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太守의 낙랑은 BC108년부터 漢에 의하여 쓰여지고 漢, 高句麗, 魏, 百濟등 漢族과 東夷가 두루 사용하였다. 8. BC195年은 고리(高麗고려,高黎고리)의 해모수(解慕漱), 한(韓)의 기자(箕丕), 위만(衛滿)조선, 낙랑국(樂浪國)의 최숭(崔崇) 등으로 다분화되어 있던 시대로 분명히 한(漢)이 낙랑군(樂浪郡)을 설치하기 이미 90년이전에 이미 낙랑국이 국호로써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왕(王)은 바로 나라의 통치자였던 것이다 |
고구려발해
- 자명고(自鳴鼓)와 낙랑국(樂浪國) 2009.02.21
- 개마무사, 아무나 갖는 것이 아니다 2009.02.21
- 주몽의 초강법((抄鋼法) 비밀 2009.02.21
자명고(自鳴鼓)와 낙랑국(樂浪國)
개마무사, 아무나 갖는 것이 아니다
개마무사, 아무나 갖는 것이 아니다
전쟁의 역학구조상 상대방이 우수한 장비를 갖고 있다면 그 장비를 재빨리 모방하거나 보다 개선해 다음 전쟁에 활용하는 것이 상식인데 중국은 개마무사가 무적이라는 것을 알고도 개마무사를 주력군으로 육성하지 않았다.
물론 중국 역사를 통틀어 기마병을 전혀 도입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사용한 기병은 북방기마민족들이 중국을 점령했을 때 또는 중국의 용병으로 이민족들을 활용했을 때 활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이 개마무사의 위용을 잘 알고 있음에도 개마무사를 채택하지 않은 이유로 학자들에 따라 중국 특유의 전술에 기인한다는 설명도 있지만 보다 근원적인 요인으로는 중국의 제철 능력의 한계 때문으로 인식한다.
쉽게 이야기해 보면 고구려는 개마무사로 무장할 수 있는 철 생산 능력이 있었던 데 반해 중국에서는 철 생산 능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철의 종류를 구분할 때는 탄소 함유량을 기준으로 한다. 탄소 함량에 따라 주철(선철이라고도 하며 탄소 함량은 1.7~4.5%), 강철(탄소 함량 0.035~1.7%), 함유량이 적은 연철(시우쇠, 단철이라고도 하며 탄소 함량은 0.035% 이하)로 나뉘는데 용도에 따라 적절한 것을 택한다. 이 중에서 강철이 가장 늦게 발견됐다.
성질이 다른 철을 만드는 기본 제련 방식은 유사하다. 과거에 철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는 두 가지로 바로 철광석과 숯이다.
산화철은 700~800도의 낮은 온도에서 환원되므로 철은 액체 상태로 되지 않고 절반쯤 녹다 만 상태에서 굳는다. 이렇게 얻은 연철(괴련철)을 단조하면 철기를 만들 수 있다. 제련로의 온도를 높이는 방법이 간단한 것은 아니므로 대부분의 고대국가에서는 이러한 공정을 거쳐 철기를 제작했다.
고대 사극에서 자주 보이는 것은 좋은 칼을 만들기 위해 용광로에서 나온 철을 불에 달구고 두드리기를 반복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쇠를 두드리면 단단해지는 것은 쇠의 금속 성질 때문이다. 쇳덩이를 현미경으로 자세히 확대해서 보면 네모, 육각형, 오각형 등 모양만 다양한 게 아니라 크기도 제각각이다. 당연히 이런 조직들이 온도에 따라 조금씩 다른 특성을 나타내게 된다.
두드리는 동안 괴련철 속의 규소 등 이물질이 압출되고 조직이 치밀해진다. 그리고 이물질 중 배출되지 않는 것도 조직 안에 고루 분산되므로 조직이 균일화되고 전체적 강도가 높아지게 된다. 또한 가열된 괴련철을 숯에 넣으면 숯의 탄소가 철에 흡수돼 자연스레 철의 표면은 적당한 탄소를 함유한 괴련강(塊鍊鋼 : wrought iron)이 되며 이를 침탄법이라고 한다.
