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사의 땅을 벗어나 ‘~스탄’ 지역으로 … 세계의 지붕 파미르를 넘어서
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초원에서 흑해까지_ 26. 사막이여, 안녕! 반갑고야, 파미르!― 서쪽으로 간 월지의 행방(1)
2014년 11월 25일 (화) 15:18:07 연호택 가톨릭관동대·영어학 editor@kyosu.net

   
  ▲ 비단길 교통로의 요충지 돈황. 이곳을 넘어서면 어떤 세계가 펼쳐질까. 감숙과 돈황의 패자였던 월지는 흉노에 쫓겨 세계의 지붕 파미르를 넘어 이동해야 했다. 사진 장영주 KBS PD  

 
마침내 사막을 떠나 세계의 지붕 파미르를 넘게 된 월지의 부류가 누구인지알아보려 한다. 왜 이들에 주목하는가. 이들이 한 때 ‘소그드인의 땅’이라는 의미의 소그디아나로 이주해 가 중앙아시아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기 때문이다. 드디어 열사의 땅을 벗어나 ‘-스탄(stan)’ 지역으로 진입하게 된다.


“만들어진 습관은 우리가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습관은 단지 어떤 상태일 뿐 아니라 어떤 경향이자 능력이기도 하다.” ―라베송, 『습관에 대하여』

필자가 중앙아시아 국가 우즈베키스탄에 처음 간 것은 2001년의 일이다. 19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해외여행이 습관이 될 무렵이다. 우즈베키스탄이라는 나라 이름이 우즈벡족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나라 즉 ‘우즈벡의 땅(-스탄)’이라는 뜻임을 알고 호기심이 생겼다. 이런 호기심, 새로운 것에 대한 관심이 나의 여행벽을 만들었고, 학문에 싫증을 느끼지 않도록 했다. 우리말 ‘땅’의 중세어가 ‘ㅅ다’인데 수만리 떨어진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어찌해서 이와 흡사한 ‘stan’이 사용되고 있을까? 저들과 우리와의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호기심을 충족하고 해결하려는 이런 식의 나의 오래된 버릇 혹은 습관이 나의 세상살이 경향이자 대단찮은 능력이라고 나는 믿는다.


우즈베키스탄은 물론 다른 중앙아시아 국가들도 대부분 다종족 사회다. 백 여 개의 민족이 혼재해 있고 따라서 인종적 혼혈(hybrid)이 꾸준히 이어져 왔다. 그 결과는 다양한 생김새다. 또 하나 미인이 많다. 그래서 우즈베키스탄에 갔다 오니 친구들이 “그 동네 여자들 모두가 영화배우라며?” 호기심 어린 질문을 했다. “에이 뭘!”이라고 답은 했지만, 속으로는 ‘그렇긴 해’라고 수긍을 했던 기억이 있다.
이런 가벼운 호기심과는 달리 이번 글은 무겁게 들어가고자 한다. 무겁다는 것은 참담한 슬픔에 처한 월지, 억지 이주할 수밖에 없는 비극적 운명에 공감해 그들의 심정을 진지하게 헤아리고, 그들의 행방을 가급적 소상히 추적하려는 의도를 말하는 것이다. 이미 알고 있지만, 월지의 西遷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배경과 결과를 개관하자면 아래와 같다.


기원전 176년 월지는 선우 모둔이 이끄는 흉노 연합군에게 치욕적 패배를 당한다. 다시 몇 년 뒤 이번에는 모둔의 아들 노상선우에게 월지 수령이 죽임을 당하는 최악의 일이 벌어진다. 그뿐이랴. 首級이 베어지고 그것도 모자라 두개골이 술잔으로 만들어지는 가공할 시련에 봉착한다. 원수는 갚아야 하거늘, 그러기에 상대해야 할 적은 너무나 강했다. 회복하기 어려운 치명타를 입은 월지는 어떻게 됐을까. 정든 곳을 떠나는 것이다.


월지는 본디 기련산맥을 배후지로 감숙과 돈황 등지에 주거지를 두고 河西는 물론 타림분지의 지배자 노릇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서역과 중국의 교역 중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뿔뿔이 흩어지는 離散은 기득권인 상권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주 후의 삶은 익숙한 것, 누리던 것과의 이별을 의미한다.
흉노에 쫓긴 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본거지에서 내몰린 이들이 천산산맥 북쪽 일리하 일대의 초원과 이식쿨 호수 주변 지역으로 이동해갔음을 우리는 진즉 알고 있다. 그로 인해 천산 주변의 선주 세력이던 塞族이 마지못해 서천과 남천을 결행했음도 문헌 기록을 통해 확인했다.


짐작컨대 쫓기는 무리의 행렬은 반드시 하나가 아니었을 것이다. 돈황에서 서쪽으로 나서면 천산 이남의 오아시스 지역과 통한다. 그곳에 성곽도시들이 있었다. 그리고 陽關을 나서면 가까이에 小國 약강(羌)이 있고, 이곳을 통해 南山 북안의 오아시스 지역에 쉽게 이를 수 있다. 가깝고 멀다는 것은 상대적이다. 실제 약강은 甘州로부터 서남방으로 1천5백리, 양관으로부터는 1천8백리나 떨어져 있었다. 장안으로부터는 6천3백리 길이었다.


중국 한자음으로 뤄창이라 불리는 약강의 위구르 명칭은 차르클릭. 고대 미란 유적이 있는 곳이다. 당나라 때는 吐蕃의 땅이 됐다. 땅의 주인은 이렇게 수시로 바뀐다. 하면 漢나라 때 명칭이 왜 羌인가. 약강이라는 지명의 기원은 이곳의 주민이 若人과 羌人으로 구성된 때문이었다. 이들이 거주한 지역은 현재 신강(新疆)의 약강현(若羌縣) 일대다. 明나라 때까지도 이곳에서는 유목생활이 이뤄졌다. 사서에 따르면 여기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은 성곽이 없고, 모전(毛氈) 즉 羊毛섬유로 만든 장막을 설치하여 거처로 삼았다. 産物은 대부분 낙타, 말, 소, 양이었다. 약강에서 서북쪽으로 가면 선선국(善國) 즉 모래 속에 묻힌 전설의 왕국 누란(樓蘭)에 이른다. 그리고 강릉에도 서울에도 경주에도 있으며, 중국 곳곳 어디에나 있는 南山은 여기서는 웅장한 곤륜산맥을 가리킨다.


패망한 월지는 부족 중심으로 움직였을 것이다. 이주 경로로 천산남로를 선택한 집단을 필자는 玉의 부족 쿠시(Kush) 혹은 카시(Kash)로 추정했다. 車師前王庭(및 後王庭), 구자국(龜滋國), 이전에는 소륵국(疏勒國)이었던 카시가르의 車師, 龜滋, 喀什의 음이 대체로 그와 같은 추정을 뒷받침한다. 이들 쿠시 부족이 후일 파미르 고원을 넘어 오늘날의 인도 북서부 카시미르로 이동해 왕국을 건립하기에 이른다. 이들이 살던 산악지역은 힌두쿠시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박트리아왕국의 소흡후(小翕侯)에 불과했던 이들이 마침내 인도 북부를 지배하는 귀상(貴霜) 왕국 즉 쿠샨왕조를 수립하게 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이 쿠샨조를 중국은 여전히 월지라 불렀다.


