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균 김옥균에 대해 역사 책에 갑신정변에 대해 나오고 해서 모두 알고 있습니다.

개화파 지도자로서 몇 가지 사상을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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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옴 http://blog.daum.net/ileejj/1533 강의자료 7 : 고균 김옥균의 삶과 사상 


김옥균을 두고 흔히 초기개화파 또는 급진개화파라고 부른다. 이는 뒤의 온건개화파와 구분해서 붙여진 것이다.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급진개화파들은 꾸준히 정치개혁을 도모했고 끝내 혁명적 방법으로 정권을 잡으려 했다. 이들이 추진한 방향을 두고 부르주아 혁명이라 평가하기도 하고 급격한 정치개혁 노선을 지향했다고도 한다. 


김옥균 등의 정치적 지향은 첫째로 자주독립을 꼽는다. 


김옥균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서양 각국은 모두 독립국이다. 어느 나라를 따질 것 없이 독립한 연후에야 화친할 수 있는데 조선이 홀로 중국의 속국이 되어 있으니 심히 부끄럽다. 조선이 어느 때에 독립하여 서양 여러 나라와 동열(同列)에 서겠는가? 〈신중환 공초〉, 《추안급국안》


이 말은 곧 우리가 완전독립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종래 전통적 외교노선인 사대교린정책을 불식하고 청나라와의 관계에서 사대명분을 없애야 한다는 것이다. 개항 이후 청나라는 조선과의 전통적 외교관계를 들어 마치 속국처럼 다루고, 외교 · 통상조약에서 먼저 자국과

의 교섭 또는 허락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내세워 끊임없이 압력을 가해왔다. 이것이 바로 자주적으로 서양제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데 장애요인이 되었다. 또 임오군란 이후 청국상인이 조선에 진출하고, 흥선대원군이 톈진에 구류되는가 하면 이홍장의 막하 오장경(吳長慶)이 서울에 주둔하면서 군문제독(軍門提督)이라는 이름으로 내정간섭을 직접적으로 진행시키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개항 이후 일본, 미국을 비롯한 서양과의 교섭에서 조선은 완전한 자주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김옥균은 전통적 외교노선을 비판하고 청국의 부당한 간섭을 배제하여 새로운 국제 시대에 조선이 내정 · 외교에서 철저한 자주노선을 수립할 것을 역설했다. 이런 바탕 위에서 애국주의와 부국강병을 지향했다. 이것이 확립되지 않으면 외래 자본주의 침략으로부터 민족적 위기를 극복할 수 없고 자주독립도 이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어 김옥균이 지향한 정체(政體)는 〈한성순보〉의 논설 〈구미입헌정체〉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서 3권 분립과 양원제를 주축으로 한 의회제도, 이를 토대로 한 입헌군주제 아래에서의 국왕의 위치와 정부의 역할 등을 소개했다. 이는 봉건적 전제군주제도를 폐지하고 근대적 입헌군주정치를 지향해야 할 필요성을 기저에 깔고 있다. 

한편 황현은 김옥균 등이 갑신정변을 성공시키고 미국의 대통령제처럼 번갈아가며 그들이 군장이 되려 했다고 쓰고 있다.(황현 《오하기문》) 한마디로 김옥균이 입헌군주제와 대통령제, 둘 중에서 어느 것을 채택하려 했는지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봉건군주제도를 타파하려 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이런 기저 위에서 봉건제도의 개혁을 꾸준히 추진했다.


김옥균은 봉건신분제인 양반제의 폐지를 열렬히 주장했다. 


궁극적으로 양반제가 존재하는 한 평등을 이룩할 수 없다는 논지였다. 이와 함께 초기개화파들은 문벌의 타파를 추진했다. 세도정치 또는 족벌정치의 온상인 문벌의 타파가 선행되어야 양반제도를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다음 관료제도의 개혁을 추진했다. 


