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을 설명하자면 이렇다. 기본적으로 발해인들이 스스로 기록한 자료가 별로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발해사의 많은 부분은 외국 사료에 기재된 것들을 통해 파악해야 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왕들의 이름과 시호, 연호 등은《신당서》발해전에 가장 많이 정리가 되어 있다. 그런데 이 책에는 10대 선왕 이후로는 시호가, 11대 대이진 이후로는 연호가 기록되지 않았고, 13대 대현석 이후에는 왕명 자체도 나오지 않는다. 

한편 발해의 마지막 왕의 이름이 "대인선" 이라는 것은《요사》를 보면 알 수 있다. 전근대시대에 아직 발해사 연구가 정밀하지 못했을 때는, 《신당서》에 나오는 13명의 왕 다음에 바로 "대인선" 을 갖다붙여 발해의 왕을 14명으로 파악하곤 했다. 더 많았을 거라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을지 모르지만, 어쨌건 자료를 찾지 못해서 말 할 수 없었을 것이다. 
  
13대왕인 "대현석" 과 "대인선" 의 중간에 "대위해" 라는 이름의 왕이 또 있었다는 사실은 20세기 들어서야 김육불에 의해 비로소 알려졌다. 이 사람의 이름은《당회요》에 나온다. 따라서 현재까지 밝혀진 발해의 왕은 15명이며, 14명짜리 계보는 과거의 정보를 답습한 것이다. 

근래 일본학자들은 발해의 역사 사실을 말하길 좋아한다. 일찍이 현석을 경왕(景王)이라고 부르고 인선을 애왕(哀王)이라고 불렀다. 그 근원은 일본 외무성이 편찬한 외교사고(外交史稿)에서 나온 것이다. 나는 그것이 상당히 근거가 없는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그 후에 『조선사략』제2권을 읽었는데, 그곳에서 "발해는 경애왕(景哀王)시기에 이르러 거란이 공격하여 멸망하였다" 고 하였으니 비로소 그 잘못된 근원을 알게 되었다. 살펴보건대, 이곳에서 말하는 경애왕은 신라의 경애왕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다. 후당 명종(明宗) 천성(天成) 원년(926)은 바로 요 태조 천현(天顯) 원년으로 또한 신라 경애왕 3년이다. 이 해에 요가 발해를 멸망시켰다. 그러므로 『동국사략』에서 "경애왕 때에 거란이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라고 한 것이다. 이 말이 분명하지 않은 것은 경애왕이란 말 앞에 신라라는 두 글자를 올려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편찬자들이 자세히 고증하지 않고 마침내 경애 두 글자를 시호로 여기고 현석과 인선의 두 왕에 분속시키면서, 그것이 근거가 없는 것임을 알지는 못하였다. 하물며 두 왕의 사이에 위해(瑋瑎) 한 대가 더 있음에랴.

-김육불, 『동북통사』下, 동북아역사재단, p577-578 (2007)

또 하나의 선민 알이랑 민족-한국 24 금제단 센터 뉴스레터 180  

인터넷뉴스팀    2006-03-03 16:54:44  

아리랑은 원래 ‘알이랑’이다(알이랑→아리랑). ‘알이랑’은 ‘알’과 ‘이랑’으로 구분된다. ‘알’은 성경의 ‘엘(EL), 아랍인의 ‘알아(알라)’처럼 ‘하느님’을 뜻하는 단어다. ‘하느님’이라는 유일신의 신명(神名)은 최초에 ‘알’이었다. 그런데 ‘알’ 앞에 ‘한’이라는 관형사를 붙이고, ‘알’ 뒤엔 ‘님’이라는 접미사를 붙여 ‘한알님’이라고 했다. 이 ‘한알님’이 한알님→하날님→하늘님→하느님으로 변한 것이다. 그러므로 ‘알’은 ‘하느님’을 의미한다. ‘이랑’은 ‘~와 함께’라는 토씨로서 영어의 ‘With’에 해당한다(: 갑돌이랑= 갑돌이와 함께). 그래서 ‘알이랑’은 ‘하느님과 함께’(With God)’라는 뜻이다. ‘알이랑’은 종교적인 말로서 우리 겨레의 원형이 유일신 하느님께 제사하던 제천민족, 곧 천손민족(天孫民族)이라는 사실을 한 마디로 알려주는 선민 한국인의 키워드(Keyword)이다.



