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1년부터 늘어난 대한제국의 국방비 비율에 대한 고찰
대한 제국군 군복
대한제국은 1900년 3월 20일 원수부관제 를 개정하였고, 이는 군무軍務중심의 국정운영을
의미하는 조치였고 이로써 원수부 4개국 局長의 호칭은 總長으로 승격되었고, 그 권
한도 확대되었다. 고종은 관제개정 이후 즉각 관련 인사를 선별하였다.
구 분 |
군사관련 관직 및 약력 |
비 고 |
군무국총장 軍務局總長 이종건 李鍾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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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년, 우포도대장 및 친군전영 감독 1895년, 총어사 및 연무공원판리사무 1896년, 육군부장 임명 및 군부대신 |
법규교정소소속으로 대한국국제 제정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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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국총징 檢查局總長 조동윤 趙東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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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참령 임용 및 친위 3대대장 1898년, 육군참장 임명 및 군부협판 1899년, 육군부장 임명 및 원수부 군무국장 |
초대 군무국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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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계국총장 會計局總長 민영환 閔泳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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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개성유수・해방총관/ 1888년, 병조판서 1896년, 육군부장, 군부대신, 러시아황제대관식 특명전권공사 特命全權公使 1897년, 군부대신, 영국여왕즉위 60주년의식 大使 |
해천추범海天秋帆,사구속초使歐續草 등 저서에서 서구의 군제 및 규모를 긍정적으로 평가 |
기록국총장 記錄局總長 이학균 李學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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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 미군사교관 다이 보좌 1895년, 참령 임용 및수원대 대대장 1899년, 육군참장, 원수부 검사국장 |
1898년,무관학교군사교범 보명조전步兵操典을 번역・출간 |
원수부 초대 총장과 군사관련 주요 약력
이전에 대한제국의 국방비에 대한 자료를 올렸었는데, 1896년에 16.28%, 1897년에는 23.38%, 1898년에는 27.66%, 1899년에는 22.37%, 1900년에는 26.56%였으나 돌연 1901년부터는 41.02%, 1902년에는 38.33%, 1903년에 39.46%, 1904년에는 37.63%라는 엄청난 비율로 국방비가 증가되는 것에 대해서 한 번 고찰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1년 만에 국방비가 20% 가까이 증가세를 보이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이전에도 대한제국은 국방비에 상당한 지출을 했지만 1901년부터 1904년만큼은 아니었죠.
이러한 배경에는 총 3가지의 사건이 한 몫을 했다고 보여집니다. 하나는 의화단 운동으로 인한 변경의 불안함과 러시아와 일본의 국방비 증강, 그리고 국내의 소요 사태 등이 그 원인으로 꼽혀집니다.
1900년 3~4월부터는 청 내부의 분쟁이 예상되어 막벌이군 수백 명이 배를 타고 인천으로 피난 온다는 소문과 산동지역 피난민 10,000여 명이 평안도로 건너온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하는 등 국경지역의 혼란은 심화되었고 있었던 상태였습니다.
대한제국 역시 청 의화단 운동으로 인해 각 국 공사관이 공격받았음을 알고 있었고 이후 8개국 연합군에 의해 청군 패잔병과 의화단 잔존 세력이 대한제국 변경 지대로 오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청에서 건너온 피난민들도 상당한 골칫거리였죠.
대한제국 정부가 확인한 피난민의 숫자는 14,000명이었고, 이외에 더 많은 피난민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뿐 확실한 숫자는 알 수 없었습니다. 연합군의 진압 이후 함경-평안도 일대까지 청군 패잔병과 비적 떼가 난동을 부리는 사태가 왔다는 의미입니다.
게다가 대한제국의 궁내부 고문관이었던 샌즈(W. F. Sands)는 의화단사건의 확장이 차후 대한제국에 대한 열국의 개입을 초래할 것이라며 경고하자, 자체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는 상황에 직면했고 따라서 대한제국 원수부는 황제의 명에 따라 변경 지대의 병력을 증강합니다.
청에 주재하던 각 국 공사관 무관들도 대한제국의 역할을 확실하게 해달라며 경고를 보내죠. 만약 대한제국이 청군 패잔병과 의화단 잔여 세력을 제압하지 못한다면 8개국 연합군이 한반도로 진주할 수도 있다는 경고를 말입니다.
의화단(청비) 국경 유입 방지를 위한 대한제국 북경지역 군사운영과 배치도
따라서 일련의 군비 증강은 필수적이었으며 대한제국은 기존의 중앙군과 지방군으로는 이들을 모두 제압할 수 없다고 판단 하에 안북도 의주 및 강계, 함경남도 북청, 함경북도 종성에 진위대를 설치하는 안건을 황제에게 올리고, 황제는 의화단에 대비하는 것이라며 승인합니다.
총 5곳의 진위대가 증설되면서 50만 1,016원을 소모하게 되었고 이는 대한제국 국방비의 30.6%에 해당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습니다. 따라서 1900년 26.56%였던 국방비 비율이 1901년부터는 41.02%로 증가하게 된 원인의 하나라고 꼽혀집니다.
당시 대한제국이 얼마나 골머리를 썩혔는지, 진위대 증강으로도 모자라 중앙의 정예 친위대 600명을 추가로 파병할 지경이었으니까요. 북청의 진위대 병력이 전부 삼수-갑산 지대로 파견을 나간지라 비어버린 지역에 대해 중앙군이 공백을 메꿔준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외에도 해주, 안주, 황주에 주둔한 병력 중 각 100명씩 총 300명을 차출하여 변경에 증원했으며, 강화 주둔 제1연대 소속 병사 100명도 서울에서 급히 재편한 다음 경흥부로 이동시키기도 했습니다.
