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숙 甘肅과 롱서 隴西 의 관계에 대하여

최두환 2008.12.27 09:02  http://blog.daum.net/chosunsachoyduhway/8755161

우리는 지금 조선의 력사를 연구함에 있어 가장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고 있는 것이 지명의 정체성이다. 력사 속의 그 지명이 현재의 지도 위에 있는 것과 동일하냐? 하는 것이다.
현재의 지도는 분명 력사 속의 지명으로 표시된 것이라야 할진대, 대개 그렇지 않기 때문에 력사학자들이 노고를 아끼지 않고 그것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특히 아시아=조선 력사의 패러다임에서는 이에 대해 아주 민감하게 접근하며 아예 통째로 부정하는 경우도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얼마만큼 변화가 있으며, 얼마만큼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는 정도의 차이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적어도 한반도가 조선의 터전이었다는 패러다임에서는 어떤 지명도 그대로 받아들여졌다고 본다. 아무리 한반도 북쪽이 만주이고, 고조선의 터전이 지금의 중국대륙의 동부지역을 상당히 차지했을 것이라는 강역의 주장을 인정하더라도 그것은 큰 테두리 안에서의 변화는 없다고 본다. 말하자면 한사군이 한반도 북부 료녕성 지역에 있다손 해도.
그러나 이젠 한반도니, 일본렬도로서는 조선의 중심적 력사의 터전으로는 인정하지 않으며, 아시아 자체가 꼬리아=조선이라는 패러다임에서는 모든 지명이 1900±50년 당시에 만들어 놓은 그대로를 결코 인정할 수 없다.
여러 곳의 지명을 한 곳으로 묶어서 편집하기도 하고, 한 곳의 지명을 다른 이름으로 고쳐서 여러 곳에다 붙여놓기도 했거니와, 아예 지명 자체를 다른 곳으로 옮겨버린 경우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웬만하면 그 지명 속에 들어있는 력사를 알 수 없게 되어 있다. 이 사실을 알 수 있다면 력사의 진실 찾기는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


좀은 어렵지만 결코 어렵지 않은 한 가지 사례의 지명의 이동된 현상을 찾아보자.

(1) 甘肅省: 在我國中部. 地居 西之西. 故亦曰隴西. … 禹貢雍州之域. [중국고금지명대사전]

이 말은 "감숙성은 우리나라[지금의 중국]의 중심부에 있다. 그 당은 롱서의 서쪽에 있다. 그래서 '롱서'라고도 한다. … 옛날 우공 시절엔 '옹주'의 땅이었다."는 말이다.
옛날엔 천하를 9주로 나누었는데, 그 가운데 "옹주(雍州)" 땅이 "감숙성"이라는 말이며, 곧 "롱서도"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롱서"라는 말은 도대체 무엇인가?

(2) 西突厥 : 동서쪽으로 44 N-56 E에서 44 N-96 E까지, 남북쪽으로 34 N-80 E에서 50 N-84 E까지.[중국력사지도집 제5책, p.30-31]

이 말은 "서-투르크"의 강역이 천산(天山)과 이식크호 [Issyk: 熱海]를 중심으로 동서쪽 5000km, 남북으로 1800km의 넓은 지역이라는 말인데, 그것이 수조(隋朝) 시절에 그랬다는 말이다. 그 서쪽이 무려 아랄해 서쪽을 넘는다.
그런데 이 "서-투르크[西突厥]" 지역이라고 지도에 표시된 것이 당조(唐朝) 때에는 어땠는가?
위의 책 p.63-64에 보면, 거의 같은 강역인데, 아프가니스탄[阿富汗] 지역이 더 포함디어 있고, 아랄해 서쪽이 잘려나갔을 뿐인 이 지역을 "隴右道西部"[롱우도서부]라고 하였다. 물론 그 중심지는 천산과 이시크호[熱海]이다.
이것은 지역이 西突厥[서-투르크]= 右道西部인 것이다. 물론 西=右이다.

 隴右에 天水가 있다. 그런데 "강/물"이라는 "水"를 가졌지만, 天水는 강이 아니다. 그 옆에 다른 이름의 강이 있다. 아마도 본디 강이름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西部"(서부)의 상대적 개념은 "東部"(동부)이니, 반드시 "롱右道東部"(롱우도동부)가 있을 것이며, "롱우도서부"의 동쪽에 있는 것이 당연하며, 그곳은 그 동쪽 경계에 있는 지명 과주(瓜州: 옥문관)·사주(沙州: 돈황)가 있는 90 E의 이동쪽에서 106 E까지의 지금의 감숙성 지역이다. 그렇다면 西部와 東部의 경계에 있는 지역이 "롱"(롱)이라는 말이며, 그곳에 "天水"가 있다는 말이라야 더 합리적 해석이 될 것이다.