고개를 넘어 간다

그렇다면 ‘고개를 넘어 간다’는 무슨 뜻일까? 그것은 고대 한민족이 이란고원을 지나 파미르고원을 넘어, 천산산맥과 알타이산맥을 넘어갔다는 말이다.

실로 많은 고개를 넘은 것이다. ‘파미르 고원’을 지나(支那) 사람들은 총령(蔥嶺)이라고 하는데, 이는 한국어 파() 마루() 그대로 파마루(파미르)이다. 지리학에서도 역시 파미르 고원(蔥嶺)에서는 파()가 많이 야생한다고 한다. 파미르 고원은 ‘파마루’로서 파()가 많이 자생하는 산마루()이기에 파마루(파머루) 고원인 것이다. ‘파미르’라는 지명의 어원이 한국어 ‘파마루’이다. 이러한 언어적인 연관성은 고대 한국인이 참으로 ‘파미르고원’을 지나 천산산맥을 넘고 알타이산맥을 넘어서 동방으로 이동해 왔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고고학적 증거이다. 알타이 고개를 넘어서 동쪽으로 조금 더 이동하면 시비리(시베리아) 벌판이 펼쳐지고 바이칼 호수가 나온다. 우리 겨레는 이 바이칼 호수를 거쳐 동쪽으로 계속 이동하다가 마침내 아시아 동녘에서 제일 높고 밝은 산인 한산(犬白山→白頭山)에 이르러 배달나라를 세웠던 것이다. 백두산 산정에 올라 노아처럼 창조주 한님께 천제(天祭)를 드린 후에!


알이랑 알이랑 알 알이요
알이랑 고개를 넘어 간다

따라서 이 노래 가사를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이요
하느님과 함께 고개를 넘어 간다.
(with God, with God, with God, just God.
accompany with God, I will take over the mountains.)

‘아리랑’은 빛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공경하던 고대 한국인이 광명의 본원지를 찾아 동방의 이 땅에 오기까지 수많은 산과 언덕과 고원들을 넘어 오면서 부른 ‘찬송가’였던 것이다. ‘아리랑’이 우리 겨레의 마음속에 그토록 크게 자리 잡고 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겨레의 역사와 가장 오랫동안 함께 해온 민족의 숨결이며 역사의 맥박이기 때문이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이란 누구를 뜻할까? 문맥상 그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이 된다. 왜냐하면 “알이랑 고개를 넘어 간다”는 바로 앞의 가사는 “하느님과 함께(with God) 고개를 넘어 간다”는 뜻으로서, 유일신 하느님을 섬기는 자들의 찬송이며 믿음의 고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이란 하느님을 버린 자들, 곧 배역자들을 의미한다.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난다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난다’는 것은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에 대한 악담이나 저주가 아니다. 만약 노래 가사가 “나를 버리고 ‘가는 놈’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난다”고 했다면, 그것은 실제로 발에 병이 나라고 욕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가사는 “가는 놈”이 아니고 “가시는 님”이다. 따라서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난다’는 것은 발병이 나서라도 더 떠나가지 못하고 나의 품으로 되돌아오라는 회귀원망(回歸願望)의 연정(戀情)을 노래한 것이다. 즉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버린 자들을 향해 다시 순수한 하느님 신앙으로 되돌아 올 것을 사랑으로 촉구하는 것이다. 이렇게 겨레의 노래 ‘알이랑’에는 ‘하느님을 위한 열정’과 ‘잃은 자를 위한 연민’이 함께 깊이 배어 있다. 즉 경천애인(敬天愛人)의 얼이 담겨 있는 것이다.


