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삼신도원(三神道院) 원문보기▶ 글쓴이 : 삼신지기
부여의 옥갑(玉匣) 금루옥의(金縷玉衣)
1.부여의 옥갑(玉匣) 금루옥의(金縷玉衣)
1.1 .불변에 대한 염원-옥 신앙
그 중 하나는 주왕이 분사하였을 때, 옥을 몸에 걸치고 있었기 때문에 불 속에서도 그의 육체가 타지 않고 남았다는 것이다. 이에 관하여 생각나는 것은 허베이(河北)성 만청(滿城)현 이나 산둥(山東)성 쉬저우(徐州)시 에서 발견된 금루옥의(金縷玉衣)나 은루옥의(銀縷玉衣)이다.
옥은 신선사상에 따라 그것을 소지하면 악귀를 물리친다고 전해져 왔다. 그리고 옥은 사람이 죽어도 시신을 썩지 않게 하는 신통력이 있다고 믿었다. 오늘날에도 옥은 자체에서 발산하는 파동이 우리 인체에 골고루 침투하여 혈액 순환을 좋게 하고, 조직을 생성한다 하여 건강용 보석으로 인기를 모으고 있지만, 고대 중국에서도 옥만이 가질 수 있는 특이한 효과가 인정되었던 것이다.
옥의(玉衣)는 옥갑(玉匣)이라고도 하는데, 죽은 자의 신분에 따라 옥 조각을 이을 때 각각 금·은·동 실로 구분하여 사용했다. 당시에는 옥으로 만든 옷을 입히면 시체가 부패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1968년에 허베이성 만청현에 있는 중산정왕(中山靖王) 부부의 묘에서 금실로 엮은 옥의가 출토되었는데, 여기서 출토된 2겹의 금루옥의가 원형대로 잘 보존되어 있었다. 중산정왕 유승(劉勝)의 옥의는 2,498개의 옥 조각이 금실로, 유승의 처가 입은 옥의는 2,160개의 옥 조각을 금실로 엮어 만든 것이었다. 각각의 옥 조각들은 모두 정밀하게 설계·가공되었으며, 여기에 구멍을 뚫고 금실로 복잡하고 다양하게 연결시켰다. 이것은 당시 수공예의 수준을 알려줄 뿐 아니라 옥에는 신비한 힘이 있다고 믿고, 옥 조각을 금실이나 은실로 이어 유체를 영구보존하려는 염원을 담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실로 상·주 시대는 매미, 물고기, 새, 돼지, 혹은 무기의 본을 뜬 옥 조각품이 유행하였다. 1) 호신용 부적으로, 2) 왕과 제후들 사이에 서약으로, 3) 또는 신분의 증표로서 사용되기도 하였고, 4) 옥에 맹세문을 적어 부장물과 함께 무덤에 넣기도 하였다. 옥이 이렇게 존중되어진 것은 색이나 광택의 아름다움 때문만이 아니라 옥이 불변하는 보석으로 여겨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옥이 중국에서는 흔하지 않아 매우 귀한 물건으로 여겨졌다. 그렇기에 주로 황실에서 많이 사용되었고, 자연 황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물건이 되었다. 그래서 왕이 사용하는 의자를 옥좌(玉座), 왕이 사용하는 도장을 옥새(玉璽), 귀한 아들은 옥동자(玉童子)라 불리어지게 된 것이다.
1.2 제국 부여의 옥갑
중국 전한(前漢:서기전 206~서기8년)에 황제와 제후왕들을 매장할 때 옥을 캐어 2498편의 옥편을 가공하고, 옥편의 네 귀퉁이에 구멍을 뚫어 약 1100g의 금실로 꿰맨 옥의, 옥침, 신 등으로 만들어진 수의 즉, 옥갑(玉匣)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옥갑의 생산에 너무 많은 비용이 들어가므로 후한(後漢:25~220) 때에는 황제의 장례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이 옥갑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다가, 위(魏:220~264)나라의 문제(:220~227)가 박장령을 내려 옥의 사용을 아예 금지시켰다.
이와 같이 후한시대에 후한의 황제만 사용할 수 있었던 이 옥갑을 후한의 황제가 미리 만들어서 부여와 가까운 현도군의 창고에 보관하고 있다가, 부여의 왕이 서거하였다는 통보를 받을 때마다 부여왕의 장례식에 늦지 않도록 즉각 이 옥갑을 선물로 보내야 했다고 중국 위, 촉, 오의 삼국시대 역사서인 『삼국지』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부여가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강대국이었음을 보여 주는 기록이다.