이 天山은 너무 커서 중앙아시아에 있는 서쪽 파미르고원에서부터 시작하여 동쪽으로 알타이산[金山: Altai]까지 2000km나 뻗어있다. 알타이산과 가장 가까운 천산산맥의 동쪽 끝자락에 박달산[博格達山=貪汗山=時羅漫山]의 남쪽에 "天山郡/天山軍"(천산군)이 있고, "交河郡"(교하군)이 있고, 그 바로 옆에 "들판[트루판: 吐魯蕃]"이 있다.

"롱서"지역은 중앙아시아의 훨씬 서쪽이며, 서아시아의 동부지역에 해당되는 56 E에서부터 지금의 섬서성 서쪽 106 E까지라야 옳지 않을까? 이것은 그만큼 지역/지명이 동쪽으로 옮겨졌다는 말이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西"와 "右"는 같은 개념이므로, " 西"는 " 右"와 일치해야 설득력이 있다. 지금 "롱서"는 감숙성 지역에 실려있고, 위의 지도 p.61-62에서 보면, 34.9 N-104.9 E에 있다. 그렇다면 이 " 西"는 사실 " 東"에 해당되어야 한다. 그래서 "롱西道東部"라고 하는 모양이다. 이 사실이 바로 "롱서"가 그만큼 동쪽으로, 즉 현재의 감숙성 자리로 옮겨졌음을 말해준다.

天水는 天山과 다르지 않다. 산과 물은 바로 그 이름에서 유래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미름은 사실 같은 지명이거나, 거의 같은 지역에 나란히 있어야 할 이름이다.

그런데 "天水軍"은 현재 감숙성 천수현 서남쪽 70리에 있다고『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 나와 있다. 그런데 위의 지도에서 보면, 물론『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는 언급되지 않지만, "天山軍"이 신강성 동북부에 "西州/高昌" 옆에 적어놓았다.
아무리 보아도 이 두 지명은 본디 같은 것으로 보이며, 지명이 옮겨진 뒤의 왜곡이라고 본다.

우리는 롱서/롱우의 지역을 동경 106도에 있는 것으로써 력사의 기준점으로 삼아 해석한다면, 력사의 진실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리덕유(李德裕)의 호가, 리춘경(李春卿)의 호가, 리첨(李詹)의 호가 " 西"(롱서)이고, 입만 벌였다 하면 시가 되고, 노래가 만들어졌다는 리백(李白)의 고향이 "롱서"이다. 그곳은 조선의 땅이었다.

섬서성진번이 고조선의 옛 서쪽 경계가 맞았다.

2013.05.01 18:22 http://blog.daum.net/manjumongol/1498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

看羊島飛鴻洪在朝鮮鏡城府南九十里。其縱長六十餘里。278_158b其深六百餘尺。中有島曰看羊。洲渚平衍。無草樹之傅焉。沙潔如鋪練。抵北海僅一舍。

간양도 비홍홍(기러기가 난다?)은 조선 경성부 남쪽 90리에 있다.  중간에 섬이 있어 간양도라고 한다. 초목이 없고 모래가 넓게 펼쳐져 있고 북해를 가까스로 막고 있다.

蘓武傳云匈奴徙武北海上。湖之名以鴈書也。島因牧羝而稱焉。然其俗鹵樸。不能載之書策。故或有疑之者。而司馬氏匈奴傳曰。匈奴東接濊貊朝鮮。則今關北固匈奴界也。遼東志所謂木郞古。卽其墟云。

소무전에는 훈족이 북해위로 이동했다. 호인들이 말하기를 안서라고 한다. 섬은 양을 기르기떄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사마씨의 훈족전에는 훈족은 동으로 예맥조선과 접한다고 하는데  지금 조선 관북이 옛 훈족경계이다. 요동지에는 목랑고라고했는데 모두 같은 곳이다.

新知錄云蘇武牧羝處則陝西鎭番衛也。山因以蘓武名。王昭君墓則山西大同府也。西地多白草。此塚獨靑。苟然則陝西距北海甚遠。漢書278_158c何得稱北海乎。此又可異也已

신지록에는 소무가 양을 기른곳이 섬서성 진번 위지역이라고 한다. 그래서 소무산이 있다. 왕소군묘는 산서성 대동부에 있다. 서쪽에는 풀이 많다. 섬서는 북해와 아득히 먼데 한서에는 북해라고 했다.(중략)

비슷한 기록이 조선후기에 다른 문집에도 실려있다. 조선의 지리개념은 조선국 길주 서쪽이 고구려 현도이고 그 다음이 훈족의 땅인데 조선이 점령하여 6진을 설치했다는 것이다. 임진왜란떄 일본군이 쓴 기록에는 길주에서 올량합과 조선군

연합군과 붙었다고도 하는데 당시 올량합은 바이칼호에서 베이징까지 왕래하던 유목민족으로 지금도 몽골서부에 올량합부족이라고 자칭하는 부족이 살고 있다.