이는 행정기구의 개폐로부터 시작되었다. 임오군란 뒤 그들이 만든 기구인 기무처(機務處)에 이런 내용이 잘 반영되어 있다. 여기에서 그들은 궁중예산제도를 확립하여, 왕궁에서 사사로이 무한정 쓰는 경비를 한정하게 했고, 국가재정수입을 호조의 단일 기구에서만 관장하도록 했으며 근대적 군사제도의 실시를 추진했다. 


그밖에 그들은 풍속의 변화를 꾀했다. 


그 중에서 복제의 개선, 색의(色衣)의 장려와 단발의 시행을 가장 중시했다. 이들은 벼슬아치들에게 도포나 장식이 많은 관복을 고쳐 두루마기로 통일시켰으며 일반 백성에게는 색의를 권장했다. 이는 실질 있는 풍속을 권장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서양의 근대문물 수입을 위해 학교의 설치, 통신제도의 개선, 기예의 장려 등을 도모했다. 


그들은 종래의 역마제(驛馬制, 역을 기준으로 한 파발)를 바꾸어 우정국을 설치했고, 전보를 보급하기 위해 전선국을 설치했으며, 각지에 어학학교 · 기예학교 등을 두었다. 또 인재양성을 위해 유학생을 일본 · 중국에 파견하여 어학과 기술을 익히게 했고, 근대적 출판 · 언론을 보급하기 위해 박문국을 설치하고 〈한성순보〉를 발행했다.

   

  이러한 기구와 제도의 개혁과 풍속 · 문화운동은 단순한 개량의 수준이 아니었다. 비록 실학자의 주장을 수용한 면도 있고 선진문물의 영향을 입은 바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근대지향이라는 면이 짙게 깔려 있었다. 그들의 이런 근대지향성은 번번이 수구파에 의해, 특히 복제개선 등에서 제대로 실현해 보지 못하고 좌절하는 수가 흔했다.  1895년에 전면적으로 단행된 ‘단발의 실시’를 놓고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난 사례를 보아도 이 점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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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갑신정변의 주역들로 왼쪽부터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이다. 프랑스 혁명가 나폴레옹 상징인 손을 옷에 넣고 있다.



개화파 갑신정변 생사와 이후 참여 조직


갑신정변 김옥균_180507.pptx


관련 문서]

1> 박영효, <갑신정변>, <순종실기 :신민 14호>, 신민사, 1926.
2> 문일평, <사외이문비사(史外異聞秘史)>: 호암전집(3), 조광사, 1946.
3> 신복룡, <사외이문비사(史外異聞秘史)>: 호암전집(3), 조광사, 1946.
4> 서재필, <회고 갑신정변>. ( <동아일보> 193512)
5> 김옥균, <갑신일록>



개화사상가 유대치는 양반 출신

글 동아일보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2007 1 09

 

전남 장성군 북이면 송산리에서 발견되 유대치의 것으로 추정되는 묘비명.

백의유대치월헌홍규지묘(白衣劉大致月軒洪奎之墓)라고 적혀있다. 탁본 제공 유영심씨

개화당의 개혁정치를 뒤에서 조종했다고 하여 백의정승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던 유대치. 의원으로 알려졌던 그는 역관 출신인 친구 오경석(1831 – 1879)과 더불어 대표적인 중인층 개화파 지도자로 꼽혔다. 그런 그가 양반 출신일 가능성을 면밀히 분석한 논문이 발표됐다. 지난해 상한(常漢.상놈) 계층이 갑신정변에 적극 참여했다는 사실을 구명한 갑신정변 연구를 펴낸 박은숙 서울시사연구소 연구원이 한국인물사연구제ㅎ4호의 유대치의 신분과 정세인식에서 밝힌 내용이다.

