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병제개혁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1905 4 16일 대한제국 최고 군사 기관인 원수부를 해체하고 진위대(지방군)의 병력을 크게 감축시켰는데 본래의 18개 대대에서 수원·청주·대구·광주·원주·황주·평양·북청의 8개 대대로 축소하였습니다. 편제는 과거 1개 대대가 5개 중대였던 것을 4개 중대로 개편시켰으며, 1개 중대 병력을 장교 이하 256명으로 줄여서 8개 대대를 모두 합쳐도 2,365명에 불과했습니다.

  일본은 대한제국의 군대 축소에 아예 정미 7조약의 비밀조치서 따라 대한제국 군대해산을 하려고 했습니다. 일본 통감부는 대한제국군 시위대 병력 전부를 1907 8 1일자로 비무장 상태로 훈련원에 모이라고 공지했습니다.  참고로 통감부는 1910면 한일합방 이전에 대한제국을 통치하기 위해 설치한 기관으로 초대 조선통감부 통감은 이토히로부미(이등박문)였습니다. 대한 의병장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을 맞고 숨을 거두웠더래요.

 

  남대문 전투는 대한제국 군대가 1907 8 1일 군대해산에 항거하여 일본군과 교전을 벌인 전투로 남대문에서 서소문(소의문)에 아우러는 일대에서 오전 9 시부터 시작되어 1230분 즘까지 4시간 이상 장렬하게 벌어진 전투입니다.

 

간략 전투 배치도

남대문 전투의 도호선이 된 시위대 1연대 1대대장 박승환 참령(현재 소령), 권총 자결입니다그는 유서에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니 만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라고 하였습니다.  

박승환의 자결 소식을 접한 제2연대 1대대 중대장 오의선 정위 등도 자결하였고 1연대 소대장 참위 남상덕이 "대대장과 함께 죽자!"라고 외치며 군사들을 지휘하여 일본 교관진에게 총격을 가했습니다. 이에 격분한 장병들이 대대 일부 장교들의 지위에 따라 무기고를 부수고 총을 꺼내 일본군과 교전을 시작하였다.

1연대 1대대가 봉기하뎐 시점에 바료 옆 병영에 있던 2연대 1대대는 무기를 반납하고 해산식장으로 향하려던 참이었다. 마침 그때 제 2연대 1대대는 대대장 이기표 참령이 군을 통제하는 회의에서 해임되어 격양되어 있었다.

대대장을 따라 훈련원으로 갈 준비를 하던 중 이 치열한 총성을 들은 시위 2연대 참령 오의선이 군도를 뽑아들며 "앉아서 무장해제를 당할 수는 없다.  1연대가 궐기했으니 우리도 싸우자!"고 외쳤고, 대대원들 역시 이에 적극 호응하여 "1연대가 궐기했다!"고 외치며 영내로 난입, 마침 무기고를 점검하며 탄약을 반출하던 일본군을 발견, 육탄으로 그들과 난투극을 벌이며 마침내 총과 탄약을 회수하고 바로 거리로 뛰쳐나가게 되었습니다.

이들 시위 1, 2연대의 각 1대대 병력은 거리에서 합류, 2연대 참령 오의선, 정위 권중협, 소대장들인 참위 남상덕, 장세정, 노덕세, 이준영, 이한승, 그리고 무관학교 3학년 생도로서 소대장 견습차 파견되어 있던 견습 참위 이충순 등 3, 특무정교 다수의 지휘 하에 전투를 개시했습니다.

이에 미리 대비하고 있었던 일본군은 오전 10 20분 대한제국군 시위대 2연대 1대대 주둔지를 향해 51연대 3대대 병력과 남대문 위병 등, 그리고 호치키스 기관총 3을 투입 공격을 개시하였습니다한편 51연대 1대대와 2대대는 서소문 위병들과 더불어 거의 비슷한 시간대에 대한제국군 시위대 1연대 1대대 주둔지에 대한 공세를 시작했습니다.   

M1914 호치키스 기관총을 프랑스에서 운용 중인 미군의 모습 <출처: Public Domain>

참고로 호치키스 기관총(Hotchkiss machine gun)은 가스압력 작동방식을 구현한 첫 총기다. 현재까지 등장한 모든 가스작동식 소화기의 공통 조상에 해당하는 획기적인 무기체계다.  8mm탄을 사용한 호치키스 기관총은 분당 500~600발을 사격할 수 있다.