원래 동몽골에 살았으나 윤관장군에게 패한뒤 서쪽으로 밀려났고 원나라때 바이칼에서 베이징까지 왕래하며 살게되었다. 조선개국시 올량합 부족은 추장이 와서 조회하고 충성맹세를 하고 조선의 변방을 지키게 되었고 선조때 임진왜란에 조선군의 일원으로 참전했고 후금이 올량합을 공격하자 조선군이 올량합을 구원하기 위해 출병했다는 청나라의 기록도 있다. 즉 조선은 옜 훈족경계에서 오히려 더 서쪽으로 진격했다는것이다.

지금 바보같은 학자도 훈족의 경계를 베이징에서 약간 동쪽으로 추측하지  북한 함경도지방으로 추측하는 사람은 없다.

위의 글은 조선의 어떤 지명유래에 관한 기록으로 간양도라는 지명이 원래 훈족이 양을 기르던 곳이라는 설명이다. 즉 한나라때 훈족이 양을 기르던 섬서성 진번 위지역이 원래는 옛 고조선의 땅이었음을 알수 있다. 훈족이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동호를 쳐서 땅을 뺴앗았는데 그때문에 훈족선우에게 시집간 왕손군묘가 산서성 서북부에 있는 것이다. 위의 글대로라면 동호는 고조선의 속국인 것이다.(한나라때 기록을 살펴보면 북해가 지금 산서성서쪽에서 감숙 섬서성위의 황하를 말하는 것이다.훈족이 황하를 따라 동진한 것을 설명하는것이 바로 위의 북해를 따라서 이동했다는 기록이다.)

진번은 조선의 서쪽경계로 한나라때 기록을 살펴보면 대략 산서성 서부 일대로 나온다. 그런데 청나라 고지도와 무수히 많은 고지도에 진번이 음산의 서쪽 끝에 지금 감숙성의 서부에 그려져 있다.

이것은 원래 고조선의 영역이 감숙성 서부였고 그 너머 서쪽에 훈족이 있었음을 알수 있다. 훈족이 강성해지고 고조선이 쇠약해지면서 고조선의 진번역시 산서성 서부로 이동하게 된것이다.

당나라 기록에 기련에서 거란(고란)과 고구려와 접경하고 있다고 했다. 호태왕 비문에는 더 나아가 기련 남쪽의 토욕혼을 정벌했다고 되어 있는데 이후 돌궐이 발흥해서 고구려가 산서성까지 밀렸다가 수나라와 당나라때 고구려가 동돌궐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서돌궐에는 사신을 보내 동맹을 제의한다.

고구려 말기 고구려는 전성기 영역의 상당부분을 수복해서 기련산까지 진격한 것이다. 그곳은 바로 고조선의 서쪽영토 진번을 약간 넘어선 것이다.

옛기록에 보면 유연이 전성기에 옛 고조선의 서쪽 변경까지 차지했다라고 되어 있다.  고구려 시대인데 굳이 고조선이라고 기록한 것이 아무래도 진번 근처까지 유연이 차지한것을 말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발해는 위구르 서부지방에 진격했다는 중국기록이 있다. 그러면 발해는 고구려의 지명을 그대로 썻을 것이다. 반면 고려는 서쪽변경이 고구려에 비해 표현하기 힘들정도로 작아졌기 때문에 고구려 발해의 지명을 고려땅안에 집어넣어 왕조의 정통성을 살리려 했을 것이다. 그래서 웅주라는 명칭도 원래는 황하 서편에 있는데 고려는 새로 점령한 여진족의 땅에 웅주를 설치한다.

고려와 조선의 기록을 보면 발해의 땅에 대한 지리기록이 많다. 실제 발해의 땅이 아니지만 지명을 옮겨서  그곳이 옜날 발해의 땅이 맞다고 우기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에는 발해 서경 중경 상경 동경땅이 모두 있다라고 적혀있다.

《단군신화》의 발상지 문제우리 민족은 어디서 왔는가?(6)

http://www.dbanews.com  동북아신문
박문희  |  pwx0907@yahoo.com.cn  2008.03.14


《단군신화》를 보면 460여자 되는 짧은 글속에 수천년간에 걸친 아름찬 력사내용을 압축해 담고있다. 환웅의 삼위태백 강림, 단군의 탄생, 조선국 창설, 백악산아사달 천도, 장당경 은둔...하다면 환웅이 내렸다는 삼위 태백은 진실일가, 허구일가? 아니면 태백의 수식어에 불과한 것일가? 진실이라면 그 위치는?