우리 선조들은 쇠의 날과 등의 두께를 달리하면 쇠의 성질을 인공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들은 쇠의 색깔이 황혼 빛에 이르는 순간을 포착해, 안쪽 날부터 시작해 등 부분까지 순간적으로 물에 담그는 것을 반복했다. 날 부분은 갑작스레 담금질하면 갈라질 수 있기 때문에 손끝에서 나오는 숙련된 기술이 필수적이었다. 이런 과정을 수백 번에 걸쳐 반복하면서, 날 부분은 강하게 만들고 가운데와 등 부분은 약하지만 유연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 칼은 칼의 표면 부분만 탄소가 함유된 강철이고 그 안쪽은 여전히 연철이므로 칼을 사용함에 따라서 표면의 강철은 부서지게 되고 칼이 강한 충격을 받으면 쉽사리 휘게 된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점은 칼 한 자루를 만드는 데 드는 시간과 인력이 너무도 과다하다는 점이다.
침탄법으로 철을 만들 수 있지만 청동처럼 철을 주물로 부어 칼의 형태를 만들고 마무리 단조를 통하면 칼의 생산력을 비약적으로 증가시킬 수 있다. 이를 선철(주철, cast iron)이라고 한다. 그런데 철을 녹이기 위해서는 순철의 경우 1천535도 이상이 돼야 하는데 고대에 1천500도 이상을 만든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여기서 장인들은 용융점을 낮추는 방법을 고안했는데 그 비결은 철에 탄소가 함유될수록 녹는점이 낮아진다는 것이다. 이때의 연로로 질이 좋은 숯을 사용한다.
제련로 안의 온도가 올라가면 CO 가스가 형성된다. 제련로 안의 온도가 700~800도에 이르면 CO 가스에 의해 철산화물이 Fe2O3 → Fe3O4 → FeO → Fe 순으로 환원되며 환원된 철은 탄소와 접촉하여 Fe3C로 된다.
한편 제철로 안의 온도가 1천50-1천100도에 이르면 광석 중에 포함돼 있던 맥석 성분이 석회와 작용하여 광제가 1천200도 이상의 온도에서는 액체 상태의 선철과 분리된다. 따라서 제철로 안에서는 쇳물과 용융된 광재가 생기는데 광제는 쇳물보다 비중이 작으므로 쇳물 위로 뜰 때 이를 분리하여 쇳물을 뽑아낼 수 있는데 이때의 선철은 약 3~4퍼센트의 탄소가 함유돼 있다.
선철(주철)은 보통 백색주철과 회색주철로 나뉘는데, 백색주철은 탄소가 탄화물 형태로 결합돼 흰색을 띠므로 백색주철(철탄소합금계 가운데서 용융점이 1천130도로 가장 낮은데도 주조성이 좋으며 강도가 높고 내마모성이 좋다)이라고 부르며 회색주철은 탄소가 흑연형태로 포함되면서 겉면에 퍼져 회색빛을 띠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쇳물을 그대로 주형에 부어 칼을 만들면 외형은 나무랄 데 없는 칼이지만 나무 등을 세게 치면 곧바로 깨져버린다. 날을 세우려고 망치로 두드려도 깨져버리고 숫돌로 갈아도 워낙 경도가 높아 제대로 날이 서지 않는다.
