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스키타이 황금 기마민족

요녕성 서풍현 서차구 유물

요녕성 서풍현 서차구 목곽묘 고분군(기원전 150년~서기 50년)




 

 요녕성 서풍현 서차구 목곽묘 고분군 출토 스키타이 양식 청동제 벨트

요녕성 서풍현 서차구 목곽묘 고분군 출토 스키타이 양식 청동제 벨트 버클의 말 탄 두 무사가 초원을 누비는 모습.  

 

요녕성 서풍현 서차구 목곽묘 고분군 출토 스키타이 양식 청동제 벨트 버클의 생명나무와 2마리 낙타.


KBS 역사스폐셜 부여 동명왕 편에 '북부여'의 유물들로 소개된 요녕성 서풍현 서차구 목곽묘 고분군 출토 스키타이 양식 청동제 벨트 버클들.
 
요녕성 서풍현 서차구 목곽묘 고분군의 스키타이 형식 동물투쟁모티브 


요녕성 서풍현 서차구 목곽묘 고분군의 스키타이 형식 청동제 벨트 버클의 쌍雙 황소.
 요녕성 서풍현 서차구 목곽묘 고분군의 스키타이 형식 청동제 벨트 버클의 새 부리를 가진 괴물(왼쪽).
요녕성 서풍현 서차구 목곽묘 고분군의 스키타이 형식 청동제 벨트 버클의 새 부리를 가진 천마天馬


기원전 150년~서기 50년 -   요녕성 서풍현 서차구 목곽묘 고분군 출토 황금 귀고리들.
 

요녕성 서풍현 서차구 목곽묘 고분군 출토 스키타이 양식 안테나 자루 철검.
 

러시아 여자 고고학자들의 스키타이 여궁사女弓士 재현.

 

프리기아인의 소아시아 탈출.

1).기온의 하강으로 遊牧民의 전투적 騎馬民族化.(동아시아 동일)

2).스키타이(Scythia)일부가  B.C 8c경 카스피해에서흑해 北岸으로 이동.

3).킴메르(Cimmer)의 카프카즈(남러시아) 지역을 공격하자 쫒겨남.

4).킴메르의 이동은 소아시아 지역(현 터키 중서부)에서 히타이트의 공백을 메우고 번영하던 프리기아(Phrygia)를 공격.

5).프리기아인(Phrygian)의 일부가 B.C690년 전화(戰禍)를 피해 수도 고르디온(Gordion)을 버리고 카자크스탄 방면으로 탈출 추정. 

6).스키타이는 이후 앗시리아를 몰아내고 BC6c 이집트를위협.- 고대문명교류사,정수일,2002. 외 . 르네크루세, 유라시아 유목제국사,김호동 역,1999.

2.동진한 프리기아인은 누구인가?
 
1) 기원전 20c경 이란인계 최초로 설립된 나라로 미타국(米它國)이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히타이트(bc33c~12c) 몰락 후 번영. – Midas왕의 황금문명.

2) 조로아스터교(拜火敎)로 불을 숭상하였다. (지층에서 석유가 솟는 석유산지)

3) 헤로도투스가  이집트인의 말을 인용하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인을 Phrygian이라고 했다.- 지중해문명과 단군조선,박용숙,집문당,1996

4) 앗시리아 기록에 의거, B.C 707년 사르곤 2세에 의해서 정복당함.

5) 킴메르인에게 B.C690년 정복당했으며 B.C546년 리디아 왕국에게 정복당함. 이후 회복을 못하고 멸망.

<주>

1).페르시아는 파사국(婆娑國)으로 伽倻 김수로왕의 파사석과 관련.

2).변한(弁韓)의 정치,문화 주체세력과 관련 추정.   (운영자 자료)

 
3. 흉노의 구리솥 
동복은 오르도스에서 부여,신라,가야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스키타이 민족과 한민족의 관계(펌)

그리스인들이 스키타이 페르시아인들은 사카라고 불렀는데, 넓은 의미로는 유라시아 대륙에서 활동하던 백인종 유목민족(페르시아계 유목인과 같은 의미) 전체를 통칭하며, 좁은 의미로는 페르시아 다리우스왕이 그리이스와 전쟁을 벌였던 스키타이 국가를 말하는데, 대개 스키타이 위치는 크림반도를 포함한 흑해 북부 초원지대이며, 넓게는 동경 30도 선상의 우크라이나 북부의 중심에 있는 키예프(Kiev)에서부터 동경 60도 선상의 우즈베케스탄 서북부의 끝에 있는 아랄(Aral)해[咸海]까지에 걸쳐 활동하였다.

