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발률 정복을 위해 고선지장군과 휘하의 당나라 군대가 넘었을 탐구령(Darkot Pass).사진= 장영주 KBS PD  

唐나라 開元 15년(727년) 음력 11월. 마침내 慧超 스님(704~787년)은 당나라의 수도 長安에 당도한다. 약 4년간 천축(인도)과 서역을 巡遊한 뒤다. 20대 초반의 젊은 승려가 교통과 숙식이 용이치 않았을 낯선 세상 험한 곳으로 장기간 장거리 여행을 감행한 그 용기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여행은 즐거움과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다. 집 떠나면 개고생이란 말이 있다. 여행은 인내를 요구한다. 혜초 스님이 겪어야 했던 갖가지 고생이 대략이나마 그려진다. 그가 귀로에 세계의 지붕 파미르 고원을 넘었다. 고산병으로 얼굴이 호빵처럼 붓고 울렁증이나 두통으로 당장에라도 쓰러지고 싶었을 것이다.

서역과의 교류에 대한 중국 사신의 말을 기록한 『宋書』 「夷蠻傳」 第57 豫州蠻條는 이런 이야기를 담고 있다. “漢代 서역의 언어를 번역할 수 있어 먼 곳까지 통할 수 있게 되니, 길이 난 곳이 수만 리가 됐다. 頭痛之山을 넘는데, 밧줄을 타고 건너가야만 하는 험난한 곳을 넘고, 죽음의 길을 살아서 지나가려니, 몸은 앞으로 나가는데 魂은 돌아가려 할 지경이었다.”

파미르를 넘는 일이 얼마나 험난한 일인지, 목숨을 건 도전인지를 보여주는 기사다. 두통산이란 표현은 웃음을 자아낸다. 필경 고산증 증세로 나타나는 두통 때문에 산 이름을 그렇게 부른 것 같다. 그러나 해발 3천 미터만 되면 어느 곳에서고 두통이 생기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頭痛之山이 특정한 山이름인지는 모르겠다. 『通典』 卷193 「邊防」 渴槃陀條와 『漢書』 「西域傳」에 따르면, 두통산이 지금의 신장 타시쿠르간(Tashkurgan) 타지크 자치현의 갈반타 서남쪽에 있고, 고대 인도의 계빈(Kapisa)으로 통하는 험준한 산으로, 大頭痛山과 小頭痛山으로 나뉘어 있다고 한다.
 

   ▲ 수그드 강 남쪽에 자리한 소그디아나의 도시들. Rabinjan(혹은 Arbinjan) 근처에 월지의 Kush clan(玉氏族)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Kushaniya가 있다.사진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Rabinjan  

혜초 스님은 토화라에 있던 겨울 어느 날 문득 눈을 만나 난감한 심정을 오언시로 표현했다. “차디찬 눈보라 얼음까지 섞여 몰아치고/ …… / 우물가는 도사린 뱀처럼 얼어붙었다/ 횃불 벗 삼아 오르며 노래 불러보건만/ 저 파미르 고원 어찌 넘을 것인가.” 蔥嶺 즉 파미르를 넘기 전이다. 파미르고원이 어디든가. 세계의 지붕이라 불리는 산악고원지대다. 이곳에 과거 護蜜國이 있었다. 호밀이란 나라 이름은 胡麥 또는 黑麥이라고도 하는 호밀(rye)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왕의 居城은 색가심성(塞迦審城). 여기가 심상치 않은 곳이다.

『신당서』 「서역전」이 전하는 호밀국 이야기를 먼저 읽어본다.

“護蜜은 달마실철제(達摩悉鐵帝) 혹은 확간(???侃)이라고도 부른다. 북위 때에 발화(鉢和)라고 불렀던 것인데 역시 吐火羅의 고지이다. 왕의 거처는 색가심성(塞迦審城)인데 북쪽으로  湖河(아무다리야 강)에 임해 있다. 사람들은 푸른 눈동자를 하고 있다. 현경 연간에 그 땅을 鳥飛州로 삼았고, 국왕 사발라힐리발(沙鉢羅???利發)을 자사로 임명했다. 그 곳은 四???이 토화라로 들어가는 길의 입구에 해당하며, 예전에는 토번에 복속했. 개원 8년(720) 그 왕인 나려이타골돌록다비륵막하달마살이(羅旅伊陀骨???祿多毗勒莫賀達摩薩爾)를 왕으로 책봉했다.”

놀랍지 않은가. 여기 사람들이 푸른 눈동자를 갖고 있다니. 기억을 더듬어보자. 돌궐과 오손인의 신체적 특징이 푸른 눈에 붉은 머리라는 사실을 인문학기행 초반부에 얘기했다. 그렇다면 호밀국의 주민은 돌궐, 오손과 같은 종족일 수도 있다. 왕의 이름도 흥미롭다. 사발라힐리발. 沙鉢羅는 어떤 음, 어떤 의미를 지닌 말일까. 돌궐제국(552~744년)의 5대 카간 阿史那 攝圖(ashina shetu or setu, ‘white dragon’이란 뜻)의 칭호도 沙鉢略(또는 始波羅)이었다. 돌궐비문에 근거해 이 이름은 이시바라(Ishbara)라고 읽는다. 돌궐제국의 창건자 伊利可汗(Illiq Qaghan) 阿史那 土門의 동생으로 西面可汗 즉 서돌궐의 엽호(yabghu)였던 阿史那 室點密(재위: 552~575년)은 Istemi의 음차어다. 어쨌든 왕의 칭호로 Ishbara를 같이 쓰는 이상, 그렇다면 호밀국(왕)은 돌궐과 같은 언어와 칭호를 사용하는 족속이라고 말해도 좋겠다.

開元 8년(720년) 唐 조정에 의해 왕으로 책봉됐다는 당시 호밀왕의 官稱 ‘나려이타골돌록다비륵막하달마살이’도 그가 돌궐과 동계임을 의심케 하기에 충분하다. 이 긴 칭호에 포함된 한자어 骨???祿, 莫賀는 돌궐인명에서 흔히 보는 어휘다. 위구르 제국 초대 가한 칭호의 한자어 표기도 골돌록으로 시작한다. 골돌록비가궐가한. 이는 고대 투르크어 Qutlugh bilge k¨ul qaghan의 음사로 ‘고귀하며 현명하고 강한 군주’라는 의미 깊은 칭호다. 그 왕의 거처가 색가심성이라 했다. 이 또한 파미르에서 발원하는 아무다리야강, 정확히는 지류인 판지강(the Panji)의 南岸에 있는 이시카심(Iskashim)城의 음차자다. Iskashim을 한자어로 전사하는 과정에서도 어두 모음 /i/가 탈락됐다.

파미르고원 와칸 계곡(중국 사서의 호밀)에 생활 터전을 가지고 있는 주민들은 스스로를 이시코슈미(ishkoshum´l) 내지  이시코시미(ishkoshim´l)라고 부른다. 인도-아리안 자료에 근거할 때 첫음절 ish-는 Saka(索種)를 나타내며, koshum은 ‘land, earth’의 의미를 지닌다. 이 둘이 합쳐져 이시카심이 탄생했다. 이시카심은 ‘색종(사카족)의 땅’인 것이다. 월지에 밀려 어디론가 사라진 색종이 세계의 지붕 파미르, 판지강이 흐르는 와칸 계곡에 터전을 잡고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 고대 색종의 후예일 수도 있는 이시카미 마을의 어린이들.  

아프가니스탄 북부 바닥샨주(the Province of Badakhshan) 판지강 상류 좌안에 사는 1천500에서 2천 명 정도의 이시카시미들이 예나 지금이나 무심히 흐르는 판지강 건너 타지키스탄 고르노-바닥샨 자치구(the Gorno-Badakhshan Autonomous Region) 이시카시미구 뉴트(Nyut) 키시라크(qishlaq: ‘촌락’)의 동족들을 바라보며 생활하고 있다. 역사의 비극이다.

그렇더라도 자연경관은 비경 중의 비경이다. 판지강 북쪽은 와칸산맥, 남쪽은 그 유명한 설산 힌두쿠시. 『魏書』 「서역전」과 『北史』 「서역전」 第85 鉢和國條는 힌두쿠시의 장관을 이렇게 말한다. “발화국은 갈반타의 서쪽에 있다. 그 풍토 역시 추우며, 사람과 가축이 함께 사는데, 땅을 파서 그곳에 거주한다. 또한 큰 설산이 있는데 바라보면 마치 은색 봉우리와 같다. 그 주민들은 오로지 보리떡만 먹고 밀로 빚은 술을 마시며, 모전으로 만든 외투를 입는다.”

여기서 말하는 발화국은 와칸의 한자어 음차어로 바로 호밀국이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의아하겠지만,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설명 하려 한다. 위의 글에서 ‘바라보면 마치 은색 봉우리 같은 대 설산’이라고 한 산이 다름 아닌 힌두쿠시다. 이번 글의 표제 일부분을 ‘인도의 玉’ 힌두쿠시 산맥이라고 한 건 Hindukush에서의 kush가 다름 아닌 ‘玉’을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Kush라는 어휘를 재삼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토템으로서 玉을 부족명으로 삼은 월지의 갈래가 본거지를 떠나 서역으로 이주해 간 경로나 흔적을 찾는데, 이 kush라는 어휘가 큰 역할을 한다.

천산일대를 거점으로 유목생활을 하던 색종은 월지에 밀려 어디로 갔을까. 그것이 한동안 궁금했었다. 그리고 그들의 기원이나 언어 풍습 등은 어떠했을지도 무척 알고 싶었다. 일단 호밀국 혹은 발화라국으로 알려진 파미르 산중의 나라가 색종의 왕국이었음을 알았고, 그들의 신체적 특징과 언어에 대해서도 다소간의 정보를 얻었다. 잠정적인 결론이지만 색종은 돌궐과 동종이라고 조심스럽게 말할 수 있다.

『신당서』, 『구당서』의 호밀국은 休密(『후한서』), 胡密丹(『梁書』), 胡蔑(『一切徑音義』) 등으로도 표기된다. 『대당서역기』는 호밀을 拘迷陀라 적고 있다. 이는 프톨레미(Ptolemy, AD 83년경~168년경.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 천문학자, 지리학자, 점성학자인 클라우디오스 프톨레마이오스를 말한다)가 말하는 Komedai와 아랍 문헌 자료에 보이는 Kumed와 같은 것이다.

“실크로드는 로마령 시리아의 수도인 안티오크를 출발해 …… 메르브(Merv)를 거쳐서, 그리고 이 시기 인도-스키타이 사람들 즉 중국에서는 월지 또는 인도에서는 토화라인으로 기록된 사람들이 지배하고 있었던 박트라(Bactra, 大夏)로 이어졌다. 이곳에서 실크로드는 파미르 고원으로 들어갔다. 프톨레미에 의하면 이 산맥의 계곡 즉 ‘코메다이(Komedai) 언덕’의 아랫자락에는 돌탑이 있고, 그 부근에서 ‘비단’을 운바하는 중국(seric) 상인들과 레반트 상인들이 물품을 교환했다”.(르네 그루쎄,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90쪽)
결국 護密 등의 다양한 이표기는 구미타의 拘迷와 같은 음 즉 /kume/을 다른 한자로 전사한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이 무슨 뜻을 지니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호밀의 또 다른 명칭인 鉢和나 확간(둘 다 Wakhan의 음차)의 의미를 검토하면 혹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위서』 「서역전」 伽倍國條는 흥미로운 내용을 전한다. 가배국이 옛 휴밀흡후이고 도읍은 和墨城이라는 것이다. 사차의 서쪽에 있고 代와는 1만3천리 떨어져 있으며, 그곳 사람들은 산 계곡 사이에 거주한다고도 했다. 가배국이 옛 휴밀흡후라는 것은 과거 휴밀흡후였던 곳이 위서가 기록될 당시에는 가배국이라 불렸다는 말로 이해된다. 도대체 흡후(yabghu)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月氏의 수령을 나타내는 것으로 알려진 이 말은 원래 토하라어에서 ‘땅, 지방’을 뜻하는 ‘yapoy 혹은 ype’라는 말과 연관이 있다고 하는데, 나는 아직 이에 대해 자신이 없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마침내 총령을 넘어간 월지의 또 다른 행적을 찾을 수 있는 단초가 되는 귀중한 문헌기록을 발견한 것이다. 후일 쿠샨왕조를 세운 大夏(Bactria)의 오흡후 중의 하나인 귀상흡후는 옛 휴밀흡후였던 가배국의 서쪽 560리, 代와는 1만3천560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겸돈국이라고 『위서』 「서역전」 겸돈국條는 기록하고 있다. “겸돈국은 옛 귀상흡후로 도읍은 호조성이다. 절설막손의 서쪽에 있고 대와는 1만3천560리 떨어져 있다. 산 계곡 사이에 거주한다.”

그런데 『위서』 「서역전」보다 훨씬 오래전에 쓰여진 『前漢書』 「서역전」 第66 大宛國條에 대완국의 도읍이 貴山城이며, 서남으로 690리 떨어진 곳에 대월지국이 있고, 토지, 풍토, 물산, 민속이 대월지, 안식과 동일하다고 전한다. 여기서 말하는 貴山은 月氏가 복속시킨 오흡후 가운데 하나인 貴霜과 어원적으로 동일하며 둘 다 Kushan 내지 Kushaniya를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추정은 월지의 한 갈래인 Kush족이 이동 중에 흩어져 여기저기 자리를 잡으며 자신들의 흔적을 지명 등으로 남겼다는 전제를 받아들일 때 의미가 있다. 참고로 현재 우즈베키스탄에는 사마르칸드 서북쪽에 과거 소그드인의 도시라고 알려진 Kushaniya가 있다.

가배국(휴밀흡후)과 겸돈국(귀상흡후)의 사이에는 절설막손(雙靡흡후)이 있었다. 가배국에서 서쪽으로 500리 떨어진 곳이다. 쌍미흡후의 위치와 관련해서 『신당서』 「서역전」은 호밀의 북쪽은 識匿(Shighnan), 남쪽에는 商彌가 있다고 했다. 덧붙여 말하기를, “상미는 오흡후의 하나로 그 지방의 크기는 2천 리가 넘는다. 포도가 많이 나고, 자황도 나오는데 돌을 굴착해서 그것을 얻는다. 동북으로 산을 넘어 700리를 가면 波謎羅川(파미르강)에 이른다. 동서가 천리이고 남북이 백리이며, 봄과 여름에 비와 눈이 내린다”고 했다. 

과거 귀상흡후였던 겸돈국에서 서쪽으로 100리 떨어진 지점에 옛적에 힐돈흡후였던 불적사국이 자리 잡고 있었다. 代와는 1만3천660리 떨어진 곳이며, 이 나라 사람들 역시 여타 나라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산 계곡 사이에 거주했다. 도읍은 薄茅城이다. 弗敵沙는 이 일대의 지명인 Badakhshan의 音譯이 아닐까 싶다.

불적사국에서 남쪽으로 100리를 가면 閻浮謁國이 나오는데 여기는 과거 高附흡후이고 도읍은 高附城이다. 代와는 1만3천760리 떨어져 있으며, 여기 주민들도 역시 산 계곡 사이에 거주한다. 『後漢書』는 다섯 번째 흡후로 고부가 아니라 都密을 들고 있다. 그 진위야 어찌됐든 大夏를 구성하던 오흡후의 하나인 옛 귀상흡후 겸돈국이 나머지 4개 흡후를 규합해 쿠샨왕조를 수립하게 된다. 중국사서가 계속해서 쿠샨제국을 월지라 부른 이유를 알만하다. 귀상흡후는 물론 파미르 산중의 다른 흡후들이 모두 월지에 속하는 씨족 내지 부족이었던 것이다. 귀상이 玉을 뜻하는 월지어 kush이듯, 나머지 네 흡후의 명칭도 월지어를 한자로 전사한 것이며 나름대로의 상서로운 의미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을 다 아는 것은 현재로선 역부족이다.

