

 

스키타이인은 월지(月支) 영역과 이웃에 있었다. 스키타이인과 토하라인은 거의 친근한데 그들은 인도유럽 공통 유산을 공유하고 급격하게 그들의 문화를 변화할 수 있는 고도의 발전된 문명으로부터 오랫동안 분리되어 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더 길게 오랜 인도유럽 관습과 전통을 보존할 수 있었다.

 스키타이는 후에 토하라인보다 늦게 타림 분지에 정착했을 것이지만 중국 기록은 스키타이 침입을 기록하지 않았다. 이미 이 지역에 호탄에 관한 첫 번째 중국 기록이 쓰여졌던 기원전 200 전에 이주했기 때문이다.

 

더글라스 아담스 (Douglas Q. Adams)에 따르면, 토하라인은 국경주민의 의미로 그들 자신을 아니(Akni)로 불렀다. 역사가 버나드 서전트 (Bernard Sergent)는 아시쿠치(Arsi-Kuci)로 불렀고 최근 악느쿠치 (Agni-Kuci)로 바꾸었다.

 

모합하라타 서사에 투차(Tuchar)로 불려진 토처(tocher)는 고대 달 왕조의 후손이었다. 흰두 신화에서 달 왕조는 (Soma-vansha, Chandra-vansha 그리고 Ailas 로 알려진)는 크샤트리아 바르나 (Kshatriya Varna) 또는 전투 계급의 4개 주요 가게중의 하나였다. 이 전설적인 왕조는 달 (소마 Soma 또는 찬드라 Chandra)로 부터 내려왔고 반면 다른 주요 가게인 태양 왕조(Surya-vanshi)는 태양 (Surya)로 부터 내려왔다. 일라(Ila)와 부다의 아들, 달신 소마의 불법적인 아이, 푸루라바스(Pururava)가 발견한 달 왕조의 전설적인 수도는 프라티스타나(Pratisthan)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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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트리아는 아리안족의 고향이었으며, 그들은 BC2500-2000년에 남서쪽으로는 이란에 들어갔고, 인도 북서부에 들어갔다. 그 후 중앙아시아의 페르시아 제국 (550?330 BC)의 북부 주가 되었다. 바로 이 지역은 산이 많은 나라의 비옥한 토지가 투란 사막으로 둘러쌓여 있으며, 조로아스터교의 예언자 Zarathushtra가 태어나고 첫번째 신봉자들을 얻었던 지역으로 알려졌다. 아베스탄 언어는 조로아스터교 성전의 고대 언어로, 산스크리트어와 관련있는 고() 이란어였다. 오늘날 몇몇 학자들은 아베스탄 언어는 산스크리트어의 서부 방언이었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두 언어가 아리안족의 가장 오래된 인도-이란어였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아베스탄(Avestan) 언어는 서양식으로 발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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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스크리트어로 찬드라(Candra)는 힌두신화에서 달의 신이다.

चन्द्र, Chandra, 또는 Candra. 산스크리트어 '빛나다'는 뜻이다.

인도 신화에 나오는 과 구요(九曜. 인도천문학에서 취급하는 아홉 개의 천체). 라자니파티(밤의 왕)이라고도 한다. 베다 시대에 달을 관장하는 신은 소마였으나 힌두교 시대가 되면서 달의 신격 소마는 찬드라와 동일시되었다. 간다라가 달의 신이라는 말은 카니쉬카왕이 세운 간다라제국이 달의 신이 다스리는 나라라는 말과 동일한 것이다.

 

이는 이전의 마우리아 찬드라 굽타나 아육왕의 나라와 구별될 이유가 없는 동일한 나라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단지 그 지배세력의 중추가 쿠샨이라 불리는 계층이었다는 것인데, 사실 귀상(贵霜)이나 쿠시라는 말도 월지족과는 분리될 수 없는 ‘달’의 개념이다.

 

샤히는 월지족, 무로다는 샤카족 추장의 호칭이다.

 

소발률 정복을 위해 고선지장군과 휘하의 당나라 군대가 넘었을 탐구령(Darkot Pass).사진= 장영주 KBS PD  

唐나라 開元 15년(727년) 음력 11월. 마침내 慧超 스님(704~787년)은 당나라의 수도 長安에 당도한다. 약 4년간 천축(인도)과 서역을 巡遊한 뒤다. 20대 초반의 젊은 승려가 교통과 숙식이 용이치 않았을 낯선 세상 험한 곳으로 장기간 장거리 여행을 감행한 그 용기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여행은 즐거움과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다. 집 떠나면 개고생이란 말이 있다. 여행은 인내를 요구한다. 혜초 스님이 겪어야 했던 갖가지 고생이 대략이나마 그려진다. 그가 귀로에 세계의 지붕 파미르 고원을 넘었다. 고산병으로 얼굴이 호빵처럼 붓고 울렁증이나 두통으로 당장에라도 쓰러지고 싶었을 것이다.

서역과의 교류에 대한 중국 사신의 말을 기록한 『宋書』 「夷蠻傳」 第57 豫州蠻條는 이런 이야기를 담고 있다. “漢代 서역의 언어를 번역할 수 있어 먼 곳까지 통할 수 있게 되니, 길이 난 곳이 수만 리가 됐다. 頭痛之山을 넘는데, 밧줄을 타고 건너가야만 하는 험난한 곳을 넘고, 죽음의 길을 살아서 지나가려니, 몸은 앞으로 나가는데 魂은 돌아가려 할 지경이었다.”

