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인민공화국은 동북공정으로 우리의 역사와 문명을 자기네 것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
신석기와 청동기 시대 역사인 홍산문화, 동이족의 영웅인 치우 그리고 쥬신족의 최초 나라인 고조선 등 이제는 상고시대 역사까지 중화의 것으로 만들거나 왜곡, 부정, 파괴하려고 합니다.
고조선은 한겨레의 최조 나라이고 한겨레의 뿌리입니다. 실상 뿌리인 고조선을 신화로 치부하고 존재 마저 부정하는 처지에 있습니다.
과연 중원 국가에 대한 고조선은 존재감은 어땠을까요? 국가간의 우위는 군사력이고 전쟁에서 확인이 됩니다. 춘추전국시대 고조선과 중원 국가간의 전쟁을 사서를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중원 사서에서 고조선을 비하한 다른 이름으로 교묘하게 표현하고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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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桓檀古記) 단군세기(檀君世紀)에 「戊午五十年 帝遣將彦波不哈 平海上熊襲 사벌(沙伐) 단제 무오50년(B.C 723년) 언파불합을 보내어 바다의 웅습을 평정하였다.」
「甲戌六十六年 帝遣祖乙 直穿燕都 與齊兵 戰于臨淄之南郊 告捷 갑술66년(B.C 707년), 사벌단제께서 조을을 보내 연나라의 도읍을 돌파하고 제나라 군사와 임치의 남쪽 교회에서 싸우고 승리를 알려왔다.」 기록되어 있다.
사기(史記) 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에 [二十五年, 北戎伐斉. 鄭使太子忽來救斉. 희공 25년 북융(北戎)이 제나라를 침공하자 정나라에서 태자 홀을 보내 제나라를 도와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조선 사벌단제가 제나라를 공격한 것은 제나라 13대 희공(BC 731~ 698) 때의 일이다. 희공 25년 이면 기원전 707년에 해당하므로 그 연대가 단군세기와 일치하고 있다. 사기는 고조선을 가리켜 북쪽의 이족이라는 뜻으로 북융이라고 표현하고 있음을 볼수 있다. 참고로 중국 사서를 보면 고구려를 동이라 표현한 예로 보아 북융은 조선을 가리킨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더욱이 중국의 임혜상은 중국민족사에서 진나라 이전에는 동호를 북융과 산융으로 호칭했음을 말한다. 동호는 동이와 같은 뜻으로 고조선을 비하하여 부르는 호칭이었다.
사기(史記) 흉노전(匈奴傳)에는 「是後六十有五年 而山戎 越燕而伐齊 齊禧公與戰于齊郊. 전략. 그로부터 65년 뒤 山戎(산융)이 燕(연) 나라를 넘어와서 齊(제) 나라를 공격하여 齊(제) 禧公(희공)이 산융과 제 나라 도성 밖에서 싸웠다.」 [註 사기(史記) 흉노전(匈奴傳)에는 이해가 B.C 705년경(770-65=705)으로 적혀 있다.] 이 기록에서는 왕검조선(王儉朝鮮)이 산융(山戎)으로 적혀있다.
제태공세가에서는 북융이라 하더니 흉노전에는 산융이라 한다. 이는 조선의 실체를 감추기 위한 중국인의 의도적인 곡필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왜 고조선은 제나라를 공격하였을까? 그것은 제나라가 산동성 일대의 래이(萊夷)를 병탄한 사실과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설원] 정간 편에 의하면 “래국(萊國)이 신하인 자맹의 말을 듣지 않자 제나라가 이를 병합해 버렸다”고 한다.
고조선과 제나라와의 싸움에 대해서는 춘추 좌전에도 언급하고 있다.
“(노나라 환공 ; BC 712 ~ 694) 6년 (BC 707) 북융이 제나라를 공격하자 제후(齊候 : 희공)는 정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이에 정나라 태자 홀이 군대를 끌고가 제나라를 구원하였다. 6월에 북융의 군대를 크게 쳐부수고 북융의 장수인 대량과 소량 및 갑수 300명을 잡아 제나라에 바쳤다.”
[춘추]는 노나라의 사서를 공자가 도덕적 견지에서 수정 가필한 문헌이다. 윗글을 보면 북융이라 표현된 고조선이 제나라와 연나라 연합군에서 크게 깨진 것처럼 기록되어 있으나 다음의 춘추 기록을 들여다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여러 제후들이 (북융 : 조선의 공격에 대항하여) 제나라를 수비하였기 때문에 제나라에서는 구원하러 온 제후들에게 가축과 곡식을 보내고 노나라로 하여금 서열을 정하게 하였는데, 연나라는 뒤로 물러났으며 태자 홀은 전공이 있는데도 뒤로 밀려나 이를 분하게 여겼다.”
