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 ⑧숭선전지(崇善殿誌)에 기록된 가야건국

숭선전지(崇善殿誌)는 김해 김씨 집안의 역사서이자, 경전과도 같은 책이다.
숭선전(崇善殿)이란 한민족의 최초 조상인 환인씨(桓仁氏)로부터 삼황오제(三皇五帝) 이후 역대로, 선조들의 위패를 모시고 추모하면서 제사를 지내는 전각을 말한다.

  삼황(三皇)이란 천황(天皇, B.C.8479년)·지황(地皇, B.C.8364년)·인황(人皇, B.C.8247년)이다. 오제(五帝)는 유소씨(有巢氏:일명 桓雄氏, B.C.3898년)·수인씨(燧仁氏, B.C.3739년)·복희씨(伏羲氏, B.C.3512년)·신농씨(神農氏, B.C.3071년)·황제씨(黃帝氏, B.C.2679년)이다. .

 기자조선(箕子朝鮮) 때는 숭인전(崇仁殿)이라 했고, 고구려 동명왕(東明王) 때는 숭령전(崇靈殿)이라 했다. 신라 혁거세(赫居世) 때는 숭덕전(崇德殿), 신라 4대 탈해왕(脫解王, A.D.56∼78년) 때는 숭신전(崇信殿)이라 했다. 그리고 알지왕(閼智王), 신라 30대 문무왕(文武王)과 신라 56대 경순왕(敬順王) 때는 숭혜전(崇惠殿)이라고 했다.
그리고 백제 온조왕 시절에는 숭렬전(崇烈殿)이라 했고, 고려 태조왕건 때는 숭의전(崇義殿)라 했다.
그러므로 가야국의 숭선전까지 8대전으로, 사서에는 기록되어 있다.

 숭선전에는 머리말에서부터 후서(後敍:뒤에 기록한다는 뜻)가 있고, 숭선전지서(崇善殿誌序)의 원문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숭선전지》의 목차가 시작된다. 목차에는 도판(圖版:도록으로 된 판)이 있고 사진으로 된 능의 도표와 왕묘, 그리고 제각 등이 수록되어 있다.

  《숭선전지》의 제1권은 가락국기(駕洛國記)로 시작하여, 제2권은 여러 가지 통문(通文:신하들의 상소문 같은 것)이 있다. 제3권에는 각종 제문(祭文:제사 때 올리는 글)과 여러 가지 상량문(上樑文:집을 지을 때 들보를 올리는 글)을, 제4권에는 관문(關門:중요한 요처의 글)이 있고, 제5권에는 여러 곳의 전각이 배치된 곳을 싣고 있다. 그리고 끝장에는 속편에 부록으로 실은 제1권으로 광무(光武) 7년부터 기록하고 있다. 광무 7년이면 후한(後漢:東漢) 때이다. 후한 광무제(光武帝, A.D.25∼56년)는 이름이 유수(劉秀)이며 연호는 건무(建武)라고 되어 있다. 광무 7년은 후한 광무제 32년이란 뜻이다. 가락국의 기록은 후한 광무제 32년부터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숭선전지 머리말에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것을 보면 김해부(金海府)라고 되어 있다. 김해부(金海府)는 필자가 앞서 밝혔듯이, 대륙의 절강성(浙江省) 임해군(臨海郡)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김수로왕비 허황옥(許黃玉)은 남천축의 아유타국(阿踰陀國) 왕의 딸이라고 되어 있다.
필자가 전술한 바와 같이 서장성과 인도와의 접경지대가 아리(阿里)이다. 아유타국이 있던 곳이다. 이곳이 남천축국이다.

본래 천축국은 신강성 동북부에서 시라일다(尸羅逸多)라는 왕이 세운 것으로 강대해지자 다섯 천축국으로 나누어졌다. 서장성과 청해성(靑海省) 서쪽지역과 신강성(新疆省) 일대가 모두 옛 천축국이었다

  사서에서 아(阿)자는 본래 언덕이라는 뜻이다. 사막이 많고 돌이 많으며 거친 땅이라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의 글자가 아(阿)자이다. 아자를 보면 금방 서역(西域)임을 알 수 있다.
아리(阿里), 아라(阿羅), 아슬라(阿瑟羅), 아미타불(阿彌陀佛), 아유타(阿踰陀) 등은 주로 사막이 옆에 있는 언덕이라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들이다.   한국에는 모래와 사막과 언덕이 없기 때문에 아(阿)자가 붙을 만한 곳이 없는데, 유독 아현동(阿峴洞)에 아자가 붙어있으나 모래와 사막이 있는 언덕이 아니므로 후에 갖다붙인 지명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허황옥의 호(號)는 보주태후(普州太后) 또는 보조태후(普照太后)라고 했다. 보주(普州)는 사천성 안악현(安岳縣)이었음을 지적한 바 있다. 또 수로왕의 묘지인 왕릉과 허황옥의 왕릉은 구지봉(龜旨峯)의 산 동쪽에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숭선전지 서문 24페이지에서 보면 가야국의 계통은 삼한(三韓)이 오가야(五伽耶)의 종주국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으며 무릇 491년 간 지속되어 왔음을 기록하고 있다. 후한(後漢) 건무(建武:光武帝, A.D.25∼56년) 당시 신라와 더불어 삼한(三韓)의 왕통에서 시작되었다고 적고 있다.