파미르를 넘는 일이 얼마나 험난한 일인지, 목숨을 건 도전인지를 보여주는 기사다. 두통산이란 표현은 웃음을 자아낸다. 필경 고산증 증세로 나타나는 두통 때문에 산 이름을 그렇게 부른 것 같다. 그러나 해발 3천 미터만 되면 어느 곳에서고 두통이 생기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頭痛之山이 특정한 山이름인지는 모르겠다. 『通典』 卷193 「邊防」 渴槃陀條와 『漢書』 「西域傳」에 따르면, 두통산이 지금의 신장 타시쿠르간(Tashkurgan) 타지크 자치현의 갈반타 서남쪽에 있고, 고대 인도의 계빈(Kapisa)으로 통하는 험준한 산으로, 大頭痛山과 小頭痛山으로 나뉘어 있다고 한다.
 

   ▲ 수그드 강 남쪽에 자리한 소그디아나의 도시들. Rabinjan(혹은 Arbinjan) 근처에 월지의 Kush clan(玉氏族)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Kushaniya가 있다.사진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Rabinjan  

혜초 스님은 토화라에 있던 겨울 어느 날 문득 눈을 만나 난감한 심정을 오언시로 표현했다. “차디찬 눈보라 얼음까지 섞여 몰아치고/ …… / 우물가는 도사린 뱀처럼 얼어붙었다/ 횃불 벗 삼아 오르며 노래 불러보건만/ 저 파미르 고원 어찌 넘을 것인가.” 蔥嶺 즉 파미르를 넘기 전이다. 파미르고원이 어디든가. 세계의 지붕이라 불리는 산악고원지대다. 이곳에 과거 護蜜國이 있었다. 호밀이란 나라 이름은 胡麥 또는 黑麥이라고도 하는 호밀(rye)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왕의 居城은 색가심성(塞迦審城). 여기가 심상치 않은 곳이다.

『신당서』 「서역전」이 전하는 호밀국 이야기를 먼저 읽어본다.

“護蜜은 달마실철제(達摩悉鐵帝) 혹은 확간(???侃)이라고도 부른다. 북위 때에 발화(鉢和)라고 불렀던 것인데 역시 吐火羅의 고지이다. 왕의 거처는 색가심성(塞迦審城)인데 북쪽으로  湖河(아무다리야 강)에 임해 있다. 사람들은 푸른 눈동자를 하고 있다. 현경 연간에 그 땅을 鳥飛州로 삼았고, 국왕 사발라힐리발(沙鉢羅???利發)을 자사로 임명했다. 그 곳은 四???이 토화라로 들어가는 길의 입구에 해당하며, 예전에는 토번에 복속했. 개원 8년(720) 그 왕인 나려이타골돌록다비륵막하달마살이(羅旅伊陀骨???祿多毗勒莫賀達摩薩爾)를 왕으로 책봉했다.”

놀랍지 않은가. 여기 사람들이 푸른 눈동자를 갖고 있다니. 기억을 더듬어보자. 돌궐과 오손인의 신체적 특징이 푸른 눈에 붉은 머리라는 사실을 인문학기행 초반부에 얘기했다. 그렇다면 호밀국의 주민은 돌궐, 오손과 같은 종족일 수도 있다. 왕의 이름도 흥미롭다. 사발라힐리발. 沙鉢羅는 어떤 음, 어떤 의미를 지닌 말일까. 돌궐제국(552~744년)의 5대 카간 阿史那 攝圖(ashina shetu or setu, ‘white dragon’이란 뜻)의 칭호도 沙鉢略(또는 始波羅)이었다. 돌궐비문에 근거해 이 이름은 이시바라(Ishbara)라고 읽는다. 돌궐제국의 창건자 伊利可汗(Illiq Qaghan) 阿史那 土門의 동생으로 西面可汗 즉 서돌궐의 엽호(yabghu)였던 阿史那 室點密(재위: 552~575년)은 Istemi의 음차어다. 어쨌든 왕의 칭호로 Ishbara를 같이 쓰는 이상, 그렇다면 호밀국(왕)은 돌궐과 같은 언어와 칭호를 사용하는 족속이라고 말해도 좋겠다.

開元 8년(720년) 唐 조정에 의해 왕으로 책봉됐다는 당시 호밀왕의 官稱 ‘나려이타골돌록다비륵막하달마살이’도 그가 돌궐과 동계임을 의심케 하기에 충분하다. 이 긴 칭호에 포함된 한자어 骨???祿, 莫賀는 돌궐인명에서 흔히 보는 어휘다. 위구르 제국 초대 가한 칭호의 한자어 표기도 골돌록으로 시작한다. 골돌록비가궐가한. 이는 고대 투르크어 Qutlugh bilge k¨ul qaghan의 음사로 ‘고귀하며 현명하고 강한 군주’라는 의미 깊은 칭호다. 그 왕의 거처가 색가심성이라 했다. 이 또한 파미르에서 발원하는 아무다리야강, 정확히는 지류인 판지강(the Panji)의 南岸에 있는 이시카심(Iskashim)城의 음차자다. Iskashim을 한자어로 전사하는 과정에서도 어두 모음 /i/가 탈락됐다.

파미르고원 와칸 계곡(중국 사서의 호밀)에 생활 터전을 가지고 있는 주민들은 스스로를 이시코슈미(ishkoshum´l) 내지  이시코시미(ishkoshim´l)라고 부른다. 인도-아리안 자료에 근거할 때 첫음절 ish-는 Saka(索種)를 나타내며, koshum은 ‘land, earth’의 의미를 지닌다. 이 둘이 합쳐져 이시카심이 탄생했다. 이시카심은 ‘색종(사카족)의 땅’인 것이다. 월지에 밀려 어디론가 사라진 색종이 세계의 지붕 파미르, 판지강이 흐르는 와칸 계곡에 터전을 잡고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 고대 색종의 후예일 수도 있는 이시카미 마을의 어린이들.  