이 옥갑의 조공문화로 미루어 볼 때 한나라에서는 해마다 막대한 량의 곡식, 금ㆍ은ㆍ보화ㆍ옷감 등을 부여에 조공하지 않았을 리 없다. 그 이유는 한나라를 침입하지 말라는 것, 고구려, 선비 등을 견제해 달라는 이유였을 것이다.
1.3 옥갑(玉匣)
갑(匣)은 원래 갑옷, ‘궤짝’을 뜻하고, 문갑(文匣) 등등의 그 용례에서 들어나듯이 이것이 일반적인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원전(原典)은 이것이 ‘하나의 셑트(set)’임을 밝히는 ‘옥갑(玉匣) 일구(一具)’를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옥의(玉衣: 옥갑(玉匣))는 ‘미이라 붕대’이고, 관(棺)도 있었음을 뜻합니다.
여기에는 옥(玉)과 옷칠, 황칠(黃漆)등의 칠공예 등등이 가미된 ‘신성하기 짝이 없는’ 그런 관(棺)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옥갑(玉匣) 일구(一具)’를 그것이 아무리 값비싼 것이라도 ‘파괴하지 못했다’라는 말이 기록된 것은, 사후(死後)에 ‘인간의 영혼을 재판하는 재판관’의 옥장(玉葬)이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 ‘감히 파괴치 못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2. 부여의 옥갑(夫餘的玉匣)
삼국지 三國志卷30-위서 魏書30-오환선비동이전 烏丸鮮卑東夷傳第30-부여 夫餘
부여는 장성 북쪽에 있다. 현도(玄菟)에서 천리를 가야하고, 남으로 고구려, 동쪽으로 읍루, 서쪽으로 선비가 접해 있고, 북쪽으로 약수가 있으며, 가히 2천리다.
夫餘在長城之北, 去玄菟千里, 南與高句麗, 東與挹婁, 西與鮮卑接, 北有弱水, 方可二千里.
음 식을 먹음에는 모두 조두 (도마와 굽이 달린 그릇)를 사용하고, 여럿이 모이면 절하고 술을 마시면서 잔을 닦아 돌리고 , 서로 절하고 양보하여 오르고 내린다. 은(은나라 달력)의 정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나라의 큰 모임으로, 연일 음식을 먹으며 노래와 춤을 하니, 이를 영고라 하며, 이때에는 형벌과 가둠이 없고, 죄인들을 풀어준다.
食飮皆用俎豆, 會同拜爵洗爵, 揖讓升降. 以殷正月祭天, 國中大會, 連日飮食歌舞, 名曰迎鼓, 於是時斷刑獄, 解囚徒.
한나라 시대에 부여왕은 옥갑으로 장사를 지내는데, 항상 현도군에 미리 맡겨 두었다가, 왕이 죽으면 가져다가 장례를 치뤘다. 공손연을 쳐서 벨 때 현도의 창고에 옥갑 하나가 있었다. 지금 부여의 곳간에는 수 대를 내려 온 옥벽과 규와 제기들이 있어, 대대로 보물로 전해졌으며, 노인이 말하길 선대로부터 하사 받은 것이라 한다.
漢時, 夫餘王葬用玉匣, 常豫以付玄菟郡, 王死則迎取以葬. 公孫淵伏誅, 玄菟庫猶有玉匣一具.
今夫餘庫有玉璧 珪 瓚 數代之物, 傳世以爲寶, 耆老言先代之所賜也.
옥갑(玉匣).금루옥의(金缕玉衣)
金缕玉衣(금루옥의)
명칭 名 称: 금루옥의 金缕玉衣
제조년대 制造年代: 서한 西汉
재료 材 料: 백옥 白玉 청옥 青玉
규격 规 格: 전장 全长188厘米 cm
수장지 收 藏 地: 하북성 문물연구소 河北省 文物研究所
소개 介 绍
1968년 하북성 만성현 중산정왕 유승묘 출토
1968年河北省满城县中山靖王刘胜墓出土。
옥의유정방형, 장방형, 삼각형과 다변형 옥편 2,498편, 금실로 역어서 사람형태를 만들었다. 옥의는 덮개를 나눌 수 있는데 상체, 소매, 장갑, 바지, 신발과 생식기 등 부분이 있다. 부속품으로 옥 베개 1건, 옥황 2건이 있다.
