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낙동강의 여명 <1> 철의 해양왕국

◆1천7백년전 시간여행

경남 김해시 중심부의 나지막한 구릉지인 봉황대(鳳凰臺). 금관가야(가락국)의 국읍(國邑)이 있었다는 곳.

봉황대 바로 아래에 바닷물이 출렁거린다. 김해평야는 형상도 흔적도 없다. 남쪽은 남해, 서쪽은 해반천이 바다와 만나는 강어귀, 동쪽은 낙동강 지류인 예안천이 실개천처럼 흐른다.

밀물이 되면 봉황대 앞 항구에 한·중·일의 큰 배들이 진을 치고 사신들과 장사꾼들이 모여 한바탕 거래를 펼친다. 철기를 납작하게 가공한 판상철부(板狀鐵斧) 꾸러미도 보인다.

김해시 대동면 예안리(사적 제261호)는 주로 서민들이 오순도순 모여사는 갯마을이다. 이곳 마을어귀에도 바닷물이 찰방거린다. 사람들은 물때를 맞춰 갯가에서 고기를 잡거나 조개를 채취하며 살아간다. 서기 4~6C 예안리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터에 대규모 매장지를 마련해 뼈를 묻었다.

1천7백여년전 고(古) 김해만의 낯선 풍경이다. 학계의 발굴조사와 연구로 김해지역의 옛 풍경들이 하나씩 되살아나고 있다.

부산대 윤선(지질학) 교수는 “김해시 장유면 수가리 패총의 단면과 예안리 고분의 지질, 주변의 해식동을 조사한 결과, 당시 해수면은 지금보다 5~6m 높았다”며 “1~3C 금관가야는 천혜의 항구를 확보해 번창할 수 있었으나, 4C를 전후해 육지가 서서히 융기해 항구를 상실, 쇠퇴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가야시대때 김해 일원이 내만이었다는 것은 수가리, 농소리, 회현리, 예안리 패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하지만 당시 지형연구 및 정확한 해안선 복원은 과제다.

◆되살아나는 금관가야

지난 여름, 김해 봉황동 유적지 남측에서 문화재 발굴작업을 벌이던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팀은 가볍게 전율했다. 이곳 습지 퇴적토에서 삼국시대 토기편과 4~5C대의 목주(木柱), 목열(木列)시설이 나왔기 때문.

경남발전연구원 이성주 역사문화센터장은 “좀더 파내려가야 정확한 것이 드러나겠지만, 목주 목열 등의 유구로 볼때 금관가야의 접안시설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선착장 유적이 확인될 경우 해양왕국 금관가야의 실체는 한층 뚜렷해진다.

김해 봉황대는 조선시대때부터 금관가야의 왕궁터로 알려졌던 곳. 지난 92~93년 발굴 조사결과 왕궁의 부속시설로 추정되는 방어시설과 가야인의 집자리, 환호(環濠), 조개더미 등이 확인됐다. 이밖에 골각기, 숫돌, 철기, 슬래그(철 찌꺼기), 송풍관이 함께 출토돼 가야사회의 철기문화시스템을 엿보게 했다.

봉황대 인근 구릉지에는 초기 철기시대 유적인 ‘회현리 패총’이 있다. 1907년 발견돼 일본인들에 의해 조사된 이 패총에서는 많은 조개더미와 가야토기, 세형동검, 탄화미, 화천(貨泉) 등이 나와 학계를 놀라게 했다.

이 가운데 화천은 가야사 조명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화천은 서기 9년 신(新)나라를 세운 중국의 왕망이 주조한 화폐로, 평양 등 서북한지역, 바다 건너 일본의 규슈북부와 오사카만 등지에서 두루 발견됐다.

인제대 이영식(사학) 교수는 “당시 황해도~일본열도를 왕래하려면 2년 가량이 걸렸다. 반면 화천은 10년밖에 사용되지 않았다. 이 기간에 화천이 동북아 곳곳을 돌아다녔다는 것은 당시의 교역이 얼마나 활발했는지를 말해준다”며 “김해는 당시 동북아시아 유일의 중개 무역항이었다”고 지적했다.

봉황대는 2001년 2월 인접한 회현리 패총과 더불어 ‘김해 봉황대 유적’으로 확대 지정됐으며, 현재 ‘가야유적 체험촌’이 조성되고 있다. 이곳의 산책길에는 아직도 2천여년전의 조개껍데기와 토기편이 흩어져 있어 묘한 감흥을 준다.

◆가야의 힘

가야 제국(諸國)의 힘의 원천은 철과 바다였다. 가야의 대·소국들은 분립 속에서 때때로 협력하며 고도의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교역로를 개척했다.

철은 가야의 힘이자 경제였다. 철기제작 및 가공은 당시로선 첨단기술이었다. 생활도구, 농기구, 무구류 등에 두루 사용된 철 기술은 시대를 초월할 만큼 뛰어났다.

가야의 철제품은 김해, 동래, 함안, 고령, 합천 등 가야고분 곳곳에서 출토되고 있으며 신라와 일본의 고분에서 수입품의 일부가 나오고 있다. 전기가야의 판상철부, 후기가야의 철정(덩이쇠)이 바로 그런 유물이다. 철정은 일정한 규격으로 만들어져 철기의 소재나 화폐로 사용됐다.

가야 제국의 교역로도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대가야의 교역루트와 관련, 경북대 박천수(고고학) 교수는 고령~거창~함양~운봉고원~섬진강 수계 코스를 설정, “산간분지의 대가야가 정치적 통합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철을 이용한 지역내의 교역과 5C 후기 남해안으로 통하는 대외 교역로를 확보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함안의 아라가야 역시 진동만과 마산만으로 통하는 두개의 해상 교역로를 열어 세력을 유지했다는 연구(남재우·창원대 강사)가 있다.