  그러나 1차 공격은 아직 실탄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던 시위 1, 2연대 각 대대의 치열한 반격에 공격이 중단되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일본군은 추가로 시위 2연대 병영 가까이에 있던 남대문 위에서 기관총 2정을 추가 거치, 영내에 집중 총격을 퍼붓는 것과 동시에 51연대 3대대 중대장이 손수 다이너마이트를 들고 병영으로 돌입, 육탄 폭파를 가하는 맹공을 펼쳤습니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 51연대 3대대 중대장 대위 가지와라[梶原] 1명이 대한군의 총화에 휩쓸려 전사하였고, 육탄돌격에 가담한 특무상사 등 하사관 3명이 중상을 입는 등 피해가 속출했습니다.
 
그러나 대한제국군은 2차례 이상 남대문 방향으로 진출하여 통감부를 습격하려 했으나 일본군의 기관총 사격에 전진을 매번 포기해야 했고, 일본군의 지속적인 공격에 뒤이어 증원된 2개 연대의 일본군에 맞서면서 보유한 그 적은 탄약마저 거의 소진하게 되었습니다. 이러는 동안에도 훈련원에서 해산된 병사들 상당수는 울분을 터뜨리며 봉기를 일으킨 시위 1, 2연대에 연거푸 합류해 왔습니다.

그리고 정오를 조금 넘겨 12 30분이 되었을 때, 마침내 시위 1, 2연대 1대대는 병영을 포기하고 서울 시내로 흩어져 시가전을 개시하게 되지만 탄약부족으로 제대로 저항을 하지 못 하고 전투는 끝났습니다.

 

8 1일 전투 당시 간부로서 확인된 전사자 명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참령             오의선 ( 2연대 1대대 중대장)

정위 권중협 (1연대 1대대 중대장), 참위 장세정, 노덕세, 이준영, 이규병, 이한승, 남상덕

특무    정교    김순석, 고희정

견습 소대장    이충순, 백보용

령관장교 1, 위관장교 7, 특무정교(원사) 2, 견습소대장 2. 12.

참위 이준영은 장교가 된지 하루만에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대한제국군 남대문 전투 내용을 표로 간략하게 아래와 같이 정리해보았습니다.

 

대한제국군

일본 조선주차군 13사단

교전국

시위대 1연대 1대대

시위대 2연대 1대대

 

51연대

7,9,10,12 중대

지휘관

참위 남성덕

조선주차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 長谷川好道

대위 가지와라[梶原]

병력

소총 베르단

후장식 단발 소총

탄약 소지 10 ~ 15

소총 5연발 38식 아리사카

호치키스 기관총

피해

전사 68(장교 13)

부상 100 여명

포로 516

전사 4

부상 30 ~ 40

총탄

-

총탄 보병 7215, 공병 350, 기병 및 포병 8, 기관총탄 1138, 황색화약 1.6kg 총탄 보병 7215, 공병 350, 기병 및 포병 8, 기관총탄 1138, 황색화약 1.6kg

노획물

-

소총 74, 실탄 3,305

 

대한제국군 시위대 봉기를 진압하고 병영을 점령한 일본군

* 출처

1. 경향신문 남대문 전투관련 기사, 1907 8 9

2. 한양이야기, 조선왕조 500년 도읍 한양 읽기 , 남대문 전투 단락

3. 한국 근대사 산책 4, 러일전쟁에서 한국군 해산까지, 남대문 전투 단락

4. 조선군사령부 1910 ~ 1945, 古野直野, 1997, 대왕사

5. 대한제국의 군사제도, 서인한, 서울 ; 혜안, 2000

6. 대한제국 군대해산과 박승환-궁금-, 호국보훈이야기, 독립이야기, 국가보훈처

 

 

1901년부터 늘어난 대한제국의 국방비 비율에 대한 고찰

2017. 9. 1. 14:54      작성자 : 오로라    http://blog.naver.com/kkumi17cs1013/221087135645

 

대한 제국군 군복


 

 대한제국은 1900년 3월 20일 원수부관제 를 개정하였고, 이는 군무軍務중심의 국정운영을

의미하는 조치였고 이로써 원수부 4개국 局長의 호칭은 總長으로 승격되었고, 그 권
한도 확대되었다.  고종은 관제개정 이후 즉각 관련 인사를 선별하였다.

 

구 분

군사관련 관직 및 약력

비 고

군무국총장

軍務局總長

이종건

李鍾健

 

1885, 포도대장 및 군전영 감독

1895, 총어사 및 연무공원리사무

1896, 군부장 임명 및 군부대

소소속으로

대한국국제 제정.

