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세 수인천황(活目入彦五十狹茅)                

서기 수인기 3 3월조에 『신라왕자(아시라 가야) 천일창이 내귀하였다. 가지고 온 물건은 우태옥(=엽세주) 1, 족고옥 1, 제녹녹의 적석옥(赤石玉) 1, 출석의 소도 1, 출석의 창 1, 일경 1, 웅신리(熊神籬) 1구 등 모두 일곱 가지였다. 그것을 다지마[但馬]국에 간수해두고 항상 신물로 여겼다』

이설에서 『처음 천일창이 배를 타고 파마국에 정박하여 육속읍에 있을 때 천황이 三輪君의 선조 大友主와 倭直의 조 張尾市를 파마에 보내 천일창에게 "그대는 누구이며 어느 나라 사람인가"하고 물었다. 천일창이 대답하기를 "나는 신라국주의 아들이다. 그런데 일본국에 성황이 계신다는 말을 듣고 나라를 아우 知古에게 주고 귀화했습니다"라고 했다. 그리고는 바친 물건이 엽세주, 족고주, 제녹녹적석옥, 출석도자, 출석창, 일경, 웅신리, 담협천대도 전부 여덟 가지였다. 천황은 천일창에 조하여 "하리마국의 육속읍과 담로도의 출천읍을 줄 테니 그대 마음대로 살아라"라고 했다...(중략)...천일창은 토도하를 거슬러 올라가 북쪽의 근강국 오명읍에 들어가 잠시 살다가 다시 근강에서 약협국을 거쳐 서쪽의 단마국에 이르러 살 곳으로 정했다. 그래서 근강국 경촌곡의 도인(陶人)은 천일창을 따라온 사람들인 것이다. 그리하여 천일창은 단마국의 출도인 태이의 딸 마다오를 취하여 단마제조를 낳았다. 제조는 단마일유저를 낳고 일유저는 청언을 낳고 청언은 전도간수를 낳았다』  
  
지금 이 기사는 가야본토에서도 쫓기고 구주에서도 패하여 본주로 도망을 가서 재기를 도모하는 응신을 묘사한 기사다. 천일창의 대도 이름 이사사[膽狹淺]는 응신의 별칭 이사사별신의 이사사[去來紗]와 같아 천일창이 곧 응신이며 수인천황은 그와 동시대 인물이라는 뜻이다. 수인기 2년 시세조에 아라사등의 황우설화가 나오는 것도 그 설화에서 황우를 잡아먹은 '郡公'이 바로 수인천황임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수인천황이 귀수대왕(근구수)이기 때문이다.  

서기 수인기 26 8월조에 물부십천근대련에게 출운국에 가서 신보를 조사하라고 하는데 신보를 조사한다는 것은 출운국을 빼앗기 위해 공격을 한다는 뜻이다. 물부십천근의 '十千'은 뜻으로 ''과 같고 숭준전기에 등장하는 포조부만의 이름 ''같아 침류왕의 분식이칭이다. 침류에게 군사를 주어 가야계와 무내숙니의 연고지인 출운국을 공격하라고 명할 수 있는 인물은 귀수대왕밖에 없다.  

수인기 39 10월조에 『오십경부명(五十瓊敷命)은 모정의 토지천상궁에 가서 칼 천 자루를 만들었다. 따라서 그 칼을 천상부(川上部)라 한다. 다른 이름은 라반(裸伴)이라 한다. 석상신궁에 거두고 이후 오십경부명에 명하여 석상신궁의 신보를 주관하게 하였다』       

오십경부는 숭신천황의 화풍시호에 들어 있는 '오십경식(五十瓊殖)'과 같은 의미로서 숭신(=응신/천일창)과 동일인물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천일창에게 석상신궁의 신보를 관리하게 했다는 것은 그 신보들이 왕권을 상징하는 물건들이므로 결과적으로 백제가 가야에 져서 열도를 당분간은 장악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가야의 대화왕조를 거쳐야 열도가 백제땅이 된다는 뜻이다. 많은 칼을 신궁에 바쳤다는 것은 칼을 받은 신궁측(=백제)에서 크게 졌다는 것을 우회표현한 것이다. 근강전투의 결과를 암시하고 있다. 석상신궁은 초고대왕이 진좌한 궁이다.    

이 천황의 황후는 사호히메[狹穗姬]인데 가야계 지명 사호[佐保/沙本]와 같아 가야인을 꾸민 인물인데 서기 신대기 하9단에서 천손 니니끼와 결혼하는 목화개야희(木花開耶姬)다.            

고사기 수인기에 "沙本毘古王의 반역"조에 천황이 잠을 자다가 깨어나 황후에게 「사호 쪽에서 폭우가 쏟아져 순식간에 얼굴이 젖고 작은 비단색 뱀이 내 목을 감고 있었다. 이게 무슨 뜻일까?」라고 묻고 있는데 사호히꼬[沙本毘古]왕은 황후 사호히메의 오빠다. 같은 기사가 서기 수인기 5 10월조에도 실려 있다.

'
사호'는 가야계 지명인데 원래는 사히시라기[沙比新羅]에서 나온 이름이고 사히시라기[新羅]는 가나가라[金加羅]이며 가나가라[任那加羅]인 것이다. 폭우가 쏟아졌다는 것은 근강전투에서의 가야군의 기습수공을 상징한 것이며 비단색 뱀도 가야계를 상징한 것이다. 가야의 수공기습을 당한 인물은 귀수대왕이므로 수인천황이 귀수대왕임을 알려주는 기사인 것이다.                      

수인기 23 10월조에는 예진별황자가 나이 30이 되도록 말을 못하다가 고니를 보고 말문이 트이자 천탕하판거를 시켜 고니를 잡아오도록 하는데 출운국 또는 다지마[但馬]국에서 잡았다고 하였고 예진별황자가 이 고니와 같이 놀면서 말을 배웠다고 나온다. 이것은 경행기에서 동국정토 도중 전사하여 그 혼령이 백조가 되었다던 일본무존을 여기서는 고니[]로 표현한 것이다. 예진별황자는 응신의 형이고 천탕하판거는 鳥取造의 조라 하였는데 침류왕의 이칭이다. 숭준전기에 등장하는 침류왕의 이칭 포조부만의 도도리베[捕鳥部]와 도도리베[鳥取部]는 같은 성씨다.    

이 이야기는 귀수대왕의 숙원인 열도편입이, 대화왕조를 거쳐 동성대왕이 통합왕국을 이루면 그 다음으로 침류왕의 후손인 무령왕이 통합왕국을 물려받음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을 압축하여 비유한 것이다. 대화왕조는 출운 또는 다지마라는 가야계 지명으로 대표시키고 동성대왕은 그 증조부인 예진별명을 내세우고 무령왕은 그 선조인 천탕하판거(=침류왕)를 내세워 은유적인 설화를 꾸민 것이다.      

고니를 잡은 것이 열도병합이라는 백제왕실의 숙원이 이루어졌다는 것이고, 그것을 잡은 것은 무령왕이고 가야왕족 동성대왕이 대통합왕국을 이루어 물려준 것을 예진별황자가 고니와 놀면서 말을 배웠다고 비유한 것이다. 가야왕실로서 백제왕실에 대해 비로소 면목이 섰다는 뜻이다.              

화풍시호에 들어 있는 '活目入彦'은 가야군의 불의의 기습수공으로 익사하여 "눈을 뜬 채로 별이 되었다"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하고 이사지[五十狹茅]라는 키워드는 신공전기에 향판왕(=초고대왕)과 인웅왕(=귀수대왕)이 반역을 했다고 꾸민 이야기에 인웅왕측 장군이름 이사지..스꾸네[五十狹茅宿니]로 다시 등장하는데 역시 귀수대왕이다.              

한풍시호 수인의 '어질 仁'자는 王仁과의 연결고리이기도 하고 뜻을 보면 '열매씨'라는 의미도 있다. '드리울 垂'자는 위에서 밑으로 늘어뜨리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분위기상 '' '잠잘 睡'와 비슷한 느낌을 주고 있다. 즉 「비파호에 어질게 잠들어 있다」는 뜻으로 보인다. 또 성덕태자나 왕인박사로 꾸민 것과 연결해 보면 참으로 점잖고 어진 분위기도 풍기고 있다.  

'
열매씨 仁'자로 보면 백제에서 처음에는 침류계로 계승이 되다가 무내계로 계승이 되기도 하지만 결국은 귀수대왕의 자손들로 왕위가 계승되고 있다. 즉 「열매씨를 하대까지 주욱 드리우고 있다」라는 뜻을 담아 왕실의 시조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기·기를 저술하는 시점까지는 그렇다.


12
세 경행천황(大足彦忍代別)          

이 천황의 황자 중에 소대명이 후에 일본무존이라고 불리는데 귀수대왕을 달리 꾸민 인물이다. 12 7월조에 서기 371년의 귀수태자의 구주평정이 경행의 웅습평정으로 기술되어 있고 같은 내용을 달리 꾸민 이야기가 경행기 27 8월조에 일본무존의 웅습평정 이야기로 실려 있고 그 13년 후인 경행기 40 6월조에 서기 384년 귀수대왕의 본주원정이 일본무존의 동국정토 이야기로 실려 있다. 서기 371년 귀수태자의 구주평정과 서기 384년 귀수대왕의 본주원정 간의 시차 13년과 맞추어 꾸민 것이다.        

황후는 파마도일대랑희라 해놓고 이설에 稻日稚郞姬라 하였다고 주를 달아 놓고 있는데 귀수대왕을 등재한 천황의 황후로는 윤공의 경우만 제외하고는 전부 아라사등의 차녀를 꾸며 실었는데 여기서도 이설이 맞는 것이다. '어릴 稚'가 작다는 뜻이다. 대랑희는 아라사등의 장녀를 가리킨다. 하리마[播磨]도 천일창이 개척한 지명으로 나온다. 윤공의 황후만은 백제왕권과 열도통치권을 의인화한 기법을 사용한 것이다.  

'三代實錄'에 貞觀 6 8월 神櫛命의 後 右京人 讚岐朝臣高作 등에게 和氣朝臣 성을 내렸다고 한다<일본서기/암파문고/2000/2/360p/보주7-4>」라고 하는데 성씨록을 찾아보면 아래와 같이 나온다.
      
和氣朝臣; 垂仁天皇皇子 鐸釋別命之後也(좌경황별)
山邊公;    和氣朝臣同祖(우경황별)
山守;      垂仁天皇皇子 五十日足彦命之後也(섭진국황별)
和氣公;   犬上朝臣同祖 倭建命之後也(화천국황별)
別公;      犬上朝臣同祖 日本武尊之後也(우경황별)      
讚岐公;   大足彦忍代別天皇皇子 五十香足彦命(亦名神櫛別命)之後也(우경황별)    

일본무존(=왜건명)의 후손성씨 와께[和氣/]가 수인천황의 황자인 탁석별명의 후로도 되어 있고 '山守'조의 수인의 황자 이가다라시히꼬[五十日足彦] '讚岐公'조의 경행의 황자 이가다라시히꼬[五十香足彦]가 이름이 같은 동일인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수인과 경행이 동일인물이며 탁석별명과 일본무존도 전부 동일인물로서 귀수대왕을 분식한 인물들인 것이다. 수인 2 10월조에 마끼무꾸[纏向]에 도읍을 했다 했는데 경행 4 11월조에 역시 같은 곳에 도읍했다 하여 동일인물임을 암시해 주고 있다.

경행기 53 8, 10월조에는 경행이 일본무존과 동일인물임을 알려주는 설화가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은 근강전투에서 귀수대왕이 전사하여 비파호 밑바닥에 잠들었다는 것을 비파호에서 잡은 백합을 반록육안이 회를 쳐서 천황에게 대접했다고 했는데 이것은 가야군이 근강전투에서 귀수대왕을 전사시켰다는 뜻이다. 반록육안이 가야계 대반씨로서 수인기의 예진별황자다.  
  
膳大伴部; 阿倍朝臣同祖 大彦命孫 磐鹿六雁命之後也. 景行天皇巡狩東國至上總國 從海路渡淡水門 出海中得白蛤  
              於是磐鹿六雁爲膳進之 故美六雁賜膳大伴部(좌경황별)  

내용은 본기와 같은데 동국순수가 일본무존의 동국정토 및 귀수대왕의 본주친정과 같은 것이며 관동지방을 거쳐 비파호(=담수문)에서 전사했다는 뜻이다. 무쯔[]>무쯔[牟都]가 가야왕족 수직돌림자 '마다'계열 이칭이다. 대언명은 반록육안과 동일인물인데 후나야마고분의 주인공이다.    
                   
'
景行'이란 한풍시호를 분석해보면 '()'은 「빛[], 밝다[], 크다[], 사모하다[]」의 뜻이 있고 '()'  「그림자[物之陰影], []」이란 뜻이 있다. 음이 두 가지다. 그런데 이것을 한 줄로 꿰고 순서를 바꾸어 「빛, 밝다, 크다, , 그림, 사모하다」로 놓고 해석해보면 성덕태자와 귀수대왕을 연결하는 절묘한 연결고리가 나온다.

이 글자만 보더라도 기·기를 쓴 사람들은 당연한 얘기이긴 하지만 한자를 깊이 연구했고 최소 23년 최대 39년이란 오랜 기간 동안 심사숙고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이란 글자 한 자 속에 성덕태자와 귀수대왕을 연결하는 모든 이미지가 함축돼 있기 때문이다. ''자의 여러 가지 뜻을 바로 하나로 꿰어서 해석해보면 「[]처럼 밝고[] 위대한[] 분으로서 의관[]만으로 장례를 치렀으니 그림[]이라도 그려서 길이길이 사모해야할[] 」이라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
'자엔 묘하게도 뜻이 완전히 상대적인 의미가 동시에 들어 있다. 다름 아닌 '' '그림자'라는 뜻이다. 그림자란 그림과 같은 의미로 본다. 물체 그 자체가 아니고 빛으로 물체를 그린 것이다. '그림 畵'자와 뜻이 같은 것이다. 사물 그 자체가 아니고 그린 것이니까. 사진을 ''이라고 지금도 표현한다. 서기, 풍토기, 성씨록에서도 ''자를 초상화의 뜻으로 쓰고 있다.  

이 시호는 경행천황이 성덕태자와 동일인물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갈 行'이란 말은 귀수대왕의 열도원정을 상징한다고 본다. ''자까지 포함하여 다시 보면 「해처럼 밝고 위대한 분으로서 열도원정[] 중에 전사하여 의관만으로 장례를 치렀으니 그림이라도 그려 길이길이 사모해야할 천황」으로 된다.  

절묘한 글자 선택이 아닐 수 없다. 역시 시호는 아무렇게 짓는 것이 아니다. 의미를 고도로 함축한 말을 선택해서 짓는다. 또 이 ''자를 파자(破字)해 보면 "서울[] 하늘에 떠있는 해[]" 즉 王이라는 뜻이 바로 나온다.      

화풍시호 大足彦忍代에서 '' '다라시'로서 '비출 照' '데라스'와 같은 뜻이다. '별 언彦'은 존칭이고 ''은 위력을 나타내는 말이다. 연결해서 보면「크게 빛나는 천황으로서 대대로 왕을 배출했다」라는 뜻으로 풀이되어 시조라는 뜻을 담고 있다.    


13
세 성무천황(稚足彦)        

성무기 3년 정월조에 『무내숙니를 대신으로 하였다. 천황과 무내숙니는 같은 날 태어나 특히 총애하였다』고 나오는데 이 문장이 천황과 무내숙니가 동일인물이라는 암호문이다.  

성무기 4 2월조에 『선황 경행천황은 총명신무하사 천명을 받아서 황위를 받으셨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부왕인 경행천황이 천손 니니끼와 동일인물임을 알려주는 문구다.

성무기 5 9월조에는 오랫동안 성실히 천황을 한 것처럼 기술되어 있는데 그 기사를 보면 한풍시호를 이해할 수 있다. "군주로서의 일을 성실히 수행했다"는 정도로 이해된다. 실사상으로 백제에서도 왜에서도 왕이 된 적 없는 인물이다.    

치족언(稚足彦)이란 화풍시호의 '' '어리다', '작다'라는 뜻이고 '다라시히꼬[足彦]' "빛나는 별"이란 뜻인데 작은 해라고 할 수 있다. 귀수대왕을 등재한 경행천황의 화풍시호 대족언인대별의 오호다라시히꼬[大足彦]에 상대되는 이름으로 지은 것이다. 부왕보다 격이 낮은 이름이다.  

궁이름이 다까아나호[高穴穗]인데 아나호[穴穗]천황은 진사왕을 등재한 인물이고 ''자를 붙여 진사왕의 형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무내와 진사는 동복형제다.  


14
세 중애천황(足仲彦)  

일본무존(=귀수대왕)의 중자라고 나와 침류왕임을 알려주고 있다. 원년 윤11월조에 진사왕의 왕위찬탈을 비유한 월인의 백조설화가 실려 있다. 중애 2년기에 침류왕이 열도의 가야군과 대치하다가 귀국하는 상황과 가야군과 진사군에게 협공 당해 전사하는 상황이 은유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2년기에 이런 내용이 기술된 것도 침류왕이 재위 1년여만에 전사한 것과 맞춘 것이다.    

한풍시호 '仲哀'의 뜻은 "仲子로서 천황이 되었으나 哀痛하게 죽었다"는 뜻이다. 왕위에 오른 지 불과 1년여만에 이복동생 진사왕에게 자결을 강요당하고 시신을 팔단을 당했으니 시호에 '슬플 哀'자가 들어갈 만도 한 것이다. 화풍시호 '족중언'에서 ''은 중자라는 뜻이고 다라시히꼬[足彦]는 경행의 대족언에 비해 존칭의 강도가 떨어진 시호다.          