 연호택 가톨릭관동대·영어학

연호택 가톨릭관동대·영어학 editor@kyosu.net


열사의 땅을 벗어나 ‘~스탄’ 지역으로 … 세계의 지붕 파미르를 넘어서
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초원에서 흑해까지_ 26. 사막이여, 안녕! 반갑고야, 파미르!― 서쪽으로 간 월지의 행방(1)
2014년 11월 25일 (화) 15:18:07 연호택 가톨릭관동대·영어학 editor@kyosu.net

   
  ▲ 비단길 교통로의 요충지 돈황. 이곳을 넘어서면 어떤 세계가 펼쳐질까. 감숙과 돈황의 패자였던 월지는 흉노에 쫓겨 세계의 지붕 파미르를 넘어 이동해야 했다. 사진 장영주 KBS PD  

 
마침내 사막을 떠나 세계의 지붕 파미르를 넘게 된 월지의 부류가 누구인지알아보려 한다. 왜 이들에 주목하는가. 이들이 한 때 ‘소그드인의 땅’이라는 의미의 소그디아나로 이주해 가 중앙아시아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기 때문이다. 드디어 열사의 땅을 벗어나 ‘-스탄(stan)’ 지역으로 진입하게 된다.


“만들어진 습관은 우리가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습관은 단지 어떤 상태일 뿐 아니라 어떤 경향이자 능력이기도 하다.” ―라베송, 『습관에 대하여』

필자가 중앙아시아 국가 우즈베키스탄에 처음 간 것은 2001년의 일이다. 19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해외여행이 습관이 될 무렵이다. 우즈베키스탄이라는 나라 이름이 우즈벡족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나라 즉 ‘우즈벡의 땅(-스탄)’이라는 뜻임을 알고 호기심이 생겼다. 이런 호기심, 새로운 것에 대한 관심이 나의 여행벽을 만들었고, 학문에 싫증을 느끼지 않도록 했다. 우리말 ‘땅’의 중세어가 ‘ㅅ다’인데 수만리 떨어진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어찌해서 이와 흡사한 ‘stan’이 사용되고 있을까? 저들과 우리와의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호기심을 충족하고 해결하려는 이런 식의 나의 오래된 버릇 혹은 습관이 나의 세상살이 경향이자 대단찮은 능력이라고 나는 믿는다.


우즈베키스탄은 물론 다른 중앙아시아 국가들도 대부분 다종족 사회다. 백 여 개의 민족이 혼재해 있고 따라서 인종적 혼혈(hybrid)이 꾸준히 이어져 왔다. 그 결과는 다양한 생김새다. 또 하나 미인이 많다. 그래서 우즈베키스탄에 갔다 오니 친구들이 “그 동네 여자들 모두가 영화배우라며?” 호기심 어린 질문을 했다. “에이 뭘!”이라고 답은 했지만, 속으로는 ‘그렇긴 해’라고 수긍을 했던 기억이 있다.
이런 가벼운 호기심과는 달리 이번 글은 무겁게 들어가고자 한다. 무겁다는 것은 참담한 슬픔에 처한 월지, 억지 이주할 수밖에 없는 비극적 운명에 공감해 그들의 심정을 진지하게 헤아리고, 그들의 행방을 가급적 소상히 추적하려는 의도를 말하는 것이다. 이미 알고 있지만, 월지의 西遷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배경과 결과를 개관하자면 아래와 같다.


기원전 176년 월지는 선우 모둔이 이끄는 흉노 연합군에게 치욕적 패배를 당한다. 다시 몇 년 뒤 이번에는 모둔의 아들 노상선우에게 월지 수령이 죽임을 당하는 최악의 일이 벌어진다. 그뿐이랴. 首級이 베어지고 그것도 모자라 두개골이 술잔으로 만들어지는 가공할 시련에 봉착한다. 원수는 갚아야 하거늘, 그러기에 상대해야 할 적은 너무나 강했다. 회복하기 어려운 치명타를 입은 월지는 어떻게 됐을까. 정든 곳을 떠나는 것이다.


월지는 본디 기련산맥을 배후지로 감숙과 돈황 등지에 주거지를 두고 河西는 물론 타림분지의 지배자 노릇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서역과 중국의 교역 중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뿔뿔이 흩어지는 離散은 기득권인 상권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주 후의 삶은 익숙한 것, 누리던 것과의 이별을 의미한다.
흉노에 쫓긴 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본거지에서 내몰린 이들이 천산산맥 북쪽 일리하 일대의 초원과 이식쿨 호수 주변 지역으로 이동해갔음을 우리는 진즉 알고 있다. 그로 인해 천산 주변의 선주 세력이던 塞族이 마지못해 서천과 남천을 결행했음도 문헌 기록을 통해 확인했다.


짐작컨대 쫓기는 무리의 행렬은 반드시 하나가 아니었을 것이다. 돈황에서 서쪽으로 나서면 천산 이남의 오아시스 지역과 통한다. 그곳에 성곽도시들이 있었다. 그리고 陽關을 나서면 가까이에 小國 약강(羌)이 있고, 이곳을 통해 南山 북안의 오아시스 지역에 쉽게 이를 수 있다. 가깝고 멀다는 것은 상대적이다. 실제 약강은 甘州로부터 서남방으로 1천5백리, 양관으로부터는 1천8백리나 떨어져 있었다. 장안으로부터는 6천3백리 길이었다.


중국 한자음으로 뤄창이라 불리는 약강의 위구르 명칭은 차르클릭. 고대 미란 유적이 있는 곳이다. 당나라 때는 吐蕃의 땅이 됐다. 땅의 주인은 이렇게 수시로 바뀐다. 하면 漢나라 때 명칭이 왜 羌인가. 약강이라는 지명의 기원은 이곳의 주민이 若人과 羌人으로 구성된 때문이었다. 이들이 거주한 지역은 현재 신강(新疆)의 약강현(若羌縣) 일대다. 明나라 때까지도 이곳에서는 유목생활이 이뤄졌다. 사서에 따르면 여기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은 성곽이 없고, 모전(毛氈) 즉 羊毛섬유로 만든 장막을 설치하여 거처로 삼았다. 産物은 대부분 낙타, 말, 소, 양이었다. 약강에서 서북쪽으로 가면 선선국(善國) 즉 모래 속에 묻힌 전설의 왕국 누란(樓蘭)에 이른다. 그리고 강릉에도 서울에도 경주에도 있으며, 중국 곳곳 어디에나 있는 南山은 여기서는 웅장한 곤륜산맥을 가리킨다.


패망한 월지는 부족 중심으로 움직였을 것이다. 이주 경로로 천산남로를 선택한 집단을 필자는 玉의 부족 쿠시(Kush) 혹은 카시(Kash)로 추정했다. 車師前王庭(및 後王庭), 구자국(龜滋國), 이전에는 소륵국(疏勒國)이었던 카시가르의 車師, 龜滋, 喀什의 음이 대체로 그와 같은 추정을 뒷받침한다. 이들 쿠시 부족이 후일 파미르 고원을 넘어 오늘날의 인도 북서부 카시미르로 이동해 왕국을 건립하기에 이른다. 이들이 살던 산악지역은 힌두쿠시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박트리아왕국의 소흡후(小翕侯)에 불과했던 이들이 마침내 인도 북부를 지배하는 귀상(貴霜) 왕국 즉 쿠샨왕조를 수립하게 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이 쿠샨조를 중국은 여전히 월지라 불렀다.


사막남로 즉 곤륜산맥 북쪽 기슭을 따라 이주한 집단은 어찌 됐을까. 『삼국지』 魏志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 서융(西戎)조에 자로(虜)와 월지(月氏)의 여종(餘種)에 대한 설명이 있다.
“燉煌西域之南山中,從羌西至領數千里,有月氏餘種葱茈羌·白馬·黃牛羌,各有酋豪,北與諸國接,不知其道里廣狹.傳聞黃牛羌各有種類,孕身六月生,南與白馬羌……(돈황과 서역의 南山 가운데에는 약강에서부터 서쪽으로 총령에 이르는 수천 리에 걸쳐 월지의 여종(餘種)인 총자강(葱茈羌), 백마강(白馬羌), 황우강(黃牛羌) 등이 있고 각자 추호(酋豪)를 갖고 있다. 북으로는 여러 나라와 접하고 있는데, 그 거리와 광협은 알 수가 없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황우강은 여러 종류로 돼 있으며, 아이를 잉태하여 6개월이 되면 출생하고, 남쪽으로는 백마강과 인접하고 있다고 한다.)” 그랬다. 비록 흉노에 패했지만, 월지가 전멸한 것이 아니었다. 살아남은 자들이 저마다 길을 달리해 생존의 길을 모색했다. 그리고 총자강, 백마강, 황우강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었음을 중국 史書는 말해주고 있다. 왜 羌일까. 그 지역의 선주민이 羌族이었던 것이다. 손님으로 찾아간 월지는 이들 부근에서 혹은 이들 속으로 들어가 마침내 이들과 섞여 살게 됐다. 혼인도 하고 문화도 교류하면서.


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을 시작하며 필자는 기원전 2세기 월지의 서천이 중앙아시아의 인문학적 지평에 미치는 영향을 검토하고자 했다. 우리는 알고 있다. 기련산맥을 배후지로 감숙과 돈황의 패자였던 월지가 같은 유목집단 흉노에 패해 서쪽으로 이동하게 된 사연을. 그리하여 새로운 영토에서 일부는 정복자로, 또 다른 일부는 남아서 혹은 인근 지역으로 이주해 피정복 주민으로서의 삶을 살았음을. 후자의 경우 세월이 흘러 점차 잊힌 존재가 됐을 것임도 짐작할 수 있다. 강족과 동화된 월지 집단이 그러하다.


역사는 산 자의 기록이다. 자기 옹호의 산물이다. 앞서 이번 글은 원 거주지를 벗어나 파미르 고원 이동의 사막 오아시스 지역과 천산산맥 초지로 삶의 터전을 옮긴 월지의 보다 정확한 위치를 살펴보려고 한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이 말은 마침내 사막을 떠나 세계의 지붕 파미르를 넘게 된 월지의 부류가 누구인가도 알아보려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왜 이들에 주목해야 하는가. 이들이 한 때 ‘소그드인의 땅’이라는 의미의 소그디아나로 이주해 가 중앙아시아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되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들의 이주 및 정착 과정을 살피는 속에서 소그드인에 대한 다양하고 흥미로운 이야기가 거론될 것이다. 드디어 열사의 땅을 벗어나 인문학기행의 행선지는 ‘-스탄(stan)’ 지역으로 진입하게 되는 것이다.


몽골초원(과거에는 달리 불렸을 것이다)을 중심으로 한 초원의 지배자는 수시로 바뀌었다. 흉노, 선비, 유연, 돌궐, 위구르, 키르기즈, 키타이, 몽골 등의 순이었다. 이들은 항가이 산맥 서쪽에 자리 잡은 외트겐을 시원지로 혹은 성산으로 삼았다. 양과 말을 치며 유목생활을 영위했다. 바이칼이나 흥안령산맥 주변의 종족들은 추위에 강한 순록과 더불어 살았다. 그래서 순록을 자신들의 族名으로 삼았다. 선비의 한 갈래인 탁발부(拓拔部)가 바로 저들 말로 순록을 가리키는 tabu를 족명으로 사용했다. 이들은 흥안령산맥과 훌룬 부이르 일대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집단이었다. 代나라 땅으로 이주해 와 오호십육국 시대를 거치며 하북을 평정하고 魏를 세웠다. 대나라는 지금의 내몽고자치구 呼和浩特 西南의 盛樂을 수도로 한 제후국이다. 탁발선비가 세운 위라나를 우리는 北魏라 부른다. 저들 스스로 삼국시대 조조 부자의 魏를 계승한 것으로 자임한 때문이다.


과연 ‘소그드’는 무엇일까? 한자어로 粟特, 束毒 등으로 표기된 이 집단 혹은 국가 명칭은 어떻게 해서 생긴 것일까? 束毒 즉 Sogd(or Soghud)를 필자는 ‘소’를 뜻하는 말 sog와 명사 복수형 어미 -ud~ut의 결합으로 이해한다. 즉 Sogd라는 ethnonym(종족명)은 소를 기르는 집단을 가리키는 명칭인 것이다. 시베리아의 Saha(or Saka)족을 주변 종족들이 야크소를 기르는 집단이라 해서 Yakut라는 타칭(exoethnonym)으로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Sogd 혹은 Soghud가 과연 소종족일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티베트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吐蕃(티베트족)은 羌族과 蕃族 두 민족 간의 혈연적 융합의 하이브리드다. 아로장포(雅魯藏布)강 유역을 제외한 티베트 지역은 거의가 고대 羌族의 땅이다. 吐藩은 중국 史書의 기록이고, 이 말이 서양으로 전해지면서 티베트(Tibet)가 된 것이다. 티베트인 스스로는 농업인이라는 뜻의 뵈파(博巴)라고 불렀는데, 유목민 조파(卓巴)와 차별을 두고자 하는 의도가 엿보인다. 토번의 ‘蕃’은 ‘농업’을 뜻하는 ‘博’(뵈)과 발음이 같다. 암소와 숫야크 사이의 하이브리드인 조(dzo, dzho, zho, zo)는 노새처럼 이종교배의 산물로 주로 짐 싣는데 이용된다. 조는 수컷이고 암컷은 조모(dzomo)라 부른다. 조모는 번식능력이 있는데 비해 수놈 조는 생산능력이 없다. 슬픈 존재다.


농사를 생업으로 하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야크소나 혼혈종 조의 등에 물자를 싣고 북방으로부터 내려온 소몰이 집단이 야만인으로 보였을 것이다. 농업사회에서 소는 귀하게 여기는 동물이다. 배가 고프다고 함부로 잡아 막을 수 없다. 그럴 경우 다음 해 농사를 짓기 어렵기 때문이다. 사람은 굶어도 소는 먹여야 한다. 티베트에는 3대 방언 지역이 있다. 먼저 위장(衛藏)방언 지역. ‘위장’은 수도인 라사가 위치한 아로장포강 하류 유역의 정치적 ‘중심지’를 가리키는 티베트어 ‘위’와 쉬가체 등지를 포함하는 아로장포강 상류 유역의 종교적 중심지의 ‘聖潔’을 가리키는 ‘장’의 합성어다. 그런데 동남지역에 해당하는 바얀카라(巴顔喀拉: ‘풍요롭고 검다’는 뜻)산 이남 지역의 康巴(캄파)들이 사는 康(캄)방언 지역에서 소(牛)를 so라 부른다. 기련산과 바얀카라(巴顔喀拉)산 사이 靑海湖 주변과 하서회랑 일대의 티베트 북부 안다방언 지역에서는 소를 sog(~sok)라 한다.


So/Sog은 중국 사서에 등장하는 모우강(牛羌)을 가리키는데 사용된다. 모우 즉 야크소를 기르며 사는 羌族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티베트인들에게 so는 야크에 다름 아니었다. 13세기가 돼 몽골인들이 과거 모우강의 땅에 들어왔다. 티베트 사람들은 자신들을 문명과 세련됨의 표준으로 삼고 북쪽의 몽골을 야만인, 오랑캐의 땅이라는 뜻에서 So(의 땅)라고 비하해 불렀다. 그렇다면 Sogd는 소(sog) 즉 야크를 유목하거나 방목하는 집단이라 할 만하다.


티베트인들은 야만스런 오랑캐를 호르(Hor)라고 부른다. 다른 지역 티베트인들에게 캄파(康巴)는 ‘호르’(Hor)로 불리기도 한다. 캄파들이 사는 참도지역이 고대에는 西羌부족들이 살았기 때문이다. 티베트 사람들에게 羌族은 오랑캐인 호르였다. 『蕃漢對照東洋地圖』에서는 회골국(廻骨國) 즉 위구르의 나라를 Hor로 적고 있다. 북방의 이민족은 다 호르인 셈이다. 칭기즈칸의 조상도 호르라 불렸다. 칭기즈칸은 ‘호르 장겔제뽀’라고 불렸다. 漢族을 호르라 부르는 일은 없다. 『번한대조동양지도』에 의하면 吐蕃의 자칭은 Po다. 『梵語雜名』은 토번을 Bhuta라고 기록한다. 머리가 복잡해진다. 그러고 보니 우리도 ‘호로자식’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 말이 어쩌면 티베트에서 수입됐을지도 모른다. 물론 한자어 胡虜에서 들어왔을 가능성도 있다. 정확한 진실을 알기에는 옛일이 너무나 막연하다.



연호택 가톨릭관동대·영어학

월지족月支族의 서천西遷은 조작이다.

   

 월지는 현재 신비에 쌓인 정체 불명의 민족으로 여겨 지고 있으나, 일부 그 문헌에 남아있는 자료를 추적하면, 조선사를 푸는 열쇠가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① 대월지 | 大月氏

중국 전국(戰國)시대에서 한(漢)나라 때까지 중앙아시아 아무다르야강(江) 유역에서 활약한 이란계(系) 또는 투르크계의 민족.