 

검사국총징

檢查局總長

조동윤

趙東潤

 

1897, 령 임용 및 3대대장

1898, 장 임명 및 군부협판

1899, 군부장 임명 및 원수부 군무국장

대 군무국장 역임.

 

회계국총장

會計局總長

민영환

閔泳煥

 

1884, 개성해방총관/ 1888,

1896, 군부장, 군부대, 러시아제대관식 특명전권공사 權公使

1897, 군부대, 영국여60주년의식 大使

해천추범海天秋帆,사구속초使歐續草

저서에서 서구의 군제 및

규모를 긍정적으로 평가

기록국총장

記錄局總長

이학균

李學均

 

1888, 군사관 다이 보

1895, 령 임용 및수원대 대대장

1899, , 원수부 사국장

1898,무관학교군사교범 보명조전步兵操典을 번역출간

                                     원수부 초대 총장과 군사관련 주요 약력

 

이전에 대한제국의 국방비에 대한 자료를 올렸었는데, 1896년에 16.28%, 1897년에는 23.38%, 1898년에는 27.66%, 1899년에는 22.37%, 1900년에는 26.56%였으나 돌연 1901년부터는 41.02%, 1902년에는 38.33%, 1903년에 39.46%, 1904년에는 37.63%라는 엄청난 비율로 국방비가 증가되는 것에 대해서 한 번 고찰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1년 만에 국방비가 20% 가까이 증가세를 보이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이전에도 대한제국은 국방비에 상당한 지출을 했지만 1901년부터 1904년만큼은 아니었죠.


이러한 배경에는 총 3가지의 사건이 한 몫을 했다고 보여집니다. 하나는 의화단 운동으로 인한 변경의 불안함과 러시아와 일본의 국방비 증강, 그리고 국내의 소요 사태 등이 그 원인으로 꼽혀집니다.


1900년 3~4월부터는 청 내부의 분쟁이 예상되어 막벌이군 수백 명이 배를 타고 인천으로 피난 온다는 소문과  산동지역 피난민 10,000여 명이 평안도로 건너온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하는 등 국경지역의 혼란은 심화되었고 있었던 상태였습니다.


대한제국 역시 청 의화단 운동으로 인해 각 국 공사관이 공격받았음을 알고 있었고 이후 8개국 연합군에 의해 청군 패잔병과 의화단 잔존 세력이 대한제국 변경 지대로 오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청에서 건너온 피난민들도 상당한 골칫거리였죠.


대한제국 정부가 확인한 피난민의 숫자는 14,000명이었고, 이외에 더 많은 피난민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뿐 확실한 숫자는 알 수 없었습니다. 연합군의 진압 이후 함경-평안도 일대까지 청군 패잔병과 비적 떼가 난동을 부리는 사태가 왔다는 의미입니다.


게다가 대한제국의 궁내부 고문관이었던 샌즈(W. F. Sands)는 의화단사건의 확장이 차후 대한제국에 대한 열국의 개입을 초래할 것이라며 경고하자, 자체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는 상황에 직면했고 따라서 대한제국 원수부는 황제의 명에 따라 변경 지대의 병력을 증강합니다. 


청에 주재하던 각 국 공사관 무관들도 대한제국의 역할을 확실하게 해달라며 경고를 보내죠. 만약 대한제국이 청군 패잔병과 의화단 잔여 세력을 제압하지 못한다면 8개국 연합군이 한반도로 진주할 수도 있다는 경고를 말입니다.


 

의화단(청비) 국경 유입 방지를 위한 대한제국 북경지역 군사운영과 배치도


따라서 일련의 군비 증강은 필수적이었으며 대한제국은 기존의 중앙군과 지방군으로는 이들을 모두 제압할 수 없다고 판단 하에 안북도 의주 및 강계, 함경남도 북청, 함경북도 종성에 진위대를 설치하는 안건을 황제에게 올리고, 황제는 의화단에 대비하는 것이라며 승인합니다.


총 5곳의 진위대가 증설되면서 50만 1,016원을 소모하게 되었고 이는 대한제국 국방비의 30.6%에 해당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습니다. 따라서 1900년 26.56%였던 국방비 비율이 1901년부터는 41.02%로 증가하게 된 원인의 하나라고 꼽혀집니다.


