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후(韓侯)와 고조선(古朝鮮) 2

 

시경(詩經) 한혁(韓奕)에 한후(韓侯)의 위치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한혁(韓奕) 내에 지명(地名)으로 양산(梁山), 분왕(汾王)이 나옵니다.

려왕(厲王)이 성질이 사납고 잔악하며 막돼먹어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한후(韓侯) 땅인 체()로 도망하여 보호를 받고 살다가 14년 후 죽었다. 려왕(厲王)은 분수(汾水)가 흐르는 한후의 땅으로 도망하여 분왕(汾王)이라고도 불렸다.

 려왕(厲王)의 아들, 선왕(宣王)이 다음 왕으로 올랐는데 한후(韓侯)를 달래기 위해 려왕(厲王)의 조카 딸을 한후(韓侯)에게 보내어 통혼(通婚)을 한다. ()의 병사들이 한성(韓城)을 완성했는데 주공(周公)이 낙읍(洛邑)에 성주(成周)를 만들 때 은()의 병사들을 동원한 것처럼 한후(韓侯)가 연()을 멸()하고 연()의 병사에게 성()을 쌓게 한 것이다.

()나라 이동도

 

[출처] 나동현(羅洞鉉), 중국북방이족과 이맥 고구려(6) 2절 만리장성(萬里長城)과 이족(夷族)

()나라 이동

소공(召公) 첫 수도 소(; 기산(岐山)), BC 1027

→ ①차 이동 소( ; 옹현(雍縣), 환곡(桓曲))

→ ②차 이동 기( ; 태원(太原))

→ ③차 이동 소( ; 옹현(雍縣), 환곡(桓曲))

→ ④차 이동 조성( 胙城 ; 골주(滑州), BC 760년 전후

→ ⑤차 이동 기( ; 태원(太原)), BC 662년 전후

→ ⑥차 이동 마읍(馬邑), BC 320년 전후

→ ⑦차 이동 계( ; 연산(燕山), 북경(北京)지방)

→ ⑧차 이동 무양( 武陽 ; 이현(易縣) 부근), 팽창기 소왕(昭王) BC 311~ 279년 중


산융 분포도

위 산융 분포도는 고조선 변한 영역에 포함된다.  산융이라 중원에서 칭한 족속은 동이일 것이다. 

()의 요동(遼東)에서 소금이 나는데 이를 이라 하지 않고 라 한다. <관자(管子)>

산염(山鹽)을 끓여서 정제하므로 ‘() 삶을 자라 하며 태원(太原)을 그래서 이적(夷狄)들이 대로(大鹵)라 함은 큰 소금밭을 말한다.

 선왕(宣王) 4년이 무렵 낙읍(洛邑)과 호경(鎬京)을 중심으로 할 때 태행산맥 동쪽의 여()와 요()를 포함한 북쪽 분수(汾水)를 따라 태원(太原)의 위쪽 부근이 유도(幽都, 유주(幽州))가 되고 북국(北國)이며 한후(韓侯)가 거느린 추()와 맥()이 사는 곳인데 적적(赤狄), 백적(白狄), 장적(長狄)으로 불린 지역이었다.

 한후(韓侯)가 주()를 방문하는 경로에 양산(梁山)을 지나 호경(鎬京)에 가는데 양산(梁山)은 하수(河水)와 분수(汾水)가 만나는 하서(河西)지방이니 그 북쪽에 한후가 있고 또 한후가 백만(百蠻), 추맥(追貊), 북국(北國)을 다스리는데 북국(北國)은 화하인(華夏人)들이 낙수(洛水), 경수(涇水)의 북쪽과 분수(汾水) 중북부를 말하고 있으니 이 지역을 한후가 다스렸음이 확실하다.

 중국은 태행산맥(太行山脈)을 기준으로 산동과 산서로 나뉘어 지는데 동쪽에 사는 오랑캐를 동이(東夷)라 하였다. 태행산맥(太行山脈)의 갈래인 여량산맥(呂梁山脈)이 분하(汾河)를 따라 뻗어있고 여량산(呂梁山)이 있다.