《尚書·舜典》에 “三危”란 지명이 追記된 이래 력대의 문헌기록과 후세 사람들의 연구자료를 보면 “고삼위”의 존재는 확실하며 위치도 서북지역임이 분명하다.

北魏의 酈道元 등은 “삼위산은 돈황현 남쪽에 있다”(《水經注》)고,  

唐의 리태 등은 “삼위산은 沙州(돈황)의 동남쪽으로 30리 떨어진 곳에 있다”(《括地志》)고, 

《한서》,《후한서》,《상서정의》,《상서법》,《태평어람》등은 “三危가 감숙과 청해성 경내에 있다"고 기술했고  

동한시기 마융의 《상서주》와《한서·공안국전》,  

唐나라 공영달의《尚書正義》등 史籍은 “三危”가 서부지역에 있다고 기록했다.

 그중 “대삼위”, “대돈황”설과 최신판《辭海》력사지리 분책에 올린 감숙성 롱서현(隴西縣) 서북부 지역설 등이 상대적으로 설득력을 얻고있다.

초보자 위한 강좌 - 영주(營州)의 흔적.. 玄朝_문무의 조선사 / 역사

玄朝..  2010.10.09


   http://cafe.daum.net/munmoo-chosunsa/3pCY/23

# 롱서(隴西)의 수양산(首陽山)은 확실히 고죽국(孤竹國)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확대해서 보면 다음 아래와 같다..

{ ※ 우연하게도 현 감숙성(甘肅省) 서남부의 위원(渭源)은 근세 조선(朝鮮)의 평안도(平安道) 관련 지명이기도 하는데, 평양(平壤)과 양평(襄平)도 역시 평안도(平安道)에 속하는 지명이기도 한다.. }

롱서(隴西)는 현 감숙성(甘肅省) 서남부에 실존하는 지명이고, 롱서(隴西)의 북쪽 경계에는 란주(蘭州 : 金城)와 령주(靈州)가 있는데..

營州,鄰海軍,下,刺史。本商孤竹國。

영주,인해군,하,자사。본상고죽국。
[ # 요사(遼史) 권040.. ]

 # 간단히 보면, 영주(營州)는 본디 상나라(商) 당시의 고죽국(孤竹國)이라고 했다..

 地理誌曰 : 令支有孤竹城, 故孤竹國也..
지리지왈 : 영지유고죽성, 고고죽국야..
史記曰 : 孤竹君之二子伯夷 · 叔齊, 讓國於此, 而餓死於首陽..
사기왈 : 고죽군지이자백이 · 숙제, 양국어차, 이아사어수양..
[ # 수경주(水經注) 권014.. ]

 지리지(地理誌)가 말하기를 : 영지(令支)에 고죽성(孤竹城)이 있고,(그 곳은) 옛 고죽국(孤竹國)이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가 말하기를 : 고죽(孤竹) 임금의 아들 2명은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이고, (고죽국에) 나라(고죽국)의 자리를 사양하였고, 수양산(首陽山)에 굶어 죽었다..

 # 윗 문구를 보아 알수 있듯이..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굶어 죽은 곳 - 수양산(首陽山)은 고죽국(孤竹國)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 수양산(首陽山)을 단서로 삼아 추적하기 전에 근세 조선(朝鮮)의 시를 읊어보면서 감상해보기를 권한다..

 得聖之淸孰與齊 : 성인으론 맑은 이를 누가 겨루랴
首山道便此憑隮 : 수양산 가는 길 이로 좇아 올랐도다
爲傳公信及公達 : 백이와 숙제를 전하기 위함인데 
底較遼西復隴西 : 요서와 농서는 비교나 되랴 
何事宋朝賜圭冕 : 송 나라선 무엇하러 규면을 내렸는지 
可知夫子視塗泥 : 부자께서 흙덩이로 여김 알 수 있네 
史遷慨羡靑雲士 : 사마천은 청운의 선비 부러워했으니 
未識浮名本稗稊 : 뜬 소문 원래 쓸데없음을 몰라서지 
[ # 계산기정(薊山紀程) 제4권 - 돌아오는 길[復路] : 근세 조선(朝鮮).. ]

 # 요서(遼西)와 롱서(隴西), 수양산(首陽山)을 고죽국(孤竹國)의 위치를 찾는데 중요한 단서로 얻었다..

그 전에 다음 아래의 글을 읽기 전에 마음을 비워두기를 바란다..