사막남로 즉 곤륜산맥 북쪽 기슭을 따라 이주한 집단은 어찌 됐을까. 『삼국지』 魏志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 서융(西戎)조에 자로(虜)와 월지(月氏)의 여종(餘種)에 대한 설명이 있다.
“燉煌西域之南山中,從羌西至領數千里,有月氏餘種葱茈羌·白馬·黃牛羌,各有酋豪,北與諸國接,不知其道里廣狹.傳聞黃牛羌各有種類,孕身六月生,南與白馬羌……(돈황과 서역의 南山 가운데에는 약강에서부터 서쪽으로 총령에 이르는 수천 리에 걸쳐 월지의 여종(餘種)인 총자강(葱茈羌), 백마강(白馬羌), 황우강(黃牛羌) 등이 있고 각자 추호(酋豪)를 갖고 있다. 북으로는 여러 나라와 접하고 있는데, 그 거리와 광협은 알 수가 없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황우강은 여러 종류로 돼 있으며, 아이를 잉태하여 6개월이 되면 출생하고, 남쪽으로는 백마강과 인접하고 있다고 한다.)” 그랬다. 비록 흉노에 패했지만, 월지가 전멸한 것이 아니었다. 살아남은 자들이 저마다 길을 달리해 생존의 길을 모색했다. 그리고 총자강, 백마강, 황우강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었음을 중국 史書는 말해주고 있다. 왜 羌일까. 그 지역의 선주민이 羌族이었던 것이다. 손님으로 찾아간 월지는 이들 부근에서 혹은 이들 속으로 들어가 마침내 이들과 섞여 살게 됐다. 혼인도 하고 문화도 교류하면서.


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을 시작하며 필자는 기원전 2세기 월지의 서천이 중앙아시아의 인문학적 지평에 미치는 영향을 검토하고자 했다. 우리는 알고 있다. 기련산맥을 배후지로 감숙과 돈황의 패자였던 월지가 같은 유목집단 흉노에 패해 서쪽으로 이동하게 된 사연을. 그리하여 새로운 영토에서 일부는 정복자로, 또 다른 일부는 남아서 혹은 인근 지역으로 이주해 피정복 주민으로서의 삶을 살았음을. 후자의 경우 세월이 흘러 점차 잊힌 존재가 됐을 것임도 짐작할 수 있다. 강족과 동화된 월지 집단이 그러하다.


역사는 산 자의 기록이다. 자기 옹호의 산물이다. 앞서 이번 글은 원 거주지를 벗어나 파미르 고원 이동의 사막 오아시스 지역과 천산산맥 초지로 삶의 터전을 옮긴 월지의 보다 정확한 위치를 살펴보려고 한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이 말은 마침내 사막을 떠나 세계의 지붕 파미르를 넘게 된 월지의 부류가 누구인가도 알아보려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왜 이들에 주목해야 하는가. 이들이 한 때 ‘소그드인의 땅’이라는 의미의 소그디아나로 이주해 가 중앙아시아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되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들의 이주 및 정착 과정을 살피는 속에서 소그드인에 대한 다양하고 흥미로운 이야기가 거론될 것이다. 드디어 열사의 땅을 벗어나 인문학기행의 행선지는 ‘-스탄(stan)’ 지역으로 진입하게 되는 것이다.


몽골초원(과거에는 달리 불렸을 것이다)을 중심으로 한 초원의 지배자는 수시로 바뀌었다. 흉노, 선비, 유연, 돌궐, 위구르, 키르기즈, 키타이, 몽골 등의 순이었다. 이들은 항가이 산맥 서쪽에 자리 잡은 외트겐을 시원지로 혹은 성산으로 삼았다. 양과 말을 치며 유목생활을 영위했다. 바이칼이나 흥안령산맥 주변의 종족들은 추위에 강한 순록과 더불어 살았다. 그래서 순록을 자신들의 族名으로 삼았다. 선비의 한 갈래인 탁발부(拓拔部)가 바로 저들 말로 순록을 가리키는 tabu를 족명으로 사용했다. 이들은 흥안령산맥과 훌룬 부이르 일대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집단이었다. 代나라 땅으로 이주해 와 오호십육국 시대를 거치며 하북을 평정하고 魏를 세웠다. 대나라는 지금의 내몽고자치구 呼和浩特 西南의 盛樂을 수도로 한 제후국이다. 탁발선비가 세운 위라나를 우리는 北魏라 부른다. 저들 스스로 삼국시대 조조 부자의 魏를 계승한 것으로 자임한 때문이다.


과연 ‘소그드’는 무엇일까? 한자어로 粟特, 束毒 등으로 표기된 이 집단 혹은 국가 명칭은 어떻게 해서 생긴 것일까? 束毒 즉 Sogd(or Soghud)를 필자는 ‘소’를 뜻하는 말 sog와 명사 복수형 어미 -ud~ut의 결합으로 이해한다. 즉 Sogd라는 ethnonym(종족명)은 소를 기르는 집단을 가리키는 명칭인 것이다. 시베리아의 Saha(or Saka)족을 주변 종족들이 야크소를 기르는 집단이라 해서 Yakut라는 타칭(exoethnonym)으로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Sogd 혹은 Soghud가 과연 소종족일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티베트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吐蕃(티베트족)은 羌族과 蕃族 두 민족 간의 혈연적 융합의 하이브리드다. 아로장포(雅魯藏布)강 유역을 제외한 티베트 지역은 거의가 고대 羌族의 땅이다. 吐藩은 중국 史書의 기록이고, 이 말이 서양으로 전해지면서 티베트(Tibet)가 된 것이다. 티베트인 스스로는 농업인이라는 뜻의 뵈파(博巴)라고 불렀는데, 유목민 조파(卓巴)와 차별을 두고자 하는 의도가 엿보인다. 토번의 ‘蕃’은 ‘농업’을 뜻하는 ‘博’(뵈)과 발음이 같다. 암소와 숫야크 사이의 하이브리드인 조(dzo, dzho, zho, zo)는 노새처럼 이종교배의 산물로 주로 짐 싣는데 이용된다. 조는 수컷이고 암컷은 조모(dzomo)라 부른다. 조모는 번식능력이 있는데 비해 수놈 조는 생산능력이 없다. 슬픈 존재다.