※ "
침류왕과 진사왕의 상쟁" 참조


신공황후(氣長足姬尊)        

아라사등의 장녀로서 신대기 하9단 천손강림장 이설2 "반정의 장녀"라는 뜻을 가지는 반장희(磐長姬)란 이름으로 등장한다. 오끼나가[氣長/息長]는 하쯔세[泊瀨/長谷]와 같이 자주 쓰이는 가야계 키워드로서 동성대왕을 등재한 서명천황의 화풍시호에도 들어 있다. 다라시[]는 다라시[]로도 쓰며 미칭이다.      

아라사등을 등재한 개화천황의 증손자 기장숙니왕의 딸이라고 되어 있는데 기장숙니가 바로 아라사등의 또 하나의 이칭이다. 개화천황과의 연대가 벌어져 본인을 증손자로 딸을 고손녀로 꾸민 것뿐이다.    

신공섭정전기 3월조에 中臣烏賊津使主라는 인물이 나오고 훨씬 후대에 귀수대왕을 등재한 윤공기 7 12월조에도 사인 中臣烏賊津使主로 다시 나오는데 이 인물은 中臣氏의 조인 침류왕이다.  

'
神功'이란 시호는 "신의 공덕"이란 뜻인데 신공섭정기라는 것은 "일본왕실의 황조신들이 공덕을 이룬 시기"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자면 일본왕실의 황조신 즉 초고대왕, 귀수대왕, 침류왕이 활동한 시기를 의미하며 여기에 "열도를 최초로 통일한 응신이 대화왕조를 이루기 위해 활동한 기간[神武前史]"이 포함되어 있다. 신공기는, 백제의 초고대왕이 열도를 백제땅으로 편입하기 위해 그 전에 열도를 개척해 놓은 가야와 영토분쟁을 시작한 서기 360년대부터 기술되어 있고 침류왕이 전사한 서기 385년까지가 세 황조신이 활동한 시기에 해당하고 다시 거기에 서기 385년부터 서기 390년 대화왕조가 출발하기 전까지의 시기를 포함하여 설정된 것이다. 실제로 기사의 내용은 세 황조신의 활동에 한정되어 있다.  

이들 왕실의 황조신이 활동한 시기는 다른 분식된 남자천황의 기사로 메우는 것을 불경스럽게 생각하여 天神출신의 가야왕족을 황후로 설정하여 섭정을 했다고 한 것이다. 여기서 '섭정'이란 말은 "황조신 대신에"라는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 "
칠지도" 참조            


15
세 응신천황(譽田)      

실질적인 열도의 초대왜왕이며 가야왕 아라사등의 중자다. 서기 응신전기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처음에 천황이 태자가 되고 나서 월국에 가서 각록의 사반대신을 배제하였다. 그때 대신과 태자가 이름을 서로 바꾸었다. 고로 대신을 거래사별신이라 부르고 태자는 예전별존이라 이름했다. 그러니까 대신의 본명은 예전별신 태자의 원명은 거래사별존이라 할 것인데 아무 데도 보이지 않아 미상이다』     

이름을 바꾸었다든가 옷을 바꾸어 입었다든가 하는 것은 전부 그 둘이 동일인물이라는 암호다. 응신이 사반대신이고 이사사별신이라는 말을 빙빙 돌려서 표현한 것이다. 아무 데도 적혀 있지 않은 이야기를 서기저자들이 지어내고 있으면서 모른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기 근초고기 말미의 박사 고흥에 관한 이야기도 사기저자들이 지어내면서 모른다고 하는 것과 같은 기술수법이다.              
               
쯔누가[角鹿]의 게히[사飯/氣比]신사는 이사사[去來紗]별신을 배제한다. 이 이사사[去來紗]라는 이름은 천일창의 이사사[膽狹淺]의 大刀名에서 나온 것이다. 천일창이 응신이라는 뜻이다.            

'
풍토기' 월전국 기비신궁조에 『기비신궁은 宇佐와 동체다. 팔번은 응신천황이 진좌하였다』라고 나오고 「후꾸이현 쯔누가시에 있는 氣比神宮의 제신은 '이사사와께명'으로 응신천황과 서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하는 신이다. 그리고 宇佐神宮은 오이다현 宇佐郡 宇佐町에 있는데 '연희식'에 팔번대보살우좌궁이라 하였고 응신천황을 제신으로 하고 있다<풍토기/암파서점/465p/12, 13>」라고 한다.  

그런데 일인학자 印牧邦雄은 '복정현역사'에서 「복정현의 돈하에 있는 기비신궁에서는 천일창을 伊奢沙別命으로 배제하고 있다」라고 한다. 이사사[去來紗]는 이사사[伊奢沙/膽狹淺]와 같은 이름이다. 따라서 응신=예전=이사사[去來紗/膽狹淺/伊奢沙]=게히[氣比/사飯]=천일창인 것이다.  

三宅連; 新羅國王子 天日모命之後也(좌경제번)    
橘守; 三宅連同祖 天日모命之後也(좌경제번)          
사井造; 三宅連同祖 新羅國人 天日槍命之後也(대화국제번), =/2      

천일창은 신라왕자이며 이 신라는 삼국사기 지리지 함안군조의 아라가야의 고명 아시라[阿尸良]를 한역한 것이다. 다찌바나[]는 열도통치권을 상징하는 칠지도를 은유한 것이고 '귤수' "열도통치권을 지키는(가진)"이라는 의미가 되고 이것을 천일창의 후손성씨로 창씨한 것은 대화왕조를 연 초대왜왕 응신이 천일창과 동일인물이기 때문이다.                

이 응신이 웅략과 동일인물임을 알려주는 문구가 서기 신공전기 4월조에 나온다. ...然暫假男貌 强起雄略...」라고 나오는데 9월조에 해산달이라고 나오니 4월이면 벌써 응신을 태중에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웅략을 일으켰다(가졌다)"라는 것은 태중의 응신이 곧 웅략이라는 뜻이 되는 것이다.      

응신기 3년 시세조에는 아신을 도와 진사왕을 타도하고 아신을 위에 오르게 한 구원전역이 실려 있다. 응신기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대부분이 서기 370년대∼420년대까지의 가야·백제왕족들이다. 초고대왕, 귀수대왕, 무내숙니와 그 아들들, 침류왕과 아신왕, 진사왕, 전지왕 및 예진과 진언 등이다.

화풍시호 호무다[譽田]는 대륙사서에 나오는 응신의 본명 讚을 열도어로 훈독하고 한자를 바꾸어 호무[]>호무[]로 하고 ''을 덧붙인 것이며 그의 형 예진(譽津)과 연결되는 것이다. 다시 본명 讚을 열도어로 음독하여 '사노[]'로 읽고 한자를 바꾸어 신무의 어릴 때 이름으로 만든 것이 '사노[狹野]'.    

신무=숭신=응신

한풍시호 응신을 보면 그를 재등재한 천황들의 시호와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 ·기저자들이 압축한 의미를 풀어서 해석해 보면 응신은 열도어로 음독하면 오오진[應神]이다. 여기서 '오오' '오호[]'로 치환하면 '大神'이 된다. 신무와 숭신이 동일인물이라는 것은 둘 다 시조라는 뜻을 가지는 별칭이다. 신무=始馭天下之天皇, 숭신=御肇國天皇

신무에서 武는 健의 뜻이 있으므로 건(/)과 같이 큰[/]의 뜻으로 통용되므로 '神大'가 된다. 숭신의 崇은 '높을/공경할 崇'자다. 이 말은 존칭을 표시할 땐 바로 '큰 大'와 뜻이 통한다. 셋 다 大神이란 뜻이 된다. 大神이나 神大나 글자순서만 바뀐 것뿐이다. 기술기법을 파악하면 실사에 바로 접근할 수 있다. 분식을 하면서도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이런 식으로 표시해놓은 것이다.                


16
세 인덕천황(大초료)      

서기 인덕기 원년 정월조에 상식을 넘어서는 이상한 에피소드가 아래와 같이 실려 있다.

『처음 천황을 낳던 날 부엉이[木兎]가 산실에 날아들었다. 아침에 응신천황이 대신 무내숙니를 불러 말하기를 "이게 무슨 징조인가"라고 하자 대신이 답하기를 "길하고 상서로운 것입니다. 어제 신의 처도 해산할 때 뱁새[초료]가 산옥에 들어왔습니다. 이 또한 이상한 일이었습니다"라고 했다. 천황이 "지금 짐의 아들과 대신의 아들이 같은 날 태어났다. 나란히 징조가 있었다. 이는 하늘의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그 새이름을 따서 서로 바꾸어 아들을 이름하여 후세에 나타내자"라고 했다. 초료의 이름을 따서 태자를 대초료황자라 하고 목토의 이름을 따서 대신의 아들을 목토숙니라 하였다. 이가 평군신의 시조다』  

응신의 태자이름이 사사끼[초료]라 했는데 인덕의 화풍시호에 들어 있다. 또 무내의 아들에 쯔구[木兎]가 있다는 뜻이다. 이 설화는 무내의 계보를 알려주기 위해 지은 것이다.    

사사끼[초료] '뱁새'를 가리키는데 반도어 '새새끼'가 복모음이 없는 열도어에서 단모음만으로 발음된 결과다. 이 새새끼에 상대되는 ''는 다름 아닌 경행기 일본무존의 동국정토에서 전사하여 능을 썼더니 혼령이 화하여 된 백조를 가리키는 것이고 일본무존은 귀수대왕을 분식한 인물이므로 인덕이 귀수대왕의 아들이라는 뜻인데 ''를 붙여 '큰새새끼[大초료]'는 장남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응신의 태자는 무내숙니를 인덕으로 등재하기 위해 꾸며낸 인물이고 그런 것을 암시해주기 위해 위와 같은 이상한 설화를 만든 것이다.      

한풍시호 '인덕' ''자는 귀수대왕을 모델로 창작한 王仁과의 연결고리다. '큰 德'자를 덧붙여 "왕인의 큰 아들"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인덕의 시호는 두 가지 모두 귀수대왕과의 관계를 나타내 주는 시호인 것이다.              
     
서기 효원기에는 무내숙니가 언태인신명의 손자로 되어 있는데 고사기 효원기에는 건내숙니가 비고포도압지신명의 아들로 되어 있다. 武內=建內, 彦太忍信命=比古布都押之信命이다. 서기 응신기에는 무내의 아들이 木兎宿니로 나오나 고사기 효원기에는 건내의 아들 중에 평군신의 조가 平群都久宿니로 되어 있다. 서기의 목토숙니가 고사기의 평군도구숙니인 것이다. 쯔구[木兎]는 쯔구[都久]와 같다.    

平群朝臣; 石川朝臣同祖 武內宿니男 平群都久宿니之後也(우경황별)    
阿祇奈君; 玉手朝臣同祖 彦太忍信命孫 武內宿니之後也(대화국황별)  
阿支奈臣; 玉手朝臣同祖 武內宿니男 葛城曾豆比古命之後也(섭진국황별)        
蘇何;      彦太忍信命之後也(하내국황별)  
依羅連;   神饒速日命十世孫 伊己布都大連之後也(우경천신)      
河內連;   出自百濟國都慕王男 陰太貴首王也(하내국제번)    

언태인신명은 신대기 하9단의 경진주신과 후쯔[經津/]를 연결고리로 하는 동일인물이고 히꼬후쯔[彦太]는 이고후쯔[伊己布都/伊거弗/陰太]와 같은 이름이다. '아기나군' '아지나신', 고대에 '' ''는 교체되어 쓰였으므로 같은 성씨다. '아지나신'조의 갈성증두비고명은 신공기에 등장하는 갈성습진언을 한자만 바꾼 이름이다. 실사상 경진주신=언태인신명=비고포도압지신명=이기포도대련=음태귀수왕=귀수대왕, 무내숙니=건내숙니=갈성증두비고=갈성습진언, 평군도구숙니=목토숙니이다.    

뱁새[초료]를 굴뚝새라고도 한다는데 귀수대왕을 백조로 은유하여 백제본국을 배신하고 가야에 협력한 무내는 그 반대색으로 나타내기도 한 것이다.    

서기에서 인덕이 이와..히메[磐之媛]를 황후로 하여 大兄去來穗別천황(이중), 住吉仲황자, 瑞齒別천황(반정), 雄朝津間稚子宿니천황(윤공)을 낳고, 비 日向髮長媛이 大草香황자와 번사황녀를 낳았다고 되어 있는데 이들 전부가 서기 360년대부터 420년대까지 활약한 가야·백제왕족들이다. 고사기에는 반지원을 한자를 바꾸어 이와노히메[石之比賣]라고 하였다.      

반지원은 가야왕 아라사등의 이칭 磐井에서 딴 "반정의 장녀"라는 뜻을 가진 신공의 이칭 磐長姬에서 ''자만 뺀 이름이며 서기 371 3 17일 구주전투에서 패하여 전사한 인물이고, 이중천황은 초고대왕이며 서기 375년 난파에서 가야의 기습화공으로 전사했고, 주길중황자는 응신이며 서치별황자는 응신의 형 예진별명으로 서기 384 6월 담로도해전에서 익사했고, 윤공천황은 귀수대왕이며 서기 384 2월 근강전투에서 익사했고, 인덕 자신도 서기 384 5월 기이국 조산에서 가야군에게 전사한 인물이다.        

妃 일향발장원은 구주를 의인화한 인물이고 대초향황자는 서기 385 6월 경 전사한 침류왕의 이칭이다. 번사황녀는 열도통치권을 의인화한 인물이다.    

응신기와 비교해 보면 응신이 천황일 때 무내(=인덕)는 응신의 태자로 꾸며져 있고 인덕이 천황일 때는 응신이 다시 주길중황자로 등장하는 식이다. 나머지도 인물들도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이칭을 사용하면서 전혀 다른 인물인 것처럼 등장하여 같은 시대의 이야기들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서기란 원래가 이런 사서다.    

난파(難波)에 도읍했다는 것도 특별한 의미를 둔 것인데 성씨록을 보면 아래와 같이 나온다.  

成相眞人; 渟中倉太珠敷天皇(諡敏達)皇子 難波王之後也(우경미정잡성)
路眞人; 出自諡敏達皇子 難波王也(좌경황별)      

민달천황은 귀수대왕이고 난파왕이 무내숙니다. 또 궁이름 다까쯔..미야[高津宮]는 다께우찌[武內]와 같은 이름이다. 보통 '다께우찌'를 다께찌[武內/建內]로 읽는데 아메[]=아마[]에서 보다시피 '' ''와 같고 '' ''가 교체되어 쓰이므로 '' ''와 같아서 다까쯔[高津]>다께찌[武內]인 것이다. 도읍지와 궁이름이 모두 무내숙니와 관련된 것이다.


17
세 이중천황(去來穗別)      

서기 인덕기 60 10월조의 백조능 이야기와 67년 정월조의 백설조이원의 이야기에서 보듯이 인덕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한 천황이다. 인덕 즉 무내가 가야와 협력하여 백제본국에 반기를 들자 열도로 친정을 나서 가야와 전면전을 벌이다가 오오사까 근방 나니와[難波]에서 밤중에 기습화공을 당하여 시신도 수습 못하고 전사했다. 이 전사와 관련한 내용은 이중전기에 실려 있다.  

67
년 정월조 기사에서 백설조가 역시 새로 은유된 인덕이고 사슴은 초고대왕을 은유한 것이다. 죽은 사슴의 귓속에서 백설조가 날아 나왔다 했는데 "사슴의 귓속[耳中]"이라는 문구에서 '耳中'을 반도어로 음이 같은 '履中'으로 바꾸어 한풍시호로 쓴 것이다.    

화풍시호 이자호와께[去來穗別]에서 '去來'를 특별히 '이자[伊장]'로 읽는다는 주가 있어 이 인물이 신대기에 등장하는 황실의 황조신인 이자나기.노미꼬또[伊장諾尊]나 이자나미..미꼬또[伊장염尊]와 동일인물임을 알려주고 있다. 응신의 별칭을'이사사[去來紗]'로 읽는 것과는 확실히 구분된다. '(壯 밑에 大)'자도 파자하면 '壯大하다'는 뜻이 되어 역시 왕실의 시조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        

이중전기에서 주길중황자의 화공을 당해 피하다가 石上 振의 신궁에 머물렀다 했는데 이것은 석상신궁의 제신이 되었다는 뜻이고 석상신궁의 주제신은 칠지도를 만든 백제의 초고대왕이다. 석상신궁의 제신은 셋으로 일본왕실의 세 황조신인 초고대왕과 귀수대왕, 침류왕이며 神體 역시 셋으로서 天璽瑞玉, 布都御魂, 天津羽羽斬이다.    

천새서옥은 "하늘의 옥새"를 뜻하고 하늘은 백제를 의미하고 "백제에서 모든 것을 허락하는 왕"을 의미하므로 칠지도상의 삭제된 네 글자 '百濟大王'에 해당하는 초고대왕이다. 瑞도 笏의 뜻이 있고 옥새는 인장을 뜻하므로 "왕권을 인정해주는 하늘(=백제)의 왕"이라는 의미도 되고 "모든 것을 허락한다"라는 의미에서 보면 초고대왕의 이칭 이장낙존의 ''과도 같은 뜻이다. 주제신 초고대왕과 신보 천새서옥이 대응된다. 삼종신기 중의 하나인 曲玉일 것이다.      

후쯔..미다마[布都御魂]에서 후쯔[經津/]는 귀수대왕을 가리키는 키워드이며 그 혼령이 깃든 물건은 칠지도를 가리킨다. 칠지도상의 초대왜왕이 귀수태자이기 때문이다. 제신 귀수대왕은 신보 칠지도와 대응된다.      

天津羽羽斬의 '천진'은 침류왕의 이칭 天津彦根命과 연결되고 '벨 斬'은 진사왕에게 팔단 당한 침류왕을 가리킨다. 이것은 서기 신대기 상8단 이설2에 등장하는 소잔명존의 '아라사히[추正]'인데 "아라가야에서 만든 칼"이라는 뜻이고 백제왕실의 신보가 되어 '아메..하하기리'라고 불린다. 제신 침류왕은 신보 천진우우참이라는 칼과 대응되는 것이다.

