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금관가야 왕국 김해와의 해상교류
해남, 가야와 5백년간 교류했다
2008년 10월 17일 (금) 10:17:33 노영수, 박영자 기자 hpakhan@hnews.co.kr

   
 
  중국화천(송지 군곡리), 마제류(현산 조산리 고분)  
 
   
 
  점치는 도구인 복골(송지 군곡리)  
 
   
 
 

철기제품과 토기(현산 분토리), 토기류(송지 군곡리)

해남 고대 유적지에서 발굴되는 각종 유물들은 가야지역인 김해 유적지에서도 동일하게 발굴되고 있어 당시 두 지역이 활발한 해상교류를 했음을 알 수 있다.

 
 
철기시대 송지면 군곡리에 거대한 해상세력이 활동하고 있을 때 경상남도 김해에도 해상국가인 금관가야가 왕성한 대외 해상교류를 펼치고 있었다.

송지 군곡리는 기원전 3백년부터 기원후 4백년까지 700년 동안 존속했던 해상 도시였고 이 해상도시는 금관가야와 중국, 일본 등과 활발한 교역활동을 전개했었다.

특히 군곡리 해상세력이 가장 왕성한 대외활동을 전개했던 시기는 기원후 1세기에서 3세기였다. 이 시기 군곡리 세력과 가야세력은 왕성한 교류활동을 전개하게 되는데, 이는 군곡리 패총지와 해남의 여러 유적지에서 발굴되는 각종 유물들이 뒷받침해 준다. 군곡리 패총지에서는 화천(동전)과 복골(점치는 뼈), 곡옥, 각골, 토기류 등이 출토되었는데 김해지역 패총지에서도 같은 종류의 유물들이 수습되었다.

철의 나라 가야

가야는 질 좋은 철로 중국 한나라가 고조선 땅에 세웠던 낙랑과 대방 및 일본과 활발한 해상교역 활동을 전개하며 부를 축적했는데 이들 해상세력이 거쳐 간 곳이 해남 현산면과 화산면에 있는 백포만 항구였다.

김해시 문화시설관리과 송원영 학예연구담당은 송지 군곡리에서 중국의 화폐와 가야의 토기류, 일본 유물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가야의 해상세력이 백포만을 경유한 후 서해를 거쳐 낙랑과 대방으로 진입했고 낙랑과 대방도 가야와 일본으로 가기 위해 백포만을 경유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송지 군곡리 해상세력도 백포만에서 배를 탄 후 서해를 거쳐 낙랑과 직접 교류했고 가야 및 일본과도 교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포만은 영산강세력의 국제항

목포대 강봉룡 교수는 "4세기 초까지 존속했던 송지면 군곡세력은 영산강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고대사회를 열었던 신미제국의 일원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신미제국 일원이었던 백포만 일대에서는 다량의 옹관고분이 발굴되고 있다. 옹관고분은 송지 군곡리와 미야리, 현산면 분토리 일대, 삼산면 원진과 목신, 신금, 화산면 부길, 해남읍 호천리 일대서 발굴되고 있는데 옹관묘 안에서는 토기와 철 덩어리, 철칼, 옥 장식품 등이 함께 수습됐다. 이곳 옹관묘에서 수습된 철제품은 가야생산품과 동일해 가야와 교류했음을 알게 해준다.

이와 같은 유물 수습에 대해 변남주 교사(영암 삼호서초교)는 "백포만은 신미제국의 외항적 기능을 수행한 대표 거점포구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밝히고 있다.

백포만 세력이 건설했던 군곡리 포구도시는 4세기 들어 백제에 의해 쇠락하고 만다. 대신 백제는 현산 고현리에 포구도시를 세운다.

그런데 백제가 세운 현산면 고현리 세력은 백제가 아닌 가야와의 해상교류를 활발히 전개한다. 고현리 고분군에서 수습된 각종 토기류 대부분이 가야계 토기라는 점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들 토기는 현재 현산초등학교에 소장돼 있다.

한편 백포만의 포구도시였던 현산면 고현세력은 5세기 말 들어 쇠락하고 현산 월송 세력이 그 뒤를 잇게 된다.

