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쓴이: 금소영당/김현숙 조회수 : 8 09.01.03 23:46 http://cafe.daum.net/hskk2005-5/
일본국보 스타하치망 인물화상경 명문의 비밀을 밝힌다
지금 일본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우전팔번(스타하치망)신사 인물화상경(隅田八幡神祠 人物畵像鏡)에는 우리 역사와 관련된 명문이 새겨져 있어 한·일간에 그 명문의 해석을 놓고 주장들이 분분하다.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 위 명문 중 "十六王年"을 "十大王年"으로 보는 사람도 있으나 16왕년(재위16년이란 의미)으로 보아야 앞뒤가 맞는다. 그런데 일본 학자들은 이 명문을 백제 무령왕(사마)이 왜왕인 남제왕에게 바친 헌상물이라고 해석하고, 우리 학자들은 남제왕이 사마왕의 장수를 염원하며 만든 것이라고 거꾸로 해석한다. 이 역시 한·일간 자존심 싸움이다. 역사에 관한 한 해석이 항상 반대이다. 그러나 이는 자존심 싸움으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고, 역사적 배경을 알아야 정확한 해석을 할 수 있다.
☆ 사마왕이 곧 백제 무령왕이라는 것은 확실하지만 일본 역사 어디에도 남제왕이라는 사람이 왜국의 왕위 또는 천황위에 올랐었다는 근거가 없는데도 일본학자들은 남제왕이 왜국왕이었을 것이라고 우기고 있으니 억지 중의 억지이다.
무령왕과 남제왕은 이복형제사이였다
앞서 백제 무령왕이 태어났을 때 그 아버지 곤지에게는 이미 전처소생의 다섯명의 아들이 있었다.
☆ 본 블로그 "윤여동설 -무령왕 출생의 비밀" 참조요망
☆ 책부원구 권963, 외신부8, 봉책1에는 남제태조 건원 2년인 480년에 백제왕 모도가 사신을 보내와 사지절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의 작위를 주었다고 하고, 남제서 백제국전에는, 백제 동성왕이 488년에 북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490년에 남제에 사신을 보내자 남제의 무제는 동성왕에게 "사지절 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이라는 작위를 주었는데, 이때 "모대(동성왕)의 죽은 할아버지 모도의 뒤를 이어 백제왕으로 봉한다"고 기록하고 있으므로 모도가 백제의 왕위에 올랐었고 동성왕의 할아버지였음을 알 수 있으며, 또 모도왕은 480-490년 사이에 죽었음도 알 수 있다.
잘 따져보자.
☆ 혹시 남제왕의 생일이거나 왕위에 오른 기념일이 아니었을까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인데, 여기에서는 생일로 보고 해석한다.
유추해 보면,
☆ 예란 예국을 말하는 것으로서 지금의 중국 요녕성 호로도시 일원을 말하는 것이고, 이때 대륙백제의 도읍 웅진은 하북성 당산시였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을 알고 명문을 해석해 보자.
癸未年 八月 日 十六王年 男弟王 在意紫沙加宮時 斯麻 念長壽 遣開中費直 穢人今州利 二人等
라는 해석이 가능해 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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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속의 한류를 찾아서
무령왕, 倭왕실 친동생의 장수 빌며 거울 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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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다하치만신사의 정전. 이곳에는 백제인 오진왕(백제 곤지왕자)의 신주를 모시고 있다.
‘돼지 해의 행운’ 그림이 흥미롭다.
일본의 중요 문화재에는 한국이 고대 일본을 지배한 발자취가 또렷하게 나타나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인물화상경(人物畵像鏡)’이란 청동 거울. 일본 국보인 이 청동 거울은 503년 백제 제25대 무령왕(501∼523 재위)이 왜나라 왕실의 친동생(男大迹, 오호도왕자·뒷날의 계체왕, 507∼531 재위)에게 보내준 거울이다. 지름 19.8㎝의 이 인물화상경은 현재 일본 와카야마(和歌山)현 하시모토(橋本)시의 ‘스다하치만신사’에 보존되어 있다. 둥근 거울에는 말을 탄 백제왕이며 신하들의 인물화가 선명하게 부각되어 있다. 사람 그림이 새겨져 있어 ‘인물화상경’으로 불려 왔다.
지난 1월12일 이 신사에 직접 찾아갔다. 스다하치만신사의 데라모토 요시유키(寺本嘉幸) 궁사는 필자에게 육중한 금고에 들어 있던 ‘인물화상경’을 손수 꺼내 보여주었다.