아프가니스탄 북부 바닥샨주(the Province of Badakhshan) 판지강 상류 좌안에 사는 1천500에서 2천 명 정도의 이시카시미들이 예나 지금이나 무심히 흐르는 판지강 건너 타지키스탄 고르노-바닥샨 자치구(the Gorno-Badakhshan Autonomous Region) 이시카시미구 뉴트(Nyut) 키시라크(qishlaq: ‘촌락’)의 동족들을 바라보며 생활하고 있다. 역사의 비극이다.

그렇더라도 자연경관은 비경 중의 비경이다. 판지강 북쪽은 와칸산맥, 남쪽은 그 유명한 설산 힌두쿠시. 『魏書』 「서역전」과 『北史』 「서역전」 第85 鉢和國條는 힌두쿠시의 장관을 이렇게 말한다. “발화국은 갈반타의 서쪽에 있다. 그 풍토 역시 추우며, 사람과 가축이 함께 사는데, 땅을 파서 그곳에 거주한다. 또한 큰 설산이 있는데 바라보면 마치 은색 봉우리와 같다. 그 주민들은 오로지 보리떡만 먹고 밀로 빚은 술을 마시며, 모전으로 만든 외투를 입는다.”

여기서 말하는 발화국은 와칸의 한자어 음차어로 바로 호밀국이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의아하겠지만,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설명 하려 한다. 위의 글에서 ‘바라보면 마치 은색 봉우리 같은 대 설산’이라고 한 산이 다름 아닌 힌두쿠시다. 이번 글의 표제 일부분을 ‘인도의 玉’ 힌두쿠시 산맥이라고 한 건 Hindukush에서의 kush가 다름 아닌 ‘玉’을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Kush라는 어휘를 재삼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토템으로서 玉을 부족명으로 삼은 월지의 갈래가 본거지를 떠나 서역으로 이주해 간 경로나 흔적을 찾는데, 이 kush라는 어휘가 큰 역할을 한다.

천산일대를 거점으로 유목생활을 하던 색종은 월지에 밀려 어디로 갔을까. 그것이 한동안 궁금했었다. 그리고 그들의 기원이나 언어 풍습 등은 어떠했을지도 무척 알고 싶었다. 일단 호밀국 혹은 발화라국으로 알려진 파미르 산중의 나라가 색종의 왕국이었음을 알았고, 그들의 신체적 특징과 언어에 대해서도 다소간의 정보를 얻었다. 잠정적인 결론이지만 색종은 돌궐과 동종이라고 조심스럽게 말할 수 있다.

『신당서』, 『구당서』의 호밀국은 休密(『후한서』), 胡密丹(『梁書』), 胡蔑(『一切徑音義』) 등으로도 표기된다. 『대당서역기』는 호밀을 拘迷陀라 적고 있다. 이는 프톨레미(Ptolemy, AD 83년경~168년경.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 천문학자, 지리학자, 점성학자인 클라우디오스 프톨레마이오스를 말한다)가 말하는 Komedai와 아랍 문헌 자료에 보이는 Kumed와 같은 것이다.

“실크로드는 로마령 시리아의 수도인 안티오크를 출발해 …… 메르브(Merv)를 거쳐서, 그리고 이 시기 인도-스키타이 사람들 즉 중국에서는 월지 또는 인도에서는 토화라인으로 기록된 사람들이 지배하고 있었던 박트라(Bactra, 大夏)로 이어졌다. 이곳에서 실크로드는 파미르 고원으로 들어갔다. 프톨레미에 의하면 이 산맥의 계곡 즉 ‘코메다이(Komedai) 언덕’의 아랫자락에는 돌탑이 있고, 그 부근에서 ‘비단’을 운바하는 중국(seric) 상인들과 레반트 상인들이 물품을 교환했다”.(르네 그루쎄,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90쪽)
결국 護密 등의 다양한 이표기는 구미타의 拘迷와 같은 음 즉 /kume/을 다른 한자로 전사한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이 무슨 뜻을 지니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호밀의 또 다른 명칭인 鉢和나 확간(둘 다 Wakhan의 음차)의 의미를 검토하면 혹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위서』 「서역전」 伽倍國條는 흥미로운 내용을 전한다. 가배국이 옛 휴밀흡후이고 도읍은 和墨城이라는 것이다. 사차의 서쪽에 있고 代와는 1만3천리 떨어져 있으며, 그곳 사람들은 산 계곡 사이에 거주한다고도 했다. 가배국이 옛 휴밀흡후라는 것은 과거 휴밀흡후였던 곳이 위서가 기록될 당시에는 가배국이라 불렸다는 말로 이해된다. 도대체 흡후(yabghu)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月氏의 수령을 나타내는 것으로 알려진 이 말은 원래 토하라어에서 ‘땅, 지방’을 뜻하는 ‘yapoy 혹은 ype’라는 말과 연관이 있다고 하는데, 나는 아직 이에 대해 자신이 없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마침내 총령을 넘어간 월지의 또 다른 행적을 찾을 수 있는 단초가 되는 귀중한 문헌기록을 발견한 것이다. 후일 쿠샨왕조를 세운 大夏(Bactria)의 오흡후 중의 하나인 귀상흡후는 옛 휴밀흡후였던 가배국의 서쪽 560리, 代와는 1만3천560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겸돈국이라고 『위서』 「서역전」 겸돈국條는 기록하고 있다. “겸돈국은 옛 귀상흡후로 도읍은 호조성이다. 절설막손의 서쪽에 있고 대와는 1만3천560리 떨어져 있다. 산 계곡 사이에 거주한다.”