임효택 동의대 박물관장은 “김해의 금관가야는 지정학적으로 오늘날 싱가포르를 연상케한다”며 “2C 후반~4C는 낙동강 하류지역 가야철기의 전성시대였다”고 말했다.
[국제신문 연재]
http://wondreams.hihome.com/temasogo_gayasa.htm#
지배면적으로 볼 때도 가야는 경상남·북도의 낙동강 유역과 그 서쪽 일대를 점유했다.최전성기엔 전라남·북도동부지역까지 지배했다.

이는 전성기의 고구려에 비교할 수는 없지만 백제나 신라에 비하면 손색이 없다.
요컨대 가야는 신라.백제에 버금가는 존재였다는 뜻이다.

가야가 소국 연맹체제에 머무른 채 고대국가를 완성하지못해 하나의 국가로 취급할 수 없다는 주장이 있다.그러나 가야연맹은 고구려·백제·신라와 관계를 맺을 때 하나의 정치체제로서 역할을 하였다.

또 출토 유물 등으로 미루어 개별 소국들의 생산력이나 기술수준도 매우 높았다.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기원전 1세기부터 700년 가까이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독자적인 역사를 유지했다.

세계 최초로 고대 철제 말(馬)갑옷의 실물이 발견된 곳은 다름아닌 한반도 남단의 가야다. 경남 함안의 마갑총에서 발견된 말의 갑옷과 투구는 가야시대 맹주국의 하나였던 5세기 초 안라국의 발전된 사회기반과 강력한 무력을 상징한다. 가야는 이미 1세기에 철기를 기반으로 성장했고 당시의 하이테크였던 철 제련 능력과 토기 생산기술은 일본보다 500년이나 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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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138호 가야 금관과 부속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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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저주형토기(平底舟形土器) - 보물 555호

배 모양을 본 뜬 토기로 높이 9.1㎝, 길이 27.9㎝의 크기이다. 지금까지 출토된 다른 것들에 비하면 긴 편이고 바닥 또한 수평으로 길다.

전체의 모양은 거의 좌우 대칭을 이루었고 양쪽 배 끝 부분은 길게 연장되다가 끝이 높게 들려서 반원형을 이루었다. 이 반원형 부분에는 구멍이 2개씩 있으며, 배 끝 부분에는 거의 다 부러졌지만 노를 걸었던 꼭지가 여러 개 달려있다. 배 안에는 좌우로 앉을 자리를 마련하고, 3곳에 칸막이가 있어서 사공이 이곳에 앉아 노를 젓게 되어 있다. 배 좌우 바깥 측면에는 지그재그형으로 점선이 반복되어 전체에 새겨져 있다. 어두운 녹갈색의 자연 유약이 선체의 양면에 일부 씌워져 있다.

이 배 모양의 토기는 죽은 사람의 영혼을 저승으로 운반하는 신앙의 표현으로, 무덤 속에 묻었던 의식용 그릇의 하나이다.

5∼6세기경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출토지를 알 수 없으나, 고대 선박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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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이(土履) - 보물 556호

신발 모양을 한 길이 23.5㎝, 너비 6.8∼7.2㎝의 토기이다. 삼국시대 무덤에서 발견되는 금속제의 장식용 신발과 같은 성격을 띤 껴묻거리(부장) 토기이지만 형태는 전혀 다르다.

앞쪽은 코가 우뚝 들려있고, 양 옆과 뒤는 수직으로 서 있다. 바닥은 뒷굽 이 없이 편평하며, 뒤쪽 위에는 턱을 만들어 벗겨지지 않도록 하였다. 코 뒤에 작은 구멍이 하나씩 있고 좌우에도 한 짝은 4개, 다른 짝은 5개의 구멍이 나 있어서 끈을 매달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좌우 구멍 위에서 코에 걸쳐 점선으로 한 쪽에는 사선, 다른 한 쪽에는 물고기 뼈와 비슷한 무늬를 얕게 새겼다.

이 신발은 무녕왕릉에서 나온 금속제 신발과 달리, 당시에 실제로 사용했던 신발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출토지가 분명하지 않지만 흙으로 만든 신으로는 상당히 우수한 작품이어서, 고대 껴묻거리 양상을 밝혀준 점에서 중요한 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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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고령출토일괄유물(傳高靈出土一括遺物) - 보물 570호

경상북도 고령지방 고분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는 2종류의 일괄유물이다. 고령지방은 삼국시대에 있어서 대가야국의 근거지였으며, 신라 진흥왕 23년(562) 신라의 침입에 의해 정복되기까지 화려한 가야문화를 꽃피웠던 곳이다. 오늘날 고령읍 지산동을 비롯하여 주변 지역에 가야의 무덤이 많이 모여있다. 이 일괄유물은 당시 가야문화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유품이라 하겠다.

1. 유물 Ⅰ

1)주옥:둥근 남색 유리 구슬로서 구멍이 뚫려 있다.

2)등자:말을 탈 때 사용하던 발걸이이다. 발을 디디는 부분은 둥근고리로 되어 있고, 윗부분이 수직으로 붙어 있는 타원형 발걸이로서 길이 24㎝, 지름 18㎝이다.

3)지:단면이 장방형인 숫돌로서 머리부분에 은관(銀帽)을 장식한 것으로 길이 30㎝이다.

4)검병:검의 손잡이 부분으로 손잡이 끝부분에 용장식을 하였고, 손잡이에 물고기 비늘 모양을 한 것으로 현재 길이 33㎝이다.

5)검구:은으로 되어 있으며 전체적인 형태가 큰 칼과 같다. 칼집 아래쪽 측면에 부착되는 것으로 중앙부분이 고리형을 이루고 있다.

6)검병:은으로 된 손잡이 끝부분에 ‘D’자 모양의 고리가 있고, 그 안 에 3장의 나뭇잎이 있는 고리자루칼(은장삼엽환두대도)로 현재 길이 26㎝이다.

7)검병:은으로 된 손잡이 끝부분에 민고리를 삼각형으로 연결한 고리자루칼(은장삼환두대도)이다.