청천 하늘엔 잔별도 많고,
우리네 가슴엔 수심도 많다

아리랑의 2절은 청천 하늘의 잔별만큼이나 우리 가슴엔 수심도 많다고 노래한다. 왜 알이랑 찬송을 부르며 동방으로 천동(遷動)하던 천손민족(天孫民族) 우리 조상들의 가슴엔 그리도 근심이 많았을까?

그것은 1절의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 때문이었다. 즉 유일신 신앙(제천신앙)을 저버린 자들이 제천민족(祭天民族) 우리 조상들의 커다란 근심거리가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세상 근심과는 차원이 다른 ‘거룩한 근심’이었다.(고후7:10)

이와 같은 역사적 사연을 간직한 알이랑 찬송은 우리 조상이 동방의 산지를 넘어 이 땅에 오기까지 끊임없이 불리어졌다. 그리고 우리 겨레의 삶 가운데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상 자세히 살펴본 바처럼 아리랑은 ‘찬송가’이다. 겨레의 노래 ‘아리랑’은 현존하는 인류 최고(最古)의 찬송가인 것이다.

우리 겨레는 열방 모든 족속들 가운데 민족사를 ‘알이랑’ 곧 ‘하느님과 함께’라는 유일신 신앙(제천신앙)으로 시작한 단 하나의 천손민족(天孫民族)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 한국인의 원형이다. 우리 겨레의 근본사상은 ‘이랑 정신’이다. ‘이랑’은 ‘하느님과 함께’(with God)라는 뜻이다. 따라서 그것은 ‘하느님 중심 사상’이요, ‘신본주의 정신’이다. 홍수 후에 그렇게 철저한 ‘유일신 신앙’을 갖고서 동방의 산악지대(파미르고원→천산산맥→알타이산맥)을 넘어 아시아로 천동(遷動)한 족속은 과연 누구였을까?

성경은 그 거룩한 백성이 셈의 현손(玄孫) ‘욕단’ 족속이라고 알려준다. 왜냐하면 성경에 욕단의 가계는 하느님께 선택받은 종족이며(10:21, 25), 또한 천손민족(天孫民族)인 그들은 홍수 후 ‘산지’를 넘어 ‘동방’으로 이동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10:30). 바로 그들이 알이랑민족 우리 겨레의 직계조상이다.                      


유석근|부천 상동중앙교회 담임목사. <이스라엘의 구원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또 하나의 선민 알이랑 민족> 등의 저서가 있다

[펌] http://cafe.daum.net/hakgogeomancy/주소 복사

進軍合兵薄津口瀕江屯兵忽有鳥廻翔於定方營上使人卜之曰必傷元帥定方懼欲引兵而止庾信謂定方曰豈可以飛鳥之怪違天時也應天順人伐至不仁何不祥之有乃拔神劍擬其鳥割裂而墜於座前於是定方出左涯垂山而陣與之戰百濟軍大敗…

<三國遺事 卷第一 紀異第一 太宗春秋公>

 

…이 떄에 신라군사는 당나라 군사와 연합해 가지고 나루 어귀로 육박하여 강가에 진을 치고 있는데 돌연히 웬 새가 (소)정방의 군영 위로 빙빙 돌므로 사람을 시켜 점을 쳤더니 “반드시 원수님이 부상할 것이외다.” 고 하여 정방이 겁을 먹고 군사를 끌어들여 싸움을 그만 두려고 하였다. 유신이 정방더러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는 새의 요괴스러운 일을 가지고 하늘이 주는 기회를 놓칠 것인가? 하늘과 사람의 의사에 따라 죄악을 정벌하는 이참에 나쁜 조짐이 어디 있을 것인가?” 하고는 곧 신검(神劍)을 뽑아가지고 새를 겨누니 (새가) 찢어져 죽어 소정방의 좌석 앞에 떨어졌다. 이 때 정방이 강 왼편 기슭으로 나와 산 밑에 진을 치고 싸웠더니 백제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삼국유사 권제1 기이 제1 태종 춘추공> 

 

http://myhome.hanafos.com/에서 따옴.