이 거울에 새겨진 글자들을 풀어보면 왜나라 ‘야마토왕조’(大和王朝)를 백제 왕족이 성립시킨 단서가 밝혀진다. 당시의 왜왕들은 한반도 백제국왕의 후왕(侯王)이었다. 그것을 입증하는 금석문이 담긴 일본의 고고학적 역사 고증물이 바로 4세기(서기 369년) 후반의 백제 ‘칠지도’(나라현 덴리시 석상신궁·연재 28회 참조)와 6세기 초(503년)의 백제 ‘인물화상경’이다. 그동안 “인물화상경은 도쿄 우에노의 ‘도쿄국립박물관’에 있다”는 설도 있었다. 이에 대해 스다하치만신사의 데라모토 궁사는 “낭설”이라고 한마디로 부인했다. 데라모토 궁사는 이어 신중한 어조로 “이 거울은 503년 백제 무령왕께서 일본왕실로 보내주셨습니다”라고 거듭 확언했다. 한일 고대사에 관한 매우 중대한 증언이었다. 일부 일본 학자들은 그간 이 거울이 백제로부터 건너온 사실을 부인하느라 ‘연대 조작’으로 엉뚱한 역사왜곡을 했다. 그 경위는 다음과 같다.
이 인물화상경에는 둥근 거울의 바깥쪽 테두리를 따라 모두 48개의 한자어로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아래와 같은 금석문이다.
‘癸未年八月十日大王年男弟王在意柴沙加宮時斯麻念長壽遺開中費直穢人今州利二人等取白上銅二百旱作此鏡.’
이 명문은 백제 무령왕이 일본땅의 왜왕실에 살던 친동생 ‘오호도’를 끔찍이 위하는 간곡한 내용을 담고 있다.
“503년 8월10일 대왕(백제 무령왕)시대에, 오시사카궁(일본땅 意柴沙加宮, 忍坂宮)에 있는 오호도왕자(男弟王, 男大迹, 계체왕)에게 무령왕(斯麻는 무령왕의 휘, 諱)께서 아우의 장수(長壽)를 바라시면서 개중비직과 예인(穢人) 금주리 등 2인을 파견하여 거울을 보내시는 바 이 거울은 좋은 구리쇠 200한으로 만들었노라.”
그러나 일인 사학자들은 이 명문에 대해 각양각색으로 엉뚱하게 해석했다. 역사왜곡의 대표적 유형은 계미년(癸未年)이란 60년에 한번씩 돌아오는 간지(干支) 연대의 조작이다. 쉽게 말하자면 왜왕 게이타이가 무령왕의 친동생이 아니라는 억지를 부리기 위해 거울 제작 연대의 계미년을 263년과 443년 등으로 몰고 갔던 것. 이 바람에 청동거울에 새겨진 계미년 연대가 쟁점이 됐다.
인물화상경을 스다하치만신사의 창고 속에서 최초로 발견한 것은 사학자 다카하시 겐지(高橋健自, 1871∼1929) 박사였다. 최초 발견자인 그는 이 거울 명문에 나타나 있는 “계미년은 263년이다”라고 처음부터 빗나간 주장을 했다. 이에 대해 교토교육대 사학과 와다 아쓰무(和田萃) 교수는 263년설은 엉뚱한 주장이라고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다카하시설은 명문에 보이는 사마(斯麻)를 ‘일본서기’의 ‘신공기’(神功紀)에 등장하는 사마숙니(시마노스쿠네)와 연결짓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으나, 계미년에 관한 고증에는 무리가 있다.”(‘大系日本の歷史’2 小學館,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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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이 만든 백제왕실 청동거울 ‘인물화상경’(사진 왼쪽),
지난 1월12일 스다하치만신사에서 ‘인물화상경’을 들고 있는 필자와 흰옷을 입은 데라모토 궁사(왼쪽).
필자도 와다씨 주장에 동감이다. 왜냐하면 ‘일본서기’ 역사책에 일개 조신(朝臣)으로 나오는 신하가 감히 청동거울을 만들어 왕자에게 하사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런 행적은 명문의 문맥과 도저히 조화될 수 없다. 더구나 ‘일본서기’의 ‘신공기’(神功紀)는 역사왜곡의 조작된 기록이란 게 공론화돼 있다는 점에서도 사마숙니는 인물화상경의 ‘사마’와는 전혀 무관하다.
다카하시 박사는 사마(斯麻)라는 휘를 가진 무령왕을 밀어젖혀 두고 전혀 합당치도 않은 사마숙니라는 일개 조신 쪽으로 논조를 몰고 갔다. 의도적으로 무령왕을 피한 것이다. 그가 ‘계미년 263년설’을 내세운 당시는 일제가 강제로 한일합방(1910년 8월23일)을 자행했던 직후였다. 다카하시 박사는 그 당시 도쿄제실박물관(東京帝室博物館)의 감사관이며 역사부장(歷史部長)이었다. 다카하시 박사가 당시 “고대 백제 무령왕이 왜의 후왕인 친동생에게 장수의 주술적 청동거울을 만들어 왜왕실에 보내주었다”는 사실을 밝혔다고 한다면 결과는 어떠했을까. 그 무렵 “한일은 똑같은 신을 신앙하는 동족이다”라는 연구론을 썼던 구메 구니다케(1839∼1931) 교수는 자택 기습을 받고 도쿄대 역사학 교수직에서 퇴출당했다.