8)행엽:말 엉덩이 부분이 가죽끈 등에 달아 놓은 장식으로 살구잎 모양을 하며, 그 테두리 안에는 나무가지 모양을 새기고 은못으로 고정시켰다. 길이 10.5㎝, 지름 7.5㎝

9)마탁:납작한 원통형의 말 방울로서, 아래부분은 활과 같이 휘어 진 모양을 한 장식품이다. 높이 약 4.5㎝

2.유물 Ⅱ

1)행엽:테두리 안에 나무가지 모양을 새겼다. 길이 21㎝, 지름 12㎝

2)운주:운주는 끈 위나 끈이 교차되는 지점에 부착하는 장식품으로, 이 운주는 반원형의 중앙에 꽃무늬를 새기고, 주위에 6개의 네모판을 붙인 것이다. 지름10.2㎝

3)운주:중앙에 꽃무늬가 새겨진 반원형의 금동제 운주로 네모판이 4개가 달려 있다. 지름 7.2㎝

4)안구:안장으로서 은으로 된 반원형 판에 구름무늬를 배치하고, 금도금 띠를 가장 자리에 돌린 후 못을 한 줄로 박았다. 중앙에는 가슴걸이를 이어 매기 위한 띠고리가 달려 있다. 길이 18㎝, 지름 6㎝

5)운주 및 병형:반원형 자리의 중앙에 나뭇잎 모양의 몽둥이를 세운, 금도금 한 운주로서 반원형 자리의 지름은 약 2㎝이다.

6)반구형 운주:금도금 운주로 무늬가 없는 반구형판 주위에 네모판이 달렸던 것으로 추측되나 지금은 없다.

7)십이수 운주:금도금 운주로 중앙에 꽃무늬를 새기도, 반원형판 주위에 12개의 네모판을 붙인 것으로 지름 10.5㎝이다.

8)행엽:금도금 돋을 새김 꽃무늬 행엽으로 테두리 안에 3장의 잎사귀를 장식한 무늬가 있으며, 상단 중앙에 장방형이 있는 정사각형 돌기가 있다. 지름 10.2㎝

9) 화문각행엽:금도금 행엽으로 테두리 안에 꽃잎모양이 새 겨져 있고, 지름은 10.2㎝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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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왕릉(首露王陵) - 사적 73호

가락국(금관가야)의 시조이자 김해 김씨의 시조인 수로왕(재위 42∼199)의 무덤으로, 납릉이라고 부른다.

수로왕에 대한 이야기는 『삼국유사』「가락국기」에 전하고 있으나, 무덤이 정확히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무덤의 높이는 5m의 원형 봉토무덤인데, 주위 18,000여 평이 왕릉공원으로 되어 있다. 왕릉 구역 안에는 신위를 모신 숭선전과 안향각·전사청·제기고·납릉정문·숭재·동재·서재·신도비각·홍살문·숭화문 등의 건물들과 신도비·문무인석·마양호석·공적비 등의 석조물들이 있다.

고려 문종대까지는 비교적 능의 보존상태가 좋았으나, 조선 초기에는 많이 황폐했던 듯하다. 『세종실록』을 보면, 수로왕릉과 수로왕비릉에 대해 무덤을 중심으로 사방 30보에 보호구역을 표시하기 위한 돌을 세우고, 다시 세종 28년(1446)에는 사방 100보에 표석을 세워 보호구역을 넓힌 것으로 나타난다. 무덤이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선조 13년(1580) 수로왕의 후손인 허엽이 수로왕비릉과 더불어 크게 정비작업을 마친 후이다.

『지봉유설』기록에 따른다면 능의 구조는 큰 돌방무덤(석실묘)으로 추정된다. 이 기록에는 임진왜란 때 일본인들에 의해 능이 도굴을 당했는데, 당시에 왕이 죽으면 주위에서 함께 생활하던 사람들을 같이 묻는 순장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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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왕비릉(首露王妃陵) - 사적 74호

가야의 시조 수로왕의 왕비무덤이다.

『삼국유사』「가락국기」에 의하면, 왕비는 성이 허, 이름은 황옥으로 알려져 있으며, 원래 인도 아유타의 공주로 16세에 배를 타고 와서 수로왕의 왕비가 되었다고 한다. 9명의 왕자를 낳았는데, 그 중 2명에게 왕비의 성인 허씨 성을 주어 지금도 그 후손이 이어져 오고 있다고 한다.

높이 5m 정도의 원형 봉토무덤으로서, 무덤의 밑부분에 특별한 시설은 없다. 무덤 주위에는 얕은 돌담을 4각형으로 둘러 무덤을 보호하고 있으며, 앞 쪽에는 긴 돌을 사용하여 축대를 쌓았다. 중앙에는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가락국수로왕비 보주태후허씨지릉’이라는 글이 2줄로 새겨져 있다.

무덤에 딸린 부속건물로는 숭보제·외삼문·내삼문·홍살문이 있으며, 보통 평지에 있는 무덤과는 다르게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무덤 앞에는 인도에서 가져왔다고 전하는 파사석탁의 석재가 남아 있다. 세종 28년(1446)에 수로왕릉과 함께 보호구역이 넓혀졌으며, 임진왜란 때 도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의 비석과 상석 등은 인조 25년(1641)에 다시 정비하면서 설치하였다고 한다.

왕릉에 비해서는 시설이 소박한 편이고 수로왕비릉이라고 오래전부터 전해져 왔으므로 수로왕릉과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본다면, 내부의 구조는 널무덤(토광묘) 또는 돌덧널무덤(석곽묘)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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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구산동고분군(金海龜山洞古墳群) - 사적 75호

김해시 동북쪽에 있는 분산 서남쪽 기슭에 있는 무덤들으로, 수로왕비릉에서 동북쪽으로 100∼500m 정도 떨어져 있다.

