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성 9여단장 오오시마는 오오토리 공사와 협의하여 내정개혁에 대한 답변의 시한을 정하고 구체적인 경복궁 점령작전을 계획했습니다. 경복궁 점령작전은 조선의 수도 서울에서 조선의 국왕을 포로로 삼아 조선군의 무장해제를 도모하고, 새로운 친일정권을 수립하여 조선정부가 일본에 조선주재 청군의 축출을 의뢰하도록 강요하기 위한 군사작전이었습니다.
7월 22일, 밤 10시경에 일본공사관에서 오오토리 공사와 오시마여단장을 비롯한 일본군부와 외교라인이 모여 23일 새벽부터 진행되는 경복궁 점령작전을 지휘했습니다. 작전은 제11연대가 동대문, 광희문, 동북문 등을 점령하고 순찰 및 서울시내 경계를 담당하면, 제21연대가 실질적으로 경복궁으로 난입하여 고종의 신변을 확보하고 조선군을 제압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7월 23일, 새벽 4시부터 시작된 경복궁 점령작전은 왕궁수비대와 접전을 벌였지만, 고종의 신변이 일본군에 확보되자 고종의 명으로 왕궁수비대의 무장해제가 내려졌습니다. 아침 7시를 전후하여 상황은 종료되었습니다.
제21연대 제1대대는 영추문을 통해 경복궁으로 진입하여 경복궁의 동서 양쪽으로 우회하여 왕궁수비대와 접전을 벌였다. 제1대대의 일부 병력은 광화문 왼쪽의 장위영을 습격하여 지원병력을 차단시켰습다. 평양병으로 구성된 왕궁수비대는 일본군의 침입에 대응하여 경복궁의 후문이었던 신무문을 중심으로 강력하게 접전했지만, 약 4배의 정규 일본군에 의해 열세에 있었습다. 일본군은 영추문을 먼저 통과하여 신무문을 통해 진입한 병력과 함께 경복궁 향원지 북쪽에 별궁으로 있던 건청궁乾淸宮에서 고종의 신변을 확보했습니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작전에 대응한 조선군의 활동은 전반적으로 미약했습다. 당시 경복궁을 수비하던 조선군의 전력은 평양군이 주축이었으며, 별도로 친군장용영이 있었지만 압도적인 일본군에 의해 무장해제 되었습다. 친군장용영은 많은병력이 한양 외곽경비 및 북한산성에 배치되어 실제 왕궁경비 병력은 적었습다. 오후 3시경에 동대문 근처의 친군통위영도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격렬한 총격전이 벌어졌지만, 결국 오후 5시경 통위영의 우영과 좌영이 일본군에 의해 점령됐습다. 고종의 신변이 일본군에 의해 제압되면서 강제로 내려진 고종의 교지 접하자 대부분 흩어져 평양으로 복귀했습다. 또한, 중앙군영의 병력들은 경복궁 점령이후 하도감에 모여 일본군의 군영점령에 대비하여 결사투쟁을 맹세하고 보유한 무기를 동원하여 일본군에 대응했습다. 그러나 평양병과 마찬가지로 고종의 교지를 가져온 의장병이 도착하자 스스로 해산했습다.
일본 혼성여단 조선군 진압 지역
대규모 일본군이 인천과 용산에 주둔하며 군사적 위협을 가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실록을 비롯한 연대기사료에 조선의 구체적인 대응이 없습니다. 동학농민혁명군을 진압을 한다고 지방군을 불러올 여력이 없었겠지만 지방군을 집합시키든지 어가가 이동하여 왕의 신변 안전을 확보했어야 했습니다. 일본군의 불법적인 경복궁 점령은 고종을 포로로 하고, 조선정부를 압박하여 청군의 구축(철병)의뢰를 요청하도록 하며, 일본에 적대적이었던 민씨정권을 타도하고 친일정권을 수립함에 있었습니다. 경복궁 점령이후 일본은 7월 25일, 조선정부를 압박하여 청일전쟁의 명분을 확보하고자했습니다. 일본은 조선으로 하여금 청과 체결된 일체의 장정폐기 章程 廢棄를 선언宣言하도록 했으며, 조선에 주둔한 청군을 구축驅逐(철병)하는 정식요구를 일본에 하도록 협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