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달과 온군해는 중앙아시아에서 왔다”

[중앙일보] 입력 2012.11.06 00:38 / 수정 2012.11.06 00:43
 
연대 지배선 명예교수, 카자흐스탄 학술회의서 주장
“옛 소그디아 왕국 온씨, 온달·온군해와 혈연관계”
고구려·통일신라와 교류 … 경주 괘릉 등에 흔적 남아
 
고구려의 ‘바보 장군’ 온달(溫達)과 신라 김춘추의 호위 무사 온군해(溫君解)가 중앙아시아 옛 소그디아 왕국의 왕족과 혈연관계라는 주장이 나왔다.

연세대 역사문화학과 지배선 명예 교수는 1일 카자흐스탄 아스타나에서 고려대 러시아 CIS연구소·유라시아국립대 공동 주최로 열린 한-중앙아 국제학술회의서 이 같은 내용의 ‘한반도 역사에 나타난 소그디아인 온씨 2명’학설을 발표했다. 그는 지난해 백산학회지에 ‘온달의 중앙아 출신’설을 제기한 데 이어 올해 온군해를 추가했다.

 

지 교수는 “온달은 당시 강(康)국이라 불리던 소그디아의 왕족 출신이 고구려 여인과의 사이에 낳은 아들”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삼국사기』 권 45 ‘온달전(溫達傳)’의 ‘온달의 얼굴이 멍청해 웃음거리가 됐다…다 떨어진 옷과 해진 신으로 다녔다’는 기록은 “신분 질서가 엄한 고구려에서 오늘날 다문화 가정 출신 자녀가 겪은 것과 같은 어려움을 묘사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새로 찾아낸 『삼국유사』 ‘진덕왕본기(眞德王本紀) 2년 기사’를 인용, “김춘추를 호위하며 당에서 돌아오는 길에 ‘신분이 높은 사람이 입는 갓과 옷 차림’으로 위장, 고구려 병사의 칼을 대신 맞고 죽은 온군해도 소그디아 출신”이라고 주장했다.
 

 

통일신라 8세기경 제작된 경주 괘릉의 무인석상. 연세대 지배선 교수는 “얼굴은 서역인이고 의상은 소그디아 스타일”이라고 말했다(왼쪽 긴 사진). [중앙포토] 흥덕왕릉 무인석상의 뒷모습. 오른쪽에 보이는 작은 뒷주머니는 ‘포체테’라 불리는 전형적인 소그디아 스타일이라고 지 교수는 말한다(오른쪽 가장 위). 행낭을 지고 여행하는 소그디아 사람의 인형. 7세기경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국가박물관 소장(오른쪽 가운데).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역사학자들이 긴급 대담을 했다. 왼쪽부터 코지로바 카자흐스탄 유라시아 대학 교수, 지배선 연세대 명예교수, 알리세프 우즈베키스탄 고등교육부 산하역사연구소 위원, 미나라 키르키즈 한국대학 교수(오른쪽 가장 아래).

지 교수는 두 온씨가 소그디아 왕족이라는 근거로 중국 사서인 『전당문(全唐文)』 권999 ‘康國王烏勒伽傳(강국왕오륵가전)’, 『북사(北史)』 권 97 ‘강국전(康國傳)’, 구당서 권 198, 위서 관씨지에 있는 ‘소그디아는 강국(康國)이라 불렸으며 그 왕족은 온씨’라는 기록을 들었다. 지 교수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비롯해 고구려·신라·백제의 사서, 중국 사서에서 온씨는 오로지 소그디아에만 있다”고 설명했다.

소그디아인의 기질에 대해 현장은 『대당서역기』에서 "이곳 왕들은 호탕하고 용맹하다. 대부분 용사다…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 전투할 때 그들 앞에 나타날 적이 없다”고 기록했다. 『신당서(新唐書)』 권 221 ‘강전(康傳)’에는 “남자 20세가 되면 이익을 도모할 수만 있으면 안가는 나라가 없었다”고 썼다. 요컨대 용맹했던 소그디아 왕족들이 국제적 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한반도에 온달과 온군해가 등장했다는 것이다.

지 교수는 “고구려는 돌궐과 관계가 깊었으며 돌궐의 지배 아래 있던 소그디아와의 교류도 활발했다”며 “ 현재 사마르칸트에 있는 소그디아 왕국의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에 고구려 사신이 등장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라고 말했다. 아울러 “소그디아인은 통일 신라까지 진출했으며 그 증거가 경주 괘릉과 흥덕왕릉의 서역인 무인상”이라며 “지난해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고대 복식사 연구자가 무인상의 허리띠 위로 드리운 복장, 포체테라 불리는 작은 뒷주머니가 전형적인 소그디아 스타일임을 확인했다”고 했다.

학술회의에 참가한 우즈베키스탄의 알리세프 박사(역사학)는 “고대 무역사에 따르면 소그디아인의 활동 영역이 한반도까지 미쳤을 것”이라며 “고구려가 소그디아로 사람을 보냈으니 소그디아인이 고구려에서 결혼해 온달을 낳은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카자흐스탄의 코지로바 바시에브나 박사(역사학)도 “고대무역 연구에 따르면 소그디아가 고구려로 보이는 나라와 거래한 기록들이 나온다”고 말했다.

◆소그디아(Sogdia)

현재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5~8세기에 융성했던 나라. 소그디아인들은 이란계로 조로아스터교를 믿었다. 무예에 능하고 이재에 밝아 흉노·돌궐·위구르 등 주변 유목국가를 넘나들며 다양하게 교역했다. 소그디아어는 중앙아시아 스텝지역을 지배했던 대 돌궐제국에서 공용문자로 쓰일 정도였다. 