※ "
칠지도" 참조      

화공을 피하여 석상에 진좌한 태자는 한편으로는 서기 신대기 상5단에서 화신 가꾸쯔찌[軻遇突智]를 낳다가 불에 타서 죽었다는 황조신 이장염존이고 화신은 다름 아닌 응신이다. 응신의 이칭에 축자화군이 있는데 火君은 응신 형제들이 화공으로 초고대왕을 전사시킨 것을 인연으로 만든 이름이고 신대기 하9단 이설2, 3, 4, 5에서는 도반명이 火明命, 신무(=응신)가 彦火火出見이라는 이름으로도 등장한다. '축자화군'에 대해 「肥()國의 호족, 神武記에 神八井耳命은 火君 등의 조라고 되어 있다<일본서기/암파문고/2000/3/325p/11>」하고 성씨록에는 아래와 같이 나온다.    

多朝臣; 出自諡神武皇子 神八井耳命之後也(우경황별)            
; 多朝臣同祖 神八井耳命之後也(우경황별)
肥直; 多朝臣同祖 神八井耳命之後也(대화국황별)

오호..아소미[多朝臣]는 오호..아소미[太朝臣]와도 같고 고사기저자 태조신안만려도 신무(=응신)의 후손이다. []는 호[], 오호[/]와 같은 성씨다. 신무의 후손에 火氏가 있는 것도 다 이런 인연 때문인 것이다. 그 형 도반명은 火中君, 火焰王이란 이칭이 있을 정도다.        

서기 이중기 4 8월조에 『제국에 국사를 두었다』라고 한 것은 삼국사기 근초고기 말미에 『고기에 이르기를 백제가 개국 이래로 문자로 일을 기록한 적이 없었는데 이때 이르러 박사 고흥을 얻어 비로소 서기가 있게 되었다』라고 한 내용과 그대로 일치한다. 『그러나 고흥이 다른 책에는 나타나지 않으므로 그가 어떤 인물인지는 모른다』라고 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 말은 사기저자들이 지어낸 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서기의 이중천황이 백제 초고대왕임을 사기저자들이 알아보고 옮긴 것이며 백제본기의 경우는 여기서 얘기한 '古記'가 바로 '일본서기'라는 것이다.  

서기 이중기 6년 정월조에는 장직을 세우고 장부를 정했다고 나오는데 이것은 초고대왕세에 확립된 백제의 삼단계 왕서열제도(대왕>>후왕)를 은유한 것이지 단순한 관직이 아니다.          

※ "
삼장분립제는 백제의 왕서열제도" 참조          

고사기에는 동성대왕의 증조부 서치별황자가 주길중황자(=응신)와 준인 소바까리(=진언)를 죽이고 신궁에 거하고 있는 태자에게 "정이 이미 평안해졌습니다"라고 보고하여 가야계 동성대왕이 백제·왜 대통합왕국을 이룬 후에 아신왕의 직계손인 무령왕이 그것을 물려받은 것을 비유적으로 기술하였고 고사기 이중기에는 아지직(=아신) '藏官'에 임명하고 양지(=열도)를 주었다고 표현하여 무령왕 이후는 백제가 망할 때까지, 열도의 왕권을 아신왕의 후손들이 대대로 차지하였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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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세 수인천황(活目入彦五十狹茅)                

서기 수인기 3 3월조에 『신라왕자(아시라 가야) 천일창이 내귀하였다. 가지고 온 물건은 우태옥(=엽세주) 1, 족고옥 1, 제녹녹의 적석옥(赤石玉) 1, 출석의 소도 1, 출석의 창 1, 일경 1, 웅신리(熊神籬) 1구 등 모두 일곱 가지였다. 그것을 다지마[但馬]국에 간수해두고 항상 신물로 여겼다』

이설에서 『처음 천일창이 배를 타고 파마국에 정박하여 육속읍에 있을 때 천황이 三輪君의 선조 大友主와 倭直의 조 張尾市를 파마에 보내 천일창에게 "그대는 누구이며 어느 나라 사람인가"하고 물었다. 천일창이 대답하기를 "나는 신라국주의 아들이다. 그런데 일본국에 성황이 계신다는 말을 듣고 나라를 아우 知古에게 주고 귀화했습니다"라고 했다. 그리고는 바친 물건이 엽세주, 족고주, 제녹녹적석옥, 출석도자, 출석창, 일경, 웅신리, 담협천대도 전부 여덟 가지였다. 천황은 천일창에 조하여 "하리마국의 육속읍과 담로도의 출천읍을 줄 테니 그대 마음대로 살아라"라고 했다...(중략)...천일창은 토도하를 거슬러 올라가 북쪽의 근강국 오명읍에 들어가 잠시 살다가 다시 근강에서 약협국을 거쳐 서쪽의 단마국에 이르러 살 곳으로 정했다. 그래서 근강국 경촌곡의 도인(陶人)은 천일창을 따라온 사람들인 것이다. 그리하여 천일창은 단마국의 출도인 태이의 딸 마다오를 취하여 단마제조를 낳았다. 제조는 단마일유저를 낳고 일유저는 청언을 낳고 청언은 전도간수를 낳았다』  
  
지금 이 기사는 가야본토에서도 쫓기고 구주에서도 패하여 본주로 도망을 가서 재기를 도모하는 응신을 묘사한 기사다. 천일창의 대도 이름 이사사[膽狹淺]는 응신의 별칭 이사사별신의 이사사[去來紗]와 같아 천일창이 곧 응신이며 수인천황은 그와 동시대 인물이라는 뜻이다. 수인기 2년 시세조에 아라사등의 황우설화가 나오는 것도 그 설화에서 황우를 잡아먹은 '郡公'이 바로 수인천황임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수인천황이 귀수대왕(근구수)이기 때문이다.  

서기 수인기 26 8월조에 물부십천근대련에게 출운국에 가서 신보를 조사하라고 하는데 신보를 조사한다는 것은 출운국을 빼앗기 위해 공격을 한다는 뜻이다. 물부십천근의 '十千'은 뜻으로 ''과 같고 숭준전기에 등장하는 포조부만의 이름 ''같아 침류왕의 분식이칭이다. 침류에게 군사를 주어 가야계와 무내숙니의 연고지인 출운국을 공격하라고 명할 수 있는 인물은 귀수대왕밖에 없다.  

수인기 39 10월조에 『오십경부명(五十瓊敷命)은 모정의 토지천상궁에 가서 칼 천 자루를 만들었다. 따라서 그 칼을 천상부(川上部)라 한다. 다른 이름은 라반(裸伴)이라 한다. 석상신궁에 거두고 이후 오십경부명에 명하여 석상신궁의 신보를 주관하게 하였다』       

오십경부는 숭신천황의 화풍시호에 들어 있는 '오십경식(五十瓊殖)'과 같은 의미로서 숭신(=응신/천일창)과 동일인물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천일창에게 석상신궁의 신보를 관리하게 했다는 것은 그 신보들이 왕권을 상징하는 물건들이므로 결과적으로 백제가 가야에 져서 열도를 당분간은 장악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가야의 대화왕조를 거쳐야 열도가 백제땅이 된다는 뜻이다. 많은 칼을 신궁에 바쳤다는 것은 칼을 받은 신궁측(=백제)에서 크게 졌다는 것을 우회표현한 것이다. 근강전투의 결과를 암시하고 있다. 석상신궁은 초고대왕이 진좌한 궁이다.    

이 천황의 황후는 사호히메[狹穗姬]인데 가야계 지명 사호[佐保/沙本]와 같아 가야인을 꾸민 인물인데 서기 신대기 하9단에서 천손 니니끼와 결혼하는 목화개야희(木花開耶姬)다.            

고사기 수인기에 "沙本毘古王의 반역"조에 천황이 잠을 자다가 깨어나 황후에게 「사호 쪽에서 폭우가 쏟아져 순식간에 얼굴이 젖고 작은 비단색 뱀이 내 목을 감고 있었다. 이게 무슨 뜻일까?」라고 묻고 있는데 사호히꼬[沙本毘古]왕은 황후 사호히메의 오빠다. 같은 기사가 서기 수인기 5 10월조에도 실려 있다.

'
사호'는 가야계 지명인데 원래는 사히시라기[沙比新羅]에서 나온 이름이고 사히시라기[新羅]는 가나가라[金加羅]이며 가나가라[任那加羅]인 것이다. 폭우가 쏟아졌다는 것은 근강전투에서의 가야군의 기습수공을 상징한 것이며 비단색 뱀도 가야계를 상징한 것이다. 가야의 수공기습을 당한 인물은 귀수대왕이므로 수인천황이 귀수대왕임을 알려주는 기사인 것이다.                      

수인기 23 10월조에는 예진별황자가 나이 30이 되도록 말을 못하다가 고니를 보고 말문이 트이자 천탕하판거를 시켜 고니를 잡아오도록 하는데 출운국 또는 다지마[但馬]국에서 잡았다고 하였고 예진별황자가 이 고니와 같이 놀면서 말을 배웠다고 나온다. 이것은 경행기에서 동국정토 도중 전사하여 그 혼령이 백조가 되었다던 일본무존을 여기서는 고니[]로 표현한 것이다. 예진별황자는 응신의 형이고 천탕하판거는 鳥取造의 조라 하였는데 침류왕의 이칭이다. 숭준전기에 등장하는 침류왕의 이칭 포조부만의 도도리베[捕鳥部]와 도도리베[鳥取部]는 같은 성씨다.    

이 이야기는 귀수대왕의 숙원인 열도편입이, 대화왕조를 거쳐 동성대왕이 통합왕국을 이루면 그 다음으로 침류왕의 후손인 무령왕이 통합왕국을 물려받음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을 압축하여 비유한 것이다. 대화왕조는 출운 또는 다지마라는 가야계 지명으로 대표시키고 동성대왕은 그 증조부인 예진별명을 내세우고 무령왕은 그 선조인 천탕하판거(=침류왕)를 내세워 은유적인 설화를 꾸민 것이다.      

고니를 잡은 것이 열도병합이라는 백제왕실의 숙원이 이루어졌다는 것이고, 그것을 잡은 것은 무령왕이고 가야왕족 동성대왕이 대통합왕국을 이루어 물려준 것을 예진별황자가 고니와 놀면서 말을 배웠다고 비유한 것이다. 가야왕실로서 백제왕실에 대해 비로소 면목이 섰다는 뜻이다.              

화풍시호에 들어 있는 '活目入彦'은 가야군의 불의의 기습수공으로 익사하여 "눈을 뜬 채로 별이 되었다"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하고 이사지[五十狹茅]라는 키워드는 신공전기에 향판왕(=초고대왕)과 인웅왕(=귀수대왕)이 반역을 했다고 꾸민 이야기에 인웅왕측 장군이름 이사지..스꾸네[五十狹茅宿니]로 다시 등장하는데 역시 귀수대왕이다.              

한풍시호 수인의 '어질 仁'자는 王仁과의 연결고리이기도 하고 뜻을 보면 '열매씨'라는 의미도 있다. '드리울 垂'자는 위에서 밑으로 늘어뜨리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분위기상 '' '잠잘 睡'와 비슷한 느낌을 주고 있다. 즉 「비파호에 어질게 잠들어 있다」는 뜻으로 보인다. 또 성덕태자나 왕인박사로 꾸민 것과 연결해 보면 참으로 점잖고 어진 분위기도 풍기고 있다.  

'
열매씨 仁'자로 보면 백제에서 처음에는 침류계로 계승이 되다가 무내계로 계승이 되기도 하지만 결국은 귀수대왕의 자손들로 왕위가 계승되고 있다. 즉 「열매씨를 하대까지 주욱 드리우고 있다」라는 뜻을 담아 왕실의 시조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기·기를 저술하는 시점까지는 그렇다.


12
세 경행천황(大足彦忍代別)          

이 천황의 황자 중에 소대명이 후에 일본무존이라고 불리는데 귀수대왕을 달리 꾸민 인물이다. 12 7월조에 서기 371년의 귀수태자의 구주평정이 경행의 웅습평정으로 기술되어 있고 같은 내용을 달리 꾸민 이야기가 경행기 27 8월조에 일본무존의 웅습평정 이야기로 실려 있고 그 13년 후인 경행기 40 6월조에 서기 384년 귀수대왕의 본주원정이 일본무존의 동국정토 이야기로 실려 있다. 서기 371년 귀수태자의 구주평정과 서기 384년 귀수대왕의 본주원정 간의 시차 13년과 맞추어 꾸민 것이다.        

황후는 파마도일대랑희라 해놓고 이설에 稻日稚郞姬라 하였다고 주를 달아 놓고 있는데 귀수대왕을 등재한 천황의 황후로는 윤공의 경우만 제외하고는 전부 아라사등의 차녀를 꾸며 실었는데 여기서도 이설이 맞는 것이다. '어릴 稚'가 작다는 뜻이다. 대랑희는 아라사등의 장녀를 가리킨다. 하리마[播磨]도 천일창이 개척한 지명으로 나온다. 윤공의 황후만은 백제왕권과 열도통치권을 의인화한 기법을 사용한 것이다.  

'三代實錄'에 貞觀 6 8월 神櫛命의 後 右京人 讚岐朝臣高作 등에게 和氣朝臣 성을 내렸다고 한다<일본서기/암파문고/2000/2/360p/보주7-4>」라고 하는데 성씨록을 찾아보면 아래와 같이 나온다.
      
和氣朝臣; 垂仁天皇皇子 鐸釋別命之後也(좌경황별)
山邊公;    和氣朝臣同祖(우경황별)
山守;      垂仁天皇皇子 五十日足彦命之後也(섭진국황별)
和氣公;   犬上朝臣同祖 倭建命之後也(화천국황별)
別公;      犬上朝臣同祖 日本武尊之後也(우경황별)      
讚岐公;   大足彦忍代別天皇皇子 五十香足彦命(亦名神櫛別命)之後也(우경황별)    

일본무존(=왜건명)의 후손성씨 와께[和氣/]가 수인천황의 황자인 탁석별명의 후로도 되어 있고 '山守'조의 수인의 황자 이가다라시히꼬[五十日足彦] '讚岐公'조의 경행의 황자 이가다라시히꼬[五十香足彦]가 이름이 같은 동일인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수인과 경행이 동일인물이며 탁석별명과 일본무존도 전부 동일인물로서 귀수대왕을 분식한 인물들인 것이다. 수인 2 10월조에 마끼무꾸[纏向]에 도읍을 했다 했는데 경행 4 11월조에 역시 같은 곳에 도읍했다 하여 동일인물임을 암시해 주고 있다.

경행기 53 8, 10월조에는 경행이 일본무존과 동일인물임을 알려주는 설화가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은 근강전투에서 귀수대왕이 전사하여 비파호 밑바닥에 잠들었다는 것을 비파호에서 잡은 백합을 반록육안이 회를 쳐서 천황에게 대접했다고 했는데 이것은 가야군이 근강전투에서 귀수대왕을 전사시켰다는 뜻이다. 반록육안이 가야계 대반씨로서 수인기의 예진별황자다.  
  
膳大伴部; 阿倍朝臣同祖 大彦命孫 磐鹿六雁命之後也. 景行天皇巡狩東國至上總國 從海路渡淡水門 出海中得白蛤  
              於是磐鹿六雁爲膳進之 故美六雁賜膳大伴部(좌경황별)  

내용은 본기와 같은데 동국순수가 일본무존의 동국정토 및 귀수대왕의 본주친정과 같은 것이며 관동지방을 거쳐 비파호(=담수문)에서 전사했다는 뜻이다. 무쯔[]>무쯔[牟都]가 가야왕족 수직돌림자 '마다'계열 이칭이다. 대언명은 반록육안과 동일인물인데 후나야마고분의 주인공이다.    
                   
'
景行'이란 한풍시호를 분석해보면 '()'은 「빛[], 밝다[], 크다[], 사모하다[]」의 뜻이 있고 '()'  「그림자[物之陰影], []」이란 뜻이 있다. 음이 두 가지다. 그런데 이것을 한 줄로 꿰고 순서를 바꾸어 「빛, 밝다, 크다, , 그림, 사모하다」로 놓고 해석해보면 성덕태자와 귀수대왕을 연결하는 절묘한 연결고리가 나온다.

이 글자만 보더라도 기·기를 쓴 사람들은 당연한 얘기이긴 하지만 한자를 깊이 연구했고 최소 23년 최대 39년이란 오랜 기간 동안 심사숙고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이란 글자 한 자 속에 성덕태자와 귀수대왕을 연결하는 모든 이미지가 함축돼 있기 때문이다. ''자의 여러 가지 뜻을 바로 하나로 꿰어서 해석해보면 「[]처럼 밝고[] 위대한[] 분으로서 의관[]만으로 장례를 치렀으니 그림[]이라도 그려서 길이길이 사모해야할[] 」이라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
'자엔 묘하게도 뜻이 완전히 상대적인 의미가 동시에 들어 있다. 다름 아닌 '' '그림자'라는 뜻이다. 그림자란 그림과 같은 의미로 본다. 물체 그 자체가 아니고 빛으로 물체를 그린 것이다. '그림 畵'자와 뜻이 같은 것이다. 사물 그 자체가 아니고 그린 것이니까. 사진을 ''이라고 지금도 표현한다. 서기, 풍토기, 성씨록에서도 ''자를 초상화의 뜻으로 쓰고 있다.  

이 시호는 경행천황이 성덕태자와 동일인물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갈 行'이란 말은 귀수대왕의 열도원정을 상징한다고 본다. ''자까지 포함하여 다시 보면 「해처럼 밝고 위대한 분으로서 열도원정[] 중에 전사하여 의관만으로 장례를 치렀으니 그림이라도 그려 길이길이 사모해야할 천황」으로 된다.  

절묘한 글자 선택이 아닐 수 없다. 역시 시호는 아무렇게 짓는 것이 아니다. 의미를 고도로 함축한 말을 선택해서 짓는다. 또 이 ''자를 파자(破字)해 보면 "서울[] 하늘에 떠있는 해[]" 즉 王이라는 뜻이 바로 나온다.      