농사를 생업으로 하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야크소나 혼혈종 조의 등에 물자를 싣고 북방으로부터 내려온 소몰이 집단이 야만인으로 보였을 것이다. 농업사회에서 소는 귀하게 여기는 동물이다. 배가 고프다고 함부로 잡아 막을 수 없다. 그럴 경우 다음 해 농사를 짓기 어렵기 때문이다. 사람은 굶어도 소는 먹여야 한다. 티베트에는 3대 방언 지역이 있다. 먼저 위장(衛藏)방언 지역. ‘위장’은 수도인 라사가 위치한 아로장포강 하류 유역의 정치적 ‘중심지’를 가리키는 티베트어 ‘위’와 쉬가체 등지를 포함하는 아로장포강 상류 유역의 종교적 중심지의 ‘聖潔’을 가리키는 ‘장’의 합성어다. 그런데 동남지역에 해당하는 바얀카라(巴顔喀拉: ‘풍요롭고 검다’는 뜻)산 이남 지역의 康巴(캄파)들이 사는 康(캄)방언 지역에서 소(牛)를 so라 부른다. 기련산과 바얀카라(巴顔喀拉)산 사이 靑海湖 주변과 하서회랑 일대의 티베트 북부 안다방언 지역에서는 소를 sog(~sok)라 한다.


So/Sog은 중국 사서에 등장하는 모우강(牛羌)을 가리키는데 사용된다. 모우 즉 야크소를 기르며 사는 羌族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티베트인들에게 so는 야크에 다름 아니었다. 13세기가 돼 몽골인들이 과거 모우강의 땅에 들어왔다. 티베트 사람들은 자신들을 문명과 세련됨의 표준으로 삼고 북쪽의 몽골을 야만인, 오랑캐의 땅이라는 뜻에서 So(의 땅)라고 비하해 불렀다. 그렇다면 Sogd는 소(sog) 즉 야크를 유목하거나 방목하는 집단이라 할 만하다.


티베트인들은 야만스런 오랑캐를 호르(Hor)라고 부른다. 다른 지역 티베트인들에게 캄파(康巴)는 ‘호르’(Hor)로 불리기도 한다. 캄파들이 사는 참도지역이 고대에는 西羌부족들이 살았기 때문이다. 티베트 사람들에게 羌族은 오랑캐인 호르였다. 『蕃漢對照東洋地圖』에서는 회골국(廻骨國) 즉 위구르의 나라를 Hor로 적고 있다. 북방의 이민족은 다 호르인 셈이다. 칭기즈칸의 조상도 호르라 불렸다. 칭기즈칸은 ‘호르 장겔제뽀’라고 불렸다. 漢族을 호르라 부르는 일은 없다. 『번한대조동양지도』에 의하면 吐蕃의 자칭은 Po다. 『梵語雜名』은 토번을 Bhuta라고 기록한다. 머리가 복잡해진다. 그러고 보니 우리도 ‘호로자식’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 말이 어쩌면 티베트에서 수입됐을지도 모른다. 물론 한자어 胡虜에서 들어왔을 가능성도 있다. 정확한 진실을 알기에는 옛일이 너무나 막연하다.



연호택 가톨릭관동대·영어학

박트리아, 대하(大夏), 월지(月支), 쿠샨왕조 (박트리아 - 영문위키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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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08-04-09 07:53:16.0)
 
[아무다르야: 다르야는 팔라비어로 바다 또는 강. 아무는 아물(Āmul)이라는 도시에서 유래하였고, 현재의 Türkmenabat(39.5N, 63.3E)이다. Türkmenabat은 시릴릭어로 turkmen이고, 투르크메니스탄 레밥주의 주도(州都)이며, 공식명칭은 Chardzhou이고, 또는 Chardjui이며 그 뜻은 네개의 강이다. 아무다르야는 vakhsh강과 panj강이 합류된 강으로, 현지인은 에덴동산 또는 천국의 네개의 강 중의 하나인 gihon에서 유래된 jayhoun이라고 부른다. 희랍어로 Oxus강이라고 하며, 유래는 Vakhsh(왁쉬)강이다. 옥수스강은 Matsya Purana(비슈누의 첫번째 화신의 신화)에서는 Chakshu강이고, Tushara (Rishika?)족, Lampaka족, Pahlava족, Parada족과 Shaka족의 나라를 통과한다(마하바라타 힌두 서사시에 나오는 부족명).
해석: 아무다르야는 한자로 알목하, 아목하이다. 투르크멘니스탄에서는 ‘투르크멘’이라고 하는데 토문(土門), 두만과 음이 유사하다. 위 내용으로 볼 때 에덴의 위치가 아무하가 될 수 있으며, 마하바라타 힌두서사시의 역사적 배경이 아무하가 될 수 있다. 또 박트리아는 페르시아어로 ‘박타르’이므로 ‘배달’과 통한다.
사천성은 四川이므로 아무 다르야강의 유래와 일치하는 네 개의 강이다. 인류의 시원은 중앙아시아이기 때문에 사천성의 지명도 위에서 따왔을 것이다.]
 
박트리아, 대하(大夏), 월지(月支), 쿠샨왕조
 
Bact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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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trian" redirects here. For the camel, see Bactrian camel. For the language, see Bactrian language.
 

   Map of Bactria 박트리아 지도

Ancient cities of Bactria. 박트리아의 고대 도시
 
Bactria (Bactriana, Bākhtar in Persian, also Bhalika in Arabic and Indian languages, and Daxia in Chinese) was the ancient Greek name of the country between the range of the Hindu Kush and the Amu Darya (Oxus); its capital, Bactra or Balhika or Bokhdi (now Balkh), was located in what is northern Afghanistan.
Bactria was bounded on the east by the ancient region of Gandhara. The Bactrian language is an Iranian language of the Indo-Iranian sub-family of the Indo-European family.
The Bactrians are one  of the main ancestral lines of the modern-day Tajiks.[1]
박트리아: 페르시아어로박트리아나, 박타르, 아랍어와인도어로발리카, 한자로대하(大夏). 박트리아는 힌두쿠쉬와 아무다르야(옥수스) 사이 영역에 있는 나라로서 희랍어 이름이었다. 수도는 박트라 또는 발히카 또는 보크디(현재의 발크흐)이고, 아프가니스탄 북부에 있다.
박트리아는 동쪽으로 간다라의 고대 영역과 경계가 된다. 박트리아 언어는 인도 유럽어계의 인도 이란어 아래의 이란 언어이다.
박트리아족은 현재의 타직크족(타지크스탄)의 주요한 조상의 하나이다.
 
 
Geography
Bactria is basically what is now northern Afghanistan. It is a mountainous region with a moderate climate. Water is abundant and the land is very fertile. Bactria was the home of one  of the Iranian tribes. Modern authors have often used the name in a wider sense, as the designation of all the countries of Central Asia.
지리:
박트리아는 기본적으로 현재 아프가니스탄 북부에 있다. 그 곳은 따뜻한 날씨의 산지(山地)이다. 물은 풍부하고 땅은 비옥하다. 박트리아는 이란부족 중의 하나의 고향이었다. 현대의 작가들은 종종 이 이름을 넓은 의미로 ‘중앙아시아의 모든 국가’ 명칭으로 사용해왔다.
 