현재 2기의 무덤이 남아 있는데 1기는 규모가 매우 크고, 다른 1기는 절반정도 남아 있는 상태이다. 무덤의 안은 관을 넣는 방(현실)을 만들고 그 위를 흙으로 쌓아 둥글게 무덤의 형태를 만든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이다. 현재 2기만이 확인되고 있지만, 원래는 더 많은 무덤들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발견된 유물만으로는 무덤의 정확한 성격을 파악할 수 없으나, 무덤의 구조로 보아 김해지방에서는 시대가 가장 늦은 무덤 중 하나로 생각된다.

낙동강 하류지역에서는 많지 않은 굴식돌방무덤이면서 가야의 중심지였던 김해시내에 있어, 이 지역의 무덤을 연구하고 가야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는 무덤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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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지산동고분군(高靈池山洞古墳群)

고령은 대가야의 옛 지역으로서 현재 무덤이 수백 기에 이르고 있다. 그 중 지산동 무덤들은 겉모습이 확실하고 봉분이 비교적 큰 무덤에 한하여 번호를 매겨 지금은 72호 무덤까지 정해져 있다.

이들 무덤의 겉모양들은 모두 원형의 봉토를 하고 있고, 봉토의 규모에 따라서 대형·중형·소형무덤으로 구분한다. 봉토는 흙을 높이 쌓아서 무덤의 형태를 만드는 것을 말한다.

주로 대형무덤은 산등성이의 위쪽에 많이 있으며 중형무덤은 산등성이의 중간 정도에 모여 있고, 작은무덤들은 대형무덤과 중형무덤 주위나 그 밑에서 발견이 된다.

내부구조는 돌널무덤(석상묘) 돌덧널무덤(석곽묘), 돌방무덤(석실묘) 등 여러 형태가 나타나는데, 돌널무덤의 경우 청동기시대 돌널무덤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한 봉분 안에 여러 무덤이 나타나는 것은 가족무덤의 성격이라기 보다 딸려묻기(순장)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대형무덤에서 많은 양의 토기와 함께 금동관·갑옷 및 투구·칼 및 꾸미개 종류가 출토되고 있으며, 4∼6세기 정도에 만들어진 대가야 지배계층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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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도항리고분군(咸安道項里古墳群) - 사적 84호

삼한시대에 함안을 중심으로 한 변진의 안야국이 있던 이 일대는 낮은 평야가 펼쳐져 있는데, 그 뒤의 높은 지대로부터 남쪽과 동쪽으로 낮은 산등성이가 여러 갈래로 부채살같이 퍼져 있다. 그리고 낮은 산등성이에 동쪽으로부터 차례로 말산리·산음리·가야리에, 5∼6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지는 큰 무덤들이 산등성이를 따라 나란히 위치하고 있다.

1917년 일본인이 처음으로 조사한 뒤에 1992∼1994년까지 창원 문화재연구소가 3차례에 걸쳐 발굴조사를 하였다. 그 결과 다양한 내부구조를 하고 있는 113여 기의 무덤 안에서 많은 양의 각종 토기·철기·장신구와 사람의 뼈가 발견되었다.

발굴된 무덤의 내부구조는 덧널무덤(목곽묘)이 대부분인데, 덧널무덤의 중심연대는 4세기 중엽에서 5세기 후반까지로 추측할 수 있다. 무덤의 규모와 내부구조, 발견된 유물의 차이에 의해서 소형무덤과 대형무덤으로 나누어진다.

이들 무덤은 소형무덤이 먼저 만들어지다가 이후에 큰 규모의 대형무덤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함안을 중심으로 한 작은 가야국에서 보다 넓은 지역을 지배하는 아라가야 단계로 발전하였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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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말산리고분군(咸安末山里古墳群) - 사적 85호

함안지역은 삼한시대에 아라가야가 있던 곳으로 이 지역에 있는 무덤들은 5∼6세기경에 만들어졌다.

도항리고분군(사적 제84호)과는 같은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행정구역상으로 도항리고분군과 말산리고분군으로 나누어진다. 그러나 대부분은 도항리고분군에 속하며, 이 고분군에 속하는 무덤은 1·4·9·10호의 4기 밖에 되지 않는다.

이 가운데 높이 9.7m, 지름 39.39m의 4호무덤은 가야읍 아라공원 안에 있는 무덤 가운데 가장 큰 무덤으로 1917년에 발굴조사되었다. 내부구조는 장방형의 반지하식 돌방을 가진 구덩식돌방무덤(수혈식석실묘)이다.

발견된 유물 가운데 수레바퀴 모양의 토기와 새모양 토기·말띠드리개가 특징적이며, 그밖에도 각종 토기류와 철제무기, 말장식류, 사람의 뼈 등이 발견되어 이 시대에 함안지역 문화를 밝혀줄 중요한 유적지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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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성산동고분군(星州星山洞古墳群)

경상북도 성주군 성산일대에 있는 삼국시대 무덤들이다. 성산의 정상에는 성산산성이 있고, 그 주변에 70여기의 가야 무덤들이 분포하고 있다.

1호 무덤은 높이 3.6m, 지름 13.6m로 내부구조는 앞트기식돌방무덤(횡구식석실묘)으로 보인다. 돌방(석실)에서는 은제관장식과 고리자루큰칼(환두대도), 각종 토기류가 발견되었다. 2호 무덤은 구덩식돌방무덤(수혈식석실묘)으로 창·도끼·손칼을 비롯하여 많은 수의 토기가 발견되었다.