당시 대한제국이 얼마나 골머리를 썩혔는지, 진위대 증강으로도 모자라 중앙의 정예 친위대 600명을 추가로 파병할 지경이었으니까요. 북청의 진위대 병력이 전부 삼수-갑산 지대로 파견을 나간지라 비어버린 지역에 대해 중앙군이 공백을 메꿔준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외에도 해주, 안주, 황주에 주둔한 병력 중 각 100명씩 총 300명을 차출하여 변경에 증원했으며, 강화 주둔 제1연대 소속 병사 100명도 서울에서 급히 재편한 다음 경흥부로 이동시키기도 했습니다.


이로 인해 대한제국의 기존 방어 전략인 소수병력이 주요 거점을 장악하는 점형 방어에서 병력의 증강으로 인해 선형 방어로 전환하게 되죠. 특히 분쟁발생지역으로의 중앙군 파병, 타 지역 병력의 국경지원 등은 이 시기 군사운용의 성격이 대외적 위기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방증합니다.


주목할 점은 이 당시에 독립 부대로서 활동하던 공병과 치중병을 모두 보병부대로 배속시켰다는 점인데 전투지원부대의 배속은 단위 연대의 전투력 발휘를 용이하게 하는 것이었으며 제병협동을 중시했다는 것 역시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의화단 진압을 위해 러시아는 1900년 6월 중순, 만주의 경비대 인원을 6천명에서 11,000명으로 증원하였고, 동년 7월 9일부터는 아무르강 연안 및 시베리아 지역의 정규군을 만주로 출병시켜 남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연히 대한제국은 긴장을 할 수 밖에 없었고 이어서 청의 동북삼성 일대를 완전히 장악하게 됩니다.


러시아는 대한제국측에 군사원조를 제안하며 군사개입을 시도하지만 자체적으로 국경수비 및 국방비 증액을 통해 병력과 장비를 확충한 덕에 단칼에 거부합니다.


의화단 및 청의 패잔병을 대한제국군이 자체적으로 제압했음에도 불구하고, 1900년 이후의 대한제국의 국방비 비율은 30~40%대를 웃돌았으며 이는 러시아의 남하와도 연관이 있었죠.


이후 평양에도 1개 대대를 추가 편성했으며 회령과 종성에 각각 100명을, 무산과 온성에는 200명을, 회령과 종성 사이의 거점에는 400명을 추가로 배치하기도 합니다.

대한제국군 중앙군 시위대, 친위대와 지방군 진위대 배치

 

대한제국군 체계.pptx



이러한 덕분에 대한제국군은 증강된 병력을 바탕으로 많은 전과를 올립니다. 


1. 함경도 무산군에 주둔 중인 1개 소대가 비적 37명을 사살하고, 말과 총기, 탄약 등 전리품을 얻기도 했고, 


2. 삼수군에 주둔중인 진위 제 5연대 2대대 예하 병력이 비적 400명을 격파하기도 했습니다. 


3. 수비에만 머문 것 뿐만이 아니라 대한제국군 1개 중대 500명이 두만강을 도강하여 청비 40명을 사살하는 등 공세적 행동을 취하기도 했다. 


이처럼 침략의 명분을 대한제국이 사전에 제거했으므로 러시아의 남하는 실현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은 어땠냐고요? 대한제국군이 도강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내부 문제를 해결하느라 바빴거든요. 많은 교전을 통해 전공을 올린 대한제국군은 군비를 감축하자는 의견이 1901년 12월에 올라오지만, 원수부와 황제는 단호히 거부합니다.


지금은 감축이 아닌 증강을 선택해야할 시점이라며 약간 낮아지기는 했지만 1902년 국방비를 38%대를 유지하며 병력을 더욱 강화하죠. 국내 소요도 문제였습니다.


북방을 안정시켰으나 여전히 활빈당이나 영학당, 동학 잔존 세력이 곳곳에서소요사태를 일으켰기 때문에 군비는 감축이 아닌 증강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심지어 1900년 3월 경에는 해적질을 하는 활빈당 세력까지 나온 통에 진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변경 지역 지원 병력을 제외한 중앙군은 수도에서의 정변 발생에 대비했으며, 당시 친위대 3,000명, 시위대 2,000명, 평양 진위대 1,000명, 포병대 400명, 기병대 100명 등 총 6,500명의 병력이 수도를 방어하고 있었는데, 특이한 점은 평양진위대 1,000명이 한성에 주둔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평양 출신 병사들은 당시 대한제국군 내에서도 정예였다는 것으로 보여지는데, 1895년 경복궁 침입 당시 끝까지 일본군에 맞서서 자기 위치를 사수한 덕분에 고종의 신뢰를 얻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각설하고 북방에 주력을 투입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삼남 지역의 진위대를 계속해서 유지해야만 했으며 국내 소요 이외에도 많은 사건들이 벌어짐에 따라 병력은 계속해서 증강됩니다.


