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옴] 어느 ‘일본군 출신 장교’를 위한 한국군 합참장

한겨레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   등록 :2011-11-28 20:31수정 :2011-11-29 13:23

1950년 9·28 서울수복에 이어 10월 평양에 가장 먼저 입성한 유재흥 장군(앉은 이)이 육군 2군단장 시절 참모들과 찍은 사진. 그는 51년 7월 시작된 정전회담 때 남한 쪽 옵서버로 참관했으나, 일본 육사 출신인 탓에 우리말을 알아듣지 못해 통역을 대동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50년 9·28 서울수복에 이어 10월 평양에 가장 먼저 입성한 유재흥 장군(앉은 이)이 육군 2군단장 시절 참모들과 찍은 사진. 그는 51년 7월 시작된 정전회담 때 남한 쪽 옵서버로 참관했으나, 일본 육사 출신인 탓에 우리말을 알아듣지 못해 통역을 대동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유재흥 예비역 중장 ‘군 장례식’ 논란
부친과 함께 일본 육사 출신 ‘친일사전’ 등재도 나란히 해방 뒤엔 4·3 ‘토벌’ 지휘
6·25땐 패전뒤 군단 해체되고 전작권 환수 반대 나서기도 29일 대전 현충원 안장 예정

‘대한민국 군번 3번.’

제3대 합참의장(1957~59년)과 제19대 국방장관(1971~73년)을 지낸 유재흥 예비역 육군 중장이 90살을 일기로 27일 별세했다. 군은 합참장의위원회(위원장 정승조 합참의장)를 꾸리고 합참장으로 장례식을 치르기로 했다. 군번에서 보듯 그는 한국군 최고 원로 가운데 한명이다. 하지만 후배 군인들이 그를 마음껏 기리기에는 그의 삶의 궤적이 간단치 않다.

근현대사 연구자들에게 유재흥 장군은 2대에 걸친 ‘부자 친일 장교’로 유명하다. 그의 부친 유승렬은 일본 육사(26기)를 졸업한 뒤 태평양전쟁에 참전해 육군 대좌(대령)로 일제 패망을 맞았다. 유 장군도 아버지 뒤를 이어 일본 육사(55기)를 나왔으며 1943년 보병 대위 시절 이광수·최남선 등과 함께 일본 메이지대학에서 조선인 학병 지원을 촉구하는 연설을 했다. 이런 경력 덕분에 이들 부자는 나란히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됐다.

해방 뒤 이들 부자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국군이 됐다. 아버지 유승렬은 1948년 1주일간 특별훈련 뒤 한국군에 편입돼 102여단장과 1사단장을 지냈다. 1950년 3사단장으로 한국전쟁을 맞았고, 이후 경남과 부산지구 계엄사령관을 지낸 뒤 전역했다. 아들 유 장군도 1946년 군사영어학교 졸업과 동시에 대위로 임관했고, 28살에 별을 달고 1949년 제주도지구 전투사령관으로 4·3항쟁 ‘토벌작전’을 지휘했다. 뒤이어 태백산 지구 전투 사령관을 역임했다. 친일부역 장교에서 빨갱이 때려잡는 국군으로 변신한 셈이다.

한국전쟁 당시 유 장군은 지휘하는 부대마다 패전의 기록을 쌓는다. 전쟁 발발 때는 자신이 지휘하던 7사단이 무너지며 서울이 함락됐고, 2군단장 시절엔 휘하 6·7·8사단을 몰아 북진을 재촉하다 중공군에게 반격을 당해 막대한 타격을 입고 군단이 해체된다.

1951년 3군단장 시절엔 ‘한국전쟁 최대의 치욕’으로 불리는 현리전투의 당사자가 된다. 중공군 1개 중대가 후방 퇴각로를 점령했다는 소식에 3군단은 패닉 상태에 빠져 붕괴했다. 유 장군은 비행기를 타고 후방으로 빠졌고, 휘하 3·9사단장은 계급장을 떼고 도망쳤다. 전투다운 전투도 없이 막대한 양의 차량, 야포, 박격포 등이 중공군의 손으로 넘어갔고, 복귀한 병력은 40%가 채 되지 않았고, 군단이 해체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8군 밴 플리트 사령관은 한국군 지휘부(육군본부)의 작전통제권을 박탈하고 미8군의 직접 통제를 받도록 했다.


그는 한국어가 서투른 한국군이었다. 1951~1952년 포로교환·휴전 회담에 미군 통역으로 참여했던 정경모(재일 통일운동가)씨는 저서에 이렇게 기록했다. “(회담장) 뒷자리에서 소곤소곤 일본말이 흘러나왔다. 깜짝 놀라서 뒤돌아봤다. 나중에 알아보니 일본말로 통역하는 이는 한국군 연락장교 이수영 대령이었고, 일본말을 듣고서야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은 한국군 옵서버로 파견된 유재흥 중장이었다.” 일본 나고야에서 태어나 일본군 아버지 밑에서 교육받은 그에게 모국어는 일본어였던 것이다.

여러 작전 실패 등으로 인해 4성 장군이 되지는 못했지만 1960년 군복을 벗은 뒤에도 유 장군은 승승장구했다. 10여년간 타이·스웨덴·이탈리아 등 외국 대사를 지냈으며, 1971년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됐다. 뒤이어 대한석유공사 사장과 석유화학공업협회장 등을 지냈다. 1990년대에는 성우회 회장과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반대 운동에 적극 나서기도 했다.

28일 유 장군 조문을 간다는 군인 몇몇에게 ‘그가 어떤 군인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모른다. 옛날 분이잖냐”라는 답이 돌아왔다.

유 장군은 29일 대전 국립현충원에서 영결식을 치른 뒤 장군묘역에 안장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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