스키 타이란 말의 어원은 ‘사슴’이다. 나중에 ‘사슴’에 대한 설명은 자세히 하기로 하고 낙빈기의 금문에서 자신의 문장을 ‘사슴’으로 그린 자가 누구인지를 찾아보았다.

소호금천씨(함)의 딸 문文과 전욱고양씨 사이에서 태어난 자가 중여곤(곤곤)인데 그의 문장기호가 바로 사슴이다. 전욱고양씨의 아버지가 ‘창의’인데 이 역시 천자가 되지 못한 사람이다.

다시 ‘스키타이’의 어원에 대하여 알아보자. 스키타이의 한국어는 ‘색 탁’이다. ‘색, 탁은 고 와 동일한 뜻으로 성城이라는뜻이었다. 즉 스키타이는 동일한 뜻을 두 번 겹쳐서 부르는 이름이다. ‘색’은 북방에서 ‘새끼’라는 뜻으로 ‘스키’ ‘사키’등으로 되었다.

즉 고구려가 세워질 당시 고구려는 먼저 있던 나라인 ‘고구리’ ‘색구리’ ‘탁구리’ 또는 ‘색리국’ ‘탁리국’ ‘고리국’을 이어 받았다고 하는데 이는 세 나라가 아니라 같은 나라를 부르는 이름이다. 즉 색, 탁, 고는 같은 뜻이다. 고등의 손자가 색부루 단군이다. 색부루 단군의 후손들은 모두 고씨를 성씨로 썼다. 그러므로 고, 색, 탁은 같은 성씨이다.

스키타이의 상징은 사슴뿔이라고 이미 말씀드렸다. 신라의 금관은 바로 사슴뿔의 형상이며 금관을 만든 민족은 오직 삼국과 아프가니스탄 밖에는 없다. 즉 페르시아 위 쪽에 있던 민족이 한반도로 이주해온 것이다. 백제의 칠지도도 역시 사슴뿔의 형상이다. 그러면 사슴의 그림이 엄청많이 등장하여야만 할 것 아닌가? 몽골의 알타이 지방에 가 보면 온통 천지가 사슴그림이다. 알타이라는 말 자체가 황금인데, ‘알타이’ 역시 ‘스키타이’와 같은 뜻이다. 즉 ‘아리+타이’로 구성된 단어이다.

알타이 지방 순록 암각화

색의 페르시아나 인도식발음이 ‘샤카’이다. 즉 ‘석가모니’에서 ‘석가’는 ‘샤카’를 한문식으로다시 옮겨 쓴 것이다. 그러므로 샤카족은 모두 고구려의 ‘고’씨를 부르는 말이다. 이 고씨들을 ‘마馬’라고도 부른 것이다. 그래서 고구려는 5개의 씨족으로 구성되었는데 가장 으뜸인 종족이 마가이다. 즉 마가馬加가 바로 고씨인 것이다. ‘마가’가 변하여 ‘마기’가 되었고 그것을 스페인어로는 ‘마고’라고 한다. ‘마기’는 페르시아에서 배화교의 승려를 부르는 말이다.

좌우간 스키타이 족은 말을 타고 활을 쏘는 부족이며 최초에 철기를 다루던 부족이다. 세계사에서는 힛타이트족이 최초로 철기를 발명한 부족이라고 하는데 사실 힛타이트 족은 스키타이족으로부터 갈려져나간 부족이다.

스키타이족의 다른 이름이 ‘샤카’족 인데 일본어로 ‘시카’는 ‘사슴’을 뜻한다. BC 2000년경에 ‘아’가 ‘이’로 바뀌는 음운현상이 있었다. 이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바로 ‘샤카’가 ‘시카’로 바뀐 것이다.