화풍시호 大足彦忍代에서 '' '다라시'로서 '비출 照' '데라스'와 같은 뜻이다. '별 언彦'은 존칭이고 ''은 위력을 나타내는 말이다. 연결해서 보면「크게 빛나는 천황으로서 대대로 왕을 배출했다」라는 뜻으로 풀이되어 시조라는 뜻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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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성무천황(稚足彦)        

성무기 3년 정월조에 『무내숙니를 대신으로 하였다. 천황과 무내숙니는 같은 날 태어나 특히 총애하였다』고 나오는데 이 문장이 천황과 무내숙니가 동일인물이라는 암호문이다.  

성무기 4 2월조에 『선황 경행천황은 총명신무하사 천명을 받아서 황위를 받으셨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부왕인 경행천황이 천손 니니끼와 동일인물임을 알려주는 문구다.

성무기 5 9월조에는 오랫동안 성실히 천황을 한 것처럼 기술되어 있는데 그 기사를 보면 한풍시호를 이해할 수 있다. "군주로서의 일을 성실히 수행했다"는 정도로 이해된다. 실사상으로 백제에서도 왜에서도 왕이 된 적 없는 인물이다.    

치족언(稚足彦)이란 화풍시호의 '' '어리다', '작다'라는 뜻이고 '다라시히꼬[足彦]' "빛나는 별"이란 뜻인데 작은 해라고 할 수 있다. 귀수대왕을 등재한 경행천황의 화풍시호 대족언인대별의 오호다라시히꼬[大足彦]에 상대되는 이름으로 지은 것이다. 부왕보다 격이 낮은 이름이다.  

궁이름이 다까아나호[高穴穗]인데 아나호[穴穗]천황은 진사왕을 등재한 인물이고 ''자를 붙여 진사왕의 형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무내와 진사는 동복형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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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중애천황(足仲彦)  

일본무존(=귀수대왕)의 중자라고 나와 침류왕임을 알려주고 있다. 원년 윤11월조에 진사왕의 왕위찬탈을 비유한 월인의 백조설화가 실려 있다. 중애 2년기에 침류왕이 열도의 가야군과 대치하다가 귀국하는 상황과 가야군과 진사군에게 협공 당해 전사하는 상황이 은유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2년기에 이런 내용이 기술된 것도 침류왕이 재위 1년여만에 전사한 것과 맞춘 것이다.    

한풍시호 '仲哀'의 뜻은 "仲子로서 천황이 되었으나 哀痛하게 죽었다"는 뜻이다. 왕위에 오른 지 불과 1년여만에 이복동생 진사왕에게 자결을 강요당하고 시신을 팔단을 당했으니 시호에 '슬플 哀'자가 들어갈 만도 한 것이다. 화풍시호 '족중언'에서 ''은 중자라는 뜻이고 다라시히꼬[足彦]는 경행의 대족언에 비해 존칭의 강도가 떨어진 시호다.          

※ "
침류왕과 진사왕의 상쟁" 참조


신공황후(氣長足姬尊)        

아라사등의 장녀로서 신대기 하9단 천손강림장 이설2 "반정의 장녀"라는 뜻을 가지는 반장희(磐長姬)란 이름으로 등장한다. 오끼나가[氣長/息長]는 하쯔세[泊瀨/長谷]와 같이 자주 쓰이는 가야계 키워드로서 동성대왕을 등재한 서명천황의 화풍시호에도 들어 있다. 다라시[]는 다라시[]로도 쓰며 미칭이다.      

아라사등을 등재한 개화천황의 증손자 기장숙니왕의 딸이라고 되어 있는데 기장숙니가 바로 아라사등의 또 하나의 이칭이다. 개화천황과의 연대가 벌어져 본인을 증손자로 딸을 고손녀로 꾸민 것뿐이다.    

신공섭정전기 3월조에 中臣烏賊津使主라는 인물이 나오고 훨씬 후대에 귀수대왕을 등재한 윤공기 7 12월조에도 사인 中臣烏賊津使主로 다시 나오는데 이 인물은 中臣氏의 조인 침류왕이다.  

'
神功'이란 시호는 "신의 공덕"이란 뜻인데 신공섭정기라는 것은 "일본왕실의 황조신들이 공덕을 이룬 시기"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자면 일본왕실의 황조신 즉 초고대왕, 귀수대왕, 침류왕이 활동한 시기를 의미하며 여기에 "열도를 최초로 통일한 응신이 대화왕조를 이루기 위해 활동한 기간[神武前史]"이 포함되어 있다. 신공기는, 백제의 초고대왕이 열도를 백제땅으로 편입하기 위해 그 전에 열도를 개척해 놓은 가야와 영토분쟁을 시작한 서기 360년대부터 기술되어 있고 침류왕이 전사한 서기 385년까지가 세 황조신이 활동한 시기에 해당하고 다시 거기에 서기 385년부터 서기 390년 대화왕조가 출발하기 전까지의 시기를 포함하여 설정된 것이다. 실제로 기사의 내용은 세 황조신의 활동에 한정되어 있다.  

이들 왕실의 황조신이 활동한 시기는 다른 분식된 남자천황의 기사로 메우는 것을 불경스럽게 생각하여 天神출신의 가야왕족을 황후로 설정하여 섭정을 했다고 한 것이다. 여기서 '섭정'이란 말은 "황조신 대신에"라는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 "
칠지도" 참조            


15
세 응신천황(譽田)      

실질적인 열도의 초대왜왕이며 가야왕 아라사등의 중자다. 서기 응신전기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처음에 천황이 태자가 되고 나서 월국에 가서 각록의 사반대신을 배제하였다. 그때 대신과 태자가 이름을 서로 바꾸었다. 고로 대신을 거래사별신이라 부르고 태자는 예전별존이라 이름했다. 그러니까 대신의 본명은 예전별신 태자의 원명은 거래사별존이라 할 것인데 아무 데도 보이지 않아 미상이다』     

이름을 바꾸었다든가 옷을 바꾸어 입었다든가 하는 것은 전부 그 둘이 동일인물이라는 암호다. 응신이 사반대신이고 이사사별신이라는 말을 빙빙 돌려서 표현한 것이다. 아무 데도 적혀 있지 않은 이야기를 서기저자들이 지어내고 있으면서 모른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기 근초고기 말미의 박사 고흥에 관한 이야기도 사기저자들이 지어내면서 모른다고 하는 것과 같은 기술수법이다.              
               
쯔누가[角鹿]의 게히[사飯/氣比]신사는 이사사[去來紗]별신을 배제한다. 이 이사사[去來紗]라는 이름은 천일창의 이사사[膽狹淺]의 大刀名에서 나온 것이다. 천일창이 응신이라는 뜻이다.            

'
풍토기' 월전국 기비신궁조에 『기비신궁은 宇佐와 동체다. 팔번은 응신천황이 진좌하였다』라고 나오고 「후꾸이현 쯔누가시에 있는 氣比神宮의 제신은 '이사사와께명'으로 응신천황과 서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하는 신이다. 그리고 宇佐神宮은 오이다현 宇佐郡 宇佐町에 있는데 '연희식'에 팔번대보살우좌궁이라 하였고 응신천황을 제신으로 하고 있다<풍토기/암파서점/465p/12, 13>」라고 한다.  

그런데 일인학자 印牧邦雄은 '복정현역사'에서 「복정현의 돈하에 있는 기비신궁에서는 천일창을 伊奢沙別命으로 배제하고 있다」라고 한다. 이사사[去來紗]는 이사사[伊奢沙/膽狹淺]와 같은 이름이다. 따라서 응신=예전=이사사[去來紗/膽狹淺/伊奢沙]=게히[氣比/사飯]=천일창인 것이다.  

三宅連; 新羅國王子 天日모命之後也(좌경제번)    
橘守; 三宅連同祖 天日모命之後也(좌경제번)          
사井造; 三宅連同祖 新羅國人 天日槍命之後也(대화국제번), =/2      

천일창은 신라왕자이며 이 신라는 삼국사기 지리지 함안군조의 아라가야의 고명 아시라[阿尸良]를 한역한 것이다. 다찌바나[]는 열도통치권을 상징하는 칠지도를 은유한 것이고 '귤수' "열도통치권을 지키는(가진)"이라는 의미가 되고 이것을 천일창의 후손성씨로 창씨한 것은 대화왕조를 연 초대왜왕 응신이 천일창과 동일인물이기 때문이다.                

이 응신이 웅략과 동일인물임을 알려주는 문구가 서기 신공전기 4월조에 나온다. ...然暫假男貌 强起雄略...」라고 나오는데 9월조에 해산달이라고 나오니 4월이면 벌써 응신을 태중에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웅략을 일으켰다(가졌다)"라는 것은 태중의 응신이 곧 웅략이라는 뜻이 되는 것이다.      

응신기 3년 시세조에는 아신을 도와 진사왕을 타도하고 아신을 위에 오르게 한 구원전역이 실려 있다. 응신기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대부분이 서기 370년대∼420년대까지의 가야·백제왕족들이다. 초고대왕, 귀수대왕, 무내숙니와 그 아들들, 침류왕과 아신왕, 진사왕, 전지왕 및 예진과 진언 등이다.

화풍시호 호무다[譽田]는 대륙사서에 나오는 응신의 본명 讚을 열도어로 훈독하고 한자를 바꾸어 호무[]>호무[]로 하고 ''을 덧붙인 것이며 그의 형 예진(譽津)과 연결되는 것이다. 다시 본명 讚을 열도어로 음독하여 '사노[]'로 읽고 한자를 바꾸어 신무의 어릴 때 이름으로 만든 것이 '사노[狹野]'.    

신무=숭신=응신

한풍시호 응신을 보면 그를 재등재한 천황들의 시호와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 ·기저자들이 압축한 의미를 풀어서 해석해 보면 응신은 열도어로 음독하면 오오진[應神]이다. 여기서 '오오' '오호[]'로 치환하면 '大神'이 된다. 신무와 숭신이 동일인물이라는 것은 둘 다 시조라는 뜻을 가지는 별칭이다. 신무=始馭天下之天皇, 숭신=御肇國天皇

신무에서 武는 健의 뜻이 있으므로 건(/)과 같이 큰[/]의 뜻으로 통용되므로 '神大'가 된다. 숭신의 崇은 '높을/공경할 崇'자다. 이 말은 존칭을 표시할 땐 바로 '큰 大'와 뜻이 통한다. 셋 다 大神이란 뜻이 된다. 大神이나 神大나 글자순서만 바뀐 것뿐이다. 기술기법을 파악하면 실사에 바로 접근할 수 있다. 분식을 하면서도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이런 식으로 표시해놓은 것이다.                


16
세 인덕천황(大초료)      

서기 인덕기 원년 정월조에 상식을 넘어서는 이상한 에피소드가 아래와 같이 실려 있다.

『처음 천황을 낳던 날 부엉이[木兎]가 산실에 날아들었다. 아침에 응신천황이 대신 무내숙니를 불러 말하기를 "이게 무슨 징조인가"라고 하자 대신이 답하기를 "길하고 상서로운 것입니다. 어제 신의 처도 해산할 때 뱁새[초료]가 산옥에 들어왔습니다. 이 또한 이상한 일이었습니다"라고 했다. 천황이 "지금 짐의 아들과 대신의 아들이 같은 날 태어났다. 나란히 징조가 있었다. 이는 하늘의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그 새이름을 따서 서로 바꾸어 아들을 이름하여 후세에 나타내자"라고 했다. 초료의 이름을 따서 태자를 대초료황자라 하고 목토의 이름을 따서 대신의 아들을 목토숙니라 하였다. 이가 평군신의 시조다』  

응신의 태자이름이 사사끼[초료]라 했는데 인덕의 화풍시호에 들어 있다. 또 무내의 아들에 쯔구[木兎]가 있다는 뜻이다. 이 설화는 무내의 계보를 알려주기 위해 지은 것이다.    

사사끼[초료] '뱁새'를 가리키는데 반도어 '새새끼'가 복모음이 없는 열도어에서 단모음만으로 발음된 결과다. 이 새새끼에 상대되는 ''는 다름 아닌 경행기 일본무존의 동국정토에서 전사하여 능을 썼더니 혼령이 화하여 된 백조를 가리키는 것이고 일본무존은 귀수대왕을 분식한 인물이므로 인덕이 귀수대왕의 아들이라는 뜻인데 ''를 붙여 '큰새새끼[大초료]'는 장남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응신의 태자는 무내숙니를 인덕으로 등재하기 위해 꾸며낸 인물이고 그런 것을 암시해주기 위해 위와 같은 이상한 설화를 만든 것이다.      

한풍시호 '인덕' ''자는 귀수대왕을 모델로 창작한 王仁과의 연결고리다. '큰 德'자를 덧붙여 "왕인의 큰 아들"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인덕의 시호는 두 가지 모두 귀수대왕과의 관계를 나타내 주는 시호인 것이다.              
     
서기 효원기에는 무내숙니가 언태인신명의 손자로 되어 있는데 고사기 효원기에는 건내숙니가 비고포도압지신명의 아들로 되어 있다. 武內=建內, 彦太忍信命=比古布都押之信命이다. 서기 응신기에는 무내의 아들이 木兎宿니로 나오나 고사기 효원기에는 건내의 아들 중에 평군신의 조가 平群都久宿니로 되어 있다. 서기의 목토숙니가 고사기의 평군도구숙니인 것이다. 쯔구[木兎]는 쯔구[都久]와 같다.    

平群朝臣; 石川朝臣同祖 武內宿니男 平群都久宿니之後也(우경황별)    
阿祇奈君; 玉手朝臣同祖 彦太忍信命孫 武內宿니之後也(대화국황별)  
阿支奈臣; 玉手朝臣同祖 武內宿니男 葛城曾豆比古命之後也(섭진국황별)        
蘇何;      彦太忍信命之後也(하내국황별)  
依羅連;   神饒速日命十世孫 伊己布都大連之後也(우경천신)      
河內連;   出自百濟國都慕王男 陰太貴首王也(하내국제번)    

언태인신명은 신대기 하9단의 경진주신과 후쯔[經津/]를 연결고리로 하는 동일인물이고 히꼬후쯔[彦太]는 이고후쯔[伊己布都/伊거弗/陰太]와 같은 이름이다. '아기나군' '아지나신', 고대에 '' ''는 교체되어 쓰였으므로 같은 성씨다. '아지나신'조의 갈성증두비고명은 신공기에 등장하는 갈성습진언을 한자만 바꾼 이름이다. 실사상 경진주신=언태인신명=비고포도압지신명=이기포도대련=음태귀수왕=귀수대왕, 무내숙니=건내숙니=갈성증두비고=갈성습진언, 평군도구숙니=목토숙니이다.    

뱁새[초료]를 굴뚝새라고도 한다는데 귀수대왕을 백조로 은유하여 백제본국을 배신하고 가야에 협력한 무내는 그 반대색으로 나타내기도 한 것이다.    

서기에서 인덕이 이와..히메[磐之媛]를 황후로 하여 大兄去來穗別천황(이중), 住吉仲황자, 瑞齒別천황(반정), 雄朝津間稚子宿니천황(윤공)을 낳고, 비 日向髮長媛이 大草香황자와 번사황녀를 낳았다고 되어 있는데 이들 전부가 서기 360년대부터 420년대까지 활약한 가야·백제왕족들이다. 고사기에는 반지원을 한자를 바꾸어 이와노히메[石之比賣]라고 하였다.      

반지원은 가야왕 아라사등의 이칭 磐井에서 딴 "반정의 장녀"라는 뜻을 가진 신공의 이칭 磐長姬에서 ''자만 뺀 이름이며 서기 371 3 17일 구주전투에서 패하여 전사한 인물이고, 이중천황은 초고대왕이며 서기 375년 난파에서 가야의 기습화공으로 전사했고, 주길중황자는 응신이며 서치별황자는 응신의 형 예진별명으로 서기 384 6월 담로도해전에서 익사했고, 윤공천황은 귀수대왕이며 서기 384 2월 근강전투에서 익사했고, 인덕 자신도 서기 384 5월 기이국 조산에서 가야군에게 전사한 인물이다.        

妃 일향발장원은 구주를 의인화한 인물이고 대초향황자는 서기 385 6월 경 전사한 침류왕의 이칭이다. 번사황녀는 열도통치권을 의인화한 인물이다.    

응신기와 비교해 보면 응신이 천황일 때 무내(=인덕)는 응신의 태자로 꾸며져 있고 인덕이 천황일 때는 응신이 다시 주길중황자로 등장하는 식이다. 나머지도 인물들도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이칭을 사용하면서 전혀 다른 인물인 것처럼 등장하여 같은 시대의 이야기들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서기란 원래가 이런 사서다.    

난파(難波)에 도읍했다는 것도 특별한 의미를 둔 것인데 성씨록을 보면 아래와 같이 나온다.  

成相眞人; 渟中倉太珠敷天皇(諡敏達)皇子 難波王之後也(우경미정잡성)
路眞人; 出自諡敏達皇子 難波王也(좌경황별)      

민달천황은 귀수대왕이고 난파왕이 무내숙니다. 또 궁이름 다까쯔..미야[高津宮]는 다께우찌[武內]와 같은 이름이다. 보통 '다께우찌'를 다께찌[武內/建內]로 읽는데 아메[]=아마[]에서 보다시피 '' ''와 같고 '' ''가 교체되어 쓰이므로 '' ''와 같아서 다까쯔[高津]>다께찌[武內]인 것이다. 도읍지와 궁이름이 모두 무내숙니와 관련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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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이중천황(去來穗別)      

서기 인덕기 60 10월조의 백조능 이야기와 67년 정월조의 백설조이원의 이야기에서 보듯이 인덕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한 천황이다. 인덕 즉 무내가 가야와 협력하여 백제본국에 반기를 들자 열도로 친정을 나서 가야와 전면전을 벌이다가 오오사까 근방 나니와[難波]에서 밤중에 기습화공을 당하여 시신도 수습 못하고 전사했다. 이 전사와 관련한 내용은 이중전기에 실려 있다.  

