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비단길 교통로의 요충지 돈황. 이곳을 넘어서면 어떤 세계가 펼쳐질까. 감숙과 돈황의 패자였던 월지는 흉노에 쫓겨 세계의 지붕 파미르를 넘어 이동해야 했다. 사진 장영주 KBS PD |
| 마침내 사막을 떠나 세계의 지붕 파미르를 넘게 된 월지의 부류가 누구인지알아보려 한다. 왜 이들에 주목하는가. 이들이 한 때 ‘소그드인의 땅’이라는 의미의 소그디아나로 이주해 가 중앙아시아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기 때문이다. 드디어 열사의 땅을 벗어나 ‘-스탄(stan)’ 지역으로 진입하게 된다.
“만들어진 습관은 우리가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습관은 단지 어떤 상태일 뿐 아니라 어떤 경향이자 능력이기도 하다.” ―라베송, 『습관에 대하여』
필자가 중앙아시아 국가 우즈베키스탄에 처음 간 것은 2001년의 일이다. 19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해외여행이 습관이 될 무렵이다. 우즈베키스탄이라는 나라 이름이 우즈벡족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나라 즉 ‘우즈벡의 땅(-스탄)’이라는 뜻임을 알고 호기심이 생겼다. 이런 호기심, 새로운 것에 대한 관심이 나의 여행벽을 만들었고, 학문에 싫증을 느끼지 않도록 했다. 우리말 ‘땅’의 중세어가 ‘ㅅ다’인데 수만리 떨어진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어찌해서 이와 흡사한 ‘stan’이 사용되고 있을까? 저들과 우리와의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호기심을 충족하고 해결하려는 이런 식의 나의 오래된 버릇 혹은 습관이 나의 세상살이 경향이자 대단찮은 능력이라고 나는 믿는다.
우즈베키스탄은 물론 다른 중앙아시아 국가들도 대부분 다종족 사회다. 백 여 개의 민족이 혼재해 있고 따라서 인종적 혼혈(hybrid)이 꾸준히 이어져 왔다. 그 결과는 다양한 생김새다. 또 하나 미인이 많다. 그래서 우즈베키스탄에 갔다 오니 친구들이 “그 동네 여자들 모두가 영화배우라며?” 호기심 어린 질문을 했다. “에이 뭘!”이라고 답은 했지만, 속으로는 ‘그렇긴 해’라고 수긍을 했던 기억이 있다. 이런 가벼운 호기심과는 달리 이번 글은 무겁게 들어가고자 한다. 무겁다는 것은 참담한 슬픔에 처한 월지, 억지 이주할 수밖에 없는 비극적 운명에 공감해 그들의 심정을 진지하게 헤아리고, 그들의 행방을 가급적 소상히 추적하려는 의도를 말하는 것이다. 이미 알고 있지만, 월지의 西遷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배경과 결과를 개관하자면 아래와 같다.
기원전 176년 월지는 선우 모둔이 이끄는 흉노 연합군에게 치욕적 패배를 당한다. 다시 몇 년 뒤 이번에는 모둔의 아들 노상선우에게 월지 수령이 죽임을 당하는 최악의 일이 벌어진다. 그뿐이랴. 首級이 베어지고 그것도 모자라 두개골이 술잔으로 만들어지는 가공할 시련에 봉착한다. 원수는 갚아야 하거늘, 그러기에 상대해야 할 적은 너무나 강했다. 회복하기 어려운 치명타를 입은 월지는 어떻게 됐을까. 정든 곳을 떠나는 것이다.
월지는 본디 기련산맥을 배후지로 감숙과 돈황 등지에 주거지를 두고 河西는 물론 타림분지의 지배자 노릇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서역과 중국의 교역 중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뿔뿔이 흩어지는 離散은 기득권인 상권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주 후의 삶은 익숙한 것, 누리던 것과의 이별을 의미한다. 흉노에 쫓긴 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본거지에서 내몰린 이들이 천산산맥 북쪽 일리하 일대의 초원과 이식쿨 호수 주변 지역으로 이동해갔음을 우리는 진즉 알고 있다. 그로 인해 천산 주변의 선주 세력이던 塞族이 마지못해 서천과 남천을 결행했음도 문헌 기록을 통해 확인했다.