그런데 『위서』 「서역전」보다 훨씬 오래전에 쓰여진 『前漢書』 「서역전」 第66 大宛國條에 대완국의 도읍이 貴山城이며, 서남으로 690리 떨어진 곳에 대월지국이 있고, 토지, 풍토, 물산, 민속이 대월지, 안식과 동일하다고 전한다. 여기서 말하는 貴山은 月氏가 복속시킨 오흡후 가운데 하나인 貴霜과 어원적으로 동일하며 둘 다 Kushan 내지 Kushaniya를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추정은 월지의 한 갈래인 Kush족이 이동 중에 흩어져 여기저기 자리를 잡으며 자신들의 흔적을 지명 등으로 남겼다는 전제를 받아들일 때 의미가 있다. 참고로 현재 우즈베키스탄에는 사마르칸드 서북쪽에 과거 소그드인의 도시라고 알려진 Kushaniya가 있다.

가배국(휴밀흡후)과 겸돈국(귀상흡후)의 사이에는 절설막손(雙靡흡후)이 있었다. 가배국에서 서쪽으로 500리 떨어진 곳이다. 쌍미흡후의 위치와 관련해서 『신당서』 「서역전」은 호밀의 북쪽은 識匿(Shighnan), 남쪽에는 商彌가 있다고 했다. 덧붙여 말하기를, “상미는 오흡후의 하나로 그 지방의 크기는 2천 리가 넘는다. 포도가 많이 나고, 자황도 나오는데 돌을 굴착해서 그것을 얻는다. 동북으로 산을 넘어 700리를 가면 波謎羅川(파미르강)에 이른다. 동서가 천리이고 남북이 백리이며, 봄과 여름에 비와 눈이 내린다”고 했다. 

과거 귀상흡후였던 겸돈국에서 서쪽으로 100리 떨어진 지점에 옛적에 힐돈흡후였던 불적사국이 자리 잡고 있었다. 代와는 1만3천660리 떨어진 곳이며, 이 나라 사람들 역시 여타 나라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산 계곡 사이에 거주했다. 도읍은 薄茅城이다. 弗敵沙는 이 일대의 지명인 Badakhshan의 音譯이 아닐까 싶다.

불적사국에서 남쪽으로 100리를 가면 閻浮謁國이 나오는데 여기는 과거 高附흡후이고 도읍은 高附城이다. 代와는 1만3천760리 떨어져 있으며, 여기 주민들도 역시 산 계곡 사이에 거주한다. 『後漢書』는 다섯 번째 흡후로 고부가 아니라 都密을 들고 있다. 그 진위야 어찌됐든 大夏를 구성하던 오흡후의 하나인 옛 귀상흡후 겸돈국이 나머지 4개 흡후를 규합해 쿠샨왕조를 수립하게 된다. 중국사서가 계속해서 쿠샨제국을 월지라 부른 이유를 알만하다. 귀상흡후는 물론 파미르 산중의 다른 흡후들이 모두 월지에 속하는 씨족 내지 부족이었던 것이다. 귀상이 玉을 뜻하는 월지어 kush이듯, 나머지 네 흡후의 명칭도 월지어를 한자로 전사한 것이며 나름대로의 상서로운 의미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을 다 아는 것은 현재로선 역부족이다.

 연호택 가톨릭관동대·영어학

연호택 가톨릭관동대·영어학 editor@kyosu.net


부여의 출자에 대한 <삼국지 한전>분석 (5부)
 
심제 이진우 박사 기사입력  2015/01/20 [17:40]
Ⅳ.부여의 출자(出自)에 대한 삼국지 韓傳 분석

   부여(夫餘)와 관련된 언어학적 관련성 즉 파생 국가명과 지명 등을 이루는 한국어가 고대 어떤 언어로 부터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한 연관성은 이미 2장에서 검토하였고 그 결과 한국고어는 전반적으로 터키어의 영향이 컸음을 설명하였다. 부여라는 국가명은 앞부분 음가인 부리(不而,夫里) 혹은 비리(沸利)등의 발음군과 뒷부분 음가인 령지(令支), 이지(離支)라는 발음군의 연결체임을 알 수 있는데, 이를 합하면 불리지(弗離支) 혹은 비리지(不離支)등으로 읽을 수 있다.

이것 또한 백제의 비류(沸流)나 가야(伽倻)등이 부여의 어원에서 파생된 언어임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언어 분석 결과와 사서의 기록에 의하여 기원전 6C이전에 이미 동북아시아에 진출한 터키계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에 관한 강길운의 한국고어 연구를 기초로 고대음가를 제공한 집단에 대한 실마리를  『삼국지』한전에서 발견할 수 있다.

『三國志』韓傳 - 韓在帶方之南,東西以海為限,南與倭接,方可四千里.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韓.辰韓者,古之辰國也.馬韓在西.其民土著,種植,知蠶桑,作緜布.各有長帥,大者自名為臣智,其次為邑借,散在山海間,無城郭.(臣雲新國등.. 중략)凡五十餘國. 大國萬餘家,小國數千家,總十餘萬戶.辰王治月支國.`”臣智或加優呼臣雲遣支報安邪踧支濆臣離兒不例拘邪秦支廉之號”.其官有魏率善,邑君,歸義侯,中郎將,都尉,伯長.

