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트라 해 (그리스어 紅海)  박선협  webmaster@mestimes.co.kr  [매스타임스]

에리트라 해(海)란?

‘로마의 평화’라고 일컬어졌던 제정로마시대, 호화사치를 찾아 나선 서방 사람들은 진기한 동방의 산물에 동경의 눈길을 보냈다. 그것은 로마 상인의 부풀어 오른 동방에의 진출을 자극시켰고 부추겼다. 그 판도는 대해를 넘어 인도, 이윽고는 인도지나에 도달하였다. 이것은 기원전후의 웅대한 남해 항해시대를 밝혀 주는 귀중한 증언이다.

오늘날 지도를 펴놓고 보더라도 에리트라 해(海)라는 이름의 바다를 찾기란 불가능하다. 이 이름은 기원 1~2세기의 서방인(로마인이나 그리스인)이 오늘의 인도양, 아라비아 해, 페르시아 만, 벵골 만 주변을 아울러 부른 명칭이다. 글자 뜻으로 보면 그리스어의 에리트라란 붉음(赤)을 의미한다 해서 홍해(紅海)를 가리키고 있으나, 당시는 선박이 동방무역을 위해 운항한 모든 해양, 즉 오늘날 널리 알려진 ‘남해’ 정도의 막연한 해역을 일컫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그리스어로 쓰인 이 책은, 지금 남아 있는 고대의 많지 않은 희귀한 저작물 중의 하나지만 저자이름이 적혀져 있지 않다. 기재되어 있는 달력(1~3월)이 로마 명과 이집트 명을 함께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는 이 책의 저자가 이집트에서 상업을 경영한 그리스인일 듯싶다는 것을 추측하는 데 그친다. 이 책의 성립 연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기원 1세기 전후의 작품이라는 것은 틀림이 없다. 이 책은 해상 루트에 의한 동방과의 교역을 알릴 의도로 쓰였다.

항해로, 거리, 각 정박 항구명, 그곳의 수출입 품목에 대한 기술이 특히 상세하다. 한편 승무원 수, 여행장비, 육상에서의 구체적인 상거래와 알선모양을 기술한 것은 빈약하며 불친절하다고 소문날 정도이다.

그러면서도 이 책이 결코 황당무계한 안내서가 아닌 것은 거의 동시대의 저작, 즉 스트라본(전 64년~후 21년)의 지리지(地理誌)나 브리니우스(후 23~79년)의 박물지(博物誌)ꡕ등의 기술 내용과 많은 부분에서 일치한다는 점에서도 확실하다. 그리고 발굴에 의한 고고학상 고증에 의하여서도 그 신빙성이 확인되고 있다.

앞의 두 책에 대하여 이 책의 특이한 지위는 저자가 자신의 체험을 통하여 이 안내서를 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정박항마다의 수출입품 리스트에 있어서는, 이 책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알 수가 없을 것이라고 일컬어질 정도였다. 전문(全文) 64절에서 보듯이 단편에 지나지 않으면서, 고대 교역사상의 수수께끼를 풀어헤치는 데는 불가결한 저작이다.
다른 한편 이 책이 당시 동방무역의 커다란 이익을 눈앞에 두고 일확천금을 꿈꾸었던 상인, 혹은 서둘러 상인흉내를 탐했던 사람들에게 있어, 항해, 교역상의 주의, 정보를 들려주는 귀중한 지도서였다는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렇듯 동방무역에 관한 ‘안내서’가 나타나게 되었던 기원 1세기경의 세계란 어떤 정황이었을까.

먼저 로마는 기원전 30년, 프톨레마이오스 조(朝) 이집트를 영토에 편입시키고,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재위 전 27~후 14년)가 그 후 2백 년간 계속된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의 반석을 쌓았던 것이다.

이러한 정황 아래 로마시민의 생활은 날로 불어나는 사치풍조를 휘감고 장신구, 생활필수품에 이르기까지 동방의 진기한 물품들이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앞 다투어 사들이기에 혈안이다시피 하였다.
이른바 이것이 동서교역의 융성을 재촉한 하나의 원동력이었다.
다른 한편 동방의 중국도 이 무렵 후한시대(후 25~220년)에 해당, 서역의 영역확대에는 지극히 야심적인 시대였다.

후한의 무장(武將)으로 서역제국을 삼켰던 반초(班超)가 대진국(大秦國: 로마동방영토)에 감영(甘英)을 파견(후 92년)했던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다만 이 로마와 후한의 두 제국은 서로 그 손길을 펼치면서도 직접적으로 활발한 교섭을 갖는 데까지 이르지 않았다.

그럴 것이 당시 두 제국의 중간지대라고 할 수 있는 페르시아 방면에는 파르치아 국(안식국, 安息國)이 있어 이 나라와 로마와는 적대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당시 로마가 동방의 산물을 수입하기 위해서는, 아라비아 상인의 중개를 거치든가 아니면 바닷길로 동방에 향하여 배를 띄워 산물을 직접 구입하든가 할 수밖에 없었다.

로마 상인에게 이익이 컸던 것은 중개료를 필요로 하지 않은 해로(海路)였으나, 당초는 연안전달의 방법밖에 없었고 역시 각 기항지에서 아라비아인에 의하여 세금을 징수당했다. 그것이 기원 1세기 전후에 계절풍(힛파로스의 바람)이 발견됨에 따라 로마 선박이 직접 인도까지 도달하는 것도 가능하게 되었다.
그에 의해 로마 세계와 동방과의 직접교역을 매우 활발히 하게 되어, 그것을 배경으로 하여 이 책과 같은 남해항로 이른바 교역의 안내서라 할 수 있는 저작도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서방이 동방과의 교역을 행함에 있어 다량의 교역품을 한꺼번에 그것도 육로에서와 같이 번잡한 과세를 바칠 걱정도 없이 수송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바닷길이 개척되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난파의 위험은 안고 있었으나 바다는 매력적인 코스였다. 마치 그에 응하기라도 하는 듯 인도의 여러 항구에는 멀리 중국이나 인도지나로부터의 산물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고대에 있어서 인도와의 교역을 최초대량으로 행한 것은 서방 상인(주로 그리스 상인)이었으나 기록에 남아 있는 인도와의 해상교통의 단서를 열어놓은 것은 중국이 2세기나 빠르다.
전한서(前漢書) 지리지에서는 광동성 혹은 인도지나 동북부의 해안지방으로부터 남인도 동해안의 황지국(黃支國)에 이르는 왕로(往路), 그리고 귀로, 무역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 왕래가 중국・인도 무역의 발전에 연결고리를 이루지는 못했으며, 인도의 유용성을 먼저 인식한 것은 멀리 지중해 주변의 사람들이었다.

이 시기에 중국과 인도와의 중간지대 인도지나에서 일어난 나라를 살펴보는 것은 흥미진진한 일이다. 부남국(캄보디아)은 기원 1세기 말에서 2세기 사이에 나타난 것으로 되어 있으나, 그 건국설에는 인도로부터의 도래자(渡來者)와 토착민 여자 지배자와의 인연이 쓰여 있다.

그리고 이 부남국의 활동시기(후 2~3세기)와 거의 같은 연대의 오크에오 유적에서는 당시의 유물이 다수 출토되고 있으나 이들 중에서 중국계통의 것은 극히 미미하다. 남인도로부터 왔다고 생각되는 로마화폐형 메달이나 그리스, 소아시아에 널리 행해진 기법에 의한 장신구 따위의 출토가 많다.

결국 이 나라의 서방 편중의 자세를 밝혀 주고 있다 할 것이다. 이 책 ꡔ안내기ꡕ 89쪽에서는 인도나 인도지나 방면에서 활약한 선박을 세 종류로 나누고 있으나 그중에서도 ‘언덕을 행한 배’의 어원이 선스크릿인 것을 보면, 당시 인도 이동의 교역에 관해서는 인도선박이 주로 활약하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이처럼 인도 주변국에의 영향은 대단히 컸다. 이런 점에서 미루어 볼 때, 기원 1세기경의 남해 해상교통은 인도~인도지나에서는 주로 인도선박이 활약하였고, 인도의 동해안을 포함한 그 서쪽의 대양에서는 주로 로마선박이 활약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향유(香油)의 꿈을 좇아

서방에서는 옛날부터 향유나 몰약(沒藥)이 진기하고 귀중하게 전해 왔다. 이것은 나무에다 금을 긋거나 또는 자연적으로 흘러나온 수지(樹脂)로서 황색 투명하였다.
로마 상인들은 생활에 윤활유 역할을 하는 향유를 찾아 헤맸다. 그것은 로마시민의 사치를 만족시키기 위해 위험을 무릅쓴 항해요 여행길이었다. 로마시민의 생활 속에 향유는 신(神), 몰약은 의사, 황금은 왕이라는 의식이 널리 유행하고 있었다.
13세기의 대여행가 마르코 폴로도 그 여행기 중에서 페르시아 국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그것은 3인의 박사(혹은 왕)가 어느 날 예언자의 탄생을 소문에 전해 듣고는 과연 그는 신일까 의사일까 아니면 현세(現世)를 다스릴 왕이 될 사람일까를 확인하기 위해 손에 각각 향유, 몰약, 황금을 가지고 서방을 향해 출발하였다는 것이다.
비슷한 이야기가 신약성서의 「마태복음서」에 등장한다. 그러나 성서의 경우 헌상품의 내용에 있어서는 다름이 없으나 그것을 제공받는 자가 신이냐 의사냐 또는 왕이냐는 부분은 빠지고 말았다.

이러한 점에서 미루어 향유는 신, 몰약은 의사, 황금은 왕이라는 생각이 페르시아 국에 오랜 옛날부터 있었던 것으로 성서는 이것을 원용하여 그리스도의 탄생을 극적으로 클로즈업시킨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러면 이처럼 기원 전후에 사람들의 생활에 이미 깊고 널리 스며들었다고 여겨지는 향유나 몰약은 어떤 식물에서 얻어진 것일까.

겉모양은 각기 다르지만 모두 방향성(芳香性) 고무수지로 향의 재료를 뽑는 데 쓰였다. 다만 향유가 백색으로 달콤하고 우아한 향내를 발산하는 데 대하여, 몰약은 자극성이 강한 향기를 낸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 때문에 향유는 제사나 의식에 즐겨 사용되어 페르시아인들의 이야기에 있는 것처럼 신의 이미지와 연결지어져 있다. 몰약은 그 자극성을 살려 약제로 중용(重用)되었던 까닭에 의사를 연상시키게 하였을 것이다.

전 5세기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미라 만드는 법에도 이 몰약이 청정제(淸淨劑), 방부제의 역할을 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향료로서의 이들 식물의 사용기원은 언제부터였을까.

향료의 사용기원에 대해서는 종래 이집트의 제5~6왕조(전 2,500~전 2,400년경) 때부터라는 설이 압도적이었다. 실제로 향로(香爐)가 당시의 유적에서 출토되었다.
그런데 앗가드(전 3,000년경 오리엔트에 개설된 도시국가군을 포함한 최초의 왕조)에도 향유와 몰약을 나타내는 설형문자가 있는 것을 알 수 있어, 어느 쪽이 향료사용의 앞장을 섰는지 단언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여기에 하나의 의문이 생긴다. 그것은 향유산지라고 일컬어진 남부 아라비아는 향료를 북방의 이집트 혹은 오리엔트에 공급했을 뿐, 독자적인 문명을 쌓아 올리지는 못했을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1950년 이후의 남부 아라비아의 미국인에 의한 조직적인 발굴은 이 고대 아라비아의 문명의 일각(一角)에 새 빛을 던졌다.
그것은 솔로몬 왕과 시바의 여왕 이전의 문명인 동시에 독자적인 문자까지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현재의 연구단계에서는 그 문자의 기원도 전 2천 년에 거슬러 올라가는 것에서부터 전 9백 년이라는 여러 설이 분분하여 종잡을 수 없다.

그 위에 현대의 아라비아 반도의 정치정세, 습관 따위에 의한 상세한 연구를 어렵게 하는 정황에 있어 세밀하고 확실한 것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고대 아라비아의 모습이 분명해진다면 이집트, 오리엔트에 비견할 만한 것이 될지도 모른다.
전설적인 시바의 여왕을 탄생시킨 고대 아라비아의 땅은 향료를 독점함에 따라 다른 나라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부(副)를 쌓아 올렸다.

솔로몬 왕의 지혜를 시험하기 위해 시나이 반도까지 발길을 옮긴 여왕은 그 소문에 걸맞은 위대한 왕의 지혜에 감복한 나머지 금붙이, 보석, 향료를 다량 헌정하였다 한다. 이때처럼 엄청난 향료가 솔로몬 왕에게 바쳐진 일은 두 번 다시 없었을 것이다.

고대의 향료무역을 도맡다시피 하였던 아라비아 사람들은 그 뒤에도 육로・해로의 동서무역 중계자로서 번영을 누렸다.