일본세력 해남 진입

현산면 월송에는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로 추정되는 조산고분이 위치해 있다. 이곳에서는 192점의 방대한 유물이 수습되었는데 많은 유물이 금동제 말재갈과 말 장식품 등 마구류였다. 마구류는 해남의 기존 대형옹관묘에서는 수습되지 않는 유물이다. 대신 마구류는 김해지역의 대성동 고분이나 일본 후쿠오카 지역 고분군에서 광범위하게 수습되고 있다.

또한 전형적인 일본 양식무덤인 북일면 대형고분군들에서도 일본과 가야지방에서 주로 출토되는 두귀납작병과 삼각형 철갑옷편 유물들이 수습된 바 있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 백포만 세력은 4세기말 백제 근초고왕이 영산강 일대를 접수한 후에도 백제보다는 가야, 일본과 해상활동을 꾸준히 전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해남에서는 영산강 유역의 독특한 묘제 양식인 대형합구식 옹관묘가 4세기 말에 소멸된 후 일본 후쿠오카 등에 분포하는 전방후원형 (앞은 길다란 네모, 뒤는 둥그런 무덤 모양)무덤과 즙석분(무덤표면을 작은 돌로 장식)이 등장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전방후원형 고분은 고창 영광 광주 함평 등지에서 10여기 발견되었는데 해남의 북일 것이 76m로 가장 크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변 교사는 "일본(왜)세력의 해남진입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고, 그 세력에 의해 가야와의 교류가 전개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조심스럽게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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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 대방 ↔ 가야 일본 해상교역 중간 포구
2008년 10월 24일 (금) 13:32:42 노영수, 박영자 기자 5536@hnews.co.kr

   
  경남 사천 늑도 패총지에서는 송지 군곡리와 같은 동일한 유물들이 대거 출토돼 철기시대 서남해안 포구들이 해상을 통해 활발한 대외 교류 활동을 했음을 알게 해 준다.  
 
 
   
 
  고대사회 서남해안 포구들은 중국과 가야, 일본이 해상교류 활동을 하는데 있어 중간 기착지 역할을 했다.  
 
 

서남해안은 철기시대
대외 교류 중간 기착지  

선사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나라의 주 교통로는 해상로였다. 그러나 조선시대 들어 해상교통보다는 육지를 선호하는 정책을 펴게 되면서 해로를 중심으로 성장했던 항구들은 자연스럽게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해남 화산·현산 일대에 있었던 백포만 항구였다.

백포만 항구는 철기시대 중국과 가야, 일본과 활발한 교류활동을 시작으로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도 중국 송나라와 관무역 및 사무역을 담당하는 중간 기착지 항구였다.

고려시대까지 국제 해상교역로 역할을 했던 백포만이 가장 활발한 대외 교류를 펼쳤던 시기는 철기시대였다. 이 시기 서남해안 여러 바닷가에도 해상세력들이 활동하며 활발한 대외 교류를 펼치고 있었다.

이 때 활동했던 각 나라들을 보면 평양지역에는 낙랑과 대방이 자리하고 있었고 호남과 충청 지역에는 마한이, 경상 지역에는 가야가 위치해 있었다. 이때 일본은 중국과 가야, 마한의 선진 문명을 활발히 받아들이며 문명의 꽃을 피웠던 야요이 시대였다.

이들은 해상교역을 통해 서로 간에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중국 한나라가 고조선에 세웠던 낙랑과 대방은 중국의 선진문화를 마한과 가야지역, 일본 등에 전파하는 창구 역할을 했다.

또한 철 생산의 중심지였던 가야지역은 철을 매개로 낙랑과 마한, 일본 등지와 활발한 해상교역을 전개했다. 이들의 해상교역 가운데에 끼어있던 곳이 바로 해남 백포만을 포함한 고흥, 여수, 거제도, 남해, 사천 등 서남해안 포구이다.