한 예로 1901년에는 제주에서 천주교도와 비천주교도 사이의 갈등이 폭발하

여 프랑스 선교사가 억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프랑스 함대가 출동하여 제주 진위대대와 강화 진위대에서 차출한 병력 100명, 수원 진위대에서 차출한 200명과 순검 15명을 중앙에서 파견하여 프랑스군과 대치하기도 했죠.


이렇듯 국내외적인 상황은 대한제국 정부로 하여금 다수의 자금을 국방비로 전용하지 않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을 강요했고 그 결과 1901~1904년까지 상당한 규모의 국가 예산이 국방비로 사용되는 결과를 가져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나저나 병력을 상당히 유동적으로 운용했는데 북방 수비 하나는 제대로 해냈네요.


*출처

1. 大韓帝國期 元帥府 創設과 國防的 軍事運營

2. '대한제국의 군사제도 ' 서인한

3. '대한제국기 군사정책과 군사기구의 운영' 조재곤

4. 고종실록 권 38 광무 2년

5. 관보 7, 제 1160호 광무 3년 1월 17일, 57~59페이지

6. 일러스트 'Anyan'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황태연 교수는 1901년 기준으로 대한제국군 병력이 한성 서울 중앙군 병력과 지방 군대인 진위대를 합치면 2 8천 여명에 달하고 전국 포군과 육군무관학교 생도를 합치면 충분히 3만명이 넘는다고 추정치를 근거로 제시한다.

 정말 대한제국 군사력이 그렇게 강했다는 말인가? 대한제국 군대와 무기 관련해서 살펴볼까요. 먼저 총기제조에 대해 볼까합니다.

 대한제국 시위대 기병대


한국근대 전력산업의 발전과 경성전기연세대학교 경제학과 오진석, 2006‘Ⅱ. 1. 1) 대한제국의 근대산업육성정책내용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1887년에 설립한 기기국 산하의 기기창은 1890년대 자금난으로 크게 위축되어 었는데, 대한제국에 들어서 군부 軍部 포공국砲工局 산하의 기계창機械廠 (기기창機器廠, 한성기계국漢城器械局 등으로도 불림)으로 변신해 중흥을 꾀하고 있었다.

 기기창을 관할한 기기국은 군무아문 산하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1895 3 군무아문이 폐지되고 군부가 신설되면서 기기국이

폐지되고 포공국이 신설되었다. 아마도 기계창은 이때부터 포공국에서 관할하게 것으로 보인다.  

* 기계창機械廠은 기계()나 도구()를 두어 두는 창고(), 또는 만드는 공장()

그런데 1901 이용익李容翊 기계창의 대대적인 확장을 도모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프랑스 육군포병대위 출신 패이외(Payeur) 중위 루이(Louis) 각각 기계창의 수지사首技師와 군물조사원軍物調査員으로 고빙하여 기계창 확장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토록 하였다.  당시 프랑스인 기술자 고빙계약을 체결한 군부 포공국장 대변 軍部砲工局長 代辦 이건영李健榮(이인영의 ) 이용익 계열의 인물로 추정된다.   그는 군부 포공국장 軍部砲工局長(1901.2.4~3.15) 재직하다가 이용익이 맡고 있었던 탁지부의 탁지부 사세국장度支部 司稅局長(3.16~7.24)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당시 군부 포공국장변軍部砲工局長代辦(3.20~7.31) 겸하였다. 

이용익의 군수산업 육성 계획은 1903 말에 다시 추진되었다. 당시 대한제국은 러일전쟁의 전운이 감돌면서 외국에서 각종 군사장비를 대량 수입하고 징병제 실시를 통한 의무병역제도로의 개선을 시도하는 육군 군사력 증강에 박차를 가하고,

 4,000톤급 포선 砲艦 양무호揚武號(55만원) 구입하여 해군 창설을 도모하는 대규모 군비확장을 기도하였다. (김재승金在勝, 한국근대해군창설사 韓國近代海軍創設史 혜안, 2000)

 이런 분위기 아래 1903 12월경 이용익은 드디어 삼정물산三井物産 경성지점장京城支店長 소전감사차랑小田柿捨次郞, 정상선문井上宜文 협의 하에 용산 전환국 뒤쪽에 총기제조소銃器製造所 설치하는데 성공하였다.

