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읽기]창원은 가야의 탁순국이었다 | |
글쓴이: 김태식 날짜: 2004.02.23. 05:41:24 조회: 181 글쓴이IP: 211.245.244.85 | |
삼한시대 ‘낙랑·왜’와 교역 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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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국 초록불 | 2008/02/24 20:21 | *..역........사..* |
신공황후 46년, [일본서기] 연대로는 246년 봄 3월에 탁순국卓淳國에 사신을 보냈다. 탁순의 왕 말금한기末錦旱岐는 이런 요지의 말을 전했다.
"244년 7월 중순에 백제인 구저, 미주류, 막고莫古 세 사람이 와서 '백제왕이 동방의 귀한 나라 일본에 다녀오라고 했는데 그 길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바다가 멀고 풍랑이 심하니 큰 배가 있어야 갈 수 있다고 하니 '배를 준비하겠다. 귀한 나라의 사신이 오면 꼭 우리나라에 알려달라'고 했다."
그래서 왜의 사신은 종자와 탁순인을 붙여 백제로 가게 했다. 백제의 초고왕은 매우 기뻐하며 보물을 나눠주고 일본에 조공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위 내용은 [환단고기]와 맞먹을 뻥이라 하겠다.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왜는 표류한 임나인을 만난 적이 있고, 신라라는 존재도 "신" 덕분에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백제와 접촉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탁순국을 통해서 백제라는 나라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 위 기사 속에 담긴 유일한 진실이겠다. (말금한기에서 末錦은 일본서기 독음이 makomu이고 寐錦은 mukimu로 우리 발음은 같지만 일본어에서는 발음이 다르다는 지적을 받았습니다.)
백제의 초고왕은 재위기간이 166년에서 214년이다. [일본서기]와 연대가 맞지 않는다. 저 왕이 근초고왕이라면 재위 기간이 346년에서 375년이 되는데, 연대를 2갑자 내리면 364년의 일이 되기 때문에 연대가 맞는다. 특히 저 기사에 나오는 사람 중 막고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구수왕 조에 나오는 장군 막고해莫古解가 틀림없다. 따라서 저 일이 일어난 때는 364년으로 보는 것이 옳겠다.
위 접촉의 결과 신공황후 47년, 즉 365년에 백제는 왜에 사신을 보낼 수 있었다. 막고가 사신으로 갔다. 이때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백제 측의 공물이 신라 측의 공물에 비해 형편없어서 이를 따지자, 백제 사신은 이런 말을 한다.
"길을 잃어 사비신라沙比新羅에 이르렀는데 그들이 우리를 3개월간 감금했고 결국 죽이려고 했다. 그들을 저주하자 그것을 두려워해서 죽이지 않고 공물만 바꾼 뒤에 이 일이 알려지면 돌아오는 길에 죽이겠다고 해서 지금까지 침묵하고 있었다."
이에 왜는 신라에 사신을 보내 이 일을 책망했다고 한다.
위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백제가 왜에 가기 위해서는 신라의 영향권 안을 통과해야 한다는 점이다. 나머지 이야기는 신빙성이 전혀 없으므로 따질 필요가 없다. [일본서기]에는 신라 앞에 이런저런 말이 붙는데, 앞서 신공황후가 신라를 정복하겠다고 할 때도 고금신라栲衾新羅라는 말을 쓰고 있다. 혹시 신라가 여럿 있었던 것은 아닐까? (栲衾은 takuhusuma라고 읽으며 신라에 붙는 마쿠라고토바(枕詞=특정 단어 앞에 나오는 수식어)라고 한다. 沙比新羅(sahisira)는 草羅(sahira)라고도 적는 삽량주歃良州를 가리킨다는 의견도 있다. - 알려주신 모님께 감사.)
그리고 신공황후 49년 [일본서기] 연대 249년에 신라를 공격한다. 이것이 신공황후의 두번째 신라 공격인 셈이다. (솔직히 "일본을 공격한다"라는 농담만큼 뜬금없다.)
3월 왜군은 탁순에서 백제군과 합류했다. 그러나 군대가 적었다. 그래서 추가 군대가 백제에서 온다. 이 백제군을 이끈 장수가 목라근자木羅斤資다. 훗날 문주왕(재위 475-478)을 웅진으로 도피시킨 목협만치의 아버지다. 엄마야, 249년에 부대를 이끌던 장군의 아들이 475년에도 살아있다고? [일본서기]를 보다보면 이런 좀비들을 좀 만날 수 있다. 다음 회에 다른 사람을 소개하겠다.
목라근자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 이때는 429년으로, 3갑자를 내려서 보는 것이 옳다. 그러나 다음 구절이 문제가 된다.
백제-왜 연합군은 신라를 격파했다. 그 뒤 비자본(比自火+本), 남가라(南加羅), 탁국(口+彔)國, 안라(安羅), 다라(多羅), 탁순(卓淳), 가라(加羅)의 7국을 평정했다. 그뿐만 아니라 서쪽의 고해진(古奚津), 남만의 침미다례(忱彌多禮)도 정벌했고, 이 모든 것을 백제에게 주었다. 이 위세에 놀라 비리(比利), 피중(辟中), 포미지(布彌支), 반고(半古)의 4읍이 스스로 항복했고 이 또한 백제의 것이 되었다. 백제의 초고왕과 왕자 구수(뒤의 근구수왕)는 일본에 충성을 맹세하고 조공을 바칠 것이라 약속했다.