전국시대 말기에는 서몽골로부터 간쑤[甘肅] 서부, 황허강[黃河] 상류, 동(東)투르키스탄, 중가리아, 서(西)투르키스탄의 일부에까지 미치는 대세력이었다.


BC 3세기 말 흉노(匈奴)가 갑자기 일어나자 그 압박에 쫓겨 서쪽으로 이동하여 아무다르야강 북안에 중심을 두고 그 남쪽의 대하(大夏:드하라의 음역으로, 아프가니스탄의 北半 드하레스탄을 가리키며, 당시 그리스인 식민왕국 박트리아의 중심지)를 지배하였다. 그것은 한(漢)나라가 대월지(大月氏)와 더불어 흉노를 협격(挾擊)하고자 하여 장건(張騫)을 파견한(BC 139) 직후의 일이었다. 대월지는 이 제안을 거절하고 대하 지방의 통치에 힘써 파미르·힌두쿠시의 남북에 토착제후(土着諸侯)인 다섯의 흡후(翕侯)를 두고 다스리게 하였다.


AD 1세기경 다섯 흡후의 하나인 귀상흡후(貴霜翕侯)가 대두하고, 이어서 대월지에 대신하였다(쿠샨왕조). 또한 황허강 상류 유역에는 대월지의 잔존세력이 남아 있어서 소월지(小月氏)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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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②주석: <漢書>서역전에 대하여 보면, ‘大夏 (박트리아),에 5흡후가 존재한다, 그들은 대월지에 복속한다’ 라고 나오는데, 한서<漢書>에는 대하와 월지를 분리하여 다른 종족으로 보고 있고, 5흡후翕侯가 박트리아 고유의 제도, 즉 토착제후라고 하고 있다. 반면에 <後漢書> 서역전에는 , 대월지가 이주해간 지역이 처음부터 대하였다. ‘遂遷于大夏’ 즉 5흡후가 대월지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학계는 이 사실을 가지고 후한서의 저자가 대하의 흡후가 대월지라고 오해하고 있다고 하고 있으며, 그 이유는 <후한서>를 편찬할 때에 이미 많은 시간이 흘러, 대월지가 서천한 사실이 애매해 졌기 때문일 것이라고 해설하고 있다. 이것은 <후한서>의 저자가 오해한 것이 아니고, 후대의 역사 조작 세력이 <한서>를 조작하여, 원래의 박트리아 지역이 대하와 아무런 관련이 없고, 월지가 서천했다는 사실을 부각시키기 위해, 즉 조선사를 동쪽으로 옮기었기 때문인 것이다. (월지를 현 감숙성에다가 옮겨 놓았다.)

 

  즉 박트리아가 월지족의 바로 아래, 박트리아가=대하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한 술책인 것이다.(결국 같은 세력이 된다) 즉, 월지의 위치는 현 아프카니스탄에서 아무하를 넘어 발하슈호 일대에 까지 인것이다. 거기에 원래 있었던 월지족을 만리 가까이 돈황 감숙성 부근으로 심어놓은 것이 지금의 역사이다.


  게다가 , 한헌석 칼럼에서 이미 밝혀진 대로 함흥=발흐를 현 만주로 이식시켰기 때문에 결국 월지는 그대로 현재의 박트리아 지역을 중심으로 있었고, (그것은 조선의 역사에서 부여가 된다.) 다만 흉노에게 그 북쪽 지역이 점령당하여, 세력이 축소되어 진 것 뿐이다. 따라서 월지, 즉 박트리아 대하, 는 원래의 아프카니스탄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뻗어 있는 부여가 되는 것이며, 흉로는 그 서쪽과 서북지역에 위치하게 되는 것이다. 역시, 흉노의 중심 강역을 1만리 이상이나 옮겨 놓았다. 어떻게 이렇게 교묘한 언도 도단을 할 수 있는 것 인가.. !. 이 몇 개의 단어만 살짝 바꾸어도 역사가 180도로 달라지다니, 그 마귀같은 솜씨에, 경탄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흉노는 흑해 일대에서, 이란을 제외하고 , 아랄해 부근까지에 있었고, 그동쪽 ,동남쪽으로 대하=월지와 나란히 존재했던 것이다. 흉노는 하夏의 후예라고 하였으므로 하 = 대하이며, 사카, 스키타이, 키타이,카라키타이 족이다. 결국 흉노는 통사에서의 하왕조가 멸망하고, 박트리아에서 쫓겨난 것이며, 자기 고향을 되찾기 위해 월지와 자웅을 겨루게 되는 것이다. 그 싸움에서 월지가 패하고, 아랄해 동쪽지역을 일시적으로 상실하여, 중심이, 발흐쪽으로 남진한 것을 만리 동쪽으로 강역을 조작하여 마치 월지의 고향이 돈황, 감숙성인 것처럼 교묘하게 꾸며 놓은 것이다. 또한 흉노나 월지나 똑같은 하의 후예이므로, 그것은 내전 동족상잔 일뿐 서로 완전히 다른 세력간의 싸움이 아니다, 당시는 주조, 단군 조선의 조대명, 주왕조가 쇠퇴하는 시기였으므로, 각지에서 군벌들이 일어나서 싸우는 시대였다.

결국 월지는 서천한것이 아니라 남천을 하였고, 만여리를 이동한 것이 아니라, 단 몇 백리를 잃었을 뿐이다. 결국 지금의 박트리아지역이 원래 월지국이 있던 곳이고 같은 사람들을 뜻하며, 그것은 즉 곧 부여이다. 그곳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가 나온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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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합니다. 그리고 한발짝 더 나가 봅시다. 위 지도의 파르티아, 박트리아, 마우리아를 합했던 진제국의 진시황이BC 221년 나머지 스키타이 중국을 다 통일합니다. BC 206년 한고조 유방이 함양에 들어가 진을 멸합니다. BC 202년 항우를 패퇴시키고 한왕조를 성립시킵니다. 당시의 문명권 전체를 아우르는 것입니다. 이 한제국을 서안 이동으로 옮겨 조작하고, 흉노와 구려를 조작합니다. 이 세가지가 다 HAN(HUN) KOREA입니다. 이 시기의 이 문맥에서 흉노와 구려가 조작된 것입니다. 이 시기(BC 3C 말)의 월지도 조작됩니다. 장건이 BC138년 이 대하(사기 대원전)로 사신으로 옵니다. 이게 말이나 됩니까? 가설 삼아 공부해 볼만하지요. 감사 08.10.12 10:26
장건전은 거짓말이 확실합니다. 이글을 쓰면서 느꼈던 점은 25사는 다 조작이다, 처음부터 다시 써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08.10.12 10:57
대월지를 설명하는 도입부에서 'BC 3세기' 흉노에 밀려 서천을 하였다는 기록으로 시작하십니다... 위에서는 그 유역을 아무다르여강이라고 설명을 하셨는데, 원본의 강이름도 동일한 지요?... 보통 흉노가 나온다면, 중앙아시아 서쪽지역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 기본이 아닌지요?... 08.10.12 11:07
만약 모든 역사기록드링 중앙아시아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면, 구지, 이동이라는 표현을 쓸 필요가 있었을까요?... 당시는 유목시기입니다. 상대적으로 이동이 손쉬우며, 강력한 세력에 의해 근거지가 쉽게 옮겨 질 수 있는 시기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명적인 접근은 유목에서 도시화로 변경된 고려이후의 접근에 타당성이 있다고 사료됩니다.. 08.10.12 11:10
특정의 주장이 절대 바뀌지 말아야 할 '신념'이 되었기에, 모든 사서의 기록이 조작으로 가는 것입니다. 조작이라는 말은 상당히 심각한 단어이고, 최후의 순간에 주장할 수 있는 민감한 사항입니다. 08.10.12 11:14
제가 인용한 부분은 현재의 통설입니다. 그것을 비판한 것입니다. 08.10.12 14:45
조선과 고려의 역사가 동쪽으로 이동된 역사라면, 대월지 국의 역사도 동쪽으로 이동된 역사일 수 있을음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장건과 당나라도 마찬가지 입니다... 08.10.12 11:18
만약 동이와 대월지가 서로 상반의 관계에 있는 집단이라면, 상대적으로 이집단이 위치해야하는 곳은 동이의 반대쪽인 적어도 흑해와 그 왼쪽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08.10.12 11:23
부디! 정착을 하여 성을 쌓으려고 하지 마시고, 지속적으로 창의적, 창조적 접근을 하시어, 가려진 역사의 진실에 도달할 때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았으면 합니다. 자칫하면, 대조연이 현재까지 이루어놓은 많은 발견이 하나의 잘못된 가설로 인해, 외면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08.10.12 11:41
맞습니다. 사람은 이동을 합니다. 당시가 유목사회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혼동하도록 역사를 조작했고, 스키타이를 야만으로 만들었습니다. 또한 유목에서 문명을 받아들여 정착생활로 변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 입니다. 왜냐하면,인간은 나약한 존재이니까요. 그래서 조선이 신라이후 부터 썩어 들어가기 시작하여, 결국 조선이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정착만 강조했으니까요. 그 이전은 유목과 , 정착을 잘 조합하여 나라를 다스립니다. 그 중심에 황제가 있습니다. 덕이 있는 군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과유불급이라고, 넘쳐도 안되고, 모자라도 안됩니다. 유목민족만 강하고 좋다고 할 수 없고, 정착이 또 더 좋다 08.10.12 14:49
고려의 행정구역을 보더라도, 개경을 제외한 기타지역은 상설행정구역이 아니라, 안찰사가 파견되는 비정착적 행적구역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것이 조선으로 오면서, 정착적 제도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삼국과 그전의 시대에는 유목의 시대입니다. 그 사이에 도시가 있는 것입니다... 역사의 흐름속에서, 사회의 발전과정이, 우리들의 해석에 반영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08.10.12 15:00
신라, 고려에서 조금씩 모순이 나타나고 조선에서 결정적으로 정착을 강조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신라는 천하를 통일했습니다. 그래서 안주하는 것입니다. 물이 고이면 썩게 되있습니다. 08.10.12 15:02
바로 그렇습니다. 유목적 색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전투력은 유목력이 강해야 극대화 되는 것이죠... 08.10.12 15:19
할 수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양자가 조화를 이룰 때에 그 것이 톱니바퀴처럼 잘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태극의 원리이고, 새상의 이치라고 생각하기에 이러한 주장을 하는 것이고, 끝까지 진실에 도달할 때까지 긴장 늦추지 말라는 그말 새겨 듣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08.10.12 14:51
유목(고대삼국)->과도(고려)->정착(조선)->현대(디지털유목)으로 변화되는 것이 진정한 태극의 이론이 아닐까요?... 하나는 음과 양으로 구성되어있고, 또 그 음과 양 각각에도 음과 양이 있습니다. 전체적인 구도의 태극의 법칙은 '유목'에서 -> '정착'을 거쳐->다시 '디지털 유목'으로 흘러가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08.10.12 15:00
동의 합니다. 그것을 잘 아시는 분께서 왜 혼란을 느끼시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한헌석 칼럼을 저는 맹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동의 하는 것 뿐입니다. 다시 한번 보아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이제 찾기 시작했는데 증거를 제시하라고 하시는 것은 저같은 무지랭이에게는 벅찬일입니다. 시간을 두고 계속하여 관심가져주시고, 비평하여 주십시오 08.10.12 15:06
문제는 '대조명'과 '고구려/당조'가 가지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나라의 역사로 볼 수 있는 사건이 어디까지인가를 규명해야 본 내용이 풀려집니다... 이민족의 역사가 우리민족 역사의 중심이 될 수는 없습니다..... 08.10.12 15:34
이민족은 없습니다. 현 중국대륙에 있는 역사도 조선의 역사입니다. 내것 니것이 없습니다. 과거에 오랑캐 였던 사람도 중원으로 들어가 황족이 되고 이것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반복이 된 것 뿐입니다. 고려,조선이라는 개념의 상당히 광의의 개념입니다. 08.10.12 15:47
한, 중, 일을 다른 민족으로 분리시키는게 역사조작세력들의 목표였습니다. 이이제이 방법을 써서 아직까지도 통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중일 아니 아시아 유럽은 모두 같은 역사 틀 안에서 있는 것인데 이것을 현대국가와 민족개념을 도입하여 갈기 갈기 찢어 놓은 것입니다. 08.10.12 15:49
이민족은 존재합니다. 서구에서 그린 타타르의 그림에서도 여진복장의 서양인이 등장합니다... 08.10.12 15:57
아시아인이 이민족이라는 이야기 아닙니다.. 아시아인이 이민족성이 나타납니까?... 이민족이라는 것은 Western을 뜻합니다... 08.10.12 15:58
민족개념은 서양이 19세기에 만든 것입니다. 이민족이라기 보다 서로 황제가 되려 했던 것이죠 08.10.12 16:25

월지족은 의견이 너무 많고 일치점을 찾기 어렵습니다. 이 페이지를 번역하다가 참고문헌에서 북경사범대 서문명의 논문을 먼저 번역해서 이 사이트에 올렸습니다. 같이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거짓 속에서 진실 찾기 게임 같습니다.

서문명 논문 카니시카왕과 대월지 왕계의 연대와 이 페이지에서 연대는 차이가 많이 납니다.

 

총분량 23페이지. 번역 정성이 그 전만 못한 것 같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또 영어 원문에 구문 에러가 있는 문장이 많습니다.

 

 

월지족

Yuezhi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Yuezhi/Rouzhi

월지(月支)/육지(肉支/)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The migrations of the Yuezhi through Central Asia, from around 176 BCE to 30 CE.

기원전176년경부터 서기30년까지 중앙아에서 월지족의 이민 행로

Total population

총인구

Some 100,000 to 200,000 horse archers, according to the Shiji, Chapter 123.[1] The Hanshu Chapter 96A records: 100,000 households, 400,000 people with 100,000 people able to bear arms.[2]

기마 궁수 약10만에서 20만명(사기123).

후한서 96: 10만 가구, 인구 40만명, 승병 10만명

Regions with significant populations

상당한 인구가 있는 지역

Western China (pre-2nd century BCE)[3]

중국 서부(기원전2세기 전)

 

 

Central Asia (2nd century BCE-1st century CE)

중앙아시아(기원전2세기부터 서기1세기)

 

 

Northern India (1st century CE-4th century CE)

북부 인도(서기1세기부터4세기)

 

 

Languages

언어

Unknown, although the epigraphy ranges from Greek language to Bactrian, and often considered to have spoken a Tocharian language.[4]

알수 없음. 비문은 희랍어부터 박트리아어까지로 쓰여졌고, 토하르 언어를 사용한 것으로 짐작됨.

Religion

종교

Iranian deities (Nana), Buddhism, Zoroastrianism, Hinduism.

이란의 일신교(나나교), 불교, 배화교, 힌두교

Related ethnic groups

관련된 민족 집단

Kushans

쿠샨 왕조

 

Yuezhi/Rouzhi (Chinese: 月氏, also 月支, Wade-Giles: Yüeh-Chih) or Da Yuezhi/Da Rouzhi (Chinese:大月氏, also 大月支, "Great Yuezhi") "The Great Clan of Yue/Rou", is the Chinese name for an ancient Central Asian people. (This is not moon. It's originally (rou) as a character component.)(See Chinese Wikipedia to get the source) There are numerous theories about the derivation of the name Yuezhi and none has yet found general acceptance.[5][6] In Chinese the name translates literally as 'Moon Clan.' According to Zhang Guang-da the name Yuezhi is a transliteration of their own name for themselves, the Visha (the tribes), being called the Vijaya in Tibetan.[7]. They are believed by most scholars to have been an Indo-European people,[8] and may have been the same as or closely related to the Tocharians (Τοχάριοι) of Classical sources.[9] They were originally settled in the arid grasslands of the eastern Tarim Basin area, in what is today Xinjiang and western Gansu, in China, before they migrated to Transoxiana, Bactria and then northern South Asia, where they formed the Kushan Empire.