브리니우스의 ꡔ박물지(博物誌)ꡕ는 12세기 비잔틴의 사본을 통하여 오늘날에 두루 알려지고 있다. 이 사본에 세계지도가 첨부되어 있으며 원추도법(圓錐圖法)이 처음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것이었다.
경도 180도, 남위 20도에 이르는 반구도(半球圖)로 남북미 대륙,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은 그려져 있지 않다. 그리고 아프리카 동해안 남부와 동남아시아의 연안부가 인도양을 둘러싼 것과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인도양 위를 부는 계절풍은 4~10월 중순에 걸쳐 남서풍과, 1~3월에 걸친 북동풍이 있다. 특히 1월은 강풍으로 정확하게 불어오는 탓에 브리니우스(77년 박물지를 저작)는 그 작품 안에서 인도출항일을 이집트력의 티비(Tybi)의 달(12월 27일~1월 25일) 초순이 아니면 다음달 메치르(Mechir)의 달 제6일까지로 한정하고 있다.

이 계절풍은 안내기에도 나오는 바와 같이 ‘힛파로스의 바람’이라고 불렸다.
힛파로스라는 무역선의 내왕에 의해 이 계절풍이 발견된 연대는 확실치 않다. 기원전 1세기경이었다는 것과 기원후 1세기 중엽이라는 설로 갈라져 있다.
어느 쪽이든 서방 사람들에 의한 이 계절풍의 발견은 인도・로마 간의 무역사상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던 것이다.

고대인도 해상무역 (The maritime Trade of Ancient Indian )

스리랑카 신화(Srilanka; Ceylon)에서 비자야(Vijaya)의 왕자가 북인도에서 항해를 해서 700명 수행원과 함께 실론섬에 도착하여 싱할라(Singhala) 왕국을 수립하는 것으로 나와 있고 인도 역사서 마하완사에 BC 543년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신화를 사실적인 관점으로 볼 때 700명의 수행원과 코끼리,등을 실을 수 있는 정도의 큰 선박을 제조할 수 있는 기술과 남인도 실론섬으로 향해할 수 있는 항로와 항해술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BC 3세기 북 인도를 통일한 마우리아 왕조(Mauriya) 아소카왕(Asoca) 시대에는 해상업무 행정기구가 있어서 체계적이고 일괄적인 해상업무가 이루어 졌다. 예를 들면 선박건조,항해 선장,불고포교사,개척지 관할,등 관할하였다.  아소카왕의 해외정책적 불교 전파로 실론섬에 불교가 전파가 되었고 타 해외지역에도 불교와 인도문화, 행정법,철학,등이 전파되었다.
 
  주제에서 걷 가지로 현재 파키스탄,아프카니스탄에 있던 유목민족 캄보자는 카보자 드바라버티 무역로(Kamboja Dvaravati Caravan)로  구자라트 지방에 도착하여 로마,실론섬 그리고 더 멀리 오늘라 캄보디아까지 진출하여 보석과 말 무역을 하고 식민지를 개척하였다.  캄보자가 캄보디아라는 왕 칭호에 바르만(Varman)을 사용하는 것이 한 근거가 된다.  그외 언어,문화,정치제도,등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나머지는 각자 찾아보았으면 합니다.

  불교자료에 따르면 실론섬에서 서바나(Savannabhumi; 말레이반도)까지 수백 킬로미터가 되고 순풍을 만나면 7일만에 도착할 수 있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가 잘 아는 김해 금관가야 건국자 김수로왕의 왕비 허황옥 보주태후님께서 인도 아유타(아요디야 ;Ayodihya) 왕국에서 김해에 도착하였다는 삼국유사 기록이 있다.  신화로만 여겼던 내용이 몇몇 뜻있는 학자와 재야 학자에 의해 조금씩 규명되고 있다. 몇몇기 논에서 중국 보주지방을 파헤져 행로를 주장하는 분이 계시고 진짜 인도 아유타 지방에서 왔다는 분과 기타 주장이 있다.    실론섬에서 말레이 반도까지 7일 이면 말레이 반도에서 광동성까지 7일 그리고 김해까지 7일 넉넉하게 잡아 1달 이면 한반도나 일본에 도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1세기 경에  향로 다밧길을 통해서 고대 인도들이 무역을 하였고 저 멀리 극동 한반도,일본까지 진출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대의 바닷길 문헌으로 반고가 쓴 『漢書』에서는 중국에서 인도에 이르는 곳에 있던 국가들이 바닷길을 통해 교류했을 가능성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내용이 있다. 책에서는 한 무제 이래로 동남아․인도 국가들이 중국에 대해 조공무역을 행하였다고 하는데 당시 벌써 이러한 형태의 무역이 형태가 있었다고 믿기는 어렵지만 후대에까지 황지국(남인도 칸치국 추정)에서 사절단이 왔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지속적인 접촉이 유지되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후한대의 2세기경에 천축․대진․단국․엽조 등지에서 사절단이 왔다는 기록이 보이고, 동로마(大秦)의 사신을 사칭한 것으로 추정되는 상인들의 기록도 있어 바닷길이 예전부터 중요한 교역로로 쓰이고 있었음을 반영한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吳 역시 지정학적으로 서역의 육상 교역로와 격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대신 해상활동이 활발하였다. 당시 부흥했던 베트남 남부의 부남(Funan)국과 중천축국(대월지 ; 쿠샨 Kusan, Komboja)의 교류도 흥미롭다. 두 나라 사이의 교류는 중국․인도 사이의 중계무역에 도움이 되었으며 부남국은 후대에 등장하는 스리비자야, 사일렌드라, 말라카 같은 동남아 중계무역 국가의 선례가 되었다. 바닷길을 통한 교류는 吳가 멸망한 후 晉의 통일시기에도 계속되었다. 이 때 국가의 중심이 된 문벌귀족들은 산호․비취 등의 사치품에 관심이 있어 부남․참파 등 20여개 국가들과 교역하였다. 바닷길의 쇠퇴는 북방민족의 화북 지방 점령시기를 기점으로 한다. 이때 쫓겨난 진의 황족과 민중은 남부에 겨우 자리 잡았으며(東晋) 경제적으로 발달한 화북 지방의 점령, 북방민족에 의한 약탈과 파괴로 사치품에 대한 수요는 급감하였기 때문이다.(기원후 300~400)

월지족은 의견이 너무 많고 일치점을 찾기 어렵습니다. 이 페이지를 번역하다가 참고문헌에서 북경사범대 서문명의 논문을 먼저 번역해서 이 사이트에 올렸습니다. 같이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거짓 속에서 진실 찾기 게임 같습니다.

서문명 논문 카니시카왕과 대월지 왕계의 연대와 이 페이지에서 연대는 차이가 많이 납니다.

 

총분량 23페이지. 번역 정성이 그 전만 못한 것 같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또 영어 원문에 구문 에러가 있는 문장이 많습니다.

 

 

월지족

Yuezhi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Yuezhi/Rouzhi

월지(月支)/육지(肉支/)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The migrations of the Yuezhi through Central Asia, from around 176 BCE to 30 CE.

기원전176년경부터 서기30년까지 중앙아에서 월지족의 이민 행로

Total population

총인구

Some 100,000 to 200,000 horse archers, according to the Shiji, Chapter 123.[1] The Hanshu Chapter 96A records: 100,000 households, 400,000 people with 100,000 people able to bear arms.[2]

기마 궁수 약10만에서 20만명(사기123).

후한서 96: 10만 가구, 인구 40만명, 승병 10만명

Regions with significant populations

상당한 인구가 있는 지역

Western China (pre-2nd century BCE)[3]

중국 서부(기원전2세기 전)

 

 

Central Asia (2nd century BCE-1st century CE)

중앙아시아(기원전2세기부터 서기1세기)

 

 

Northern India (1st century CE-4th century CE)

북부 인도(서기1세기부터4세기)

 

 

Languages

언어

Unknown, although the epigraphy ranges from Greek language to Bactrian, and often considered to have spoken a Tocharian language.[4]

알수 없음. 비문은 희랍어부터 박트리아어까지로 쓰여졌고, 토하르 언어를 사용한 것으로 짐작됨.

Religion

종교

Iranian deities (Nana), Buddhism, Zoroastrianism, Hinduism.

이란의 일신교(나나교), 불교, 배화교, 힌두교

Related ethnic groups

관련된 민족 집단

Kushans

쿠샨 왕조

 

Yuezhi/Rouzhi (Chinese: 月氏, also 月支, Wade-Giles: Yüeh-Chih) or Da Yuezhi/Da Rouzhi (Chinese:大月氏, also 大月支, "Great Yuezhi") "The Great Clan of Yue/Rou", is the Chinese name for an ancient Central Asian people. (This is not moon. It's originally (rou) as a character component.)(See Chinese Wikipedia to get the source) There are numerous theories about the derivation of the name Yuezhi and none has yet found general acceptance.[5][6] In Chinese the name translates literally as 'Moon Clan.' According to Zhang Guang-da the name Yuezhi is a transliteration of their own name for themselves, the Visha (the tribes), being called the Vijaya in Tibetan.[7]. They are believed by most scholars to have been an Indo-European people,[8] and may have been the same as or closely related to the Tocharians (Τοχάριοι) of Classical sources.[9] They were originally settled in the arid grasslands of the eastern Tarim Basin area, in what is today Xinjiang and western Gansu, in China, before they migrated to Transoxiana, Bactria and then northern South Asia, where they formed the Kushan Empire.

월지(月支)/육지(肉支)/월씨(月氏), 또는 대월지(大月支):

-대부족(대월지)은 고대 중앙아인에 대한 중국식 명칭이다. (月은 달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는 육()이다) 월지에 대한 파생어에 대하여 수많은 이론이 있으며, 아직까지 아무도 공론(公論)을 찾지 못하고 있다. 중국어에서 이 명칭은 달 부족으로 번역할 수 있다. 장광다에 의하면 명칭 월지는 고유명에 대한 음역으로, 마치 비샤족은 티벳어로 비자야로 불리는 것과 같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월지족은 인도-유럽인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상고사에서의 토하르족과 같거나 밀접하게 관련된 것일 수도 있다. 월지족은 원래 중국 감숙성 서부와 신강성의 타림 분지 동부의 건조한 초지에 정착했으며, 나중에 트란스옥시아나, 박트리아 그리고 남아시아 북부에 이주했으며, 이곳에서 쿠샨왕조를 개창했다.

 

[남아시아: 여기서는 주로 인도 지역을 가리킨다. 남아시아 북부는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에 해당된다. ]

{해설: ()을 부수로 사용할 때 육달월이라 한다. 즉 月은 肉의 약자이다. 고대어에서 月과 肉의 발음이 같았을 것이다.

월지는 Odi의 음역이라는 것이 있는데, 출처는 알 수 없다. 북경대 서문명은 Odi라고 했으나 출처를 밝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월()’, ()일 수 있으며, 올디=Ordi로 볼 수 있고, Ordi천막이라는 뜻이 되고, 월지족은 천막생활을 하는 유랑 유목민이라고 할 수 있다. }

 

1) 기원

The first known reference to the Yuezhi was made in 645 BCE by the Chinese Guan Zhong in his Guanzi 管子(Guanzi Essays: 73: 78: 80: 81). The dates of this book are disputed however, and it may date to as late as 1st century BCE.[10] The book described the Yuzhi 禺氏, or Niuzhi 牛氏, as a people from the north-west who supplied jade to the Chinese from the nearby mountains of Yuzhi 禺氏 at Gansu.[11] The supply of jade from the Tarim Basin from ancient times is indeed well documented archaeologically: "It is well known that ancient Chinese rulers had a strong attachment to jade. All of the jade items excavated from the tomb of Fuhao of the Shang dynasty, more than 750 pieces, were from Khotan in modern Xinjiang. As early as the mid-first millennium BCE the Yuezhi engaged in the jade trade, of which the major consumers were the rulers of agricultural China." (Liu (2001), pp. 267-268). The suffix "Di" or "Zhi" (Chinese:) was generally used to describe the Di people, "Western barbarians", in Chinese annals.

월지에 대한 처음으로 알려진 언급은 기원전 645년 관중(管仲) 관자(管子)라는 책에 있다. 책의 연대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늦어도 기원전 1시기이다. 책에서 (禺氏) 또는 우씨(牛氏)를 서술했고, 이들은 감숙성 근처의 우씨 산에서 중국인에게 비취를 제공했던 북서부 사람이라고 했다. 고대부터 타림분지에서 비취를 제공하였다는 것은 정말로 고고학적으로 증거자료가 잘 제공된다. 잘 알려진 것으로 고대 중국 통치자들은 비취에 강한 집착이 있었다. ()왕조의 () 무덤에서 발굴된 모든 비취 품목은 750점이 넘고, 신강성의 우전(화전)에서 온 것이었다. 일찍이 기원전500년경부터 월지족은 비취 무역을 하였고, 주 고객은 농업 국가 중국의 통치자들이었다. 접미사 //()”는 일반적으로 저()족을 가리키는 것으로, 중국 사료에서 서부 오랑캐(서융)”라는 뜻이다.

[(),()의 고음은 라고 볼 수 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Rouzhi/Yuezhi (lit. "Rou(maybe Meat, but not Moon) People")[citation needed] was the name used continuously by ancient Chinese historians to designate the tribe throughout its migrations, from the time it was in the eastern Tarim Basin area (7th to 2nd century BCE[citation needed]) to the time it ruled the Kushan Empire in India (1st-3th century CE).