치우는 여신으로 이집트의 ‘이시스’이며 이가 곧 ‘아르테미스’이며 또는 ‘페르세포네’ 로마에서는 ‘코레’라는 여신이라고 이미 말씀드렸다. 페르세포네의 상징동물은 맷돼지이며, 가끔은 곰으로도 나타난다. 그런데 아르테미스 여신이 가장 좋아하는 동물이 바로 ‘사슴’이며 그녀는 ‘사슴’의 보호자를 자처하고 나선다. 몽골 암각화 전문연구가인 김호석박사와 예서원의 최삼주 실장이 알타이지방에 가서 실제로 찍은 사진들이다. 아래 호랑이처럼 보이는 동물은사실 맷돼지이다. 맷돼지는 치우의 상징이므로 사슴 그림을 끄릴때면 항상 같이 등장하는 것이다.

8 세기 기원전 스키타이인(Scythai, 그리스 Σκύθαι). )들은 인도·이란 계통의 유목민족이다. 종족의 명칭도 ‘스쿠타(skuta-)’라는 고대 이란어에서 나왔으며, 이는 오늘날 영어에서 ‘shooter’와 동일한 어원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한다. 스키타이는 ‘궁사’를 뜻하는 셈이었다. 스키타이, 사하, 선 모두 암 순록 투르크어 사가이온(Сагаион) 과 다루르어 수간(Sugan) 어원으로 부터 왔다.

Scythia, Saxa, and the Sǒn-Xian[Seon] (鮮: Soyon) all originate from the word for female reindeer—'Сагаион' in Turkish and 'Sugan' in Dagur.

스키타이 나 사이 XIYA 사람, 고대 페르시아 바다 호 해시의 키프로스의 키프로스면을 마시고, 키프로스에 뾰족한 모자를 쓰고, 사카 (Saka, SECK 사람들)라고 ; 아슈쿠자이(Ashkuzai), 페르시아와 고대 인도라는 고대 아시리아는 "플러그"또는 "사카"라고, "한", 사카, Skuthoi 또는 Sacae 라는 고대 그리스, 중국 "역사 기록"이라고 기원전 3 세기, 중앙 아시아, 인도 - 유럽 언어 가족의 동부이란 유목민의 남부 러시아 초원에 위치 - 뾰족한 모자 키프로스 또는 Sakya이라고 사람들

유태인 아쉬케나지(Ashkenaz)는 스키타이와 어원이 같습니다. 유태인은 오히려 유태인이 스키타이인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그 근거지는 아르메니아입니다. 독일에 대한 중세 히브리어 이름이 아쉬케나즈이고, 라인강 유태인 공동체 이름입니다.  거란 키타이(Khitai)도 동일 어원이라는 견해가 있다.

1969~1970년에는 카자흐스탄의 알마티라는 도시에서 멀지않은 이식 쿨 호수 부근에서 기원전 5~4세기에 속하는 다수의 고분이 발견되었고 여기서 소위 ‘황금인간’으로 알려진 유해가 발굴되었다. 이런 이름이 붙여지게 된 것은 신장 165㎝로 추정되는 청년이 입고 있던 황금으로 된 의상 때문이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4개의 화살이 꽂혀 있는 장식을 한 모자이다. 고대 페르시아 자료에는 ‘사카 티그라하우다(Saka Tigrahauda)'라는 종족이 언급되어 있는데, ‘티그라’는 화살을, ‘하우다’는 모자를 뜻하며, ‘사카’는 ‘스키타이’와 동일한 어원을 갖는 종족명칭이다. 따라서 그것은 ‘화살 같은 모자를 쓴 사카족’을 뜻한다고 할 수 있으니, ‘황금인간’은 바로 이 종족에 속한 귀족청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민족의 기원과 역사에 관해서 가장 상세한 기록을 남긴 인물은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역사가인 헤로도투스였다. 그는 ‘역사’라는 책에서 스키타이의 기원에 대해 몇 가지 설화를 전하면서 자신이 보기에 가장 신빙성이 있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소개하였다. 그들은 원래 아락세스강(오늘날의 볼가강) 동쪽에 살던 민족이었는데, 마사게태라는 민족의 공격을 받게 되자 서쪽으로 도망쳐 강을 건너서 흑해 북안(北岸·북쪽 해안)의 원주민 킴메르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킴메르인들이 카프카스 산맥을 넘어 남쪽으로 도망치자 스키타이는 그들을 추격하기 시작했는데, 그만 도중에 길을 잘못 들어서 근동(近東) 지방으로 내려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스키타이에 관한 최초의 기록도 당시 근동의 강국이었던 아시리아의 설형문자 점토판에서 발견된다. 즉 이슈파카이 왕이 이끄는 아슈쿠자이라는 집단이 아시리아의 왕 에사르핫돈(기원전 680~669년)과 전투를 하여 패배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여기서 아슈쿠자이가 스키타이를 지칭한다는 데에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당시 근동 지역에는 아시리아, 메디아, 우라르투 등 여러 세력들이 각축을 벌여 정치적으로 극도의 혼란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무대에 출현한 스키타이는 이들 국가와 때로는 연맹하고 때로는 적대하면서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이슈파카이의 아들인 파르타투아는 과거의 적이었던 에사르핫돈과 혼인동맹을 맺게 되었는데, 후일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가 메디아에 의해 포위 공격당할 때 그의 아들이 스키타이의 왕이 되어 원군을 이끌고 와서 메디아를 격파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 뒤 스키타이는 이집트 원정에 나서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거쳐 남진했는데, 겁을 먹은 이집트의 파라오가 직접 선물을 갖고 올라와 스키타이의 국왕 마디에스에게 바치고 화평을 맺었다. 헤로도투스에 의하면 스키타이는 이처럼 28년 동안 중근동 각지를 호령하면서 여러 민족으로부터 조공을 받기도 하고 약탈을 자행하기도 했지만, 메디아의 국왕 퀴악사레스가 그들을 연회에 초대하여 술에 잔뜩 취하게 한 뒤 몰살시켜 버림으로써 그들의 패권은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고 한다.