  숭선전지 첫권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개벽 후 나라가 아직 서지 아니했고 나라이름이 없을 때 군신이 없는 신라의 칭호를 간(干)이라 한다고 했다. 다시 말해 임군이 없었을 때 제후들의 칭호에 무조건 간(干)자를 사용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아도간(我刀干)·유수간(留水干)·유천간(留天干)·신천간(神天干)·오천간(五天干)·신귀간(神鬼干) 등 아홉 명의 추장(酋長) 등이 모여, 백성들 중에 뽑은 영수와 백성 100여 명과 함께 모여 가야 왕을 선출하는 문제를 의논했다는 기록이다. 그때 백성 7만 5천 명은 도시 외곽의 산야에서 논밭을 경작했다고 한다.

  숭선전지 1권 5쪽에 보면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건무 18년 임인년(壬寅年) 계욕( 浴:목욕하고 푸닥거리를 뜻함)일에 북쪽에 있는 구지봉(龜旨峯)에서 이상한 소리와 함께 상스러운 기운이 나타났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형상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딘지 사람의 소리는 분명했다.
구간(九干:아홉 명의 한국인. 즉 대표자격)들이 대응하기를 여기는 구지(龜旨)다라고 했다고 한다.
또 말하라고 하자 하늘에서는 너희들에게 명령을 내린다고 했다. 그때 구지봉에서는 다음과 같은 노랫소리가 터져나왔다.

          구하구하(龜何龜何:거북아! 거북아!)
        수기현야(首其現也:머리를 내밀어라)
        약불현야(若不現也:만약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번작이끽야(幡灼而喫也:이글거리는 불에 구워먹겠다
)

  이와 같은 뜻으로 계속해서 많은 사람들이 춤과 노래를 불렀다고 되어 있다. 그 당시 하늘에서는 이상한 자색 빛이 나타나더니 그 빛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곳에 불그스레한 황금알 여섯 개가 둥근 해처럼 놓여져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참으로 놀라면서도 기뻐하며 여러 번 절하여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아도간(我刀干)이란 사람이 하늘에서 내려온 알을 안고 집에 가져왔다.  
그후 여섯 알이 화하여 동자가 되었고, 그들이 각각 여섯 가야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인데, 알〔卵〕이라는 것은 가장 핵심을 뜻한다. 게다가 황금알이라고 했으므로 군신의 자손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알이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대륙의 북쪽 방향에서 남쪽 대륙으로 내려온 것을 뜻한다. 그리고 9간으로 대표되는 인근의 제후들이 모여 가야국의 왕으로 옹립하기 위한 행사를 구지봉 주위에서 행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김수로왕의 나라이름은 대가락(大駕洛)이라고도 하며 또는 가야국(伽耶國)이라 했는데 여섯 가야 중에 하나이다라고 했다. 나머지 다섯은 각각 다섯 가야의 주인이며, 동쪽으로 황산강(黃山江)이 있고 서남으로는 창해(滄海:차디찬 바다. 즉 東海를 뜻함)가 있고 서북으로는 지리산(智異山)이 있으며, 동북으로는 가야산(伽耶山)이 있다고 했다.

  여기서 지리산(智異山)은 지금 중국 대륙의 지주(智州)가 있는 곳이다. 지주에 있는 지이산은 광서성(廣西省) 울림현(鬱林縣)과 하지현(河池縣) 동쪽이다.   황산강(黃山江)이라는 강 역시 한국에는 없는 강이다. 여기서 황산강(黃山江)은 안휘성 남부에 있고 황산에서 상해 동쪽으로 흐르는 샛강인 듯하다. 지금 한국의 김해를 가야국으로 보았을 때 동쪽인 부산쪽에는 황산이나 황산강이 있을 리 없다. 현재 중국 지도에는 상해시(上海市) 주변에 황강(黃江) 황포(黃浦)라는 강과 포구가 있는 것으로 보아 황산강은 안휘성에 있는 황산(黃山)에서 동으로 멀리 뻗어 흘러간 강으로 보인다.