경산 임당동 고분군(慶山 林堂洞 古墳群: 史蹟 第300號) 출토

삼엽문 환두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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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시아에서 한반도와 그 주변국(중국?일본)에서 출토되는 환두대도(環頭大刀)는 그 연원이 중국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먼저 환두대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도(刀)와 검(劍)의 차이를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도(刀)라는 것은 날이 곧거나 약간 휘어져 있는 베는 목적으로 쓰이는 외날 칼을 의미하며 검(劍)이라는 것은 날이 곧은 형태의 찌르는 목적으로 쓰이는 양날 칼을 의미한다. 환두대도(環頭大刀)라 함은 칼자루 손잡이에 둥근 고리 장식이 달려 있는 1m~1m 50cm 길이의 외날칼(刀)을 말하며 대개는 한국의 경우 기원후 4C~기원후 7C까지 활발하게 쓰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칼럼에서는 현재까지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환두대도의 기원, 형식 및 환두대도의 의미(정치?사회), 기능(예도?실용) 등을 살펴보고자 하며 특히 환두대도와 일반 도검(刀劍)과의 차이를 집중적으로 다루어 보도록 하겠다. (이 칼럼에서 환두대도가 사용된 시기적 범위는 기원전 1C에서 기원후 7C로 한정 짓도록 하며 그 이후 시기는 일반 도검으로 규정하도록 하겠다.) 

 

                                    http://redhothobbies.tripod.com/에서 따옴.

                                                           서양의 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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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검의 발달사적 측면에서 볼 때 초기 형태 면에서는 검이 압도적으로 쓰였으나 후기에 갈수록 도가 더 많이 쓰였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것은 곧 전쟁의 양상이 검을 사용해 찌르는 것에서 도를 사용해 베는 것으로 변화해 나갔음을 의미한다. 서양의 경우 검이 더 많이 사용된 것으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으나, 서양의 검은 베는 용도보다는 찌르거나 브로드소드(broad sword: 검신의 날 부분의 폭이 넓은 검: 칼럼지기 註)라 하여 머리(투구 부분)를 찍는 용도로 사용됐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맥락이 틀리다고 볼 수 있다. 서양에서 도(刀: sabre)가 활발히 쓰인 때는 십자군 이후 이슬람 세력의 영향으로 화약이 도입되고 총포가 쓰이면서 무거운 무기 보다는 가볍고 날렵한 무기가 선호되면서 부터였다. (알렉산드르 뒤마의 삼총사를 참고하기 바람)        

 

                                         http://www.toonhound.com/에서 따옴.

                                                              브로드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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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두대도가 중국에서 쓰인 것은 전국시대(戰國時代)부터라고 전해진다. 중국 사상(思想)의 황금기라고 불리는 춘추전국시대는 난세이자 군웅할거의 시대였으며 능력 본위의 인물이 발탁되는 실력 위주의 사회였다.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춘추시대는 서주(西周)가 있던 BC 770~BC 453의 기간을 말하며 형식적이나마 주 왕조를 받들고 지방 세력 스스로를 후(侯)로 칭하던 시기였으며 명칭은 공자의 저서 춘추에서 비롯되었다. 전국시대는 한(漢) 나라의 유향(劉向)이 편찬한 전국책(戰國策)에서 유래되었고 각 지방 세력이 스스로 왕(王)을 칭하기도 하였으며 BC 453~BC 221까지의 시기를 무대로 하고 있다. 춘추시대 전쟁 양상의 큰 특징은 철제 무기를 사용한다는 점과 전차가 주요 공격 수단이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전국시대에 들어 큰 변화를 겪는데 전차 위주의 공격에서 중무장 보병으로의 변혁이 그것이었다. 즉 전차를 타고 창과 활로 싸우던 것이 보병들이 맞붙어 싸우는 것으로 바뀐 것이었다. 이후의 전쟁 양상은 원거리 공격 무기 (투창, 활)에서 근거리 공격 무기(창, 칼)로 변화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http://protein.biochem.queensu.ca/에서 따옴.