사르마티아족에 흡수되었고 또 동쪽의 한 갈개는 파르티아와 대월지(大月地) 를 건설했습니다. 알란족 또는 라제스족으로 불렸고 로마 용병으로 활약했했고 코가서스 지역에 정착한 알란족의 후예로 오세트인으로 전해지고 있으면 파키스탄 및 아프카니스탄에 사는 파슈툰족의 동쪽에 이란계 백인의 후손이라 합니다. 백인 투르크인의 원조다.

근동을 떠난 스키타이인들은 다시 카프카스 산맥을 넘어서 흑해 북안의 초원으로 돌아갔다. 헤로도투스는 이들이 북방으로 귀환한 뒤 일어난 흥미로운 사건에 대해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스키타이인들이 근동을 원정하는 동안 부인들이 현지의 노예들과 관계를 맺어 낳은 자식들이 귀환한 옛 주인에게 예속되기를 거부했고, 양측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스키타이인들은 그들을 제압할 수 없었다. 그런데 노예들을 상대할 때는 칼이나 활이 아니라 채찍을 써야 한다는 누군가의 제안을 받아들여 채찍을 휘둘렀더니 겁을 먹고 다시 복종했다고 한다. 이 설화는 스키타이인들이 흑해 북안 즉 돈강과 다뉴브강 사이의 초원지역을 점령하고 국가를 건설할 때 군사적 정복과 함께 현지 주민과의 민족적 혼합도 동시에 일어났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흑해 북쪽 해안을 근거로 건설된 스키타이 국가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우선 ‘왕족 스키타이’라는 집단인데 최고의 지배층을 이루었고, 그 다음에는 일반 유목민으로 구성된 ‘유목 스키타이',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피정복민 ‘농경 스키타이’가 있었다. 이러한 복합적 구조는 스키타이 국가가 결코 단일한 종족이 아니라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이질적인 다양한 부족들의 결합체였음을 말해준다.

흑해 북안으로 돌아온 스키타이는 기원전 6세기 말 페르시아 제국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냄으로써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다리우스 대제는 80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스키타이를 잡기 위해서 초원을 헤맸으나 종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절망에 빠진 그는 스키타이인들에게 사람을 보내 비겁하게 도망만 다니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나와서 싸우자는 전갈을 보냈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우리는 도망다니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생활방식이 원래 그렇다”는 조롱 섞인 답신뿐이었다. 식량이 고갈된 페르시아군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스키타이는 초원에 물이 귀하므로 그들이 물이 있는 곳을 따라 퇴각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맹추격을 시작했으나, 페르시아인들은 초원의 지리에 어두워 물도 없는 엉뚱한 길로 가는 바람에 전멸 위기에서 벗어나 구사일생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고 한다.