짐작컨대 쫓기는 무리의 행렬은 반드시 하나가 아니었을 것이다. 돈황에서 서쪽으로 나서면 천산 이남의 오아시스 지역과 통한다. 그곳에 성곽도시들이 있었다. 그리고 陽關을 나서면 가까이에 小國 약강(婼羌)이 있고, 이곳을 통해 南山 북안의 오아시스 지역에 쉽게 이를 수 있다. 가깝고 멀다는 것은 상대적이다. 실제 약강은 甘州로부터 서남방으로 1천5백리, 양관으로부터는 1천8백리나 떨어져 있었다. 장안으로부터는 6천3백리 길이었다.
중국 한자음으로 뤄창이라 불리는 약강의 위구르 명칭은 차르클릭. 고대 미란 유적이 있는 곳이다. 당나라 때는 吐蕃의 땅이 됐다. 땅의 주인은 이렇게 수시로 바뀐다. 하면 漢나라 때 명칭이 왜 婼羌인가. 약강이라는 지명의 기원은 이곳의 주민이 若人과 羌人으로 구성된 때문이었다. 이들이 거주한 지역은 현재 신강(新疆)의 약강현(若羌縣) 일대다. 明나라 때까지도 이곳에서는 유목생활이 이뤄졌다. 사서에 따르면 여기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은 성곽이 없고, 모전(毛氈) 즉 羊毛섬유로 만든 장막을 설치하여 거처로 삼았다. 産物은 대부분 낙타, 말, 소, 양이었다. 약강에서 서북쪽으로 가면 선선국(婼善國) 즉 모래 속에 묻힌 전설의 왕국 누란(樓蘭)에 이른다. 그리고 강릉에도 서울에도 경주에도 있으며, 중국 곳곳 어디에나 있는 南山은 여기서는 웅장한 곤륜산맥을 가리킨다.
패망한 월지는 부족 중심으로 움직였을 것이다. 이주 경로로 천산남로를 선택한 집단을 필자는 玉의 부족 쿠시(Kush) 혹은 카시(Kash)로 추정했다. 車師前王庭(및 後王庭), 구자국(龜滋國), 이전에는 소륵국(疏勒國)이었던 카시가르의 車師, 龜滋, 喀什의 음이 대체로 그와 같은 추정을 뒷받침한다. 이들 쿠시 부족이 후일 파미르 고원을 넘어 오늘날의 인도 북서부 카시미르로 이동해 왕국을 건립하기에 이른다. 이들이 살던 산악지역은 힌두쿠시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박트리아왕국의 소흡후(小翕侯)에 불과했던 이들이 마침내 인도 북부를 지배하는 귀상(貴霜) 왕국 즉 쿠샨왕조를 수립하게 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이 쿠샨조를 중국은 여전히 월지라 불렀다.
사막남로 즉 곤륜산맥 북쪽 기슭을 따라 이주한 집단은 어찌 됐을까. 『삼국지』 魏志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 서융(西戎)조에 자로(貲虜)와 월지(月氏)의 여종(餘種)에 대한 설명이 있다. “燉煌西域之南山中,從婼羌西至葱領數千里,有月氏餘種葱茈羌·白馬·黃牛羌,各有酋豪,北與諸國接,不知其道里廣狹.傳聞黃牛羌各有種類,孕身六月生,南與白馬羌鄰……(돈황과 서역의 南山 가운데에는 약강에서부터 서쪽으로 총령에 이르는 수천 리에 걸쳐 월지의 여종(餘種)인 총자강(葱茈羌), 백마강(白馬羌), 황우강(黃牛羌) 등이 있고 각자 추호(酋豪)를 갖고 있다. 북으로는 여러 나라와 접하고 있는데, 그 거리와 광협은 알 수가 없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황우강은 여러 종류로 돼 있으며, 아이를 잉태하여 6개월이 되면 출생하고, 남쪽으로는 백마강과 인접하고 있다고 한다.)” 그랬다. 비록 흉노에 패했지만, 월지가 전멸한 것이 아니었다. 살아남은 자들이 저마다 길을 달리해 생존의 길을 모색했다. 그리고 총자강, 백마강, 황우강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었음을 중국 史書는 말해주고 있다. 왜 羌일까. 그 지역의 선주민이 羌族이었던 것이다. 손님으로 찾아간 월지는 이들 부근에서 혹은 이들 속으로 들어가 마침내 이들과 섞여 살게 됐다. 혼인도 하고 문화도 교류하면서.