 
History
Bactria-Margiana Archaeological Complex (BMAC)
 
Godesses, Bactria, Afghanistan, 2000-1800 BCE
 
The Bactria-Margiana Archaeological Complex (BMAC, also known as the "Oxus civilization") is the modern archaeological designation for a Bronze Ageculture of Central Asia, dated to ca. 2200–1700 BC, located in present day Turkmenistan, northern Afghanistan, southern Uzbekistan and western Tajikistan, centered on the upper Amu Darya (Oxus), in area covering ancient Bactria. Its sites were discovered and named by the Soviet archaeologist Viktor Sarianidi (1976). Bactria was the Greek name for the area of Bactra (modern Balkh), in what is now northern Afghanistan, and Margiana was the Greek name for the Persian satrapy of Margu, the capital of which was Merv, in today’s Turkmenistan.
According to some writers, Bactria was the homeland of Aryan tribes who moved south-west into Iran and into North-Western India around 2500-2000 BCE Later it became the north province of the Persian Empire in Central Asia.(Cotterell, 59) It was in these regions, where the fertile soil of the mountainous country is surrounded by the Turanian desert, that the prophet Zarathushtra (Zoroaster) was said to have been born and gained his first adherents. Avestan, the language of the oldest portions of the Zoroastrian Avesta, was onc e called "old-iranic" which is related to Sanskrit. Today some scholars believe the Avestan-Language was the western dialect of the Sanskrit because both languages are the oldest Indo-Iranian language of Aryans we know. With the time the Avestan-Language became developed by own western style.
역사:
박트리아-마르기아나 유적군(BMAC)
BMAC는 옥수스 문화라고 하며, 중앙아시아의 현대의 고고학 명칭이고, BC2200-1700년이며, 투르크메니스탄, 북부 아프가니스칸, 남부 우즈베키스탄, 서부 타지키스탄에 있고, 중심은 고대 박트리아 영역의 아무다르야(옥수스)강의 상류에 있다. 이 곳은 소련 고고학자 빅토르 사리아니디(1976)가 발견하고 이름을 붙였다. 박트리아는 현재의 북부 아프가니스탄의 박트라(현 발크) 지역에 대한 희랍 이름이었고, ‘마르기아나’는 마르구의 페르시아 군주에 대한 희랍어 이름이며, 마르구의 수도는 현 투르크메니스탄의 메르브(MERV)이었다. [MERV: 한자로 목록(木鹿), 페르시아어로 Mary, 12세기 최대 도시. Mary주의 주도, 위치는 37.6N, 61.8E]
작가들에 따르면, 박트리아는 아리안족의 고향이었으며, 그들은 BC2500-2000년에 남서쪽으로는 이란에 들어갔고, 인도 북서부에 들어갔다. 그 후 중앙아시아의 페르시아 제국 (550–330 BC)의 북부 주가 되었다. 바로 이 지역은 산이 많은 나라의 비옥한 토지가 투란 사막으로 둘러쌓여 있으며, 조로아스터교의 예언자 Zarathushtra가 태어나고 첫번째 신봉자들을 얻었던 지역으로 알려졌다. 아베스탄 언어는 조로아스터교 성전의 고대 언어로, 산스크리트어와 관련있는 고(古) 이란어였다. 오늘날 몇몇 학자들은 아베스탄 언어는 산스크리트어의 서부 방언이었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두 언어가 아리안족의 가장 오래된 인도-이란어였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아베스탄 언어는 서양식으로 발전되었다.
 
 
Cyrus and Alexander
See main article: Bactria (satrapy)
It is not known whether Bactria formed part of the Median Empire, but it was subjugated by Cyrus the Great, and from then formed one  of the satrapies of the Persian empire. After Darius III of Persia had been defeated by Alexander the Great and killed in the ensuing chaos, his murderer Bessus, the satrap of Bactria, tried to organize a national resistance based on his satrapy.
Alexander conquered Sogdiana and Iran without much difficulty; it was onl y in to the south, beyond the Oxus, that he met strong resistance. After two years of bloody war Bactria became a province of the Macedonian empire, but Alexander never successfully subdued the people. After Alexander’s death the Macedonian empire was eventually divided up between generals in Alexander’s army. Bactria became a part of the Seleucid empire, named after its founder, Seleucus I.
씨루스와 알렉산더:
박트리아가 메디안 제국의 일부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씨루스 대왕(590 BC 또는 576 — 530 BC)에 의해 종속되었으며, 그 때부터 페르시아 제국의 군주의 하나가 되었다(사트라피는 산스크리트어로 크샤트리야(kshatriya)이고 군인계급 또는 왕).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가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패배하고 뒤이은 혼란에서 살해당한 후에, 시해자 베수스(BC329사망)는 박트리아의 군주인데, 그의 군주에 기초한 국민저항군을 조직하려 했다.
알렉산더는 별 어려움 없이 소그드(이란족, 粟特)와 이란을 정복했다; 강력한 저항에 부딪힌 곳은 옥수스강을 넘어 남쪽 뿐이었다. 알렉산더 사후 마케도니아 제국은 결국 알렉산더 장군들(의 국가)로 분리되었다. 박트리아는 창건자 셀로우코스를 따서 셀로우코스(BC312-64년) 왕조의 일부가 되었다.
 
[소그디아: 이란족의 고대문명으로 한자로 속특이고, 페르시아어로 수구다이다. 현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 부하라, 후잔드(khujand), 케쉬이다. 주 도시는 사마르칸. 위치는 박트리아의 북쪽, 콰레즘(화레즘)의 동쪽, 강거(康居)국의 남동쪽에 있으며, 자라프샨 계곡을 따라 아무다르야와 시르다르야 강 사이에 있다.
강거(康居)국: 대완(大宛, Ferghana)의 북서쪽의 왕국으로 소그드 왕국의 시기이다. 한나라 장건이 BC128년 방문함. 이 부족은 월지족을 닮았고, 월지국은 남쪽에 흉노는 동쪽에 있다(월지국이 박트리아).
한나라 때 장건이 갔었던 지역으로, 이 지역은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지로, 희랍국가입니다. 따라서 한자 이름과 희랍 이름이 있습니다.]  
 
 
Seleucid Empire
The Macedonians (and especially Seleucus I and his son Antiochus I) established the Seleucid Empire, and founded a great many Greek towns in eastern Iran, and the Greek language became dominant for some time there.
The paradox that Greek presence was more prominent in Bactria than in areas far more adjacent to Greece could possibly be explained by the supposed policy of Persian kings to deport unreliable Greeks to this the most remote province of their huge empire.[citation needed]
셀레우코스 왕조: (영어 사전)
마케도니아인들(특히 셀레우코습세와 그의 아들 안티오쿠스1세)는 셀루우코스 왕조를 열었고, 동부 이란에 거대한 희랍 도시를 건설했으며, 희랍어가 이곳에서 오랫동안 지배적이었다.
{번역 생략}
 
Greco-Bactrian Kingdom
 
Gold stater of the Greco-Bactrian king Eucratides, the largest gold coin of Antiquity.
 