이는 언어적으로 부여(夫餘)와 진(辰)은 터키계언어를 이해하였다는 사실에 기반 하며 그러한 사실을 추정할 수 있는 내용이 다음과 같음을 볼 수 있다.
“臣智或加優呼臣雲遣支報安邪踧支濆臣離兒不例拘邪秦支廉之號”

상기 문장에 대한 선행 연구자들의 해석으로“신지에게는 간혹 우대하는 신운견지보(臣雲遣支報) 안야축지(安邪踧支) 분신리아불례(濆臣離兒不例) 구아진지렴(拘邪秦支廉之號)의 칭호를 더하기도 한다”라고 하였고, 이 구절의 해석은 대체로 이병도의 설을 따른다 하였는데 부여 출자에 대한 인식부족과 문장의 난해성으로 인하여 아직도 더 연구가 필요하다고 한바, 최근의 해석 시도로서 정형진은 문장의 띄어 읽기 변화를 통해“신운국의 견지보, 안야국의 축지, 분신국의 리아, 부례구야의 진지렴“으로 해석하고, 특히 부례구야(不例拘邪)를 프리기아로 해석하여 신채호가 주장한 불리지국(弗離支國), 불령지(弗令支)에 대응한다고 보았다.
 
   본 연구자는 선행연구에 대해 보완된 의견을 제시하고자 한다. 『삼국지』한전 내용에서 “진한(辰韓)은 고진국(古辰國)이라 하였고, 옛 진왕은 월지국(月支國)을 다스린다”는 내용에 대해 기존 연구자들은 『삼국지』에서 표기된 월지국과 달리 『위략』과 『후한서』의 내용을 들어 월지국을 목지국(目支國)의 오기로 주장하는데 대해서 연구자는 동의하기가 힘들다. 여기서 월지국은 고진국(古辰國)과 정치적으로 연결된 국가로 추정되며, 시기적으로 진국(辰國)이라는 존재를 기술한 『삼국지』  저술시기보다 수세기 전인 기원전 3세기 이전에 동음(同音)의 흉노풍속을 가진 강력했던 국가 월지(月氏)가 존재했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목(目)은 월(月)의 오기로 보아 연구자는 이 월지국을 다스리는 왕을 고진왕(古辰王)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본문에 출현한 직급 신지(臣智)는 삼한의 수장을 일컫는 뜻으로 상기 문장에 대한 새로운 해석 시도로 연구자는 “臣智或加優呼, 臣雲遣支, 報安邪踧支, 濆臣離兒,不例拘邪秦支廉,之號”로 읽으려 하며, 이를 해석하면 “신지 혹은 가우라고 부르는데, 신운국의 견지, 보안야국의 축지, 분신국의 리아, 부례구야의 진지렴”으로 해석된다. 진국(辰國)의 언어가 부여를 비롯한 고대 터키계어 음가와 관련 있으므로 『삼국지』가 쓰여진 3세기 이전의 국가이름과 지역을 고찰하면 『한전』에 기록된 신운국, 보안야국, 분신국, 부례구야국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문장에 열거된 신지(臣智) 혹은 가우라 부르는 나라와 수장 이름의 음가를 알기 위해 기원전·후로 터키어와 관련된 어원을 사용했을 나라들의 명칭을 고대 아나톨리아에 위치했던 프리기아(Phrygia)가 부례구야(不例拘邪),불리지(弗離支)로, 폰투스(Pontus)가 보안야(報安邪)로, 카파도키아(Cappadocia)가 가독(加毒)등으로 대응된다고 볼 수 있다.

한국어 기원추적에 대한 강길운의 주장을 기반으로 할 때, 위만조선의 대신들이 백성들을 이끌고 망명한 진왕(辰王)이 이끄는 고진국(古辰國)이 터키계어를 사용했고 또한 월지국(月支國)을 다스리는 기록은 시기상으로 기원전 3세기경에 감숙성과 영하성에 존재하다 기원전 2세기말 흉노에게 패한 후 박트리아 지방으로 서천(西遷)한 월지(月氏國)로 대응될 수 있다고 본다. 이와 관련하여 『사기』흉노열전에 의하면 월지는 기원전174년 흉노의 노상선우에 의해서 궤멸적 타격을 입고 서쪽으로 이동하며, 그 지역에 존재하던 대하국(大夏,박트리아)을 공격하여 속국으로 삼았다.

또한 『사기』대완열전에 따르면 월지 또한 흉노와 습속이 같다고 하였으며, 고진국(古辰國) 또한 지역적으로 월지가 있었던 지역과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고 가정하면, 이미 소아시아 지역에서 기원전 7C초까지 존재하다 먼저 동진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철기문화와 흉노습속을 가진 부례구야(不例拘邪, Phrygia)의 영향 하에 있다가 이후 동진(東進)하여 진한(辰韓)이란 이름으로 낙랑지(樂浪地)에 도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1세기 그리스 지리학자 스트라본은 『지리지』에서 그리스, 박트리아 왕들의 세력 반대편에 Phrynoi(흉노)와 Seres(비단, 중국)이 있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부례구야(不例拘邪,Phrygia)는 진국보다 시기적으로 먼저 동진하여 활동한 사실이 기원전 6세기 이전 기록인 『관자』등에서 발(發)로 확인되는 것으로 보인다. Phrynoi의 등장 기록과 관련하여 삼국지『한전』의 기사를 연구한 자료에는 흉노라는 단순설명으로 후속 연구 없이 그친 것은 흉노사 연구에 매우 아쉬운 점이라고 할 수 있다.
 
  『후한서』 등에는 부여와 진번 그리고 고구려를 흉노라 칭했고 흉노와 습속이 같다고 하였던바, 부여와 흉노,고구려와 관련된 특이할 만한 습속으로 형사취수제 (Lavir-ate Marrage)를 꼽을 수 있다. 이 제도는 유목민족 원래 혈족의 재산이 족외로 유출을 방지하고 혈족이 형수를 부양하는 의미가 있다. 이와 같은 흉노계열의 문화인 형사취수제의 전통을 이어가고 터키계 언어를 구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부례구야(不例拘邪,Phrygia)와 월지(月支)족의 동진 과정의 중간 기점에 중앙아시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현대까지 그 습속이 남아있는 카자크스탄(Kazakhstan)을 눈여겨볼 일인 것이다.