외부의 위협을 극복하고 성취한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추진된 그리스와의 교역은 스키타이 국가에 경제적 번영을 가져다 주기에 충분했다. 스키타이의 발전과 번영은 그들이 남긴 고분에서 발견된 출토물이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다. 흔히 ‘쿠르간’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고분들은 흙과 돌로 쌓여진 작은 언덕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규모가 큰 것은 높이 20m에 이르며 그 아래에는 목곽분이 안치되어 있었다. 이들 스키타이 고분들은 특히 쿠반 반도(켈레르메스, 코스트롬스카야)와 크리미야 반도(쿨 오바, 체르톰리크, 솔로하)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어, 그곳이 스키타이 국가의 핵심적인 중심지였음을 말해준다. 유물 중에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것이 특히 많아서 스키타이 귀족들의 재화와 부의 규모를 추측케 할 뿐만 아니라, 스키타이 특유의 문화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학자들은 흔히 스키타이 문화의 3대 요소로 마구, 무기, 동물양식을 드는데, 이 가운데 특히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 동물양식이다. 이같은 스키타이 동물양식이 어디에서 기원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세 가지 학설이 대립되어 왔다. 하나는 남러시아 자생설이고, 또 하나는 서아시아 기원설이며, 마지막으로 중앙아시아 기원설이 있다. 스키타이의 유물들을 보면 남러시아나 서아시아의 영향을 부인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1970년대 전반 남시베리아의 투바공화국에 위치한 아르잔이라는 곳에서 직경 120m에 달하는 거대한 고분이 발견되었고, 거기서 출토된 유물들은 결정적으로 중앙아시아 기원설의 손을 들어주었다. 탄소 연대측정 결과 지금까지 발견된 어떤 동물양식의 유물들보다 시기가 빠른 기원전 9세기 중후반으로 판명된 이 고분에서 후일 스키타이 동물양식의 중요한 요소를 분명히 갖고 있는 유물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스키타이 국가의 중심지는 흑해 북안이었다. 그러나 동물양식을 특징으로 하는 고대 유목문화는 유라시아 초원에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있었고, 이는 고고학적인 발굴을 통해서 확인된다. 1940년대 후반 알타이 고산지대의 파지리크라는 곳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학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 고분은 땅을 파서 시신이 담긴 목곽(木槨)을 안치하고 그 위에 돌을 쌓아올린 소위 적석목곽분의 구조를 지녔다. 적석총의 특징을 지닌 신라시대 고분들과의 유사성 때문에 우리나라 학자들에게도 큰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파지리크 고분은 이미 오래전에 도굴되었지만, 묘실 안팎으로 스며든 이슬과 빗물이 결빙되어 고분 전체가 일종의 냉장고가 되어버려, 그 속에 있던 시신과 많은 부장품들이 전혀 부식되지 않은 채로 발견되었다.

미라 처리되어 실로 꿰맨 흔적이 보이는 시신의 피부에는 동물양식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고, 손가락 끝으로 눌러보면 피부가 들어갔다가 다시 나올 정도로 보존이 잘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 밖에 순장된 말들과 거기에 씌웠던 말가면이 나왔고, 목제품·펠트·직물 등에도 스키타이 특유의 양식들이 보였다. 특히 흥미로운 사실은 헤로도투스가 묘사한 바와 같이 제사의식을 행할 때 대마초를 흡입하는 데에 사용하는 도구들이 그대로 발견되어, 그의 기록이 얼마나 정확하고 신빙성이 있는가 하는 점을 확인시켜 주었다. 뿐만 아니라 페르시아에서 직조된 카펫, 중국에서 만들어진 청동거울 등도 발견되어 광범위한 교역의 존재도 짐작케 한다.

스키타이 동물양식의 특징은 중앙아시아를 거쳐 더 서쪽의 몽골리아 초원으로까지 확산되었다. 1924년 울란바토르 북방 80㎞에 위치한 노인 울라 고분은 동방의 유목민족인 흉노인들의 것으로, 여기서 나온 다량의 부장품 가운데 그리핀이 순록을 공격하는 모양이 수놓인 카펫이 발견되었다. 중국에서 만들어진 직물이나 칠기 등이 다수 있고 그 중에는 전한 건평5년(기원전 2년)의 명문(銘文)을 갖고 있는 것도 있는데, 이는 흉노가 한나라와 조공 관계를 통해서 상당량의 물품들을 입수했기 때문일 것이다. 스키타이 문화의 영향은 고비사막 남쪽의 내몽골 지역에서도 강하게 발견되고 있다. 흔히 ‘오르도스 청동기’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초원 청동기 제품들 중에는 맹수가 초식동물을 덮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기원 전 7~1세기 스키타이 세계의 문화

족/문화명

지역

정치, 문화

사르마타이

스키타이 동쪽에 위치

남우랄지방과 우랄강 동쪽 스탶지역

*알타이 산맥에서 카자흐스탄의 스탶국가와 중앙아시아 지역에 이들과 밀접하게 관련있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생활과 경제상황이 스키타이와 비슷하며 집을 갖지 않고 마차생활을 한다.