Map of the Greco-Bactrian at its maximum extent, circa 180 BCE
[Sogdiana는 속특, Ferghana는 대완, Bactria는 대하, Parthia는 안식국]
 
The many difficulties against which the Seleucid kings had to fight and the attacks of Ptolemy II of Egypt, gave Diodotus, satrap of Bactria, the opportunity to declare independence (about 255 BCE) and conquer Sogdiana. He was the founder of the Greco-Bactrian kingdom. Diodotus and his successors were able to maintain themselves against the attacks of the Seleucids - particularly from Antiochus III the Great, who was ultimately defeated by the Romans (190 BCE).
The Greco-Bactrians were so powerful that they were able to expand their territory as far as India:
"As for Bactria, a part of it lies alongside Aria towards the north, though most of it lies above Aria and to the east of it. And much of it produces everything except oil. The Greeks who caused Bactria to revolt grew so powerful on account of the fertility of the country that they became masters, not onl y of Bactria and beyond, but also of India, as Apollodorus of Artemita says: and more tribes were subdued by them than by Alexander...." [2]
그레코-박트리아 왕국: [BC250-125] [그레코는 ‘그리스의’ 의 뜻]
셀로우코스 왕들이 부딪힌 어려움과 이집트의 프톨레미2 세의 침략으로 인하여, 박트리아의 군주 디오도투스는 기원전 255년 독립을 선언하고 소그드 왕국을 정복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디오도투스와 그의 후계자들은 셀로우코스의 침략(특히 안티무스 3세 대왕)으로부터 대항할 수 있었다.(안티무스3세는 로마제국에 의해 결국 패배당함)
그레코-박트리아는 강력해서 인도까지 영역을 확장할 수 있었다:
“박트리아는, 그 일부는 아리아의 북쪽에 놓여 있고, 대부분 아리아 위쪽과 동쪽이다. 석유를 제외한 모든 것이 생산된다.  박트리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희랍인들은 토지가 비옥해서 강력해졌으며 박트리아와 그 주변 그리고 인도에서 주인이 되었으며, 아르테미타의 아폴로도루스(희랍작가)가 말하는 바와 같이: 많은 부족들은 알렉산더에 의해서가 아니라 희랍인들에게 정복되었다.”
 
 
Indo-Greek Kingdom: 인도-희랍(그리스) 왕국
Main article: Indo-Greek Kingdom
 
The founder of the Indo-Greek KingdomDemetrius I (205-171 BCE), wearing the scalp of an elephant, symbol of his conquest of India.
인도-희랍 왕국의 개창자 데메트리우스(BC205-171)는 꼬끼리 머리 가죽을 쓰고 있는데, 인도 정복의 상징이다.
 
The Bactrian king Euthydemus and his son Demetrius crossed the Hindu Kush and began the conquest of Northern Afghanistan and the Indus valley. For a short time they wielded great power; a great Greek empire seemed to have arisen far in the East. But this empire was torn by internal dissensions and continual usurpations. When Demetrius advanced far into India one  of his generals, Eucratides, made himself king of Bactria, and soon in every province there arose new usurpers, who proclaimed themselves kings and fought one  against the other.
Most of them we know onl y by their coins, a great many of which are found in Afghanistan, Pakistan and India. By these wars the dominant position of the Greeks was undermined even more quickly than would otherwise have been the case. After Demetrius and Eucratides, the kings abandoned the Attic standard of coinage and introduced a native standard, no doubt to gain support from outside the Greek minority. In India, this went even further. Indo-Greek King Menander I (known as Milinda in India), recognized as a great conqueror, converted to Buddhism. His successors managed to cling to power somewhat longer, but around 10 CE all of the Greek kings were gone.
인도-희랍 왕국:
박트리아 왕 유티데무스와 아들 데메트리우스는 힌두쿠쉬를 넘어서 북부 아프가니스탄과 인두스 계곡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짧은 시간에 그들은 권력을 휘둘렀다; 대 희랍제국은 극동에서 일어서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 제국은 내부 불화와 계속된 왕위찬탈로 분열되었다. 드메트리우스가 인도로 진격할 때, 그의 장군 유크라티데스은 스스로 박트리아의 왕이라 했으며, 곧 모든 지역에서 찬탈자가 나타났으며, 자신을 왕이라 하고 서로 싸웠다.
그들 대부분을 오직 그들의 주화로만 알 수 있는데, 주화의 대부분은 아프카니스탄, 파키스탄, 인도에서 발견된다. 이러한 전쟁에 의해서 희랍인들의 우세적인 위치는 다른 경우보다 훨씬 빨리 깎아 내려갔다. 데메트리우스와 유크라티데스왕은 아테네의 표준 주화를 포기하고 토착 표준을 도입했는데, 희랍 소수민족 밖에서 지원을 얻기 위해서였다. 인도에서 이것은 훨씬 더 진척되었는데, 인도-희랍왕 메난데르(밀린다왕)은 대 정복자로서 불교에 귀의했다. 그의 계승자는 좀 오랫동안 그럭저럭 권력을 유지했지만, 기원10년쯤에 모든 희랍의 왕들은 사라졌다.
 
[대승경전 밀린다王問經에 밀린다왕과 비구 나가세나와의 문답이 있다. 이 경전은 한글로 번역되 한국 사찰에 많이 보급되었다. 희랍인들이 불교에 귀의하게 된 것은 전불시대(역사이전의 부처의 시대)에 불교를 믿었었기 때문이고, 소크라테스의 철학으로 인해 고등 불교를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왕문경에 보면 밀린다왕의 질문은 상당히 수준이 높다. 서양인 답게 질문이 직설적이다. 또 희랍어, 페르시아어, 산스크리트어는 같은 언어에서 유래된 것이기 때문에 불교를 이해하는데 빠른 것이다.
인도-희랍왕국은 기원10년 인도-스키타이인의 침공으로 멸망했다. 이 시기에 파키스탄의 동부에 ‘Taxila’라고 하는 도시들이 있었는데 이 도시들에 여러 왕가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이 왕국은 대승불교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 특히 불상을 조각함. 초기불교에서는 불제자는 부처를 존중하는 의미로 보리수 아래에 앉아 있는 부처의 모습에서 보리수와 그의 제자들만 그리고 부처의 모습은 ‘좌대’만을 표시했다. 그러나 희랍인들은 부처를 신으로 여겼기 때문에 신상처럼 불상을 조각한 것이다.]
 
 
Sakas and Yuezhis
 
The treasure of the royal burial Tillia tepe is attributed to 1st century BC Sakas in Bactria.
왕실 부장품 틸리야 테페는 BC1세기 박트리아의 사카족의 것이다.
 