육지족/월지족(()을 뜻하고, 달을 뜻하는 것이 아님/논거가 필요함)은 고대 중국인 사가들에 의해 끊임없이 사용된 이름으로 유목민을 가리키고, 기원전 7세기부터 기원전2세기까지 타림분지 동부에서 있었던 때부터, 서기 1세기부터 3세기까지 인도의 쿠샨왕조를 통치했던 때까지 월지족이라는 이름이 사용된 것이다.

 

According to former USSR scholar Zuev, there was a Queen among the large Yuezhi confederation who added to her possessions the lands of the Tochar (Pinyin: Daxia) on the headwaters of the Huanghe circa 3rd century BCE. According him, the Chinese chronicles began referring to the queen's tribe as the Great Yuezhi (Da Yuezhi), and to call the Daxia/Tochars the Lesser Yuezhi (Pinyin: Xiao Yuezhi). Together, they were simply called Yuezhi. In the 5th century CE, a scholar and translator monk Kumarajiva, while translating texts into Chinese, used the name "Yuezhi" to translate "Tochar". In the middle of the 2nd century BCE the Yuezhi conquered Bactria, and the Ancient Greek authors inform us that the conquerors of Bactria were the Asii and Tochari tribes. Bactria then in the Chinese chronicles began to be called the country of Daxia, i.e. Tocharistan and the language of Bactria/Tocharistan began to be called "Tocharian"." [12]

구 소련 학자 주에프(Zuev)에 의하면, 대월지족에 여왕이 있었고 기원전3세기경에 황하의 상류에 있는 토하르(대하)를 합병하였다. 그에 의하면 중국 년대기는 여왕의 부족을 대월지라고 부르고, 대하/토하르를 소월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이 둘을 단순히 월지라고 불렀다. 서기 5세기에, 학자 겸 승려인 구마라습은 중국어로 번역하면서, “토하르월지라고 번역했다. 기원전 2세기 중반에 월지는 박트리아를 정복했고, 고대 희랍 작가가 말하기를 박트리아를 정복한 자들은 아시족과 토하르족이라고 했다. 박트리아는 그 때 중국 연대기에 의하면 대하국으로 불리기 시작했는데, 예를 들면 토하리스탄과 박트리아/토하리스탄의 언어는 토하리안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토하리스탄은 토하르국을 가리키고, 토하리안은 토하르 언어 또는 토하르 부족을 가리키는 듯하다. 희랍어 표현임.]

{정말 혼란스러운데, 황하강 상류에 어떻게 대하가 있을 수 있는가? 혹시 황하는 아무다르여강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까? 왜냐면 대하는 아무다르여강상류로 공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The Yuezhi are also documented in detail in Chinese historical accounts, in particular the 2nd-1st century BCE "Records of the Great Historian", or Shiji, by Sima Qian. According to these accounts:

"The Yuezhi originally lived in the area between the Qilian or Heavenly Mountains (Tian Shan) and Dunhuang, but after they were defeated by the Xiongnu they moved far away to the west, beyond Dayuan, where they attacked and conquered the people of Daxia and set up the court of their king on the northern bank of the Gui [= Oxus] River. A small number of their people who were unable to make the journey west sought refuge among the Qiang barbarians in the Southern Mountains, where they are known as the Lesser Yuezhi.",[13]

월지는 또한 자세하게 중국 사료에 기록되어 있는데, 특히 기원전2세기-1세기에, 사마천의 사기에서다. 이 사료에 의하면:

월지는 본디 기련 또는 천산과 돈황 사이의 지역에 살았고, 그러나 흉노에게 패한 후에 서쪽으로 멀리 대완(大宛)을 넘어 이주하였으며, 그곳에서 대하를 공격하여 정복했으며, 규수(아무다르여강)의 북안(北岸)에 왕궁을 세웠다. 서쪽으로 떠날 수 없는 소수 부족은 남산의 저강족(氐羌族) 속에서 정착하였으며, 이들을 소월지라고 부른다.”

[여기서 남산은 우전의 남쪽에 있는 곤륜산이 될 수도 있고, 감숙성의 기련산이 될 수도 있다. ]

 

The Qilian and Dunhuang original homeland of the Yuezhi have recently been argued not to refer to the current locations in Gansu, but to the Tian Shan range and the Turfan region, 1,000 km to the west, Dunhuang identified with a mountain named Dunhong listed in the Shanhaijing.[14]

월지의 본고향 기련과 돈황은 최근에 감숙성의 현위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서쪽으로 1Km 떨어진 천산산맥과 투르판 지역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며, 돈황은 산해경에 있는 돈훙(敦薨){천산(天山)} 같은 것이라고 한다.

 

The Yuezhi may have been a Caucasoid people, as indicated by the portraits of their kings on the coins they struck following their exodus to Transoxiana (2nd-1st century BCE), and especially the coins they struck in India as Kushans (1st-3rd century CE). However, no direct records for the name of Yuezhi rulers are known to exist (only Chinese accounts mention the name), and some doubt on the accuracy of their first coins.[15]

월지는 백인(코카서스인)일 수도 있는데, 왜냐하면 기원전 2세기-1세기에 트란스옥시아나로 이주한 후에 주조한 주화에 있는 왕들의 초상화가 제시하고 있으며, 특히 서기 1세기-3세기의 인도 쿠샨왕조에서 주조한 주화가 증거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Ancient Chinese sources do describe the existence of "white people with long hair" (The Bai people of the Shan Hai Jing) beyond their northwestern border, and the very well preserved Tarim mummies with Caucasian features found at the ancient oasis on the Silk Road, Niya, often with reddish or blond hair, today displayed at the Ürümqi Museum and dated to the 3rd century BCE, have been found in precisely the same area of the Tarim Basin.[16]

고대 중국 사료에서 북서부 경계를 넘어 긴 머리의 백인”(산해경의 백인)의 존재에 대하여 분명히 서술하고 있다. 잘 보존된 타림 미라는 코카서스인(백인) 얼굴을 하고 있고, 실크로드 고대 오아시스 니야에서 발견되었으며, 붉은 머리 또는 금발을 하고 있으며, 현재는 우루무치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으며, 년대는 기원전 3세기에 해당되는데, 정확히 타림 분지의 같은 장소에서 발견되었다.

[우루무치: 우루음치 또는 적화(迪化)라고 . 우루무치는 몽골어로 아름다운 목장이라는 . 적화는 만주어로 깨달음이라는 .]

 

The Indo-European Tocharian languages also have been attested in the same geographical area, and although the first known epigraphic evidence dates to the 6th century CE, the degree of differentiation between Tocharian A and Tocharian B, and the absence of Tocharian language remains beyond that area, tends to indicate that a common Tocharian language existed in the same area of Yuezhi settlement during the second half of the 1st millennium BCE.

인도-유럽 토하르 언어들은 또한 지리적으로 같은 지역임이 입증되었으며, 비록 첫번째로 알려진 명문(銘文) 증거는 서기6세기를 기록하고 있고, 토하르어 A와 토하르어 B의 차이정도와 토하르어가 없는 곳이 그 지역을 넘어서 존재하지만, 토하르 공통어는 기원전 500년부터 기원후까지(500년간) 월지족 정착지와 동일한 지역에 존재했음을 가리키는 경향이 있다.

[불완전 문장입니다. 뜻은 월지족 정착지에 토하르 언어가 존재했다는 것.]

 

According to one  theory, the Yuezhi were probably part of the large migration of Indo-European speaking peoples who were settled in eastern Central Asia (possibly as far as Gansu) at that time. The nomadic Ordos culture, who lived in northern China east of the Yuezhi, are another example. Also the Caucasian mummies of Pazyryk, probably Scythian in origin, are located around 1,500 kilometers north-west of the Yuezhi, and dated also to around the 3rd century BCE.[citation needed]

According to Han accounts, the Yuezhi "were flourishing" during the time of the first great Chinese Qin emperor, but were regularly in conflict with the neighbouring tribe of the Xiongnu to the northeast.

어느 설에 따르면, 월지족은 아마도 인도-유럽어를 말하는 종족들의 대 이동 중의 일부였을 것이고, 그들은 그 당시에 중앙아시아 동부에 정착했다(어쩌면 감숙성에도). 오르도스 문화를 갖는 유목민은 월지의 동쪽 즉 중국 북부에 살았으며, 또 다른 사례이다. 또한 파지릭의 코카서스인 미라는, 아마도 스키타이 출신일 것이고, 월지족으로부터 북서쪽으로 약1500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기원전3세기경이다.

한나라 사료에 의하면, 월지족은 진시황 때에 번영했으며, 그러나 북동쪽의 흉노와 자주 충돌하였다.

 

----- 여기서부터 제2장까지는 이 사이트에 먼저 올렸던 내용입니다. ------

[파지릭: 알타이 산맥, 시베리아, 노보시비르스크에 사는 유목민으로, 중국, 몽고, 카자흐스탄의 국경선 지역이다. 스키타이를 닮았다.]

[오르도스(악이다사): 내몽고 자치구의 오르도스 사막을 가리킴. 흉노에 의해 쫓겨 기원전6세기-2세기에 기마유목민이 정착했다. 레베딘스키에 의하면, 스키타이족이고, () 월지족이라고 한다. 특히 사카족과도 관련이 있다. 문화적으로 동호(東胡)와 관련이 있다. 또한 저강족(氐羌族)과 관련이 있다. 어느 사료에 의하면, 오르도스 지역은 돌궐족의 전설적인 고향이라고 한다. – 이상 영문 위키에서 발췌.]

 

{해설: 월지족은 오르도스에 살았으며, 흉노에 의해 쫓겨 천산 넘어 이식쿨호에 정착한 것이다. 월지족이 진시황 때 번영했다는 것은 진시황이 월지족을 받아들여 천하를 통일하고 강성해졌다는 의미가 된다.

영문 위키에서 월지족의 본고향을 추적해보니, 오르도스이다. 또 여러문헌에서 월지는 달()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음역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월지는 오르도스를 음역한 것이 된다.

오르도스는 최두환님이 제시한 “Orda/Ordi/Orde”에서 음역한 것이다. 또한 거란족은 영주를 차지하고자 애를 썼는데, 거란족은 스키타이족이고 월지족이며, 영주의 의미는 군대 진영(陣營)”이라는 의미가 있으므로, 오르도스는 영주가 되는 것이다. “오르다의 뜻이 천막(())이므로, 진영이라는 뜻이 들어 있는 것이다.

문상욱님이 연구한 바에 의해서도 거란족의 영주는 북경 근처는 될 수 없고 내몽고 오르도스지역일 것이라고 주장한 바가 있다.

그러나 대륙조선사에 의거해보면, 영주=오르도스의 위치는, 최두환님이 제기한 카자흐스탄의 시르다르여강 하류 키질 오르다에 해당되는 것이다.

키질은 뜻이 붉은이므로, 키질 오르다는 적근몽고에 해당될 수도 있다. 몽고는 오행으로 색상을 정하여 군대를 운용했다. 오행으로 남쪽은 적(), 중앙은 황(), 동쪽은 청(), 서쪽은 백(), 북쪽은 흑()이다.

당나라 때 거란족은 카자흐스탄의 키질오르다(영주)”에 있었고, 고구려는 발하쉬호/페르가나/천산 지역이고, 당나라 서안은 상대적으로 아랄해 카스피해의 남서쪽이 되어야 한다.

몽고는 키질오르다의 북서쪽이 본고향이다. 몽고가 남진하여 키질오르다를 접수하고 적근몽고라고 칭한 것이다. 즉 몽고의 수도에서 남쪽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키질 오르다는 여러 곳에 있는데, 키질 오르다의 북쪽에 몽고 제후국의 중앙 수도가 있는 것이다.

서하 또한 월지족이므로, 서하의 위치를 현재의 오르도스와 녕하성으로 보고 있지만, 서하는 카자흐스탄의 키질 오르다에 있어야 맞다. 사실 대하의 영토를 조금 더 넓게 보면 키질오르다를 초과한다. 즉 대하와 서하는 같은 것으로, 대하의 서쪽에 있는 것을 서하라고 한 것이다.

이상한 것이 있는데, 금장한국은 볼가강 러시아 지역에 있다. 금장한국은 징기스칸의 장남이 차지했는데, 장남이 원나라를 승계한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금장한국(金帳汗國)에서 금장은 금색 천막이므로, 중앙 황색을 뜻한다. 즉 볼가강이 몽고의 중심지라는 것이 된다. 징기스칸의 장남은 혈통이 의심스러워 황제가 되지 못했다고 하지만, 혹시 장남이어서 명목상 황색을 부여한 것은 아닐까 한다. 그러나 어쩌면 러시아 볼가강 유역이 원나라의 중심지일수도 있는 것이다.

해설 끝}

 

 

2) The Yuezhi exodus

월지족의 이동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The Yuezhi were settled at the doorstep of Qin China in the 3rd century BCE.

월지족은 기원전3세기에 진()나라의 문 앞에 정착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A Scythian horseman from the area invaded by the Yuezhi, Pazyryk, c.300 BCE.

월지족이 침공한 지역의 스키타이 기마인, 파지릭, 기원전300년경.

 

The Yuezhi sometimes practiced the exchange of hostages with the Xiongnu, and at one  time were hosts to Modu Shanyu (Ch:冒頓), son of the Xiongnu leader. Modu stole a horse and escaped when the Yuezhi tried to kill him in retaliation for an attack by his father. Modu subsequently became ruler of the Xiongnu after killing his father.