다카하시 박사에 의해 1914년 제기된 ‘계미년의 263년설’은 일본 사학계에서 서서히 묵살되자, 그 후 443년설과 503년설이 대두되기에 이르렀다. 443년설은 미즈노 유(水野 裕) 교수의 주장이고, 503년설은 후쿠야마 도시오(福山敏男) 교수의 설이다. 먼저 미즈노 교수의 설은 “443년 8월, 윤공천황(允恭天皇, 412∼453)이 남동생과 함께 황후(皇后)의 오시사카궁(忍坂宮)에 있을 때 사마(斯麻, 필자주·여기서는 백제 무령왕의 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님)가 장수를 염원해서∼”라는 식이다. 그런가 하면 503년설을 주장한 후쿠야마 교수는 “503년 8월 인현대왕(仁賢大王)의 시대 계체왕(男弟王)이 오시사카궁에 있을 때 사마가∼”라고 했다. 후쿠야마 교수는 503년을 바르게 짚고도 백제 무령왕이 아닌 왜의 인현대왕의 시대라고 역시 호도했다.
이 같은 주장에서 어느 누구도 사마(斯麻, 시마)를 무령왕의 휘(이름)라고 내세우지는 않았다. 다만 주목되는 것은 후쿠야마설이다. 그는 계미년을 503년으로 짚었고 남제왕(男弟王)을 즉위 전의 계체왕으로 지목했다. 여기까지는 공감이 가지만 어째서 사마를 무령왕이라고 진솔하게 수긍하지 않은 것일까. 사마의 존재를 명쾌하게 밝히지 않고서는 후쿠야마설도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어째서 백제의 무령왕은 왜국의 오시사카궁에 있던 오호도를 걱정하면서 장수를 염원하며 귀중한 왕실 청동거울까지 만들어 보내주었던 것인가. 오호도가 무령왕의 친동생이었기 때문이다. 계체왕은 백제 제24대 동성왕(東成王, 479∼500)의 아들이었다. 동성왕은 이름이 무대(牟大)여서, 왜나라에 있을 때 무대왕(牟大王)으로도 불렸다.
동성왕은 일본에 건너가 백제왕가에 살았던 곤지(昆支)왕자의 아들이다. 곤지왕자는 백제 개로왕(蓋鹵王, 455∼474 재위)의 제2왕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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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로왕의 제1왕자는 문주왕(文周王, 475∼476 재위)이며 문주왕의 뒤를 이은 것은 문주왕의 제1왕자인 삼근왕(三斤王, 477∼479 재위)이다. 삼근왕이 승하하자 왜나라에 가있던 문주왕의 동생이 백제로 귀국해 동성왕으로 등극했다.
여기서 잠깐 ‘일본서기’를 살펴보자. 왜나라의 무열왕(武烈王, 498∼506 재위)이 서거했으나 후사가 없었다. 대신들이 서둘러 왕위 계승자를 찾던 중에, 응신왕(應神王)의 5대손인 남대적(男大迹, 男弟, 오호도)을 왕위에 등극시켰다. 그가 바로 남제왕(男弟王)인 계체왕(繼體王)이다. 남대적은 우시왕(汚斯王)의 아들이다. 우시왕을 ‘일본서기’에서는 언주인왕(彦主人王, 히코우시왕)으로도 부르고 있다. 바로 이 우시왕이 무대왕 즉 동성왕이다. 무대의 무(牟, 소 울무字)란 ‘소’(牛)를 상징하며, 우시(汚斯, うし)는 ‘소’를 일컫는 만요가나(이두식)의 ‘우시’라는 한자어식 일본 표기이기도 하다.
1971년 7월8일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감격의 날이었다. 오랜 침묵을 깨고 백제 무령왕릉이 공주 땅에서 발굴됐고, 이를 통해 무령왕의 휘가 ‘인물화상경’의 ‘사마(斯麻)’와 똑같은 ‘사마(斯麻)’라는 사실을 고고학적으로도 확인하게 됐다. 무령왕과 왕비를 모신 이 고분의 2개의 묘지석(墓誌石)은, 특히 무령왕이 523년 5월3일 승하했음을 입증해 주었다. 무령왕과 왕비의 왕관 장식이며 매장 유물들에선 왜나라 고대 왕가 분묘의 발굴물과 똑같은 것들이 발견됐다.
이에 따라 묘지석은 한일 고대 관계사의 온갖 수수께끼를 일시에 풀어준 가장 눈부신 역사의 기념비로 주목됐다. 한일 고대사를 새로 써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