                                                          서한의 보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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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의 전국시대에 등장한 환두대도는 환수도(環首刀)라고 불렸으며 그 특징은 손잡이와 날 사이에 칼코등이 없다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이후 한반도에서 출토되는 환두대도의 기본적 형식과 같다. 칼코등의 기본적 용도는 적군과 교전 시 손목을 방어한다는 것과 칼날과 손잡이 부분을 구분하는 것이다. 그러나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 칼코등이 보이는 것은 매우 드물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환두대도가 장식용이나 권위 상징물로만 쓰였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칼코등이 기원후 7C부터 쓰였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그것은 부여 부소산성에서 출토된 것으로 확인된다.   

 

http://www.kendo.com.hk/에서 따옴.

고대 중국의 환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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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단은 환두대도의 기원이 중국 전국시대에 있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으나 환두의 경우 그 형식은 이미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Scytho -Siberian Cultural Sphere)에서 보이고 있다. 또 중국의 전국시대는 북방 종족의 문물에 크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확인되기 때문에 그 기원이 곧 중국에 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환두대도는 처음 환두검에서 대도로 발전한 것으로 여겨진다.


        환두대도는 형식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대략 5가지 정도로 분류할 수 있는데 소환두대도, 삼엽문환두대도(삼엽환두대도), 삼루문환두대도(삼루대도), 용봉문환두대도, 규두대도 등이다.


        소환두대도(素環頭大刀)는 민고리자루칼이라고도 하며 가장 간단하고 단순한 형태이다. 즉 고리가 자루에 달려 있으며 고리 안에는 아무런 장식도 달려 있지 않다. 북한 사회과학원에서는 고리에 끈(또는 술)을 달아 풀어지지 않도록 손목에 감아 사용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중국에서는 고리에 오색 끈(또는 술)을 달아 화려하게 보이도록 장식을 했다고도 한다. 기원후 7C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사마르칸트의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에는 고구려 사신으로 추정되는 두 명의 사절이 보이는데 두 명 모두 환두대도를 차고 있으며 칼코등이 보인다.     

 

http://www.orientarch.uni-halle.de/에서 따옴.

고구려 추정 사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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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엽문환두대도(삼엽환두대도)는 고리 자루 안에 세 잎사귀 모양의 조각이 들어간 것을 지칭하며 이런 종류의 환두대도는 중국 집안 지역과 북한 그리고 한반도 중남부에서 출토되어 발견된 예가 있다. 특이한 점은 고구려의 경우 상당히 실용적인 것을 강조한 것으로 생각되며 이것은 장식대도가 한 점도 출토되지 않는 것에서 유추할 수 있다.

 

        삼루문환두대도(三累文環頭大刀, 삼루대도三累大刀)는 고리자루 세 개가 맞물려 品자 모양을 하고 있으며 이것은 한반도 남부 쪽의 신라 가야 백제 문화권에서 발견되고 있다. 그래서 추정하는 사람에 따라 이러한 유형의 환두대도는 장식적인 측면이 강해 지방 귀족 세력에게 내려준 위세품의 일종으로 보기도 한다.

 

                                    http://myhome.hanafos.com/에서 따옴.

                      부산 복천동 고분군 10, 11호분 주곽 출토 삼엽(左) 및 삼루문 환두(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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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봉문환두대도(龍鳳文環頭大刀)는 칼자루 고리 장식에 용이나 봉을 조각한 것으로 용과 봉이 함께 조각되기도 하고 각각 따로 조각되기도 한다. 용 한 마리만 조각되었을 때는 단룡문환두대도 봉 한 마리만 조각되었을 때는 단봉문환두대도라고 지칭한다. 그리고 용이 두 마리 일 때는 쌍룡문 봉이 두 마리일 때는 쌍봉문환두대도라고 한다. 이 용봉문환두대도는 피장자의 권위가 가장 큰 것으로 해석되는 유물이며 대표적인 것으로는 충남 공주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단룡문환두대도가 있다.  