 

발해고구려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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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한국인들과 사얀-알타이 민족들 간의 민족 문화적 관계에 대하여-Abaev N. Viacheslavo -

 

고대 한국인들과 사얀-알타이 민족들 간의 민족 문화적 관계에 대하여 


                            Abaev N. Viacheslavovitch(러시아 투바대학)
                                               
                                                               
원(原)몽골인들의 기원에 관한 문제는 고대 한국민족의 기원과 함께 사얀-알타이 민족그룹의 이동, 주변 민족들 간의 영향력 행사등과 맞물려 아주 중요한 주제이다. 이 민족간의 이동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행해졌고, 동쪽 아무르강 연안, 만주지역, 그리고 한반도에까지 그 여파가 미쳤고, 동쪽으로 이동하는 이러한 과정 속에 현대 몽골어와 부리야트어가 만들어지게까지 될 정도였다.(빅토로바, 1958)

 
원몽골어와 고대 투르크 언어들은 흉노의 언어를 바탕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바이다. 사얀-알타이 지역 동부의 산악-타이가지역에서 이 두 언어의 모태가 형성되어 점차로 동부 사얀에서 아무르강 상류까지, 몽골 알타이를 지나 현재의 중국 신강지역을 따라 남쪽의 황해까지 이르렀다. 물론 이러한 언어의 흐름은 서기 전 3세기 경 고대 흉노의 거대한 유목제국의 형성과 관련이 있다.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고대 중국문헌에 나오는 여러 흉노어의 관련 단어들은 많은 연구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일본인 학자 시라토리 꾸라끼띠는 흉노어는 투르크어계통에 속한다고 주장했다.(시라토리, 1970, 4권, 1-8쪽) 그러나 람스테트는 흉노의 언어에서 아직 몽골어와 투르크어로 갈라지지 않은 상태인 알타이어계통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하였다.(람스테트, 1937, 81-91쪽) 이에 러시아 학자인 L.N. 구밀레프는 흉노의 언어는 투르크어계통이라고 굳게 확신하였다.(구밀레프, 1960, 48-49쪽) 하지만 L. 라게티같은 학자는 이러한 논의들에 대해 가급적 언급을 피하며 신중하게 접근할 것을 요구했다.(라게티, 1950, 141-149쪽)

여러 연구결과에 따르면, 흉노 언어의 기원은 우랄언어들이고 특히 그중에서도 핀-위구르어, 사모예드어, 케트어같은 고아시아어일 것이라는 의견이 옳다고 본다. 또한 고대 투르크어와 몽골어의 구분은 우랄 인접지역 숲 속에 살던 민족들이 사얀-알타이, 남우랄 지역 그리고 이 후 중앙아시아 숲-스텝과 대유라시아 평원으로 이동함에 따라 생겨났다는 주장도 옳다고 본다. 이와 같은 민족들의 이동은 결국 우랄-알타이계 민족들과 스키타이같은 이란계 민족들, 아리아인이라 부르는 인도-유럽계 민족들 간의 적극적인 상호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민족간의 만남들은 왜 투르크-몽골어 언어요소 안에 이란 언어적인 요소가 포함되어있으며, 더 나아가 한국어안에 우랄어, 특히 핀-위구르어의 요소들이 있는지를 설명해줄 수 있는지 보여준다.

대부분의 몽골학 연구자들은 몽골어는 궁극적으로 고대 투르크어, 더 정확히 말하자면 중앙아시아의 동쪽과 퉁구스-만주부족의 영향을 받은 극동지역의 우랄-알타이어를 근간으로 형성되고 분화되었다고 여긴다. 그와 동시에 고대한국어가 주요한 영향을 끼친다. 특히 한국어의 영향으로 투르크-몽골계 민족들의 정치문화에 대한 중요한 단어가 만들어진다. 사얀-알타이어어의 '사까(    )'와 '한(  )'과 어근에서 같이 하는 '까간(      또는 '한')'이란 단어가 이것이다. 이 단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어원 설명이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첫 번째 설명은 스키토-시베리아의 민족문화에서 찾을 수 있다. 즉, 당시 사람들이 숭배했던, 예를 들어 사코-스키타이와 투르크-몽골계 부족들에게 신화적인 조상 할머니인 '알란-호아(알란호)'같은 순록이나 사슴 토템에서 나왔다는 의견이다. 두 번째 설명은 다음과 같다. '까-간(뚜바어로 '하안')'은 '피'를 뜻한다. 이 피는 단순한 피가 아닌 '혈통'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왕족의 피란 뜻이다. '까간'은 한편으로는 사코-스키타이인들이 '항금뿔을 가진 순록의 산' 알타이와 관련이 있다.

'위서(魏書)' 41장에 따르면 중국 대륙에 뚜파(Tufa)족은 '남양'왕조를 세웠고, 또바(Toba)족은 북위(386-534년)를 세웠는데, 이들은 서로 가까운 친척부족이라고 써있다. 또한 위서에는 또바, 썅비(      ), 쥬잔(    ) 그리고 아바르(오브르이)족과 현대 헝가리인들의 조상이라고 생각되는 쥬잔족들과의 관계도 무척 친밀했다고 밝히고 있다.(따스낀, 47,48쪽) 러시아 문헌에는 쥬잔(중국어로는 쥬앙)의 일부가 서쪽으로 즉 유럽으로 아바르라는 이름으로 현재 헝가리의 빤노니 지방을 정복했다고 한다.

 이 아바르인들은 결국 헝가리민족을 형성했으며, 또한 알타이(우랄) 언어요소도 전파시켰다. 이러한 언어적 요소가 이런식으로 한국어에도 전해졌을 가능성이 있다.(빅토로바, 1980, 131쪽)

 
흥미로운 것은 야쿠트어에서 '또파(Topa)'는 '순록'을 뜻한다. 하지만 일반적인 투르크-몽골어에서는 또파란 '고개', '산정상'을 뜻한다. 이는 민족명인 '뚜바(띄바)'가 우랄어계통에서 '울창한 숲으로 덮힌 고원'이란 어원을 갖는 것과 관련이 있다. 민족명이 가지는 어원적 의미는 지명(地名)뿐만 아니라 인명(人名)과도 관련이 있다.

 예를 들어 칭기스칸의 조상중 하나이자 몇몇 전설에 따르면 아무르 유역에 살고 항상 물고기 껍데기로 만든 옷을 입었다던 도부메르겐은 개인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주변 민족명, 지명이 관련이 있다고 여긴다.

 
위에 잠깐 서술한 쥬잔족은 사얀의 지명 그리고 사까의 민족명과 관련이 있다. 어근들을 풀어보면 쥬잔족은 '순록의 민족'이란 뜻을 가지고 있고, 사얀은 '사까의 민족들'이란 뜻이 나온다. 그런데 사까 자체도 순록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쥬잔, 사얀, 사까는 같은 뜻의 말인 것이다.