월지(月支)/육지(肉支)/월씨(月氏), 또는 대월지(大月支):

-대부족(대월지)은 고대 중앙아인에 대한 중국식 명칭이다. (月은 달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는 육()이다) 월지에 대한 파생어에 대하여 수많은 이론이 있으며, 아직까지 아무도 공론(公論)을 찾지 못하고 있다. 중국어에서 이 명칭은 달 부족으로 번역할 수 있다. 장광다에 의하면 명칭 월지는 고유명에 대한 음역으로, 마치 비샤족은 티벳어로 비자야로 불리는 것과 같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월지족은 인도-유럽인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상고사에서의 토하르족과 같거나 밀접하게 관련된 것일 수도 있다. 월지족은 원래 중국 감숙성 서부와 신강성의 타림 분지 동부의 건조한 초지에 정착했으며, 나중에 트란스옥시아나, 박트리아 그리고 남아시아 북부에 이주했으며, 이곳에서 쿠샨왕조를 개창했다.

 

[남아시아: 여기서는 주로 인도 지역을 가리킨다. 남아시아 북부는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에 해당된다. ]

{해설: ()을 부수로 사용할 때 육달월이라 한다. 즉 月은 肉의 약자이다. 고대어에서 月과 肉의 발음이 같았을 것이다.

월지는 Odi의 음역이라는 것이 있는데, 출처는 알 수 없다. 북경대 서문명은 Odi라고 했으나 출처를 밝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월()’, ()일 수 있으며, 올디=Ordi로 볼 수 있고, Ordi천막이라는 뜻이 되고, 월지족은 천막생활을 하는 유랑 유목민이라고 할 수 있다. }

 

1) 기원

The first known reference to the Yuezhi was made in 645 BCE by the Chinese Guan Zhong in his Guanzi 管子(Guanzi Essays: 73: 78: 80: 81). The dates of this book are disputed however, and it may date to as late as 1st century BCE.[10] The book described the Yuzhi 禺氏, or Niuzhi 牛氏, as a people from the north-west who supplied jade to the Chinese from the nearby mountains of Yuzhi 禺氏 at Gansu.[11] The supply of jade from the Tarim Basin from ancient times is indeed well documented archaeologically: "It is well known that ancient Chinese rulers had a strong attachment to jade. All of the jade items excavated from the tomb of Fuhao of the Shang dynasty, more than 750 pieces, were from Khotan in modern Xinjiang. As early as the mid-first millennium BCE the Yuezhi engaged in the jade trade, of which the major consumers were the rulers of agricultural China." (Liu (2001), pp. 267-268). The suffix "Di" or "Zhi" (Chinese:) was generally used to describe the Di people, "Western barbarians", in Chinese annals.

월지에 대한 처음으로 알려진 언급은 기원전 645년 관중(管仲) 관자(管子)라는 책에 있다. 책의 연대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늦어도 기원전 1시기이다. 책에서 (禺氏) 또는 우씨(牛氏)를 서술했고, 이들은 감숙성 근처의 우씨 산에서 중국인에게 비취를 제공했던 북서부 사람이라고 했다. 고대부터 타림분지에서 비취를 제공하였다는 것은 정말로 고고학적으로 증거자료가 잘 제공된다. 잘 알려진 것으로 고대 중국 통치자들은 비취에 강한 집착이 있었다. ()왕조의 () 무덤에서 발굴된 모든 비취 품목은 750점이 넘고, 신강성의 우전(화전)에서 온 것이었다. 일찍이 기원전500년경부터 월지족은 비취 무역을 하였고, 주 고객은 농업 국가 중국의 통치자들이었다. 접미사 //()”는 일반적으로 저()족을 가리키는 것으로, 중국 사료에서 서부 오랑캐(서융)”라는 뜻이다.

[(),()의 고음은 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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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zhi/Yuezhi (lit. "Rou(maybe Meat, but not Moon) People")[citation needed] was the name used continuously by ancient Chinese historians to designate the tribe throughout its migrations, from the time it was in the eastern Tarim Basin area (7th to 2nd century BCE[citation needed]) to the time it ruled the Kushan Empire in India (1st-3th century CE).

육지족/월지족(()을 뜻하고, 달을 뜻하는 것이 아님/논거가 필요함)은 고대 중국인 사가들에 의해 끊임없이 사용된 이름으로 유목민을 가리키고, 기원전 7세기부터 기원전2세기까지 타림분지 동부에서 있었던 때부터, 서기 1세기부터 3세기까지 인도의 쿠샨왕조를 통치했던 때까지 월지족이라는 이름이 사용된 것이다.

 

According to former USSR scholar Zuev, there was a Queen among the large Yuezhi confederation who added to her possessions the lands of the Tochar (Pinyin: Daxia) on the headwaters of the Huanghe circa 3rd century BCE. According him, the Chinese chronicles began referring to the queen's tribe as the Great Yuezhi (Da Yuezhi), and to call the Daxia/Tochars the Lesser Yuezhi (Pinyin: Xiao Yuezhi). Together, they were simply called Yuezhi. In the 5th century CE, a scholar and translator monk Kumarajiva, while translating texts into Chinese, used the name "Yuezhi" to translate "Tochar". In the middle of the 2nd century BCE the Yuezhi conquered Bactria, and the Ancient Greek authors inform us that the conquerors of Bactria were the Asii and Tochari tribes. Bactria then in the Chinese chronicles began to be called the country of Daxia, i.e. Tocharistan and the language of Bactria/Tocharistan began to be called "Tocharian"." [12]

구 소련 학자 주에프(Zuev)에 의하면, 대월지족에 여왕이 있었고 기원전3세기경에 황하의 상류에 있는 토하르(대하)를 합병하였다. 그에 의하면 중국 년대기는 여왕의 부족을 대월지라고 부르고, 대하/토하르를 소월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이 둘을 단순히 월지라고 불렀다. 서기 5세기에, 학자 겸 승려인 구마라습은 중국어로 번역하면서, “토하르월지라고 번역했다. 기원전 2세기 중반에 월지는 박트리아를 정복했고, 고대 희랍 작가가 말하기를 박트리아를 정복한 자들은 아시족과 토하르족이라고 했다. 박트리아는 그 때 중국 연대기에 의하면 대하국으로 불리기 시작했는데, 예를 들면 토하리스탄과 박트리아/토하리스탄의 언어는 토하리안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토하리스탄은 토하르국을 가리키고, 토하리안은 토하르 언어 또는 토하르 부족을 가리키는 듯하다. 희랍어 표현임.]

{정말 혼란스러운데, 황하강 상류에 어떻게 대하가 있을 수 있는가? 혹시 황하는 아무다르여강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까? 왜냐면 대하는 아무다르여강상류로 공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The Yuezhi are also documented in detail in Chinese historical accounts, in particular the 2nd-1st century BCE "Records of the Great Historian", or Shiji, by Sima Qian. According to these accounts:

"The Yuezhi originally lived in the area between the Qilian or Heavenly Mountains (Tian Shan) and Dunhuang, but after they were defeated by the Xiongnu they moved far away to the west, beyond Dayuan, where they attacked and conquered the people of Daxia and set up the court of their king on the northern bank of the Gui [= Oxus] River. A small number of their people who were unable to make the journey west sought refuge among the Qiang barbarians in the Southern Mountains, where they are known as the Lesser Yuezhi.",[13]

월지는 또한 자세하게 중국 사료에 기록되어 있는데, 특히 기원전2세기-1세기에, 사마천의 사기에서다. 이 사료에 의하면:

월지는 본디 기련 또는 천산과 돈황 사이의 지역에 살았고, 그러나 흉노에게 패한 후에 서쪽으로 멀리 대완(大宛)을 넘어 이주하였으며, 그곳에서 대하를 공격하여 정복했으며, 규수(아무다르여강)의 북안(北岸)에 왕궁을 세웠다. 서쪽으로 떠날 수 없는 소수 부족은 남산의 저강족(氐羌族) 속에서 정착하였으며, 이들을 소월지라고 부른다.”

[여기서 남산은 우전의 남쪽에 있는 곤륜산이 될 수도 있고, 감숙성의 기련산이 될 수도 있다. ]

 

The Qilian and Dunhuang original homeland of the Yuezhi have recently been argued not to refer to the current locations in Gansu, but to the Tian Shan range and the Turfan region, 1,000 km to the west, Dunhuang identified with a mountain named Dunhong listed in the Shanhaijing.[14]

월지의 본고향 기련과 돈황은 최근에 감숙성의 현위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서쪽으로 1Km 떨어진 천산산맥과 투르판 지역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며, 돈황은 산해경에 있는 돈훙(敦薨){천산(天山)} 같은 것이라고 한다.

 

The Yuezhi may have been a Caucasoid people, as indicated by the portraits of their kings on the coins they struck following their exodus to Transoxiana (2nd-1st century BCE), and especially the coins they struck in India as Kushans (1st-3rd century CE). However, no direct records for the name of Yuezhi rulers are known to exist (only Chinese accounts mention the name), and some doubt on the accuracy of their first coins.[15]

월지는 백인(코카서스인)일 수도 있는데, 왜냐하면 기원전 2세기-1세기에 트란스옥시아나로 이주한 후에 주조한 주화에 있는 왕들의 초상화가 제시하고 있으며, 특히 서기 1세기-3세기의 인도 쿠샨왕조에서 주조한 주화가 증거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Ancient Chinese sources do describe the existence of "white people with long hair" (The Bai people of the Shan Hai Jing) beyond their northwestern border, and the very well preserved Tarim mummies with Caucasian features found at the ancient oasis on the Silk Road, Niya, often with reddish or blond hair, today displayed at the Ürümqi Museum and dated to the 3rd century BCE, have been found in precisely the same area of the Tarim Basin.[16]

고대 중국 사료에서 북서부 경계를 넘어 긴 머리의 백인”(산해경의 백인)의 존재에 대하여 분명히 서술하고 있다. 잘 보존된 타림 미라는 코카서스인(백인) 얼굴을 하고 있고, 실크로드 고대 오아시스 니야에서 발견되었으며, 붉은 머리 또는 금발을 하고 있으며, 현재는 우루무치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으며, 년대는 기원전 3세기에 해당되는데, 정확히 타림 분지의 같은 장소에서 발견되었다.

[우루무치: 우루음치 또는 적화(迪化)라고 . 우루무치는 몽골어로 아름다운 목장이라는 . 적화는 만주어로 깨달음이라는 .]

 

The Indo-European Tocharian languages also have been attested in the same geographical area, and although the first known epigraphic evidence dates to the 6th century CE, the degree of differentiation between Tocharian A and Tocharian B, and the absence of Tocharian language remains beyond that area, tends to indicate that a common Tocharian language existed in the same area of Yuezhi settlement during the second half of the 1st millennium BCE.

인도-유럽 토하르 언어들은 또한 지리적으로 같은 지역임이 입증되었으며, 비록 첫번째로 알려진 명문(銘文) 증거는 서기6세기를 기록하고 있고, 토하르어 A와 토하르어 B의 차이정도와 토하르어가 없는 곳이 그 지역을 넘어서 존재하지만, 토하르 공통어는 기원전 500년부터 기원후까지(500년간) 월지족 정착지와 동일한 지역에 존재했음을 가리키는 경향이 있다.

[불완전 문장입니다. 뜻은 월지족 정착지에 토하르 언어가 존재했다는 것.]

 

According to one  theory, the Yuezhi were probably part of the large migration of Indo-European speaking peoples who were settled in eastern Central Asia (possibly as far as Gansu) at that time. The nomadic Ordos culture, who lived in northern China east of the Yuezhi, are another example. Also the Caucasian mummies of Pazyryk, probably Scythian in origin, are located around 1,500 kilometers north-west of the Yuezhi, and dated also to around the 3rd century BCE.[citation needed]

According to Han accounts, the Yuezhi "were flourishing" during the time of the first great Chinese Qin emperor, but were regularly in conflict with the neighbouring tribe of the Xiongnu to the northeast.

어느 설에 따르면, 월지족은 아마도 인도-유럽어를 말하는 종족들의 대 이동 중의 일부였을 것이고, 그들은 그 당시에 중앙아시아 동부에 정착했다(어쩌면 감숙성에도). 오르도스 문화를 갖는 유목민은 월지의 동쪽 즉 중국 북부에 살았으며, 또 다른 사례이다. 또한 파지릭의 코카서스인 미라는, 아마도 스키타이 출신일 것이고, 월지족으로부터 북서쪽으로 약1500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기원전3세기경이다.

한나라 사료에 의하면, 월지족은 진시황 때에 번영했으며, 그러나 북동쪽의 흉노와 자주 충돌하였다.

 

----- 여기서부터 제2장까지는 이 사이트에 먼저 올렸던 내용입니다. ------

[파지릭: 알타이 산맥, 시베리아, 노보시비르스크에 사는 유목민으로, 중국, 몽고, 카자흐스탄의 국경선 지역이다. 스키타이를 닮았다.]

[오르도스(악이다사): 내몽고 자치구의 오르도스 사막을 가리킴. 흉노에 의해 쫓겨 기원전6세기-2세기에 기마유목민이 정착했다. 레베딘스키에 의하면, 스키타이족이고, () 월지족이라고 한다. 특히 사카족과도 관련이 있다. 문화적으로 동호(東胡)와 관련이 있다. 또한 저강족(氐羌族)과 관련이 있다. 어느 사료에 의하면, 오르도스 지역은 돌궐족의 전설적인 고향이라고 한다. – 이상 영문 위키에서 발췌.]

 

{해설: 월지족은 오르도스에 살았으며, 흉노에 의해 쫓겨 천산 넘어 이식쿨호에 정착한 것이다. 월지족이 진시황 때 번영했다는 것은 진시황이 월지족을 받아들여 천하를 통일하고 강성해졌다는 의미가 된다.

영문 위키에서 월지족의 본고향을 추적해보니, 오르도스이다. 또 여러문헌에서 월지는 달()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음역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월지는 오르도스를 음역한 것이 된다.

오르도스는 최두환님이 제시한 “Orda/Ordi/Orde”에서 음역한 것이다. 또한 거란족은 영주를 차지하고자 애를 썼는데, 거란족은 스키타이족이고 월지족이며, 영주의 의미는 군대 진영(陣營)”이라는 의미가 있으므로, 오르도스는 영주가 되는 것이다. “오르다의 뜻이 천막(())이므로, 진영이라는 뜻이 들어 있는 것이다.

문상욱님이 연구한 바에 의해서도 거란족의 영주는 북경 근처는 될 수 없고 내몽고 오르도스지역일 것이라고 주장한 바가 있다.

그러나 대륙조선사에 의거해보면, 영주=오르도스의 위치는, 최두환님이 제기한 카자흐스탄의 시르다르여강 하류 키질 오르다에 해당되는 것이다.

키질은 뜻이 붉은이므로, 키질 오르다는 적근몽고에 해당될 수도 있다. 몽고는 오행으로 색상을 정하여 군대를 운용했다. 오행으로 남쪽은 적(), 중앙은 황(), 동쪽은 청(), 서쪽은 백(), 북쪽은 흑()이다.

당나라 때 거란족은 카자흐스탄의 키질오르다(영주)”에 있었고, 고구려는 발하쉬호/페르가나/천산 지역이고, 당나라 서안은 상대적으로 아랄해 카스피해의 남서쪽이 되어야 한다.

몽고는 키질오르다의 북서쪽이 본고향이다. 몽고가 남진하여 키질오르다를 접수하고 적근몽고라고 칭한 것이다. 즉 몽고의 수도에서 남쪽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키질 오르다는 여러 곳에 있는데, 키질 오르다의 북쪽에 몽고 제후국의 중앙 수도가 있는 것이다.

서하 또한 월지족이므로, 서하의 위치를 현재의 오르도스와 녕하성으로 보고 있지만, 서하는 카자흐스탄의 키질 오르다에 있어야 맞다. 사실 대하의 영토를 조금 더 넓게 보면 키질오르다를 초과한다. 즉 대하와 서하는 같은 것으로, 대하의 서쪽에 있는 것을 서하라고 한 것이다.

이상한 것이 있는데, 금장한국은 볼가강 러시아 지역에 있다. 금장한국은 징기스칸의 장남이 차지했는데, 장남이 원나라를 승계한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금장한국(金帳汗國)에서 금장은 금색 천막이므로, 중앙 황색을 뜻한다. 즉 볼가강이 몽고의 중심지라는 것이 된다. 징기스칸의 장남은 혈통이 의심스러워 황제가 되지 못했다고 하지만, 혹시 장남이어서 명목상 황색을 부여한 것은 아닐까 한다. 그러나 어쩌면 러시아 볼가강 유역이 원나라의 중심지일수도 있는 것이다.

해설 끝}

 

 

2) The Yuezhi exodus

월지족의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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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Yuezhi were settled at the doorstep of Qin China in the 3rd century BCE.

월지족은 기원전3세기에 진()나라의 문 앞에 정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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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cythian horseman from the area invaded by the Yuezhi, Pazyryk, c.300 BCE.