玉衣由正方形、长方形、三角形和多边形玉片2,498块,以金丝编缀成人形。玉衣可分成头罩、上身、袖子、手套、裤筒、鞋及生殖器套等部分。附有玉枕一件,玉璜二件。这套玉衣是目前出土的西汉玉衣中较早的一件。
玉衣,或称“玉匣”,在西汉初年开始应用,是皇帝和显贵死时使用的殓服。西汉的玉衣使用没有严格规定,到了东汉,对穿结玉片的金属丝作了区分,有金、银、铜之别,表明不同等级。玉衣在曹魏时期禁止。目前,我们已发现的完整的和遭损坏的玉衣共20余套,对于了解汉代丧葬制度有重要的参考价值。
估价:人民币8,000,000元。
0.满城汉墓(만성한묘)
满城汉墓是全国重点文物保护单位。位于保定城西北21公里处满城县陵山。是西汉中山靖王刘胜及其妻窦绾的墓葬。是中国目前保存最完整、规模最大的山洞宫殿。西汉中山靖王刘胜是汉景帝刘启的儿子,武帝刘彻的庶兄,他在景帝前元三年(公元前154年)被封为中山王,死于武帝元鼎四年(前113)二月,统治长达42年。中山国位于太行山东麓,大致包括今易水以南、滹沱河以北的地区,首府设在卢奴(今河北定州市)。西汉中山国有十代王,刘胜是第一代王。刘胜墓与窦绾墓均采用以山为陵的营建方式,墓道及墓室凿山而成,呈弧形,平面布局上两墓则大同小异。全墓分为墓道、甬道、南耳室、北耳室、中室和后室6个部分,墓室中分别修建了木结构瓦房和石板房,形成了一座功能齐备的豪华地下宫殿。墓内除了华丽的陈设和棺椁外,发掘中还出土各类文物1万多种。其中仅金银器、玉石器、铜器、铁器等精品便有4000多件,各类铜灯19件,尤以长信宫灯、错金博山炉等最为珍贵。刘胜、窦绾两套完整的金缕玉衣,是全国考古工作中首次发现。刘胜金缕玉衣全长1.88米,用玉片2498片,金丝约1100克;窦绾玉衣全长1.72米,用玉片2160片,金丝约600克。满城陵山汉墓的出土文物曾赴欧、亚、美等国和地区展出,受到了国内外高度赞誉。
满城汉墓是 刘备先祖,刘胜墓中的文物.
满城汉墓上篇——冀地行之河北省博物馆
满城汉墓位于河北省保定市的满城县。看过中央电视台《探索发现》关于满城汉墓节目的朋友可能还记得,发现这座汉墓纯属巧合。60年代,当地驻军修建军事工程,在满城西南的小山丘上发现了人工开凿的洞穴,并发现里面有文物。随后文物专家进驻,2个月的清理发掘,终于将这个庞大的墓葬昭明天下,并判定年代为西汉。根据汉制,又在附近发现了另一座墓。这两座墓的主人就是西汉中山靖王刘胜和窦琯夫妇,两墓共出土珍贵文物一万多件。更有金缕玉衣、博山炉等以往只在文献中记载的国宝,一时间在全国大城小市到处都在谈论这个惊天大发现。
中山靖王,这是汉代诸侯王中的一个封号。首代中山靖王刘胜是汉景帝的儿子、汉武帝刘彻的哥哥,他的封地范围北到今保定满城以北、南至今石家庄无极县、西到保定唐县石家庄新乐一带、东达今天保定的蠡县地区。西汉早期,经过文景之治后,这个区域应该是华北平原比较富饶的地方。也就是这个出产颇丰的地区,支撑了刘胜奢靡的生活。
相传刘胜是一个疏于政事、只顾享乐的平安王爷,看看几百年后他的子孙刘备,某些地方倒是继承了老祖宗的风格。墓中那些精美华丽的陪葬品可以从一个侧面反映出主人当年的生活。2000年还以出土文物中的四件作为图样发行了一套《中山靖王墓出土文物》的邮票。
饮食器具
刘胜好酒,这在墓中出土的器具上得到了印证。在博物馆中,不仅有一排大大的用来储藏美酒的瓦缸,还有些主人日用的青铜盛酒壶,比较有特色的展品有:蟠龙纹铜壶、鸟篆文铜壶、乳钉纹铜壶、铜链子壶等。