월지족은 때때로 흉노와 인질을 교환했으며, 흉노 추장의 아들 모돈선우는 한 때 월지족에게 인질이 되었다. 월지족이 모돈선우의 아버지에 의한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모돈선우를 죽이려 할 때 모돈선우는 말을 훔쳐 도망갔다. 모돈선우는 그의 아버지를 죽인 후에 이어서 흉노의 왕이 되었다.

 

Around 177 BCE, led by one  of Modu's tribal chiefs, the Xiongnu invaded Yuezhi territory in the Gansu region and achieved a crushing victory. Modu boasted in a letter to the Han emperor that due to "the excellence of his fighting men, and the strength of his horses, he has succeeded in wiping out the Yuezhi, slaughtering or forcing to submission every number of the tribe". The son of Modu, Jizhu, subsequently killed the king of the Yuezhi and, in accordance with nomadic traditions, "made a drinking cup out of his skull."(Shiji 123. Watson1961:231).

기원전177년경, 모돈 부족 추장 중의 한 명이 이끄는 흉노족은 감숙성의 월지 영역을 침공하여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모돈은 한() 황제에게 편지로 자랑하기를 그의 병사의 뛰어남과 말의 힘으로 월지족을 소탕하는데 성공했으며, 대량으로 죽이거나 부족의 전 인원의 항복을 받아냈다라고 했다. 모돈의 아들 지주[기주/한자이름 아직 모름]는 이어서 월지의 왕을 죽였고, 유목민 전통에 따라 그의 해골로 마시는 잔을 만들었다.

 

Following Chinese sources, a large part of the Yuezhi people therefore fell under the domination of the Xiongnu, and these may have been the ancestors of the Tocharian speakers attested in the 6th century CE. A very small group of Yuezhi fled south to the territory of the Proto-Tibetan Qiang, and came to be known to the Chinese as the "Small Yuezhi". According to the Hanshu, they onl y numbered around 150 families.

중국사료에 의하면, 그 결과 월지족의 대부분은 흉노의 지배아래 떨어졌고, 월지족은 서기 6세기 토하르 언어 사용자의 조상일수도 있는 것이다. 월지족의 작은 부족은 티벳트인의 원부족인 강족(羌族)의 땅 남쪽으로 이주했으며, 중국에는 소월지로 알려졌다. 한서(漢書)에 의하면 그들은 단지 150가구에 불과했다고 한다.

 

Finally, a large group of the Yuezhi fled from the Tarim Basin / Gansu area towards the northwest, first settling in the Ili valley, immediately north of the Tian Shan mountains, where they confronted and defeated the Sai (Sakas or Scythians): "The Yuezhi attacked the king of the Sai who moved a considerable distance to the south and the Yuezhi then occupied his lands" (Han Shu 61 4B). The Sai undetook their own migration, which was to lead them as far as Kashmir, after travelling through a "Suspended Crossing" (probably the Khunjerab Pass between present-day Xinjiang and northern Pakistan). The Sakas ultimately established an Indo-Scythian kingdom in northern India.[citation needed]

결국 대월지족은 타림분지/감숙성 지역에서 북서쪽으로 이주했으며, 처음에는 바로 천산 북쪽에 있는 이리하(伊犁河) 계곡에 정착했으며, 이곳에서 색(/사카족 또는 스키타이족)종을 만나 패배시켰다: “월지는 사카의 왕을 공격했으며, 사카 왕은 남쪽으로 상당히 멀리 이주했고, 그래서 월지족은 그의 땅을 차지했다(한서). 사카족은 이민을 시작했고, 그리하여 이들은 카슈미르까지 멀리 오게 되었는데, “국경선 보류지역을 통과한 후의 일이다(아마도 Khunjerab Pass지역으로 현재 신강성과 파키스탄 북부의 국경선 지역)[불완전 문장]. 사카족은 결국 인도 북부에 인도-스키타이 왕국을 건설했다(논거가 요구됨).

 

After 155 BCE, the Wusun, in alliance with the Xiongnu and out of revenge from an earlier conflict, managed to disloge the Yuezhi, forcing them to move south. The Yuezhi crossed the neighbouring urban civilization of the Dayuan in Ferghana, and settled on the northern bank of the Oxus, in the region of Transoxiana, in modern-day Tajikistan and Uzbekistan, just north of the Hellenistic Greco-Bactrian kingdom. The Greek city of Alexandria on the Oxus was apparently burnt to the ground by the Yuezhi around 145 BCE.[citation needed]

기원전155년이후, 오손(烏孫)족은 흉노와 동맹을 맺고 전번의 분쟁에 대한 보복으로 월지족을 간신히 쫓아냈으며, 그들을 남쪽으로 이주하게 했다. 월지족은 이웃하는 도시문명인 페르가나의 대완(大宛)과 접촉하였고, 아무다르여강(옥수스강)의 북안(北岸)에 정착했고, 이곳은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이고, 현재의 타지크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 희랍화된 희랍-박트리아 왕국(대하)의 바로 북쪽에 있다. 희랍 도시 옥수스강의 알렉산드리아 도시는 기원전145년 분명히 월지족에 의하여 불타서 잿더미가 되었다(논거가 필요).

 

 

3) Settlement in Transoxiana

트란스옥시아나에 정착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The Chinese mission of Zhang Qian to the Yuezhi in 126 BCE, Mogao Caves, 618-712 CE mural painting.

기원전126년 월지족을 향한 중국 사신 장건(張騫), 막고굴, 서기 618-712년의 벽화.

[트란스옥시아나: 옥수스강(아무다르여강)을 가로지르는 지역.]

 

The Yuezhi were visited by a Chinese mission, led by Zhang Qian in 126 BCE[17] , that was seeking an offensive alliance with the Yuezhi to counter the Xiongnu threat to the north. Although the request for an alliance was denied by the son of the slain Yuezhi king, who preferred to maintain peace in Transoxiana rather than to seek revenge, Zhang Qian made a detailed account, reported in the Shiji, that gives considerable insight into the situation in Central Asia at that time.[18]

기원전126년 중국 사신 장건(張騫)은 월지를 방문했는데, 북쪽에서 흉노의 위협을 받고 있는 월지족과 공격적인 동맹을 맺고자 한 것이었다. 비록 동맹에 대한 요청은 살해된 월지 왕의 아들에게 거부당했지만, (월지왕의 아들)는 보복보다는 트란스옥시아나에서 평화를 유지하고자 했기 때문으로, 장건은 자세한 설명을 했으며, 그 내용은 사기에 기록되었는데, 그것은 그 당시 중앙아시아의 상황에 대하여 깊이 알 수 있는 것이다.

 

Zhang Qian, who spent a year with the Yuezhi and in Bactria, relates that "the Great Yuezhi live 2,000 or 3,000 li (832-1,247 kilometers) west of Dayuan (Ferghana), north of the Gui (Oxus) river. They are bordered on the south by Daxia (Bactria), on the west by Anxi (Parthia), and on the north by Kangju (beyond the middle Jaxartes). They are a nation of nomads, moving from place to place with their herds, and their customs are like those of the Xiongnu. They have some 100,000 or 200,000 archer warriors."[19]

박트리아에서 월지족과 1년을 보낸 장건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대월지는 규수(옥수스강/아무다르여강)의 북쪽에 있는 대완(大宛/페르가나)에서 서쪽으로 2천리 또는 3천리(832-1247km) 떨어진 곳에 살고 있다. 대월지는 남쪽으로 대하(박트리아), 서쪽으로는 안식국(파르티아), 북쪽으로는 강거(康居/시르다르여 강 중류 넘어서 있음)와 국경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유목민 국가로, 가축과 함께 장소를 옮겨 살고, 풍습은 흉노와 같다. 궁수(弓手) 병사는 약 10만 또는 20만명이다.”

[이 문단의 내용을 살펴보면, 대월지는 카자흐스탄의 시르다르여강 하류에 있는 키질 오르다가 중심지처럼 보인다. 마침 이곳은 거란족의 영주 지역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거란은 키탄으로 월지와 같은 스키타이족이다.]

 

Although they remained north of the Oxus for a while, they apparently obtained the submission of the Greco-Bactrian kingdom to the south of the Oxus. The Yuezhi were organized into five major tribes, each led by a yabgu, or tribal chief, and known to the Chinese as Xiūmì (Ch:休密) in Western Wakhān and Zibak, Guishuang (Ch:貴霜) in Badakhshan and the adjoining territories north of the Oxus, Shuangmi (Ch:雙靡) in the region of Shughnan, Xidun (Ch:) in the region of Balk, and Dūmì (Ch:都密) in the region of Termez [20]

그들은 비록 옥수스의 북쪽에 잠시 머물렀지만, 그들은 분명히 옥수스의 남쪽에 있는 희랍-박트리아 왕국을 복종시켰다. 월지는 5개의 주요 부족으로 조직되었는데, 각각은 야브구(제후) 또는 부족장에 의해 통치되었고, 그 부족은 중국에 다음과 같이 알려졌다:

서부 와한(Wakhān)과 지박(Zibak)에 있는 휴밀(休密),

바다흐샨(Badakhshan)과 그 옆에 있는 옥수스 북쪽 영역에 있는 귀상(貴霜),

슈그흐난(Shughnan) 지역의 쌍미(雙靡),

발크(Balk) 지역의 (),

테르메즈(Termez) 지역의 도밀(都密) 등이다.

 

A description of the Greco-Bactrian kingdom was made by Zhang Qian after the conquest by Yuezhi:

"Daxia (Greco-Bactria) is located over 2,000 li southwest of Dayuan, south of the Gui (Oxus) river. Its people cultivate the land and have cities and houses. Their customs are like those of Ta-Yuan. It has no great ruler but onl y a number of petty chiefs ruling the various cities. The people are poor in the use of arms and afraid of battle, but they are clever at commerce. After the Great Yuezhi moved west and attacked the lands, the entire country came under their sway. The population of the country is large, numbering some 1,000,000 or more persons. The capital is called the city of Lanshi (Bactra) (modern Balkh) and has a market where all sorts of goods are bought and sold."[21]

월지에 의해 정복된 희랍-박트리아 왕국에 대하여 장건은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대하(희랍-박트리아)는 대완의 남서쪽으로 2천리 넘어서, 규수(아무다르여강)의 남쪽에 있다. 사람들은 땅을 경작하고 도시와 집이 있다. 풍습은 대완과 같다. 대군장(大君長)은 없지만 여러 도시를 다스리는 소장(小長)이 있다. 사람들은 무기를 다루는데 서투르고 전쟁을 두려워하며, 그러나 상업에는 영리하다. 대월지가 서쪽으로 이주하여 그 영토를 침공한 후에, 그 나라 전 영토는 대월지의 통치가 되었다. 그 나라 인구는 많은데 약100만명 이상이다. 수도는 란스(박트라/현재 발크흐)이고 시장에서 여러 상품이 매매된다.”

 

In a sweeping analysis of the physical types and cultures of Central Asia that he visited in 126 BCE, Zhang Qian reports that "although the states from Dayuan west to Anxi (Parthia), speak rather different languages, their customs are generally similar and their languages mutually intelligible. The men have deep-set eyes and profuse beards and whiskers. They are skilful at commerce and will haggle over a fraction of a cent. Women are held in great respect, and the men make decisions on the advice of their women."[22]

기원전26년 그가 방문했던 중앙아의 물산과 문화에 대한 포괄적이 분석에서, 장건은 보고하기를 비록 대완에서 서쪽으로 안식국(파르티아)까지의 나라들은 좀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들의 풍습은 일반적으로 단순하고 그들의 언어는 서로 알기가 쉽다. 남자는 깊은 눈과 풍부한 턱수염과 구레나룻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장사에 밝고 푼돈을 가지고도 다툰다. 여성들은 크게 존경을 받고 있으며, 남성은 여성의 충고에 따라 결정을 한다.”

 

 

4) Invasion of Bactria

박트리아의 침공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One of the first Yuezhi coins, imitative, in crude style, of the coins of the Greco-Bactrian king Heliocles, circa 120 BCE.
Obv: Presumed bust of a Yuezhi chief with Greek royal headband.
Rev: Zeus with thunderbolt and sceptre. Misspelled Greek legend BASILEO HELIOLEEU "(of) King Heliocles".

첫번째 월지 주화 중의 하나, 희랍-박트리아 왕 헬리오클레스의 주화를 조잡하게 모방한 것임, 기원전120년경.

좌측: 희랍왕실 머리띠를 두르고 있는 월지 추장으로 추정되는 흉상.

우측: 벼락과 권장(權杖/왕권)의 제우스 신. 헬리오클레스 왕에 대한 철자가 잘못된 희랍어 명문(銘文) BASILEO HELIOLEEU.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Asia in 001 CE, showing location of Tocharian/Yue-Chi tribes.

서기 1년 아시아, 토하르족/월지족의 위치를 보여주고 있음.

[마우스 클릭하면 확대사진 링크]

 

In 124 BCE the Yuezhi were apparently involved in a war against the Parthians, in which the Parthian king Artabanus I of Parthia was wounded and died:

"During the war against the Tokharians, he (Artabanus) was wounded in the arm and died immediately" (Justin, Epitomes, XLII,2,2: "Bello Tochariis inlato, in bracchio vulneratus statim decedit").