개화당 연구의 대가인 고 이광린 서강대 명예교수는 숨은 개화사상가 유대치’(1973)’에서 유대치의 본명으로 알려진 유홍기(劉洪基)가 연관을 많이 배출한 한양 유씨의 족보에 1831년생으로 등장하는 점에 주목했다. 유대치는 김옥균의 갑신일록과 윤치호의 윤치호 일기에 자주 등장하다가 1884년 갑신정변이 3일 천하로 끝난 뒤 행적이 묘연해진다. 신뢰할 만한 기록은 그가 오경석의 아들이자 제자인 위차 오세창을 데리고 경기도 광주와 가평으로 피신 중 변소에 간다면 나간 뒤 사려졌다는 위창의 회고가 마지막이다. 이 때문에 이 교수의 유홍기= 유대치추정은 학계의 정설이 됐다. 박 연구원은 이를 반증하는 자료를 제기했다. 우선 전남 장성군 북이면 송산리에서 발견되 강릉 유씨 유홍규(유홍규, 1814 – 1884)의 묘비명이 있다. 묘비명에는 유홍규가 백의정승으로 불린 유대치라는 내용이 기록돼 있는데 박 연구원을 이 묘비가 1924년 이전부터 있었다는 주민 증언도 채록했다. 1911년 발행된 강릉 유씨 족보에 유홍규가 대치로 개명했으면 개화당을 지도한 백의정승이라는 가필된 기록도 발견됐다.

1882 11 11일자 승정원 일기에 유대치가 벼슬을 하지 않은 양반인 유학(幼學)이어서 부사용(副司勇)이라는 종9품의 관직을 내린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런데 1869년 발간된 한양 유씨 족보에는 유홍기가 이미 사용이란 관직을 받았다는 모순된 기록이 나온다.

 박 연구원은 유대치 중인설은 그가 역관의 집에서 태어나 의()를 업으로 했다는 후대의 기록(1944년 발간된 김옥균 전)과 중인의 집단 거주지였던 광교 부근 관철동 에서 살았다는 정황 증거에 근거한다.”김옥균, 박영효 등 최고 문벌 양반과 교제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오히려 양반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주장했다.

 

한국인물사 유대치(유홍기) - 개화사상 형성의 숨은 지도자

글 김범 /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지역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18세기 이후부터 전 세계는 근대화의 격랑에 휩쓸렸다. 근대화의 주체는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서양이었고, 그 대상은 그들을 제외한 전 세계였다. 그 충격은 어디서나 컸지만, 오랫동안 독자적인 문명을 발전시켜온 동아시아 국가들이 체감한 강도와 시련은 더욱 심각했다.

근대화의 과정은 아마도 시간과 공간의 압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교통과 통신을 비롯한 물질문명의 발달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넓은 공간을 훨씬 빠른 시간 안에 장악하게 되면서 사건의 속도와 규모는 급격히 팽창했다. 근대는 그동안 개별적으로 성장하면서 부분적으로만 접촉해 온 동양과 서양 문명이 본격적으로 맞부딪치면서 그야말로 ‘세계사적 규모’의 사건이 일어난 국면이었다.

오랜 역사에서 처음 식민지로 전락했다는 사실이 보여주듯이 조선의 근대화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러나 수많은 개인의 삶조차 그렇듯, 한 나라가 그런 실패로 그냥 허망하게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조선에도 급변하는 현실을 분석하고 활로를 모색하며 과감하게 행동한 인물들이 있었다. 그들의 방략(方略)은 크게 척화(斥和)와 개화(開化)로 나뉘었다. 유대치(劉大致, ?~?)는 그중에서 개화파에 중요한 영향을 줌으로써 조선의 근대사에 적지 않은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었다.

 

흐릿한 기초적 사항들

 

방금 말했듯이 유대치는 조선의 개화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인물이었지만, 그의 구체적인 이력은 흐릿하다. 그렇게 된 가장 중요한 까닭은 그에 관련된 직접적인 자료가 매우 부족하기 때문이다. 유대치의 삶과 사상을 재구성할 수 있는 주요 자료는 김옥균(金玉均, 1851~1894)의 [갑신일록(甲申日錄)]ㆍ[윤치호 일기]ㆍ[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 등인데, 모두 다른 사람의 간접적인 서술이어서 근접성이 떨어진다는 한계를 갖고 있다.