관건은 주철에서 탄소를 적당히 제거하는 것으로 비밀은 주철을 고열에서 일정시간 가열해 주는 것이다. 주철 표면의 탄소가 산소와 결합하여 제거된다. 또한 철은 온도 변화에 따라서 탄소함유율이 낮은 페라이트상과 탄소 함유율이 높은 오스테나이트상을 오가므로 이 과정에서 철 내부의 탄소가 유리돼 한 곳으로 뭉쳐 흑연덩어리를 형성해 철 자체의 탄소량이 감소한다. 이렇게 가열가공을 거쳐 탄소량을 2.3~3.4퍼센트로 만든 전성주철(展性鑄鐵) 혹은 가단주철(可鍛鑄鐵)은 연성이 있어 어느 정도의 단조작업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 방법의 문제는 재가열 과정에서 철이 산화되는 것은 물론 탄소량의 감소가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또한 철 내부의 흑연괴로 인한 경도 약화로 농기구 등을 만드는 데는 문제가 없으나 무기에 사용할 수 있는 정도의 고강도의 철 즉 강철을 얻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러므로 장인들은 고강도의 철을 손쉽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소위 선철에서 손쉽게 탄소를 제거하는 방법인데 가장 먼저 개발된 방법은 초강법(炒鋼法)이다. 초강법은 녹은 상태의 주철에 고운 흙이나 산화철 가루 등 탈탄제(脫炭劑)를 넣고 저어서 주철의 탄소가 철광석 가루와 결합하여 제거되도록 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탄소가 제거되면 철의 용융점이 높아져서 곧 굳게 되므로 잘 저어주고 센 불로 계속 가열하여야 한다. 이 경우 약 2퍼센트의 탄소를 함유하는 비교적 고품질의 강철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방법의 문제점은 탄소 함유량을 정확히 조절하는 것이 어렵다는 점이다.
또 한 가지의 방법은 관강법(灌鋼法)이다. 주철과 순철(연철)을 함께 섞어 열을 가하면 탄소함유율이 높은 주철이 1천200도 내외에서 먼저 용해된다. 순철은 주변의 주철로부터 탄소를 흡수하면서 용융점이 낮아져 1천300-1천400도에서 녹아 주철과 섞이게 된다. 이렇게 되면 탄소량이 과다한 주철은 탄소를 잃고 탄소량이 부족한 순철은 탄소를 얻게 돼 적절한 탄소량을 가진 강철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강법은 초강법에 비하여 탄소량의 조절이 보다 용이하다는 장점이 있다.
고고학사에 의하면 기원전 25세기경 수메르에서 철기를 만들었으며 강철은 아르메니아 지역의 히타이트족이 기원전 2천 년경에 개발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강철을 용광로에서 직접 얻은 것이 아니라 연철의 표면을 침탄법으로 열처리하여 강철로 변화시킨, 질이 낮은 것이다. 이 기술은 히타이트족이 계속 주조법을 독점하다가 그들이 멸망하자 여러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철이 생산된 지 거의 10세기가 지난 기원전 12-10세기가 돼서야 이란, 팔레스티나, 메소포타미아 및 지중해 동부 지역에서 강철이 제련된 것도 그 때문이다.
한편 중국에서의 철기 사용은 기원전 1100년경으로 올라가지만 기원전 7세기인 춘추전국시대에 비로소 주철의 주조가 가능했다. 이는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러서야 중국에서 진정한 철기시대가 시작됐음을 의미한다. 이때의 제강법은 단철을 여러 번 불에 넣어 단련함으로써 강철을 얻었으므로 백련강(百鍊鋼) 천련강(千鍊鋼)이란 명칭만으로도 그 제조의 어려움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단조에 의해 생산되는 철제무기는 매우 고가여서 극히 일부에서만 사용됐으므로 정작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는 통일제국 성립 후까지도 여전히 청동제 무기만을 사용했다. 청동을 사용하는 진나라가 철기를 사용하는 열국들을 격파한 것은 고대사의 미스터리 중에 하나이다.
초강법(炒鋼法)이나 주철탈탄강법(鑄鐵脫炭鋼法)을 사용한 강철은 한나라 초기인 기원전 1세기경에 비로소 나타나며 이후 더 이상의 제철기술 발전이 미미하여 문화혁명기까지도 거의 동일한 방식으로 제철이 이루어진다.
중국의 영향을 받아 우리나라 문화가 진전됐다는 학설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의 철기는 중국보다 당연히 늦어야 한다.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철기시대가 언제 시작됐느냐는 문제는 대체로 두 가지 설로 나뉜다. 그 하나는 중국 전국시대(기원전 475-221년)에 ‘명도전(明刀錢)’과 함께 유민들이 한반도로 유입되면서 철기문화가 들어왔다는 설이며, 다른 하나는 기원전 108년 한무제가 고조선을 침략할 때 한나라의 금속문화가 도입됐다는 견해이다.