There is no evidence that the Sakas were related to the Buddha’s original clan, Shakya.
The weakness of the Greco-Bactrian empire was shown by its sudden and complete overthrow, first by the Sakas, and then by the Yuezhi (who later became known as Kushans), who had conquered Daxia (= Bactria) by the time of the visit of the Chinese envoy Zhang Qian, who was sent by the Han emperor to investigate lands to the west of China circa 126 BC.[3]
But then its emergence, isolated thousands of miles from Greece, could onl y be described as a paradox. However, its cultural influences were not completely undone; an artistic style mixing western and eastern elements known as the Gandhara culture survived the empire for hundreds of years.
사카(塞,새)족과 월지(月支)족:
사카족이 부처의 씨족 샤키야족과 관련이 있다는 증거는 없다.
그레코-박트리아 제국의 몰락은 갑자기 완벽히 전복되었는데, 먼저 사카족에 의해서, 그 다음은 월지족에 의해서였다. 월지족은 나중에는 쿠샨(貴霜 ,귀상)족이라고 한다. 쿠샨족은 대하(박트리아)를 정복했는데 그 당시는 한무제의 장건이 방문할 때이고 기원전 126년에 서역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것이다.
그러나 쿠샨왕조의 출현은 희랍에서 수천마일 떨어진곳에서는 역설로 서술될 뿐이었다. 그러나 그 문화적 영향은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다; 간다라 문화라고 하는 동서양의 예술적 혼합은 수백년동안 제국에서 살아남았다.
 
 
Contacts with China
 
Zhang Qian taking leave from emperor Han Wudi, for his expedition to Central Asia from 138 to 126 BCE, Mogao Caves mural, 618-712 CE.
장건의 한무제와의 이별, 기원전138-126년 중앙아시아 탐방, 서기 618-712년의 막고굴 벽화.
 
The name Daxia appears in Chinese from the 3rd century BCE to designate a mythical kingdom to the West, possibly a consequence of the first contacts with the expansion of the Greco-Bactrian Kingdom, and then is used by the explorer Zhang Qian in 126 BCE to designate Bactria.
The reports of Zhang Qian were put in writing in the Shiji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by Sima Qian in the 1st century BCE. They describe an important urban civilization of about one  million people, living in walled cities under small city kings or magistrates. Daxia was an affluent country with rich markets, trading in an incredible variety of objects, coming as far as Southern China. By the time Zhang Qian visited Daxia, there was no longer a major king, and the Bactrian were suzerains to the nomadic Yuezhi, who were settled to the north of their territory beyond the Oxus (Amu Darya). Overall Zhang Qian depicted a rather sophisticated but demoralized people who were afraid of war.
Following these reports, the Chinese emperor Wu Di was informed of the level of sophistication of the urban civilizations of Ferghana, Bactria and Parthia, and became interested in developing commercial relationship them:
"The Son of Heaven on hearing all this reasoned thus: Ferghana (Dayuan) and the possessions of Bactria (Daxia) and Parthia (Anxi) are large countries, full of rare things, with a population living in fixed abodes and given to occupations somewhat identical with those of the Chinese people, but with weak armies, and placing great value on the rich produce of China" (Hanshu, Former Han History).
These contacts immediately led to the dispatch of multiple embassies from the Chinese, which helped to develop the Silk Road.
중국과의 교류:
대하는 기원전3세기 중국에서 서역의 신비왕국을 가리키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아마도 그레코-박트리아 왕국의 확장과 더불어 첫번째 접촉의 결과일 것이고, 기원전 126년 장건에 의해 박트리아를 가리키는 것으로 쓰여졌다.
장건의 보고서는 기원전 1세기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되어있다. 약 백만의 사람들이 작은 왕 또는 지사의 통치아래 성안에서 살고 있는 문명도시를 서술하고 있다. 대하는 시장이 활기찬 부유한 나라이고, 다양한 물품을 거래하고, 멀리는 남부 중국까지 거래한다. 장건이 대하를 방문할 때는, 주요한 왕이 없었으며, 박트리아 왕국은 월지족 유목민을 지배하고 있었고, 월지족은 옥수스강(아무다르여) 넘어 왕국의 북쪽에 거주하고 있었다. 전반적으로 장건은 전쟁을 두려워하고 교활하고 풍속이 문란한 사람들이라고 서술했다.
다음 보고서에서, 한무제는 페르가나(대완), 박트리아(대하), 파르티아(안식국)의 복잡한 도시문명을 듣고서 그들과 상업교류에 관심을 가졌다:
 “천자는 이 모든 것을 듣고서 이와 같이 생각했다: 페르가나(대완)와 박트리아(대하)와 파르티아(안식)은 큰 나라이고, 희귀한 것이 많고, 고정된 장소에 거주하고, 중국인과 어느정도 같은 직업을 가지고 있지만, 군대는 약하고, 중국의 풍부한 물산에 관심을 갖는다.(한서, 전한)
이러한 교류는 즉각 중국에서 여러 사신을 파견하게 되었고, 실크로드를 발전시키게 하였다.
[위는 깊이 있는 내용이 없어 보입니다]
 
 
Tokharistan
 
Kushan worshipper with Zeus/Serapis/Ohrmazd, Bactria, 3rd century CE.[4]
 
Kushan worshipper with Pharro, Bactria, 3rd century CE.[5]
 
토하리스탄: 토하리 왕국
Following the settlement of the Yuezhi (described in the West as "Tocharians"), the general area of Bactria came to be called Tokharistan. From the 1st century CE to the 3rd century CE, Tokharistan was under the rule of the Kushans. They were followed by Sassanides (Indo-Sassanids). Later, in the 5th century, it was controlled by the Xionites and the Hephthalites. In the 7th century, after a brief rule under the TurkishKhaganats, it was conquered by the Arabs.
This article incorporates text from the Encyclopædia Britannica Eleventh Edition, a publication now in the public domain.
월지족이 정착함에 따라(서 양에서는 ‘토차리언’이라고 함) 박트리아의 일반적인 지역은 토하리스탄으로 불려졌다. 기원 1세기부터 3세기까지, 토하리스탄은 쿠샨왕조의 통치아래 있었다. 그 다음은 사사니드왕조의 통치를 받았다. 그 후 5세기에 씨오니테와 헤프탈리테의해 지배되었다. 7세기 돌궐 가한(왕)의 짧은 통치 후에는 아랍에게 정복되었다.
[토하리스탄의 영역은 쿠샨 박트리아와 같으며, 남부 타지키스탄, 북부 아프가니스탄과 Surxondaryo(아무강 지류)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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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3. 신화는 동서양이 공유 중산 2008-04-09 18:50:24.0



박 트리아는 페르시아어로 박타르이므로 박달, 배달이 됩니다. 즉 배달의 역사를 이란인 희랍인과 공유한다는 것입니다. 상고시대의 고조선, 삼한의 역사는 페르시아,인도,그리스와 공유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즉 고조선의 역사중에서 그리스 로마신화, 힌두신화, 페르시아 신화 등의 내용은 고조선의 역사를 가리킬 수 있다고 봅니다.
특히 신라의 이름 지명을 보면 범어, 페르시아어, 희랍어와 닮은 것이 많습니다.
신화중에서 내용이 같다면 연원이 같은 것에서 출발하여 각색되어 변형된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몽골-돌궐의 텡그리 신앙은 단군신앙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미주 인디언까지 해당됩니다.
댓글 2. 전불시대 중산 2008-04-09 18:32:19.0



  위키영문사이트 참고서적을 보면 주로 서양인 학자입니다. 부처는 1만년, 5천년, 3천년 이내에몇 천만년동안 출현해왔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문명주기설에 따른 것으로, 사상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야, 부처가 출현하여 설법을 하는 것입니다. 원시시대에는 출현해도 알아듣는 사람이 없기 때문임. 부처의 출현이후 문명은 더욱 고도화 되고, 일반적으로 최후에는 물질과학 수준이 높아지고, 정신적인 수준은 떨어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최후에는 전쟁, 사막화, 질병, 지각변동, 혜성충돌 등으로 인류의 문명은 하루아침에 또는 시간을 두고 사라지게 됩니다. 소겁, 중겁, 대겁이라 하는데, 긴 기간에 일어난 재앙 또는 넓은 지역의 재앙을 대겁이라 한다면, 짧은 기간 좁은 범위의 재앙은 소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주기는 종류가 엄청 많습니다.
  적어도 1만년에 한번씩 문명은 고도화되고 지구는 엄청난 재앙으로 인하여 살아남은 소수에 의해 원시시대로 돌아가게 됩니다.