열사의 땅을 벗어나 ‘~스탄’ 지역으로 … 세계의 지붕 파미르를 넘어서
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초원에서 흑해까지_ 26. 사막이여, 안녕! 반갑고야, 파미르!― 서쪽으로 간 월지의 행방(1)
2014년 11월 25일 (화) 15:18:07 연호택 가톨릭관동대·영어학 editor@kyosu.net

   
  ▲ 비단길 교통로의 요충지 돈황. 이곳을 넘어서면 어떤 세계가 펼쳐질까. 감숙과 돈황의 패자였던 월지는 흉노에 쫓겨 세계의 지붕 파미르를 넘어 이동해야 했다. 사진 장영주 KBS PD  

 
마침내 사막을 떠나 세계의 지붕 파미르를 넘게 된 월지의 부류가 누구인지알아보려 한다. 왜 이들에 주목하는가. 이들이 한 때 ‘소그드인의 땅’이라는 의미의 소그디아나로 이주해 가 중앙아시아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기 때문이다. 드디어 열사의 땅을 벗어나 ‘-스탄(stan)’ 지역으로 진입하게 된다.


“만들어진 습관은 우리가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습관은 단지 어떤 상태일 뿐 아니라 어떤 경향이자 능력이기도 하다.” ―라베송, 『습관에 대하여』

필자가 중앙아시아 국가 우즈베키스탄에 처음 간 것은 2001년의 일이다. 19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해외여행이 습관이 될 무렵이다. 우즈베키스탄이라는 나라 이름이 우즈벡족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나라 즉 ‘우즈벡의 땅(-스탄)’이라는 뜻임을 알고 호기심이 생겼다. 이런 호기심, 새로운 것에 대한 관심이 나의 여행벽을 만들었고, 학문에 싫증을 느끼지 않도록 했다. 우리말 ‘땅’의 중세어가 ‘ㅅ다’인데 수만리 떨어진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어찌해서 이와 흡사한 ‘stan’이 사용되고 있을까? 저들과 우리와의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호기심을 충족하고 해결하려는 이런 식의 나의 오래된 버릇 혹은 습관이 나의 세상살이 경향이자 대단찮은 능력이라고 나는 믿는다.


우즈베키스탄은 물론 다른 중앙아시아 국가들도 대부분 다종족 사회다. 백 여 개의 민족이 혼재해 있고 따라서 인종적 혼혈(hybrid)이 꾸준히 이어져 왔다. 그 결과는 다양한 생김새다. 또 하나 미인이 많다. 그래서 우즈베키스탄에 갔다 오니 친구들이 “그 동네 여자들 모두가 영화배우라며?” 호기심 어린 질문을 했다. “에이 뭘!”이라고 답은 했지만, 속으로는 ‘그렇긴 해’라고 수긍을 했던 기억이 있다.
이런 가벼운 호기심과는 달리 이번 글은 무겁게 들어가고자 한다. 무겁다는 것은 참담한 슬픔에 처한 월지, 억지 이주할 수밖에 없는 비극적 운명에 공감해 그들의 심정을 진지하게 헤아리고, 그들의 행방을 가급적 소상히 추적하려는 의도를 말하는 것이다. 이미 알고 있지만, 월지의 西遷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배경과 결과를 개관하자면 아래와 같다.


기원전 176년 월지는 선우 모둔이 이끄는 흉노 연합군에게 치욕적 패배를 당한다. 다시 몇 년 뒤 이번에는 모둔의 아들 노상선우에게 월지 수령이 죽임을 당하는 최악의 일이 벌어진다. 그뿐이랴. 首級이 베어지고 그것도 모자라 두개골이 술잔으로 만들어지는 가공할 시련에 봉착한다. 원수는 갚아야 하거늘, 그러기에 상대해야 할 적은 너무나 강했다. 회복하기 어려운 치명타를 입은 월지는 어떻게 됐을까. 정든 곳을 떠나는 것이다.


월지는 본디 기련산맥을 배후지로 감숙과 돈황 등지에 주거지를 두고 河西는 물론 타림분지의 지배자 노릇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서역과 중국의 교역 중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뿔뿔이 흩어지는 離散은 기득권인 상권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주 후의 삶은 익숙한 것, 누리던 것과의 이별을 의미한다.
흉노에 쫓긴 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본거지에서 내몰린 이들이 천산산맥 북쪽 일리하 일대의 초원과 이식쿨 호수 주변 지역으로 이동해갔음을 우리는 진즉 알고 있다. 그로 인해 천산 주변의 선주 세력이던 塞族이 마지못해 서천과 남천을 결행했음도 문헌 기록을 통해 확인했다.


짐작컨대 쫓기는 무리의 행렬은 반드시 하나가 아니었을 것이다. 돈황에서 서쪽으로 나서면 천산 이남의 오아시스 지역과 통한다. 그곳에 성곽도시들이 있었다. 그리고 陽關을 나서면 가까이에 小國 약강(羌)이 있고, 이곳을 통해 南山 북안의 오아시스 지역에 쉽게 이를 수 있다. 가깝고 멀다는 것은 상대적이다. 실제 약강은 甘州로부터 서남방으로 1천5백리, 양관으로부터는 1천8백리나 떨어져 있었다. 장안으로부터는 6천3백리 길이었다.