이로 인해 대한제국의 기존 방어 전략인 소수병력이 주요 거점을 장악하는 점형 방어에서 병력의 증강으로 인해 선형 방어로 전환하게 되죠. 특히 분쟁발생지역으로의 중앙군 파병, 타 지역 병력의 국경지원 등은 이 시기 군사운용의 성격이 대외적 위기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방증합니다.
주목할 점은 이 당시에 독립 부대로서 활동하던 공병과 치중병을 모두 보병부대로 배속시켰다는 점인데 전투지원부대의 배속은 단위 연대의 전투력 발휘를 용이하게 하는 것이었으며 제병협동을 중시했다는 것 역시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의화단 진압을 위해 러시아는 1900년 6월 중순, 만주의 경비대 인원을 6천명에서 11,000명으로 증원하였고, 동년 7월 9일부터는 아무르강 연안 및 시베리아 지역의 정규군을 만주로 출병시켜 남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연히 대한제국은 긴장을 할 수 밖에 없었고 이어서 청의 동북삼성 일대를 완전히 장악하게 됩니다.
러시아는 대한제국측에 군사원조를 제안하며 군사개입을 시도하지만 자체적으로 국경수비 및 국방비 증액을 통해 병력과 장비를 확충한 덕에 단칼에 거부합니다.
의화단 및 청의 패잔병을 대한제국군이 자체적으로 제압했음에도 불구하고, 1900년 이후의 대한제국의 국방비 비율은 30~40%대를 웃돌았으며 이는 러시아의 남하와도 연관이 있었죠.
이후 평양에도 1개 대대를 추가 편성했으며 회령과 종성에 각각 100명을, 무산과 온성에는 200명을, 회령과 종성 사이의 거점에는 400명을 추가로 배치하기도 합니다.
대한제국군 중앙군 시위대, 친위대와 지방군 진위대 배치도
이러한 덕분에 대한제국군은 증강된 병력을 바탕으로 많은 전과를 올립니다.
1. 함경도 무산군에 주둔 중인 1개 소대가 비적 37명을 사살하고, 말과 총기, 탄약 등 전리품을 얻기도 했고,
2. 삼수군에 주둔중인 진위 제 5연대 2대대 예하 병력이 비적 400명을 격파하기도 했습니다.
3. 수비에만 머문 것 뿐만이 아니라 대한제국군 1개 중대 500명이 두만강을 도강하여 청비 40명을 사살하는 등 공세적 행동을 취하기도 했다.
이처럼 침략의 명분을 대한제국이 사전에 제거했으므로 러시아의 남하는 실현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은 어땠냐고요? 대한제국군이 도강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내부 문제를 해결하느라 바빴거든요. 많은 교전을 통해 전공을 올린 대한제국군은 군비를 감축하자는 의견이 1901년 12월에 올라오지만, 원수부와 황제는 단호히 거부합니다.
지금은 감축이 아닌 증강을 선택해야할 시점이라며 약간 낮아지기는 했지만 1902년 국방비를 38%대를 유지하며 병력을 더욱 강화하죠. 국내 소요도 문제였습니다.
북방을 안정시켰으나 여전히 활빈당이나 영학당, 동학 잔존 세력이 곳곳에서소요사태를 일으켰기 때문에 군비는 감축이 아닌 증강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심지어 1900년 3월 경에는 해적질을 하는 활빈당 세력까지 나온 통에 진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변경 지역 지원 병력을 제외한 중앙군은 수도에서의 정변 발생에 대비했으며, 당시 친위대 3,000명, 시위대 2,000명, 평양 진위대 1,000명, 포병대 400명, 기병대 100명 등 총 6,500명의 병력이 수도를 방어하고 있었는데, 특이한 점은 평양진위대 1,000명이 한성에 주둔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평양 출신 병사들은 당시 대한제국군 내에서도 정예였다는 것으로 보여지는데, 1895년 경복궁 침입 당시 끝까지 일본군에 맞서서 자기 위치를 사수한 덕분에 고종의 신뢰를 얻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각설하고 북방에 주력을 투입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삼남 지역의 진위대를 계속해서 유지해야만 했으며 국내 소요 이외에도 많은 사건들이 벌어짐에 따라 병력은 계속해서 증강됩니다.
한 예로 1901년에는 제주에서 천주교도와 비천주교도 사이의 갈등이 폭발하
여 프랑스 선교사가 억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프랑스 함대가 출동하여 제주 진위대대와 강화 진위대에서 차출한 병력 100명, 수원 진위대에서 차출한 200명과 순검 15명을 중앙에서 파견하여 프랑스군과 대치하기도 했죠.
이렇듯 국내외적인 상황은 대한제국 정부로 하여금 다수의 자금을 국방비로 전용하지 않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을 강요했고 그 결과 1901~1904년까지 상당한 규모의 국가 예산이 국방비로 사용되는 결과를 가져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나저나 병력을 상당히 유동적으로 운용했는데 북방 수비 하나는 제대로 해냈네요.
*출처
1. 大韓帝國期 元帥府 創設과 國防的 軍事運營
2. '대한제국의 군사제도 ' 서인한
3. '대한제국기 군사정책과 군사기구의 운영' 조재곤
4. 고종실록 권 38 광무 2년
5. 관보 7, 제 1160호 광무 3년 1월 17일, 57~59페이지
6. 일러스트 'Any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