중국의 역사서인 삼국지에 이와 관련된 해상 교역로가 기록돼 있다. 삼국지에는 낙랑과 대방군이 왜로 이르기 위해 서해안-한국-남해안-구야한국-대마도-왜로 통했다고 적고 있다. 여기서 한국이란 지명은 충청도 일대인 아산만 일대로 보고 구야한국은 금관가야의 중심지였던 지금의 김해지역으로 보는 데 이견이 없다.

따라서 낙랑과 대방은 서남해안의 복잡한 해로를 거쳐 가야와 일본으로 갔고 반대로 일본과 가야도 이 경로를 통해 낙랑과 교류했을 것이다.

이를 뒷받침해주는 대표적인 유물이 중국의 화폐인 화천과 오수전이다. 이들 화폐들은 해남 송지 군곡리를 비롯해 거문도, 경남 사천 늑도, 마산 성산, 김해 회현리 그리고 제주도에서도 수습되고 있어 이들 상호간에 바다를 통한 교류가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특히 경남 사천지역의 늑도 패총지는 고대 해상교통로에서 송지 군곡리 만큼 주목되는 곳이다. 3차례에 걸친 발굴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늑도 패총지에서는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1세기에 해당되는 유물 1만3000여점이 수습되는데 낙랑계 토기와 중국 한대에 주조된 반양전과 거울, 일본 야요이 중기 문화와 관련된 토기들이 발견된다.

특히 김해 삼천포 늑도 패총지에서 출토된 단면삼각형 구연토기와 토기뚜껑, 고배, 조개팔치, 골각기 등의 유물은 송지 군곡리에서도 출토되었다. 

철기시대 서남해안의 해상 네트워크의 실체는 고성군 고성읍 송학리 고분군에서도 확인된다. 이곳 고분군은 소가야의 당시 정치 지도자들의 무덤으로 추정되는데 신라 백제를 비롯해 일본과 가야지역의 다양한 유물들이 수습된 바 있다.

또한 순천시 서면 운평리 유적에서도 대가야시대 유물이 다수 출토된다. 이곳 고분 발굴을 맡았던 순천대 발굴팀은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들을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했다. 따라서 백제가 이 지역을 차지하기 이전에 순천지역은 대가야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음을 확인시켜준 예라고 밝혔다.

가야계 토기는 중국의 화폐와 함께 서남해안 여러 포구도시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는 서남해안을 끼고 있는 고흥, 여수, 순천, 거제, 통영, 사천, 남해, 고성 등 여러 포구들이 낙랑과 일본, 가야와 대외활동을 전개했고 낙랑과 일본, 가야 해상세력들이 이곳 포구들을 중간 기착지로 이용했음을 추정케 한다.   

또한 해남 백포만을 비롯한 서남해안에 위치한 포구들이 국제항의 중간 기착지 역할을 했던 것은 가야를 비롯해 일본과의 근접성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가야와 일본과의 근접성 때문에 중국과 일본, 가야는 서남해안의 복잡한 포구들을 거쳐 가며 교역을 했던 것이다.

특히 해안선이 매우 복잡해 곳곳에 해상포구가 잘 발달된 거제지역만 보더라도 일본과 교류하기에 매우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거제시는 대마도와 약 6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서로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

고대사회 국제항의 거점 역할을 했던 서남해안은 그 해로상의 위치 때문에 숱한 왜침과 함께 임진왜란 때 주요 해전의 장소로 떠오르게 된다. 이순신 장군이 최초 거북선을 이용했던 사천전투와 한산도 및 노량해전, 명량해전 등이 모두 이 해로상에서 치러졌다.

임진왜란은 일본이 중국으로 진출하기 위해 일으킨 전쟁이었던 만큼 일본은 철기시대 국제항의 중간 기착지 역할을 했던 서남해안의 여러 포구들을 거쳐 가야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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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천년전 송지 군곡리는 해상무역 도시였다
1. 2천년전 송지 군곡리는 국제항구도시였다
2008년 10월 02일 (목) 13:49:26 박영자 기자, 노영수 기자 hpakhan@hnews.co.kr