67
년 정월조 기사에서 백설조가 역시 새로 은유된 인덕이고 사슴은 초고대왕을 은유한 것이다. 죽은 사슴의 귓속에서 백설조가 날아 나왔다 했는데 "사슴의 귓속[耳中]"이라는 문구에서 '耳中'을 반도어로 음이 같은 '履中'으로 바꾸어 한풍시호로 쓴 것이다.    

화풍시호 이자호와께[去來穗別]에서 '去來'를 특별히 '이자[伊장]'로 읽는다는 주가 있어 이 인물이 신대기에 등장하는 황실의 황조신인 이자나기.노미꼬또[伊장諾尊]나 이자나미..미꼬또[伊장염尊]와 동일인물임을 알려주고 있다. 응신의 별칭을'이사사[去來紗]'로 읽는 것과는 확실히 구분된다. '(壯 밑에 大)'자도 파자하면 '壯大하다'는 뜻이 되어 역시 왕실의 시조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        

이중전기에서 주길중황자의 화공을 당해 피하다가 石上 振의 신궁에 머물렀다 했는데 이것은 석상신궁의 제신이 되었다는 뜻이고 석상신궁의 주제신은 칠지도를 만든 백제의 초고대왕이다. 석상신궁의 제신은 셋으로 일본왕실의 세 황조신인 초고대왕과 귀수대왕, 침류왕이며 神體 역시 셋으로서 天璽瑞玉, 布都御魂, 天津羽羽斬이다.    

천새서옥은 "하늘의 옥새"를 뜻하고 하늘은 백제를 의미하고 "백제에서 모든 것을 허락하는 왕"을 의미하므로 칠지도상의 삭제된 네 글자 '百濟大王'에 해당하는 초고대왕이다. 瑞도 笏의 뜻이 있고 옥새는 인장을 뜻하므로 "왕권을 인정해주는 하늘(=백제)의 왕"이라는 의미도 되고 "모든 것을 허락한다"라는 의미에서 보면 초고대왕의 이칭 이장낙존의 ''과도 같은 뜻이다. 주제신 초고대왕과 신보 천새서옥이 대응된다. 삼종신기 중의 하나인 曲玉일 것이다.      

후쯔..미다마[布都御魂]에서 후쯔[經津/]는 귀수대왕을 가리키는 키워드이며 그 혼령이 깃든 물건은 칠지도를 가리킨다. 칠지도상의 초대왜왕이 귀수태자이기 때문이다. 제신 귀수대왕은 신보 칠지도와 대응된다.      

天津羽羽斬의 '천진'은 침류왕의 이칭 天津彦根命과 연결되고 '벨 斬'은 진사왕에게 팔단 당한 침류왕을 가리킨다. 이것은 서기 신대기 상8단 이설2에 등장하는 소잔명존의 '아라사히[추正]'인데 "아라가야에서 만든 칼"이라는 뜻이고 백제왕실의 신보가 되어 '아메..하하기리'라고 불린다. 제신 침류왕은 신보 천진우우참이라는 칼과 대응되는 것이다.

※ "
칠지도" 참조      

화공을 피하여 석상에 진좌한 태자는 한편으로는 서기 신대기 상5단에서 화신 가꾸쯔찌[軻遇突智]를 낳다가 불에 타서 죽었다는 황조신 이장염존이고 화신은 다름 아닌 응신이다. 응신의 이칭에 축자화군이 있는데 火君은 응신 형제들이 화공으로 초고대왕을 전사시킨 것을 인연으로 만든 이름이고 신대기 하9단 이설2, 3, 4, 5에서는 도반명이 火明命, 신무(=응신)가 彦火火出見이라는 이름으로도 등장한다. '축자화군'에 대해 「肥()國의 호족, 神武記에 神八井耳命은 火君 등의 조라고 되어 있다<일본서기/암파문고/2000/3/325p/11>」하고 성씨록에는 아래와 같이 나온다.    

多朝臣; 出自諡神武皇子 神八井耳命之後也(우경황별)            
; 多朝臣同祖 神八井耳命之後也(우경황별)
肥直; 多朝臣同祖 神八井耳命之後也(대화국황별)

오호..아소미[多朝臣]는 오호..아소미[太朝臣]와도 같고 고사기저자 태조신안만려도 신무(=응신)의 후손이다. []는 호[], 오호[/]와 같은 성씨다. 신무의 후손에 火氏가 있는 것도 다 이런 인연 때문인 것이다. 그 형 도반명은 火中君, 火焰王이란 이칭이 있을 정도다.        

서기 이중기 4 8월조에 『제국에 국사를 두었다』라고 한 것은 삼국사기 근초고기 말미에 『고기에 이르기를 백제가 개국 이래로 문자로 일을 기록한 적이 없었는데 이때 이르러 박사 고흥을 얻어 비로소 서기가 있게 되었다』라고 한 내용과 그대로 일치한다. 『그러나 고흥이 다른 책에는 나타나지 않으므로 그가 어떤 인물인지는 모른다』라고 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 말은 사기저자들이 지어낸 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서기의 이중천황이 백제 초고대왕임을 사기저자들이 알아보고 옮긴 것이며 백제본기의 경우는 여기서 얘기한 '古記'가 바로 '일본서기'라는 것이다.  

서기 이중기 6년 정월조에는 장직을 세우고 장부를 정했다고 나오는데 이것은 초고대왕세에 확립된 백제의 삼단계 왕서열제도(대왕>>후왕)를 은유한 것이지 단순한 관직이 아니다.          

※ "
삼장분립제는 백제의 왕서열제도" 참조          

고사기에는 동성대왕의 증조부 서치별황자가 주길중황자(=응신)와 준인 소바까리(=진언)를 죽이고 신궁에 거하고 있는 태자에게 "정이 이미 평안해졌습니다"라고 보고하여 가야계 동성대왕이 백제·왜 대통합왕국을 이룬 후에 아신왕의 직계손인 무령왕이 그것을 물려받은 것을 비유적으로 기술하였고 고사기 이중기에는 아지직(=아신) '藏官'에 임명하고 양지(=열도)를 주었다고 표현하여 무령왕 이후는 백제가 망할 때까지, 열도의 왕권을 아신왕의 후손들이 대대로 차지하였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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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세 수정천황(神井名川耳)        

신무의 황자에 수연이명이란 이름이 나오는데 무내숙니(귀수의 장자)를 달리 꾸민 인물로서 서기 수정전기에 수연이명을 역시 신무의 중자인 신정명천이존과 그 형 신팔정이명이 제거하는 스토리가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그 서형 수연이명은 나이가 들고 조정의 일을 오래 하였다. 그래서 일을 맡기고 친히 하게 했다. 그런데 그 왕은 뜻을 단단히 세워 품고 있는 마음씨가 원래 인의에 어긋나 국상중에 (천황의) 위엄과 복록을 마음대로 했다. 나쁜 마음을 품고 두 아우를 죽이려고 했다. 때는 태세 을묘(서기전 582년)다』      

『(11월) 신정명천이존이 그 형 신팔정이명과 함께 몰래 그 마음을 알아차리고 잘 막아내었다. 산능의 일을 마치자 궁부치언에게 활을 만들게 하고 왜단부 천진진포에게 화살촉을 만들게 하고 시부(矢部)에게 화살을 만들게 하였다. 활과 화살이 다 되었을 때 신정명천이존은 (*1)수연이명(手硏耳命)을 사살하려고 하였다...(중략)...신정명천이존이 그 문을 밀쳐 열었다. 신팔정이명은 수족이 떨려 활을 쏠 수가 없었다. 그때 신정명천이존이 그 형이 가지고 있던 활과 살을 빼앗아 잡고서 수연이명을 쏘았다. 한 대를 가슴에 맞추었다. 두 번째 화살을 등에 맞추었다. 드디어 죽였다. 이에 신팔정이명은 부끄러워 자복했다. 신정명천이존에게 양보하여 "나는 형이지만 유약해서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지금 그대는 무용이 뛰어나 원흉을 스스로 죽였다. 마땅히 그대가 천위에 나아가 황조의 업을 이어야 한다. 나는 그대를 도와 신기에 제사지내는 것을 맡겠다"라고 했다. 이가 곧 다신(多臣)의 시조다』

수연이명(手硏ㅇㅇ)란 이름에서 다기시[手硏]는 불구를 나타내는 말이다. 이것은 신대기 상5단의 4신출생장에서 「3년이 지나도 다리로 일어서지 못한」 질아(蛭兒)로서 무내숙니를 가리키고 있다. 도로가 평탄하지 않다는 말은 사람얼굴로 치면 '곰보'라는 뜻을 가지는 연결고리다.                                      
     
무내숙니의 이칭에 이가가시고오[伊香我色男]가 있는데 시고오[色男/色雄/色乎]는 시고오[醜男]라는 뜻으로서 이들 이칭과도 연결되는 것이다. 백제를 배신하여 밉다는 뜻이다. 고사기 대국주신 국양조에 「이즈모[出雲]의 다기시[多藝志]의 오바마[小浜]」라는 지명이 나오는데 천수일(=무내)이 출운신의 조가 되었다고 한 것과 연결고리다. 다기시[手硏]=다기시[多藝志]인 것이다. 이 다기시의 오바마는 서기 신대기 상8단 이설6 말미의 소언명명설화에 나오는 이사사[五十狹狹] 해변이다. 소언명명이 무내이기 때문이다.    

(*1) 「'다기시'는 도로가 평탄하지 않은 모습, 또는 다리 등이 오므라들어 바로 설 수 없는 모습<일본서기/암파문고/2000년/권1/199p/주12>」      

수연이명은 두 동생의 서형(庶兄)이라 하여 혈통이 다름을 시사하고 있다. 서기에는 두 동생으로 나와서 응신의 형인 예진별명은 빠져있으나 예진별명은 무내숙니가 제거된 후 몇 달만에 역시 전사했다. 그래서 둘만 등장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고사기에는 신팔정이명의 형으로 언팔정이명이 나와 수연이명의 동생이 셋이라고 했다. 그런데 성씨록에는 언팔정이명이 신팔정이명의 아들로 나온다. 언팔정이명은 수연이명을 제외한 신팔정이명의 형제가 전부 셋이었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꾸민 것이다.        

고사기 신무기 다기시미미(手硏ㅇㅇ; 무내숙니,수연이명,)의 반역조에 보면 신팔정이명이 장협국조의 조로 나오는데 서기 신대기 하9단 이설4에는 구주 서남부에 事勝國勝長狹이란 인물이 나오고 이 인물이 바로 신팔정이명이며 이 지역은 천일창이 건설한 구주신라 영역이므로 천일창=응신=신무=신팔정이명인 것이다. 이설4에는 事勝國勝神이란 이름도 등장하고 염토노옹이란 별칭이 있다 했는데 아라사등이다. 장협이 아들인데 그 부왕에게는 神이라 호칭하여 격을 높인 것이다.
             
신대기 하11단에서도 아라사등을 달리 꾸민 언파불합존의 아들이 넷 나오는데 무내숙니인 오뢰명이 포함되어 있다. 또 신팔정이명은 신무를 달리 꾸민 인물이고 그 동생에게 양위를 하는 것을 보면 응신은 당대로 끝나고 이복동생 진언이 진왕이 되는데 이가 바로 신정명천이존이라고 할 수 있다. 갈성에 도읍했다 하여 가야계임을 시사하고 있다. 갈성은 가라성이고 곧 가라국이라는 뜻이다. 즉 수정천황은 응신의 이복동생 진언을 등재한 인물인 것이다. 대륙사서에 찬왕(讚王=응신)의 아우 珍王으로 나오는 인물이다.  

다기시미미를 제거한 이 해가 태세 을묘 즉 서기전 582년이라 했는데 신무기에는 무오년 5월조에 기술되어 있고 실사상으로는 서기 384년으로서 단순히 보아도 966년이나 인상한 것이다. 신무와 수정의 순서는 대화왕조의 왕재위순서와 맞춘 것이다.      

3세부터 8세까지는 기사도 거의 없는 천황들이라서 누구를 꾸며 실었는지 식별하기가 어렵다.      


9세 개화천황(稚日本根子彦大日日)        

개화천황은 가야왕 아라사등을 등재한 인물로 판단된다. 개화천황의 중자가 후에 숭신천황이 되는데 숭신은 응신을 재등재한 인물로서 응신을 중자로 하는 인물은 아라사등일 수밖에 없다.    

開化란 한풍시호는 열도를 최초로 대규모로 개척했다는 의미를 직설적으로 표현한 이름이다. 열도에 선진문명을 본격적으로 열었다는 뜻이다. 그 개척설화가 신대기 상8단의 팔기대사설화, 수인기 2년 시세조의 액유각인설화다. 팔기대사설화는 시마네현의 이즈모[出雲] 제철단지를 개척한 것을 꾸민 것이고 액유각인설화는 열도의 북쪽 지금의 후꾸이현의 쯔누가[角鹿/敦賀]를 개척한 설화다.

또 청녕천황(白髮武廣國押稚日本根子)과 선화천황(武小廣國押盾)으로도 등재되어 있는데 청녕의 화풍시호에는 '稚日本根子'라는 동일한 키워드가 들어 있고 선화와는 '化'자 돌림이기도 하고 선화의 화풍시호에는 청녕의 화풍시호에 들어 있는 '廣國押'이라는 키워드가 들어 있다. 청녕의 화풍시호에 들어 있는 '백발'은 신대기 하9단 이설4와 신무전기에 등장하는 염토노옹과의 연결고리인데 아라사등은 서기에서 노인으로 종종 등장하여 예언을 하는 듯한 기사가 있고 고사기 경행기 왜건명의 동국정벌에도 불을 피우는 노인으로 등장하여 九夜十日을 예언하고 있는 것도 사례 중의 하나다.        


10세 숭신천황(御間城入彦五十瓊殖)  

이 천황의 소개기사에 「...幼好雄略(유호웅략)...」이라는 구절이 있어 웅략천황과 동일인물임을 암시해주고 있는데 웅략은 응신을 재등재한 인물이다. 또 한풍시호는 '神'자가 들어 있는 시호 넷 중의 하나인데 신공을 제외하면 신무, 숭신, 응신이 전부 동일인물이기 때문이다.      

서기 숭신기 12년 9월조에 '御肇國天皇(어조국천왕)'이라 하여 시조임을 알려주고 있는데 신무도 시조라 고 '始馭天下 之天皇'이라 하였고 시조가 둘일 수는 없으므로 숭신이 신무와 동일인물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신무=숭신=응신)인 것이다. 어(御: 임금)는 존칭이고 조국(肇國)은 '초개국(初開國)'을 의미한다.

서기 숭신기 10년 9월조에는 귀수대왕(근구수; 근초고왕의 아들)의 12만 대군과 접전을 벌여 도강하는 백제군을 기습수공하여 귀수대왕을 전사시키고 대승을 거둔 후에 패퇴하는 백제군을 추격하여 승전을 구가하는 대목이 달리 꾸며져 실려 있다.      

『무식안언(武埴安彦)이 처 오전원과 더불어 모반을 꾀하여 군사를 이끌고 갑자기 이르렀다. 길을 각 나누어 남자는 산배로부터, 여자는 대판으로부터 帝京을 공격하여 들어오려고 하였다. 이때 천황은 오십협근언명을 보내 오전원의 군사를 쳤다. 대판에서 막아 모두 대파했다. 오전원을 죽이고 그 군사를 모두 참했다. 다시 大彦을 和邇臣의 원조 언국즙과 함께 보내 산배를 향하여 식안언을 쳤다. 그때 기옹을 화이의 무조판 위에 놓았다. 정병을 이끌고 나아가 那羅山에 올라 싸웠다...(중략)...나라산을 떠나 진격하여 輪韓河에 이르러 식안언과 더불어 강을 사이에 끼고 진을 치고 서로 도발했다. 고로 사람들이 그 강의 이름을 바꾸어 挑河라 하였다. 지금 泉河라 하는 것은 말이 변한 것이다. 식안언이 바라보고 언국즙에 물었다. "어찌하여 너는 군사를 일으켜 왔는가". 답하기를 "너는 역천무도하여 왕실을 넘어뜨리려 하고 있다. 고로 의병을 일으켜 너의 반역을 치려고 한다. 이는 천황의 명이다"라고 했다. 이에 각자 활쏘기를 다투었다. 무식안언이 활을 먼저 언국즙에게 쏘았으나 맞히지 못했다. 언국즙이 나중에 식안언을 쏘았는데 가슴을 맞혀 죽였다. 그 군사들이 두려워 물러났다. 추격하여 하북에서 깨뜨렸다. 참수가 반을 넘었다. 시신이 많아 넘쳤다. 그래서 그곳을 하부리소노[羽振苑]이라 한다. 또 그 군사들이 무서워 도망갈 때 대변[屎]이 바지[ ]에서 새어 떨어졌다. 그래서 갑옷을 벗어버리고 도망하였다. 도망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땅에 머리를 조아리고 '我君' 하고 외쳤다. 고로 그때 사람들이 갑옷을 벗은 곳을 가와라[伽和羅]라 하였다. 바지에서 대변이 떨어진 곳을 구소바까마[屎 ]라 하였다. 지금 구스바[璋葉]라 하는 것은 말이 변한 것이다. 또 땅에 머리를 조아린 곳을 '我君'이라 한다』  

식안언(埴安彦)은 효원천황의 황자인데 「埴安의 음훈 '하니야스'는 "진흙 속에서 쉬는 것", 즉 진흙에 묻힌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근구수왕(귀수대왕)이 근강전에서 전사하여 비파호에 잠긴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백제에 의한 왜국통치 삼백년사/윤영식/1987년/387p>」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적절한 풀이로 본다.  
      
그런데 여기서 식안언(=귀수대왕)을 전사시킨 인물이 언국즙인데 성씨록에는 다음과 같이 초고대왕(근초고왕)의 후손으로 나온다.      

和邇部; 天足彦國押人命三世孫 彦國葺命之後也(우경황별)              

아마다라시[天足]는 아마데라스[天照]와 같아 천족언국압인명은 천조대신이므로 초고대왕이다. 그 3세손(=손자)은 무내숙니, 침류왕, 진사왕 셋인데 이 중에서 가야와 협력하여 초고대왕과 귀수대왕을 차례로 전사시킨 인물은 무내숙니다. 언국즙명이 무내숙니인 것이다. 와니[和邇]는 와니[王仁]를 같은 음의 다른 한자로 바꾼 성씨다.  