월지족이 침공한 지역의 스키타이 기마인, 파지릭, 기원전300년경.

 

The Yuezhi sometimes practiced the exchange of hostages with the Xiongnu, and at one  time were hosts to Modu Shanyu (Ch:冒頓), son of the Xiongnu leader. Modu stole a horse and escaped when the Yuezhi tried to kill him in retaliation for an attack by his father. Modu subsequently became ruler of the Xiongnu after killing his father.

월지족은 때때로 흉노와 인질을 교환했으며, 흉노 추장의 아들 모돈선우는 한 때 월지족에게 인질이 되었다. 월지족이 모돈선우의 아버지에 의한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모돈선우를 죽이려 할 때 모돈선우는 말을 훔쳐 도망갔다. 모돈선우는 그의 아버지를 죽인 후에 이어서 흉노의 왕이 되었다.

 

Around 177 BCE, led by one  of Modu's tribal chiefs, the Xiongnu invaded Yuezhi territory in the Gansu region and achieved a crushing victory. Modu boasted in a letter to the Han emperor that due to "the excellence of his fighting men, and the strength of his horses, he has succeeded in wiping out the Yuezhi, slaughtering or forcing to submission every number of the tribe". The son of Modu, Jizhu, subsequently killed the king of the Yuezhi and, in accordance with nomadic traditions, "made a drinking cup out of his skull."(Shiji 123. Watson1961:231).

기원전177년경, 모돈 부족 추장 중의 한 명이 이끄는 흉노족은 감숙성의 월지 영역을 침공하여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모돈은 한() 황제에게 편지로 자랑하기를 그의 병사의 뛰어남과 말의 힘으로 월지족을 소탕하는데 성공했으며, 대량으로 죽이거나 부족의 전 인원의 항복을 받아냈다라고 했다. 모돈의 아들 지주[기주/한자이름 아직 모름]는 이어서 월지의 왕을 죽였고, 유목민 전통에 따라 그의 해골로 마시는 잔을 만들었다.

 

Following Chinese sources, a large part of the Yuezhi people therefore fell under the domination of the Xiongnu, and these may have been the ancestors of the Tocharian speakers attested in the 6th century CE. A very small group of Yuezhi fled south to the territory of the Proto-Tibetan Qiang, and came to be known to the Chinese as the "Small Yuezhi". According to the Hanshu, they onl y numbered around 150 families.

중국사료에 의하면, 그 결과 월지족의 대부분은 흉노의 지배아래 떨어졌고, 월지족은 서기 6세기 토하르 언어 사용자의 조상일수도 있는 것이다. 월지족의 작은 부족은 티벳트인의 원부족인 강족(羌族)의 땅 남쪽으로 이주했으며, 중국에는 소월지로 알려졌다. 한서(漢書)에 의하면 그들은 단지 150가구에 불과했다고 한다.

 

Finally, a large group of the Yuezhi fled from the Tarim Basin / Gansu area towards the northwest, first settling in the Ili valley, immediately north of the Tian Shan mountains, where they confronted and defeated the Sai (Sakas or Scythians): "The Yuezhi attacked the king of the Sai who moved a considerable distance to the south and the Yuezhi then occupied his lands" (Han Shu 61 4B). The Sai undetook their own migration, which was to lead them as far as Kashmir, after travelling through a "Suspended Crossing" (probably the Khunjerab Pass between present-day Xinjiang and northern Pakistan). The Sakas ultimately established an Indo-Scythian kingdom in northern India.[citation needed]

결국 대월지족은 타림분지/감숙성 지역에서 북서쪽으로 이주했으며, 처음에는 바로 천산 북쪽에 있는 이리하(伊犁河) 계곡에 정착했으며, 이곳에서 색(/사카족 또는 스키타이족)종을 만나 패배시켰다: “월지는 사카의 왕을 공격했으며, 사카 왕은 남쪽으로 상당히 멀리 이주했고, 그래서 월지족은 그의 땅을 차지했다(한서). 사카족은 이민을 시작했고, 그리하여 이들은 카슈미르까지 멀리 오게 되었는데, “국경선 보류지역을 통과한 후의 일이다(아마도 Khunjerab Pass지역으로 현재 신강성과 파키스탄 북부의 국경선 지역)[불완전 문장]. 사카족은 결국 인도 북부에 인도-스키타이 왕국을 건설했다(논거가 요구됨).

 

After 155 BCE, the Wusun, in alliance with the Xiongnu and out of revenge from an earlier conflict, managed to disloge the Yuezhi, forcing them to move south. The Yuezhi crossed the neighbouring urban civilization of the Dayuan in Ferghana, and settled on the northern bank of the Oxus, in the region of Transoxiana, in modern-day Tajikistan and Uzbekistan, just north of the Hellenistic Greco-Bactrian kingdom. The Greek city of Alexandria on the Oxus was apparently burnt to the ground by the Yuezhi around 145 BCE.[citation needed]

기원전155년이후, 오손(烏孫)족은 흉노와 동맹을 맺고 전번의 분쟁에 대한 보복으로 월지족을 간신히 쫓아냈으며, 그들을 남쪽으로 이주하게 했다. 월지족은 이웃하는 도시문명인 페르가나의 대완(大宛)과 접촉하였고, 아무다르여강(옥수스강)의 북안(北岸)에 정착했고, 이곳은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이고, 현재의 타지크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 희랍화된 희랍-박트리아 왕국(대하)의 바로 북쪽에 있다. 희랍 도시 옥수스강의 알렉산드리아 도시는 기원전145년 분명히 월지족에 의하여 불타서 잿더미가 되었다(논거가 필요).

 

 

3) Settlement in Transoxiana

트란스옥시아나에 정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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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hinese mission of Zhang Qian to the Yuezhi in 126 BCE, Mogao Caves, 618-712 CE mural painting.

기원전126년 월지족을 향한 중국 사신 장건(張騫), 막고굴, 서기 618-712년의 벽화.

[트란스옥시아나: 옥수스강(아무다르여강)을 가로지르는 지역.]

 

The Yuezhi were visited by a Chinese mission, led by Zhang Qian in 126 BCE[17] , that was seeking an offensive alliance with the Yuezhi to counter the Xiongnu threat to the north. Although the request for an alliance was denied by the son of the slain Yuezhi king, who preferred to maintain peace in Transoxiana rather than to seek revenge, Zhang Qian made a detailed account, reported in the Shiji, that gives considerable insight into the situation in Central Asia at that time.[18]

기원전126년 중국 사신 장건(張騫)은 월지를 방문했는데, 북쪽에서 흉노의 위협을 받고 있는 월지족과 공격적인 동맹을 맺고자 한 것이었다. 비록 동맹에 대한 요청은 살해된 월지 왕의 아들에게 거부당했지만, (월지왕의 아들)는 보복보다는 트란스옥시아나에서 평화를 유지하고자 했기 때문으로, 장건은 자세한 설명을 했으며, 그 내용은 사기에 기록되었는데, 그것은 그 당시 중앙아시아의 상황에 대하여 깊이 알 수 있는 것이다.

 

Zhang Qian, who spent a year with the Yuezhi and in Bactria, relates that "the Great Yuezhi live 2,000 or 3,000 li (832-1,247 kilometers) west of Dayuan (Ferghana), north of the Gui (Oxus) river. They are bordered on the south by Daxia (Bactria), on the west by Anxi (Parthia), and on the north by Kangju (beyond the middle Jaxartes). They are a nation of nomads, moving from place to place with their herds, and their customs are like those of the Xiongnu. They have some 100,000 or 200,000 archer warriors."[19]

박트리아에서 월지족과 1년을 보낸 장건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대월지는 규수(옥수스강/아무다르여강)의 북쪽에 있는 대완(大宛/페르가나)에서 서쪽으로 2천리 또는 3천리(832-1247km) 떨어진 곳에 살고 있다. 대월지는 남쪽으로 대하(박트리아), 서쪽으로는 안식국(파르티아), 북쪽으로는 강거(康居/시르다르여 강 중류 넘어서 있음)와 국경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유목민 국가로, 가축과 함께 장소를 옮겨 살고, 풍습은 흉노와 같다. 궁수(弓手) 병사는 약 10만 또는 20만명이다.”

[이 문단의 내용을 살펴보면, 대월지는 카자흐스탄의 시르다르여강 하류에 있는 키질 오르다가 중심지처럼 보인다. 마침 이곳은 거란족의 영주 지역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거란은 키탄으로 월지와 같은 스키타이족이다.]

 

Although they remained north of the Oxus for a while, they apparently obtained the submission of the Greco-Bactrian kingdom to the south of the Oxus. The Yuezhi were organized into five major tribes, each led by a yabgu, or tribal chief, and known to the Chinese as Xiūmì (Ch:休密) in Western Wakhān and Zibak, Guishuang (Ch:貴霜) in Badakhshan and the adjoining territories north of the Oxus, Shuangmi (Ch:雙靡) in the region of Shughnan, Xidun (Ch:) in the region of Balk, and Dūmì (Ch:都密) in the region of Termez [20]

그들은 비록 옥수스의 북쪽에 잠시 머물렀지만, 그들은 분명히 옥수스의 남쪽에 있는 희랍-박트리아 왕국을 복종시켰다. 월지는 5개의 주요 부족으로 조직되었는데, 각각은 야브구(제후) 또는 부족장에 의해 통치되었고, 그 부족은 중국에 다음과 같이 알려졌다:

서부 와한(Wakhān)과 지박(Zibak)에 있는 휴밀(休密),

바다흐샨(Badakhshan)과 그 옆에 있는 옥수스 북쪽 영역에 있는 귀상(貴霜),

슈그흐난(Shughnan) 지역의 쌍미(雙靡),

발크(Balk) 지역의 (),

테르메즈(Termez) 지역의 도밀(都密) 등이다.

 

A description of the Greco-Bactrian kingdom was made by Zhang Qian after the conquest by Yuezhi:

"Daxia (Greco-Bactria) is located over 2,000 li southwest of Dayuan, south of the Gui (Oxus) river. Its people cultivate the land and have cities and houses. Their customs are like those of Ta-Yuan. It has no great ruler but onl y a number of petty chiefs ruling the various cities. The people are poor in the use of arms and afraid of battle, but they are clever at commerce. After the Great Yuezhi moved west and attacked the lands, the entire country came under their sway. The population of the country is large, numbering some 1,000,000 or more persons. The capital is called the city of Lanshi (Bactra) (modern Balkh) and has a market where all sorts of goods are bought and sold."[21]

월지에 의해 정복된 희랍-박트리아 왕국에 대하여 장건은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대하(희랍-박트리아)는 대완의 남서쪽으로 2천리 넘어서, 규수(아무다르여강)의 남쪽에 있다. 사람들은 땅을 경작하고 도시와 집이 있다. 풍습은 대완과 같다. 대군장(大君長)은 없지만 여러 도시를 다스리는 소장(小長)이 있다. 사람들은 무기를 다루는데 서투르고 전쟁을 두려워하며, 그러나 상업에는 영리하다. 대월지가 서쪽으로 이주하여 그 영토를 침공한 후에, 그 나라 전 영토는 대월지의 통치가 되었다. 그 나라 인구는 많은데 약100만명 이상이다. 수도는 란스(박트라/현재 발크흐)이고 시장에서 여러 상품이 매매된다.”

 

In a sweeping analysis of the physical types and cultures of Central Asia that he visited in 126 BCE, Zhang Qian reports that "although the states from Dayuan west to Anxi (Parthia), speak rather different languages, their customs are generally similar and their languages mutually intelligible. The men have deep-set eyes and profuse beards and whiskers. They are skilful at commerce and will haggle over a fraction of a cent. Women are held in great respect, and the men make decisions on the advice of their women."[22]

기원전26년 그가 방문했던 중앙아의 물산과 문화에 대한 포괄적이 분석에서, 장건은 보고하기를 비록 대완에서 서쪽으로 안식국(파르티아)까지의 나라들은 좀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들의 풍습은 일반적으로 단순하고 그들의 언어는 서로 알기가 쉽다. 남자는 깊은 눈과 풍부한 턱수염과 구레나룻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장사에 밝고 푼돈을 가지고도 다툰다. 여성들은 크게 존경을 받고 있으며, 남성은 여성의 충고에 따라 결정을 한다.”

 

 

4) Invasion of Bactria

박트리아의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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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of the first Yuezhi coins, imitative, in crude style, of the coins of the Greco-Bactrian king Heliocles, circa 120 BCE.
Obv: Presumed bust of a Yuezhi chief with Greek royal headband.
Rev: Zeus with thunderbolt and sceptre. Misspelled Greek legend BASILEO HELIOLEEU "(of) King Heliocles".

첫번째 월지 주화 중의 하나, 희랍-박트리아 왕 헬리오클레스의 주화를 조잡하게 모방한 것임, 기원전120년경.

좌측: 희랍왕실 머리띠를 두르고 있는 월지 추장으로 추정되는 흉상.

우측: 벼락과 권장(權杖/왕권)의 제우스 신. 헬리오클레스 왕에 대한 철자가 잘못된 희랍어 명문(銘文) BASILEO HELIOLEE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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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a in 001 CE, showing location of Tocharian/Yue-Chi tribes.

서기 1년 아시아, 토하르족/월지족의 위치를 보여주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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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124 BCE the Yuezhi were apparently involved in a war against the Parthians, in which the Parthian king Artabanus I of Parthia was wounded and died:

"During the war against the Tokharians, he (Artabanus) was wounded in the arm and died immediately" (Justin, Epitomes, XLII,2,2: "Bello Tochariis inlato, in bracchio vulneratus statim decedit").

기원전124년 월지족은 분명히 파르티아 제국과 전쟁에 돌입했고, 여기서 파르티아 왕 아르타바누스1세는 부상을 입고 죽었다:

토하르족과 전쟁 중에, (아르타바누스)는 팔에 부상을 입었으며 즉시 죽었다.”(Justin)

 

Some time after 124 BCE, possibly disturbed by further incursions of rivals from the north, and apparently vanquished by the Parthian king Mithridates II, successor to Artabanus, the Yuezhi moved south to Bactria. Bactria had been conquered by the Macedonians under Alexander the Great in 330 BCE, and since settled by the Hellenistic civilization of the Seleucids and the Greco-Bactrians for two centuries.

기원전124년 후의 얼마 후에, 아마도 북쪽으로부터 경쟁자의 깊은 침입으로 교란당하고, 아르타바누스의 승계자 파르티아왕 미트리다테스2세에 의해 격파 당한 월지족은 남쪽으로 박트리아로 이주했다. 박트리아는 기원전330년 알렉산더 대왕의 마케도니아 왕국에 정복되었었으며, 그 때부터 2세기 동안 셀레우코스 왕조와 희랍-박트리아 왕조의 헬레니즘 문명이 정착되었다.

 

This event is recorded in Classical Greek sources, when Strabo presented them as a Scythian tribe, and explained that the Tokharians -- together with the Assianis, Passianis and Sakaraulis -- took part in the destruction of the Greco-Bactrian kingdom in the second half of the 2nd century BCE:

"Most of the Scythians, beginning from the Caspian Sea, are called Dahae Scythae, and those situated more towards the east Massagetae and Sacae; the rest have the common appellation of Scythians, but each separate tribe has its peculiar name. All, or the greatest part of them, are nomads. The best known tribes are those who deprived the Greeks of Bactriana, the Asii, Pasiani, Tochari, and Sacarauli, who came from the country on the other side of the Jaxartes, opposite the Sacae and Sogdiani." (Strabo, 11-8-1)

이 사건은 고대 희랍 사료에 기록되었는데, 그 당시에 스트라보는 그들을 스키타이족으로 소개했으며, 설명하기를 토하르족은 아시아니스족[아시족], 파시아니스족 그리고 사카라울리스족[사카족] 등과 함께 기원전2세기 후반에 희랍-박트리아 왕국을 파괴하는데 참여했다:

카스피해에서 출발한 대부분의 스키타이족은, 다해 스키태로 불리고, 더 동쪽에 있는 것은 마사케태와 사캐라고 한다{불완전문장}; 그 나머지는 스키타이라는 일반 명칭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나 각각 분리된 부족은 그의 독특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들 대부분은 유목민이다. 가장 잘 알려진 부족들은 희랍으로부터 박트리아를 빼앗은 아시족, 파시아니족, 토하르족 그리고 사카라울리족으로, 이들은 시르다르여강(작사르테스)의 반대편 국가에서 즉 사캐와 소그드의 반대편 온 것이다.” (스트라보)

 

{해설: 드디어 모순점이 나왔습니다. 신강성의 월지족이 대하를 점령했다와 카스피해 스키타이족이 대하를 점령했다는 서로 모순되면서 연관이 있다. 사실 월지족은 스키타이족이다. 대하를 점령한 이들은 사실 같은 부족으로 동일한 장소에서 출발한 것이다. 신강성의 월지족은 아마 거짓일 수 있으며, 월지족의 발원지는 아랄해 동북쪽 카자흐스탄의 키질 오르다일 수 있다. 바로 월지는 오르다/오르디의 음역인 것이다.}

 

The last Greco-Bactrian king Heliocles I retreated and moved his capital to the Kabul Valley. The eastern part of Bactria was occupied by Pashtun people.