중국 한자음으로 뤄창이라 불리는 약강의 위구르 명칭은 차르클릭. 고대 미란 유적이 있는 곳이다. 당나라 때는 吐蕃의 땅이 됐다. 땅의 주인은 이렇게 수시로 바뀐다. 하면 漢나라 때 명칭이 왜 羌인가. 약강이라는 지명의 기원은 이곳의 주민이 若人과 羌人으로 구성된 때문이었다. 이들이 거주한 지역은 현재 신강(新疆)의 약강현(若羌縣) 일대다. 明나라 때까지도 이곳에서는 유목생활이 이뤄졌다. 사서에 따르면 여기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은 성곽이 없고, 모전(毛氈) 즉 羊毛섬유로 만든 장막을 설치하여 거처로 삼았다. 産物은 대부분 낙타, 말, 소, 양이었다. 약강에서 서북쪽으로 가면 선선국(善國) 즉 모래 속에 묻힌 전설의 왕국 누란(樓蘭)에 이른다. 그리고 강릉에도 서울에도 경주에도 있으며, 중국 곳곳 어디에나 있는 南山은 여기서는 웅장한 곤륜산맥을 가리킨다.


패망한 월지는 부족 중심으로 움직였을 것이다. 이주 경로로 천산남로를 선택한 집단을 필자는 玉의 부족 쿠시(Kush) 혹은 카시(Kash)로 추정했다. 車師前王庭(및 後王庭), 구자국(龜滋國), 이전에는 소륵국(疏勒國)이었던 카시가르의 車師, 龜滋, 喀什의 음이 대체로 그와 같은 추정을 뒷받침한다. 이들 쿠시 부족이 후일 파미르 고원을 넘어 오늘날의 인도 북서부 카시미르로 이동해 왕국을 건립하기에 이른다. 이들이 살던 산악지역은 힌두쿠시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박트리아왕국의 소흡후(小翕侯)에 불과했던 이들이 마침내 인도 북부를 지배하는 귀상(貴霜) 왕국 즉 쿠샨왕조를 수립하게 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이 쿠샨조를 중국은 여전히 월지라 불렀다.


사막남로 즉 곤륜산맥 북쪽 기슭을 따라 이주한 집단은 어찌 됐을까. 『삼국지』 魏志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 서융(西戎)조에 자로(虜)와 월지(月氏)의 여종(餘種)에 대한 설명이 있다.
“燉煌西域之南山中,從羌西至領數千里,有月氏餘種葱茈羌·白馬·黃牛羌,各有酋豪,北與諸國接,不知其道里廣狹.傳聞黃牛羌各有種類,孕身六月生,南與白馬羌……(돈황과 서역의 南山 가운데에는 약강에서부터 서쪽으로 총령에 이르는 수천 리에 걸쳐 월지의 여종(餘種)인 총자강(葱茈羌), 백마강(白馬羌), 황우강(黃牛羌) 등이 있고 각자 추호(酋豪)를 갖고 있다. 북으로는 여러 나라와 접하고 있는데, 그 거리와 광협은 알 수가 없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황우강은 여러 종류로 돼 있으며, 아이를 잉태하여 6개월이 되면 출생하고, 남쪽으로는 백마강과 인접하고 있다고 한다.)” 그랬다. 비록 흉노에 패했지만, 월지가 전멸한 것이 아니었다. 살아남은 자들이 저마다 길을 달리해 생존의 길을 모색했다. 그리고 총자강, 백마강, 황우강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었음을 중국 史書는 말해주고 있다. 왜 羌일까. 그 지역의 선주민이 羌族이었던 것이다. 손님으로 찾아간 월지는 이들 부근에서 혹은 이들 속으로 들어가 마침내 이들과 섞여 살게 됐다. 혼인도 하고 문화도 교류하면서.


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을 시작하며 필자는 기원전 2세기 월지의 서천이 중앙아시아의 인문학적 지평에 미치는 영향을 검토하고자 했다. 우리는 알고 있다. 기련산맥을 배후지로 감숙과 돈황의 패자였던 월지가 같은 유목집단 흉노에 패해 서쪽으로 이동하게 된 사연을. 그리하여 새로운 영토에서 일부는 정복자로, 또 다른 일부는 남아서 혹은 인근 지역으로 이주해 피정복 주민으로서의 삶을 살았음을. 후자의 경우 세월이 흘러 점차 잊힌 존재가 됐을 것임도 짐작할 수 있다. 강족과 동화된 월지 집단이 그러하다.


역사는 산 자의 기록이다. 자기 옹호의 산물이다. 앞서 이번 글은 원 거주지를 벗어나 파미르 고원 이동의 사막 오아시스 지역과 천산산맥 초지로 삶의 터전을 옮긴 월지의 보다 정확한 위치를 살펴보려고 한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이 말은 마침내 사막을 떠나 세계의 지붕 파미르를 넘게 된 월지의 부류가 누구인가도 알아보려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왜 이들에 주목해야 하는가. 이들이 한 때 ‘소그드인의 땅’이라는 의미의 소그디아나로 이주해 가 중앙아시아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되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들의 이주 및 정착 과정을 살피는 속에서 소그드인에 대한 다양하고 흥미로운 이야기가 거론될 것이다. 드디어 열사의 땅을 벗어나 인문학기행의 행선지는 ‘-스탄(stan)’ 지역으로 진입하게 되는 것이다.