 阮籍《詠懷詩》亦以爲然。今此二山。竝有夷、齊祠耳。
완적《영회시》역이위연。금차이산。병유이、제사이。
而曹大家注《幽通賦》云。隴西首陽縣是也。今隴西亦有首陽山。
이조대가주《유통부》운。롱서수양현시야。금롱서역유수양산。
許愼云。首陽山在遼西。諸說不同。致有疑惑。
허신운。수양산재료서。제설부동。치유의혹。
而《伯夷歌》云。登彼西山。則當隴西者近爲是也。
이《백이가》운。등피서산。칙당롱서자근위시야。 
[ #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 고죽수양산변증설(孤竹首陽山辨證說) : 근세 조선(朝鮮).. ]

 완적(阮籍)의 영회시(詠懷詩)는 역시 그렇다고 여겼고, 지금의 두 산이다..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의 제사를 기울이면서 아울러 가졌다..
조대가(曹大家)의 주석 유통부(幽通賦)가 이르기를 롱서(隴西)의 수양현(首陽縣)이 옳다.. 지금 롱서(隴西)에 역시 수양산(首陽山)이 있다..

허신(許愼)이 이르기를 수양산(首陽山)은 요서(遼西)에 위치한다.. 여러 사람이 주장하는 말이 똑같지 않고, 의혹하기를 이르렀다..
백이가(伯夷歌)가 이르기를 서산에 오르면, 당연히 롱서(隴西)와 가까우니 옳다고 한다..

 # 윗 기록을 읽으면서 알수 있듯이  요서(遼西) 위치설에 대하여 여러 사람마다 주장이 다르니 의혹을 가지게 된 것이다..

{ # 우리 나라의 사학계와 지나(支那 : 중화) 사학계는 이를 알지 못하는채, 의혹스러운 요서(遼西) 위치설을 고집하고 있는데, 잘못된 것이다.. }

 # 확실한 것은 고조선(古朝鮮) 시대부터 근세 조선(朝鮮) 시대까지 백이(伯夷) 숙제(叔齊)의 수양산(首陽山)은 롱서(隴西)에 위치하는 것은 옳기 때문에 시대를 초월하는 정론으로 볼 수 있다..

 

東漢經文學家曹大家(即班昭)注《幽通賦》說:"夷齊餓於首陽山在隴西首陽。" …
동한경문학가조대가(즉반소)주《유통부》설:"이제아어수양산재롱서수양。" …
正義曰曹大家注幽通賦云:「夷齊餓於首陽山,在隴西首。」
정의왈조대가주유통부운:「이제아어수양산,재롱서수。」
[ # 사기(史記) 권061 백이열전제일(伯夷列傳第一).. ]

 동한경(東漢經)의 문학가 - 조대가(曹大家 : 즉 반소(班昭)이다)의 주석 유통부(幽通賦) 설에 따르면,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굶은 수양산(首陽山)은 롱서(隴西)의 수양(首陽)에 위치한다..

정의(正義)가 말하기를 조대가(曹大家)의 주석 유통부(幽通賦)가 이르기를 :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굶은 수양산(首陽山)은 롱서(隴西)의 수양(首陽)에 위치한다..

 #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근세 조선(朝鮮) 당시의 기록과 후한(後漢) 당시의 기록에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굶어 죽은 수양산(首陽山)은 롱서(隴西)에 있다는 것이다..

 首陽山, 古孤竹國之地, 伯夷 · 叔齊, 孤竹君之二子, 餓死首陽山之下, 即此山也..
수양산, 고고죽국지지, 백이 · 숙제, 고죽군지이자, 아사수양산지하, 즉차산야..
[ # 무경총요(武經總要) 전집(前集) 권022.. ]

 수양산(首陽山)은 옛 고죽국(孤竹國)의 지역이고, 백이(伯夷) 숙제(叔齊)는 고죽국(孤竹國) 임금의 아들 2명이다..  수양산(首陽山)의 아래에 아사하여 죽었고, 즉 이 산(롱서의 수양산)이다.






스키타이와 대월씨국 - 고조선과 월지국

[신라는 대륙에도 존재했다] 

     신라의 뿌리를 추적하던 중 유물면에서 스키타이와의 연관성을 알게 되고, 그 스키타이인들이 세운 대월씨국(대월지국)과 만나게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한단고기에도 등장하는 대월지국은 신라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아직 결론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월지국에 대하여 수집한 자료들을 정리한다.   추후 보완해 나갈 계획이다. 

1. 스키타이의 후손으로 본 월지국
 
1) 스키타이란 : 기원전 제2천년기말에 볼가강의 한 인도유럽어족은 수레를 끌고 자신들의 땅을 떠나 시베리아 땅으로 올라가 예니세이강까지 갔다.   북쪽과 동쪽으로 카스피해를 돌아 이란까지 내려가 거기에서 키메르족이라는 이름을 얻고, 그 다음에는 사카족(석가모니 종족)으로 불리다가, 기원전 7세기에 마침내 스키타이족이 되었다.