58호 무덤 굴방에서는 금제굵은고리귀고리(금제태환이식), 은제팔찌, 금동제말장식(행엽)이 발견되었다. 각 무덤에서 발견되는 굽다리접시(고배)의 굽에 생긴 구멍(투창)이나 1호 무덤에서 출토된 관장식이 경주지역의 것과 유사성을 보인다. 또한 58호 무덤의 유물은 전형적인 신라제품으로 5∼6세기경 성산가야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유물들은 성산가야가 신라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고, 당시 신라와 적대관계였던 인접한 대가야와는 문화적으로 교류가 없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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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

고령고아동벽화고분(高靈古衙洞壁畵古墳) - 사적 165호 경북 고령군
김해예안리고분군(金海禮安里古墳郡) - 사적 261호 경남 김해시
동래복천동고분군(東萊福泉洞古墳群) - 사적 273호 부산 동래구
김해구지봉(金海龜旨峰) - 사적 429호

신비의 왕국 가야의 불교는 신화인가 역사인가

〈4〉김해 초선대와 파사석탑


가야(伽倻). 낙동강 유역을 근거지로 기원전후부터 562년까지 존재했던 고대국가. 1세기 무렵 12부족이 6가야로 편성되었고 제법 발달된 철기문화를 통해 한반도 동남부를 지배했던 연맹체. 초대 왕은 붉은 보자기에 싸여 하늘로부터 내려온 금합 안의 황금알에서 태어난 수로왕(首露王). 이때가 서기 42년. 그는 6년 뒤 멀리 불교국가인 인도 아유타국으로부터 허황옥(許黃玉)을 왕비로 맞이하였고, 서기 199년 158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이 이국의 신부와 함께 신화와 역사의 경계를 넘나든 인물. 신비의 왕국 가야의 역사는 우리 고대사에 있어서 가장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 중 하나다.


‘신비의 왕국’ 가야의 불교는 신화인가 역사인가

 장유화상 발자취 지역사찰 곳곳에 남아

 불상과 석탑에는 인도양식 특징 나타나

<사진> 초선대 마애불. 상호에서 인도 귀족의 모습이 보여 가야불교의 증거라고 전한다.

600년을 유지한 나라의 역사가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나오는 고작 몇 줄이 전부이고, 그밖에 일본의 역사서에 단편적인 기록들이 전할 뿐이다. 그래서 가야의 역사는 온통 수수께끼 투성이다. 근래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철기를 사용한 선진문화의 실체가 조금씩 밝혀지고는 있어도 역사의 대부분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주류 사학계의 연구가 실체가 불분명한 가야사의 정형화에는 기여했으나, 고대사에서 필요한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데는 오히려 독이 되었던 것도 분명해 보인다.

반면에 이른바 재야사학 쪽의 시각은 훨씬 스케일이 크다. 단순 연맹체 정도가 아니라 1세기에 멀리 인도와도 독자적 교통을 할 정도로 강대한 해상국가였으며, 가야 출신의 천황(10대 숭신천왕)이 나올 정도로 일본에 직접적 영향력을 주었던 초강대국이었다는 주장이다. 여기에는 한국 고대사를 주름잡았던 잊혀진 고대왕국에 대한 짙은 향수가 느껴진다.

가야의 역사와 불교를 신화가 아닌 사실로 인정하고 연구함으로써 이 분야에 독특한 발자취를 남긴 사람이 있었다. 바로 이종기(李鍾琦, 1995년 작고)다. 신문언론인이자 아동문학가인 그는 가야의 고토를 모두 답사한 것은 물론이고 왕비 허황옥의 출신지인 아유타국으로 비정되는 갠지스강 중류에 있는 고대 인도의 아요디야국까지 찾아가 그곳에서 가야와의 연관성을 추적한 뒤 1975년에 <가락국탐사>라는 책을 펴냈다. 순전히 아마추어의 입장에서 연구한 것이지만 그 책은 국내 사학계가 관심을 갖지 않던 부분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위업’이라 할만 했다. 어느 분야에서든 열정에 넘치는 아마추어가 매너리즘에 빠진 프로를 능가하는 경우는 종종 있다.

가야사에 관해서는 불교사학계도 논의의 당사자다. 수로왕이 허황옥을 신부로 맞이할 때 인도의 불교가 함께 들어왔다는 것이 가야불교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뱃길을 통해 허황옥과 함께 온 오빠 장유(長遊)는 인도의 고승으로서 그로 인해 가야는 우리나라 최초의 불교국가가 되었다고 한다. 사실 ‘가야’라는 말 자체에 불교의 색채가 가득 묻어있다. 주지하다시피 석가모니가 성도한 곳이 바로 부다가야 아닌가.

가야불교에 대한 의문은 내게서 늘 떠나지 않았다. 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년에 중국 전진(前秦)에서 순도를 통해 불교가 처음 전래되었다는 것이 정설이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의심 없이 그렇게 알고 있다. 하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수로왕과 혼인하기 위해 인도에서 건너온 허황옥 일행이 파사석탑을 들여오고, 또 그의 오빠인 장유는 가야 영토 곳곳에 사찰을 창건했으니 결국 정황상 불교가 들어왔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는가. 이렇게 되면 교과서에 나오는 불교도입시기와는 무려 300년의 차이가 생긴다. 그렇지만 가야불교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사진> 초선대 마애불 앞 불족적. 왼쪽 발자국으로, 인도 부다가야에 있는 오른쪽 발자국과 한쌍이라고 전한다.

“가야에 불교가 도입된 것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수로왕이 허황후를 아내로 맞아 나라를 다스린 지 150여 년이나 되었지만 당시 아직 절을 세우고 불교를 믿는 일이 없었다…제8대 질지왕 2년(452)에야 비로소 왕후사(王后寺)를 세웠다’는 기록으로 보아 452년 이후일 것이다. 허황후가 인도에서 왔다는 것도 믿을 수 없다. 가야인들이 수만 리나 떨어진 인도를 알고 있었을 리 만무하니까. 그들은 불교가 전래된 후에야 비로소 불교의 성지인 인도의 존재를 인식하게 됐을 것이다. 따라서 허황후의 인도 출신설은 조작 내지 윤색된 것이다.”

여기에 많은 역사학자들이 동조하고 있다. 하지만 김해를 중심으로 한 옛 가야의 영토에 자리 잡은 사찰들에서는 예외 없이 허황후 이야기가 전한다. 나는 그런 사실에 도통 마음이 편치 않았고, 여러 의문점들이 떠올랐다. 이 지역 일대의 거의 모든 사찰에서 가야 창건설이 주장되고 있는 것을 어떻게 전설이라고만 할 것인가? 설령 그렇다고 해도 전설은 아무 이유 없이 만들어졌겠는가? 인도에서 가야까지 8000㎞도 넘는 먼 바닷길이라지만 왜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길이라고만 생각하는가?