蟠龙纹铜壶的壶盖有凤纹,壶身通体嵌有鎏金的抽象龙纹,围绕龙形纹饰还配有云纹,似乎含有龙行九天的意思。展出资料介绍说,铜壶原为诸侯楚元王宫中的器具,后来楚王参与七国叛乱,平定叛乱后此壶就被皇室没收,并赐给了刘胜使用。颇为遗憾的是,壶体有一处明显的凹陷,似乎受过硬伤。
鸟篆文铜壶很有特点,初一看壶身四周用金银线错出一组组眼花缭乱的花纹,颇为奇特,甚为精美。在看了文字介绍后才明白,原来这一组组花纹竟然就是传说中的鸟篆文。鸟篆文是由中国古代篆书演化而来,它由篆字为基础,在字体上修饰抽象的鸟状和虫状花纹,从而变成一种全新的美术字体,就和今天的综艺体等美术字一个概念。介绍上说壶身四周文字是一句酒宴上助兴用的吉祥语。
乳钉纹铜壶壶身纹饰以镏金条相交集,形成若干菱形和三角形,再在胎体上嵌以同样形状的琉璃。另外在镏金条交叉处纹以银质乳钉,整个壶看上去大方而又充满立体感。这个壶原本也是贡品,曾放置于长乐宫,后再赐予刘胜。
【满城汉墓】
再整理转贴一点相关考古资料(且偷一回懒,老是自己写实在累死人)
【满城汉墓】全国重点文物保护单位。位于河北省保定市城西北21公里处满城县陵山(满城县城西南约1.5公里处陵山主峰东坡)。是西汉中山靖王刘胜及其妻窦绾的墓葬。也是中国目前保存最完整、规模最大的山洞宫殿。
西汉中山靖王刘胜是汉景帝刘启的儿子,武帝刘彻的庶兄,他在景帝前元三年(公元前154年)被封为中山王,死于武帝元鼎四年(前113)二月,统治长达42年。
西汉的中山国位于太行山东麓,大致包括今易水以南、滹沱河以北的地区,首府设在卢奴(今河北定州市)。西汉中山国有十代王,刘胜是第一代王。
刘胜墓与窦绾墓均采用以山为陵的营建方式,墓道及墓室凿山而成,呈弧形,平面布局上两墓则大同小异。全墓分为墓道、甬道、南耳室、北耳室、中室和后室6个部分,墓室中分别修建了木结构瓦房和石板房,形成了一座功能齐备的豪华地下宫殿。
墓内除了华丽的陈设和棺椁外,发掘中还出土各类文物1万多种。其中仅金银器、玉石器、铜器、铁器等精品便有4000多件,各类铜灯19件,尤以长信宫灯、错金博山炉等最为珍贵。刘胜、窦绾两套完整的金缕玉衣,是全国考古工作中首次发现。刘胜金缕玉衣全长1.88米,用玉片2498片,金丝约1100克;窦绾玉衣全长1.72米,用玉片2160片,金丝约600克。满城陵山汉墓的出土文物曾赴欧、亚、美等国和地区展出,受到了国内外高度赞誉。
刘胜墓全长约52米,最宽处约38米,最高处约7米,由墓道、车马房、库房、前堂和后室组成,窦绾墓和刘胜墓的形制大体相同。两墓的墓室庞大,随葬品豪华奢侈,共出土金器、银器、铜器、铁器、玉器、石器、陶器、漆器、丝织品等遗物1万余件,其中包括"金缕玉衣"、"长信宫灯"、"错金博山炉"等著名器物。 窦墓在刘墓之北侧,皆坐西朝东。凿山为陵,内部布局完全模仿宫殿建筑。墓室庞大,随葬品豪华奢侈。 刘墓全长51.7米,最宽处37.5米,最高处6.8米,体积2,700立方米,由墓道、车马房(南耳室)、库房(北耳室)、前堂(中室)和后室组成。前堂是一个修在岩洞里的瓦顶木结构建筑,宽宏富丽,象征墓主人生前宴饮作乐的大厅。后室又分石门、门道、主室和侧室。主室象征内寝,内置汉白玉石铺成的棺床,上置棺椁。主室南侧的小侧室象征盥洗室。墓内有完整的排水系统。整个墓道先用石块填满,后在墓道外口砌两道土坯墙,其间浇灌铁水加以严封。 窦墓和刘墓大体相同,体积为3,000立方米,外口是在两道砖墙之间,灌以铁水封闭,比刘墓更为坚固严密,其库房和车马房亦比刘墓为大。两墓出土金、银、铜、铁、玉、石、陶、漆等器物,丝织品、银鸟篆壶和医用金针共一万多件。