그런데 중국 전국시대의 유적지 가운데 철기가 출토된 지방은 20여 군데에 이르고 있는데 대부분의 지방이 고조선 영역이다. 이것은 이들 유물이 중국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 지역에 살고 있던 고조선인들에 의해 개발됐다고 믿는 것이 자연스러운 추론이다. 즉 중국과 완전히 다른 청동기술을 발전시킨 고조선에서 철기도 독자적으로 발전됐다는 뜻이다. 특히 고조선은 그 당시 세계 어느 나라도 갖지 못한 첨단 기술인 강철을 주조하는 기술까지 갖고 있었다.
평양의 강동군 송석리 1호 석관 무덤에서 나온 직경 15센티미터, 두께 0.5센티미터의 쇠로 된 둥근 거울은 앞면이 매끈하고 뒷면에 1개의 꼭지가 붙어 있는데 절대 연도가 무려 3104±179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탄소 함량이 낮은 강철은 용광로에서 선철과 산화제를 작용시켜 얻는데 이 쇠거울의 화학 조성은 탄소가 0.06%, 규소 0.18%, 유황이 0.01%인 저탄소강이었다.
더구나 탄소가 적은 저탄소강임에도 불구하고 굳기가 연철보다 강하고 유황도 매우 적은 양이다. 일반적으로 탄소 함유량이 1.0% 미만인 저탄소강은 온도가 적어도 1천500도 이상 되는 용광로에서 직접 얻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쇠거울은 연철이나 선철을 두드려 만든 것이 아니고 용광로에서 직접 얻은 쇳물로 주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평양시 강동군 항목리에서 출토된 쇠줄칼은 연대가 다소 내려가는 기원전 7세기경의 탄소 공구강인데 겉면에 격자 문양이 나 있어 줄칼 형태를 모두 갖추고 있다. 재질은 탄소가 약 1.0%, 규소 0.15%, 유황이 0.0007%였으며 줄칼에 단접부가 없고 높은 온도에서만 형성되는 조직을 갖고 있다. 이 쇠줄칼도 쇠를 완전히 용융한 상태에서만 얻을 수 있으므로 중국보다 훨씬 앞선 시기에 강철다운 강철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학자들은 고조선 지역에서 발견되는 강철의 비율을 볼 때 고조선 장인들이 제련로 안의 온도를 적어도 1천400도 정도 유지한 상태에서 철을 14-16시간 정도 녹여냄으로써 질 좋은 강철을 생산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고조선 장인들이 이와 같은 철을 생산할 수 있었던 것은 제련로의 완벽한 설계, 연료와 탄소 공급원으로서의 숯의 사용, 효율적인 송풍관 등 덕분이다.
고조선 영역의 철 생산지는 매우 광범위하다. 대표적인 것은 은율 일대 노천 철광상으로 철제 망치와 징이 출토됐다. 또한 『고광록』에는 요하 하류 지역(요동)인 안산과 철령(쌍성), 개주(개평), 요양, 승덕, 심양 등지에서 주로 자철광과 적철광을 채취하여 철을 생산했다고 적혀 있다.
고조선 지역에서 생산된 강철이 주목받는 이유는 간단하다. 당시 서아시아에서도 강철이 생산되기는 했지만 저급품이었다. 그런데 고조선에서 생산된 강철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확보하지 못한 고온의 용광로에서 직접 얻은 질 좋은 것으로 그 연대도 무려 기원전 1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것이 고조선이 강력한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고 추론할 수 있는 근거이다.
한민족이 건설한 2번째 국가로 추정되는 부여의 경우도 철기 생산에 있어서는 선진국이었다. 『삼국지』〈위지동이전〉에는 부여의 군사들이 투구ㆍ활ㆍ화살ㆍ칼ㆍ창을 병기로 삼고 집집마다 갑옷과 휴대 가능한 무기를 갖추고 있었다고 적혀 있는데 이것은 거의 다 철로 만든 것이다.