현산면과 송지면 일대는 고대사회 해상세력이 활동했던 지역이다.
이들 해상세력은 현산면과 화산면으로 이어지는 백포만을 중심으로 한 바닷길을 이용해 중국 및 일본과 해상교역활동을 펼쳤고 송지 군곡리에 자신들의 항구도시를 세웠다. 
송지 군곡리 국제항구도시는 700년 간 유지되었고 현산 백포마을과 화산면 관동마을 바닷가에 위치했던 백포항은 고려시대까지 중국과 국제무역이 이뤄졌다.   
본지에서는 백포만 세력과 해상교역을 했던 경남 김해와 남해, 전남 고흥지역을 비롯한 서남해안 고대 바닷길을 찾아 해상 무역로를 기획 연재한다.   <편집자 주>

 

   
 
  현재 간척지로 변한 현산면 신방리 앞 백포만은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국제항 역할을 했다.  
 
   
 
  송지면 군곡마을 뒷편에 위치한 조개무지 잔등은 고대사회때 국제항구도시가 자리했던 곳이다.  
 

1986년 밝혀진 군곡리 역사

1986년, 철기시대 국제 항구도시였던 백포만의 면모가 세상에 드러났다. 목포대 박물관이 송지면 군곡리에서 세 차례에 걸쳐 3년간 발굴 조사한 결과 기원 전후 군곡리는 중국과 일본, 가야 문명권과 바닷길을 통해 해상무역을 했고 중국과 일본을 잇는 국제적인 항구도시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기원전 3세기에 생성되기 시작한 이 항구도시는 이후 700년간 존속했고 철기시대인 1세기 이후에는 중국과 일본을 이어주는 거점항구도시로서 역할을 왕성히 해냈다. 

이곳에서는 1세기 중국의 화천(돈)과 복골(점 치는 도구), 다량의 철기류와 일본의 토기류 및 복골 등이 수습되었다. 또 가야지역의 삼천포 늑도 패총지에서 발견된 토기류도 이곳에서 발굴되었다. 

국제적인 항구 도시였던 이 도시가 송지면 군곡리에 들어선 이유는 무엇일까.

송지면 군곡리는 백포만에 속한 지역이다. 백포만은 중국에서 일본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뱃길이다.

또한 백포만은 서해에서 남해로 꺾이는 꼭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백포만은 한중일 문물교류의 주요 거점 포구였고 군곡리는 포구 사람들이 거주했던 국제도시였다.

또한 백포만은 중국의 한나라가 고조선에 세웠던 낙랑과 대방군이 일본과 교류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 가야 했던 포구이기도 했다. 낙랑군과 대방군은 서해를 거쳐 백포만을 경유한 후 금관가야였던 김해를 통해 일본의 대마도로 들어갔다.

이같은 사실은 중국의 화천이 군곡리와 제주도, 고흥 거문도, 창원, 김해 등지에서 동일하게 발견되고 있다는 점이 증명해 준다.

그렇다면 군곡리에 세워진 국제 항구도시의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포구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는 변남주 교사는 침미다례라고 말한다.

군곡세력 백제 근초고왕 때 멸망

송지면 군곡리에 침미다례라는 소국이 들어서 있을 때, 영산강 유역에는 신미제국이라는 고대국가가 들어서 있었다. 영산강 일대에 들어선 신미제국은 독자적인 국가로 옹관고분(항아리 무덤) 이라는 독특한 묘제 양식을 남긴다. 송지 군곡리 일대에서도 대형 합구옹관묘가 발견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이 일대 세력은 영산강 유역의 신미제국과 관련이 있는 세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700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군곡리 국제 포구도시가 4세기 들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만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4세기 들어 백제와 고구려는 동맹을 맺고 낙랑군과 대방군을 축출한다. 3세기까지 동북아 해상교역은 낙랑과 대방군이 주도하고 있었다. 낙랑과 대방군을 추출한 백제와 고구려는 이제 동북아 연안항로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치열한 싸움을 전개한다.

이때 백제에는 위대한 군왕인 근초고왕이 있었다. 근초고왕은 평양성에서 고구려 군을 격파하고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후 연안항로의 주도권을 쥐게 됐다.