지금 이 기사는 귀수대왕의 12만 대군이 가야군의 기습수공을 당하여 귀수대왕이 전사하고 패주하는 장면이다. 서기로 384년 2월이다. 근강전투와의 연결고리로 「기옹을 와니[和邇]의 무조판 위에 놓았다」라고 했다. 기옹은 근강전투에서 강을 막았던 물막이를 뜻하고 '와니'는 왕인 즉 귀수대왕을 가리키며 무조판은 언덕이름이다. 와가라가와[輪韓河]는 근강을 달리 이름지은 것 같다.        

오전원(吾田ㅇ)을 죽였다는 것은, 여성은 영토를 은유하고 아다[吾田]가 '아라가야땅'이라는 뜻이므로 가야본국과 구주를 빼앗겼다는 뜻이다. 하후리소노[羽振苑]는 원래 시체를 버리는 곳이라 하는데 백제군의 전사자가 많았다는 뜻이다.  

「바지에서 대변이 떨어진 곳을 구소바까마[屎곤 ]라 하였다. 지금 구스바[樟葉]라 하는 것은 말이 변한 것이다」라는 것은 이 전투가 귀수대왕의 군대와 싸운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구소바까마'라는 것은 핑계고 구스[樟]>구스[貴須]라는 키워드로 패주하는 측이 귀수대왕의 군대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고사기에서는 구스바[久須婆]라고 하여 휘인 須를 넣어 지었다. 근강전투에서 이긴 쪽은 가야의 예진별명, 예전별명, 진언, 무내숙니 등이다.  

위의 인용문에 이어서 보면 대물주신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대물주신이 밤에만 오므로 처가 그의 모습을 볼 수 없다 하니 처 왜적적희명에게 대물주신이 자신의 형체를 보여주는데 예쁜 작은 뱀[美麗小蛇]으로 변하여 나타난다. 가야계는 해신으로서 용 또는 뱀으로 은유된 경우가 서기에 여러 차례 기술되어 있는데 그 사례 중의 하나다. 대물주신은 가야계이며 이것이 숭신기에 실려 있는 것은 숭신이 대물주신이라는 암시다.  

서기 수인기 2년 시세조에 화풍시호 미마기[御間城]에서 미마나[任那]가 나왔다고 했으나 이것은 원래음 가나[任那]를 숨기기 위해 지어낸 음이다. '미마나'의 어원을 보면 숭신천황의 화풍시호에 들어있는 '어간성(御間城)'에서 어(御)는 존칭이니 떼고 간성(間城)을 반도어로 생각해보면 '사이/새 間'이다. 성(城)은 金城>新羅의 예에서 보듯이 羅, 那, 國과 대치해 쓸 수 있는 말이다. 여기서 '사이/새 間'의 훈 '새'의 음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뜻이 다른 '새 新'으로 한자를 바꿀 수 있다. 따라서 '間>新'으로 '城>羅'로 치환을 하면 新羅가 되고 이것은 삼국사기 지리지 함안군조의 아라가야의 고명 아시라[阿尸良]를 한역한 新羅와 같아진다.      

※ "아라사등의 황우설화" 참조

숭신천황의 시호에 이런 키워드를 넣어둔 것은 이 인물이 아라가야출신임을 알려주기 위해 지어 붙인 것이다. 서기 384년에 귀수대왕을 전사시키고 백제군을 대파한 가야측은 예진, 예전, 진언, 무내 등인데 그 중에서 시조로 등재할 만한 인물은 응신뿐이다.    

서기 숭신기 9년 3월조에 묵판신과 대판신이 나오는데 묵판신은 고사기 이중기의 응신의 이칭 묵강중왕과 '墨'으로 연결되므로 응신이고 대판신은, 대판 근방 난파에서 가야의 기습화공에 말려 전사한 초고대왕을 가리킨다. 오오[大]>近, (ㅅ+아래아)(ㄲ+아래아)>(사까, 소꼬)이므로 오오사까[大坂]는 '近速古'와 같은 뜻이다. 소꼬[速古]는 초고대왕의 열도시호다. '오오사까'라는 지명도 초고대왕의 시호에서 나온 것이다.            

서기 숭신기 65년 7월조에는 임나국의 소나갈질지가 등장하는데 중자 응신을 천황으로 등재하고 그 부왕을 본국의 사신으로 등장시킨 것이다. 숭신기 60년 7월조에는 무일조명이 하늘에서 가져온 신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무내숙니가 가지고 도왜한 형칠지도를 가리키는 것이다. 

성씨록을 보면 가야계 모야씨와 주길씨가 숭신의 후손으로 나타난다.    

下毛野朝臣; 崇神天皇皇子 豊城入彦命 之後也(좌경황별)
上毛野朝臣; 下毛野朝臣同祖 豊城入彦命五世孫 多奇波世君 之後也.....(좌경황별)
池田朝臣;    上毛野朝臣同祖 豊城入彦命十世孫 佐太公 之後也(좌경황별)
住吉朝臣;    上毛野同祖 豊城入彦命五世孫 多奇波世君 之後也(좌경황별)      

상모야, 하모야는 계체기에 등장하는 毛野臣의 후손인데 숭신의 후손으로도 나오는 것이다. 다까하세[多奇波世]는 응신의 형 예진의 이칭이다. 주길신사는 가야계 네 신을 모신 신사로서 제신이 예진, 예전, 신공 등이다. 숭신은 가야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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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천황 출신계보 및 시호분석    

기ㆍ기는 백제가 반도에서 멸망하고 동조가 있던 열도로 건너가서 반도와의 인연을 끊고 열도에서 자생한 왕조처럼 꾸민 역사서다. 따라서 그 전에 열도의 패권을 놓고 다투던 역사까지도 흡수 기술하게 되었고 그래서 피아가 모호하게 사서를 저술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기ㆍ기를 저술할 당시의 열도 귀족구성을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모두 20대 호족(豪族)이 있는데 12대 족벌(族閥)이 백제계고 8대 족벌(族閥)이 가야계로 신찬성씨록에 나온다. 말하자면 "한 지붕 두 가족"인 것이다. 그래서 대체로 가야왕족을 천황으로 등재했을 때는 백제가 적으로 나오고 백제왕족을 천황으로 등재했을 때는 가야가 적으로 나온다.    

똑같은 내용을 가야 중심으로 기술할 때와 백제 중심으로 기술할 때 이칭이 필요하고 지명도 당초지명에서 인접한 곳의 지명, 또는 다른 이름을 지어 사용하게 된 것이다. 그 이전에 서로 다투던 역사를 직필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사정에서 분식을 하다보니 수많은 이칭들을 지어 쓰고 시대를 무시하고 연대를 무려 천년을 상대로 밀어 올리기도 하고 실사의 편년을 무시하고 이리저리 기사를 흩어놓은 것이다.    

신무천황과 숭신천황 사이의 천황들은 기사다운 기사가 없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한 사람의 왕을 여러 천황으로 등재하고 왕이 된 적도 없는 인물을 천황으로 등재하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천일창은 일곱 천황으로 등재되었다. 신공황후 포함하여 41명의 천황 중에서 실존했던 인물은 12명 정도밖에 안 된다. 그것도 신공처럼 왕이 된 적이 없는 인물도 있다. 실제로 열도의 왕을 지낸 인물은 오히려 천황으로 등재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일본고대사에 있어서 여자천황은 실제로는 없었다. 기ㆍ기상 여자천황은 실제로 딱 두 인물을 여러 차례 등재한 가공의 천황이고 아라가야왕 아라사등의 딸 둘을 꾸며서 등재한 인물들이다. 일본의 천황으로 꾸며진 인물들은 아래와 같다.  


○ 가야왕족

1. 가라왕 아라사등이 개화(開化), 청녕(淸寧), 선화(宣化) 등 셋으로

2. 아라사등의 장자 예진별명이 반정(反正), 안한(安閑) 등 둘로

3. 아라사등의 중자 천일창이 신무(神武), 숭신(崇神), 응신(應神), 웅략(雄略), 계체(繼體),
                                       숭준(崇俊), 천지(天智) 등 일곱으로

4. 아라사등의 삼자 진언이 2대 수정(綏靖)천황으로

5. 아라사등의 장녀 반장희가 신공(神功)황후, 황극(皇極), 제명(齊明) 등 셋으로

6. 아라사등의 차녀 목화개야희가 추고(推古), 지통(持統) 등 둘로

7. 아라사등의 고손자 동성대왕이 무열(武烈), 흠명(欽明), 서명(舒明) 등 셋으로 등재되어 있고   


○ 백제왕족

1. 초고대왕이 이중(履中), 인현(仁賢) 등 둘로

2. 귀수대왕이 수인(垂仁), 경행(景行), 윤공(允恭), 민달(敏達), 천무(天武) 등 다섯으로

3. 귀수대왕의 장자 무내숙니가 성무(成務), 인덕(仁德) 등 둘로

4. 귀수대왕의 중자 침류왕이 중애(仲哀), 현종(顯宗), 용명(用明), 효덕(孝德) 등 넷으로

5. 귀수대왕의 삼자 진사왕을 안강(安康)천황으로 등재하였고    

기타 3대부터 8대까지 6명은 식별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기사가 없는 공백상태다. 또 위의 반장희를 등재한 황극과 제명은 동일인이다. 황극천황은 서명천황의 황후로서 서명천황이 몰한 후에 황극천황이 되었다가 효덕천황에게 양위하고 효덕이 일찍 죽자 다시 천황이 되어 제명이라는 시호를 하나 더 가지게 된 경우다. 말하자면 천황을 두 번 역임한 것이다. 이리하여 기사가 부실한 6명을 제외하고도 12명으로 34명을 만든 셈이다. 무려 세 배 가까이 늘렸다.      

연대는 빨라야 360년대 정도부터 700년까지 350년 정도인데 서기전 660년까지 밀어 올려서 대략 4배로 늘렸다. 실질적으로 열도의 독자적인 역사는 백제가 망할 때까지는 대화왕조 4대밖에 없다. 그것도 가야의 김씨왕조였고 기간으로 정확히 90년 간이다. 가야계인 동성대왕의 대통합왕국 포함하면 113년 간이다. 그 중에서 응신을 제외한 3명의 왜왕은 아라사등의 삼자와 그 후손들인데도 진언을 제외하고는 천황으로 등재하지 않았다. 천신(天神)이 아니고 국신(國神)이라고 신분차별을 한 것이다. 그래서 대륙사서에 등장하는 왜왕 넷 중에서 응신인 찬왕을 제외하고 진왕, 제왕, 무왕은 서기상의 동시대 천황과 매칭이 안 되는 것이다. 반도에서 열도로 직접 건너간 가야ㆍ백제왕족과 그 후손들만 천신ㆍ천손으로 분류한 것이다. 그래서 일인학자들 중에는 일본의 고대국가 형성시기를 서기 7세기말 정도로 보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 말을 뒤집어보면 일인들은 이런 서기의 실사내용을 다 안다는 얘기다. 이런 사정들을 알고서 기ㆍ기를 읽어야 하는 것이다.      


◎ 계보 및 시호분석              

1세 신무천황(神日本磐余彦)        

서기 신대기 하11단 본문에 언파염무노자초즙불합존이 아들을 넷 낳았는데 언오뢰명, 도반명, 삼모입야명, 신일본반여언존 등이고 신일본반여언존이 신무인데 언파불합존의 4자로 나오지만 제대로 된 서열은 이설3에 나온다. 삼모입야명과 순서가 바뀐 것이 맞는 것이다.    

언오뢰명은 신무전기 무오년 5월 8일 기국 조산에서 전사한 인물인데 귀수대왕의 장자 무내숙니다. 백제왕족이지만 칠지도를 들고 후왕으로 도왜하였으나 가야에 협력하였다고 가야인처럼 취급한 것이다. 신무의 형 도반명은 신찬성씨록에 신라왕족으로 아래와 같이 나온다.                              

新良貴; 彦波염武노자草葺不合尊男 稻飯命之後也 是出於新良國 卽爲國主 稻飯命出於新羅國王者祖合(우경황별)      

언파염무노자초즙불합존이란 기다란 이름은 통상 줄여서 언파불합존이라고 부른다. '시라기[新良貴]'라는 성씨는 언파불합존의 아들[男] 도반명(稻飯命)의 후손으로 되어 있는데 도반명은 「신라국출신이며 신라국주도 했다[是出於新良國 卽爲國主]」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시라기[新良貴], 시라기[新良], 시라기[新羅]는 전부 같은 이름이다. 형이 신라인이므로 당연히 신무도 신라인이라는 말이 된다.

이 신라는 경주신라가 아니며 삼국사기 지리지 함안군조의 아시라[阿尸良]>新羅이며 아라가야의 고명이다. 그래서 '아라가야인'이라는 뜻을 가진 아라시또[阿羅斯等 ;아라사등]라는 이름이 자주 등장하는 것이다. 언파불합존은 아라사등과 동일인물이다.  

가계가 언파불합존(=아라사등)> 도반명, 신일본반여언존(=신무), 삼모입야명이며 서기 흠명기 17년 정월조에 「築紫火君[百濟本記云 築紫君兒 火中君弟]」라고 나오는데 '축자군'에 대해 「筑紫國造家이며 繼體紀 22년 12월조에는 筑紫國造 磐井의 아들을 筑紫君葛子라고 쓰고 반정을 繼體記와 釋紀13所引 축후국풍토기에 筑紫君이라고 적고 있다<일본서기/암파문고/2000년/권3/325p/주13>」라고 하므로 이 가계는 축자군(=반정)> 화중군(도반명; 예진별명), 축자화군(신무; 응신)인데 반정이 아라사등이며 화중군이 도반명이고 축자화군이 신무다.    

火君은 신무 형제들이 화공으로 초고대왕을 전사시킨 것을 인연으로 만든 이름이고 신대기 하9단 이설2, 3, 4, 5에서는 도반명이 화명명, 신무가 언화화출견이라는 이름으로도 등장한다. '축자화군'에 대해 「肥(火)國의 호족, 神武記에 神八井耳命은 火君 등의 조라고 되어 있다<일본서기/암파문고/2000년/권3/325p/주11>」하고 성씨록에는 아래와 같이 나온다.    

多朝臣; 出自諡神武皇子 神八井耳命之後也(우경황별)            
火;       多朝臣同祖 神八井耳命之後也(우경황별)
肥直;    多朝臣同祖 神八井耳命之後也(대화국황별)

오호.노.아소미[多朝臣]는 오호.노.아소미[太朝臣]와도 같고 고사기저자 태조신안만려도 신무의 후손이다. 호[火]는 호[肥], 오호[多/太]와 같은 성씨다.    

서기 민달기 12년 7월조에 「 火·葦北國造(화위부국조) 阿利斯等(아라사등)의 아들 달솔 日羅(일라)」라고 나오고 시세조에는 「火·葦北國造 형부차부 阿利斯等의 아들 달솔 日羅」라고 나온다. 화·위북국조라는 것은 화국과 위북국을 관장하는 집안이란 뜻이고 형부차부란 법과 군을 장악하고 있다는 뜻으로 고대엔 곧 인 것이다. 화국은 지금의 구마모도현 서부지역이고 위북국은 지금의 구마모도현에 해당하며 아시[葦]는 '아침'이란 뜻이고 위북국은 北新羅라는 의미다. 이것은 구주 서남부에 있던 구주신라북쪽에 있는 신라라는 뜻이며 성씨록 '시라기[新良貴]'조에 나오는 신라는 이 두 신라와 본국인 아라가야의 고명 신라를 가리키는 것이다. 구주신라는 고사기 응신기에 실려 있는 천지일모의 신라국이며 서기 수인기 3년 시세조의 신라왕자 천일창(일라,예진별명,도반명,화중군)이 개척한 신라국이다.        

서기 민달기 12년 7월조를 계속 보면 일라가 모반을 하여 죽이려고 하는데 일라의 몸에서 화염 같은 빛이 나서 두려워 못 죽이다가 12월 그믐날 그 身光이 사라질 때 죽였다고 나온다. 日羅라는 이름은 바로 "몸에서 화염 같은 빛이 난다"는 의미를 이름으로 표현한 것인데 "빛이 사방으로 발산되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이 화염이란 말도 연결고리인데 성씨록에서 찾아보면 아래와 같이 나온다.    

爲名眞人; 宣化天皇皇子 火焰王之後也(우경황별)
爲奈眞人; 宣化皇子 火焰王之後也(섭진국황별)
川原公;    爲奈眞人同祖 火焰親王之後也(섭진국황별)  

민달기의 일라가 선화천황의 황자로도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고사기 수인기에 천황이 황후에게 아이의 이름을 지어라고 하자 「볏짚성[稻城]을 태울 때 火中에서 태어났으므로 호무지와께.노.미꼬[本牟智 和氣御子]로 하겠다」라고 하였는데 火中이 키워드로서 이 인물이 위에 나온 축자군(반정,아라사등 )의 장자 화중군(火中君; 도반명,예진별명)이며 축자화군(신무)의 형이다. 호무지[本牟智]는 호무쯔[品牟都], 호무쯔[譽津]라고도 하는데 '무쯔[牟都]'는 가야왕족 수직돌림자 '마다'계열 이칭이며 호[本/品]는 호[火]와 같기도 하고 존칭이기도 하다.  

또 고사기 개화기에 대오왕의 아들에 서립왕과 토상왕이 있다 했는데 서립왕을 품지부군(品遲ㅇ君)의 조라 하였고 이 호무지[品遲]도 호무쯔[品牟都/譽津], 호무지[本牟智]와 같은 이름으로 서립왕이 곧 화중군이기도 한 것이다. '새벽 서(曙)'는 아스까[飛鳥] 직전의 동성대왕시대를 가리키고 "새벽을 세운 왕" 즉 서립왕은 동성대왕의 증조부 예진별명이기 때문이다. 예진별명은 예전별명인 응신천황의 형이다.      