 

http://bingoimage.naver.com/에서 따옴.

공주 무령왕릉 출토 단룡문환두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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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규두대도는 칼자루가 각이 진 모양으로 되어 있으며 둥그런 구멍이 간단하게 나 있는 형태를 띠고 있다. 규두대도는 일본 남부에서 특히 큐슈를 중심으로 다수가 출토되었으며 한반도에서는 전라남도 나주를 중심으로 출토되었다. 그래서 규두대도는 마한(馬韓) 세력의 위세품(威勢品: prestige goods)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한검(漢劍: 환수검[環首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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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 도깨비가 새겨진 귀면문환두대도가 있는데 이것은 벽사의 상징으로 생각되며 특수한 형태로 여겨지고 있다.

 

 

http://www.nonsanmuseum.net/에서 따옴.

한국과 일본의 환두,규두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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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이러한 환두대도의 의미는 무엇일까?

   

        먼저 정치적 의미로는 중앙 권력자가 지방 지배 계급에 내린 권위를 인정해준다는 신표로서의 의미가 있을 수 있다. 그 다음으로는 사회적으로 그것(권위)이 그 지역의 피지배 계층에게 받아들여졌음을 의미하는 물질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왜냐하면 무덤은 죽은 자가 속해있던 일족이 살아있음으로 인해 만들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경제적으로는 금속(철, 금, 은), 보석, 광물 등을 동원해 칼을 만들 수 있을 정도의 경제 규모를 가진 사람이 존재했다는 것과 문화적으로는 금속 입사 기법이나 용과 봉, 도깨비, 나뭇잎 무늬 등을 활용한 집단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의미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규두대도 일본 군마현 후지오카 출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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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에 덧붙여 환두대도의 기능을 알아보도록 하자. 크게 두 가지로 나누자면 환두대도는 실용 무기로서의 기능과 예도?제의적 기능이 있을 수 있는데, 실용 무기로서의 기능은 전장에서 실제로 적들과 맞붙어 적을 베고 자신을 방어하는 기능을 생각할 수 있다. 이 경우 출토된 환두대도에서 칼코등이 없는 것은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는데 실제로는 쓰였지만 매장하면서 넣지 않은 경우와 실제로도 보조 무기로만 사용되었기 때문에 칼코등을 쓰지 않았을 경우를 상정할 수 있다. 칼코등이 실제 유물로 출토된 것은 충남 부여 부소산성의 기원후 7C 유물이었으며 사마르칸트의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도 기원후 7C경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기원후 7C 이후에나 등장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웃인 일본에서는 군마 현의 경우 기원후 6C 환두대도에도 칼코등이 남아있기 때문에 한반도에서도 최소한 기원후 6C 이전부터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두 번째 예도로서의 기능을 살펴본다면 이것은 그 자체가 매납 유물이기 때문에 굳이 칼코등을 달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칼코등은 분리가 되기 때문에 여러 번 재활용할 여지가 충분하고 실제로도 조선시대에 쓰였던 예도(온양민속박물관 소장)에는 칼코등 장식이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피장자가 전사로서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하며 함께 묻힌 환두대도가 예(禮)를 갖춰 피장자의 권위를 높이는 기능을 하였음도 생각할 수 있다.

 

http://home.kimo.com.tw/에서 따옴.

한대 환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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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전 1C에서 기원후 7C까지 시기의 환두대도와 그 이후 시기의 일반 도검류와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칼코등의 유무에 있는데 이것은 칼코등이 손목을 보호하는 기능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볼 수 있다. 환두대도에서 칼코등이 없었던 것을 기술이 미발달 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이미 그 이전 단계에 있던 청동검이나 석검에서는 칼코등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창원 다호리 유적과 같은 기원전 1C경의 삼국시대 전기 (원삼국시대)의 철기 유적에서도 칼코등은 존재하며 아직도 환두대도에서만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충분히 규명되지 않은 상황이다.