내가 가야사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가락국탐사>를 읽고부터였다. 고등학교 시절, 동네 서점에서 이 책을 우연히 손에 잡은 나는 신화와 현실을 넘나드는 가야의 역사에 매료되었다. 전공을 사학으로 정한 것도 이 책의 영향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대학엔 마침 김해에서 올라온 친구가 있었다. 이 친구와 나는 학교 근처의 허름한 라면집에서 막걸리와 소주를 가운데 두고 역사 토론을 벌이느라 야간통금에 걸리기 일쑤였다.

평소에도 알아듣기 힘들던 그의 김해 사투리는 빈 병이 늘어감에 따라 해독불능의 수준이 되곤 했지만…. 김수로왕과 허황후를 각각 시조로 하는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 끼리는 통혼하지 않는다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으나, 김해 김씨에게는 몽고반점 비슷한 남다른 신체적 특징이 있어서 자기들끼리는 서로 확인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그에게서 처음 들었다. 대학생활이후 처음 맞은 여름방학이 되자마자 나는 이 친구의 김해 집으로 내려가 함께 김해 일대의 가야유적을 쏘다녔는데 이것은 가장 소중한 추억 중의 하나다.

가야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알려진 사찰의 범위는 꽤 넓다. 내가 다녀본 바로는 김해를 중심으로 동쪽으로 합천 해인사, 서쪽으로 하동 쌍계사, 그리고 북쪽으로 청도 대운암에 이르기까지 가야불교의 시조 장유화상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나는 가야의 영토 범위가 어디까지인가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가야 때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 사찰들의 분포가 곧 가야의 영토일 테니까.

공간적 범위를 김해 지방에만 한정해 보더라도 몇 가지 유물도 전한다. 대표적인 게 파사석탑(婆娑石塔)이다. 수로왕비릉 옆에 있는 이 석탑은 허황옥이 가야로 시집 올 때 배에 싣고 왔다고 전한다. 붉은 빛이 도는 희미한 무늬가 표면에 남아 있는 등 우리나라에서 나는 석질이 아니라서 수만 리를 건너온 이력을 짐작케 한다.

금선사 옆에 있는 초선대(招仙臺)의 마애불상 역시 가야불교의 대표적 상징 중 하나다. 5m 크기의 바위에 새겨진 이 불상을 대부분 고려시대 것으로 본다. 하지만 가야불교를 믿는 쪽에서는 1세기 작품이라고 확신한다.

<사진> 파사석탑. 허황후가 인도에서 배를 타고 올 때 가져왔다고 전한다.

그 근거로 상호가 전형적인 인도인의 모습을 닮았고, 가사 자락에 새겨진 국화꽃 형태가 인도불상에서 보이는 특징이라는 것이다. 이 불상 바로 앞에는 불족적 하나가 새겨져 있는데 이 역시 가야불교의 증거로 거론된다.

한파가 몰아치던 1월 중순, 거의 30년 만에 초선대 마애불상 앞에 다시 섰다. 그 동안의 연륜 때문일까, 그때와 지금 보는 감흥이 사뭇 다르다. 함께 간 불교조각가 친구가 보자마자 외친다. “각(刻)이 달라! 이건 가야만의 조각일 수밖에 없어!” 그의 말마따나 귀에는 인도 귀족이 흔히 차던 가락지 같은 귀고리가 걸려 있는 듯 보이기도 한다.

가야에 불교가 전파된 것을 1세기로 보아 우리나라 불교의 도입을 300년 이상 끌어올릴 수 있을 지, 혹은 과장된 설화에 불과한 것인지 당장 결론지을 수는 없다. 하지만 역사란 문헌에만 의지한다고 해서 모두 다 풀려지지는 않는다. 기록이 모든 것을 다 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현상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신화와 전설을 포함하여 실제로 전해지고 있는 현상, 그리고 우리가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유물과 유적. 이런 것을 무시하고 문자만 따질 때 핵심을 놓치게 된다. 가야사도 바로 그런 경우일 수 있다.

신대현 / 논설위원사찰문화연구원

[불교신문 2397호/ 1월30일자]

2008-01-26 오전 11:33:19 / 송고
이영식교수의 이야기 가야사 여행 <4> 동전 한 닢이 말하는 해상왕국
황해도 일본서도 출토된 화천은 중계무역 증거
여섯빛깔 문화이야기

 
  김해 회현동패총전시관.
회현동패총

2006년 10월 10일 김해시내 회현동에 패총단면전시관이 오픈되었습니다. 9m 깊이의 조개더미를 수직으로 잘라 넓은 정면과 좌우 짧은 단면의 3개 면을 노출시켜 가야인의 쓰레기장을 박력 있고 생동감 있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1907년 일본인 이마니시가 발견한 지 꼭 100년 만의 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발견된 초기 철기시대의 대표유적입니다. 여러분들이 국사 시간에 열심히 외우셨던 바로 그 유적입니다. 회현리패총으로 기억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지금의 행정구역명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수로왕릉 남쪽의 봉황대에서 동쪽으로 뻗어 내린 낮고 길쭉한 언덕으로, 가야인들이 먹고 버린 조개껍질들이 생활쓰레기와 함께 쌓여 생긴 유적입니다. 지금 쓰레기장이라면 환경문제의 하나로 골치 거리가 됩니다만, 회현동패총은 가야사를 되살릴 수 있는 보고입니다.

발굴조사

1920년 우메하라와 하마다, 1934년 카야모토와 같은 일본인들이 발굴하였고, 1992년부터 2005년까지 간헐적으로 부산대박물관과 경남고고학연구소 등이 발굴조사를 했습니다. 수많은 조개껍질과 가야토기의 파편들, 그리고 생활도구들이 출토되었고, 화천·세형동검·탄화미처럼 가락국(금관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되살릴 수 있는 것들도 확인되었습니다. 탄화미는 2000년 전 건국기의 가락국에서 성숙한 쌀농사가 행해졌음을 보여줍니다. 세형동검(細形銅劍)은 한민족 청동기문화의 대표 유물로 가야에 대한 고대일본의 지배나 간섭을 말하던 일본학계의 잘못된 주장을 일축할 수 있는 증거 자료가 됩니다.