서부 부리야트의 '뚠까(    )'라는 지명도 주목할 만하다. 이곳은 몽골비사에 나오는 '뚠까이뜨(      )'를 연상시키는 현대 뚜바의 성씨(姓氏)인 '돈각(      )'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N.P. 샤스찌나는 '뚠까이뜨'의 어원은 'tongho', 즉 '숲'이라는 뜻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B.I. 따따린쪠프는 뚠까이뜨와 돈각, 뚠까는 발음만이 비슷하게 들릴 뿐, 실제 뜻은 다르다고 주장하였다. 더 나아가 그는 돈각은 뚜바어의 동사 '둔'이 중심어이며 이 말은 투르크어의 '똔'인데 이것은 '얼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따따린쪠프의 의견으로 뚠까의 어원을 살피기는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이와 발음상 비슷한 단어들이 도처에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시베리아에 있는 한 민족인 '퉁구스(      )', 강이름인 '퉁구스카', 이루쿠츠크에 있는 큰'퉁구스'강 그리고 '썅비'와 같이 흉노의 붕괴이후 등장했으며 러시아 학자들이 고몽골인들로 생각하는 중국의 민족지적 개념인 '둥후(    )'와 뚜바의 돈각과의 관계는 설명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른바 '썅비'는 몽골인들의 직접적인 조상들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주채혁 교수에 의하면 '썅비'는 고대 한국의 민족이자 정치체인 '조선'의 원류라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썅비'의 어원을 제공한 성스러운 산 '썅비샨(        )'과 '달라이-노드(    -  )'호수는 흥미롭다. 신당서(新唐書)에 의하면 달라이-노르 호수는 당시 '쮸이룽(        )'이라고 불렀고, 현대에는 '훌룽(      )', '꿀룽(      )', '훌룽-부이르(      -    )'라고 부른다. 주채혁 교수에 따르면 '다쌴비샨(            )'은 이 호수에서 멀리 떨어져있지 않으며, 대흥안령 산맥 북서쪽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한다. V.S. 따스낀은 호수는 아르군(    )강과 연결되어있으며 현대 지도에는 표시되어있지 않지만 달라이-노르 호수를 끼고 흐른다고 한다.(따스낀, 363쪽, № 8)

시라또리를 위시하여 일련의 부리야트 학자들은 이 아르군 강을 전설적인 '에르구네-쿤(      -  )'으로 여긴다. 하지만 좀더 연구해본 결과 필자는 에르구네-쿤이 두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 번째가 뚜바남쪽에 있는 웁스-후르 호수와 떼스-헴강이다. 두 번째 에르구네-쿤은 아르군 상류와 대흥안령산맥이다. 이 두 곳이 몽골인들과 동(東)우량하이인들의 역사적 고향인 것이다.
한국-투르크-몽골의 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민족 단어중 하나인 '함(  )'은 학자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이 말은 사얀-알타이 민족들에게 '샤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L.K. 헤르쩩은 '함'의 어원에 대해 두 가지의 흥미로운 설명을 하고 있다. '함'은 고아시아 사얀-알타이어에서 '강(江)'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는 '헴(  )'에서 온 말이라고 주장한다. 한국어의 '강(江)'은 헴-함을 거쳐 강이라는 발음을 가졌을 것이다. 또 다른 그의 이설은 '함'은 '까간'처럼 '혈통'이란 뜻이 있다고 한다. 필자의 견해에 따르면 부르한과 텡그리라는 종교관을 가진 사얀-알타이 민족들의 샤머니즘의 요소들은 타이가지대 시베리아와 극동에 사는 유목민들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얀의 동쪽과 동북쪽에서 고대 투르크인들과 고대 몽골인들과 더불어 살던 퉁구스-만주 민족들과의 접촉과 상호관계는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동아시아에서 두드러진다. 그래서 성산(聖山)의 하나인 '우환(      , 중국어로 '치산')에 살던 '둔후(    )'족의 지역상황에 특별한 관심이 쏠린다. 따스낀에 따르면 우환산맥에서 '우환'족이 이름을 얻었을 것이라 하는데, 이 산맥은 중국인 판이에 따르면 랴오뚱에서 북서쪽으로 수천마일 떨어져 있다고 한다.(따스낀, 6-7쪽) 따스낀은 이 산맥이 아무르 상류 쪽일 것이라고 단정했는데, 필자가 보기에는 최근까지 에벤끼족이 살았던 부리야트 공화국의 끼진긴스끄 아이막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몽골어에서 '붉다'라는 뜻의 '울라간(      , 또는 '울란(    )', 중국어의 '치산'도 '붉은 산'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에서 어원을 찾으려는 시도는 무척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부리야트의 지명들은 투르크어나 에벤키어 또는 고아시아어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우환이라는 민족명칭에서 퉁구스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우환산에 대해 고대문헌에서는 '오관(ogwan)'이라고 표현을 했다. 이것은 아마도 트랜스바이칼지역에 살았을 퉁구스부족 '우왕(    , 또는 '구이(  )', 갸이(  )')'와 명칭이 유사하다.(바인슈쩨인, 1972, 119쪽) 당서(唐書)에 보면 '우왕'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써있다. "...그들에게는 양과 말이 없다.

대신 순록을 가축처럼 기른다. 이끼를 먹이고 수레를 끌게 한다."(비츄린, 1950, 1권, 350쪽) 여기서 수레란 순록이 끄는 썰매를 말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7세기에 쓰여진 이 기록의 신뢰성에 대해 바이슈쩨인은 순록업의 기원문제에 대해 언급하면서 "만약 순록업을 주로하는 삶의 양태를 안다면, 순록이 끄는 썰매에 대해 의심할 바 없다."라고 하였다.(바인슈쩨인, 1972, 120쪽) 여기서 하나 덧붙인다면 우환과 둔후가 고대 몽골인들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따스낀은 다른 문헌을 토대로 우환을 우왕으로 읽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따스낀, 7-9, 483쪽)

신빙성에 다소 문제는 있지만 좀 더 오래된 중국 문헌에는 북아시아의 동부지역에서 5세기말에도 순록업이 행해졌다는 기록이 나온다. 499년에 쓰여진 중국 문헌 '난시(      )'에는 '푸산(    )'에 있는 어떤 국가에서는 사람들이 순록에 썰매를 매서 다니며, 순록의 젖으로 꾸므이스를 만든다고 쓰여져 있다.(비츄린, 1950, 2권, 47쪽)