As they settled in Bactria from around 125 BCE, the Yuezhi became Hellenized to some degree, as suggested by their adoption of the Greek alphabet and by some remaining coins, minted in the style of the Greco-Bactrian kings, with the text in Greek. The area of Bactria they settled came to be known as Tokharistan, since the Yuezhi were called "Tocharians" by the Greeks.

희랍-박트리아의 마지막 왕 헬리오클레스1세는 후퇴하여 수도를 카불 계곡으로 옮겼다. 박트리아의 동부는 파슈툰 족에게 점령되었다.

그들이 기원전125년경부터 박트리아에 정착하자, 월지족은 어느 정도 헬레니즘화 되었는데, 그 이유는 희랍 문자를 채택한 점과 희랍문자와 더불어 희랍-박트리아 왕들의 스타일로 주조된 잔존하는 일부 주화에 의해서 암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정착한 박트리아 지역은 토하리스탄(토하르왕국)으로 알려졌는데, 그 이유는 월지족은 희랍인들에게 토하르족으로 불렸기 때문이다.

 

Commercial relations with China also flourished, as many Chinese missions were sent throughout the 1st century BCE: "The largest of these embassies to foreign states numbered several hundred persons, while even the smaller parties included over 100 members... In the course of one  year anywhere from five to six to over ten parties would be sent out." (Shiji, trans. Burton Watson).

중국과의 상업 거래 또한 활발하였는데, 그 이유는 많은 중국인 사절이 기원전1세기 내내 보내졌기 때문이다: “외국으로 이러한 사절의 최대 규모는 700명이고, 반면에 심지어 가장 적은 숫자도 100명을 넘는다…. 1년 동안 어느 곳에서든지 5 6개에서 10개의 사절단이 보내지곤 하였다.”(사기, 번역 버튼 왓슨)

 

The Hou Hanshu also records the visit of Yuezhi envoys to the Chinese capital in 2 BCE, who gave oral teachings on Buddhist sutras to a student, suggesting that some Yuezhi already followed the Buddhist faith during the 1st century BCE (Baldev Kumar (1973)).

후한서에 또한 기록하기를 월지의 사절이 기원전2년에 중국 수도를 방문했으며, 그는 불경을 제자에게 구두로 강의하였고, 일부 월지족은 기원전1세기 동안 불교를 믿고 있다고 제시하였다(Baldev Kumar (1973)).

 

A later Chinese annotation in Shiji made by Zhang Shoujie during the early 8th century quoted Wan Zhen's Strange Things from the Southern Region (a now-lost text of from the Wu kingdom) describes the Kushans as living in the same general area north of India, in cities of Greco-Roman style, and with sophisticated handicraft. The quote are dubious, as Wan Zhen probably never visited the Yuezhi kingdom through the Silk Road, though he might had gathered his information from the trading ports in the coastal south.[15] The Chinese never adopted the term "Guishuang", and continued to call them "Yuezhi":

서기 8세기 초에 장셔우지에의 사기 주석에서 완전남부 지역의 기이(奇異)’(동오(東吳)의 잃어버린 문서)에 대한 인용이 있으며, 즉 쿠샨왕조는 인도의 북쪽 지역에서, 희랍-로마 양식의 도시에서, 정교한 수제품과 더불어 살고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 인용은 매우 의심스러운데 왜냐면 남부 해안 무역항에서 정보를 수집하였을지 언정, 완전은 아마도 결코 월지왕국을 실크로드를 통해 방문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중국은 결코 귀상이라는 용어를 채택하지 않았고, 계속해서 월지라고 불렀다.

 

"The Great Yuezhi [Kushans] is located about seven thousand li (about 3000 km) north of India. Their land is at a high altitude; the climate is dry; the region is remote. The king of the state calls himself "son of heaven". There are so many riding horses in that country that the number often reaches several hundred thousand. City layouts and palaces are quite similar to those of Daqin (the Roman empire). The skin of the people there is reddish white. People are skilful at horse archery. Local products, rarities, treasures, clothing, and upholstery are very good, and even India cannot compare with it." [23]

대월지(쿠샨)는 인도의 북쪽으로 약 7천리(3km)에 있다. 그 땅은 높은 데 있다; 기후는 건조하다; 그 지역은 궁벽한 곳에 있다. 그 나라의 왕은 자신을 천자라고 부른다. 그 나라에는 매우 많은 승마용 말이 있어서 그 숫자가 종종 70만 마리에 이른다. 도시 배치와 궁전들은 대진(大秦/로마)의 것과 매우 비슷하다. 그곳 사람들의 피부는 불그스름하고 하얗다. 사람들은 기마 궁술에 뛰어나다. 지방 생산품, 희귀한 것, 보물, 의복, 그리고 가구류는 매우 양호하고, 심지어 인도와는 비교할 수 없다(인도보다 뛰어남).”

 

 

5) Expansion into the Hindu-Kush

힌두쿠쉬로의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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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posthumus, slightly barbarized, coin of Hermaeus, minted in the Paropamisadae between 50 BCE and 25 BCE.
Obv: Bust of Hermaeus. Greek legend BASILEOS SOTIROS ERMAIOU "Saviour King Hermaeus".
Rev: Zeus, non-radiating, making a benediction gesture. Kharoshti legend: MAHARAJASA TRATARASA HERAYAMASA "Saviour King Hermaeus".

헤르마에우스 왕(기원전90-70)의 사후의 주화로 좀 조잡하고, 기원전 50-20년 사이에 파로파미사대에서 주조되었다.(힌두쿠시 지역)

좌측:헤르마에우스 흉상. 희랍어 명문 BASILEOS SOTIROS ERMAIOU구세 왕 헤르마에우스”.

[SOTIROS soter로 구세주이고, 희랍어 H강기식과 약기식이 있으며, 예를 들면 E에 강식식 부호가 있으면 He로 발음한다. ERMAIOU에서 E강기식 부호가 있으면 헤르마이오우로 읽는다.]

우측: 제우스, 후광이 없고, 자비를 베푸는 모습. 하로슈티 문자 명문: MAHARAJASA TRATARASA HERAYAMASA.

[원문에 대한 영문 번역이 잘못 되어 있다. 마하:(), 라자사: , 트라타라사: 3?이라는 뜻이고, 헤라야마사는 제우스의 별명인 것 같다.

 

The area of the Hindu-Kush (Paropamisadae) was ruled by the western Indo-Greek king until the reign of Hermaeus (reigned c. 90 BCE70 BCE). After that date, no Indo-Greek kings are known in the area, which was probably overtaken by the neighbouring Yuezhi, who had been in relation with the Greeks for a long time. According to Bopearachchi, no trace of Indo-Scythians occupation (nor coins of major Indo-Scythian rulers such as Maues or Azes I) have been found in the Paropamisadae and western Gandhara.

힌두쿠쉬(파로파미사대) 지역은 서양인 인도-희랍왕에 의해 통치되었는데 마지막은 헤르마에우스 왕(재위 기원전90-70)이다. 그 이후로 어떠한 인도-희랍왕도 그 지역에서 알려져 있지 않는데, 아마도 이웃 월지족이 점령했기 때문일 것이고, 월지는 예전부터 오랫동안 희랍인과 관련을 맺고 있었다. 보페라치치에 의하면 인도-스키타이인이 점거한 어떠한 흔적도 파로파미사대(힌두쿠시)와 서부 간다라에서 발견되지 않는다고 한다(즉 마우에스 또는 아제스1세와 같은 인도-스키타이인 통치자의 어떠한 주화도 없다).

 

As they had done in Bactria with their copying of Greco-Bactrian coinage, the Yuezhi copied the coinage of Hermeaus on a vast scale, up to around 40 CE, when the design blends into the coinage of the Kushan king Kujula Kadphises.

그들은 박트리아에서 희랍-박트리아 주화를 모방하고 있었기 때문에, 월지족은 헤르마에우스의 주화를 대량으로 모방했는데, 약 서기 40년까지이고, 그때 그 디자인은 쿠샨왕 쿠줄라 카드피세스(구취각)의 주화와 섞였다.

 

The first presumed, and documented, Yuezhi prince is Sapadbizes (probably a yabgu's prince of Yuezhi confederation), who ruled around 20 BCE, and minted in Greek and in the same style as the western Indo-Greek kings.

처음이라 여겨지고 기록된 월지 왕자는 사파드비제스(아마도 월지 연맹의 야브구(제후)의 왕자)이고, 기원전20년경 통치했으며, 희랍어로 그리고 서부 인도-희랍 왕들과 같은 형태로 주조했다.

 

 

6)      Foundation of the Kushan empire

쿠샨 제국의 건설

By the end of the 1st century BCE, one  of the five tribes of the Yuezhi, the Guishuang (Ch: 貴霜, origin of name Kushan adopted in the West), managed to take control of the Yuezhi confederation. According to some theories[citation needed], the Guishuang may have been distinct from the Yuezhi, possibly of Saka origins. From that point, the Yuezhi extended their control over the northwestern area of the Indian subcontinent, founding the Kushan Empire, which was to rule the region for several centuries. The Yuezhi came to be known as Kushan among Western civilizations, however the Chinese kept calling them Yuezhi throughout their historical records over a period of several centuries.

기원전1세기 말에, 월지족의 5부족 중의 하나인 귀상족(貴霜族, 서양에서 채택된 쿠샨의 어원)은 월지 연맹의 통치권을 간신히 얻었다. 일부 이론들(논거필요)에 의하면, 귀상족은 아마도 사카 출신 월지족과 구별될 수도 있다. 그 시점에서부터(?), 월지족은 인도 대륙의 북서부 지역에 대한 통치를 확장했으며, 쿠샨제국을 건설하고 수세기 동안 그 지역을 통치하게 되었다. 월지는 서구 문명에는 쿠샨으로 알려졌지만, 그러나 중국은 수세기 동안 역사적 기록을 통틀어 그들을 계속 월지라고 불렀다.

 

The Yuezhi/ Kushans expanded to the east during the 1st century CE, to found the Kushan Empire. The first Kushan emperor Kujula Kadphises ostensibly associated himself with Hermaeus on his coins, suggesting that he may have been one  of his descendants by alliance, or at least wanted to claim his legacy.

월지/쿠샨은 서기1세기 동안 동쪽으로 확장하여 쿠샨제국을 건설했다. 첫 번 째 쿠샨 황제 쿠줄라 카드피세스는 표면상 주화에다 자신을 헤르마에우스와 관련시켰는데, 그는 연맹에 의해 그(헤르마에우스)의 자손들 중의 한 명일 수도 있거나, 적어도 그의 유산을 갖기를 요구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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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irst self-declared Kushan ruler Heraios (1-30 CE) in Greco-Bactrian style.

Obv: Bust of Heraios, with Greek royal headband.

Rev: Horse-mounted King, crowned with a wreath by the Greek goddess of victory Nike. Greek legend: TVPANNOVOTOΣ HΛOV - ΣΛNΛB - KOÞÞANOY "The Tyrant Heraios, Sanav (meaning unknown), of the Kushans".

첫 번 째 자칭 쿠샨 왕 헤라이오스(서기1-30), 희랍-박트리아 양식.

좌측(앞면): 헤라이오스 흉상, 희랍 왕실 머리 띠를 두르고 있음.

우측(뒷면): 말을 탄 왕, 희랍 승리의 여신 니케에 의해 화환으로 왕관을 쓰고 있다.

희랍어 명문: TVPANNOVOTOΣ HΛOV - ΣΛNΛB – KOÞÞANOY쿠샨의 절대 군주 헤라이오스, 사나브(의미 모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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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piction of Heraios, from his clearest coins.

그의 가장 선명한 주화에서 헤라이오스 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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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sible Yuezhi king and attendants. Gandhara stone palette, 1st century CE.

아마도 월지왕과 시종들. 간다르 원반석, 서기 1세기.

 

The unification of the Yuezhi tribes and the rise of the Kushan is documented in the Chinese Historical chronicle Hou Hanshu:

"More than a hundred years later, the xihou (Ch:翖侯, "Allied Prince") of Guishuang (Badakhshan and the adjoining territories north of the Oxus), named Qiujiu Que (Ch: 丘就卻, Kujula Kadphises) attacked and exterminated the four other xihou ("Allied Princes"). He set himself up as king of a kingdom called Guishuang (Kushan). He invaded Anxi (Parthia) and took the Gaofu (Ch:高附, Kabul) region. He also defeated the whole of the kingdoms of Puda and Jibin (Ch: 罽賓, Kapiśa-Gandhāra). Qiujiu Que (Kujula Kadphises) was more than eighty years old when he died.

His son, Yan Gaozhen (Ch:閻高珍) (Vima Takto), became king in his place. He returned and defeated Tianzhu (Northwestern India) and installed a General to supervise and lead it. The Yuezhi then became extremely rich. All the kingdoms call [their king] the Guishuang (Kushan) king, but the Han call them by their original name, Da Yuezhi." (Hou Hanshu, trans. John Hill, [24]).

월지 부족들의 통합과 쿠샨의 등장은 중국 사서 후한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100여년 후에, 귀상(바다흐샨과 아무강 북쪽의 근접 영역)의 흡후(翖侯/연맹 왕자) 구취각(丘就卻, Kujula Kadphises)은 다른 네 흡후를 공격하여 전멸시켰다. 그는 자신을 귀상 왕국의 왕이라 자칭했다. 그는 또한 푸다와 계빈(罽賓, Kapiśa-Gandhāra)의 모든 왕국들을 패배시켰다. 구취각은 80세 이상이 되어 사망했다.

그의 아들 염고진(閻高珍, Vima Takto, 웨마)은 이어서 왕이 되었다. 그는 되돌아 와서 천축국(인도북서쪽)을 패퇴시키고 그곳에 장군을 봉하여 감독하고 다스리게 했다. 월지는 그때 지극히 번영하였다. 모든 왕국들은 귀상왕이라고 불렀지만, 한나라는 원래 이름 대월지라고 불렀다.”(후한서)

 

The Yuezhi/Kushan integrated Buddhism into a pantheon of many deities, became great promoters of Mahayana Buddhism, and their interactions with Greek civilization helped the Gandharan culture and Greco-Buddhism flourish.

월시/쿠샨은 불교를 다신교와 통합하였으며, 대승불교의 큰 장려자가 되었으며, 희랍문명과 상호 교류에 의해 간다라 문화와 희랍-불교가 번영하게 되었다.

 

During the 1st and 2nd century, the Kushan Empire expanded militarily to the north and occupied parts of the Tarim Basin, their original grounds, putting them at the center of the lucrative Central Asian commerce with the Roman Empire. When the Han Dynasty desired to advance north, Emperor Wu sent the explorer Zhang Qian to see the kingdoms to the west and to ally with the Yuezhi people, in order to fight the Xiongnu Mongol tribe. The Yuezhi continued to collaborate militarily with the Chinese against nomadic incursion, particularly with the Chinese general Ban Chao against the Sogdians in 84 CE, when the latter were trying to support a revolt by the king of Kashgar. Around 85 CE[citation needed], they also assisted the Chinese general in an attack on Turfan, east of the Tarim Basin.

서기 1세기 2세기 동안에, 쿠샨제국은 군대를 북쪽으로 진격하여 그들의 원 고향인 타림 분지의 일부를 점령했으며, 그곳을 로마제국과 중앙아시아 교역에 유리한 중심지로 만들었다. () 왕조가 북쪽으로 진격하기를 원했을 때에, 한무제는 탐험가 장건(張騫)을 보내 서부의 왕국들을 보고 월지족과 연맹하게 하였는데, 흉노 몽고족과 싸우기 위함이었다. 월지족은 계속해서 유목민의 침입에 대항하여 중국과 군사적으로 협력하였으며, 특히 서기 84년 소그드에 대항하여 중국 장군 반초(班超)와 협력했으며, 그 때 후자(소그드/반초?)는 카쉬가르 왕의 반란을 지지하고자 하였다. 85년경(논거부족), 그들은 또한 타림 분지 동쪽의 투르판을 공격하는데 있어서 중국 장군을 도왔다.