기원전124년 월지족은 분명히 파르티아 제국과 전쟁에 돌입했고, 여기서 파르티아 왕 아르타바누스1세는 부상을 입고 죽었다:

토하르족과 전쟁 중에, (아르타바누스)는 팔에 부상을 입었으며 즉시 죽었다.”(Justin)

 

Some time after 124 BCE, possibly disturbed by further incursions of rivals from the north, and apparently vanquished by the Parthian king Mithridates II, successor to Artabanus, the Yuezhi moved south to Bactria. Bactria had been conquered by the Macedonians under Alexander the Great in 330 BCE, and since settled by the Hellenistic civilization of the Seleucids and the Greco-Bactrians for two centuries.

기원전124년 후의 얼마 후에, 아마도 북쪽으로부터 경쟁자의 깊은 침입으로 교란당하고, 아르타바누스의 승계자 파르티아왕 미트리다테스2세에 의해 격파 당한 월지족은 남쪽으로 박트리아로 이주했다. 박트리아는 기원전330년 알렉산더 대왕의 마케도니아 왕국에 정복되었었으며, 그 때부터 2세기 동안 셀레우코스 왕조와 희랍-박트리아 왕조의 헬레니즘 문명이 정착되었다.

 

This event is recorded in Classical Greek sources, when Strabo presented them as a Scythian tribe, and explained that the Tokharians -- together with the Assianis, Passianis and Sakaraulis -- took part in the destruction of the Greco-Bactrian kingdom in the second half of the 2nd century BCE:

"Most of the Scythians, beginning from the Caspian Sea, are called Dahae Scythae, and those situated more towards the east Massagetae and Sacae; the rest have the common appellation of Scythians, but each separate tribe has its peculiar name. All, or the greatest part of them, are nomads. The best known tribes are those who deprived the Greeks of Bactriana, the Asii, Pasiani, Tochari, and Sacarauli, who came from the country on the other side of the Jaxartes, opposite the Sacae and Sogdiani." (Strabo, 11-8-1)

이 사건은 고대 희랍 사료에 기록되었는데, 그 당시에 스트라보는 그들을 스키타이족으로 소개했으며, 설명하기를 토하르족은 아시아니스족[아시족], 파시아니스족 그리고 사카라울리스족[사카족] 등과 함께 기원전2세기 후반에 희랍-박트리아 왕국을 파괴하는데 참여했다:

카스피해에서 출발한 대부분의 스키타이족은, 다해 스키태로 불리고, 더 동쪽에 있는 것은 마사케태와 사캐라고 한다{불완전문장}; 그 나머지는 스키타이라는 일반 명칭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나 각각 분리된 부족은 그의 독특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들 대부분은 유목민이다. 가장 잘 알려진 부족들은 희랍으로부터 박트리아를 빼앗은 아시족, 파시아니족, 토하르족 그리고 사카라울리족으로, 이들은 시르다르여강(작사르테스)의 반대편 국가에서 즉 사캐와 소그드의 반대편 온 것이다.” (스트라보)

 

{해설: 드디어 모순점이 나왔습니다. 신강성의 월지족이 대하를 점령했다와 카스피해 스키타이족이 대하를 점령했다는 서로 모순되면서 연관이 있다. 사실 월지족은 스키타이족이다. 대하를 점령한 이들은 사실 같은 부족으로 동일한 장소에서 출발한 것이다. 신강성의 월지족은 아마 거짓일 수 있으며, 월지족의 발원지는 아랄해 동북쪽 카자흐스탄의 키질 오르다일 수 있다. 바로 월지는 오르다/오르디의 음역인 것이다.}

 

The last Greco-Bactrian king Heliocles I retreated and moved his capital to the Kabul Valley. The eastern part of Bactria was occupied by Pashtun people.

As they settled in Bactria from around 125 BCE, the Yuezhi became Hellenized to some degree, as suggested by their adoption of the Greek alphabet and by some remaining coins, minted in the style of the Greco-Bactrian kings, with the text in Greek. The area of Bactria they settled came to be known as Tokharistan, since the Yuezhi were called "Tocharians" by the Greeks.

희랍-박트리아의 마지막 왕 헬리오클레스1세는 후퇴하여 수도를 카불 계곡으로 옮겼다. 박트리아의 동부는 파슈툰 족에게 점령되었다.

그들이 기원전125년경부터 박트리아에 정착하자, 월지족은 어느 정도 헬레니즘화 되었는데, 그 이유는 희랍 문자를 채택한 점과 희랍문자와 더불어 희랍-박트리아 왕들의 스타일로 주조된 잔존하는 일부 주화에 의해서 암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정착한 박트리아 지역은 토하리스탄(토하르왕국)으로 알려졌는데, 그 이유는 월지족은 희랍인들에게 토하르족으로 불렸기 때문이다.

 

Commercial relations with China also flourished, as many Chinese missions were sent throughout the 1st century BCE: "The largest of these embassies to foreign states numbered several hundred persons, while even the smaller parties included over 100 members... In the course of one  year anywhere from five to six to over ten parties would be sent out." (Shiji, trans. Burton Watson).

중국과의 상업 거래 또한 활발하였는데, 그 이유는 많은 중국인 사절이 기원전1세기 내내 보내졌기 때문이다: “외국으로 이러한 사절의 최대 규모는 700명이고, 반면에 심지어 가장 적은 숫자도 100명을 넘는다…. 1년 동안 어느 곳에서든지 5 6개에서 10개의 사절단이 보내지곤 하였다.”(사기, 번역 버튼 왓슨)

 

The Hou Hanshu also records the visit of Yuezhi envoys to the Chinese capital in 2 BCE, who gave oral teachings on Buddhist sutras to a student, suggesting that some Yuezhi already followed the Buddhist faith during the 1st century BCE (Baldev Kumar (1973)).

후한서에 또한 기록하기를 월지의 사절이 기원전2년에 중국 수도를 방문했으며, 그는 불경을 제자에게 구두로 강의하였고, 일부 월지족은 기원전1세기 동안 불교를 믿고 있다고 제시하였다(Baldev Kumar (1973)).

 

A later Chinese annotation in Shiji made by Zhang Shoujie during the early 8th century quoted Wan Zhen's Strange Things from the Southern Region (a now-lost text of from the Wu kingdom) describes the Kushans as living in the same general area north of India, in cities of Greco-Roman style, and with sophisticated handicraft. The quote are dubious, as Wan Zhen probably never visited the Yuezhi kingdom through the Silk Road, though he might had gathered his information from the trading ports in the coastal south.[15] The Chinese never adopted the term "Guishuang", and continued to call them "Yuezhi":

서기 8세기 초에 장셔우지에의 사기 주석에서 완전남부 지역의 기이(奇異)’(동오(東吳)의 잃어버린 문서)에 대한 인용이 있으며, 즉 쿠샨왕조는 인도의 북쪽 지역에서, 희랍-로마 양식의 도시에서, 정교한 수제품과 더불어 살고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 인용은 매우 의심스러운데 왜냐면 남부 해안 무역항에서 정보를 수집하였을지 언정, 완전은 아마도 결코 월지왕국을 실크로드를 통해 방문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중국은 결코 귀상이라는 용어를 채택하지 않았고, 계속해서 월지라고 불렀다.

 

"The Great Yuezhi [Kushans] is located about seven thousand li (about 3000 km) north of India. Their land is at a high altitude; the climate is dry; the region is remote. The king of the state calls himself "son of heaven". There are so many riding horses in that country that the number often reaches several hundred thousand. City layouts and palaces are quite similar to those of Daqin (the Roman empire). The skin of the people there is reddish white. People are skilful at horse archery. Local products, rarities, treasures, clothing, and upholstery are very good, and even India cannot compare with it." [23]

대월지(쿠샨)는 인도의 북쪽으로 약 7천리(3km)에 있다. 그 땅은 높은 데 있다; 기후는 건조하다; 그 지역은 궁벽한 곳에 있다. 그 나라의 왕은 자신을 천자라고 부른다. 그 나라에는 매우 많은 승마용 말이 있어서 그 숫자가 종종 70만 마리에 이른다. 도시 배치와 궁전들은 대진(大秦/로마)의 것과 매우 비슷하다. 그곳 사람들의 피부는 불그스름하고 하얗다. 사람들은 기마 궁술에 뛰어나다. 지방 생산품, 희귀한 것, 보물, 의복, 그리고 가구류는 매우 양호하고, 심지어 인도와는 비교할 수 없다(인도보다 뛰어남).”

 

 

5) Expansion into the Hindu-Kush

힌두쿠쉬로의 확장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A posthumus, slightly barbarized, coin of Hermaeus, minted in the Paropamisadae between 50 BCE and 25 BCE.
Obv: Bust of Hermaeus. Greek legend BASILEOS SOTIROS ERMAIOU "Saviour King Hermaeus".
Rev: Zeus, non-radiating, making a benediction gesture. Kharoshti legend: MAHARAJASA TRATARASA HERAYAMASA "Saviour King Hermaeus".

헤르마에우스 왕(기원전90-70)의 사후의 주화로 좀 조잡하고, 기원전 50-20년 사이에 파로파미사대에서 주조되었다.(힌두쿠시 지역)

좌측:헤르마에우스 흉상. 희랍어 명문 BASILEOS SOTIROS ERMAIOU구세 왕 헤르마에우스”.

[SOTIROS soter로 구세주이고, 희랍어 H강기식과 약기식이 있으며, 예를 들면 E에 강식식 부호가 있으면 He로 발음한다. ERMAIOU에서 E강기식 부호가 있으면 헤르마이오우로 읽는다.]

우측: 제우스, 후광이 없고, 자비를 베푸는 모습. 하로슈티 문자 명문: MAHARAJASA TRATARASA HERAYAMASA.

[원문에 대한 영문 번역이 잘못 되어 있다. 마하:(), 라자사: , 트라타라사: 3?이라는 뜻이고, 헤라야마사는 제우스의 별명인 것 같다.

 

The area of the Hindu-Kush (Paropamisadae) was ruled by the western Indo-Greek king until the reign of Hermaeus (reigned c. 90 BCE70 BCE). After that date, no Indo-Greek kings are known in the area, which was probably overtaken by the neighbouring Yuezhi, who had been in relation with the Greeks for a long time. According to Bopearachchi, no trace of Indo-Scythians occupation (nor coins of major Indo-Scythian rulers such as Maues or Azes I) have been found in the Paropamisadae and western Gandhara.

힌두쿠쉬(파로파미사대) 지역은 서양인 인도-희랍왕에 의해 통치되었는데 마지막은 헤르마에우스 왕(재위 기원전90-70)이다. 그 이후로 어떠한 인도-희랍왕도 그 지역에서 알려져 있지 않는데, 아마도 이웃 월지족이 점령했기 때문일 것이고, 월지는 예전부터 오랫동안 희랍인과 관련을 맺고 있었다. 보페라치치에 의하면 인도-스키타이인이 점거한 어떠한 흔적도 파로파미사대(힌두쿠시)와 서부 간다라에서 발견되지 않는다고 한다(즉 마우에스 또는 아제스1세와 같은 인도-스키타이인 통치자의 어떠한 주화도 없다).

 

As they had done in Bactria with their copying of Greco-Bactrian coinage, the Yuezhi copied the coinage of Hermeaus on a vast scale, up to around 40 CE, when the design blends into the coinage of the Kushan king Kujula Kadphises.

그들은 박트리아에서 희랍-박트리아 주화를 모방하고 있었기 때문에, 월지족은 헤르마에우스의 주화를 대량으로 모방했는데, 약 서기 40년까지이고, 그때 그 디자인은 쿠샨왕 쿠줄라 카드피세스(구취각)의 주화와 섞였다.

 

The first presumed, and documented, Yuezhi prince is Sapadbizes (probably a yabgu's prince of Yuezhi confederation), who ruled around 20 BCE, and minted in Greek and in the same style as the western Indo-Greek kings.

처음이라 여겨지고 기록된 월지 왕자는 사파드비제스(아마도 월지 연맹의 야브구(제후)의 왕자)이고, 기원전20년경 통치했으며, 희랍어로 그리고 서부 인도-희랍 왕들과 같은 형태로 주조했다.

 

 

6)      Foundation of the Kushan empire

쿠샨 제국의 건설

By the end of the 1st century BCE, one  of the five tribes of the Yuezhi, the Guishuang (Ch: 貴霜, origin of name Kushan adopted in the West), managed to take control of the Yuezhi confederation. According to some theories[citation needed], the Guishuang may have been distinct from the Yuezhi, possibly of Saka origins. From that point, the Yuezhi extended their control over the northwestern area of the Indian subcontinent, founding the Kushan Empire, which was to rule the region for several centuries. The Yuezhi came to be known as Kushan among Western civilizations, however the Chinese kept calling them Yuezhi throughout their historical records over a period of several centuries.