많은 사얀-알타이 민족들, 예를 들어 동뚜바의 또드진, 그들의 친척관계인 또팔라르 그리고 다르하뜨, 쏘이요트인들은 사모예드인들의 후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순록 썰매를 끌고 다니며, 순록업을 퉁구스인들보다 먼저 했을 것이다. 또한 우랄-알타이계열 민족들뿐만 아니라 이란어를 사용하는 민족들을 만났을 것이다. 문헌을 보면 순록업은 사얀지방에서 먼지 시작되었고, 여기서부터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간 것을 볼 수 있다.(바인슈쩨인, 1991, 292쪽) 바인슈쩨인은 고고학자 B.A. 슈람꼬의 툰드라지대 민족에겨서 볼 수 있는 순록썰매에 쓰는 용구와 유사한 것이 스키타이에도 서기전 4세기에 존재했을 것이라는 의견(슈람꼬, 1988, 233-237쪽)에 반박하였다.

바인슈쩨인은 사얀지역에서 순록을 기르기 시작한 최초의 시기를 기원전 1000년경으로 보고 있다. 그는 이러한 순록업의 시작은 스텝지역에서 밀려들어온 목축업을 하는 민족들이 타이가 지역에서 사냥을 하던 사모예드계 부족들에게 영향을 주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바인슈쩨인, 1991, 291쪽) 다시 말해 사얀지역의 순록업은 목축업자, 정확히 말하면, 말을 기르던 민족의 영향을 받아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V.K. 다르쟈와 O.K. 슈의라빠를 위시한 뚜바 연구자들은 바인슈쩨인과 다른 의견을 낸다. 그들은 순록업과 목축업은 우랄-알타이와 사얀의 산악-타이가에서 거의 동시에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 순록업과 목축업은 숲과 숲-스텝의 사냥꾼들과 어부들의, 채취경제에서 농업단계로 넘어가 태평양 연안지역까지 진출 할 수 있었던 사람들의 문화-경제생활의 총체에서 시작되었다고 여긴다. 동시에 그들은 기존의 목축업의 방법들을 잊어가면서 전문적이 순록업을 하게 되었고 그들의 활동범위는 숲 툰드라 지역과 유라시아 북부의 툰드라 평원까지 넓어졌다.
사얀지역의 순록업은 산악 타이가 지역에서 순록업이 더 이상 팽창할 수 없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 안에 사얀에서 동쪽으로 사는 민족, 특히 트랜스 바이칼지역의 에벤키에게 순록업을 전달하였다. 이러한 결과로 비교적 최근까지 퉁구스인들을 '말(馬) 퉁구스인'과 '순록 퉁구스인'으로 나누어 불렀다.
필자의 견해로는 유라시아의 유목문명 현상은 목축업의 과정에서 형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타이가 사냥꾼들의 농업, 목축업, 순록업 등 생업문화의 총체적인 결과로 인해, 또는 숲과 스텝 부족들의 민족문화적 협동관계의 결과로 형성되었다. 자연적으로 옛날에 어느 정도 목축업과 말 사육을 번갈아 했던 민족들은 조금씩이나마 농업도 하면서 유라시아 대 평원 전지역에 급격히 퍼져나갔다. 더불어 순록업자들, 예를 들어 사얀인들은 스키타이, 흉노 등 스텝제국들이 형성되기 전에 일찌감치 동쪽과 남동쪽으로 이동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그들의 순록업과 이동이 일찍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유적지는 물론이거니와 정착민들(중국인들)의 문헌에서도 이들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기 힘들다.

바인슈쩨인에 따르면 퉁구스의 순록업은 서기 무렵에 시작되었다. 그리고 서기 일천년 중반 무렵 그들의 순록업에 대한 내용이 중국문헌에 등장한다.(바인슈쩨인, 1972, 120쪽) 그러나 이것을 믿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첫째로 중국문헌 자체의 신뢰성이다. 생활상의 묘사, 민족의 특징에 대한 묘사는 다른 스텝지역의 유목민에 더 가깝게 기술했고, 산악타이가지대에 대한 많은 부분이 빠져있다. 둘째로 순록에 얹는 안장은 나무와 가죽으로 만들어졌으며 그것은 고고학적 유물로 남기에는 오래 보존되지 않는다. 셋째 순록은 안장없이 탈 수 있다. 특히 키가 작은 퉁구스인과 청소년들은 안장을 사용하지 않았다. 뚜바-또드진인들은 겨울에 순록에게 썰매를 매어 짐을 옮기게는 하였지만, 사람들은 스키를 탔다. 스키가 순록보다 더 빠르기 때문이었다.

사얀-알타인들과 고대 한국인들과의 민족문화 관계에 대한 보충자료들은 흉노와의 부족구성의 문제와 그들의 종교-신화적 분석, 고대 한국인들과의 신화계보의 비교를 하게 한다. 많은 연구자들은 중국에서는 흉노의 왕족을 '후양(    )'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주목한다. 하지만 문제는 '후양'으로 발음되고 씌여지게 된 납득할만한 근거를 중국문헌에서 찾을 수 없다. 흉노, 투르크, 몽골의 신화와 전설은 기본적인 세부사항은 서로 일치한다. 몽골의 왕족 칭기스칸 보르드쥐긴의 신화적 조상은 '끼얀(    )'이며, 이 가문의 증조부는 '끼야트(    )'인 것에서 앞의 '후양'의 어원에 대한 의문을 풀 수가 있다. 다른 한편 끼얀은 이란의 왕족 '케이아니드'와 관계가 있다. 또한 늑대의 자궁에서 또는 산의 동굴, 계곡(세 가지 다 신화적 사고에서는 같은 것이다.)에서 출생한 고대 위구르민족의 엘리트층과도 관계가 있다. 위구르의 '위(  )'는 '산에 있는 동굴'을 뜻한다.