{이 단락은 기존의 것과 다른 점이 많습니다.}

 

In recognition for their support to the Chinese, the Kushans requested, but were denied, a Han princess, even after they had sent presents to the Chinese court. In retaliation, they marched on Ban Chao in 86 CE with a force of 70,000, but, exhausted by the expedition, were finally defeated by the smaller Chinese force. The Kushans retreated and paid tribute to the Chinese Empire during the reign of the Chinese emperor Han He (89-106).

중국에 대한 그들[쿠샨]의 지지에 대한 보답으로, 쿠샨은 한나라 공주를 요청했지만, 거절되었으며, 심지어 그들(쿠샨)이 선물을 중국 왕실에 보낸 후에도 그러했다. 보복으로 쿠샨은 7만의 병사로 서기86년 반초를 공격했으나, 원정으로 체력이 소진되어, 결국 더 작은 중국 군에게 패배 당했다. 쿠샨은 후퇴하여 한화제(漢和帝/89-106) 통치기간 동안 중국황제에게 조공을 바쳤다.

 

Later, the Yuezhi/Kushans established a kingdom centered on Kashgar around 120 CE[citation needed], and introduced the Brahmi script, the Indian Prakrit language for administration, and Greco-Buddhist art which developed into Serindian art.

나중에, 월지/쿠샨은 서기120년경 카슈가르에 자리잡은 왕국을 건설했으며(논거요청됨), 브라미 문자와 행정 언어로 인도 프라크리트 언어 그리고 세린디안 예술로 발전한 희랍-불교 예술을 도입했다.

 

Benefiting from this territorial expansion, the Yuezhi/Kushans were among the first to introduce Buddhism to northern and northeastern Asia, by direct missionary efforts and the translation of Buddhist scriptures into Chinese. Major Yuezhi missionary and translators included Lokaksema and Dharmaraksa, who went to China and established translation bureaus, thereby being at the center of the Silk Road transmission of Buddhism.[citation needed]

영토 확장으로 이득을 얻은 월지/쿠샨은 불교를 아시아 북부와 북동부에 소개하는 첫 번 째 중에 속하였는데, 즉 직접적인 사절(선교사)의 노력과 불전을 중국어로 번역하는 것을 통해서이다. 주요한 월지 포교사 이면서 번역가로는 로칵세마(지루가참(支婁迦讖))와 다르마락샤(Dharmaraka /축법호(竺法護))이고, 이들은 중국에 가서 번역 관청을 세웠으며, 그 때문에 실크로드에서 불교 전도의 중심이 된 것이다.

 

The Chinese kept referring to the Kushans as Da Yuezhi throughout the centuries. In the Sanguozhi (三國志, chap 3), it is recorded that in 229 CE "The king of the Da Yuezhi, Bodiao 波調 (Vasudeva I), sent his envoy to present tribute, and His Majesty (Emperor Cao Rui) granted him the title of "King of the Da Yuezhi Intimate with the Wei ()."

중국은 수세기를 걸쳐서 쿠샨을 대월지라고 지속적으로 불렀다. 삼국지에 기록하기를 서기 229년에 대월지의 왕 파조(波調/바수데바1)는 조공사신을 보냈으며, ()나라 제2대 황제 조예(曹叡)는 그를 위나라에 충성스런 대월지의 왕이라고 봉하였다.


[지루가참(支婁迦讖): 서기 147 탄생. Lokakema 는 산스크리트어로 세계의 복지라는 뜻. 그는 대승불교 경전을 중국어로 번역한 초기의 불교 승려이다. 그는 간다라 월지족의 쿠샨인이다. 성씨 지()는 월지에서 따온 것이다. 그의 모국어는 토하르어이다. 대승불교 번역서: Prajñāpāramitā Sūtra/ 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 Pratyutpanna Sutra/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 아도세왕경(阿闍世王經), 잡비유경(雜譬喩經), 수릉엄경(首楞嚴經), 무량청정평등각경(無量淸淨平等覺經), 보적경(寶積經) .

해설: 위 경중에서 수릉엄경과 보적경은 성명쌍수 수련과 관련이 깊은 경전입니다.

 

다르마락샤(Dharmaraka /축법호(竺法護): 대승불교 번역가. 가족은 돈황에 살았고, 그곳에서 서기230년에 탄생했다. 젊었을 서역 여러나라를 여행하고 중앙아시아의 언어와 문자를 배웠다. 묘법련화경(妙法蓮華經) 번역했다. 154개의 상좌부 불경과 대승 불경을 번역했다.

번역서: Saddharmapunnarnkasūtr/ 정법화경(正法華經),

Pancavimsatisāhasrikāprajnāpāramistasūtra /광찬반야바라밀경(光贊般若波羅密經),

Danabhūmikasūtra / 점비일절지덕경(漸備一切智德經),

Lalitavistara/ 보요(普曜) .

 ]


2008-08-15

이태수 번역

박트리아, 대하(大夏), 월지(月支), 쿠샨왕조 (박트리아 - 영문위키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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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hosunsa.org/ssMain/d.jsp?menu_index=3

날짜: (2008-04-09 07:53:16.0)
 
[아무다르야: 다르야는 팔라비어로 바다 또는 강. 아무는 아물(Āmul)이라는 도시에서 유래하였고, 현재의 Türkmenabat(39.5N, 63.3E)이다. Türkmenabat은 시릴릭어로 turkmen이고, 투르크메니스탄 레밥주의 주도(州都)이며, 공식명칭은 Chardzhou이고, 또는 Chardjui이며 그 뜻은 네개의 강이다. 아무다르야는 vakhsh강과 panj강이 합류된 강으로, 현지인은 에덴동산 또는 천국의 네개의 강 중의 하나인 gihon에서 유래된 jayhoun이라고 부른다. 희랍어로 Oxus강이라고 하며, 유래는 Vakhsh(왁쉬)강이다. 옥수스강은 Matsya Purana(비슈누의 첫번째 화신의 신화)에서는 Chakshu강이고, Tushara (Rishika?)족, Lampaka족, Pahlava족, Parada족과 Shaka족의 나라를 통과한다(마하바라타 힌두 서사시에 나오는 부족명).
해석: 아무다르야는 한자로 알목하, 아목하이다. 투르크멘니스탄에서는 ‘투르크멘’이라고 하는데 토문(土門), 두만과 음이 유사하다. 위 내용으로 볼 때 에덴의 위치가 아무하가 될 수 있으며, 마하바라타 힌두서사시의 역사적 배경이 아무하가 될 수 있다. 또 박트리아는 페르시아어로 ‘박타르’이므로 ‘배달’과 통한다.
사천성은 四川이므로 아무 다르야강의 유래와 일치하는 네 개의 강이다. 인류의 시원은 중앙아시아이기 때문에 사천성의 지명도 위에서 따왔을 것이다.]
 
박트리아, 대하(大夏), 월지(月支), 쿠샨왕조
 
Bact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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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trian" redirects here. For the camel, see Bactrian camel. For the language, see Bactrian language.
 

   Map of Bactria 박트리아 지도

Ancient cities of Bactria. 박트리아의 고대 도시
 
Bactria (Bactriana, Bākhtar in Persian, also Bhalika in Arabic and Indian languages, and Daxia in Chinese) was the ancient Greek name of the country between the range of the Hindu Kush and the Amu Darya (Oxus); its capital, Bactra or Balhika or Bokhdi (now Balkh), was located in what is northern Afghanistan.
Bactria was bounded on the east by the ancient region of Gandhara. The Bactrian language is an Iranian language of the Indo-Iranian sub-family of the Indo-European family.
The Bactrians are one  of the main ancestral lines of the modern-day Tajiks.[1]
박트리아: 페르시아어로박트리아나, 박타르, 아랍어와인도어로발리카, 한자로대하(大夏). 박트리아는 힌두쿠쉬와 아무다르야(옥수스) 사이 영역에 있는 나라로서 희랍어 이름이었다. 수도는 박트라 또는 발히카 또는 보크디(현재의 발크흐)이고, 아프가니스탄 북부에 있다.
박트리아는 동쪽으로 간다라의 고대 영역과 경계가 된다. 박트리아 언어는 인도 유럽어계의 인도 이란어 아래의 이란 언어이다.
박트리아족은 현재의 타직크족(타지크스탄)의 주요한 조상의 하나이다.
 
 
Geography
Bactria is basically what is now northern Afghanistan. It is a mountainous region with a moderate climate. Water is abundant and the land is very fertile. Bactria was the home of one  of the Iranian tribes. Modern authors have often used the name in a wider sense, as the designation of all the countries of Central Asia.
지리:
박트리아는 기본적으로 현재 아프가니스탄 북부에 있다. 그 곳은 따뜻한 날씨의 산지(山地)이다. 물은 풍부하고 땅은 비옥하다. 박트리아는 이란부족 중의 하나의 고향이었다. 현대의 작가들은 종종 이 이름을 넓은 의미로 ‘중앙아시아의 모든 국가’ 명칭으로 사용해왔다.
 
 
History
Bactria-Margiana Archaeological Complex (BMAC)
 
Godesses, Bactria, Afghanistan, 2000-1800 BCE
 
The Bactria-Margiana Archaeological Complex (BMAC, also known as the "Oxus civilization") is the modern archaeological designation for a Bronze Ageculture of Central Asia, dated to ca. 2200–1700 BC, located in present day Turkmenistan, northern Afghanistan, southern Uzbekistan and western Tajikistan, centered on the upper Amu Darya (Oxus), in area covering ancient Bactria. Its sites were discovered and named by the Soviet archaeologist Viktor Sarianidi (1976). Bactria was the Greek name for the area of Bactra (modern Balkh), in what is now northern Afghanistan, and Margiana was the Greek name for the Persian satrapy of Margu, the capital of which was Merv, in today’s Turkmenistan.
According to some writers, Bactria was the homeland of Aryan tribes who moved south-west into Iran and into North-Western India around 2500-2000 BCE Later it became the north province of the Persian Empire in Central Asia.(Cotterell, 59) It was in these regions, where the fertile soil of the mountainous country is surrounded by the Turanian desert, that the prophet Zarathushtra (Zoroaster) was said to have been born and gained his first adherents. Avestan, the language of the oldest portions of the Zoroastrian Avesta, was onc e called "old-iranic" which is related to Sanskrit. Today some scholars believe the Avestan-Language was the western dialect of the Sanskrit because both languages are the oldest Indo-Iranian language of Aryans we know. With the time the Avestan-Language became developed by own western style.
역사:
박트리아-마르기아나 유적군(BMAC)
BMAC는 옥수스 문화라고 하며, 중앙아시아의 현대의 고고학 명칭이고, BC2200-1700년이며, 투르크메니스탄, 북부 아프가니스칸, 남부 우즈베키스탄, 서부 타지키스탄에 있고, 중심은 고대 박트리아 영역의 아무다르야(옥수스)강의 상류에 있다. 이 곳은 소련 고고학자 빅토르 사리아니디(1976)가 발견하고 이름을 붙였다. 박트리아는 현재의 북부 아프가니스탄의 박트라(현 발크) 지역에 대한 희랍 이름이었고, ‘마르기아나’는 마르구의 페르시아 군주에 대한 희랍어 이름이며, 마르구의 수도는 현 투르크메니스탄의 메르브(MERV)이었다. [MERV: 한자로 목록(木鹿), 페르시아어로 Mary, 12세기 최대 도시. Mary주의 주도, 위치는 37.6N, 61.8E]
작가들에 따르면, 박트리아는 아리안족의 고향이었으며, 그들은 BC2500-2000년에 남서쪽으로는 이란에 들어갔고, 인도 북서부에 들어갔다. 그 후 중앙아시아의 페르시아 제국 (550–330 BC)의 북부 주가 되었다. 바로 이 지역은 산이 많은 나라의 비옥한 토지가 투란 사막으로 둘러쌓여 있으며, 조로아스터교의 예언자 Zarathushtra가 태어나고 첫번째 신봉자들을 얻었던 지역으로 알려졌다. 아베스탄 언어는 조로아스터교 성전의 고대 언어로, 산스크리트어와 관련있는 고(古) 이란어였다. 오늘날 몇몇 학자들은 아베스탄 언어는 산스크리트어의 서부 방언이었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두 언어가 아리안족의 가장 오래된 인도-이란어였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아베스탄 언어는 서양식으로 발전되었다.
 
 
Cyrus and Alexander
See main article: Bactria (satrapy)
It is not known whether Bactria formed part of the Median Empire, but it was subjugated by Cyrus the Great, and from then formed one  of the satrapies of the Persian empire. After Darius III of Persia had been defeated by Alexander the Great and killed in the ensuing chaos, his murderer Bessus, the satrap of Bactria, tried to organize a national resistance based on his satrapy.
Alexander conquered Sogdiana and Iran without much difficulty; it was onl y in to the south, beyond the Oxus, that he met strong resistance. After two years of bloody war Bactria became a province of the Macedonian empire, but Alexander never successfully subdued the people. After Alexander’s death the Macedonian empire was eventually divided up between generals in Alexander’s army. Bactria became a part of the Seleucid empire, named after its founder, Seleucus I.
씨루스와 알렉산더:
박트리아가 메디안 제국의 일부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씨루스 대왕(590 BC 또는 576 — 530 BC)에 의해 종속되었으며, 그 때부터 페르시아 제국의 군주의 하나가 되었다(사트라피는 산스크리트어로 크샤트리야(kshatriya)이고 군인계급 또는 왕).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가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패배하고 뒤이은 혼란에서 살해당한 후에, 시해자 베수스(BC329사망)는 박트리아의 군주인데, 그의 군주에 기초한 국민저항군을 조직하려 했다.
알렉산더는 별 어려움 없이 소그드(이란족, 粟特)와 이란을 정복했다; 강력한 저항에 부딪힌 곳은 옥수스강을 넘어 남쪽 뿐이었다. 알렉산더 사후 마케도니아 제국은 결국 알렉산더 장군들(의 국가)로 분리되었다. 박트리아는 창건자 셀로우코스를 따서 셀로우코스(BC312-64년) 왕조의 일부가 되었다.
 
[소그디아: 이란족의 고대문명으로 한자로 속특이고, 페르시아어로 수구다이다. 현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 부하라, 후잔드(khujand), 케쉬이다. 주 도시는 사마르칸. 위치는 박트리아의 북쪽, 콰레즘(화레즘)의 동쪽, 강거(康居)국의 남동쪽에 있으며, 자라프샨 계곡을 따라 아무다르야와 시르다르야 강 사이에 있다.
강거(康居)국: 대완(大宛, Ferghana)의 북서쪽의 왕국으로 소그드 왕국의 시기이다. 한나라 장건이 BC128년 방문함. 이 부족은 월지족을 닮았고, 월지국은 남쪽에 흉노는 동쪽에 있다(월지국이 박트리아).
한나라 때 장건이 갔었던 지역으로, 이 지역은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지로, 희랍국가입니다. 따라서 한자 이름과 희랍 이름이 있습니다.]  
 
 
Seleucid Empire
The Macedonians (and especially Seleucus I and his son Antiochus I) established the Seleucid Empire, and founded a great many Greek towns in eastern Iran, and the Greek language became dominant for some time there.
The paradox that Greek presence was more prominent in Bactria than in areas far more adjacent to Greece could possibly be explained by the supposed policy of Persian kings to deport unreliable Greeks to this the most remote province of their huge empire.[citation needed]
셀레우코스 왕조: (영어 사전)
마케도니아인들(특히 셀레우코습세와 그의 아들 안티오쿠스1세)는 셀루우코스 왕조를 열었고, 동부 이란에 거대한 희랍 도시를 건설했으며, 희랍어가 이곳에서 오랫동안 지배적이었다.
{번역 생략}
 
Greco-Bactrian Kingdom
 
Gold stater of the Greco-Bactrian king Eucratides, the largest gold coin of Antiquity.
 