기원전1세기 말에, 월지족의 5부족 중의 하나인 귀상족(貴霜族, 서양에서 채택된 쿠샨의 어원)은 월지 연맹의 통치권을 간신히 얻었다. 일부 이론들(논거필요)에 의하면, 귀상족은 아마도 사카 출신 월지족과 구별될 수도 있다. 그 시점에서부터(?), 월지족은 인도 대륙의 북서부 지역에 대한 통치를 확장했으며, 쿠샨제국을 건설하고 수세기 동안 그 지역을 통치하게 되었다. 월지는 서구 문명에는 쿠샨으로 알려졌지만, 그러나 중국은 수세기 동안 역사적 기록을 통틀어 그들을 계속 월지라고 불렀다.

 

The Yuezhi/ Kushans expanded to the east during the 1st century CE, to found the Kushan Empire. The first Kushan emperor Kujula Kadphises ostensibly associated himself with Hermaeus on his coins, suggesting that he may have been one  of his descendants by alliance, or at least wanted to claim his legacy.

월지/쿠샨은 서기1세기 동안 동쪽으로 확장하여 쿠샨제국을 건설했다. 첫 번 째 쿠샨 황제 쿠줄라 카드피세스는 표면상 주화에다 자신을 헤르마에우스와 관련시켰는데, 그는 연맹에 의해 그(헤르마에우스)의 자손들 중의 한 명일 수도 있거나, 적어도 그의 유산을 갖기를 요구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The first self-declared Kushan ruler Heraios (1-30 CE) in Greco-Bactrian style.

Obv: Bust of Heraios, with Greek royal headband.

Rev: Horse-mounted King, crowned with a wreath by the Greek goddess of victory Nike. Greek legend: TVPANNOVOTOΣ HΛOV - ΣΛNΛB - KOÞÞANOY "The Tyrant Heraios, Sanav (meaning unknown), of the Kushans".

첫 번 째 자칭 쿠샨 왕 헤라이오스(서기1-30), 희랍-박트리아 양식.

좌측(앞면): 헤라이오스 흉상, 희랍 왕실 머리 띠를 두르고 있음.

우측(뒷면): 말을 탄 왕, 희랍 승리의 여신 니케에 의해 화환으로 왕관을 쓰고 있다.

희랍어 명문: TVPANNOVOTOΣ HΛOV - ΣΛNΛB – KOÞÞANOY쿠샨의 절대 군주 헤라이오스, 사나브(의미 모름)”.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Depiction of Heraios, from his clearest coins.

그의 가장 선명한 주화에서 헤라이오스 묘사.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Possible Yuezhi king and attendants. Gandhara stone palette, 1st century CE.

아마도 월지왕과 시종들. 간다르 원반석, 서기 1세기.

 

The unification of the Yuezhi tribes and the rise of the Kushan is documented in the Chinese Historical chronicle Hou Hanshu:

"More than a hundred years later, the xihou (Ch:翖侯, "Allied Prince") of Guishuang (Badakhshan and the adjoining territories north of the Oxus), named Qiujiu Que (Ch: 丘就卻, Kujula Kadphises) attacked and exterminated the four other xihou ("Allied Princes"). He set himself up as king of a kingdom called Guishuang (Kushan). He invaded Anxi (Parthia) and took the Gaofu (Ch:高附, Kabul) region. He also defeated the whole of the kingdoms of Puda and Jibin (Ch: 罽賓, Kapiśa-Gandhāra). Qiujiu Que (Kujula Kadphises) was more than eighty years old when he died.

His son, Yan Gaozhen (Ch:閻高珍) (Vima Takto), became king in his place. He returned and defeated Tianzhu (Northwestern India) and installed a General to supervise and lead it. The Yuezhi then became extremely rich. All the kingdoms call [their king] the Guishuang (Kushan) king, but the Han call them by their original name, Da Yuezhi." (Hou Hanshu, trans. John Hill, [24]).

월지 부족들의 통합과 쿠샨의 등장은 중국 사서 후한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100여년 후에, 귀상(바다흐샨과 아무강 북쪽의 근접 영역)의 흡후(翖侯/연맹 왕자) 구취각(丘就卻, Kujula Kadphises)은 다른 네 흡후를 공격하여 전멸시켰다. 그는 자신을 귀상 왕국의 왕이라 자칭했다. 그는 또한 푸다와 계빈(罽賓, Kapiśa-Gandhāra)의 모든 왕국들을 패배시켰다. 구취각은 80세 이상이 되어 사망했다.

그의 아들 염고진(閻高珍, Vima Takto, 웨마)은 이어서 왕이 되었다. 그는 되돌아 와서 천축국(인도북서쪽)을 패퇴시키고 그곳에 장군을 봉하여 감독하고 다스리게 했다. 월지는 그때 지극히 번영하였다. 모든 왕국들은 귀상왕이라고 불렀지만, 한나라는 원래 이름 대월지라고 불렀다.”(후한서)

 

The Yuezhi/Kushan integrated Buddhism into a pantheon of many deities, became great promoters of Mahayana Buddhism, and their interactions with Greek civilization helped the Gandharan culture and Greco-Buddhism flourish.

월시/쿠샨은 불교를 다신교와 통합하였으며, 대승불교의 큰 장려자가 되었으며, 희랍문명과 상호 교류에 의해 간다라 문화와 희랍-불교가 번영하게 되었다.

 

During the 1st and 2nd century, the Kushan Empire expanded militarily to the north and occupied parts of the Tarim Basin, their original grounds, putting them at the center of the lucrative Central Asian commerce with the Roman Empire. When the Han Dynasty desired to advance north, Emperor Wu sent the explorer Zhang Qian to see the kingdoms to the west and to ally with the Yuezhi people, in order to fight the Xiongnu Mongol tribe. The Yuezhi continued to collaborate militarily with the Chinese against nomadic incursion, particularly with the Chinese general Ban Chao against the Sogdians in 84 CE, when the latter were trying to support a revolt by the king of Kashgar. Around 85 CE[citation needed], they also assisted the Chinese general in an attack on Turfan, east of the Tarim Basin.

서기 1세기 2세기 동안에, 쿠샨제국은 군대를 북쪽으로 진격하여 그들의 원 고향인 타림 분지의 일부를 점령했으며, 그곳을 로마제국과 중앙아시아 교역에 유리한 중심지로 만들었다. () 왕조가 북쪽으로 진격하기를 원했을 때에, 한무제는 탐험가 장건(張騫)을 보내 서부의 왕국들을 보고 월지족과 연맹하게 하였는데, 흉노 몽고족과 싸우기 위함이었다. 월지족은 계속해서 유목민의 침입에 대항하여 중국과 군사적으로 협력하였으며, 특히 서기 84년 소그드에 대항하여 중국 장군 반초(班超)와 협력했으며, 그 때 후자(소그드/반초?)는 카쉬가르 왕의 반란을 지지하고자 하였다. 85년경(논거부족), 그들은 또한 타림 분지 동쪽의 투르판을 공격하는데 있어서 중국 장군을 도왔다.

{이 단락은 기존의 것과 다른 점이 많습니다.}

 

In recognition for their support to the Chinese, the Kushans requested, but were denied, a Han princess, even after they had sent presents to the Chinese court. In retaliation, they marched on Ban Chao in 86 CE with a force of 70,000, but, exhausted by the expedition, were finally defeated by the smaller Chinese force. The Kushans retreated and paid tribute to the Chinese Empire during the reign of the Chinese emperor Han He (89-106).

중국에 대한 그들[쿠샨]의 지지에 대한 보답으로, 쿠샨은 한나라 공주를 요청했지만, 거절되었으며, 심지어 그들(쿠샨)이 선물을 중국 왕실에 보낸 후에도 그러했다. 보복으로 쿠샨은 7만의 병사로 서기86년 반초를 공격했으나, 원정으로 체력이 소진되어, 결국 더 작은 중국 군에게 패배 당했다. 쿠샨은 후퇴하여 한화제(漢和帝/89-106) 통치기간 동안 중국황제에게 조공을 바쳤다.

 

Later, the Yuezhi/Kushans established a kingdom centered on Kashgar around 120 CE[citation needed], and introduced the Brahmi script, the Indian Prakrit language for administration, and Greco-Buddhist art which developed into Serindian art.

나중에, 월지/쿠샨은 서기120년경 카슈가르에 자리잡은 왕국을 건설했으며(논거요청됨), 브라미 문자와 행정 언어로 인도 프라크리트 언어 그리고 세린디안 예술로 발전한 희랍-불교 예술을 도입했다.

 

Benefiting from this territorial expansion, the Yuezhi/Kushans were among the first to introduce Buddhism to northern and northeastern Asia, by direct missionary efforts and the translation of Buddhist scriptures into Chinese. Major Yuezhi missionary and translators included Lokaksema and Dharmaraksa, who went to China and established translation bureaus, thereby being at the center of the Silk Road transmission of Buddhism.[citation needed]

영토 확장으로 이득을 얻은 월지/쿠샨은 불교를 아시아 북부와 북동부에 소개하는 첫 번 째 중에 속하였는데, 즉 직접적인 사절(선교사)의 노력과 불전을 중국어로 번역하는 것을 통해서이다. 주요한 월지 포교사 이면서 번역가로는 로칵세마(지루가참(支婁迦讖))와 다르마락샤(Dharmaraka /축법호(竺法護))이고, 이들은 중국에 가서 번역 관청을 세웠으며, 그 때문에 실크로드에서 불교 전도의 중심이 된 것이다.

 

The Chinese kept referring to the Kushans as Da Yuezhi throughout the centuries. In the Sanguozhi (三國志, chap 3), it is recorded that in 229 CE "The king of the Da Yuezhi, Bodiao 波調 (Vasudeva I), sent his envoy to present tribute, and His Majesty (Emperor Cao Rui) granted him the title of "King of the Da Yuezhi Intimate with the Wei ()."

중국은 수세기를 걸쳐서 쿠샨을 대월지라고 지속적으로 불렀다. 삼국지에 기록하기를 서기 229년에 대월지의 왕 파조(波調/바수데바1)는 조공사신을 보냈으며, ()나라 제2대 황제 조예(曹叡)는 그를 위나라에 충성스런 대월지의 왕이라고 봉하였다.


[지루가참(支婁迦讖): 서기 147 탄생. Lokakema 는 산스크리트어로 세계의 복지라는 뜻. 그는 대승불교 경전을 중국어로 번역한 초기의 불교 승려이다. 그는 간다라 월지족의 쿠샨인이다. 성씨 지()는 월지에서 따온 것이다. 그의 모국어는 토하르어이다. 대승불교 번역서: Prajñāpāramitā Sūtra/ 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 Pratyutpanna Sutra/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 아도세왕경(阿闍世王經), 잡비유경(雜譬喩經), 수릉엄경(首楞嚴經), 무량청정평등각경(無量淸淨平等覺經), 보적경(寶積經) .

해설: 위 경중에서 수릉엄경과 보적경은 성명쌍수 수련과 관련이 깊은 경전입니다.

 

다르마락샤(Dharmaraka /축법호(竺法護): 대승불교 번역가. 가족은 돈황에 살았고, 그곳에서 서기230년에 탄생했다. 젊었을 서역 여러나라를 여행하고 중앙아시아의 언어와 문자를 배웠다. 묘법련화경(妙法蓮華經) 번역했다. 154개의 상좌부 불경과 대승 불경을 번역했다.

번역서: Saddharmapunnarnkasūtr/ 정법화경(正法華經),

Pancavimsatisāhasrikāprajnāpāramistasūtra /광찬반야바라밀경(光贊般若波羅密經),

Danabhūmikasūtra / 점비일절지덕경(漸備一切智德經),

Lalitavistara/ 보요(普曜) .

 ]


2008-08-15

이태수 번역

박트리아, 대하(大夏), 월지(月支), 쿠샨왕조 (박트리아 - 영문위키번역)
.bbs_content p{margin:0px;}

http://chosunsa.org/ssMain/d.jsp?menu_index=3

날짜: (2008-04-09 07:53:16.0)
 
[아무다르야: 다르야는 팔라비어로 바다 또는 강. 아무는 아물(Āmul)이라는 도시에서 유래하였고, 현재의 Türkmenabat(39.5N, 63.3E)이다. Türkmenabat은 시릴릭어로 turkmen이고, 투르크메니스탄 레밥주의 주도(州都)이며, 공식명칭은 Chardzhou이고, 또는 Chardjui이며 그 뜻은 네개의 강이다. 아무다르야는 vakhsh강과 panj강이 합류된 강으로, 현지인은 에덴동산 또는 천국의 네개의 강 중의 하나인 gihon에서 유래된 jayhoun이라고 부른다. 희랍어로 Oxus강이라고 하며, 유래는 Vakhsh(왁쉬)강이다. 옥수스강은 Matsya Purana(비슈누의 첫번째 화신의 신화)에서는 Chakshu강이고, Tushara (Rishika?)족, Lampaka족, Pahlava족, Parada족과 Shaka족의 나라를 통과한다(마하바라타 힌두 서사시에 나오는 부족명).
해석: 아무다르야는 한자로 알목하, 아목하이다. 투르크멘니스탄에서는 ‘투르크멘’이라고 하는데 토문(土門), 두만과 음이 유사하다. 위 내용으로 볼 때 에덴의 위치가 아무하가 될 수 있으며, 마하바라타 힌두서사시의 역사적 배경이 아무하가 될 수 있다. 또 박트리아는 페르시아어로 ‘박타르’이므로 ‘배달’과 통한다.
사천성은 四川이므로 아무 다르야강의 유래와 일치하는 네 개의 강이다. 인류의 시원은 중앙아시아이기 때문에 사천성의 지명도 위에서 따왔을 것이다.]
 