흥미로운 것은 한국의 북부 지역에서 조상의 탄생신화의 장소는 동굴이나 산의 협곡과 관련이 있으며, 남부 지역은 궤짝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알려진 대로 동굴과 궤짝은 유라시아지역에서 세상을 태어나게 한 '우주의 알'을 뜻한다. 그러나 사얀-알타이와 중앙아시아에 사는 민족들처럼 한국인들에게도 우주알로부터의 세상의 창조라는 고대의 모티브는 인성을 가진 조상의 출현까지만 통용되었다. 주몽의 탄생설화를 보면, "알을 깨자 그가 거기서 나왔다. 갓 태어난 아이는 완성된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쟈르일가시노바, 1972, 86쪽) 한국신화에서 문화영웅 또는 조상들은 하늘에 존재한다. 하지만 그들의 탄생은 거의 땅에서 이루어진다. 예를 들면 단군은 태백산에서, 김수로는 구지봉에서, 김알지는 금산주변의 처녀림에서 태어났다.
지배자들의 이름은 흉노의 지배 부족과 사얀-알타이 부족들 간의 민족적 관계를 가리킨다. 고대 중국역사서에 따르면 흉노의 강력한 중앙정부체제는 서기전 209년 아버지 뚜만을 죽이고 권력을 찬탈한 모대(마오둥)와 관련이 있다. 모대의 군대는 서기전 201년까지 10년 가까이 중국문헌에 동쪽에 사는 오랑캐라는 뜻의 '동호'부족을 압박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모대란 이름은 뚜만(    )이라는 이름처럼 고대 사얀-알타이의 부족인 '마아드이(    )'부족과 관련이 있는 씨족명이다. 뚜만도 뚜마뜨(    )부족과 관련이 있다. 뚜마뜨 족은 사얀-알타이 지역과 중앙아시아의 '뚜바스(    )', '또바(    )', '떼파(    )', '찌파(    )', '뚜판(      )'족의 시족 공동체이다. 이 씨족명은 한국 북부에 있는 한자로는 '대지의 문'이란 뜻이 있는 '두만강'의 명칭과 관련이 있다.

한국과의 유사점은 더 제시할 수 있다. 뚜바의 뚜마뜨는 마찬가지로 '호르-뚜마뜨(  -    )'로도 불리었다. '호르'는 하나의 큰 민족집단을 이루는데, 이 '호르'를 어근으로 하여 고대 사얀-알타이(알타이, 뚜바, 하카시아)민족들을 '호오라이(      )', '혼고라이(        )', '우량하이(      )'로 불렀다. 필자의 견해로는 고대한국의 '고려(고구려)'도 '호르'를 어근으로 하여 만들어진 말이라고 생각한다.

고구려의 전설에는 강물의 신의 딸로부터 태어난 주몽이 시조라고 한다. "아주 오랜 옛날 주몽왕이 나라를 세웠다. 그는 북부여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강물의 신의 딸이다."라고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자를가시노바, 1972, 86쪽) 주몽에 대한 신화 속에 서술된 고구려 사람들과 북쪽의 부여 사람들과의 관계는 그들의 문화와 삶에 대해 서술한 부분에서 찾을 수 있다. '상고지'의 필자는 "동방의 오랑캐들의 전설에 따르면 그들(고구려인들)은 부여에 뿌리를 둔 한 분파이다. 그들의 언어는 서로 거의 같다."(끄류꼬프, 64쪽) 고구려 민족의 역사에 대해 연구를 한 R.SH. 자를가시노바는 이러한 상황은 북쪽의 퉁구스-만주족이 고구려 문화원류에 여러 요소를 가미하게 한 증거라고 주장했다. 주몽에 관한 신화는 고대 한국인들과 사얀-알타이 민족들과의 민족문화상의 유사성을 보여준다. 특히 헤로도투스에 의해 스키타이로 잘못 알려졌고, 흉노의 융기와 함께 동아시아에서 흑해연안까지 주름잡았던 '싹'족의 신화와 유사하다. 서기전 2000년말부터 1000년 초까지 치끼, 구르이, 뗄레족과 다른 이란어계통의 언어를 사용하는 부족들, 위그로-핀어를 사용하는 부족들, 고대 투르크 민족들은 서로 연합하여 강력한 부족 연합체를 형성하였다. 그들은 강력한 씨족 연합체를 형성했다. 이들은 끊이지 않는 이동과 전쟁 속에서 멀게는 중앙아시아의 동쪽과 남쪽까지 침투하였다. 중국문헌에 의하면 이들을 '치디(    )'라고 불렀는데, '붉은 오랑캐'라는 뜻이다. 아마도 이들이 인종적으로 백인에 가깝다보니 더 붉게 보여서 그렇게 부른 것으로 여긴다. '붉다'라는데서 알수 있듯 붉은 색은 스키타이인들, 다시말해 귀족들인 전사집단의 특별한 상징이다.

흑해 연안의 스키타이인들의 종교에 대해 헤로도투스는 그들이 강물의 신을 숭배하고 제물을 바친다고 하였다. 뚜바어로 '아릭-부가(    -    )', '깊은 곳의 지배자'란 이름을 가진 전설적인 왕 '아르폭싸이(        )'는 싸코-스키타이의 한 씨족장으로 여겨지는 것은 이 제의의 의미를 나타낸다. 이와 동시에 물에 대한 제의는 대지의 여신이며, 가정의 화로를 지켜주면, 산의 주인이자, 산의 동굴에서 왕권에 대한 상징물을 씨족장들에게 선사하는 '따비띠(      )'에게 바치는 제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산에 있는 동굴은 강과 마찬가지로 신성한 '대지의 문'의 역할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지의 문'인 두만강은 이러한 종교-신화적인 관념들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념은 부족명칭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데, '헴-칙(  -  )'은 '강에 사는 치키인들', '또바(    )'는 '땅의 주인', '또곤(    )'은 '대지'란 뜻이 있따. 아마도 뚜바나 티벳이란 명칭도 위와 같은 명칭들이 확대되어 만들어진 것이다. 여하간 주몽이라는 이름도 이러한 음운학적 토대에서 만들어진 이름일 것이다.
요점을 정리해보면 뚜바의 사키-치키들은 케렉수르문화와 황금뿔을 가진 성스러운 순록이 그려져 있는 '순록돌(사슴돌)'의 문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문화의 확대는 직접적으로 한반도에 미치지는 않았다. 그래서 가정해 보건데, 첫째, 이 문화의 영향은 간접적으로 사얀-알타이 사얀-알타이 부족들, 즉 처음에는 사키-치키인들을 통해, 그 다음에는 흉노제국에 의해 실행되었을 것이다. 둘째, 흉노가 원몽골인들과의 협력관계의 과정에서 둔후를 정복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한국의 신화는 사얀-알타이 민족들과 직접적인 관계에 대한 몇 가지 관념을 보여준다. 대표적인 것이 단군신화이다. 신화 속에서 곰은 고대 한국인들의 국가인 조선의 시조로써 여겨진다. 곰에 대한 신성함은 사얀-알타이민족들에게의 성산(聖山)제의와 볼 수 있다. 사얀-알타이와 중앙아시에서는 신성한 산을 '하의라칸(        )'이라고 부른다. 이는 '곰산'이란 뜻이다.
구조와 내용에서 단군 신화는 고대 한국인들과 사얀-알타이 민족간의 밀접한 관계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특히 그것은 최고 권력과 또한 거기에 걸맞는 상징이 천상의 최고신으로부터 집권부족의 대표자에게 직접 전달되는 정치문화의 계승과 관련된 전통에서 주로 볼 수 있다. '뗀리 굿(        )' - '하늘의 신', '하늘의 아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이 말은 흉노의 지배자에 대한 형용구와 직함이다. 흉노라는 명칭에도 고대 위구르어로 '하늘의 태양'이라는 뜻의 '꾼 뗀리(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단군'이란 이름도 단순한 이름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추측하기에는 '하늘의 신-태양'이라고 여겨진다.
이런식으로 흉노가 고대 한국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을 증명되었다. 또한 반대로 고대 한국에서 흉노로의 영향은 이른바 '호르'라 불리는 사얀-알타이민족의 하위 민족에 의해 이루어졌다. '호르'란 말은 고대 고려(고구려)라는 말로 변해갔다. '호르'의 다른 명칭인 '훈고라이(        )'는 '훈가르(      , 헝가리)' 등이 되었다.