  불경은 시간개념이 희박하여 몇천년전의 일도 몇 겁전이라고 쓰는데, 1겁은 어떤때는 1억년입니다.
 원시7불은 시간적으로 무슨 의미인지 알 수 가 없습니다. 두가지로 볼 수 있는데, 예를 들면 백만년 동안이면 백만명의 부처가 출현한 것으로 보면, 이 기간의 대표적인 부처를 원시7불의 하나로 적는 방식입니다. 그러면 원시7불 중 한분 한분마다 백만년마다 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총 7백만년이 됩니다.
  적어도 원시 7불은 석가모니 직전의 부처이름이 아니고, 몇 십만년전, 몇 백만년 전의 부처 이름입니다.

역사 이전은 사료가 별로 없으므로 무슨 시대구분을 못하지만, 수련계에서는 지구의 역사를 모모 부처의 시대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시기는 '석가모니불 시대'에 해당되고 거의 끝나가는 시점입니다.

댓글 1. 전불은 가섭불 최남석 2008-04-09 12:38:45.0



 전불은 가섭불입니다  대승공교 이지요 새거란 (스기타이) 으로서 알타이에서 발상한 새부루(서가불)은 주술밀교 입니ㄷ
페르시아 가 이란 북부에 있다가 지금의 페르시아로 갔는데 달마대사 가 이곳 원 페르시아 출생이고  달마는 가섭의 공교를 계승하여 지나에 전했으며 니힐리즘이 이곳에서 발상한 사상으로 쏘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야스퍼스  니체로 이어지다 정치적 허무주의로 악화 되어 나찌의 파시즘이 나왔습니다  (최남석 연구 미완성 결론)

기고 하신 글은 저자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저 하고 맥락이 닿아 있네요





<감숙성 돈황의 오아시스 월아천의 모습>



마한의 소국가운데 목지국(目支國 ) 이라는 나라가 있습니다.

이 나라는 월지국(月支國) 혹은 월씨국(月氏國) 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옛 마한땅에서 나와 백제의 제후국으로 편입되었던 월지국은

현재 강단사학에서 충청남도 직산(稷山) 일대라고 비정하고 있습니다.

백제 또한 마한땅에서 나왔으며, 강단사학은 백제땅을 현 전라도와 충청도로

비정하고 있으므로 이것은 큰 오류는 없는듯 보입니다만



월지국이 충청남도 직산이 되어야 하는 어떠한 근거나 이유도

설명하여 주고 있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단지 지역을 비정함에 있어 여러 의견이 분분하다라는 정도로 해석하고 있지요



월지국은 불교와 밀접한 관련을 많이 보여주고 있는데,

신라와 가야등의 나라를 포함하여 수많은 소국들에게 불교를 전파하고 있으며,

신라유물인 청동여래입상 (靑銅如來立像,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06호)이

월지국에서 전래되었으며, 원효가 극진히 모셨다는 관세음보살상 또한

월지국에서 표류하여 온 것으로 사서들은 기록하고 있는것으로 보아

월지국은 불교문화의 진수를 가진 국가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불교에 관한 기록중 천독(天毒) 또는 천축(天竺)이라 함은 수미세계(천국)을 의미하는데

산해경에서 조선을 천독이라 칭하면서,

인도를 남천축(南天竺)이라 하고, 월지국(月支國)을 북천축(北天竺)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신라의 시조 김수로왕은 인도여자인 허태후랑 결혼하였는데,

월지국에 갔다올 때, 인도에서만 나는 파사석을 싣고 오자 아무 사고없이

건너오게 되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원효대사가 이 돌을 가지고 석탑을 지었는데,

이것이 경상남도의 보리암전 삼층석탑이라고 강단사학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 은

신라와 가야에 불교를 전파하는데 종종 등장하는 이 월지국과 동명의 나라가

한반도 월지국과 같은 시기에 감숙성 쪽에 엄연히 존재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월지국 또한 한반도의 월지국과 마찬가지로 월지국 대월씨국 목지국 등으로

불리웠으며, 대륙에 대한 불교 전파에 막대한 영향을 하고 있음을

여러 사서들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월지국(月支國, 달지국:목지국)은 서역 말로 또는 월씨국(月氏國))이라고도 하며,
서역(西域, 마한)의 큰 왕국이다.

이 종족은 원래 중국의 감숙성 돈황과 기련(祁連) 사이에 살다가
BC 174년에 흉노에게 쫓겨 이리천(伊犁川)과 실타리야천(悉陀犁耶川)의 상류인
열하(熱河)의 남방으로 옮겼으나 BC 158년경에 다시 오손(烏孫)의 침략을 받아
지금의 사마르칸트 지방에 근거를 정하고 새종(塞種)을 정벌(征伐)하고 위수(위水) 연안의 대하국(大夏國)을 정복하여 대왕국을 건설하였다.

제3세 가니색가왕(迦 色迦王) 때에 세력이 크게 떨쳐 서쪽으로는 페르샤(이란)의 동부에서부터 중앙아세아 인도에 걸친 건타라(乾陀羅) 왕국이 되자 불교의 외호자(外護者) 가 되고 500명의 아라한(阿羅漢)을 모으고 대비파사(大毘婆沙)를 편찬함. 그 후 불교가 대성(大成)하여 지루가참(支婁迦懺)등 많은 스님들이 중국에 불경을 전하고 지양(支亮), 지겸(支謙), 법호(法護), 지법도(支法度), 지도근(支道根),지시륜(支施崙) 또는 지성(支姓)의 저자(著者) 모두 월지국(月支國) 사람들이다. 이 나라가 멸망한 것은 미상이나 5C경으로 보고 있다

- 불교사전



진시황이 죽고 항우와 유방이 패권을 다투고 있을 때, 지나대륙 북쪽 흉노에서는

월지국에 볼모로 잡혀있던 모돈이 탈출하여 아버지 두만선우를 죽이고 스스로

선우(천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지나대륙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동호를 공략하고 월지국을 침략하여

흉노의 세력을 엄청나게 키웠으며, 진시황때 빼앗겼던 오르도스 지방(중주지방)

을 모두 되찾았습니다.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였을 때, 모돈선우는 군사를 일으켜 한나라를 치게 되고,

유방은 신하를 자청하면서 흉노의 준속국이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흉노에게 엄청난 핍박과 차별을 받게 되지요.