박트리아, 대하(大夏), 월지(月支), 쿠샨왕조
 
Bactria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Jump to: navigation, search
"Bactrian" redirects here. For the camel, see Bactrian camel. For the language, see Bactrian language.
 

   Map of Bactria 박트리아 지도

Ancient cities of Bactria. 박트리아의 고대 도시
 
Bactria (Bactriana, Bākhtar in Persian, also Bhalika in Arabic and Indian languages, and Daxia in Chinese) was the ancient Greek name of the country between the range of the Hindu Kush and the Amu Darya (Oxus); its capital, Bactra or Balhika or Bokhdi (now Balkh), was located in what is northern Afghanistan.
Bactria was bounded on the east by the ancient region of Gandhara. The Bactrian language is an Iranian language of the Indo-Iranian sub-family of the Indo-European family.
The Bactrians are one  of the main ancestral lines of the modern-day Tajiks.[1]
박트리아: 페르시아어로박트리아나, 박타르, 아랍어와인도어로발리카, 한자로대하(大夏). 박트리아는 힌두쿠쉬와 아무다르야(옥수스) 사이 영역에 있는 나라로서 희랍어 이름이었다. 수도는 박트라 또는 발히카 또는 보크디(현재의 발크흐)이고, 아프가니스탄 북부에 있다.
박트리아는 동쪽으로 간다라의 고대 영역과 경계가 된다. 박트리아 언어는 인도 유럽어계의 인도 이란어 아래의 이란 언어이다.
박트리아족은 현재의 타직크족(타지크스탄)의 주요한 조상의 하나이다.
 
 
Geography
Bactria is basically what is now northern Afghanistan. It is a mountainous region with a moderate climate. Water is abundant and the land is very fertile. Bactria was the home of one  of the Iranian tribes. Modern authors have often used the name in a wider sense, as the designation of all the countries of Central Asia.
지리:
박트리아는 기본적으로 현재 아프가니스탄 북부에 있다. 그 곳은 따뜻한 날씨의 산지(山地)이다. 물은 풍부하고 땅은 비옥하다. 박트리아는 이란부족 중의 하나의 고향이었다. 현대의 작가들은 종종 이 이름을 넓은 의미로 ‘중앙아시아의 모든 국가’ 명칭으로 사용해왔다.
 
 
History
Bactria-Margiana Archaeological Complex (BMAC)
 
Godesses, Bactria, Afghanistan, 2000-1800 BCE
 
The Bactria-Margiana Archaeological Complex (BMAC, also known as the "Oxus civilization") is the modern archaeological designation for a Bronze Ageculture of Central Asia, dated to ca. 2200–1700 BC, located in present day Turkmenistan, northern Afghanistan, southern Uzbekistan and western Tajikistan, centered on the upper Amu Darya (Oxus), in area covering ancient Bactria. Its sites were discovered and named by the Soviet archaeologist Viktor Sarianidi (1976). Bactria was the Greek name for the area of Bactra (modern Balkh), in what is now northern Afghanistan, and Margiana was the Greek name for the Persian satrapy of Margu, the capital of which was Merv, in today’s Turkmenistan.
According to some writers, Bactria was the homeland of Aryan tribes who moved south-west into Iran and into North-Western India around 2500-2000 BCE Later it became the north province of the Persian Empire in Central Asia.(Cotterell, 59) It was in these regions, where the fertile soil of the mountainous country is surrounded by the Turanian desert, that the prophet Zarathushtra (Zoroaster) was said to have been born and gained his first adherents. Avestan, the language of the oldest portions of the Zoroastrian Avesta, was onc e called "old-iranic" which is related to Sanskrit. Today some scholars believe the Avestan-Language was the western dialect of the Sanskrit because both languages are the oldest Indo-Iranian language of Aryans we know. With the time the Avestan-Language became developed by own western style.
역사:
박트리아-마르기아나 유적군(BMAC)
BMAC는 옥수스 문화라고 하며, 중앙아시아의 현대의 고고학 명칭이고, BC2200-1700년이며, 투르크메니스탄, 북부 아프가니스칸, 남부 우즈베키스탄, 서부 타지키스탄에 있고, 중심은 고대 박트리아 영역의 아무다르야(옥수스)강의 상류에 있다. 이 곳은 소련 고고학자 빅토르 사리아니디(1976)가 발견하고 이름을 붙였다. 박트리아는 현재의 북부 아프가니스탄의 박트라(현 발크) 지역에 대한 희랍 이름이었고, ‘마르기아나’는 마르구의 페르시아 군주에 대한 희랍어 이름이며, 마르구의 수도는 현 투르크메니스탄의 메르브(MERV)이었다. [MERV: 한자로 목록(木鹿), 페르시아어로 Mary, 12세기 최대 도시. Mary주의 주도, 위치는 37.6N, 61.8E]
작가들에 따르면, 박트리아는 아리안족의 고향이었으며, 그들은 BC2500-2000년에 남서쪽으로는 이란에 들어갔고, 인도 북서부에 들어갔다. 그 후 중앙아시아의 페르시아 제국 (550–330 BC)의 북부 주가 되었다. 바로 이 지역은 산이 많은 나라의 비옥한 토지가 투란 사막으로 둘러쌓여 있으며, 조로아스터교의 예언자 Zarathushtra가 태어나고 첫번째 신봉자들을 얻었던 지역으로 알려졌다. 아베스탄 언어는 조로아스터교 성전의 고대 언어로, 산스크리트어와 관련있는 고(古) 이란어였다. 오늘날 몇몇 학자들은 아베스탄 언어는 산스크리트어의 서부 방언이었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두 언어가 아리안족의 가장 오래된 인도-이란어였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아베스탄 언어는 서양식으로 발전되었다.
 
 
Cyrus and Alexander
See main article: Bactria (satrapy)
It is not known whether Bactria formed part of the Median Empire, but it was subjugated by Cyrus the Great, and from then formed one  of the satrapies of the Persian empire. After Darius III of Persia had been defeated by Alexander the Great and killed in the ensuing chaos, his murderer Bessus, the satrap of Bactria, tried to organize a national resistance based on his satrapy.
Alexander conquered Sogdiana and Iran without much difficulty; it was onl y in to the south, beyond the Oxus, that he met strong resistance. After two years of bloody war Bactria became a province of the Macedonian empire, but Alexander never successfully subdued the people. After Alexander’s death the Macedonian empire was eventually divided up between generals in Alexander’s army. Bactria became a part of the Seleucid empire, named after its founder, Seleucus I.
씨루스와 알렉산더:
박트리아가 메디안 제국의 일부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씨루스 대왕(590 BC 또는 576 — 530 BC)에 의해 종속되었으며, 그 때부터 페르시아 제국의 군주의 하나가 되었다(사트라피는 산스크리트어로 크샤트리야(kshatriya)이고 군인계급 또는 왕).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가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패배하고 뒤이은 혼란에서 살해당한 후에, 시해자 베수스(BC329사망)는 박트리아의 군주인데, 그의 군주에 기초한 국민저항군을 조직하려 했다.
알렉산더는 별 어려움 없이 소그드(이란족, 粟特)와 이란을 정복했다; 강력한 저항에 부딪힌 곳은 옥수스강을 넘어 남쪽 뿐이었다. 알렉산더 사후 마케도니아 제국은 결국 알렉산더 장군들(의 국가)로 분리되었다. 박트리아는 창건자 셀로우코스를 따서 셀로우코스(BC312-64년) 왕조의 일부가 되었다.
 
[소그디아: 이란족의 고대문명으로 한자로 속특이고, 페르시아어로 수구다이다. 현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 부하라, 후잔드(khujand), 케쉬이다. 주 도시는 사마르칸. 위치는 박트리아의 북쪽, 콰레즘(화레즘)의 동쪽, 강거(康居)국의 남동쪽에 있으며, 자라프샨 계곡을 따라 아무다르야와 시르다르야 강 사이에 있다.
강거(康居)국: 대완(大宛, Ferghana)의 북서쪽의 왕국으로 소그드 왕국의 시기이다. 한나라 장건이 BC128년 방문함. 이 부족은 월지족을 닮았고, 월지국은 남쪽에 흉노는 동쪽에 있다(월지국이 박트리아).
한나라 때 장건이 갔었던 지역으로, 이 지역은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지로, 희랍국가입니다. 따라서 한자 이름과 희랍 이름이 있습니다.]  
 
 
Seleucid Empire
The Macedonians (and especially Seleucus I and his son Antiochus I) established the Seleucid Empire, and founded a great many Greek towns in eastern Iran, and the Greek language became dominant for some time there.
The paradox that Greek presence was more prominent in Bactria than in areas far more adjacent to Greece could possibly be explained by the supposed policy of Persian kings to deport unreliable Greeks to this the most remote province of their huge empire.[citation needed]
셀레우코스 왕조: (영어 사전)
마케도니아인들(특히 셀레우코습세와 그의 아들 안티오쿠스1세)는 셀루우코스 왕조를 열었고, 동부 이란에 거대한 희랍 도시를 건설했으며, 희랍어가 이곳에서 오랫동안 지배적이었다.
{번역 생략}
 
Greco-Bactrian Kingdom
 
Gold stater of the Greco-Bactrian king Eucratides, the largest gold coin of Antiquity.
 
Map of the Greco-Bactrian at its maximum extent, circa 180 BCE
[Sogdiana는 속특, Ferghana는 대완, Bactria는 대하, Parthia는 안식국]
 
The many difficulties against which the Seleucid kings had to fight and the attacks of Ptolemy II of Egypt, gave Diodotus, satrap of Bactria, the opportunity to declare independence (about 255 BCE) and conquer Sogdiana. He was the founder of the Greco-Bactrian kingdom. Diodotus and his successors were able to maintain themselves against the attacks of the Seleucids - particularly from Antiochus III the Great, who was ultimately defeated by the Romans (190 BCE).
The Greco-Bactrians were so powerful that they were able to expand their territory as far as India:
"As for Bactria, a part of it lies alongside Aria towards the north, though most of it lies above Aria and to the east of it. And much of it produces everything except oil. The Greeks who caused Bactria to revolt grew so powerful on account of the fertility of the country that they became masters, not onl y of Bactria and beyond, but also of India, as Apollodorus of Artemita says: and more tribes were subdued by them than by Alexander...." [2]
그레코-박트리아 왕국: [BC250-125] [그레코는 ‘그리스의’ 의 뜻]
셀로우코스 왕들이 부딪힌 어려움과 이집트의 프톨레미2 세의 침략으로 인하여, 박트리아의 군주 디오도투스는 기원전 255년 독립을 선언하고 소그드 왕국을 정복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디오도투스와 그의 후계자들은 셀로우코스의 침략(특히 안티무스 3세 대왕)으로부터 대항할 수 있었다.(안티무스3세는 로마제국에 의해 결국 패배당함)
그레코-박트리아는 강력해서 인도까지 영역을 확장할 수 있었다:
“박트리아는, 그 일부는 아리아의 북쪽에 놓여 있고, 대부분 아리아 위쪽과 동쪽이다. 석유를 제외한 모든 것이 생산된다.  박트리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희랍인들은 토지가 비옥해서 강력해졌으며 박트리아와 그 주변 그리고 인도에서 주인이 되었으며, 아르테미타의 아폴로도루스(희랍작가)가 말하는 바와 같이: 많은 부족들은 알렉산더에 의해서가 아니라 희랍인들에게 정복되었다.”
 
 
Indo-Greek Kingdom: 인도-희랍(그리스) 왕국
Main article: Indo-Greek Kingdom
 
The founder of the Indo-Greek KingdomDemetrius I (205-171 BCE), wearing the scalp of an elephant, symbol of his conquest of India.
인도-희랍 왕국의 개창자 데메트리우스(BC205-171)는 꼬끼리 머리 가죽을 쓰고 있는데, 인도 정복의 상징이다.
 