-스키타이를 공격하고 동쪽으로부터 내습한 阿蘭인에 의해 민족적 쇠망을 가져온다.

-무기, 마구, 의장이 스키타이와 유사

-전기 : 스키타이 색채가 엷어지면서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 영향이 많이 나타난다.   페르시아식의 동물문, 괴수문과 함께 기하문이 유행, 말기에 가서는 그리스로마, 게르만과의 접촉을 통해 보석상감세공을 발달시킨다.   스키타이 동물의장과 오리엔트의 괴수의장이 결합되어 사르마타이 미술 특유의 동물투쟁문, 괴수문 등의 황금식판을 만들어낸다.

-중기 : 정치, 군사적으로 크게 연맹하여 중장비 기마전술을 채용하면서 번성.   후기에는 부족중의 하나인 아란이 사르마티아를 대표

塞, 烏孫

중앙아시아 동부

-二枝式말재갈, 새모양의 교구, 스키타이풍의 山羊形이나 態形의 飾具, 단추 등의 청동기, 청동제, 철제, 골제로 된 兩翼 내지 삼각鏃, 목제의 장족, 각종 珠類

-페르가나 지방 : 제사용으로 보이는 동물형 장식이 붙은 소반, 솥 등의 청동기 출토

-세가지 지방적 특색

*천산 : 남시베리아의 문화의 양향이 오래 지속

*페르가나 : 남방 아나우 문화와의 혼합

*시르 다리아 : 맛사게타이, 사르마타이 문화의 영향

⇒오손, 큐샨, 康居로 나뉨

오손은 유목적 전통을 잘 유지, 스키타이적 남시베리아와 관련 깊다.

쿠샨은 농경적 환경 속에서 발전

강거는 정주와 유목으로 나뉘어져 정주자는 아랄해 동안의 맛사게타이, 사르마타이 등과 혼합되며 한편, 색의 전통을 갖는 사람들은 중부 카자흐스탄에서 유목을 계속했다.

타가르문화

남시베리아 미누신스크분지

-카라수크 문화 계승 : 카라수크 문화에서 갖가지 동물표현이 이루어져, 타가르문화에 이르러 현저히 발달.

-흑해연안의 스키타이 문화와 가장 유사

분묘양식과 부장품을 가지고 3기로 나뉜다.

*제 2기 : 동물의장이 많이 나타난다.   특히 산양, 사슴 등의 동물이 透彫나 입체상으로 표현되어 무기들을 장식한 예가 많다.   스키타이식 靑銅鍑 제작

*제 3기 : 철기제작 일반화.   스키타이 전기 이지식 말재갈 등 마구나 동물의장의 청동식판 등 스키타이풍 기마문화 번성

마이밀문화

 

알타이 산지의 타갈 문화와 거의 같은 시기에 성립

타갈 문화와 동류의 문화, 약간의 지방색을 띤다.

스키타이풍 유목기마민의 문화-청동제 단검, 장검, 圓鏡, 이지식말재갈, 동물의장

파지릭문화(전5~4세기)

알타이 산지

死者의 문신 : 공상적인 괴수문-스키타이 장례의식을 방영

묘실내에 대마의 열매를 넣은 청동향로 발견

애마의 부장-몽고마, 서방산의 밤색털인 아리아말

정령(전3~5세기)

바이칼호 남쪽에서 예니세이강 상류(북외몽고)

고분에서 스키타이식 삼익족, 삼각족, 鍑, 이지식말재갈, 칼, 스키타이풍의 동물의장 출토

중국문화의 영향-왕의 장신구, 전한의 화폐, 銅印

수원청동기문화(전5~전2세기)