부여 영역에는 오늘날의 길림성, 흑룡강성, 러시아의 하바로프스크 일대 등 철 생산지가 많다. 무산군 범의구석 유적에서도 연철제품이 발굴됐고 이들은 기원전 7-5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곧바로 다음 단계인 선철 생산 단계로 이어진다.
강철은 기원전 2-1세기에 제련됐는데 무산군에서 발견된 강철 도끼는 탄소가 1.55퍼센트, 규소가 0.10퍼센트, 망간이 0.12퍼센트, 연이 0.07퍼센트, 유황이 0.08퍼센트였다. 이 도끼는 탄소의 함유량이 1퍼센트 이상인 매우 단단한 극경강으로 부여 사람들이 제품의 용도에 맞게 철을 자유자재로 다루었음을 보여준다.
고조선과 부여의 제철 기술이 고구려로 전승돼 각종 장비를 질 좋은 철로 만들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추론이다. 2001년과 2004년 아차산 제4고구려보루에서 출토된 철기를 대상으로 최종택, 박장식 교수가 금속학적 미세조직을 분석한 결과 연철을 대상으로 한 침탄제강법과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관강법(灌鋼法)으로 강철을 만든 흔적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이는 고구려에서 고대 철기기술의 양대 산맥으로 볼 수 있는 두 가지 제강법은 물론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다양한 제강법을 사용하여 각 제품에 알맞은 철기를 제작했음을 보여준다. 한마디로 고구려 독자의 철강 기법으로 여러 가지 철기를 만들었다는 뜻이며, 고구려의 철기문명 수준이 매우 뛰어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고구려 동천왕이 철기병 즉 개마무사 5천 명을 동원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그들을 무장시키기 위한 철의 양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개마무사 1인당 말 갑옷 최소한 40킬로그램, 장병의 갑옷 무게 20킬로그램, 기타 장비를 포함하여 10킬로그램을 휴대한다고 해도 최소한 70킬로그램의 철이 소요된다. 이를 5천 명에 적용한다고 단순하게 계산하더라도 350톤의 철이 필요하며 예비량을 가정한다면 최소한 500여 톤이 필요하다.
현대의 제철 기술로는 500여 톤이 그다지 크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약 1800년 전에 이 정도로 많은 양의 철을 생산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고구려의 개마무사는 앞선 철기문명을 바탕으로 탄생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고구려의 저력은 중국보다 앞선 철기문명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고려할 때 최근 인기 있는 TV 역사드라마에서 부여가 강철을 만들 수 있는 초강법을 터득하지 못하고 절절 매고 있을 때, 중국의 한나라는 철기군을 운용하고 있는 모습은 실제의 역사와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알지 못하고 막연하게 우리 민족은 중국 한(漢)족에 비해 문명의 수준이 뒤떨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매우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계속)
참고문헌
「고구려를 다시보자(2) 벽화로 본 고구려」, 이태호, 동아일보, 2004.03.22
『한국의 7대 불가사의』, 이종호, 역사의 아침, 2007
『조선기술발전사』,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94
고조선에서의 제철 및 철재 가공기술의 발전, 박영초, 조선고고연구, 1989년 1호
『세계 최고의 우리 문화유산』, 이종호, 컬쳐라인, 2000
『조선광업사』, 리태형, 공업종합출판사, 1991