그리고 송지 군곡리에 있던 침미다례를 도륙한다. 역사서에 도륙이라고 표기한 것은 아마 침미다례 세력들이 백제에 필사적인 저항을 했었음을 의미한다. 이로서 군곡리 포구도시는 완전히 파괴되고 만다.         

현산 고현세력 등장

군곡리에 들어선 침미다례라는 국제 포구도시를 완전히 파괴해 버린 근초고왕은 그렇다고 백포만이 가지고 있던 국제적인 해상로로서의 위치를 가볍게 여기지는 않았다. 자신에게 반대한 군곡세력을 철저히 파괴한 대신 현산면 고현리에 새로운 도시를 만들고 군곡리의 역할을 대신하게끔 한다.  

그러나 백제의 동북아 해상교역의 주도권은 오래가지 못한다. 고구려의 반격이 시작된 것이다.
근초고왕 때에 성장했던 고현리 일대 유물을 통해서도 이를 알 수 있다.

현산초등학교에 소장된 토기는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백제계 토기가 아닌 가야계 토기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 때문이다. 이는 백제의 통제가 약화되자 고현세력은 독자적으로 가야와 해상교류를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국제도시 고현에서 월송으로

백제의 힘이 약화되자 백포만의 해상세력의 거점은 고현에서 현산면 월송리로 이동한다.
이때 백제에 눌려있던 일본의 홀로서기가 시작된다. 일본은 중국 남조에 접근하면서 한반도에 또 다른 세력들과 연대를 구축한다.

그 세력이 바로 해남 월송 세력과 영산강 유역 세력이다. 물론 일본의 부상에 대해 영산강 유역 신미제국을 주도했던 시종면과 반남면의 중심세력들은 이에 응하지 않는다.

이와 달리 해남의 월송세력은 백제의 간섭에서 벗어나 가야와 일본과의 문화교류를 활발히 전개했고 영산강 유역의 변두리 세력이었던 광주와 함평, 영광 등지의 세력들도 일본과 강화를 한다.

이러한 인연으로 현산 월송을 비롯한 이 지역에서는 일본식 무덤양식인 전방후원분이 광범위하게 분포하게 된다. 현산 월송리 조산마을에는 대형 고분이 남아있다. 그런데 이 무덤의 형태가 일본 무덤양식을 따르고 있다는 점이 이를 반증한다.

6세기 고현이 다시 국제도시로

6세기 들어 상황은 다시 급변한다. 무령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백제의 성왕은 수도를 사비(부여)로 천도하고 동북아 해상교역을 회복시킨다. 백제는 영산강유역의 신미제국을 점령하고 일본과 해남 월송세력을 아우르는 동북아 해상교역의 네트워크를 부활시킨다.

그리고 백제는 근초고왕 때 해양거점 도시로 확보한 현산 고현을 다시 부활시켜 새금현을 설치한다. 이와 함께 백제는 백포만 일대 산 정상에 산성을 중첩적으로 축조해 이를 요새화 한다.

고려시대 해남지명 첫 등장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시대에도 백포만은 중요한 국제 포구였다. 이때도 백포만의 중심 포구도시는 현산 고현이었다. 고려는 고현에 있던 새금현을 해남현으로 이름을 바꾸는데 해남이라는 지명은 이때 탄생되었다.      

백포만 일대에 있는 현산 신방리 백방산에는 중국 송나라와 교류했던 설화와 지명이 많이 전하고 있다. 고려에 왔다 돌아가는 송나라 사신을 애타게 기다렸던 첩이 백방산에서 기다리다 굳어져 망부석이 되었다는 설과 이제나 저제나 임이 올까 기다리며 건넸다는 탄식천 등이 그것이다.  

국제 포구였던 백포만은 그러나 고려 말에 이르러 쇠퇴하고 만다.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고려정부가 섬과 해안지역의 주민들을 내륙으로 이거시키는 공도정책(섬을 비우는 정책)을 폈기 때문이다. 이로서 현산면 고현에 있던 치소도 내륙인 현산면 구시리에서 삼산면 계동으로 그리고 조선 세종 대에 이르러 해남읍으로 이동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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