    춘추시대 이후 중원계국강대화에 따라 병합, 분리하다가, 전국(戰國)시대에서 한(漢)나라 때까지 중앙아시아 아무다르야강(江) 유역에서 활약한다.   전국시대 말기에는 서몽골로부터 간쑤[甘肅] 서부, 황허강[黃河] 상류, 동(東)투르키스탄, 중가리아, 서(西)투르키스탄의 일부에까지 미치는 대세력으로 하서회랑까지 점령하며 월지국을 세운다.

2) 기원전 177년 흉노의 묵특선우에게 공격을 받고, 월지는 감숙에서 쫓겨나 서쪽(일리-이식쿨유역)으로 이동한다.
 
3) 서쪽으로 이동하여 아무다르야강 북안에 중심을 두고 그 남쪽의 대하(大夏 : 드하라의 음역으로, 아프가니스탄의 北半 드하레스탄을 가리키며, 당시 그리스인 식민왕국박트리아의 중심지)를 지배하였다.   그것은 한(漢)나라가대월지(大月氏) 와 더불어 흉노를 협격(挾擊)하고자 하여 장건(張騫)을 파견한(BC 139) 직후의 일이었다.    대월지는 이 제안을 거절하고 대하 지방의 통치에 힘써 파미르·힌두쿠시의 남북에 토착제후(土着諸侯)인 다섯의흡후(翕侯)를 두고 다스리게 하였다.  
 
4) AD 1세기경 다섯 흡후의 하나인 귀상흡후(貴霜翕侯)가 대두하고, 이어서 대월지에 대신하였다(쿠샨왕조).   또한 황허강 상류 유역에는 대월지의 잔존세력이 남아 있어서 소월지(小月氏)라고 하였다.
 
5)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클릭-스키타이 
6) 유물로 보는 스키타이와 신라의 연관성

      아프가니스탄 틸리아 테페(Tillya Tepe)에서 발견된 금관은 신라 금관과 유사하다.   이 시리아․테베 유적의 연대는 대월지 시대에서 쿠샨시대 초, BC1c~ AD1c경 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금관(틸리아 테페) ⓒ김운회                             신라 금관(5~6세기)
 
      수목형 솟은장식과 머리띠형 다이아뎀에 붙여진 꽃모양 장식은 신라 왕관과 다르지만, 다이아뎀에 수목형 솟은장식과 작은 원형의 금제 달개를 매단 형식은 똑같다.   발굴 보고자는 관내부에서 발견되 성스러운 결혼을 부조한 황금장식판과 금알갱이로 세공한 목걸이와 날개 달린 아프로디테상들으로 보아 스키타이 여왕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신라 5, 6세기 금관과 이 여왕의 수목형 금관의 연대차는 4,5백년 정도이지만, 간접적이었을지라도 이것이 원류였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이 시리아-테베의 금관과 로마유리는 신라문화가 그처럼 오래전부터 스키타이인과 관련 있었고, 그후에도 소중하게 유지하여 로마문화를 흡수하였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요시미즈 츠네오(由水常雄)라는 일본 제1의 유리 공예가가 쓴 「로마문화왕국 - 신라(新羅)」(新潮社)]

2. 고조선의 후손으로 본 월지국
 
(태백일사환국본기)

구다국은 옛날에는 독로국(瀆盧國)이라 칭했고 북개마대령(北蓋馬大嶺=인산산맥?)의 서쪽에 있는 나라다.   월지국(月漬國)은 그 북쪽 500 리에 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韓)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마한(馬韓), 둘째는 진한(辰韓), 셋째는 변한(弁韓)인데, 진한을 옛 진국(辰國)이라 하고, 진왕(辰王)이 월지국을 통치하였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월지국은 진주(辰主)의 치소(治所) 라 했다.   곧 월지국은 진국의 도읍지 라는 것이다.

신채호의

{조선사연구초}

월지국이 고대의 우리나라 고조선임 을 밝히고 있다.

{국어대사전}

월지국을 목지국(目支國)이라 하고 목지국은 옛 진국의 한 부족국가라 하였다.

옛 진국이란 고조선을 지칭한다.

{불교사전}

"월지(月支)는 월씨(月氏)라고도 하며, 서역에 있던 큰 왕국"

월지국(月支國)을 서역에 있던 대월씨(大月氏)에 결부시키고 있다.

대동방씨족원류사

1. BC230년경 秦나라가 6국을 정벌통합할 때, 韓나라 또한 멸절되었다.

이에 여러 나라[6국]의 부호들을 秦나라의 수도 함양에 옮겨 살게 하였는데 ... 이러한 때에 산동, 장안 등지에서 좋은 물건들을 가지고 서쪽(서역)으로 대상의 길을 다니면서 서쪽 지방에도 안주하면서 한 집단을 이루게 되었다.