『신라 법흥왕은 선비족 모용씨의 후예였다』, 장한식, 풀빛, 1999
「환도산성과 한강유역에서 출토된 철기에 나타난 고구려의 철기기술」, 박장식, http://blog.naver.com/bestchoi21?Redirect=Log&logNo=20013974168
/이종호 과학저술가
2007.07.31 ⓒScience Times
주몽의 초강법((抄鋼法)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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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2006-10-16 |
“드디어 초강법의 비밀을 풀었습니다. 황토를 넣었더니 한(漢)나라의 검을 능가하는 강철 검이 탄생했습니다.” 최근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역사드라마 ‘주몽’에서는 단단하고 부러지지 않는 칼을 만들려는 우리 민족의 노력이 눈물겹다. 과연 우리 선조의 철기기술은 어느 정도였을까. 그저 중국 기술을 전수받아야만 했을까. 철 소재는 철(Fe)을 위주로 하는 금속재료다. 하지만 철이 동서고금을 통해 가장 널리 쓰이는 소재로 자리 잡는 과정에서는 탄소(C)의 역할이 지대했다. 철 소재는 탄소함량에 따라 연철(iron), 강철(steel), 주철(cast iron)의 세 종류로 구분한다. 거의 철원자로만 이뤄진 소재가 연철이며, 탄소함량이 중량비로 0.05~2.0%에 이르는 소재는 강철, 2.1~4.3%에 이르는 것은 주철이다. 철기기술의 핵심은 탄소함량 조절 철 소재에 탄소함량이 늘어나면 녹는 온도는 급격하게 낮아지며 강도는 높아진다. 연철은 철원자 사이의 빈 공간에 소량의 탄소원자가 제멋대로 들어간 상태다. 하지만 탄소함량이 어느 정도를 넘으면 철원자 셋에 탄소원자 하나가 기본(Fe3C)인 ‘시멘타이트’라는 강하지만 부서지기 쉬운 조직이 나타난다. 주철은 강철보다 탄소함량이 높아 시멘타이트가 차지하는 비율도 높다. 때문에 주철은 강도가 높지만 충격을 받으면 쉽게 깨진다. 반면 연철은 강도가 약해 잘 구부러진다. 드라마 ‘주몽’에 나오는 괴련철(塊鍊鐵)은 연철의 하나인 해면철(海綿鐵)이다. 드라마에서 괴련철로 만든 검은 강도가 약해 부러지기 십상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부러지지 않고 휘어지기 쉽다. 강철은 충분한 강도를 지니는 동시에 충격에 잘 견디며, 가공과정에서 두드림이나 각종 열처리를 거쳐 그 성질을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어 쓰임새가 가장 큰 철 소재다. 강철에 담금질 같은 열처리를 하면 단단해지는 이유는 ‘마르텐사이트’란 새로운 조직이 생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제강법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당대 철기산업의 기본골격이 결정된다고 볼 수 있다. 강 소재는 철광석을 녹여 직접 뽑아내기보다 이미 생산된 연철이나 주철의 탄소함량을 조절하는 제강공정에서 생산된다. 강을 만드는데 연철을 사용하면 탄소를 투입해야 하며 주철에는 탄소를 제거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철기기술의 핵심이 곧 탄소함량을 조절하는데 있다는 뜻이다. 드라마에서 초강법의 비밀이 황토라고 나온다. 초강법의 핵심은 액상의 주철에서 탄소를 제거하는 방식이다. 공기 중의 산소를 이용해 탄소를 태우거나(산화시키거나), 액체상태의 주철에 녹슨 철가루나 철광석 가루를 넣어 이들 내의 산소로 주철의 탄소를 태워낼 수 있다. 부여의 야철대장 모팔모가 넣은 황토에 이런 산화철성분이 있었다면 주철(생철)이 강철(숙철)로 바뀔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모팔모가 부러지지 않는 강철 검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피와 땀을 흘려야 했다. 