이에 흉노에 대한 복수에 이를 갈고 있던 한나라는 한무제때 드디어

흉노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던 월지국과 동맹하여 흉노를 치게 되며,

여기서 곽거병과 위청은 한나라의 숙원이었던 흉노정벌이라는 유구한 공을 세우게 됩니다.

(여기서 포로로 잡힌 흉노 휴도왕의 아들이 김씨의 시조되시는 김일제입니다)



위 내용은 지나사서에 기록된 월지국에 대한 내용이며, 이 월지는 감숙성 지방에

존재하면서 한나라와 긴밀히 협력, 흉노를 공략함을 알 수 있습니다.



간단하게 이야기해서 월지국은 충청도에 존재했던 소국이 아닙니다.

월지국은 위의 역사에서 나온바와 같이 감숙성과 서역(돈황)에 존재했던 국가이며,

불교가 전파되는 교역로의 역할을 한 국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산해경에서 월지를 북축천 인도를 남축천으로 이야기하는데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충청도는 북축천이 될 수 없습니다.



월지가 감숙성 돈황, 즉 현재의 위구르 지방에 존재하여야만

인도가 남천축 월지가 북천축이 될 수 있으며,

불교가 전파되는 교역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불교는 전한(前漢) 애제(哀帝) 원수(元壽) 원년에 월지국을 통하여

지나에 전파되었다고 역사서는 설명하고 있으며,

한무제 때 월지국으로간 장건 또한 지나의 불교전파에 영향을 크게 주었다고

주류사학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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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황은 토하르 왕국의 음차

돈황은 토하르 왕국의 음차

 

Dunhong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It has been suggested that this article or section be merged with Yuezhi#Origins. (Discu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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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unhong (Chinese: 敦薨; pinyin: Dūnhōng) mountain according to the Shanhaijing is a mountain of the Tian Shan range.

Lin Meicun identifies it with the Dunhuang (Chinese: 燉煌; pinyin: Dùnhuán) of the Shiji by Sima Qian which states that:

"The Yuezhi originally lived in the area between the Qilian Shan or Tian Shan and Dunhuang, but after they were defeated by the Xiongnu they moved far away to the west, beyond Dayuan, where they attacked and conquered the people of Daxia",[1]

The present Dunhuang (Chinese: 敦煌, 燉煌; pinyin: Dūnhuán, Dùnhuán), a Gansu oasis town, was founded around 111 BC, that is, later than the report of Zhang Qian on the Yuezhi (126 BC), which Lin Meicun takes to prove that the Dunhuan of the Shiji cannot refer to city currently bearing that name, but rather to an oasis near Turfan. He further argues that Dunhuan is the Chinese spelling of Tuharan (Tocharian), and also constructs a Tocharian etymology for Qilian, which according to a Tang Dynasty commentator of the Shiji is a Xiongnu word for "sky".


돈황:

돈훙(敦薨)산은 산해경에 의하면 천산의 지맥(支脈)이다.

린메이춘은 돈훙과 사마천의 사기에서 말하는 돈황(燉煌)은 같다고 여긴다.

사기 : 월지족은 원래 기련산 또는 천산과 돈황사이의 지역에 살았으나, 흉노에게 패배한 후에 서쪽으로 대완(大宛) 넘어 멀리 이주하였으며, 그곳에서 대하(大夏) 공격하여 정복했다.

현재의 돈황(敦煌, 燉煌)은 감숙성 오아시스 도시로 기원전 111년경에 설치되었으며, 즉 기원전126년의 월지족에 대한 장건의 보고서보다 더 늦은 것이며, 린메이춘은 증명하기를 사기의 돈황은 현재 그 이름을 갖는 도시를 가리킬 수 없으며, 오히려 투르판 근처의 오아시스를 가리킨다. 그는 더 나아가 주장하기를 돈황은 투하란(투하라 왕국/토하르족 언어)을 음차한 것이고, 또한 돈황은 기련()에 대한 토하르족 어원을 구성하는데, 기련은 사기(史記)의 당나라 주해에 따르면 흉노 언어로 하늘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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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문장을 분석해보면 천산이 기련산입니다. 기련은 흉노어로 하늘을 뜻하므로 천산(天山)이 됩니다. 돈황은 토하라 왕국을 음차한 것입니다. 토하라 왕국은 영문 위키에서 천산서북쪽에 있었던 왕국으로 월지족입니다.


위 문장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돈황은 기원전111년경에 설치되었고, 장건의 서역 탐사는 기원전 126년이라 했습니다. 장건의 서역 탐사는 보통 알려진 내용으로 서역은 파미르와 천산 서쪽입니다. 그렇다면 돈황은 월지족이 사는 곳에 있으므로 돈황의 위치는 천산 서북쪽이 되는 것입니다. 린메이춘은 과감한 주장하기가 머쩍어서 돈황을 잠시 투루판으로 비정하고 있으나, 내용을 살펴보면, 은근히 천산서북쪽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돈황은 토하라 왕국의 음차이므로 돈황은 명백히 토하라 왕국을 가리키는 것이며, 현재의 돈황이 될 수 없습니다. 영문위키에 근거하여도 페르가나 계곡 서쪽입니다.

 

천축국의 의미도 천산주변의 월지족 국가를 뜻합니다. 토하라 왕국을 살펴보면 힌두신화와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다른 위치로는 천축국은 서역에 있으므로 카스피해 부근이 될 수 있습니다. 즉 천산 역시 카스피해 부근이 되는 것입니다. 현재의 천산 지명은 고의로 날조한 지명은 아니고 민족의 이동에 따라 붙여진 자연스런 지명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상고시대의 천산의 위치는 어느 시점에서는 카스피해 부근이 되는 것입니다.

 

토하르족의 정착지로 이란, 투르크메니스탄, 아프가니스탄, 터어키 등입니다. 돈황은 토하르 왕국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돈황의 위치는 이란 터어키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현장은 도화라(覩貨羅)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위서>,<북사> 토호라(吐呼羅)국과 대월지국 동시에 보인다. <북사>,<수서> 토화라(吐火羅)국이 보인다.
 <구당서>에 토하라국이나 대월지가 보이지않지만 계빈국에서 대월지가 언급되고 파사에서 토하가가 언급된다.
 <신당서> 토화라(吐火羅) 또는 토활라(吐豁羅),도화라(覩貨羅)라 부른다. 

Kurukshetra War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이 있는데, 고대 거록 전쟁은 힌두신화의 Kurukshetra평원의 전쟁과 닮았습니다. 검토해보시기 바람니다. 시간이 있으며 이 내용을 올려보겠습니다. 쿠룩쉐트라 평원이라고 하는데, 줄여서 쿠루 평원의 전투라고 합니다. 마하바라타에 나오는 고대 전쟁으로 엄청난 큰 대전(大戰)입니다. 거록과 탁록은 같은 것일 수 있습니다.

거록 전쟁 관련 글을 올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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