2. 서역 그 곳에 대월 , 안식, 사라 라는 지명도 생겨나기도 했다.

한단고기

bc195~ [74기준] 제가의 무리는 상장군 탁을 받들어 모두 산을 넘어 월지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다.

월지는 탁의 태어난 고향이니 이를 일컬어 중마한이라 한다.


    일반적인 개념으로 기준시기(bc195)의 번조선(기자조선)은 연나라세력과 대립하며 요녕지방에 위치한다.  번조선의 상장군 탁은 요녕지방에서 하서회랑에 위치한월지로 이동한다.(bc195)   그리고는 월지와 함께 쿠샨왕조까지 이어지게 된다.   약간의 시대차이가 있기는 하나 대동방씨족원류사에서 멸절한 韓의 부호들이 이동하는 곳도 함양(장안)이며, 장사를 통하여 서역으로 진출하여 대월과 안식, 사라를 세운다는 것은 일치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일봉의 한단고기에서는 월지의 또 다른 이름이 중마한이라 한다.   마한... 우리의 삼한중의 하나로서 일반적으로는 한반도 위치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대륙에 위치하는 마한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조심스레 삼한의 위치에 대한 관념을 의심해 본다.   여기서 대동방씨족원류사의 삼한의 위치에 대하여 살펴보자.
 
삼한의 위치를 대륙에서 찾아보는 또 다른 자료가 있다. 
 
*조선천독(朝鮮天毒) 산해경(山海經. 전한 초 BC 202)원문

" 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名曰朝鮮天毒 其人水居외人愛之..."

       동쪽나라 안의 북쪽의 모퉁이 에 있는 나라이름은조선(朝鮮)이며 조선은 천독(天毒)이며, 그 사람은 물이 있는 곳에서 살고 사람을 사랑하며 가까이 한다. ( 율곤선생의 편역)
 
===> 본문에서 동쪽의 나라안 이라고 한 것은 대륙의 중앙을 뜻한다.

       그 다음의 북쪽 나라 모퉁이 라고 한 것은 지금의 동북쪽인 북경(北京)의 동쪽을 뜻한다.
 
        동해지내(東海之內)라고 한 것은 조선(朝鮮)이 대륙을 중심하여 지배하고 있다가 후일에 북해지우(北海之隅) 즉 북쪽의 나라 모퉁이로 옮겨갔음 을 뜻한다.   나라가 있는데 이름은 조선(朝鮮)이라고 했다.
 
*  곽박의 주

朝鮮今樂浪郡也 天毒卽天竺國貴遣德有文書金銀錢貨□屠出此國中也晉大興四年天竺胡王獻珍寶.... 생략

    곽박에 의하면 조선(朝鮮)은 낙랑군(樂浪郡)이라 했다.   원가(袁珂)는 조선(朝鮮)은 해내북경(海內北經)에 있다고 했다.   또한 곽박은 천독(天毒)은 천축국(天竺國) 이며 도덕(道德)을 귀중하게 생각하고, 문서(文書)가 있으며 금은(金銀)과 돈을 갖고 있으며, 나라 가운데서 죽음을 무릅쓰고 떠나갔다고 했다.(이중재씨의 편역)
 
*당(唐)나라의 요사겸(姚思廉)이 지은 양서(梁書.629년)에 의하면

     "중천축국(中天竺國)은 대월지국(大月支國) 동남으로 수천리(數千里) 떨어진 곳에 있는데, 그 지역은 3만리(三萬里)이다.   일명 신독국(身毒國)이라고도 한다."  고 하였는데 통전(766년)에서는 월지국(月支國)을월씨 국(月氏國) 이라고 하였다.   감숙성 돈황 남쪽에서 흉노에게 쫓겨 서역인 토노번까지 도망을 갔다고 한다.  이들은 본래 월지국(月支國)이었으며 신독국(身毒國)이라고도 하였다.   [월지국이 곧 신독(조선)이였음을 말한다]
 
*통전(通典)

    천축은 후한(後漢 A.D.25∼220년) 때 있었다.   전한(前漢 B.C.206∼AD.220년) 때는 신독국(身毒國)이다.   전한 초에 장건(張騫)이 대하(大夏)에 사신으로 갔는데, 그는 그곳에서 공( )의 죽장(竹杖)과 촉(蜀)의 포목을 보았다.   어떻게 이것을 얻었으냐고 대하국 사람들에게 물었더니 말하기를, 신독국의 시장에 가서 사왔다고 했다.
    신독국이 곧 천축국(天竺國)이다.   천축을 혹 마가타(摩伽0)라고도, 바라문(婆羅門)이라고도 했는데, 총령( 嶺)의 남쪽에 있었다.   즉, 총령은 곤륜산맥(崑崙山脈)을 뜻한다.   이곳은 신강성(新疆省) 남부이며 서장성(西藏省) 북부지역을 말한다.   월씨국(月氏國)에서 동남으로 수천리(數千里) 떨어진 곳인데, 지역은 3만여리(三萬餘里)였다.