고구려 연철기술, 유럽서 왔을까 철기기술은 어떤 경로를 거쳐 고구려에 성립됐을까. 철기시대는 오늘날의 터키나 중동지역에서 시작돼 유럽 전역으로 전파됐다. 최초의 철 제련은 녹는점보다 훨씬 낮은 1000℃ 부근에서 이뤄졌다. 산소는 상온에서와 달리 800℃ 이상의 온도에서는 철보다 탄소와 결합하려는 성질이 강해진다. 따라서 목탄과 철광석을 섞어 가열하면 철광석 중의 산소는 탄소와 결합해 탄산가스의 형태로 날아가고 철만 남는다. 이렇게 생산된 최초의 철은 대부분 탄소함량이 매우 낮은 연철이었다. 연철로 만든 철기는 이전의 청동기에 비해 무르며, 쉽게 부식될 뿐 아니라 모양도 나을 것이 없었다. 그러나 연철로 제작된 철기에 탄소원자를 침투시켜 강 소재로 변화시키는 기술이 개발된 뒤부터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연철에 탄소를 침투시켜 강도를 보강하는 기술은 가장 오래된 철기기술이자 14세기에 이르기까지 2500여년 동안 유럽을 풍미한 핵심기술이었다. 비록 후대이기는 하나 바로 이 기술이 고구려의 아차산 화살촉에서 확인된다는 점은 그 전파경로를 상상할 때 흥미롭기 짝이 없다. 연철을 기반으로 하는 제강기술은 대량생산에 적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생산방식이 비효율적이라 더 이상 사용되지 않고 있다. 오늘날의 한국과 중국을 포함하는 동아시아의 철기시대는 유럽에 비해 시작이 다소 늦었으나 기술체계 면에서 유럽과 전혀 달랐다. 2500여년 전 철기시대가 열리는 처음부터 녹이는 제련공정을 통해 주철소재를 생산했다. 탄소함량이 높아지면 원래 1538℃인 철의 녹는점이 급격히 낮아진다. 4.3%의 탄소를 포함하는 주철의 녹는점은 1150℃ 부근으로 구리의 녹는점 1084℃보다 그리 높지 않다. 구리를 녹일 수 있으면 주철도 녹일 수 있다는 얘기다. 문제는 주철이 충격에 매우 약하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지역에 주철을 바탕으로 하는 기술체계가 확고하게 성립할 수 있었던 이유는 주철에서 탄소를 제거해 강 소재를 생산하는 다양한 제강기술이 일찍부터 개발됐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무순 화살촉과 아차산 철 덩이는 주철을 대상으로 개발된 제강법 중 가장 대표적인 두 예를 보여준다. 특히 아차산 철 덩이 유물은 관련 제강기술이 최초로 개발되는 시점에 제작된 것이다. 고구려의 철기기술이 첨단에 있었다는 의미다. 유럽에서는 15세기경 주철을 산업용으로 생산하기 시작한 뒤 주철을 바탕으로 하는 새 제강법을 개발하는데 열을 올렸다. 유럽인들은 동아시아에서 이미 1000년 이상 쓰고 있던 기술을 빌려와 실용화하고 특허를 출원하며 생산설비를 개량함으로써 산업혁명의 기틀을 마련했다. 하지만 당시의 기술자들은 제강공정에 드는 막대한 연료 때문에 대량생산의 문턱에서 고전하고 있었다. 돌파구는 우연한 상황에서 열렸다. 19세기 중반 영국의 헨리 베세머는 공기 중에 노출된 주철제품이 그리 높지 않은 온도에서 연철로 변화되는 과정을 우연히 목격했다. 여기서 영감을 얻은 베세머는 액체 주철에 공기를 불어넣는 실험을 했다. 그 결과 공기 중의 산소로 녹은 주철 내의 탄소를 태우며 강을 생산하는 베세머법을 개발했다. 특히 주철의 탄소가 탈 때 발생하는 열이 그대로 공정에 쓰여 종전과는 달리 별도의 연료가 필요하지 않았다. 고구려시대 철기기술 주몽이건국한 고구려의 철기기술은 어느 정도 수준이었을까. 역사책에 별다른 기록이 없기 때문에 철기유물을 직접 분석해 당대의 기술을 파악해야 한다. 2001년 필자는 서울 아차산에 있던 옛 고구려군의 초소에서 발견한 화살촉과 용도가 분명치 않은 철 덩이, 그리고 만주 무순의 옛 고구려성에서 출토된 화살촉을 분석했다. 3점의 유물은 5세기나 6세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아차산 화살촉 조각은 분석 결과 중심부의 연철 주변을 탄소함량 0.5~0.6%의 강 소재가 에워싸고 있음이 밝혀졌다. 처음 화살촉의 소재는 연철이었다는 뜻이다. 강도가 낮은 연철을 두드려 화살촉으로 제작한 뒤 탄소원자를 화살촉에 침투시켜 표면 근처의 탄소함량을 높였을 것이다. 