그 결과 유대치와 관련해서는 ‘유홍기(劉鴻基)’라는 본명과 ‘대치’라는 호를 뺀 거의 모든 사항을 정확하게 알기 어렵다. 우선 가장 기초적인 사항인 생몰년과 본관도 확정할 수 없다. 본관은 그동안 한양ㆍ강릉 등의 의견이 제시되었지만, 현재는 앞의 것은 오류고 뒤의 것은 확인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신분도 그동안은 중인으로 간주되었지만, 최근에는 반론이 나오고 있다. 중인으로 파악했던 근거는 그가 조선시대 중인의 거주 지역인 서울의 광교 부근 관철동(貫鐵洞)에서 살았고 역관 가문에서 태어나 의술을 직업으로 삼았다는 기록 등이었다. 예컨대 [김옥균전](고균〔古筠〕기념회 편, 1944)에서는 “대치 선생은 원래 역관의 집에서 태어났지만 의술을 직업으로 삼았다”고 서술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중인이 아니라 양반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유대치가 역과나 의과에 합격한 증거가 없고, 1883~1884년 무렵 유대치를 자주 찾아갔던 윤치호(尹致昊, 1865~1945)의 일기에서도 그가 의술을 직업으로 삼았다는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 등이 그 주요한 논거다.

유대치가 양반일 가능성이 더 크다는 주장은 우선 그가 ‘벼슬하지 않은 양반’을 가리키는 ‘유학(幼學)’으로 관직에 임명된 기록을 주목한다. [승정원일기]에는 고종 19년(1882) 11월 감생청(減省廳)을 설치해 불필요한 관직과 관원을 줄일 때 유학 유홍기가 부사용(副司勇. 종9품)으로 임명되었고, 이듬해 5월에는 사용(司勇. 정9품)으로 승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유대치의 재력과 학식도 양반설의 근거로 제시된다. 1880년 무렵 그와 접촉했던 일본 승려 오쿠무라 엔신(奧村圓心)은 “유대치는 자산가(資産家)ㆍ학식자(學識者)ㆍ우국지사로 박영효(朴泳孝, 1861~1939)ㆍ김옥균 등의 새로운 사상가와 교제하고 있다”고 썼다([조선국 포교일지〔布敎日誌〕] 1880년 10월 4일). 실제로 유대치는 특별한 생업에 종사하지 않으면서 젊은 개화파 인물들을 집으로 자주 초대해 대접하며 토론했다는 기록이 자주 보이는데, 이런 측면은 그가 ‘자산가’로 불릴 만한 재력을 갖고 있었다는 서술을 뒷받침한다. 물론 조선 후기 이후 역관을 비롯한 일부 중인은 상당한 재력을 축적하기도 했다. 그러나 경제력은 전반적으로 양반이 좀 더 우세했다고 볼 때 중인설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첫머리에서 말했듯이 이런 모든 의견은 결국 추측일 뿐이다.

 

개화파의 형성

 

19세기 중반 근대화의 물결이 본격적으로 조선을 덮치기 시작할 때 개화파의 가장 중요한 지도자는 환재(瓛齋) 박규수(朴珪壽, 1807~1877)였다. 가문ㆍ벼슬ㆍ학식을 비롯한 그의 주요 경력은 모두 출중했다. 그는 유명한 실학자인 연암 박지원(朴趾源)의 손자로 고종 3년(1866) 대동강을 따라 평양까지 올라온 미국 무역선 제너럴 셔먼(General Sherman) 호 사건을 처리하고 우의정까지 오르는 화려한 경력을 쌓았다. 또한 그는 그런 국정 운영과 두 차례의 중국 방문(1861ㆍ1872년)을 포함한 여러 경험으로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풍부한 식견을 갖고 있었다.