흉노는 십중팔구 스텝과 숲-스텝을 휘젖고 다녔을 것이다. 흉노의 구성원에는 우랄-알타이계의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둔후족(썅비족)은 주채혁교수의 의견대로 이끼의 길을 따라 산악-타이가지대를 타고 동쪽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퉁구스-만주인들에 동화해가면서 흉노보다 먼저 아무르강 연안지역, 소흥안령산맥, 대흥안령산맥, 만주, 한반도에 도달했다.
주채혁교수의 사얀-알타이인들과 고대 한국인들간의 혈통적 연관성에 대한 결론은 러시아의 유전학자 자하로프와 뚜바 국립대 도르쥬교수가 한국인과 뚜바의 소얀, 끄르그이스 성씨 사람들의 머리털 100개를 가지고 실험을 해서 입증하고자 하였다. 자하로프 박사는 이러한 미토콘드리아 DNA검사는 그 DNA자체가 모계라인을 따라 전달되기 때문에 아직 결론을 내리기에는 이르다고 하였다. 아직까지 분자검사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확실한 결과를 위한 남성의 유전자라 할 수 있는 Y-염색체 검사도 불가피하다. 지금까지의 결과로는 자하로프 교수의 말에 의하면 한국인은 유전적으로 북부 중국인과 비슷하다고 한다. 하지만 북부 중국인들은 흉노, 투르크, 고 몽골인 등이 서로 동화되어 만들어진 민족이다.
아직까지 DNA의 핵타입에 대해서 컴퓨터를 이용한 분석이 완료되지는 않았지만 사얀-알타이에서 남자들이 이주해왔다는 설도 입증될 것으로 보인다. 뚜바 신문 '에피르(    )'에 이것과 관련해서 논문을 투고하면서 따찌아나 우이눅-오올이 독일에서 한 실험에 대해서도 서술을 하였다. 이것은 야쿠트인들의 유전자를 조사한 내용인데, 야쿠트인, 부리야트인, 몽골인과 일본인의 유전자가 비슷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 내용은 필자가 주장하는 바와도 일치한다. 먼저 야쿠트인과 부리야트인들은 사얀-알타이지역에 기원을 두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알타이인, 뚜바인, 하카시아인들은 일본인들의 조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일본인들의 조상은 한반도를 통해 일본 열도에 들어갔다고 본다.

한편 뚜바인들의 유전자를 조사해보면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조상도 사얀-알타이에서 기원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그들은 고아시아 민족들이 순록업을 본격적으로 하기 전에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주채혁교수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말을 키우는데 능했을 뿐만 아니라 순록업도 잘 행했다고 한다. 필자는 이 이론에 동의하면서 덧붙인다면, 사얀-알타이에 살던 사모예드인과 위구르-핀 민족들은 순록업을 먼저 고대 투르크인들에게 전했을 것이며, 그 다음에는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사는 퉁구스-만주인들과 원몽골인들에게 전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다시 한번 강조할 것은 민족과 국가를 형성하는 씨족의 그룹은 유라시아의 다른 민족들처럼 목축을 하는 전사, 전사귀족, 사제였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이 민족형성그룹들은 고대 중국, 특히 '중원(中原)'에 사는 사람들과는 아무 직접적인 관계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정치권력은 비록 후대에 들어 중국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궁극적으로 중국인들의 이주에 의해 형성되거나 하지는 않았다. 한국 고대 문화형성에 있어서 중국 본토에서 도망 온 기자(      )같은 사람들은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중국측 사료에서도 이들은 그저 '오랑캐국'의 '오랑캐'들 틈에서 잠시 쉴 곳이 필요했을 뿐이다. 되레 반대로 남만주지역에 거주했던 한국인들이 흉노에 의해 중국 본토로 들어가 흉노, 썅비, 고대 투르크, 고대 몽골인들처럼 중국인들의 인종적, 민족적 원류를 갖추는데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초원에서 한반도까지 <22> 투바공화국을 아시나요

사라져가는 한 초원국가에 대한 강대국들의 동상이몽

  • 국제신문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2010-02-15 19:11:45
  • / 본지 20면
   
투바호수 위의 한 섬에 세워진 포르-바쥔 성. 매우 독특한 모습이다.
 