전공(戰功)에 따라 서열을 정하는 과정에서 연나라가 뒤로 밀려난 것은 실상 그들이 고조선과의 전쟁에서 패했음을 알 수 있다.
고조선과 제나라와의 전쟁에 대해 한단고기 단군세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을 남겼다.
“[戊辰五十二年, 帝遣兵與須臾兵伐燕. 燕人告急於齊. 齊人大擧入孤竹. 遇我伏兵戰不利乞和而去.] (제36대 매륵 (買勒: BC 704년~BC 646)) 무진년(戊辰年)이며 재위 52년에 즉 BC 653년에 매륵단제(단군)께서 병력을 보내 수유(須臾)의 군대와 함께 연나라를 정벌케 하였다. 이에 연나라 사람이 제나라에 위급함을 알리자 제나라 사람들이 크게 일어나 고죽(孤竹)에 쳐들어왔는데 우리의 복병에 걸려서 싸워보았지만 이기지 못하고 화해를 구걸하고는 물러갔다.”
위의 단군세기 기록은 매륵단제가 군대를 보내 연나라를 공격하자 다급해진 연나라가 제나라에 구원을 요청한 사실을 설명하는데 사기 제태공세가에도 위와 같은 사살이 실려있다.
“二十三年 山戎代燕 燕告急於齊 齊桓公救燕代山戎 至干孤竹而還. 제나라 환공 23년, 산융이 연나라를 정벌하자 연나라는 제나라에 위급함을 알려왔다. 제나나 환공은 연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마침내 산융을 쳐서 고죽까지 이른 다음 돌아왔다.”
사기(史記) 흉노전(匈奴傳)에는 「전략. 그로부터 44년 후 산융이 燕(연) 나라을 쳤다. 연 나라는 곧 위급함을 齊(제) 나라 알렸고 齊(제) 桓公(환공)은 산융을 공격해 패주시켰다. 其後四十四年 而山戎伐燕 燕告急于齊 齊桓公北伐山戎 山戎走.」 (B.C 653년경) [註 사기(史記) 흉노전(匈奴傳)에는 이해가 B.C 661년경(705-44=661)으로 적혀 있다.]
위의 문맥을 잘 살펴보면 당시 제 환공(BC 685 ~ 643)이 고조선 및 연제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사실을 교모히 감추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만약 승리하였다면 기사의 마무리가 “산융을 격파하고 대승을 거두어 돌아왔다”는 식으로 기록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시 고조선 대 연제 연합군의 싸움에서 어느 쪽이 승리를 거두었을까? 설원 권모편을 보기로 하자.
“제 환공이 산융과 고죽을 치면서 사람을 시켜 노나라에 도움을 청하였다. 이에 노나라 왕은 신하들 불러 모아 대책을 논의하였는데, 신하들이 말하기를 ‘군대가 수천리를 가서 만이(蠻夷)의 땅에 들어가면 반드시 돌아오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자 왕은 말로만 도와준다 하고서 군사를 보내지 않았다.”
환단고기 단군세기에서는 연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연나라 군대와 합세한 제 환공이 고조선의 복명에 걸려서 전세가 불리하게 되자 화해를 구걸하고 물러갔다고 하는데, 이렇게 전세가 불리해지자 제 환공이 다시 노나라에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그렇지않았다면 무엇 때문에 노나라에 도움을 요청했겠는가? 노나라가 도와주기 않자 제 환공은 고조선에 화해를 구걸하고 물러갈 수 밖에 없었다.
제 환공의 신하 관중이 없었다면 중국은 피발이 되었을 것이라는 공자의 말(논어) [주, 여기서 피발은 종발이라고 하며 고대 고조선인의 머리를 트는 모양을 말한다.], 고조선의 거듭된 공격으로 멸망의 위기 가까이 간 연나라, 그리고 고조선 연제 연합군과의 싸움을 기록한 사서 등을 종합해 볼 때 고조선은 신화상의 국가가 아니라 실존한 국가였으며, 중국이 두려워한 국가였다.
[출처] 실증 한단고시 (정신세계사), 한단고기 역주본(상생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