박규수는 고종 11년(1874) 9월 우의정에서 물러난 뒤 김옥균ㆍ홍영식(洪英植)ㆍ서광범(徐光範)ㆍ박영효 등 그 뒤 개화파의 핵심 인물이 되는 젊은이들을 지도하면서 지냈다. 이듬해(1875) 9월 일본 군함 운요호(雲揚號) 사건이 일어나고 그 이듬해(1876) 2월에 최초의 근대적 불평등 조약인 조일수호조규가 체결되었다는 사실이 보여주듯이, 그 무렵 조선을 둘러싼 국제 정세는 대단히 급박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이런 국면에서 박규수는 자주적 문호 개방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자신의 식견을 젊은 개화파에게 전수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2년(고종 13년〔1876〕 12월) 만에 세상을 떠남으로써 개화파에게 충분하고 강력한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고 판단된다.

개화파의 형성에 기여한 또 다른 인물은 한어 역관 오경석(吳慶錫, 1831~79)이었다. 그는 고종 3년(1866)부터 11년(1874)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청에 다녀왔으며, 흥선대원군의 집권이 끝나가던 고종 9년(1872)에는 동지사(冬至使)로 파견된 박규수를 수행해 인연을 맺었다. 그는 청에 갈 때마다 북경의 서점가인 유리창(琉璃廠)에서 서양의 지도와 과학기기, 서양 학술과 문화에 관련된 책들을 사서 박규수에게 전달했다.

오경석은 박규수와도 가까웠지만, 유대치와 좀 더 밀접한 관계였다. 그는 유대치와 가까운 삼각동(현재 서울 중구 삼각동)에 살면서 중국에서 가져온 [해국도지(海國圖志)]ㆍ[영환지략(瀛環志略)] 등을 그에게 소개했다. [해국도지]는 청의 주요한 사상가인 위원(魏源, 1794∼1856)이 서양 각국의 지리ㆍ산업ㆍ인구 등을 소개한 방대한 분량(100권)의 세계지리서이고, [영환지략] 또한 청의 복건순무(福建巡撫) 서계여(徐繼畬, 1795~1873)가 지은 세계지리서인데, 모두 중국은 물론 조선의 개화사상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오경석의 아들은 3ㆍ1운동의 민족 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자 유명한 서예가ㆍ학자인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1953)인데, 그는 아버지와 유대치의 관계를 이렇게 회고했다.

 

두 사람은 동지로서 결합해 서로 만나서 우리나라의 형세가 참으로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의 처지에 있음을 탄식하고, 언젠가 일대 혁신을 일으키지 않고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음을 상의했다. 한번은 유대치가 오경석에게 우리나라의 개혁을 어떻게 해야 성취할 수 있을지 물으니, 오경석은 먼저 북촌 양반 자제들 속에서 동지를 찾아 혁신의 기운을 일으키는 데 있다고 대답했다.- [김옥균전]  

 

개화파가 형성되는 데 기여한 박규수와 오경석이 얼마 뒤 비슷한 시점에 별세하자 유대치는 거의 유일한 정신적 지주로 남았다. 그는 젊은 개화파를 적극적으로 양성하면서 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활동과 위상

 

갑신정변을 주도했던 개화파의 주요 인물들. 왼쪽부터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 이들은 유대치를 따르며 자주 만나 토론하는 사이였다.

 

 

갑신정변(1884) 이전까지 유대치는 나이와 지위를 뛰어넘어 다양한 사람들과 교유하면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우선 김옥균ㆍ박영효ㆍ서광범 등 갑신정변을 주도한 개화파의 주요 인물들을 자주 만나 토론했다. 이 무렵 유대치는 나이가 상당히 많았다고 추정되며 김옥균은 30대 초반, 박영효ㆍ서광범은 20대였다. 그들은 자주 왕래하면서 “늘 일을 의논”했다. 상당한 연령 차이도 중요하게 작용했겠지만 유대치의 위상은 호칭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는데, 그는 김옥균을 ‘군’으로 불렀고 김옥균은 그를 ‘선생’이라고 존칭했다.