- 남한의 배 크기 · 인구 30만명 
- 몽골계 민족의 전형적 유목국가 

- 스키타이시대 적석목곽분, 황금유물 등 출토 
- 알타이 못지 않은 유목문화 자랑 

- 푸틴의 강한 러시아 투바 배경 상징화 
- 중국과 러시아 영토·역사분쟁 가능성 

러시아 남부 시베리아에는 우리나라 백두대간에 비유될 수 있는 커다란 산맥이 가로지른다. 이 산맥의 이름은 사얀-알타이로 러시아와 카자흐스탄, 몽골, 중국을 아우르고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알타이도 바로 이 산맥의 일부다. 그런데 알타이의 동쪽에는 투바(현재는 티바로 개명)인들의 자치공화국이 있다. 이 공화국에는 알타이 못지 않게 고대부터 내려오는 많은 초원의 유적이 살아 숨쉬고 있다. 하지만 알타이보다 고고학 조사가 덜 진행된 탓에 외부인들이 잘 모른다. 유라시아 대륙 한 가운데 숨겨진 아시아의 진주라고도 할 수 있는 투바공화국은 러시아와 중국사이에 끼인 지정학적 위치와 유목민족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20세기 이후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 사라져가는 한 초원국가에 대한 강대국들의 동상이몽

   
러시아의 공화국 지도 속 투바공화국. 아래쪽 녹색으로 칠한 부분이다.
투바는 몽골계 민족이다. 바이칼 근처의 부리야트, 몽골공화국과 함께 라마교를 숭상하는 독실한 불교국가였다. 비록 그들은 부족 별로 나뉘어져 있었지만 서로 다른 나라로 갈라서지는 않았다. 그들을 갈라놓은 것은 20세기의 열강과 이데올로기였다. 러시아 시민전쟁 때 이 지역은 러시아 백군의 점령 하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적군이 승리함에 따라 중국과 몽골이 점령하기 시작했다. 볼세비키는 1921년에 탄누-투바(투바공화국의 별칭)라는 허수아비 독립정부를 세웠다. 초대 수상인 돈둑(Donduk)은 불교에 근간한 독립국가를 만들려 했지만 결국 볼세비키가 주도한 혁명으로 정권을 빼앗기고 제2차대전이 마무리되던 1944년 공식적으로 소비에트 연방에 편입됐다. 남한의 배 크기인 17만㎢에 인구는 해운대구보다 적은 30만 명이 사는 전형적인 유목국가다.

   
약 2500년 전 투바족이 사용했던 황금유물.
몽골처럼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주변국가의 지배를 받아야했던 투바공화국이지만, 알고 보면 이곳은 초원의 여러 국가가 살던 중심지였다. 이 지역에서는 스키타이 시대의 적석목곽분과 황금유물이 대량으로 출토돼 알타이 못지 않게 고도로 발달된 유목문화가 있었음이 밝혀지고 있다. 또한, 알타이의 파지릭문화인은 동양계 위주에 서양인이 혼혈된 사람들인 반면, 이 지역 사람들은 순수한 몽골로이드 계통이라는 점에서 유라시아 초원과 아시아를 잇는 연결고리이기도 하다. 

중앙아시아에 숨어 있는 투바공화국. 하지만 의외로 미국에서 투바는 유명하다. 왜냐하면 미국에서 손꼽히는 물리학자인 리처드 파인만이 죽기 직전까지 투바의 열렬 애호가로 자청하며 다양한 대외활동을 벌였기 때문이다. 파인만은 1965년에 노벨물리학상을 받는 등 아인슈타인과 함께 20세기 최고 물리학자였다. 또한 그는 1985년 우주왕복선 챌린저호의 폭발을 규명했으며, '파인만씨, 농담도 잘하시네'라는 책으로 물리학계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친숙한 학자이기도 하다. 


■ 농담 잘 하는 파인만 씨가 진지해진 이유
   
투바족장 황금보검.
파인만은 1970년대 중반 암에 걸리고 이후 10여 년간 힘겹게 투병생활을 했는데, 숨이 다하기 직전까지 투바의 여행을 계획하며 다양한 사회활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당시는 미소 냉전이 절정에 달한 시기로 파인만은 투바여행을 코앞에 두고 세상을 떠났다. 다행히도 그와 행동을 같이했던 랄프 레이만은 파인만의 투바사랑 역정을 '투바-파인만의 마지막 여행'이라는 책으로 남겼다. 이 책에는 죽음을 앞둔 사람답지 않게 끊임없이 새로운 것에 관심을 가지며 낙천적으로 행동하는 파인만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파인만이 투바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1940년대에 발행된 '탄누-투바'공화국의 우표 한 장에서 시작됐다. 현대문명과는 완전히 다른 패턴으로 초원 유목생활을 하는 투바인들은 언제나 창의력과 호기심에 가득 찬 파인만이 죽음의 공포를 떨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아니었을까? 

파인만의 경우가 잊혀져 가는 유목국가에 대한 관심이었다면, 21세기의 푸틴 러시아 총리(전 러시아 대통령)가 집권한 이후에 투바는 급격히 강해지고 있는 러시아 국력의 상징으로 재등장하고 있다. 근육질의 푸틴 총리가 휴가철에 반라의 차림으로 낚시나 수영을 즐기는 모습이 가끔씩 외신으로 보도된다. 강한 러시아와 지도자를 원하는 러시아 국민들을 위한 선전의 성격이 강하다. 그런데 푸틴이 주로 휴가를 즐기는 곳이 투바의 초원이다. 그 배경에는 푸틴의 측근인 투바 출신 러시아 정부 비상대책부장관 세르게이 쇼이구가 있다고 한다. 그 인연으로 투바의 자연과 역사는 중앙아시아의 마지막 남은 초원문화의 터전에서 러시아 국력의 상징으로 등장했다. 

투바에는 호수 속에 세워진 '포르-바쥔' 이라는 성터가 있다. 마치 엘도라도의 전설처럼 호수 위에 떠 있는 듯한 이 성터는 서기 12세기 대 탕구트국(티베트계통의 민족이 세운 나라. 중국어로 서하·西夏)의 것이다. 지난 2007년 여름에 푸틴은 모나코의 황태자 알베르트 2세와 이 성터 발굴 현장에 머물렀다. 한국 같이 정치인들이 양복에 안전모를 쓰고 뒷짐진 채 현장을 순시하지 않고, 자연 속에서 캠핑을 하며 삽으로 흙을 퍼올리는 모습이 보도됐다. 푸틴의 마초이즘적 이미지를 강화시키는 데 초원제국을 연구하는 고고학도 동원된 셈이다. 이렇듯 러시아에 가장 늦게 편입된 변방의 투바는 최근 강력해지는 러시아의 거칠지만 강한 자연의 상징으로 떠오르고 있다.


