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병제개혁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1905년 4월 16일 대한제국 최고 군사 기관인 원수부를 해체하고 진위대(지방군)의 병력을 크게 감축시켰는데 본래의 18개 대대에서 수원·청주·대구·광주·원주·황주·평양·북청의 8개 대대로 축소하였습니다. 편제는 과거 1개 대대가 5개 중대였던 것을 4개 중대로 개편시켰으며, 1개 중대 병력을 장교 이하 256명으로 줄여서 8개 대대를 모두 합쳐도 2,365명에 불과했습니다.
일본은 대한제국의 군대 축소에 아예 정미 7조약의 비밀조치서 따라 대한제국 군대해산을 하려고 했습니다. 일본 통감부는 대한제국군 시위대 병력 전부를 1907년 8월 1일자로 비무장 상태로 훈련원에 모이라고 공지했습니다. 참고로 통감부는 1910면 한일합방 이전에 대한제국을 통치하기 위해 설치한 기관으로 초대 조선통감부 통감은 이토히로부미(이등박문)였습니다. 대한 의병장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을 맞고 숨을 거두웠더래요.
남대문 전투는 대한제국 군대가 1907년 8월 1일 군대해산에 항거하여 일본군과 교전을 벌인 전투로 남대문에서 서소문(소의문)에 아우러는 일대에서 오전 9 시부터 시작되어 12시 30분 즘까지 4시간 이상 장렬하게 벌어진 전투입니다.
간략 전투 배치도
남대문 전투의 도호선이 된 시위대 1연대 1대대장 박승환 참령(현재 소령), 권총 자결입니다. 그는 유서에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니 만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라고 하였습니다.
박승환의 자결 소식을 접한 제2연대 1대대 중대장 오의선 정위 등도 자결하였고 1연대 소대장 참위 남상덕이 "대대장과 함께 죽자!"라고 외치며 군사들을 지휘하여 일본 교관진에게 총격을 가했습니다. 이에 격분한 장병들이 대대 일부 장교들의 지위에 따라 무기고를 부수고 총을 꺼내 일본군과 교전을 시작하였다.
1연대 1대대가 봉기하뎐 시점에 바료 옆 병영에 있던 2연대 1대대는 무기를 반납하고 해산식장으로 향하려던 참이었다. 마침 그때 제 2연대 1대대는 대대장 이기표 참령이 군을 통제하는 회의에서 해임되어 격양되어 있었다.
대대장을 따라 훈련원으로 갈 준비를 하던 중 이 치열한 총성을 들은 시위 2연대 참령 오의선이 군도를 뽑아들며 "앉아서 무장해제를 당할 수는 없다. 1연대가 궐기했으니 우리도 싸우자!"고 외쳤고, 대대원들 역시 이에 적극 호응하여 "1연대가 궐기했다!"고 외치며 영내로 난입, 마침 무기고를 점검하며 탄약을 반출하던 일본군을 발견, 육탄으로 그들과 난투극을 벌이며 마침내 총과 탄약을 회수하고 바로 거리로 뛰쳐나가게 되었습니다.
이들 시위 1, 2연대의 각 1대대 병력은 거리에서 합류, 2연대 참령 오의선, 정위 권중협, 소대장들인 참위 남상덕, 장세정, 노덕세, 이준영, 이한승, 그리고 무관학교 3학년 생도로서 소대장 견습차 파견되어 있던 견습 참위 이충순 등 3명, 특무정교 다수의 지휘 하에 전투를 개시했습니다.
이에 미리 대비하고 있었던 일본군은 오전 10시 20분 대한제국군 시위대 2연대 1대대 주둔지를 향해 51연대 3대대 병력과 남대문 위병 등, 그리고 호치키스 기관총 3정을 투입 공격을 개시하였습니다. 한편 51연대 1대대와 2대대는 서소문 위병들과 더불어 거의 비슷한 시간대에 대한제국군 시위대 1연대 1대대 주둔지에 대한 공세를 시작했습니다.