남몽고의 오르도스

유목기마민족의 색채가 극히 강하게 나타남

-전5~전2세기:스키타이식 복, 아키타케스형 단검, 이지시 말재갈, 동복, 스키타이식 동물의장 식판, 칼, 투구, 갑옷, 馬面

-동물문은 스키타이 영향을 받은 흉노문화

타쉬투크문화(전1~5세기)

미누신스크 지방

타가르문화 후에 일어난 문화

타가르문화를 기반으로 중국의 하문화, 몽고의 흉노문화의 영향으로 성립

사자의 얼굴에서 떠내는 가면:백색인종과 황색인종의 혼혈형을 보여주고 있다. 분묘 부장품에서 보면, 지배층은 유목기마민이고 피지배층은 농경민족.

전 1세기경의 한 대 유적이 발견-문화교류

일찍 청동가공 기술발달-동물상를 예술적 사실적으로 표현한 무기나 장식품은 스키타이, 사르마타이 양식과 유사

위키백과 사카 번역

1.명칭,언어, 역사적 배경

사카(Sakas)는 (고대 이란어의 영어 형태로 복수 남성명사, 고대 그리스어Σάκαι, Sakai; 사스크리트어 Śaka) 고대 페르시아 시대부터 중기 페르시아 시대까지 중국 신장에서 부터 동유럽에 걸펴 유라시아를 아우르는 평지에 이주하여 살았다.  중기 페르시아 때 투르크 이동으로 투르크인으로 대치되거나 투르크에 흡수되었다.
 * 투르크는 돌궐(突厥)이다.

아키메니드 제국 때 사카 영역 대부분은 페르시아의 관할영에 있었고 사카(Saka)라 불렸고 고대 이란 다른 지역에도 거주했다.  고대 그리이스인은 사카를 스키타이(Scythians)라고 불렀지만 페르시아어로 사카이(Sakai)로 인식했다.
사카이는 모든 스키타이인을 의미하고 또한 중앙 아시아와 극동의 종족까지 의미했다.

기원후 300년 전, 중기 페르시아 시작 전에  이들은 후에 카작스탄(Kazkhstan), 우즈벡키스탄(Ozbekistan), 타직스탄(Tajikistan), 아프카니스탄(Afghanistan), 파키스탄(Pakistan), 인도와 이란 지역, 알타이 산맥, 러시아 시베리아, 중국 신장성
에 살았다.  이 때문에 로마는 Saceans (Sacae) 과 Scyths (Scythae) 모두 인식을 하였다.
   스키타이인는 경계 지역에서 중국어로 사이(Sai: , Old Sinitic*sək)로 불러졌고 서쪽 경계에서는 중동 지역에 들어온 첫 이란인 이었다. 아시리아 시대 에사하돈 기록에 사카인들에 대해서 아쉬쿠자(Ashkuza) 또는 이쉬후자(Ishhuza)로 불렸다.

허그 윈클러(Hugo Winckler)는 심한 의문이 들지 않게 스키타이와 정체성을 연관시킨 첫 사람이다.   고대 시메리안(Cimmerians)이라 알려진 기미라이(Gimirrai)와 관련되었다. 이 스키다이인은 주로 우라투(Urartu) 왕국에 정착하는 관심이 있었고 후에 아르메니아(Armenia)가 되었다. 유티(Uti), 사쿠센(Shacusen)은 그 이름을 반영한다.   고대 히브루 텍스트에 아쉬쿠즈(Ashkuz)는 기미리(Gimirri; Gorner)부터 파생된 종족으로 여겼다.  

스키타이는 키에프 남쪽 우크라이나(Ukraine)와 트레이스(Thrace),마케도니아(Macedon)로 진출했다. 구별된 명칭이 이점을 줄 정도로 충분히 다르다는 사실에서 아키메니드(Acheamenid)는 그들을 위한 관할 명을 스쿠드라(Skudra)로 지었다. 그 이름은 엘람과 아카이드에 Is-ku-ud-ra로 발견된다.  

사카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중국 신장성 웨이우얼 자치구에 있지만 그 언어는 이란 동부 또는 북동부 지역에 넓게 퍼졌고 다시 2개 방언으로 갈라졌다.  중기 이란 시기에 스키타이는 사마트(Sarmatians),알란(Alan), 로하러니(Roxolani)같은 다른 민족명으로 동화되거나 훈족으로 흡수되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