토상왕의 우사기[兎]는 고사기 신대기 대국주신조의 백토설화에 나오는 가야계를 가리키는 키워드이며 '上'은 가야계 중에서 가장 먼저 왕이 된 응신을 가리키는 키워드다. 토상왕이 응신이기 때문이다. 가계가 대오왕>(서립왕, 토상왕)이다. 오호마다[大오]왕은 오호마다[大派]왕과 같고 "큰 末多王"이라는 뜻이며 아라사등의 이칭인 고노마다간기[己能 末多 干岐]와도 같은 뜻의 이름이다.  

선화천황의 또 하나의 아들을 성씨록에서 찾아보면 아래와 같이 나온다.

多治眞人; 宣化天皇皇子 賀美惠波王 之後也(우경황별)        

화염왕이 예진별명이므로 그 아우 하미혜파왕은 응신이며 선화천황은 아라사등인 것이다. 다지[多治]는 서기 수인기 3년 3월조의 이설에 등장하는 淸彦의 아들 다지마모리[田道間守]의 다지[田道]를 한자만 바꾼 것이며 인덕기 53년 5월조에 등장하는 상모야군의 조 다까하세[竹葉瀨]의 아우 다지[田道]와 동일인물이다. 다까하세가 예진별명이고 다지는 예전별명 즉 응신이다. 가계가 선화천황>(화염왕, 하미혜파왕)이며 淸彦(청언)>전도간수이며 청언은 서기 신대기 상8단 팔기대사설화에 등장하는 소잔명존(=아라사등)의 이칭 淸이다. 청의 아들에 사루히꼬[坂輕彦; 예진별명], 야시마[八島; 예전별명,응신], 시노[篠; 진언]가 있는데 사루히꼬는 예진별명이고 야시마는 대팔주를 최초로 통일한 예전별명 즉 응신이며, 시노는 그 아우 珍彦이고 신대기 하11단의 삼모입야명인 것이다.          

서기 선화기 원년조에 보면 화염황자가 있고 아우에 상식엽황자도 있는데 일명 '椀子'라고 부르고 있다. 별명은 전부 키워드로서 연결고리로 쓰이므로 성씨록을 찾아보면 아래와 같이 나온다.      

三國眞人; 諡繼體皇子 椀子王之後也(우경황별)  
三國眞人; 繼體皇子 椀子王之後也(산성국황별)
酒人眞人; 繼體皇子 兎王之後也(대화국황별)      

선화천황의 아들 상식엽황자(=椀子)가 계체천황의 아들로도 되어 있고, 고사기 개화기에 나오는 대오왕의 아들 토상왕과 '주인진인'조의 계체천황의 아들 토왕도 같은 인물이다. 上은 상식엽황자의 上과 같은 뜻으로 가야계 중에서 가장 먼저 왕이 되었다는 뜻으로서 응신기 22년 9월조에는 上道縣이라는 지명으로도 나오고 응신의 후손 성씨 중에 上道臣으로도 표현되고 있으며 응신기 13년 9월조에는 上枝라는 말로도 표현하고 있다. 가장 늦게 왕이 배출된 장자집안 예진별명의 후손성씨에는 下道臣이 있다.        

마리꼬/마로꼬[椀子]는 뜻이 '그릇'으로서 응신의 별칭인 게히[氣比/사飯]와 같은 뜻이다. 응신이 완자와 동일인물이라는 암호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신무전기 무오년 9월조에는 귀수대왕과의 근강전투가 기록되어 있고 기미년 3월조에는 「이 달에 유사에 명하여 제택을 경영하게 했다」라고 나오며 이것은 실사상 서기 389년이고 응신이 즉위하기 전년에 해당한다. 이 무렵 아신과 백제·왜분립을 위한 밀약을 맺는 것이 서기 황극기 3년 정월조에 중신겸자와 중대형의 스토리로 꾸며져 실려 있다.  

서기 신무기 원년 정월조에는 신무를 시어천하지천황(始馭天下之天皇)이라 부르고 있는데 "처음으로 천하를 다스린 천황"이라는 뜻으로서 신무가 시조라는 의미인데 왜의 최초의 왕조는 서기 390년에 성립된 대화왕조이므로 그 초대왕 응신과 신무가 동일인물인 것이다. 그래서 신대기 하11단에는 신무의 어릴 때 이름이 사노[狹野]라고 하고 있는데 이것은 응신의 본명 讚을 열도어로 음독한 사노[讚]와 같은 것이다.              

신무천황은 가야왕 아라사등의 중자로서 대화왕조를 연 응신을 달리 꾸민 인물 중의 하나다. 신라왕자 천일창이 가져온 신보 중에 '이사사[膽狹淺]'의 大刀가 있는데 응신의 별칭 '이사사[去來紗]'별신과 같아 천일창이 곧 신무이기도 한 것이다.  

출처 블로그 > 또다른 세계
원본 http://blog.naver.com/wjdrudtkdsla/80010950812
칠지도와 응신으로 본 왜왕가의 비밀은?

칠지도와 응신으로 본 왜왕가의 비밀은?
일본 최초의 국가인 야마토왜를 세운 응신왕도 백제 왕족
 
성훈 칼럼니스트
 
본 글은 아래 3부작의 (2부)입니다. 
(1부) 백제 부흥군을 지원한 왜왕가의 정체는?
(2부) 칠지도와 응신으로 본 왜왕가의 비밀은?
(3부) 백제의 분국인 왜의 위치는 어디인가?


2007년 하반기에 MBC에서 <태왕사신기>라는 24부작 판타지 역사드라마를 방영했다. 이 드라마는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복군주였던 광개토태왕의 일대기를 그린다하여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드라마 제작비는 대략 약 450억원이 들었다고 발표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의 역사드라마에 일본 자금이 들어와 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제작사측은 MBC에 24부작을 50여억원에 팔고, 나머지는 해외 수출 특히 일본 수출로 제작비를 충당하겠다는 의도였다. 일본 흥행이 성공해서 제작사가 돈을 벌었는지 손해를 받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여하튼 한국의 역사드라마 제작을 일본 자금으로 했다는 불상사는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결국 드라마의 내용 즉 광개토태왕의 진실된 역사가 일본에 의해 훼손되어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잘못 전해진 것이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제2의 광개토태왕 비문훼손사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왜 태왕사신기라는 드라마에 일본 자금이 개입되면 안 되는지 그 이유를 아는 국민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그러다보니 이 드라마가 연말에 시청자가 뽑은 드라마대상을 받는 불상사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것은 이 나라 매국식민사학자들이 역사의 진실을 국민들에게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하튼 우리나라 국민들의 역사인식의 수준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시청자 투표에 의해 2007년 올해의 드라마로 선정된 <태왕사신기>
 
일본의 자금이 <태왕사신기>에 들어온 이유는 단순한 상업적인 목적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다. 일본의 배급사가 한국의 역사드라마가 일본에서 흥행성이 있다고 판단되어 그 큰 돈을 투자한 것이라고 보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전혀 되지 않는다. 일본은 다른 목적이 있어 자금을 집어넣고는, 흥행을 위해서 일본 아줌마들에게 큰 인기가 있는 배용준을 캐스팅하라고 주문한다.

상식적으로 볼 때, 배용준을 캐스팅해서 겨울연가와 같이 돈이 적게 들어가는 현대극으로   만들어도 일본에서는 흥행이 된다. 단지 흥행이 목적이었다면 돈이 많이 들어가는 역사드라마를 만들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왜 일본은 한국의 역사드라마에 엄청난 자금을 집어넣었을까?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 이유는 다름 아닌 당시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라이벌이었던 야마토왜국 응신왕에 대한 비밀이 한국드라마에서 언급되는 것을 극도로 꺼렸기 때문이다. 결국 일본은 자금을 집어넣고는 금기시되어있는 응신왕에 대한 이야기를 아예 드라마에서 빼버렸다. 최초 백제 아신왕 역으로 캐스팅되었던 송일국씨가 도중하차된 것이 그 이유라 하겠다.

광개토태왕 당시 중국은 5호16국으로 잘게 쪼개져 있어 고구려의 적수가 되지 못하였다. 광개토태왕의 유일한 적수는 바로 중국대륙의 동부를 지배하고 있던 백제뿐이었다. 당시 백제는 왜의 응신왕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그래서 아신왕과 응신왕에 대한 이야기가 태왕사신기에서 빠지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이 밝혀지기를 꺼린 응신왕이란 과연 어떤 인물인지 지금부터 하나하나 밝혀보기로 하겠다.

왜왕가의 혈통을 이룬 응신이란 인물은?

지난 주 (1부)에서는 응신왕의 5대손인 26대 왜왕인 계체왕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내려오는 현 일본왕실의 혈통에 대해 알아보았다. 일본왕실의 족보인 신찬성씨록과 일본의 국보인 인물화상경을 통해본 왜왕가의 핏줄은 백제에서 건너간 왕족임이 확실히 밝혀졌다. 그렇다면 계체왕 이전의 25명의 왜왕의 혈통은 어떠한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 백제왕족으로 야마토왜국을 세운 응신왕
<일본서기>를 보면 신대(神代)를 거쳐, 1대왕인 신무(神武)왕으로부터 14대 중애(仲哀)왕까지 나오고 다음 신공왕후의 대를 거쳐, 15대 응신왕이 집권하여 일본 최초의 고대국가인 야마토왜를 세우는 것으로 되어 있다. 야마토왜국은 응신으로부터 시작하여 25대 무열왕까지 11명의 왕이 있었고, 무열왕이 후사 없이 죽자 백제 무녕대왕의 남동생 격인 계체왕이 추대된다.

그러한 응신왕의 혈통이 어떠한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실제로 <일본서기>를 보면 화려한 수사구어를 가진 일왕의 명칭이 15대 응신조에 와서 간단히 된 것은 왕조의 교체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리고 응신왕의 즉위는 2주갑(120년)을 올린 390년으로 보아야 옳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의문점이 하나 있다. 일본 최초의 고대국가인 야마토왜를 세운 사람이 응신왕이면 그 이전에는 국가라는 형태가 없었다는 말인데 어떻게 응신왕이 15대 왕이 될 수 있는지? <일본서기>에 나와 있는 그 이전의 14명의 왕과 신공왕후는 허구의 인물이란 말인가? 아니면 야마토왜 이전에 다른 형태의 국가가 있었단 말인가?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일본서기>의 초기 왕통에 대한 기록은 사실상 허구로 보아도 무리가 아니다. 일본 역사에 있어 신(神)자가 사용된 왕은 1대 신무(神武)왕, 10대 숭신(崇神)왕, 신공(神功)왕후, 15대 응신(應神)왕 이렇게 네명 뿐이다. 이들은 모두 건국자 또는 정복자를 의미한다.

중국의 <남사>와 <양서> 왜전에 보면 “진 안제 때 왜왕 찬이 있었고, 찬이 죽자 동생 미가 섰고, 미가 죽자 아들 제가 섰고, 제가 죽자 아들 여가 섰고, 여가 죽자 동생 무가 섰다.(晋安帝時 有倭王讚, 讚死 立弟彌, 彌死 立子濟, 濟死 立子與, 與死 立弟武)”는 기록이 있다. 진안제의 재위기간은 AD 396~418년이다. 따라서 왜왕 은 응신왕이다. 참고로 맨 마지막 立弟武의 는 무녕왕을 밀함이다.

<일본서기 신대 하의 제11단 신황승운>에 보면 신무왕의 어릴 때 이름이 협야(狹野)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협야는 ‘사노’로 발음되며 바로 찬(讚)의 음인  ‘산’에서 온 것이고,  이 찬(讚)을 훈독하면 응신의 이름인 호무다(譽田)의 ‘호무(譽)’와 일치한다. 즉 왜왕 찬(산)이란 이름을 음으로 읽으면 1대 신무왕의 협야(사노)가 되고, 훈으로 읽으면 호무다의 호무 즉 응신이 되는 것이다. 참고로 응신(應神)의 일본식 이름은 호무다(譽田)로 <신찬성씨록>에 보면 진(眞 또는 眞人)씨의 시조가 된다.

따라서 <일본서기>의 1대 신무왕은 바로 15대 응신왕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상게서에 따르면 숭신왕은 담담허존이고, 신공왕후 이후 120년은 공백기(실제로는 백제왕의 직할통치기)이며 응신왕이 곧 시조인 천무왕이라는 이론이 있을 정도로 왜(일본)의 역사는 아주 짧다 하겠다. 결국 일본서기의 응신 이전의 14명의 왕은 허구의 왕이던가, 아니면 조그만 부족의 부족장이었기 때문에 <일본서기>를 편찬하면서 일본(왜)의 역사를 길게 하기 위해 조작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14대 중애왕의 왕후였던 신공왕후가 섭정하여 69년 100세의 나이로 죽고 태자 응신이 즉위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15대 응신왕은 신공왕후의 섭정 3년에 태자가 되고, 신공왕후의 사후 AD 270년 70세에 등극하여 110세에 죽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응신왕은 66년간을 태자라는 신분으로만 있었고, 신공왕후는 아들 나이가 70살이 되도록 섭정한 모후였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믿어야 하는지?

▲   1991년 출판되어 일본서기 속의 노래인 와가(和歌)가 한국어임을 밝힌 책
 
김성호선생은 1982년 <비류백제와 일본국가의 기원>에서 응신대왕을 비류백제의 마지막 왕으로 묘사하는 이론을 펼친 적이 있다. 상당히 설득력 있는 이론이라 그냥 흘려버리기에는 아까운 이론이었으나, 필자는 김성호선생의 이론은 두 가지 관점에서 오류가 있다고 본다.
첫째는 백제를 한반도로, 왜를 현 일본열도로 설정하여 역사의 이야기를 전개한 것이고
둘째는 온조백제(십제)와 비류백제(백제)를 별개의 국가로 본 것이다.

이 두 가지 점만 보완되었더라면 김성호선생의 이론은 천하제일의 이론이 아닌가 한다. 분명 현 일본열도는 백제와 관련 있던 당시 왜국의 땅이 아니다. 그 이유는 백제의 주무대는 한반도가 아닌 중국대륙의 동부 평야지대이기 때문에, 백제와 왜의 유기적인 교류도 결국 중국대륙에서 일어난 일로 보아야 할 것이다. (3부에서 설명)

그리고 온조백제와 비류백제를 별개의 국가로 볼 것이 아니라 비류의 죽음 이후 하나의 백제 안에 온조계와 비류계가 공존하고 있던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겠다. 실제로 백제에서 비류계로 분류되는 왕은 8대 고이왕, 9대 책계왕, 10대 분서왕, 12대 계왕, 22대 문주왕, 23대 삼근왕, 24대 동성대왕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김성호선생의 <비류백제와 일본국가의 기원>을 연구한 ‘잃어버린 한국고대사연구회’의 홍순주회장이 최인호씨의 <제4의 제국>이란 책과 TV 다큐멘타리를 비판한 주장을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백제의 온조계는 북부여 해모수 계열이라 해(解)씨이고, 비류계는 졸본부여 계통으로 진(眞)씨를 쓴다. (이 이론대로라면 비류와 온조의 부계가 다르다) 온조계인 13대 근초고왕은 전왕인 계왕(비류계)을 시해하고 왕위에 오른다. (중국 사서에는 당태종이 대륙백제의 역사를 말살하였기 때문에 선비족 모용수가 세운 전연이 부여족을 침략한 기사로 위장되어 있다고 한다).

계왕의 아들인 진정과 손자인 응신은 근초고왕을 피해 가야로 옮겨갔다가, 왜로 건너가 왜에 정착하며 세력을 규합한다. 근초고왕에게 계속 저항하던 비류계 진정/응신 세력은 1차로 AD 368년 근구수태자에게 밀려 가야인와 함께 왜로 도피하고, 2차로는 AD 396년 고구려 광개토태왕에게 패하여 응신 세력이 자신의 본거지 왜로 달아나, AD 405년 야마토 왜(大和倭) 정부를 세우게 된다.
=> 다른 견해는 가야 세력이 왜로 거너가 나라는 세웠다는 것이다 .(김해 대성동 고분)
    가야인들이 광개토호태왕 공격 이전에 비류계에 지배를 받고 있다는 고고학적 근거는 무엇인가?
    응신의 아버지가 진정이 아라사등(阿羅斯等)이면 가야인이지 어떻게 비류계 백제인이라는 말인가?
    아라사등 이름 자체가 '아라가야 사람'이라는 의미이고 안라의 옛 이름이 아시라이고 이는 신라(新羅)이다.
 

가야인들은 광개토태왕의 공격 이전 수십년 전에 이미 북방 기마민족으로 표현되는 비류계 백제인인 진정/응신 세력의 지배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참고로 <일본서기>에서는 응신의 아버지인 진정이 아라사등(阿羅斯等)과 동일 인물로서 아라가야왕으로 나온다. 그래서 AD 400년 호태왕 비문의 종발성 전투에서는 가야 + 왜의 연합군이 고구려 + 신라의 연합군과 대결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비류계 세력이 백제를 떠나 가야의 외래 지배세력이 되었기 때문에 현지 원주민인 가야 세력과 겹치게(Overlapping)되어 결과적으로 이 최인호씨의 “제4의 제국”이란 다큐멘타리에서는 응신을 토박이 가야인으로 착각하였고 이들 제4의 제국인 가야인들이 일본으로 간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  비류계 진정과 응신은 온조계 근초고왕에게 쫓겨 가야로 도망온다. 근구수태자가 계속 추격하자 왜로 간다.
[대륙사관 4국 개념으로  본 왜의 위치]

금관 가야국에서 초대 김수로 왕처럼 갑자기 외부에서 나타나 귀지설화의 주인공이 되어 의문시 되었던 그리고 현지 가야 지방을 정벌한 북방 기마민족의 정체는 온조계 근초고왕 세력에게 왕권을 빼앗긴 비류계 진정과 응신으로 대변되는 백제인이었다.