동전 한 닢

 
  낙랑 화천
화천(貨泉)은 서기 9년 신(新)을 세운 왕망(王莽)이 찍은 돈으로 엽전처럼 생겼습니다. 가운데에 네모난 구멍이 있고, 그 오른쪽에 화(貨), 왼쪽에 천(泉)이라 새겼습니다. 물론 왕망전으로도 불리는 화천은 한 잎의 동전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전혀 새롭고 너무나도 중요한 가야왕국 발전의 비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화천은 평양과 황해도, 바다 건너 일본열도의 큐슈에서 오사카까지에도 점점이 출토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에서 찍은 화폐가 한반도 남단의 김해에서 출토되는 것도 신기한데, 서북한 지역과 일본열도에서 함께 출토되고 있다는 점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해상왕국

 
  해남 화천
화천이 주조된 약 200년 후의 기록이지만 '삼국지' 왜인전은 황해도의 대방군에서 일본열도의 왜국들에 이르는 바닷길을 전하고 있습니다. 황해도에서 서해안을 따라 남하하다 남해에 들어서서 동으로 방향을 바꿔 김해에 도착하고, 1000리(70㎞)의 바다를 건너 쓰시마, 다시 천리를 건너 이키, 다시 천리를 건너 큐슈 북부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바닷길은 기원전후에서 3세기 후반까지 고대 동아시아 세계를 연결하는 중요한 무역로였습니다. 김해의 가락국은 중국과 일본열도를 연결하는 중개무역항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현대의 동아시아에는 싱가포르 홍콩 상하이 나가사키 부산 등이 중개무역항으로서 유명합니다만, 고대에는 가락국이 거의 유일무이한 중개무역항이었습니다. 서북한지역과 일본열도, 그리고 회현동패총에서 출토되었던 화천은 이러한 바닷길을 통한 인간과 물자의 왕래를 증명해 주는 증거입니다. '삼국지'에 따르면 황해도에서 일본열도를 왕래하는 기간은 대개 2년 내지 2년 반이 걸렸습니다. 반면에 화천은 불과 10년 밖에 통용되지 않았습니다. 불과 10년 밖에 사용되지 않았던 화폐가 2년 내지 2년 반이나 걸렸던 바닷길에 점점이 출토되고 있다는 것은 이 바닷길을 통한 무역과 왕래가 얼마나 빈번했던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일본 화천
중국의 선진 문물과 일본열도의 원자재가 김해의 가락국에서 교환되었고, 가락국에 모여진 가야 여러 나라들의 물품이 중국과 일본에 수출되기도 하였습니다. 가락국과 함께 남해안에 위치한 전기 가야의 나라들이 일찌감치 고대왕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경제적 바탕이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원전후에서 3세기경에 이르는 가락국을 해상왕국이라 부르는 데 주저할 필요가 없습니다.

인제대 역사고고학과 교수·박물관장

  입력: 2007.02.15 20:16 / 수정: 2007.02.15 오후 8:5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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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가락을 찾아라!
  • 글쓴이: 최두환  2007.11.15

    조선의 력사 가운데서 신비한 것이 참으로 많다. 그런 신비한 력사 가운데서 "가야"만큼 아리송한 것도 없을 것이다. 현재 경상도, 특히 김해 지방에서 유물이 나오기만 하면 거의 "가야"유물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가야에는 김수로가 건국했다는 "금관가야"에서부터 "대가야·소가야·고녕가야·아라가야·성산가야·비화가야"가 그것이다. 이런 가야의 이름에도 비슷한 소리의 글자가 많다. 이것은 나중에 인도로 지역이 이동되면서 새로운 위치를 갖게 되었을 것이다.

    金官伽倻: 駕洛·南+伽倻·伽耶·加耶
    大伽倻: 高靈·大+加耶·加羅. 伴跛
    小伽倻: 固城+固城. 久差·古嵯·
    古寧伽倻: 咸昌+伽倻·伽耶·加耶
    阿羅伽倻: 咸安·安羅·阿尸良·呵耶+伽倻·伽耶·加耶
    星山伽倻: 星州·碧珍+伽倻·伽耶
    非火伽倻: 昌寧·比自 

    이렇게 많은 가야에서 그것이 정작 어디라고 말하기에는 마땅찮기도 하다.
    그런데 "가야"니, "가락"이니 하는 것에는 뭔가 공통적인 것이 보인다. 이들을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1) 加耶[三國史記]
    伽耶[三國史記/三國遺事]
    伽倻[高麗史/東國輿地勝覽]
    (2) 加羅[廣開土王碑/南齊書/日本書紀]
    伽羅[梁書倭傳]
    迦羅[隋書/北史]
     羅[三國遺事]
    柯羅[日本書紀]
    (3) 狗邪[三國志魏書東夷]
    拘邪
    (4) 加良[三國史記]
    駕洛[三國史記/三國遺事]
    駕落[三國史記]

    위의 글들은 우리들이 통상 "가야/가락"으로 두 가지의 형태를 부르는 말인데, 한자로는 4가지 부류로 구분했지만, 각각 다른 글자들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모두 하나의 소리를 다르게 썼을 뿐인데, 어떤 의미가 있으며,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지 보자.