 

경성부사京城府史2, 경성부京城府, 1936, 1025~1026. 군부 포공국에서 이미 1903 7월경부터 삼청동 기계창 내에 총기제조소 설립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지만 삼정三井과의 교섭이 이루어지지 않아 성공하지못했는데 (황성신문皇城新聞 1903.7.2, 7.30, 9.1, 9.8, 11.21) 전기철도사무 조변위원電氣鐵道事務 査辦委員 임명된 적이 있었던 이용익 계열의 이무영李懋榮 군부 포공국 포병과장에 임명(1903.11.19) 이후, 급진전하여 12월경에 설립에 성공한 듯하다. (황성신문皇城新聞 1903.11.17,12.12.) 

 이에따라  위치도 애초 삼청동 기계창 내에서 용산으로 변경되었다.


이용익은 1903 10월에 육군참장陸軍參將 헌병사령부관憲兵司令官 임명되었고, 1904 1월에는 군부대신軍部大臣을 거쳐 원수부 검사국 총장元帥府檢査局總長 되었다. ( 안용식安龍植, 대한제국관료사 연구 大韓帝國官僚史硏究, 연세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延世大學校 社會科學硏究所, 1995, 680.) 주지하듯 이용익은 1904 2월에 일본으로 납치되었으므로 이후로는 이상 사업에 관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후 총기제조소는 1904 7월과 9월에 정식으로 군기창관제軍器廠官制 공포되어 군기창 산하기관인 총포제조소銃砲製造所 편입되었다. 관제로 군기창은 군부대신 직속으로 산하에 총포제조소銃砲製造所, 탄환제조소彈丸製造所, 화약제조소火藥製造所, 제혁소製革所, 직조소織造所 거느린 거대조직이었다. 

관제 포고와 함께 책임자인 제리提理(관리管理)에는 조직에 걸맞게 군부협판 참장參將 현영운玄暎運 임명되었다.  고종실록 高宗實錄 고종高宗4178, 411019. 관제상으로 보면 소장所長에는 참령參領 혹은 정위正尉 임명하도록 되어 있었다.      

군기창은 향후 육군에 필요한 병기兵器, 탄약彈藥, 기구器具, 재료材料 제조 수리를 맡고 해군에 필요한 화약火藥 제조하는 한편 제화製靴, 제직製絨 군용軍用 혁구革具, 피복被服 제조製造 등을 담당할 거대 기관으로 구상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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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jcjc518 블로그 '대한제국의 군사력'

2015. 2. 28. 8:43


대한제국의 군사력입니다
정규군 25,000명에 예비군10,000명
1인당 국민소득 850$,당시 이정도면 일본다음으로 많았다고 합니다

개인화기

러시아제 베르당 소총
탄:10.67×58mm
숫자:5천문 수입 대한제국군 주력소총

독일제 m1871마우저 소총
탄:11×60mm
마찬가지로 대한제국 주력소총 입니다
미국제 레밍턴 소총
구경 : 7.62mm, 길이 : 109.7cm, 총신길이 : 61cm, 무게 : 3.94kg
영국제 엔필드 소총
탄약 7.7×56mm (.303 브리티시탄) / 작동방식 볼트액션 / 전장 1,100mm (MLE) / 중량 4kg / 발사속도 분당 20~30발 / 유효사거리 503m

일본제 무라타 소총
구경: 8mm
전장: 122cm
무게: 4.17kg
장탄수: 5발
독일제 m1896마우저 권총 
탄:7.63mm
대한제국군 주력권총 입니다

분대지원화기


개틀링건
남북전쟁의 승패를 갈라노은 기관총
20문 수입
맥심기관총
탄종.303 브리티쉬
급탄250발짜리 천제 탄띠급탄
작동 방식반동식
냉각 방식수랭식
총열 길이673mm
전장1079mm
운용 인원4명
중량26.7kg
발사속도분당 500발


포병전력

독일제 75mm크루프 야포
이건 당시에는 일본도 가지지못한 고급포 였다고 합니다 현제로 따지면 pzh-2000정도

청나라제 암스트롱포
청나라에서 10문 수입합니다

대한제국 군사력이 이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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