M1914 호치키스 기관총을 프랑스에서 운용 중인 미군의 모습 <출처: Public Domain>
참고로 호치키스 기관총(Hotchkiss machine gun)은 가스압력 작동방식을 구현한 첫 총기다. 현재까지 등장한 모든 가스작동식 소화기의 공통 조상에 해당하는 획기적인 무기체계다. 8mm탄을 사용한 호치키스 기관총은 분당 500~600발을 사격할 수 있다.
그러나 1차 공격은 아직 실탄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던 시위 1, 2연대 각 대대의 치열한 반격에 공격이 중단되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일본군은 추가로 시위 2연대 병영 가까이에 있던 남대문 위에서 기관총 2정을 추가 거치, 영내에 집중 총격을 퍼붓는 것과 동시에 51연대 3대대 중대장이 손수 다이너마이트를 들고 병영으로 돌입, 육탄 폭파를 가하는 맹공을 펼쳤습니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 51연대 3대대 중대장 대위 가지와라[梶原] 1명이 대한군의 총화에 휩쓸려 전사하였고, 육탄돌격에 가담한 특무상사 등 하사관 3명이 중상을 입는 등 피해가 속출했습니다.
그러나 대한제국군은 2차례 이상 남대문 방향으로 진출하여 통감부를 습격하려 했으나 일본군의 기관총 사격에 전진을 매번 포기해야 했고, 일본군의 지속적인 공격에 뒤이어 증원된 2개 연대의 일본군에 맞서면서 보유한 그 적은 탄약마저 거의 소진하게 되었습니다. 이러는 동안에도 훈련원에서 해산된 병사들 상당수는 울분을 터뜨리며 봉기를 일으킨 시위 1, 2연대에 연거푸 합류해 왔습니다.
그리고 정오를 조금 넘겨 12시 30분이 되었을 때, 마침내 시위 1, 2연대 1대대는 병영을 포기하고 서울 시내로 흩어져 시가전을 개시하게 되지만 탄약부족으로 제대로 저항을 하지 못 하고 전투는 끝났습니다.
8월 1일 전투 당시 간부로서 확인된 전사자 명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참령 오의선 (전 2연대 1대대 중대장)
정위 권중협 (1연대 1대대 중대장), 참위 장세정, 노덕세, 이준영, 이규병, 이한승, 남상덕
특무 정교 김순석, 고희정
견습 소대장 이충순, 백보용
령관장교 1명, 위관장교 7명, 특무정교(원사) 2명, 견습소대장 2명. 계 12명.
참위 이준영은 장교가 된지 하루만에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대한제국군 남대문 전투 내용을 표로 간략하게 아래와 같이 정리해보았습니다.
|
대한제국군 |
일본 조선주차군 13사단 |
교전국 |
시위대 1연대 1대대 시위대 2연대 1대대
|
51연대 7,9,10,12 중대 |
지휘관 |
참위 남성덕 |
조선주차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 長谷川好道 대위 가지와라[梶原] |
병력 |
소총 베르단 후장식 단발 소총 탄약 소지 10 ~ 15발 |
소총 5연발 38식 아리사카 호치키스 기관총 |
피해 |
전사 68명(장교 13명) 부상 100 여명 포로 516명 |
전사 4명 부상 30 ~ 40명 |
총탄 |
- |
총탄 보병 7215발, 공병 350발, 기병 및 포병 8발, 기관총탄 1138발, 황색화약 1.6kg 총탄 보병 7215발, 공병 350발, 기병 및 포병 8발, 기관총탄 1138발, 황색화약 1.6kg |
노획물 |
- |
소총 74정, 실탄 3,305발 |
대한제국군 시위대 봉기를 진압하고 병영을 점령한 일본군
* 출처
1. 경향신문 남대문 전투관련 기사, 1907년 8월 9일
2. 한양이야기, 조선왕조 500년 도읍 한양 읽기 , 남대문 전투 단락
3. 한국 근대사 산책 4, 러일전쟁에서 한국군 해산까지, 남대문 전투 단락
4. 조선군사령부 1910 ~ 1945, 古野直野, 1997년, 대왕사
5. 대한제국의 군사제도, 서인한, 서울 ; 혜안, 2000년
6. 대한제국 군대해산과 박승환-궁금-터, 호국보훈이야기, 독립이야기, 국가보훈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