 고려 태조(太祖, A.D.918∼942년) 5년 경자(庚子) 때 다섯 가야의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금관(金官)은 김해부(金海府). ㉡고령(古寧)은 가리현(加利縣). ㉢비화(非火)는 창녕(昌寧) 또는 고령(高靈). ㉣아라(阿羅)를 성산(星山)으로 했다는 기록이다. 성산을 혹 벽진가야(碧珍加耶)라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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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⑨숭선전지에 기록된 가야지명

숭선전지는 동국여지승람에 나타난 기록을 참고하여 산천(山川)·궁실(宮室)·불우(佛宇)·능묘(陵墓)·고적(古蹟)·인물(人物) 등으로 되어 있다. 특히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지명이다.

㉠ 감로사(甘露寺)
  숭선전지에 나타나는 감로사(甘露寺)는,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 의하면 대륙 강소성(江蘇省) 진강현(鎭江縣) 북쪽 산인 북고산(北固山)에 있다고 적고 있다.  감로사는 오(吳)나라 때 손권(孫權:大帝, 연호는 黃武, A.D.222∼229년)이 설치했다. 그리고 당(唐)나라 때 이덕유(李德裕)가 절터를 다시 증개축하면서 창건된 절이 감로사이다.
  택지를 조성할 때 땅에서 달콤한 단물이 나온다고 하여 감로사(甘露寺)라고 이름지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그후 청(淸)나라 성조(聖祖)였던 강희(康熙:이름은 玄燁, A.D.1662∼1722년) 때 이름을 고쳐 초안사(超岸寺)라고 했다고 한다.

  또다른 곳은 섬서성(陝西省) 화현(華縣) 동남으로 8리에 있는 소화봉(少華峯) 서쪽에 당(唐)나라 장교(張喬)와 정곡(鄭谷)이 함께 놀러왔다가 감로사(甘露寺)에 대한 시(詩)를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고 적고 있다.
  이 시의 감로장조에 보면 사천성(四川省) 자중현(資中縣) 서북 50리에 통라천정로(通羅泉井路)라는 곳에 감로사(甘露寺)가 있으며, 당나라 승려였던 진덕(眞德) 스님이 창건한 것으로 되어 있다. 절 옆에 있는 샘물은 병을 고치는 물이라고 적고 있다.
  그리고 감로사(甘露寺)가 있는 곳에 신어산(神魚山)이 있으며, 이곳에서 동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옥지연(玉池淵)이란 연못이 있다고 되어 있다.
  그러니까 감로사가 있는 곳에는 신어산(神魚山)이 있고, 신어산 가까운 곳에는 옥지연이란 연못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곳은 송(宋)나라 이종(理宗:趙 , A.D.1225∼1264년) 가희(嘉熙, A.D.1237∼1240년) 원년에 승려인 해안(海安) 스님이 세운 것으로 되어 있으며 그후 몽암(蒙庵) 스님이 기록한 것으로 되어 있다.

㉡ 구암사(龜巖寺) 
  구암사(龜巖寺)는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 보이지 않는다. 다만 구암사,십선사(十善寺),청량사(淸凉寺)는 신어산(神魚山)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신어산은 감로사(甘露寺)에 있다는 기록을 보았다. 감로사는 신어산에 있다 했으며 감로사는 지금 대륙의 강소성(江蘇省) 진강현(鎭江縣) 북고산(北固山)이라 했다. 북쪽에 있는 고산(固山)인지 북고산(北固山)인지는 자세히 알 길이 없다. 그래서 북고산을 찾아보기로 했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 183쪽에 북고산이 있었다. 이곳은 강소성(江蘇省) 단도현(丹徒縣) 북쪽 1리에 있다고 적고 있다. 지형으로는 산이 우뚝 솟은 입구에서부터 강으로 이어져 삼면(三面)이 물로 되어 있다고 했다.   이곳에는 황금색과 붉은 색의 두 산이 나란히 있고 경치가 수려해 사람들이 말하기를 삼산(三山), 즉 세 개의 산의 서울이란 뜻으로 불려졌다고 한다.
  산 아래에 다다르면 큰 강이 있고 산세와 강물이 험난하고 견고하여 양(梁)나라 무제(武帝, A.D.502∼519년, 이름은 숙연, 연호는 천감)가 산에 올라 오래도록 서 있다가 말하기를, 산 준령으로서 자태를 지키는 것은 부족함이 없구나. 과연 서울인 도읍지다운 입구는 실로 장관이로다라고 했다고 한다.
  산봉우리에는 용왕을 모신 사당이 있는데, 송(宋)나라 때 한세충(韓世忠)이 군사를 파견해 사당에 매복해 있다가 중원에서 온 왕출(王出)을 굴복시켰다고 적고 있다. 진강현(鎭江縣)은 진강시로 되어 있고, 강소성 남쪽으로 지금의 남경시(南京市)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중국 지도에 남경시 동쪽에 있는 진강시(鎭江市)에는 감로사가 있고 신어산(神魚山)도 있으며, 구암사·십선사·청량사, 그리고 운점산(雲岾山)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진국사(鎭國寺)와 명월사(明月寺)도 진강현 주변인 명월산(明月山)에 있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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