유대치가 가까이 지낸 또 다른 젊은 인물로는 윤치호와 오세창이 있었다. 먼저 윤치호는 당시 미국 공사의 통역이라는 독특한 위치에 있었는데, 유대치는 그런 그의 지위를 이용해 자신의 의견을 고종과 미국 공사에게 전달하려고 노력했다. 윤치호도 유대치를 ‘영웅’이자 ‘선각자’로 높이 평가하고 ‘대치 어른(丈)’이라고 부르면서 따랐다([윤치호 일기]). 앞서 나온 역관 오경석의 아들 오세창도 유대치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그는 아버지와 유대치의 친분에 따라 어려서부터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을 배웠으며, 갑신정변 무렵에는 그를 따라 개화당의 모임에 참석하기도 했다. “대치 선생은 깊이 불교를 믿어 도는 높고 품성은 청백(淸白)했다. 역사학에 조예가 깊어 조선 고금의 역사에 통달했다. 변설(辯舌)은 유창하고 신체는 장대하며 홍안과 백발에 항상 생기에 넘쳐 행동했다”고 오세창은 평가했다([김옥균전]).

유대치는 그밖에 유혁로(柳赫魯)ㆍ박제경(朴齊絅) 등 하층 양반과도 교류했다. 유혁로는 무과 출신으로 오위장(五衛將)을 지냈으며 박제경은 몰락 양반으로 짐작되는 인물이다. 유대치는 이들과 어울려 시국을 논의하고 산천을 유람했다.

국내외의 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던 개화기에 유대치의 위상은 매우 높이 평가되었다.

오경석이 조관(朝官)을 유도하여 외교를 운용할 때에 일백의(一白衣)로 시정에 은복(隱伏)하여 [해국도지]ㆍ[영환지략] 등으로써 세계의 사정을 복찰(卜察, 점치고 살핌)하면서 뜻을 내정의 국면 전환에 두고 가만히 귀족 중의 영준(英俊, 뛰어난 인재)을 규합하여 방략(方略)을 가르치고 지기(志氣)를 고무하여 준 이가 있으니 당시 지인의 사이에서 백의정승의 이름을 얻은 유대치가 그라. 박영효ㆍ김옥균ㆍ홍영식ㆍ서광범과 귀족 아닌 이로 백춘배(白春培)ㆍ정병하(鄭秉夏) 등은 다 대치 문하의 준모(俊髦. 빼어난 인재)로 일변 일본으로써 청을 몰아내고, 아라사(我羅斯. 러시아)로써 만주를 회수하여 청년 중심의 신국(新國)을 건설함이 그 이상(理想)의 윤곽이니 박영효ㆍ김옥균 등이 연래(年來)로 일본 교섭의 선두에 선 것도 실상 대치의 지획(指劃. 지시와 계획) 중에서 나온 것이요, 세인(世人)이 개화당으로 지목하는 이는 대개 대치의 문인을 이름이었다.- 최남선, <개화당의 연원>, [고사통(古事通)]  

 

정세의 인식

 

첫머리에서 말했듯이 유대치에 관련된 사항은 대부분 단편적이기 때문에 체계적인 사상이라고 말할 만한 부분을 파악하기는 어렵다고 지적된다. 전체적으로 그의 정세 인식은 부국강병을 가장 중시하면서 그 방안으로 재정의 통일과 군제의 개혁, 방만한 정부 규모의 축소 등을 주장했다고 평가된다.

그가 가진 서구 인식의 단면은 프랑스와 조약을 맺어 청의 내정 간섭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에서 보인다([윤치호일기] 1883년 12월 21일). 그는 서구 열강의 힘을 빌려 청의 영향력을 제어하려고 했는데, 고종과 상통하는 이런 외교 전략은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한계를 드러낸다고 지적되기도 한다.

이런 판단은 청의 성격을 이중적으로 설정하는 인식으로 이어졌다. 그는 갑신정변 직전, 경상도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윤치호에게 이렇게 말했다. “군은 염려할 것이 없다. 경상도에서 난당(亂黨)이 성을 공격하고 세력을 모으면 일은 노출되고 모의는 누설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삼영(三營)의 군사와 중국의 도움이 있으니 왕명을 받들어 토벌하면 오합의 무리는 며칠 만에 타파할 수 있을 것이다([윤치호 일기] 1884년 2월 6일).” 그러니까 그는 서구 열강과의 관계에서는 청을 제어해야 할 적대적 세력으로 파악했지만, 내부의 전란을 수습하는 데는 그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우호적 대상으로 상정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인 것이다.