몽골초원(과거에는 달리 불렸을 것이다)을 중심으로 한 초원의 지배자는 수시로 바뀌었다. 흉노, 선비, 유연, 돌궐, 위구르, 키르기즈, 키타이, 몽골 등의 순이었다. 이들은 항가이 산맥 서쪽에 자리 잡은 외트겐을 시원지로 혹은 성산으로 삼았다. 양과 말을 치며 유목생활을 영위했다. 바이칼이나 흥안령산맥 주변의 종족들은 추위에 강한 순록과 더불어 살았다. 그래서 순록을 자신들의 族名으로 삼았다. 선비의 한 갈래인 탁발부(拓拔部)가 바로 저들 말로 순록을 가리키는 tabu를 족명으로 사용했다. 이들은 흥안령산맥과 훌룬 부이르 일대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집단이었다. 代나라 땅으로 이주해 와 오호십육국 시대를 거치며 하북을 평정하고 魏를 세웠다. 대나라는 지금의 내몽고자치구 呼和浩特 西南의 盛樂을 수도로 한 제후국이다. 탁발선비가 세운 위라나를 우리는 北魏라 부른다. 저들 스스로 삼국시대 조조 부자의 魏를 계승한 것으로 자임한 때문이다.


과연 ‘소그드’는 무엇일까? 한자어로 粟特, 束毒 등으로 표기된 이 집단 혹은 국가 명칭은 어떻게 해서 생긴 것일까? 束毒 즉 Sogd(or Soghud)를 필자는 ‘소’를 뜻하는 말 sog와 명사 복수형 어미 -ud~ut의 결합으로 이해한다. 즉 Sogd라는 ethnonym(종족명)은 소를 기르는 집단을 가리키는 명칭인 것이다. 시베리아의 Saha(or Saka)족을 주변 종족들이 야크소를 기르는 집단이라 해서 Yakut라는 타칭(exoethnonym)으로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Sogd 혹은 Soghud가 과연 소종족일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티베트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吐蕃(티베트족)은 羌族과 蕃族 두 민족 간의 혈연적 융합의 하이브리드다. 아로장포(雅魯藏布)강 유역을 제외한 티베트 지역은 거의가 고대 羌族의 땅이다. 吐藩은 중국 史書의 기록이고, 이 말이 서양으로 전해지면서 티베트(Tibet)가 된 것이다. 티베트인 스스로는 농업인이라는 뜻의 뵈파(博巴)라고 불렀는데, 유목민 조파(卓巴)와 차별을 두고자 하는 의도가 엿보인다. 토번의 ‘蕃’은 ‘농업’을 뜻하는 ‘博’(뵈)과 발음이 같다. 암소와 숫야크 사이의 하이브리드인 조(dzo, dzho, zho, zo)는 노새처럼 이종교배의 산물로 주로 짐 싣는데 이용된다. 조는 수컷이고 암컷은 조모(dzomo)라 부른다. 조모는 번식능력이 있는데 비해 수놈 조는 생산능력이 없다. 슬픈 존재다.


농사를 생업으로 하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야크소나 혼혈종 조의 등에 물자를 싣고 북방으로부터 내려온 소몰이 집단이 야만인으로 보였을 것이다. 농업사회에서 소는 귀하게 여기는 동물이다. 배가 고프다고 함부로 잡아 막을 수 없다. 그럴 경우 다음 해 농사를 짓기 어렵기 때문이다. 사람은 굶어도 소는 먹여야 한다. 티베트에는 3대 방언 지역이 있다. 먼저 위장(衛藏)방언 지역. ‘위장’은 수도인 라사가 위치한 아로장포강 하류 유역의 정치적 ‘중심지’를 가리키는 티베트어 ‘위’와 쉬가체 등지를 포함하는 아로장포강 상류 유역의 종교적 중심지의 ‘聖潔’을 가리키는 ‘장’의 합성어다. 그런데 동남지역에 해당하는 바얀카라(巴顔喀拉: ‘풍요롭고 검다’는 뜻)산 이남 지역의 康巴(캄파)들이 사는 康(캄)방언 지역에서 소(牛)를 so라 부른다. 기련산과 바얀카라(巴顔喀拉)산 사이 靑海湖 주변과 하서회랑 일대의 티베트 북부 안다방언 지역에서는 소를 sog(~sok)라 한다.


So/Sog은 중국 사서에 등장하는 모우강(牛羌)을 가리키는데 사용된다. 모우 즉 야크소를 기르며 사는 羌族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티베트인들에게 so는 야크에 다름 아니었다. 13세기가 돼 몽골인들이 과거 모우강의 땅에 들어왔다. 티베트 사람들은 자신들을 문명과 세련됨의 표준으로 삼고 북쪽의 몽골을 야만인, 오랑캐의 땅이라는 뜻에서 So(의 땅)라고 비하해 불렀다. 그렇다면 Sogd는 소(sog) 즉 야크를 유목하거나 방목하는 집단이라 할 만하다.


티베트인들은 야만스런 오랑캐를 호르(Hor)라고 부른다. 다른 지역 티베트인들에게 캄파(康巴)는 ‘호르’(Hor)로 불리기도 한다. 캄파들이 사는 참도지역이 고대에는 西羌부족들이 살았기 때문이다. 티베트 사람들에게 羌族은 오랑캐인 호르였다. 『蕃漢對照東洋地圖』에서는 회골국(廻骨國) 즉 위구르의 나라를 Hor로 적고 있다. 북방의 이민족은 다 호르인 셈이다. 칭기즈칸의 조상도 호르라 불렸다. 칭기즈칸은 ‘호르 장겔제뽀’라고 불렸다. 漢族을 호르라 부르는 일은 없다. 『번한대조동양지도』에 의하면 吐蕃의 자칭은 Po다. 『梵語雜名』은 토번을 Bhuta라고 기록한다. 머리가 복잡해진다. 그러고 보니 우리도 ‘호로자식’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 말이 어쩌면 티베트에서 수입됐을지도 모른다. 물론 한자어 胡虜에서 들어왔을 가능성도 있다. 정확한 진실을 알기에는 옛일이 너무나 막연하다.



연호택 가톨릭관동대·영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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