 

                        http://www.knifegallery.co.kr/에서 따옴.사인검 복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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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두대도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 환두대도는 환도로 발전하였고 검류는 패검(佩劍)으로 발전하였는데 사인검(四寅劍)이나 칠성검(七星劍) 등이 그것이다.


        정리하자면 환두대도는 기본적으로 전사들의 무기였으며 그들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하여 부장되었다. 또한 환두대도는 중앙귀족세력이 지방 군사귀족 세력을 인정하거나 달래기 위해 내려준 하사 공물의 성격을 지니며 그 형식에 따라 차등적인 위세를 보여주기도 한다.             

 

[참고문헌]

 

● 국방군사연구소(1994), 韓國武器發達史, 第1章 古代의 武器, 第2節 三國時代의

     武器, p.63~p.175, 서울: 국방군사연구소.

 

● 盧泰天 著(2000), 韓國古代冶金技術史硏究, 서울:학연문화사.

 

● 金性泰(2000), 三國時代 刀劍의 硏究」,『仁荷史學第8輯, p.3~p.103,

    2000년 12월, 仁荷歷史學會.

 

● 具滋奉(1995),「環頭大刀의 分類와 名稱에 관한 考察」『嶺南史學』17, p.69~95,

    1995년 12월, 嶺南考古學會.

 

●李漢祥(2004), 「三國時代 環頭大刀의 制作과 所有方式」,『한국고대사연구』 36,

     p.257~286, 2004년 12월, 한국고대사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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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황보씨 족보에 중국 안정(安定)에서 시작된 성씨로서, 신라 말에 당나라로부터 건너온 황보경(皇甫鏡)이 우리나라 황보씨의 시원을 이루었다.  《영천황보씨세보(永川皇甫氏世譜)》에 의하면 황보경의 증손 능장(能長)이 고려 태조 때 공을 세워 영천부원군(永川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관향을 영천으로 하게 되었다고 한다.  황보(皇甫)성의 유래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서주(西周) 관직 명에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황보(皇父)가 황보(皇甫)의 발음이 유사한 것으로 유추하는 설이 있다.
   
  논외로 안정(安定 ; 현재 감숙성 고원현)은 한(漢)나라 시대에 양주(凉州)에 속해있는 지역이고 도요장군 황보 규(皇甫 規; 104 ~ 174 AD)의 고향이고 후한(後漢) 때 명성을 떨친 황보 숭(皇甫嵩)이 조카이고 동생은 안문태수 황보 절이다. 여러 차례 공을 세워 의랑에서 흉노 중랑장 그리고 도요장군 승진하였다.  

 그럼 고려 당시 북부 황해도 황주 지방의 호족인 황보씨 중심으로 왕실 상황을 재구성해 보면

<태조 왕건 시절 황보씨>

황주의 황보제공이 태조 왕건에게 무조건 딸을 맡기는 통에 태조 왕건은 4번째 부인으로 신정왕후 황보씨를 맞이하게 된다.

신정왕후 황보씨는 무려 80살까지 살았는데...
그 딸은 왕건의 세째아들 광종의 부인인 대목왕후 황보씨이고
그 아들 왕욱(王旭)은 임금을 못 시켰지만 손자는 임금으로 올려 제6대 성종이 되었고..
두 손녀에게는 자신의 성씨인 황보씨를 주어서 외손자인 제5대 경종의 부인(헌애, 헌정왕후는 경종과 친사촌이면서 동시에 외사촌이기도함)으로 만들었다.

<제4대 광종 시절 황보씨>
광종은 태조 왕건의 3번째 부인 신명순성왕후 유(劉)씨의 아들인데
태조 왕건의 4번째 부인인 신정왕후 황보씨가 자기 딸과 결혼시키자고 하였다.
그래서 광종은 이복 여동생을 부인으로 맞이하였는데, 그 부인이 바로 대목왕후 황보씨이다.
왕건과 신정왕후 황보씨의 딸인 대목황후 황보씨는 어머니성인 황보씨를 무려받음.