높은 온도로 달아오른 목탄 속에 화살촉을 장시간 묻어두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에서 연철이 생산됐으며 연철에 대한 제강법이 개발됐음을 의미한다. 무순 화살촉에는 중심부에 연철이 아니라 약 4.3%의 탄소를 포함하는 백주철이 자리하고 있었다. 백주철은 고대의 주철제품에서 가장 흔하게 발견된다. 주철로 제품을 만들자면 주철의 녹는점이 낮다는 점을 활용해 녹여 붓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그런데 화살촉의 주철 주변은 탄소함량 0.7~0.8%의 강철로 둘러싸여 있다. 표면에서 탄소원자가 제거된 것이다. 주철을 녹여 미리 준비한 틀에 부어 화살촉을 제작한 뒤 이 화살촉을 녹지 않을 정도의 높은 온도에서 장기간 가열하면 표면에서 탄소원자가 나와 표면에 강철 층이 만들어진다. 고구려에서 주철소재가 생산됐으며 탄소함량을 낮춰 강을 생산하는 제강법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아차산 철 덩이는 왼쪽의 강철 부위가 오른쪽의 백주철에 에워싸여 있다. 이 형상은 연철이나 주철을 개별적으로 사용해서는 얻을 수 없다. 주철과 연철 조각을 한데 묶어 주철의 녹는점 이상으로 가열하면 주철이 녹으면서 고체인 연철을 에워싸게 된다. 탄소원자는 농도가 높은 액체 주철에서 농도가 낮은 연철로 이동한다. 이 과정에서 주철 부위는 탄소를 잃고 연철 부위는 탄소를 얻어서 동시에 강 소재로 변한다. 아차산 철 덩이는 연철과 주철을 함께 사용해 강철 소재를 만들던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같은 제강법이 고구려에 있었다는 귀중한 물적 증거다. 특히 이 기술은 동일한 기술이 중국 문헌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최초의 시기와 별 차이가 없어 중국에서 들어온 것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철기유물 3점을 분석한 결과 고구려의 철기기술체계는 놀랍다. 고구려 장인들은 연철과 주철을 함께 생산했고 이들 기본소재를 이용해 다양한 제강법을 개발했다. 철기기술의 핵심은 탄소함량을 조절하는데 있다. 화학조성에 대한 인식이 현대와 같지는 않았을지라도 탄소함량 조절에 관한 한 고구려인의 인식은 현대와 비교해도 손색없다. 시대 앞선 동아시아 주철기술 그럼에도 유럽에서 개발된 베세머법의 어머니 기술은 고대 동아시아에 있던 초강법이다. 동아시아에 성립돼 있던 과거의 찬란한 철기기술이 서양학자들에 의해 밝혀지기 시작했는데, 그 연구대상은 주로 중국과 일본이었다. 하지만 최근 신라의 황남대총이나 김해 대성동 소재 가야의 고분군, 그리고 천안 용원리의 백제 고분군과 서울의 아차산과 구의동 소재 고구려 유적지에서 출토된 철기유물을 분석한 결과 우리나라에는 실로 다양한 철기기술이 있었으며 지역마다 특색 있는 기술체계가 성립돼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아차산과 무순의 철기유물 분석 결과를 보면 고구려만 해도 이미 5, 6세기에 철기기술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연철을 기반으로 한 유럽식 제강법과 주철을 바탕으로 한 동아시아식 제강법을 모두 구사했으며 이런 기술은 여러 발전 단계를 거친 것으로 추정된다. 유물에서 확인되는 기술수준으로 보아 고구려에서 초강법이 실행됐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드라마의 대소왕자처럼 우리 기술이 모두 중국에서 비롯됐다는 걸 당연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고구려 건국시기처럼 고대에 나온 철기유물을 직접 분석해 옛날 우리 기술을 체계적으로 밝혀야 한다. 그러면 철기기술의 성립과정에서 우리 민족의 역할이 중대했다는 사실을 세계의 학자들에게 알릴 수 있지 않을까 |
[출처 LG사이언스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