    위의 (1)은 그 소리가 그대로 [가야][gaya], (2)는 [가라][gara], (3)은 [구사][kusa][쿠추][kuchu], (4)는 [가라][쟈로][zalo]이다.
    결국 이들은 [gaya][gara][kuchu][zalo]의 4가지로 줄어지며, 앞의 [gaya]는 가야[Gaya] 또는 부다가야[Buddha Gaya]로서 현재 인도의 동북부 지방이다.
    두 번째 [gara]는 [goro]로도 모음변화가 가능하며, [ghore]로도 쓰여 아프가니스탄 고르[Ghore: 북위 34도 동경 65도]로 보인다.
    세 번째 [kusa]는 [kush]로, [kash]로 변형이 가능하며, 이곳은 카슈[Khash][북위 30도 동경 63도
    ]일 것이다.
    네 번째 [zalo]는 [lo]가 [벌/불/부루]와도 같은 변화로 보면, [zambul][잠불]로도 볼 수 있다. 이곳은 고르 동남쪽에 있다.
    이렇게 가야/가락국 지역을 중앙아시아로 보는 까닭은 결코 한반도 경상도의 그 김해 중심의 가야니, 가락국이라는 것이 옳은 설명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 곳의 이름을 한반도에서는 하나로 얼버무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지『신증 동국여지승람』(권32 김해도호부)에 나오는 설명부터 알아보고 넘어가자.

    (5) 성곽: 정몽주의 기문에, …그리하여 당시에 왜적을 방어하던 자취를 대개 볼 수 있었다. 지난적에 글안(契丹)·금(金)나라·원(元)나라와 국경을 린접한 敵이며, 몇 해나 항전하였으나, 옛 강토를 잃지 않고 지금에 이르렀음에도, 어찌 우연한 일이리요. 지금 국가에서 20여 년이나 군사를 움직이고 있으니, 성과 못은 곳마다 퇴폐하여 태평성대와 다름이 없다. … 내 장차 옛 가야 터를 찾으려는 바, 새 성 위에서 술잔을 들며 박위(朴 ) 후(侯)의 정적(政敵)에 성공이 있음을 축하하리라.

    여기서 잘 보자! 경상도 김해 가야가 어디인데, 그 국경이 되는 쪽의 위치에 "글안(契丹)·금(金)나라·원(元)나라"가 있다는 건가? 참으로 얼토당토 않다. 그것이 한반도라면 말이다.
    이 "가야 김해"를 중앙아시아 "고르(Ghore)"로 보자. 그러면 위의 김해성각의 기록이 어떻게 풀어지는가를 말이다.
    지금까지 글안이라는 서북쪽의 키타이, 알타이가 중심이된 금[金]나라, 우랄·알타이 바로 그 지역에 말갈이 있었고, 그 말갈의 다른 이름의 몽고라는 원이 있었다고 보면 모두가 풀어질 것이다.
    또 그 김해도호부에 있는 지명을 보자.

    (6) 신교천(薪橋川): 김해부 서북쪽 30리에 있다. 물의 근원이 창원부 렴산(簾山)에서 나오며, 동북쪽으로 흘러 락송지(落松池)에 합치고, 북쪽으로 흘러 해양강(海陽江)에 들어간다.

    이 설명에서 렴산은 바로 내가 살았던 고향 뒷산이름이며, 그 이웃 동네의 진산인데, 우리들은 그저 "구룡산(九龍山)"이란 이름으로 통하며, 신라 배극렴(裵克簾)의 이름을 따서 붙인 이름이라고도 전해온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여기에는 "강"이 없다. 물론 "낙동강"줄기라는 개구리 몇 마리, 송사시 몇 마리는 살 수 있는 실개천은 있다. 그러니 더더욱 "해양강"이란 거창한 이름의 강은 전혀 없다.
    이런 지형 설명은 어디인지 도저히 알 수 없다. 그런데 이 "해양강"은 밀양부(密陽府) 룡진(龍津) 하류의 강이라고 하는데, 한반도 경상도 밀양군, 지금은 밀양시에는 이런 강은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밀양"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그 발음이 [미량]인데, 본디 "推火郡"[추화군]이었으니, 이것은 "밀불>미르벌>미라벌"로도 된다. 이 지명의 소리는 아프가니스탄의 고르(Ghore)의 남쪽에 있는 카슈(Khash)의 남쪽 헬만드 강가에 "Mirabad"(미라바드)가 있다. 바로 이곳이 그 "밀양"일 것이며, "海陽江"이란 이름이 혹시 그 "Helmand"일 가능성이 더 높다.
    그러게 해서 다음의 기록에서 어렴풋이나마 정말 그렇겠구나 하는 말이 나올 것이다.

    (7) (김해부의) 서남쪽으로 큰 바다가 있고 세 갈래의 물이 빙 둘렀다.[西南際大海, 三叉經帶]

    이 지형 설명은 현재 한반도 김해의 먼 남쪽에 바다는 있을지언정, 서남쪽엔 바다가 없다. 이 "大海"라는 말은 아마도 헬만드(helmand)호일 것이다. 거기에는 북쪽의 하리 강(Hari Rud), 남쪽의 헬만드 강(Helmand Rud), 그 중간의 샛강 파라 강(Farrah Rud)이 너무도 어울린다. 지도에서 한번 감상이나 해보면 좋을 것이다.
    그래서 그『신증 동국여지승람』에 설명된 황산강(黃山江)을 읊은 강혼(姜渾)의 시 한 수를 감상도 적절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8) 김해부에 배를 대고 [泊舟金海府]
    문득 진양산을 바라보니 [却望晉陽山]
    넓고 넓은 구름 하늘이 멀고 [納納雲天遠]
    아득히 물이 질펀한 나라는 넓어[茫茫水國寬]
    강과 호수에 이 밤이 흥겨워라.[江湖今夜興]

    김해에서 진양산(晉陽山)을 바라본다니 우습다. 그 진양산이 중앙아시아에서도 어딘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한반도 김해 근처에서는 없다.
    그리고 물이 질펀한 나라[水國]이니, 강과 호수[江湖]는 바로 헬만드 호가 안성마춤이다. 게다가 그곳의 흐르는 강을 보며, 이것은『신증 동국여지승람』의 김해부 형승을 설명한 것을 쏙 빼 닮았다.

    http://cafe.daum.net/chosun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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