其中有:长信宫灯,出土于刘胜的夫人窦绾墓。外形是个宫女跪坐执灯的形象,灯高48厘米,通体鎏金,作宫女跪坐执灯状,灯的各部分是分铸而成,可以随时拆卸,但是结合起来却天衣无缝,构成了一个完美的整体。它的灯盘可以转动,灯罩在圆形轨道内可以开合,所以就能根据需要调节光亮的大小和照射的方向。宫女的体内中空,烛火的烟滓可以通过宫女的右臂进入体内,使烟滓停滞在灯身中,用以保持室内的清洁。其科学性令人叹为观止。 难怪后来当这件文物在美国展出时,前国务卿基辛格连声惊叹:中国人在两千年前就有环保意识,中国了不起。在2000多年前,就能设计得如此精巧,实乃惊世之作; 满城汉墓中出土了错金博山炉、鼎形铜熏炉、带提笼熏炉、透雕盘龙博山炉、骑兽人物博山炉等大量的炉具,其中又以国宝错金博山炉最为精美。它炉身似豆形,通体用刚柔相济的金丝和金片错出舒展的云气,把香料放入点燃,香烟通过炉盖的许多小孔,袅袅上升,弥漫房中。
博山,乃古代神话中的仙山,错金是金银镶嵌的一种工艺。炉盘上部和炉盖则铸出高低起伏、挺拔峻峭的山峦,以象征陆地和群山。炉盖上就山势镂孔,山峦间有神兽出没,虎豹奔走,机灵的小猴或是蹲在山峰高处或是骑在兽背上嬉戏玩耍,猎人则在山中巡猎。一幅秀丽生动的自然山景就在工匠们的鬼斧神工中跃然而出。炉座把上透雕成三条蛟龙腾出波涛翻滚的海面状,以龙头擎托炉盘,在炉座把上的山、海之间饰龙纹,蕴涵着龙为沟通天、地、人三界的通天神兽的时代观念。其工艺之精湛,举世罕见。
值得一提的是,国家邮政局特意选取中山靖王墓出土的长信宫灯、蟠龙纹铜壶、错金博山炉、朱雀衔环杯这四件具有代表性的国宝级文物,于2000年10月20日发行《中山靖王墓文物》邮票一套四枚; 刘胜和窦绾都穿着金缕玉衣下葬。“玉衣”是汉代皇帝和高级贵族死后的殓服。玉衣用玉片制成,玉片间以金丝编缀。
刘胜的金缕玉衣长1.88米,共用玉片2498片,用金丝约1100克。在“玉衣”内还发现玉璧十八块,以及饭含,佩戴之物。
窦绾的玉衣略小,全长1.72米,共有2160块玉片,金丝约700克。这两套完整的金缕玉衣葬服,是闻名中外的首次重大发现,是十分珍贵的历史文物,堪称国宝。根据《后汉书 礼仪志》记载,皇帝的“玉衣”用金缕,诸侯王、列侯始封、贵人、公主用银缕;大贵人、长公主用铜缕。刘胜是诸侯王,如按《后汉书》所载,只能使用“银缕玉衣”,而实际出土的却是“金缕玉衣”。古代统治者用玉衣作为葬服,从西汉一直延续到东汉末年,直到魏文帝曹丕下令禁止使用玉衣,说这纯属“愚俗所为也”。从此,这一葬服制度才消除了。
满城汉墓中的文物还创造多项全国之最 4枚金针、5枚银针、“医工盆”,以及小型银漏斗、铜药匙、药量、铜质外科手术刀等组成了迄今发掘出土的质地最好、时代最早、保存最完整的一整套西汉时期医疗器具; 计时器铜漏壶是迄今出土的年代最早的一个古代天文学器物; 一个由石磨和大型铜漏斗组成的铜、石复合磨,是我国至今所见体积最大、时代最早、设计科学、构思奇妙的铜石复合粮食加工工具; 500多件兵器中,有我国最早采用刃部淬火新工艺的铁剑; 而刘胜的铁铠甲,也是迄今考古发掘中所见到的保存最完整的西汉铁甲; 一件玻璃盘和两件玻璃耳杯是迄今考古发现最早的国产玻璃容器...
중국 하북성 보정시 만성현 주변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