The Bactrian king Euthydemus and his son Demetrius crossed the Hindu Kush and began the conquest of Northern Afghanistan and the Indus valley. For a short time they wielded great power; a great Greek empire seemed to have arisen far in the East. But this empire was torn by internal dissensions and continual usurpations. When Demetrius advanced far into India one  of his generals, Eucratides, made himself king of Bactria, and soon in every province there arose new usurpers, who proclaimed themselves kings and fought one  against the other.
Most of them we know onl y by their coins, a great many of which are found in Afghanistan, Pakistan and India. By these wars the dominant position of the Greeks was undermined even more quickly than would otherwise have been the case. After Demetrius and Eucratides, the kings abandoned the Attic standard of coinage and introduced a native standard, no doubt to gain support from outside the Greek minority. In India, this went even further. Indo-Greek King Menander I (known as Milinda in India), recognized as a great conqueror, converted to Buddhism. His successors managed to cling to power somewhat longer, but around 10 CE all of the Greek kings were gone.
인도-희랍 왕국:
박트리아 왕 유티데무스와 아들 데메트리우스는 힌두쿠쉬를 넘어서 북부 아프가니스탄과 인두스 계곡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짧은 시간에 그들은 권력을 휘둘렀다; 대 희랍제국은 극동에서 일어서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 제국은 내부 불화와 계속된 왕위찬탈로 분열되었다. 드메트리우스가 인도로 진격할 때, 그의 장군 유크라티데스은 스스로 박트리아의 왕이라 했으며, 곧 모든 지역에서 찬탈자가 나타났으며, 자신을 왕이라 하고 서로 싸웠다.
그들 대부분을 오직 그들의 주화로만 알 수 있는데, 주화의 대부분은 아프카니스탄, 파키스탄, 인도에서 발견된다. 이러한 전쟁에 의해서 희랍인들의 우세적인 위치는 다른 경우보다 훨씬 빨리 깎아 내려갔다. 데메트리우스와 유크라티데스왕은 아테네의 표준 주화를 포기하고 토착 표준을 도입했는데, 희랍 소수민족 밖에서 지원을 얻기 위해서였다. 인도에서 이것은 훨씬 더 진척되었는데, 인도-희랍왕 메난데르(밀린다왕)은 대 정복자로서 불교에 귀의했다. 그의 계승자는 좀 오랫동안 그럭저럭 권력을 유지했지만, 기원10년쯤에 모든 희랍의 왕들은 사라졌다.
 
[대승경전 밀린다王問經에 밀린다왕과 비구 나가세나와의 문답이 있다. 이 경전은 한글로 번역되 한국 사찰에 많이 보급되었다. 희랍인들이 불교에 귀의하게 된 것은 전불시대(역사이전의 부처의 시대)에 불교를 믿었었기 때문이고, 소크라테스의 철학으로 인해 고등 불교를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왕문경에 보면 밀린다왕의 질문은 상당히 수준이 높다. 서양인 답게 질문이 직설적이다. 또 희랍어, 페르시아어, 산스크리트어는 같은 언어에서 유래된 것이기 때문에 불교를 이해하는데 빠른 것이다.
인도-희랍왕국은 기원10년 인도-스키타이인의 침공으로 멸망했다. 이 시기에 파키스탄의 동부에 ‘Taxila’라고 하는 도시들이 있었는데 이 도시들에 여러 왕가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이 왕국은 대승불교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 특히 불상을 조각함. 초기불교에서는 불제자는 부처를 존중하는 의미로 보리수 아래에 앉아 있는 부처의 모습에서 보리수와 그의 제자들만 그리고 부처의 모습은 ‘좌대’만을 표시했다. 그러나 희랍인들은 부처를 신으로 여겼기 때문에 신상처럼 불상을 조각한 것이다.]
 
 
Sakas and Yuezhis
 
The treasure of the royal burial Tillia tepe is attributed to 1st century BC Sakas in Bactria.
왕실 부장품 틸리야 테페는 BC1세기 박트리아의 사카족의 것이다.
 
There is no evidence that the Sakas were related to the Buddha’s original clan, Shakya.
The weakness of the Greco-Bactrian empire was shown by its sudden and complete overthrow, first by the Sakas, and then by the Yuezhi (who later became known as Kushans), who had conquered Daxia (= Bactria) by the time of the visit of the Chinese envoy Zhang Qian, who was sent by the Han emperor to investigate lands to the west of China circa 126 BC.[3]
But then its emergence, isolated thousands of miles from Greece, could onl y be described as a paradox. However, its cultural influences were not completely undone; an artistic style mixing western and eastern elements known as the Gandhara culture survived the empire for hundreds of years.
사카(塞,새)족과 월지(月支)족:
사카족이 부처의 씨족 샤키야족과 관련이 있다는 증거는 없다.
그레코-박트리아 제국의 몰락은 갑자기 완벽히 전복되었는데, 먼저 사카족에 의해서, 그 다음은 월지족에 의해서였다. 월지족은 나중에는 쿠샨(貴霜 ,귀상)족이라고 한다. 쿠샨족은 대하(박트리아)를 정복했는데 그 당시는 한무제의 장건이 방문할 때이고 기원전 126년에 서역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것이다.
그러나 쿠샨왕조의 출현은 희랍에서 수천마일 떨어진곳에서는 역설로 서술될 뿐이었다. 그러나 그 문화적 영향은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다; 간다라 문화라고 하는 동서양의 예술적 혼합은 수백년동안 제국에서 살아남았다.
 
 
Contacts with China
 
Zhang Qian taking leave from emperor Han Wudi, for his expedition to Central Asia from 138 to 126 BCE, Mogao Caves mural, 618-712 CE.
장건의 한무제와의 이별, 기원전138-126년 중앙아시아 탐방, 서기 618-712년의 막고굴 벽화.
 
The name Daxia appears in Chinese from the 3rd century BCE to designate a mythical kingdom to the West, possibly a consequence of the first contacts with the expansion of the Greco-Bactrian Kingdom, and then is used by the explorer Zhang Qian in 126 BCE to designate Bactria.
The reports of Zhang Qian were put in writing in the Shiji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by Sima Qian in the 1st century BCE. They describe an important urban civilization of about one  million people, living in walled cities under small city kings or magistrates. Daxia was an affluent country with rich markets, trading in an incredible variety of objects, coming as far as Southern China. By the time Zhang Qian visited Daxia, there was no longer a major king, and the Bactrian were suzerains to the nomadic Yuezhi, who were settled to the north of their territory beyond the Oxus (Amu Darya). Overall Zhang Qian depicted a rather sophisticated but demoralized people who were afraid of war.
Following these reports, the Chinese emperor Wu Di was informed of the level of sophistication of the urban civilizations of Ferghana, Bactria and Parthia, and became interested in developing commercial relationship them:
"The Son of Heaven on hearing all this reasoned thus: Ferghana (Dayuan) and the possessions of Bactria (Daxia) and Parthia (Anxi) are large countries, full of rare things, with a population living in fixed abodes and given to occupations somewhat identical with those of the Chinese people, but with weak armies, and placing great value on the rich produce of China" (Hanshu, Former Han History).
These contacts immediately led to the dispatch of multiple embassies from the Chinese, which helped to develop the Silk Road.
중국과의 교류:
대하는 기원전3세기 중국에서 서역의 신비왕국을 가리키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아마도 그레코-박트리아 왕국의 확장과 더불어 첫번째 접촉의 결과일 것이고, 기원전 126년 장건에 의해 박트리아를 가리키는 것으로 쓰여졌다.
장건의 보고서는 기원전 1세기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되어있다. 약 백만의 사람들이 작은 왕 또는 지사의 통치아래 성안에서 살고 있는 문명도시를 서술하고 있다. 대하는 시장이 활기찬 부유한 나라이고, 다양한 물품을 거래하고, 멀리는 남부 중국까지 거래한다. 장건이 대하를 방문할 때는, 주요한 왕이 없었으며, 박트리아 왕국은 월지족 유목민을 지배하고 있었고, 월지족은 옥수스강(아무다르여) 넘어 왕국의 북쪽에 거주하고 있었다. 전반적으로 장건은 전쟁을 두려워하고 교활하고 풍속이 문란한 사람들이라고 서술했다.
다음 보고서에서, 한무제는 페르가나(대완), 박트리아(대하), 파르티아(안식국)의 복잡한 도시문명을 듣고서 그들과 상업교류에 관심을 가졌다:
 “천자는 이 모든 것을 듣고서 이와 같이 생각했다: 페르가나(대완)와 박트리아(대하)와 파르티아(안식)은 큰 나라이고, 희귀한 것이 많고, 고정된 장소에 거주하고, 중국인과 어느정도 같은 직업을 가지고 있지만, 군대는 약하고, 중국의 풍부한 물산에 관심을 갖는다.(한서, 전한)
이러한 교류는 즉각 중국에서 여러 사신을 파견하게 되었고, 실크로드를 발전시키게 하였다.
[위는 깊이 있는 내용이 없어 보입니다]
 
 
Tokharistan
 
Kushan worshipper with Zeus/Serapis/Ohrmazd, Bactria, 3rd century CE.[4]
 
Kushan worshipper with Pharro, Bactria, 3rd century CE.[5]
 
토하리스탄: 토하리 왕국
Following the settlement of the Yuezhi (described in the West as "Tocharians"), the general area of Bactria came to be called Tokharistan. From the 1st century CE to the 3rd century CE, Tokharistan was under the rule of the Kushans. They were followed by Sassanides (Indo-Sassanids). Later, in the 5th century, it was controlled by the Xionites and the Hephthalites. In the 7th century, after a brief rule under the TurkishKhaganats, it was conquered by the Arabs.
This article incorporates text from the Encyclopædia Britannica Eleventh Edition, a publication now in the public domain.
월지족이 정착함에 따라(서 양에서는 ‘토차리언’이라고 함) 박트리아의 일반적인 지역은 토하리스탄으로 불려졌다. 기원 1세기부터 3세기까지, 토하리스탄은 쿠샨왕조의 통치아래 있었다. 그 다음은 사사니드왕조의 통치를 받았다. 그 후 5세기에 씨오니테와 헤프탈리테의해 지배되었다. 7세기 돌궐 가한(왕)의 짧은 통치 후에는 아랍에게 정복되었다.
[토하리스탄의 영역은 쿠샨 박트리아와 같으며, 남부 타지키스탄, 북부 아프가니스탄과 Surxondaryo(아무강 지류)강이다.
 
 
이전글 돈황은 천산 주변이고, 월지족이 거주하던 곳이다.
다음글 오이라트(와랄)의 위치는 준가르분지, 티벳, 카스피해 칼미키아 공화국

현재 글에 달린 댓글 수 : 3개
댓글 3. 신화는 동서양이 공유 중산 2008-04-09 18:50:24.0



박 트리아는 페르시아어로 박타르이므로 박달, 배달이 됩니다. 즉 배달의 역사를 이란인 희랍인과 공유한다는 것입니다. 상고시대의 고조선, 삼한의 역사는 페르시아,인도,그리스와 공유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즉 고조선의 역사중에서 그리스 로마신화, 힌두신화, 페르시아 신화 등의 내용은 고조선의 역사를 가리킬 수 있다고 봅니다.
특히 신라의 이름 지명을 보면 범어, 페르시아어, 희랍어와 닮은 것이 많습니다.
신화중에서 내용이 같다면 연원이 같은 것에서 출발하여 각색되어 변형된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몽골-돌궐의 텡그리 신앙은 단군신앙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미주 인디언까지 해당됩니다.
댓글 2. 전불시대 중산 2008-04-09 18:32:19.0



  위키영문사이트 참고서적을 보면 주로 서양인 학자입니다. 부처는 1만년, 5천년, 3천년 이내에몇 천만년동안 출현해왔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문명주기설에 따른 것으로, 사상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야, 부처가 출현하여 설법을 하는 것입니다. 원시시대에는 출현해도 알아듣는 사람이 없기 때문임. 부처의 출현이후 문명은 더욱 고도화 되고, 일반적으로 최후에는 물질과학 수준이 높아지고, 정신적인 수준은 떨어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최후에는 전쟁, 사막화, 질병, 지각변동, 혜성충돌 등으로 인류의 문명은 하루아침에 또는 시간을 두고 사라지게 됩니다. 소겁, 중겁, 대겁이라 하는데, 긴 기간에 일어난 재앙 또는 넓은 지역의 재앙을 대겁이라 한다면, 짧은 기간 좁은 범위의 재앙은 소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주기는 종류가 엄청 많습니다.
  적어도 1만년에 한번씩 문명은 고도화되고 지구는 엄청난 재앙으로 인하여 살아남은 소수에 의해 원시시대로 돌아가게 됩니다.

  불경은 시간개념이 희박하여 몇천년전의 일도 몇 겁전이라고 쓰는데, 1겁은 어떤때는 1억년입니다.
 원시7불은 시간적으로 무슨 의미인지 알 수 가 없습니다. 두가지로 볼 수 있는데, 예를 들면 백만년 동안이면 백만명의 부처가 출현한 것으로 보면, 이 기간의 대표적인 부처를 원시7불의 하나로 적는 방식입니다. 그러면 원시7불 중 한분 한분마다 백만년마다 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총 7백만년이 됩니다.
  적어도 원시 7불은 석가모니 직전의 부처이름이 아니고, 몇 십만년전, 몇 백만년 전의 부처 이름입니다.

역사 이전은 사료가 별로 없으므로 무슨 시대구분을 못하지만, 수련계에서는 지구의 역사를 모모 부처의 시대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시기는 '석가모니불 시대'에 해당되고 거의 끝나가는 시점입니다.

댓글 1. 전불은 가섭불 최남석 2008-04-09 12:38:45.0



 전불은 가섭불입니다  대승공교 이지요 새거란 (스기타이) 으로서 알타이에서 발상한 새부루(서가불)은 주술밀교 입니ㄷ
페르시아 가 이란 북부에 있다가 지금의 페르시아로 갔는데 달마대사 가 이곳 원 페르시아 출생이고  달마는 가섭의 공교를 계승하여 지나에 전했으며 니힐리즘이 이곳에서 발상한 사상으로 쏘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야스퍼스  니체로 이어지다 정치적 허무주의로 악화 되어 나찌의 파시즘이 나왔습니다  (최남석 연구 미완성 결론)

기고 하신 글은 저자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저 하고 맥락이 닿아 있네요

AD1C경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