Map of the Greco-Bactrian at its maximum extent, circa 180 BCE
[Sogdiana는 속특, Ferghana는 대완, Bactria는 대하, Parthia는 안식국]
 
The many difficulties against which the Seleucid kings had to fight and the attacks of Ptolemy II of Egypt, gave Diodotus, satrap of Bactria, the opportunity to declare independence (about 255 BCE) and conquer Sogdiana. He was the founder of the Greco-Bactrian kingdom. Diodotus and his successors were able to maintain themselves against the attacks of the Seleucids - particularly from Antiochus III the Great, who was ultimately defeated by the Romans (190 BCE).
The Greco-Bactrians were so powerful that they were able to expand their territory as far as India:
"As for Bactria, a part of it lies alongside Aria towards the north, though most of it lies above Aria and to the east of it. And much of it produces everything except oil. The Greeks who caused Bactria to revolt grew so powerful on account of the fertility of the country that they became masters, not onl y of Bactria and beyond, but also of India, as Apollodorus of Artemita says: and more tribes were subdued by them than by Alexander...." [2]
그레코-박트리아 왕국: [BC250-125] [그레코는 ‘그리스의’ 의 뜻]
셀로우코스 왕들이 부딪힌 어려움과 이집트의 프톨레미2 세의 침략으로 인하여, 박트리아의 군주 디오도투스는 기원전 255년 독립을 선언하고 소그드 왕국을 정복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디오도투스와 그의 후계자들은 셀로우코스의 침략(특히 안티무스 3세 대왕)으로부터 대항할 수 있었다.(안티무스3세는 로마제국에 의해 결국 패배당함)
그레코-박트리아는 강력해서 인도까지 영역을 확장할 수 있었다:
“박트리아는, 그 일부는 아리아의 북쪽에 놓여 있고, 대부분 아리아 위쪽과 동쪽이다. 석유를 제외한 모든 것이 생산된다.  박트리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희랍인들은 토지가 비옥해서 강력해졌으며 박트리아와 그 주변 그리고 인도에서 주인이 되었으며, 아르테미타의 아폴로도루스(희랍작가)가 말하는 바와 같이: 많은 부족들은 알렉산더에 의해서가 아니라 희랍인들에게 정복되었다.”
 
 
Indo-Greek Kingdom: 인도-희랍(그리스) 왕국
Main article: Indo-Greek Kingdom
 
The founder of the Indo-Greek KingdomDemetrius I (205-171 BCE), wearing the scalp of an elephant, symbol of his conquest of India.
인도-희랍 왕국의 개창자 데메트리우스(BC205-171)는 꼬끼리 머리 가죽을 쓰고 있는데, 인도 정복의 상징이다.
 
The Bactrian king Euthydemus and his son Demetrius crossed the Hindu Kush and began the conquest of Northern Afghanistan and the Indus valley. For a short time they wielded great power; a great Greek empire seemed to have arisen far in the East. But this empire was torn by internal dissensions and continual usurpations. When Demetrius advanced far into India one  of his generals, Eucratides, made himself king of Bactria, and soon in every province there arose new usurpers, who proclaimed themselves kings and fought one  against the other.
Most of them we know onl y by their coins, a great many of which are found in Afghanistan, Pakistan and India. By these wars the dominant position of the Greeks was undermined even more quickly than would otherwise have been the case. After Demetrius and Eucratides, the kings abandoned the Attic standard of coinage and introduced a native standard, no doubt to gain support from outside the Greek minority. In India, this went even further. Indo-Greek King Menander I (known as Milinda in India), recognized as a great conqueror, converted to Buddhism. His successors managed to cling to power somewhat longer, but around 10 CE all of the Greek kings were gone.
인도-희랍 왕국:
박트리아 왕 유티데무스와 아들 데메트리우스는 힌두쿠쉬를 넘어서 북부 아프가니스탄과 인두스 계곡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짧은 시간에 그들은 권력을 휘둘렀다; 대 희랍제국은 극동에서 일어서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 제국은 내부 불화와 계속된 왕위찬탈로 분열되었다. 드메트리우스가 인도로 진격할 때, 그의 장군 유크라티데스은 스스로 박트리아의 왕이라 했으며, 곧 모든 지역에서 찬탈자가 나타났으며, 자신을 왕이라 하고 서로 싸웠다.
그들 대부분을 오직 그들의 주화로만 알 수 있는데, 주화의 대부분은 아프카니스탄, 파키스탄, 인도에서 발견된다. 이러한 전쟁에 의해서 희랍인들의 우세적인 위치는 다른 경우보다 훨씬 빨리 깎아 내려갔다. 데메트리우스와 유크라티데스왕은 아테네의 표준 주화를 포기하고 토착 표준을 도입했는데, 희랍 소수민족 밖에서 지원을 얻기 위해서였다. 인도에서 이것은 훨씬 더 진척되었는데, 인도-희랍왕 메난데르(밀린다왕)은 대 정복자로서 불교에 귀의했다. 그의 계승자는 좀 오랫동안 그럭저럭 권력을 유지했지만, 기원10년쯤에 모든 희랍의 왕들은 사라졌다.
 
[대승경전 밀린다王問經에 밀린다왕과 비구 나가세나와의 문답이 있다. 이 경전은 한글로 번역되 한국 사찰에 많이 보급되었다. 희랍인들이 불교에 귀의하게 된 것은 전불시대(역사이전의 부처의 시대)에 불교를 믿었었기 때문이고, 소크라테스의 철학으로 인해 고등 불교를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왕문경에 보면 밀린다왕의 질문은 상당히 수준이 높다. 서양인 답게 질문이 직설적이다. 또 희랍어, 페르시아어, 산스크리트어는 같은 언어에서 유래된 것이기 때문에 불교를 이해하는데 빠른 것이다.
인도-희랍왕국은 기원10년 인도-스키타이인의 침공으로 멸망했다. 이 시기에 파키스탄의 동부에 ‘Taxila’라고 하는 도시들이 있었는데 이 도시들에 여러 왕가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이 왕국은 대승불교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 특히 불상을 조각함. 초기불교에서는 불제자는 부처를 존중하는 의미로 보리수 아래에 앉아 있는 부처의 모습에서 보리수와 그의 제자들만 그리고 부처의 모습은 ‘좌대’만을 표시했다. 그러나 희랍인들은 부처를 신으로 여겼기 때문에 신상처럼 불상을 조각한 것이다.]
 
 
Sakas and Yuezhis
 
The treasure of the royal burial Tillia tepe is attributed to 1st century BC Sakas in Bactria.
왕실 부장품 틸리야 테페는 BC1세기 박트리아의 사카족의 것이다.
 
There is no evidence that the Sakas were related to the Buddha’s original clan, Shakya.
The weakness of the Greco-Bactrian empire was shown by its sudden and complete overthrow, first by the Sakas, and then by the Yuezhi (who later became known as Kushans), who had conquered Daxia (= Bactria) by the time of the visit of the Chinese envoy Zhang Qian, who was sent by the Han emperor to investigate lands to the west of China circa 126 BC.[3]
But then its emergence, isolated thousands of miles from Greece, could onl y be described as a paradox. However, its cultural influences were not completely undone; an artistic style mixing western and eastern elements known as the Gandhara culture survived the empire for hundreds of years.
사카(塞,새)족과 월지(月支)족:
사카족이 부처의 씨족 샤키야족과 관련이 있다는 증거는 없다.
그레코-박트리아 제국의 몰락은 갑자기 완벽히 전복되었는데, 먼저 사카족에 의해서, 그 다음은 월지족에 의해서였다. 월지족은 나중에는 쿠샨(貴霜 ,귀상)족이라고 한다. 쿠샨족은 대하(박트리아)를 정복했는데 그 당시는 한무제의 장건이 방문할 때이고 기원전 126년에 서역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것이다.
그러나 쿠샨왕조의 출현은 희랍에서 수천마일 떨어진곳에서는 역설로 서술될 뿐이었다. 그러나 그 문화적 영향은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다; 간다라 문화라고 하는 동서양의 예술적 혼합은 수백년동안 제국에서 살아남았다.
 
 
Contacts with China
 
Zhang Qian taking leave from emperor Han Wudi, for his expedition to Central Asia from 138 to 126 BCE, Mogao Caves mural, 618-712 CE.
장건의 한무제와의 이별, 기원전138-126년 중앙아시아 탐방, 서기 618-712년의 막고굴 벽화.
 
The name Daxia appears in Chinese from the 3rd century BCE to designate a mythical kingdom to the West, possibly a consequence of the first contacts with the expansion of the Greco-Bactrian Kingdom, and then is used by the explorer Zhang Qian in 126 BCE to designate Bactria.
The reports of Zhang Qian were put in writing in the Shiji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by Sima Qian in the 1st century BCE. They describe an important urban civilization of about one  million people, living in walled cities under small city kings or magistrates. Daxia was an affluent country with rich markets, trading in an incredible variety of objects, coming as far as Southern China. By the time Zhang Qian visited Daxia, there was no longer a major king, and the Bactrian were suzerains to the nomadic Yuezhi, who were settled to the north of their territory beyond the Oxus (Amu Darya). Overall Zhang Qian depicted a rather sophisticated but demoralized people who were afraid of war.
Following these reports, the Chinese emperor Wu Di was informed of the level of sophistication of the urban civilizations of Ferghana, Bactria and Parthia, and became interested in developing commercial relationship them:
"The Son of Heaven on hearing all this reasoned thus: Ferghana (Dayuan) and the possessions of Bactria (Daxia) and Parthia (Anxi) are large countries, full of rare things, with a population living in fixed abodes and given to occupations somewhat identical with those of the Chinese people, but with weak armies, and placing great value on the rich produce of China" (Hanshu, Former Han History).
These contacts immediately led to the dispatch of multiple embassies from the Chinese, which helped to develop the Silk Road.
중국과의 교류:
대하는 기원전3세기 중국에서 서역의 신비왕국을 가리키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아마도 그레코-박트리아 왕국의 확장과 더불어 첫번째 접촉의 결과일 것이고, 기원전 126년 장건에 의해 박트리아를 가리키는 것으로 쓰여졌다.
장건의 보고서는 기원전 1세기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되어있다. 약 백만의 사람들이 작은 왕 또는 지사의 통치아래 성안에서 살고 있는 문명도시를 서술하고 있다. 대하는 시장이 활기찬 부유한 나라이고, 다양한 물품을 거래하고, 멀리는 남부 중국까지 거래한다. 장건이 대하를 방문할 때는, 주요한 왕이 없었으며, 박트리아 왕국은 월지족 유목민을 지배하고 있었고, 월지족은 옥수스강(아무다르여) 넘어 왕국의 북쪽에 거주하고 있었다. 전반적으로 장건은 전쟁을 두려워하고 교활하고 풍속이 문란한 사람들이라고 서술했다.
다음 보고서에서, 한무제는 페르가나(대완), 박트리아(대하), 파르티아(안식국)의 복잡한 도시문명을 듣고서 그들과 상업교류에 관심을 가졌다:
 “천자는 이 모든 것을 듣고서 이와 같이 생각했다: 페르가나(대완)와 박트리아(대하)와 파르티아(안식)은 큰 나라이고, 희귀한 것이 많고, 고정된 장소에 거주하고, 중국인과 어느정도 같은 직업을 가지고 있지만, 군대는 약하고, 중국의 풍부한 물산에 관심을 갖는다.(한서, 전한)
이러한 교류는 즉각 중국에서 여러 사신을 파견하게 되었고, 실크로드를 발전시키게 하였다.
[위는 깊이 있는 내용이 없어 보입니다]
 
 
Tokharistan
 
Kushan worshipper with Zeus/Serapis/Ohrmazd, Bactria, 3rd century CE.[4]
 
Kushan worshipper with Pharro, Bactria, 3rd century CE.[5]
 
토하리스탄: 토하리 왕국
Following the settlement of the Yuezhi (described in the West as "Tocharians"), the general area of Bactria came to be called Tokharistan. From the 1st century CE to the 3rd century CE, Tokharistan was under the rule of the Kushans. They were followed by Sassanides (Indo-Sassanids). Later, in the 5th century, it was controlled by the Xionites and the Hephthalites. In the 7th century, after a brief rule under the TurkishKhaganats, it was conquered by the Arabs.
This article incorporates text from the Encyclopædia Britannica Eleventh Edition, a publication now in the public domain.
월지족이 정착함에 따라(서 양에서는 ‘토차리언’이라고 함) 박트리아의 일반적인 지역은 토하리스탄으로 불려졌다. 기원 1세기부터 3세기까지, 토하리스탄은 쿠샨왕조의 통치아래 있었다. 그 다음은 사사니드왕조의 통치를 받았다. 그 후 5세기에 씨오니테와 헤프탈리테의해 지배되었다. 7세기 돌궐 가한(왕)의 짧은 통치 후에는 아랍에게 정복되었다.
[토하리스탄의 영역은 쿠샨 박트리아와 같으며, 남부 타지키스탄, 북부 아프가니스탄과 Surxondaryo(아무강 지류)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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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글에 달린 댓글 수 : 3개
댓글 3. 신화는 동서양이 공유 중산 2008-04-09 18:50:24.0



박 트리아는 페르시아어로 박타르이므로 박달, 배달이 됩니다. 즉 배달의 역사를 이란인 희랍인과 공유한다는 것입니다. 상고시대의 고조선, 삼한의 역사는 페르시아,인도,그리스와 공유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즉 고조선의 역사중에서 그리스 로마신화, 힌두신화, 페르시아 신화 등의 내용은 고조선의 역사를 가리킬 수 있다고 봅니다.
특히 신라의 이름 지명을 보면 범어, 페르시아어, 희랍어와 닮은 것이 많습니다.
신화중에서 내용이 같다면 연원이 같은 것에서 출발하여 각색되어 변형된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몽골-돌궐의 텡그리 신앙은 단군신앙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미주 인디언까지 해당됩니다.
댓글 2. 전불시대 중산 2008-04-09 18:32:19.0



  위키영문사이트 참고서적을 보면 주로 서양인 학자입니다. 부처는 1만년, 5천년, 3천년 이내에몇 천만년동안 출현해왔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문명주기설에 따른 것으로, 사상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야, 부처가 출현하여 설법을 하는 것입니다. 원시시대에는 출현해도 알아듣는 사람이 없기 때문임. 부처의 출현이후 문명은 더욱 고도화 되고, 일반적으로 최후에는 물질과학 수준이 높아지고, 정신적인 수준은 떨어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최후에는 전쟁, 사막화, 질병, 지각변동, 혜성충돌 등으로 인류의 문명은 하루아침에 또는 시간을 두고 사라지게 됩니다. 소겁, 중겁, 대겁이라 하는데, 긴 기간에 일어난 재앙 또는 넓은 지역의 재앙을 대겁이라 한다면, 짧은 기간 좁은 범위의 재앙은 소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주기는 종류가 엄청 많습니다.
  적어도 1만년에 한번씩 문명은 고도화되고 지구는 엄청난 재앙으로 인하여 살아남은 소수에 의해 원시시대로 돌아가게 됩니다.

  불경은 시간개념이 희박하여 몇천년전의 일도 몇 겁전이라고 쓰는데, 1겁은 어떤때는 1억년입니다.
 원시7불은 시간적으로 무슨 의미인지 알 수 가 없습니다. 두가지로 볼 수 있는데, 예를 들면 백만년 동안이면 백만명의 부처가 출현한 것으로 보면, 이 기간의 대표적인 부처를 원시7불의 하나로 적는 방식입니다. 그러면 원시7불 중 한분 한분마다 백만년마다 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총 7백만년이 됩니다.
  적어도 원시 7불은 석가모니 직전의 부처이름이 아니고, 몇 십만년전, 몇 백만년 전의 부처 이름입니다.

역사 이전은 사료가 별로 없으므로 무슨 시대구분을 못하지만, 수련계에서는 지구의 역사를 모모 부처의 시대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시기는 '석가모니불 시대'에 해당되고 거의 끝나가는 시점입니다.

댓글 1. 전불은 가섭불 최남석 2008-04-09 12:38:45.0



 전불은 가섭불입니다  대승공교 이지요 새거란 (스기타이) 으로서 알타이에서 발상한 새부루(서가불)은 주술밀교 입니ㄷ
페르시아 가 이란 북부에 있다가 지금의 페르시아로 갔는데 달마대사 가 이곳 원 페르시아 출생이고  달마는 가섭의 공교를 계승하여 지나에 전했으며 니힐리즘이 이곳에서 발상한 사상으로 쏘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야스퍼스  니체로 이어지다 정치적 허무주의로 악화 되어 나찌의 파시즘이 나왔습니다  (최남석 연구 미완성 결론)

기고 하신 글은 저자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저 하고 맥락이 닿아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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