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을 시작하며 필자는 기원전 2세기 월지의 서천이 중앙아시아의 인문학적 지평에 미치는 영향을 검토하고자 했다. 우리는 알고 있다. 기련산맥을 배후지로 감숙과 돈황의 패자였던 월지가 같은 유목집단 흉노에 패해 서쪽으로 이동하게 된 사연을. 그리하여 새로운 영토에서 일부는 정복자로, 또 다른 일부는 남아서 혹은 인근 지역으로 이주해 피정복 주민으로서의 삶을 살았음을. 후자의 경우 세월이 흘러 점차 잊힌 존재가 됐을 것임도 짐작할 수 있다. 강족과 동화된 월지 집단이 그러하다.
역사는 산 자의 기록이다. 자기 옹호의 산물이다. 앞서 이번 글은 원 거주지를 벗어나 파미르 고원 이동의 사막 오아시스 지역과 천산산맥 초지로 삶의 터전을 옮긴 월지의 보다 정확한 위치를 살펴보려고 한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이 말은 마침내 사막을 떠나 세계의 지붕 파미르를 넘게 된 월지의 부류가 누구인가도 알아보려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왜 이들에 주목해야 하는가. 이들이 한 때 ‘소그드인의 땅’이라는 의미의 소그디아나로 이주해 가 중앙아시아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되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들의 이주 및 정착 과정을 살피는 속에서 소그드인에 대한 다양하고 흥미로운 이야기가 거론될 것이다. 드디어 열사의 땅을 벗어나 인문학기행의 행선지는 ‘-스탄(stan)’ 지역으로 진입하게 되는 것이다.
몽골초원(과거에는 달리 불렸을 것이다)을 중심으로 한 초원의 지배자는 수시로 바뀌었다. 흉노, 선비, 유연, 돌궐, 위구르, 키르기즈, 키타이, 몽골 등의 순이었다. 이들은 항가이 산맥 서쪽에 자리 잡은 외트겐을 시원지로 혹은 성산으로 삼았다. 양과 말을 치며 유목생활을 영위했다. 바이칼이나 흥안령산맥 주변의 종족들은 추위에 강한 순록과 더불어 살았다. 그래서 순록을 자신들의 族名으로 삼았다. 선비의 한 갈래인 탁발부(拓拔部)가 바로 저들 말로 순록을 가리키는 tabu를 족명으로 사용했다. 이들은 흥안령산맥과 훌룬 부이르 일대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집단이었다. 代나라 땅으로 이주해 와 오호십육국 시대를 거치며 하북을 평정하고 魏를 세웠다. 대나라는 지금의 내몽고자치구 呼和浩特 西南의 盛樂을 수도로 한 제후국이다. 탁발선비가 세운 위라나를 우리는 北魏라 부른다. 저들 스스로 삼국시대 조조 부자의 魏를 계승한 것으로 자임한 때문이다.