■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러시아의 화가이자 역사가 니콜라이 레리흐가 그린 '초원의 석양'. 아인슈타인이 그의 그림을 보고 크게 감동했다고 한다.
물리학자 중에서 초원에 반한 사람은 파인만뿐이 아니었다. 아인슈타인도 초원에 반했다. 아인슈타인은 알타이에서 티베트에 이르는 여러 지역을 답사하며 그림을 그렸던 화가이자 역사가인 니콜라이 레리흐의 그림을 보며 "솔직히 말해서, 당신의 그림만큼 나를 감동시켰던 것도 없습니다"라고 찬탄을 했다. 왜 이 천재 물리학자들은 초원을 좋아했을까? 단지 새로운 것 또는 지금은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동정의 눈길이었을까. 아니면 단순히 동양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 찬 '오리엔탈리즘'의 발로였을까. 

파인만과 아인쉬타인이 좋아했던 초원은 현대와는 판이하게 다른 패러다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틀에 박힌 현대문명의 삶과 사고방식에서 완전히 벗어난 새로운 생활의 사람들이 그 원인은 아니었을까. 물리학에서 파인만이 평가받는 이유는 바로 기존의 통설을 깨는 단순하며 합리적인 생각이었다. 그리고 개방적이며 창의적으로 살며 새로운 취미와 연구를 즐겼다. 그는 지적으로는 이미 유목민적인 사고를 지녔다. 그래서 나노(nano) 시대를 예언했는지도 모른다. 그가 투바에 빠진 이유는 단순한 탐험가적 취미가 아니라 확연히 다른 방식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었을 것이다. 지금 세계는 빠르게 바뀌고 있다. 이들 천재들은 유목민의 모습에서 수십 년 뒤 지구의 미래를 본 것은 아닐까?

초원은 창조력의 원천인 동시에 강대국들이 국력을 휘두르는 도구이기도 했다. 투바의 역사가 그를 증명한다. 투바는 13세기 몽골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청나라때는 중국의 판도에 편입되었다가 1911년에 독립할 수 있었다. 이후 다시 소련의 영토가 됐고, 지금은 강한 러시아의 상징이 되고 있다. 아직 중국이 투바에 대한 영유권을 공식적으로 러시아에 제기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최근 중국은 주변지역의 역사로 관심이 확장되고 있으니, 조만간 두 강대국 간 투바를 둘러싼 역사분쟁을 기대(?)해도 좋을 듯 하다.  

   
강인욱 부경대 사학과 교수
한국에서도 투바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지난 2003~2005년 국립민속박물관에서 투바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를 행한 적이 있다. 일반인들은 오로지 알타이나 바이칼에만 관심이 있을 때 차분하게 숨겨진 진주를 밝혀서 조사한 것은 놀랍다. 21세기, 세계로 국력이 뻗어나가는 우리나라가 보는 초원은 달라야 할 것이다. 우리 또한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영토를 확장한 강대국이 아니라 투바와 같은 약소국이었음을 잊지 말자. 우리의 힘은 군사력이 아닌 주변국가에 대한 문화적인 관대함과 포용력에서 나와야 한다.  

중앙아시아의 숨겨진 투바공화국의 매력을 느끼길 바란다. 파인만과 아인슈타인이 초원에 매혹을 느낀 배경에는 다양한 문화에 대한 포용이었음도 기억해주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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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바는 러시아의 남부, 몽골의 북서쪽에 위치한 러시아 연방의 자치공화국입니다.

투르크 계통의 목축인으로 '우랑하이' 또는 '소요트'라고도 하는데
이는 부족이름 '소욘'에서 비롯되었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투바인의 외모는 한국인과 너무나 비슷합니다.

사얀 족의 지금까지의 연구 자료만 보더라도 투바의 사얀족은 한민족의 한 뿌리이며,
한민족과 같은 혈통을 가진 잃어버린 형제임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현재 사야족의 DAN를 검사하고 있는 I.A 자하로프 박사는
조선족이나 몽골족이 이 사얀족으로부터 기원이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강원대 주채혁 교수에 의하면, 예전 우리 한민족을 일컫는 '조선'이란 말은

 ‘선(鮮/순록의 먹이인 이끼)을 향해 가는'이라는 뜻을 가진다고 합니다. 

'조선'이라는 원래의 한문 이름으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닌 시베리아 원주민 사얀에서 그 뜻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조선의 ‘선(鮮)'이 순록목초지(Ewen: 鮮)이고, 

그 선은 바로 몽골과 한국의 선조인 고조선(古‘朝鮮’)·선비(鮮卑)의 그 선(鮮)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몽골족의 기원지 훌룬부이르 몽골스텝에서는

아직도 Korean을 선어(鮮語)로 말하고 선문(鮮文)을 쓰는 선족(鮮族)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라면 조선(朝鮮)도 한(韓)도 없이,  

몽·한이 모두 선족(鮮族)-‘순록치기’의 후예인 동족 ‘선(鮮)겨레'라는 것이지요.

 

투바는 그러한 ‘선(鮮)'의 기원지라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연세대학교 지배선(64·역사문화학) 교수는

 “바보로 유명한 고구려 온달(溫達·?~590) 장군이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에서 건너온 왕족의 아들일 가능성이 크다” 라고

 2011년 5월 백산학보 제89호에

자신의 ‘사마르칸트와 고구려 관계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게재했다고 합니다.

 제 글은 연세대 지배선교수의 글과는 조금 배치되지만

바로 이 온달장군과 투바의 관계를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바보온달의 원주지,,,투바공화국, 거기에 온달족이 지금도
살고있다.

에두아르 온달 (Ondar)
구글어스그래픽과 함께 흘러나오는 음악은 투바사람들로 구성된 훈후르투라는 4인조 밴드가 전통악기와 스로트싱잉 창법으로 연주한 Chiraa-Khoor라는 노래인 것으로 압니다. 물론 온달 콩가르 올이라는 분도 투바의 유명한 전통음악가인것은 맞지만 그분이 부른 것 같지 않군요. 상당히 설득력있는 가설을 담고 있는 동영상인데 이것이 혹시 트집거리가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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