=== 따라서 곤륜산맥의 서북으로 수천리 떨어진 곳이 월씨국이 된다.

=== 律坤 율곤 李重宰著「한民族史」284쪽 
    東夷 朝鮮人들이 너무도 영리하고 용맹스럽고 지혜가 있어 무서운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별명처럼 불려진 것이 신독(身毒) 또는 천독(天毒)이다.   그리고 후일 천축(天竺)으로 불려져 중천축 · 북천축 · 서천축 · 남천축 · 동천축으로 불리게 되었다.   문헌에 의하면 광동성(廣東省) 지방의 천축산(天竺山)에서 유래되어 청해성(靑海省)이 있는 곳으로 갔다는 기록도 보이나, 본래 天毒·身毒은 곤륜산을 배경삼아 천산산맥 등지와 타림 분지 등 여러 곳에서 수렵을 했던 용맹스러운 묘족(苗族)의 후예였다.

=== 전한(前漢 B.C.206∼AD.8년) 때는 연독국(捐毒國)이나 신독국(身毒國)으로 불리었고, 후한(後漢 A.D.25∼220년) 때 와서 천축국(天竺國)으로 불렸음을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다.

 

     한(漢)나라 때는 또한 연독국(捐毒國) 이 있었는데, 장안(長安)으로부터 9,800리에 있다.   장안(長安)에서 9,800리라고 한다면 신강성(新疆省) 남부에 있는 지금의 화전(和田)인 옛 이전원(伊甸園) 일대를 말한다.   도호부가 있는 곳으로부터는 2,800리 떨어진 곳이다.   남쪽으로는 총령( 嶺)인 곤륜산맥과 서로 연결되어 있고, 북쪽으로는 오손(烏孫)과 접하고 있다.   오손(烏孫)은 신강성(新疆省) 천산(天山)과 알타이 산록 일대에 있었다.   연독국 사람들의 의복은 오손 사람들과 비슷했으며, 물과 풀을 따라 이동했다.   옛날의 색종(塞種)이다.

 

안사고(顔師古)의 말에 의하면 연독(捐毒)은 즉 신독(身毒)이며,  신독(身毒)은 천축(天竺)이라 했다.

색종(塞種)은 즉 석종(釋種)을 말한다.   말하자면깨달은 사람들의 가문, 석씨(釋氏) 가문의 혈족이라는 말이다.

대륙삼한설에 이어 신라의 위치 또한 의문이 생긴다.

아래 혜초스님의 오언시( 詩) “여수(旅愁)” 를 살펴보자.
 
月夜瞻鄕路   浮雲飄飄歸   緘書參去便   風急不聽廻   我國天岸北   他邦地角西   日南無有雁   誰爲向林飛

월야첨향로   부운표표귀   함서참거편   풍급불청회   아국천안북   타방지각서   일남무유안   수위향림비


달 밝은 밤에 고향길을 바라보니 뜬구름은 너울너울 고향으로 돌아가네

나는 편지를 봉하여 구름편에 보내려 하나 바람은 빨라 내 말을 들으려고 돌아보지도 않네

내 나라는 하늘 끝 북쪽에 있고 다른 나라는 땅 끝 서쪽에 있네

해가 뜨거운 남쪽에는 기러기가 없으니 누가 내 고향 계림으로 나를 위하여 소식 전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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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는 혜초((704-787)승이 남천축국에 있으면서 旅愁(여수)를 5언시로 읊은 것이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심정을 그린 내용이다.   고향을 그리면서도 남천축국의 사정을 잘 묘사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고향인 계림(鷄林)이 하늘 끝 북쪽 이라고 한 사실이다.   남천축(남천축국은 대륙에 위치한 오천축국의 하나로 대륙남쪽에 위치해 있었다)에서 바라보는 하늘 끝 북쪽은 어디일까?   신라의 위치는.... 

이래 지도는 한반도의 신라를 구성하는 辰韓(秦韓)의 유민이 원주지을 표시하고 있는 지도이다.

즉, 한반도 신라의 근원을 추적할 수 있는 자료인 것이다.

 


또한 신라와 관련성 있는 왜(倭) 또한 대륙에도 존재했다. ( 여기를 클릭)

출처 : [正心正道] 무 병 장 수 원 | 글쓴이 : 금빛물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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