대목왕후 황보씨와 광종 사이에서 난 아들이 제5대 경종이고, 손자가 제7대 목종이다.
딸도 하나 낳았는데, 딸에게는 성씨를 양보하여 유(劉)씨를 주었다.
유(劉)는 남편 광종의 어머니이며 딸에게는 할머니가 되는 신명순성왕후의 성씨이다.

어쨌든 그 딸은 나중에 광종의 친조카이고 대목황후 황보씨의 친조카 겸 외조카인

제6대 성종의 비가 되는데, 그녀가 바로 문덕왕후 유(劉)씨이다.

<제5대 경종 시절 황보씨>
일단 경종의 어머니가 광종 임금의 부인인 대목왕후 황보씨이고..
제3부인 헌애왕후 (천주태후)와 제4부인 헌정왕후가 모두 황보씨이다.
이 두 부인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친자매지간으로,
아버지는 신정왕후 황보씨의 아들 왕욱(王旭)이고 어머니는 신의왕후 유(柳)씨이다.

헌애왕후 황보씨와 경종 임금사이의 아들은 나중에 제7대 목종 임금이 된다.

<제6대 성종 시절 황보씨>
성종의 아버지는 신정왕후 황보씨의 아들 왕욱(王旭)이고 어머니는 신의왕후 유(柳)씨이며,
앞의 헌애왕후, 헌정왕후 황보씨와는 한 부모 밑의 친남매지간이다.

성종이 임금이 되자, 성종은 그 아버지인 왕욱(王旭)을 “대종”이라 호칭하며 이미 죽고 없지만 임금과 같은 등급으로 추존하여 모신다.

부인인 문덕왕후 유(劉)씨는 광종과 대목왕후 황보씨 사이의 딸이다.
문덕왕후는 앞에서 말했듯이 어머니의 양보로 할머니의 성씨인 유(劉)씨 성을 물려 받은 여인이다. 할머니는 태조 왕건의 3번째 부인이며 광종의 어머니인 신명순성왕후 유(劉)씨이다.

<제7대 목종 시절 황보씨>
목종은 제5대 경종과 헌애왕후 황보씨 사이의 아들이다.

헌애왕후 황보씨는 아들이 임금이 되자 스스로를 천추태후라 불렀다.

그리고서는 김치양이란 사람과 재혼하여 또 아들을 낳게 되는데, 목종이 병석에 들어 눕자 “목종이 죽으면 김치양과의 아이를 임금으로 올릴 것이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에 분개한 북방 장수 강조(康兆)가 "김씨를 임금 시킬 수는 없다"라며 군사를 끌고 개성으로 내려 왔는데...
목종이 아직 살아 있는 통에 즉위하지도 않은 김씨를 몰아 낼 수는 없고 하여
목종이나 김치양 아들놈이나 똑같은 헌애왕후 황보씨의 아들이라 하여
내친 김에 목종을 쫓아 내 버리고
불쌍한 왕욱(王郁) 왕자와 헌정왕후 황보씨의 아들 제8대 현종을 추대하여 올린다.

<제8대 현종 시절 황보씨>
강조 장군에 의하여 임금이 된 현종은...
경종의 4번째 부인 헌정왕후 황보씨가 경종 임금과 사별 후 삼촌인 왕욱(王郁)과 다시 결혼하여 낳은 자식이다.

현종은 어린 나이에 부모(王郁/헌정왕후 황보씨)가 모두 돌아 가셨는데
목종 시절 천추태후(헌애왕후 황보씨:현종의 이모)가 너무 미워하여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한 때 사찰에서 스님이 되려 했던 인물이다.

결론적으로 고려 시대는 호족 중심 세력이 권력을 잡았기 때문에 근친 간의 결혼으로 결속력을 강화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초 왕들의 처가이자 외가역활을 거의 독점한 황해도 황주의 황보씨..
이후 황보씨를 어머니로 둔 현종의 자손들이 대대로 고려의 왕이된다...

[ww.coo2.net 우리 조상들의 결혼 풍속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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