여기서 근초고왕과 근구수왕이 다시 등장한다. 이들의 등장이라면 연대는 2갑자를 내려서 이 일이 369년에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어느 쪽이 진실일까?
답은 쉽지 않다. 하지만 나는 이 일이 429년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목라근자의 등장에 더 비중을 두는 것이다. 그것은 이런 이유다. 신라본기에는 431년에 왜의 공격이 있었다고 나온다. 이 공격은 실패했다. 433년에는 백제에서 화친의 사절이 온다. 나는 목라근자가 바로 이 화친의 사절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당연히 신라 공격 같은 것은 있지 않았다.
위의 내용만 잘 봐도 알 수 있다. [일본서기]는 탁순이 일본에 우호적인 나라인 것처럼 썼고, 심지어 탁순에서 정벌군이 출발했다는 식으로 쓰고 있다. 그런데 목라근자가 정벌한 일곱나라 이름에 탁순이 들어가 있다. 탁순은 본래 우호적인 나라가 아니었던 것이다. 탁순을 정벌하지 않고 탁순에서 신라 정벌군이 떠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백제는 가야와 남방 정벌에 나서면서 신라와는 우호 관계를 맺은 것이다. 목라근자는 이때 우호의 표시로 신라 여인과 결혼하는데, 그 신라 여인의 아들이 바로 목만치(=목협만치=목리만치)다.
이렇게 되면 이 무렵은 비유왕 때가 되겠다. 비유왕 때에 이런 일에 대해서 감을 잡을만한 무슨 기록이 있을까?
비유왕 2년(428)에 왜국의 사신이 왔는데, 따라온 사람이 50명이었다고 한다. 이들이 가야 정벌에 어떤 정보를 제공했을지도 모른다.
비유왕은 다음해 가을에 중국의 유송에 사신을 파견한다. 중국과의 교류는 전전대왕인 전지왕 때 동진과 교류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전대왕 구이신왕 때는 중국에 사신을 보낸 기록이 없다. 전지왕은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진동장군백제왕의 관직을 제수받았고, 비유왕도 이 관직을 물려받았다. 이런 활발한 대외 활동은 백제의 남방 정벌에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 무렵 왜도 활발한 국제 외교를 펼치는 중이었다. [송서]에는 왜의 사신이 425년 와서 사지절도독 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 육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을 요구했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유송은 안동장군왜국왕의 지위만 내렸다. 안동장군은 진동장군보다 낮은 지위다. 유송은 백제의 지위를 높여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451년에 유송은 왜의 줄기찬 노력에 굴복해서 사지절도독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육국제군사의 직을 내려주었다. 백제는 빠지고 대신 가라가 들어갔다. 왜 처음에는 가라가 없었을까? 왜는 오국제군사가 되는 것보다는 육국제군사를 유지하기 바랐던 것 같다. 임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라를 다시 넣은 이유는 그것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다.
본론으로 돌아가자. 백제가 공략한 7국은 임나의 땅이었다. 흠명천황 23년조(562년)를 보면 알 수 있다.
춘정월, 신라는 임나의 관가를 쳐 없앴다. (한 책에 말하기를 21년에 임나가 망했다고 한다. 통틀어 임나라 하고, 세분해서는 가라국加羅國, 안라국安羅國, 사이기국, 다라국多羅國, 졸마국, 고차국, 자타국, 산반하국, 걸찬국乞湌國, 임례국稔禮國 합해서 10국이다.
붉게 표시한 세 나라가 신공황후기에도 나오는 나라다. 신공황후기에 나오는 7국이 가야 지방이라는 증거다. 562년은 진흥왕 23년이다. 이 해에 이사부와 사다함이 대가야를 정벌했다. 이 이야기는 뒤에 다시 하기로 한다.
364년 백제는 왜와 처음 접촉했다. 이 상황에서 바로 연합군을 결성한다든가 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또한 이 시기에 백제는 고구려와 갈등관계에 놓여 있었다. 369년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쳐들어왔다. 가야 정벌은 3월, 고구려의 침입은 9월이다. 백제는 평양을 공격해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는 전과를 거두고 있다. 정말 이 해에 북방과 남방의 전쟁을 동시에 수행했다면 대단하다고 할 수밖에 없겠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근초고왕과 일본 사신과의 동맹의 맹세와 같은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맹세에 후광을 더하기 위해 비유왕 대의 가야 정벌을 근초고왕 대로 옮겨놓은 것은 아닐까?
앞서 나는 이 가야 정벌을 429년의 일로 본다고 했다. 그것은 400년에 있었던 고구려군의 원정과 관련이 있다. 광개토대왕비에 따르면 고구려는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아 보기 5만의 대군을 파견한다. 이것이 바로 400년이다. 이때 고구려는 신라성에서 남거성에 이르기까지 가득찬 왜인을 몰아내고 임나가라의 종발성까지 함락시킨다. 이들 성을 지키는 일은 신라인들이 맡았다. 고구려 군의 일부는 신라에 남아 신라의 국정을 좌우하다가 눌지왕의 즉위 후 신라에서 철군한다. 눌지는 고구려의 영향에서 벗어나 신라 독자 노선을 걷는다. 이 이야기는 이미 [신라, 희망의 5세기]에서 한 바 있다.
소지 마립간 3년(481년)에 고구려의 침입을 받은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백제와 가야의 병력이 출동한다. 가야가 언제부터 백제와 같이 움직인 것일까? 각자 독자적으로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나선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