 

갑신정변과 그 뒤의 행적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파가 일으킨 가장 중요한 사건은 갑신정변이었다. 1884년 12월 4일에 거사해 일단 성공했지만 사흘 만에 실패로 끝난 그 정변에 유대치는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앞서 보았듯이 김옥균ㆍ홍영식ㆍ서광범ㆍ박영효ㆍ서재필 등 이른바 ‘갑신오적’으로 불린 핵심 인물들과 자주 만나 토론함으로써 배후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유대치는 정변에 매우 조심스러운 견해를 나타냈다. 정변 한 달 전 유대치는 “개화당은 근신하면서 때를 기다려야 한다”고 조언했으며, 20여 일 전에도 김옥균에게 “일본 정부의 정략을 군들은 과연 깊이 알고 있는가? ······ 내가 우려하는 바는 일본군이 100명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절도와 제도가 청국 병사보다 강한 듯하나 병력이 크게 모자라니 이것이 매우 걱정된다.”고 우려를 표명했다([갑신일록] 1884년 11월 16일).

그의 우려대로 정변은 청의 개입으로 사흘 만에 실패했고, 주요 인물들은 망명하거나 살해됨으로써 개화파는 해체되었다. 유대치의 종적도 가뭇없이 사라졌다. 그는 오대산으로 숨었다고도 했고 일본으로 망명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오세창의 아들 오일륙(吳一六)은 유대치가 오세창과 한동안 광주ㆍ가평 등지로 피신했는데, 어느 날 변소에 간다고 나간 뒤 끝내 소식이 끊겼다고 증언했다. 유대치의 공식적인 마지막 자취는 1910년 7월에 정3품 품계를 받고 규장각 부제학에 추증된 것이었다.

첫머리에서 말했듯이 19세기 후반은 아마도 한국사에서 가장 혼란스러운 격동기였을 것이다. 그때까지는 듣지도 경험하지도 못한 문물과 개념과 상황이 급격하게 밀려오면서 반 세기 동안 견고하게 유지되던 조선의 구조에는 깊고 큰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인물이 떠오르고 사라졌다. 유대치는 그런 혼란을 직시하면서 나라의 활로를 모색한 인물이었다. 그리 참신하지는 않지만 ‘백의정승’이라는 표현대로 그는 개화사상 형성의 막후에서 크고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한 숨은 지도자였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이광린, <숨은 개화사상가 유대치>, [개화당연구], 일조각, 1977
이상일, <갑신정변의 막후 지도자―유대치>, 유기준 편, [한국근현대인물 강의], 국학자료원, 2007
이상협, <의원 유대치가 개화당 형성에 끼친 영향은?>, 노용필 외, [개화기 서울사람들 1], 어진이, 2004.

김옥균(金玉均, 1851년 2월 23일 ~ 1894년 3월 28일)의 출생과 가게 [출처 : 위키 백과)


출생과 가계 1851년 2월 23일에 조선 충청도 회덕군[5] 에서 인조 때 우의정을 지낸 안동 김씨 문충공 김상용의 9대손인 김병태(金炳台)와 부인 은진 송씨 (* 대유학자 송시열 있음) 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생가는 외삼촌 송인식(宋寅植)의 집으로, 살결이 '백옥같이 곱고 희다'고 '옥균'이라 지었다고 한다.

김옥균 선생 유허 충청남도 기념물 제 13 - 1호 (위치 : 충남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 143)


6살 때 김옥균은 5촌 당숙이자 당대 정계 거물인 김병기(金炳基)의 양자가 됐다. 당시 유력 집안에 적자가 없는 경우 일가 친척 중 양자를 들여 정치적 지위와 제사를 잇게 하는 경우는 흔했어도 맏이를 양자로 보내지는 않는데, 그럼에도 그는 친아버지인 김병태의 결정으로 세도가 집안에 입양가게 됐다.