과연 ‘소그드’는 무엇일까? 한자어로 粟特, 束毒 등으로 표기된 이 집단 혹은 국가 명칭은 어떻게 해서 생긴 것일까? 束毒 즉 Sogd(or Soghud)를 필자는 ‘소’를 뜻하는 말 sog와 명사 복수형 어미 -ud~ut의 결합으로 이해한다. 즉 Sogd라는 ethnonym(종족명)은 소를 기르는 집단을 가리키는 명칭인 것이다. 시베리아의 Saha(or Saka)족을 주변 종족들이 야크소를 기르는 집단이라 해서 Yakut라는 타칭(exoethnonym)으로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Sogd 혹은 Soghud가 과연 소종족일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티베트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吐蕃(티베트족)은 羌族과 蕃族 두 민족 간의 혈연적 융합의 하이브리드다. 아로장포(雅魯藏布)강 유역을 제외한 티베트 지역은 거의가 고대 羌族의 땅이다. 吐藩은 중국 史書의 기록이고, 이 말이 서양으로 전해지면서 티베트(Tibet)가 된 것이다. 티베트인 스스로는 농업인이라는 뜻의 뵈파(博巴)라고 불렀는데, 유목민 조파(卓巴)와 차별을 두고자 하는 의도가 엿보인다. 토번의 ‘蕃’은 ‘농업’을 뜻하는 ‘博’(뵈)과 발음이 같다. 암소와 숫야크 사이의 하이브리드인 조(dzo, dzho, zho, zo)는 노새처럼 이종교배의 산물로 주로 짐 싣는데 이용된다. 조는 수컷이고 암컷은 조모(dzomo)라 부른다. 조모는 번식능력이 있는데 비해 수놈 조는 생산능력이 없다. 슬픈 존재다.
농사를 생업으로 하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야크소나 혼혈종 조의 등에 물자를 싣고 북방으로부터 내려온 소몰이 집단이 야만인으로 보였을 것이다. 농업사회에서 소는 귀하게 여기는 동물이다. 배가 고프다고 함부로 잡아 막을 수 없다. 그럴 경우 다음 해 농사를 짓기 어렵기 때문이다. 사람은 굶어도 소는 먹여야 한다. 티베트에는 3대 방언 지역이 있다. 먼저 위장(衛藏)방언 지역. ‘위장’은 수도인 라사가 위치한 아로장포강 하류 유역의 정치적 ‘중심지’를 가리키는 티베트어 ‘위’와 쉬가체 등지를 포함하는 아로장포강 상류 유역의 종교적 중심지의 ‘聖潔’을 가리키는 ‘장’의 합성어다. 그런데 동남지역에 해당하는 바얀카라(巴顔喀拉: ‘풍요롭고 검다’는 뜻)산 이남 지역의 康巴(캄파)들이 사는 康(캄)방언 지역에서 소(牛)를 so라 부른다. 기련산과 바얀카라(巴顔喀拉)산 사이 靑海湖 주변과 하서회랑 일대의 티베트 북부 안다방언 지역에서는 소를 sog(~sok)라 한다.
So/Sog은 중국 사서에 등장하는 모우강(牦牛羌)을 가리키는데 사용된다. 모우 즉 야크소를 기르며 사는 羌族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티베트인들에게 so는 야크에 다름 아니었다. 13세기가 돼 몽골인들이 과거 모우강의 땅에 들어왔다. 티베트 사람들은 자신들을 문명과 세련됨의 표준으로 삼고 북쪽의 몽골을 야만인, 오랑캐의 땅이라는 뜻에서 So(의 땅)라고 비하해 불렀다. 그렇다면 Sogd는 소(sog) 즉 야크를 유목하거나 방목하는 집단이라 할 만하다.
티베트인들은 야만스런 오랑캐를 호르(Hor)라고 부른다. 다른 지역 티베트인들에게 캄파(康巴)는 ‘호르’(Hor)로 불리기도 한다. 캄파들이 사는 참도지역이 고대에는 西羌부족들이 살았기 때문이다. 티베트 사람들에게 羌族은 오랑캐인 호르였다. 『蕃漢對照東洋地圖』에서는 회골국(廻骨國) 즉 위구르의 나라를 Hor로 적고 있다. 북방의 이민족은 다 호르인 셈이다. 칭기즈칸의 조상도 호르라 불렸다. 칭기즈칸은 ‘호르 장겔제뽀’라고 불렸다. 漢族을 호르라 부르는 일은 없다. 『번한대조동양지도』에 의하면 吐蕃의 자칭은 Po다. 『梵語雜名』은 토번을 Bhuta라고 기록한다. 머리가 복잡해진다. 그러고 보니 우리도 ‘호로자식’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 말이 어쩌면 티베트에서 수입됐을지도 모른다. 물론 한자어 胡虜에서 들어왔을 가능성도 있다. 정확한 진실을 알기에는 옛일이 너무나 막연하다.
연호택 가톨릭관동대·영어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