AD 350년 경 이들에게 패하여 왜로 이동한 첫번째 가야 세력이 숭신왕 계열의 가야민족이라고 추정되며, AD 396년 경 광개토태왕이 왜의 응신과 연합한 아신왕의 백제를 침공하였을 때 응신이 자신의 지배아래 있었던 가야인들과 함께 두번째로 왜로 이동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백제의 아신왕은 광개토태왕에게 백년노객이 되겠다는 맹세와 함께 항복해 버리고, 응신은 패해 왜로 돌아왔으나 앞으로 광개토태왕 때문에 백제로 돌아갈 가능성이 보이지 않자 A.D 405년 아예 왜 땅에 눌러앉아 국가를 세우게 된다, 이것이 일본 최초의 고대국가인 야마토왜(大和倭)인 것이다.

이러한 응신왕의 역사적 사실인 응신왕 = 백제인이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 일본은 태왕사신기에 엄청난 자금을 집어넣고는 응신왕의 이야기를 드라마에서 아예 빼버리도록 압력을 가한 것이다. 그런 이유로 태왕사신기는 광개토태왕의 전쟁이야기인 아신왕과 응신왕의 이야기를 언급하지도 못하고, 두 자매 사이에서 방황하는 연애쟁이로 묘사된 것이다.

▲  가야를 집중 조명한 최인호씨의 소설 '제4의 제국'
 
칠지도는 근초고왕이 왜왕에게 하사한 신임장

백제의 전성기를 이끈 대왕을 꼽으라면 단연 13대 근초고대왕(초고대왕)과 24대 동성대왕이다.  근초고왕은 당시 동북아의 강자인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국세를 확장하였다. 그리고 대륙 깊숙이 요서.진평지역 뿐만 아니라 대륙 남부인 왜 땅까지 정벌하는 등 많은 담로(식민지)를 건설한 것으로 보인다. 그 식민지 중의 하나가 바로 왜(倭)였다.

근초고왕은 계왕을 시해하고 왕위에 오르고는 계왕의 아들인 진정과 응신을 계속 추격한다. 최초 가야지방으로 들어간 진정/응신 세력은 근구수태자(귀수대왕)의 공격을 받자 다시 왜 땅으로 쫓겨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시 백제는 천하무적이었다. 왜로 도망간 응신은 같이 왜로 들어간 가야세력을 기반으로 하여 반격의 기반을 마련한다.

백제 역시 왜로 들어간 응신세력을 토벌하기 위해 왜에 식민지(담로)를 건설한다. 이렇게 왜에 식민지를 건설한 백제는 왕자를 보내 왜왕으로 삼아 통치하게 한다. 부왕 근초고왕으로부터 왜왕으로 임명된 인물은 근구수태자였다. 그러면서 그 신임장으로 하사한 것이 그 유명한 칠지도이다. 칠지도란 과연 어떤 것인지 알아보기로 하자.

일본 나라현 이소노가미(石上) 신궁(神宮)에는 고대로부터 전해지고 있는 한자루의 희귀한 칼이 있는데 그 이름은 칠지도(七支刀)라 한다. 이 칼은 75cm 되는 주 몸체 양 옆에 각각 3개의 가지칼(支刀)이 있는데  그 형태는 사슴뿔이나 나뭇가지 모양의 창(槍)과도 같은 이상한 형태의 칼이다.

이병도도 이런 형태의 칼을 중국에서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이 칼이 주목을 받은 것은 형태도 형태이지만, 바로 그 칼에 새겨져 있는 명문 때문이다. 명문은 앞면에 34자 뒷면에 27자 도합 61자이다. 이 중 7자는 글자의 훼손이 심해 전혀 알아볼 수 없으며, 다른 8자는 글자의 획이 확실치 않을 뿐 글자체는 그런대로 알아 볼 수 있었다.

(앞면) 泰X四年 X月十六日 丙午正陽
         造百鍊銅七支刀 生?白兵
         宜供供 侯王XXXX作

(뒷면) 先世以來 末有此刀 百慈王世X
         寄生聖音 故爲倭王旨造 傳示後世

일본학자들의 통설(通說)은  '泰X'를  중국 황제의 연호로 단정하고 동진의‘太和’라는 연호를 끌어들였다. 이는 369년으로 <일본서기> 신공기 52년조의 ‘칠지도헌상’의 기사와 맞는다는 억지 이론이다. 여하튼 일본 금석 명문해석의 대가인 후꾸야마(福山)교수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태화 4년 정월 십일일의 순양일중의 때에 백련의 철로 칠지도를 만든다. 이것으로서 백병을 벽제(?除)하고 후왕의 공용(供用)에 마땅하고.....만든다.
선세(先世) 이래 아직 본 일이 없는 이 칼을 백제왕과 왕세자는 같이 삶을 임금의 은혜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왜왕의 상지(上旨)에 의해서 만드니 길이 후세에 전할 것이다.


후꾸야먀교수의 해석은 있지도 않은 중국의 연호를 끌어들여 <일본서기의 신공기>를 합리화하는 해석이다. 학자로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해석으로 상상에 불과한 것이다. 일본의 사학을  따르는 이병도조차 “칠지도 명문의 泰자 아래 글자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중국 연호가 아닌 백제의 연호이다.”라는 단호한 주장을 했다.  

▲   나라현 이소노가미 신궁에 보관되어 있는 칠지도. 백제대왕이 왜왕에게 하사하는 신임장의 증표이다.


칠지도의 명문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내리는 하행문(下行文)의 형식으로 되어있다. 즉 대왕(황제)인 백제왕이 후왕(제후)인 왜왕 지(旨)에게 하사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泰X 四年’은 중국의 연호가 아니다. 여러 해석이 있으나 원광대 정치학과 소진철교수의 해석이 가장 눈길을 끌고 정확한 것으로 본다.  

泰X사년 X월십육일 병오일의 정오에 무쇠를 백번이나 두들겨서 칠지도를 만든다.
이 칼은 백병(재앙)을 피할 수 있어 마땅히 후왕에게 줄만하다.

선세이래 아무도 이런 칼을 가진 적이 없는데 백자왕은 세세로
기생성음(吉祥語)하므로 왜왕 지를 위해서 이 칼을 만든다. 후세에 길이 전할 것이다.


소교수는 백제왕이 만일 중국의 연호를 쓰는 제후급의 왕이었다면 왜왕 지를 후왕으로 부르지 못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했다. 그리고 왜왕 지(旨)는 외자를 이름으로 쓰는 백제왕가의 일원이라는 것이다. 여러 근거를 이유로 칠지도는 백제의 대왕인 근초고왕이 왜로 떠나가는 제후왕인 왜왕 지를 위하여 제작 하사한 것으로 본다. 참고로 백제대왕들이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는 백제의 고문서가 1996년 9월 일본 큐슈 미야자끼현의 미카도(神門)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독자들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아니 사학과 교수도 아닌 정치학과 교수가 어떻게 백제와 왜의 역사에 대해 논할 수 있느냐? 그거 믿을 수 있는 학설이냐?”라는 것인데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소진철교수의 이론은 백제와 왜의 역사적 관계를 정치학 교수의 입장에서 정리한 것이기 때문에 사학과 교수들보다 더 신빙성이 있다 하겠다.

한국의 사학계는 일제 때 조선사편수회를 계승하며 그 이론인 반도사관을 그대로 추종하는 집단이기 때문에 일본의 역사에 대해 언급하는 것조차 절대 금기사항으로 되어 있다. 즉 한국의 식민사학계는 일본이 정신적 이론적 고향이기 때문에 일본에게 불리한 이런 주장을 절대로 할 수가 없으며, 우리 역사에 대해서는 폄하하면서도 일본 역사에 대해서는 불리한 이론을  말하지 않는 특수성이 있다. 

백제와 왜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다. 일본 학계는 백제가 왜의 신속을 받았거나, 서로 문화를 주고받은 대등한 관계로 설정하고 있다. 이에 반하여 우리 학계는 백제가 왜에 선진 문명을 전수해준 정도로 보거나, 삼국이 모두 왜와 막연하게 상당히 깊은 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보고 있다. 상세한 내용은 금기사항이라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일본(왜)의 고대유물인 ‘칠지도’와 ‘인물화상경’의 연구로 백제와 왜는 대왕국과 후국 즉 황제와 제후의 정치적 관계였다고 소교수는 설명하고 있다. 이 연구는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 기록된 양국 관계의 기록과도 일치하고 있어, 특히 일본 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으며, 백제와 왜의 관계를 새로운 시각에서 재정립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왜는 백제의 담로로부터 출발

일본(왜)의 출발은 담로로부터의 출발로 보인다. <일본서기>의 신대 제4단 육팔주생성(六八州生成)에 보면 이런 기록이 있다. “아이를 낳을 때에 이르러서 먼저 담로주(淡路州)를 포(胞)로 하였다. 뜻이 불쾌하여 고명(故名)으로는 담로주라 하니 다음으로 대일본(야마토)라 한다." 이 문구는 일본의 역사는 (백제의) 담로에서부터 출발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아달라왕 4년(157년) 동해의 빈(濱)에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가 있어 부부가 되어 살았는데, 세오녀가 후에 신공왕후가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즉 세오녀 = 신공왕후 = 비미호(卑彌呼)의 관계가 성립된다고 김성호선생과 문정창선생은 주장한다. 두 사람의 이름에 다 까마귀 오(烏)자가 있음을 눈여겨 볼 일이다.

13대 근초고왕 때는 왜왕으로 근구수태자가, 14대 근구수왕 때는 침류태자가, 15대 침류왕 때는 아신태자가 왜왕으로 갔다. 즉 대대로 태자들은 백제의 왕위에 오르기 전에 왜에서 정치 실습을 미리 한 것으로 보인다. 아신태자가 왜에 간 것을 두고 <일본서기>에서는 “응신 15년 백제왕이 아직기를 보내 양마 2필을 바쳤다”고 은유적으로 기술한 것이라고 한다.

현재 일본에 백조삼능이라는 능이 있는데, 이 능의 주인은 바로 근초고왕, 근구수왕, 침류왕이라 한다. 당시 왜는 일본열도가 아니라 대륙의 남부나 큰 섬에 있었으므로, 이 능은 나중에 이장했거나 가묘로 보여진다. 여하튼 백제의 두 영웅인 근초고왕과 근구수왕이 응신을 정벌하다가 오히려 반격을 당해 왜 땅에서 붕어한다.

침류왕이 붕어하자 백제에서는 아신태자가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숙부인 진사가 왕위에 오른다. 이에 격분한 아신태자는 응신과 결탁하여 왜의 군대를 이끌고 백제로 온다. 아신은 응신에게 도움을 청하며 아신은 백제의 왕에 그리고 응신은 왜왕에 나누어 오르기로 서로 밀약을 맺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결국 숙부인 진사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아신왕은 빼앗긴 북방의 요새인 관미성을 되찾으려 했으나 광개토태왕에게 매번 패하고 만다.

396년 병신년은 당시 동북아의 정세가 뒤바뀌는 해였다. 광개토태왕은 직접 수군을 이끌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 백제의 수도를 공격했다. 백제의 주력군을 북방경계선에 배치한 아신왕은 광개토태왕의 후방기습공격에 허를 찔려 패하고 만다. 결국 아차산에서 백년노객이 되겠다는 맹세와 함께 광개토태왕에게 항복하고 만다.

▲    태왕사신기에서 방영된 백제 아신왕의 항복장면. 백년노객이 되겠다는 맹세와 함께 항복한다.
 
응신은 정황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변복을 하고 가야로 들어갔다가 왜로 도망간다. 이것을 <일본서기>에서 기록하기를, “16년 왕인이 왔다. 태자의 스승으로 하였다. 여러 전적을 왕인에게서 배웠다. 통달하지 못한 것이 없었다. 왕인은 서수(書首) 등의 시조다.”라는 기록인데 응신(應神)과 왕인(王仁)은 일본 발음으로 다 ‘오오진’으로 발음되어 동일인물이라고 김성호선생은 지적했다. 

백제의 아신왕이 고구려 태왕에게 항복하는 절대절명의 국가적 위기 속에서 <일본서기>처럼 백제가 한가로이 왕인을 보내 문물을 전했다는 것은 솔직히 이해하기 곤란한 면이 있다. 그래서 정황적으로 볼 때 김성호선생의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 기원>의 내용은 상당 부분 맞을 것으로 보인다.

광개토태왕의 가공할 위력 때문에 응신은 백제로 돌아갈 꿈을 접고, 아신왕이 붕어하는 해 인 A.D 405년 왜 땅에서 독자적으로 나라를 세우는데 이것이 바로 일본 최초의 고대국가인 야마토왜(大和倭)인 것이다. 즉 일본의 역사는 바로 백제왕족인 응신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는 계속 백제왕족과 그 후손이 왕위에 오르면서 오늘날까지 내려온 것이다.

▲  법륭사의 비밀문서인 '성예초'에는 백제 성왕이 왜왕을 겸했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백제 근초고왕은 귀족인 진모진을 왜에 파견하여 일본 최초의 백제조복(朝服)을 만들게 한다. <부상략기> 기록에 따르면, 당시 15대 오오진(응신)왕이 일본왕 최초로 백제조복을 입었으며, 그 후에 대대로 일본왕들이 입었고, 33대 스이코여왕 등극 때에는 참여한 만조백관 모두가 백제 옷을 입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백제와 왜와의 명령체계는 백제대왕 → 백제왕자 → 실권자 소가씨(또는 왜왕)이었다. <일본서기>기록에 따르면  당대 최고실권자인 소가우마코(蘇我馬子)는 일본에 온 백제왕자에게 향응을 제공하고, 백제왕자와 친히 대화(보고)했다는 기록을 볼 때 백제왕이 대리인인 백제왕자를  통해 왜국을 간접 통치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소가(蘇我)씨 가문은 당대 실권자로서 사실상 최고권력을 약 100년간 누리는데, 미즈노 유우의 저서 <천황가의 비밀>에 “이 소가씨 가문은 본래 한국에서 건너온 가문이다”라고 되어있다. 왜왕도 백제왕족이고 최고실권자도 백제귀족이면 당시 백제의 일본에 대한 영향력이 얼마나 막강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백제와 왜국의 정치적 관계는 단순한 중앙정부와 지방정권이라기 보다는 매우 가까운 형제국 이상의 특성을 보이고 있다. 즉 “왜국(일본)은 작은 백제”로 보아야 옳을 것이다. 일본인은 百濟라는 글자를 발음대로 ‘햐꾸사이’라고 발음하지 않고 ‘구다라’라는 고어로 발음하고 있다. ’구다라‘(크다> ㅗ모음 구다)는 대국(大國)을 의미한다는 주장도 있으나 아직도 왜 그렇게 발음하는지 그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고 있다.

▲     백제가 멸망한 이후 8세기 중반 의자왕의 아들 부여용(扶餘勇)의 자손들이 만든 백제왕신사. 역대 백제왕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아직도 일본에는 백제와 관련된 지명이 많이 남아있다. 그 중에서도 일본의 긴키(近畿)지방의 백제왕신사(百濟王神社)와 백제사(百濟寺)가 가장 유명하다. 백제왕신사는 백제가 멸망한 이후 8세기 중반 의자왕의 아들 부여용(扶餘勇)의 자손들이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역대 백제왕들의 위패가 모셔졌다고 한다. 그리고 오오사카(大阪)에는 백제역(百濟驛), 백제천(百濟川), 백제교(百濟橋), 백제대교(百濟大橋) 등이 있으며 나라(奈良)에도 백제촌(百濟村) 등이 있다.

▲   일본 오사카에 남아있는 백제의 흔적인 백제역. 현재 화물만 취급하고 있는 역이다.
 
고구려계와 신라계도 왜왕이 된 적이 있다.

백제계 뿐만 아니라 고구려와 신라계도 왜왕에 오른 적이 있다. 5세기 초반 고구려, 신라, 왜국 간에 다년간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고구려계의 왜왕으로는 18대 반정(反正)왕이 있다. <일본서기>에 반정왕은 담로궁에서 태어났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고구려 군이 왜군을 추적하여 담로도에 쳐들어가 승리한 고구려의 세력이 백제계 이중왕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른다. 

고구려계 반정왕은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신라계 윤공(允恭)에게 제거당한 것으로 보인다. 19대 윤공왕은 씨성(氏姓)을 바로잡아 고구려세력을 제거한다.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는 윤공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고 걱정하여 사절단과 조물을 보내고 그들이 행한 상례 등을 보면 윤공왕이 신라계였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고 민족사학자 문정창선생은 설명한다.

신라계 윤공왕 이후 20대 안강왕이 죽은 후 윤공왕의 5자를 칭하는 백제계 대박뢰(大泊瀨)황자가 재빨리 행동을 개시하여 왕위에 오른다. 21대 웅략왕부터는 다시 백제계로 왕권이 넘어간다. 이가 곧 송나라 순제에게 상표문(上表文)을 바친 왜왕무(倭王武)로 나중에 백제로 돌아와 무녕왕이 된다.  

이와 같이 역사가 짧은 섬나라 일본이 유구한 역사를 가진 조상의 나라인 조선을 식민지배 하려면 조선의 역사말살이 필요했다. 이런 역사를 그대로 남겨두어 조선인들이 이러한 백제와 왜의 역사를 알게 된다면 조선을 영원히 식민지로 지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일왕 특명으로 조선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하는 정책을 펴게 되는 것이다. 그 일환으로 설치되는 기관이 바로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였다.

그런데 해방 6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현 한국의 사학계는 일제시대 조선사편수회의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아 조상의 역사를 엉터리로 왜곡하고 있다. 단군은 아직까지도 신화이며, 삼국이 한반도 안에 있었다는 반도사관이 아직도 그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러다보니 동북공정과 일본의 역사왜곡에 전혀 대응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의 역사 이론 자체가 엉터리인데 어떻게 중국과 일본의 이론이 잘못된 것이라도 말할 수 있겠는가!!!

위에서 설명한 백제와 왜의 모든 상황은 한반도와 일본열도가 아닌 중국대륙에서 일어난 상황이었다. 다음 주에  ‘백제의 분국인 왜의 위치는 어디?’가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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