    그러면 사영대감 김병기 (金炳冀, 1818년~1875년) 생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생부는 김창집의 손자 김성행(金省行)의 증손 김영근인데 9촌숙이 되는 김조순의 아들 김좌근(金左根)의 양자가 되었다. 순원왕후의 조카뻘이 된다. 1847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여러 벼슬을 거쳐 정3품 당하관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승진, 1848년 사복시정(司僕寺正)이 되었다. 1849년 철종 즉위 후, 다시 승진하여 성균대사성이 된 뒤에 종2품으로 거듭 승진, 예조참판(禮曹參判), 이조참판(吏曹參判] ) 등을 지냈다.
그 뒤 거듭 승진하여 1853년 총융사(摠戎使), 훈련대장, 이조판서(吏曹判書)를 거쳐 예조판서(禮曹判書), 형조판서(刑曹判書), 공조판서(工曹判書) 등 각조의 판서직을 두루 역임하고, 1862년 판돈령부사로 전임되었다. 그 뒤 종일품 의정부좌찬성(左贊成)으로 있을 때, 1863년 12월 철종이 급서하자 조대비와 후계문제를 놓고 갈등하였으며, 고종이 1864년 흥선대원군이 섭정으로 집권하자 광주부유수로 좌천되었다. 이후 외직을 전전하다가, 다시 요직에 등용되었으며 좌찬성(左讚))에 이르렀다.
안동김씨 세도가 한창일 때 몰락왕족으로 파락호생활을 하던 흥선대원군과도 교류하며 어려움에 처했던 흥선대원군을 재정적으로 도운 관계로, 뒷날 안동김씨 일족이 대부분 숙청되었을 때에도 살아남아 관직에 계속 머무를 수 있었다. 김동인과 유주현의 소설 《대원군》에서는 흥선군의 주요 정적이자, 흥선군을 면박하는 역할로 묘사된다. 문집에 《사영집》이 있다.]

  김옥균(金玉均)은 어려서부터 문장·시·글씨·그림·음악 등에 두루 다재다능했다. 입양 후엔 후계자 수업을 받아야 해 유명한 선생들을 찾아다니며 과거 준비만 전념했다. 11살 때 양부 김병기가 외직에 나갈 순번이 돼 강릉 부사로 갔다. 옥균도 강원도 강릉으로 이주해 송담 서원에서 배웠다.[8] 강릉은 서인의 원조 율곡 이이의 고향으로, 율곡의 사당을 모신 그곳에서 노론의 학통을 이었다. 5년 후인 16세 때 다시 중앙으로 전임하는 양아버지를 따라 상경했다.
1870년 당시 홍문관 제학으로 제너럴셔먼호 사건 등을 진압하고 흥선대원군의 총애를 받던 박규수의 문하가 됐다.

박규수는 누구일까?
[박규수(朴珪壽, 1807년 10월 27일 ~ 1877년 2월 9일)는 조선 말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반남(潘南). 초명은 규학(珪鶴), 자는 환경(桓卿→瓛卿) 또는 정경(鼎卿), 호는 환재(桓齋→瓛齋), 헌재(獻齋), 환재거사(瓛齋居士) 등이다.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 추사 김정희 등과 교류가 깊었고, 제네럴 셔먼 호를 격퇴하고 경복궁 재건의 총책임을 맡는 등 흥선대원군으로부터도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연암 박지원의 학문 및 사상의 계승자로서 척화론(斥和論)에 반대하고,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다온 후 양무 운동처럼 서양 기술의 선택적 도입과 국제 통상을 주장했다.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서재필, 박정양, 윤치호 등 개화파 청년들을 길러냈으며 일본과 강화도 조약이 체결될 때는 위정척사파의 명분론을 반대하고, 막후에서 조정 대신들을 움직여 조약 체결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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