한후(韓侯)와 고조선(古朝鮮)

 

증산도, 참 진리의 세계 http://blog.naver.com/gnbone/220270570656 참조한 글입니다.

 시경(詩經) ‘한혁(韓奕)’편을 깊이 생각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한혁(韓奕)은 한후(韓侯)하는 인물을 칭송하여 지은 시인데 우리의 상고사(上古史)와 관련하여 대단히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겨례와 관련된 부분을 검토해보고자 한다.

임금께서 한후(韓侯)에게 퇴()와 맥()을 맡기셨다. 한후가 엄()과 북쪽 나라들을 모두 맡아 이로서 그 수장()이 되었다. ”

王錫韓侯 其追其貊. 奄受北國 因以其伯.

 한후(韓侯)가 퇴(; ‘읽기 가능)와 맥()을 다스리는 통치자임을 알 수 있다. 여기 퇴()은 기록에 잘 보이지 않아 알기는 어렵지만 맥()과 함께 예()가 동북방을 대표하는 족으로서 예맥(穢貊)이라는 하나로 통칭한다.   

신용하 교수님은 고대 중국인들은 ’,’’,’’,’등으로 음차 표기했다가 변음되어 (Ye)’ 발음하게 되었다.‘고 하였고   고() 윤내현 교수님은 ()가 예()로 소리가 변화되기 쉬운 점에서 퇴()는 예()로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어쨌든 퇴()가 예()가 아니더라도 예맥(穢貊)에 속한다고 본다.

 예맥(穢貊)은 동이(東夷)이므로 이 들을 다스리는 한후는 고조선족(古朝鮮族)임을 알 수 있다. 한후는 엄()과 북쪽 나라들도 다스렸다고 하였는데 이 지역은 사기(史記) 조세가(趙世家) 조양자(趙襄子)의 산동 일대와 그 북쪽이다. 한후의 통치 영역은 중국의 북쪽에서 동쪽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으로 수많은 나라를 다스렸기 때문에 백만(百蠻) 즉 수많은 오랑캐라고 표현했다.

 시경에서 한후는 주나라 왕으로부터 작위를 받은 제후인 것처럼 노래하고 있지만 이것 사실일 수 가 없다. 한후는 수많은 거수국을 거느린 대국이었지만 후세에 중원이 천자의 나라로 행세하며 춘추필법(春秋筆法) 즉 대의명분을 밝히는 논법으로 왜곡하여 기록한 것일 뿐이다.



 서주(西周) 여왕(厲王) (BC 855 ~ BC841), 100 여개가 넘는 도시국가들이 나타날 때라 연()나라는 소국으로 태행산맥(太行山脈) 서쪽, 지금의 태원(太原) 부근에 도읍을 하고 있었다

그 동쪽의 산동반도에는 동이(東夷)의 국가들이, 지금의 북경 일대는 변한(弁韓; 번조선(番朝鮮))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변한의 도읍은 안덕향(安德鄕, 현재 하북성 당산시(唐山市))이었다. 이러 시대를 배경으로 한후 (변한의 단군)와 주나라 왕 사이에 인척관계가 맺어지는 놀라운 사건이 벌어졌다.

한후가 장가를 들었는데 주여왕(周厲王)의 생질입니다. 저 큰 한성은 연나라 군사가 완성하였다.”

韓侯取妻 汾王之甥. 溥彼韓城 燕師所完.

 한후는 연나라와 인척관계를 맺었는데 주()나라 분왕(汾王)의 조카를 아내로 맞아 연나라의 사위가 되었으며 연의 병사들이 한후의 큰 성을 완성해주었다는 내용입니다.  분왕(汾王)()나라 여왕厲王)을 말하는데 성질이 사납고 잔악하며 사람의 도리에 어긋나 막되어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분수(汾水)가 흐르는 한후의 땅으로 도망하여 얻은 이름이다.

 

한후에 관하여는 죽서기년(竹書紀年)에 두 번의 기록이 보인다.

 ()나라 성왕(成王) 12(재위: 기원전 1,100년경)

왕병(王兵)과 연나라 병사들이 한성(韓城)을 지었다. 왕이 한후에게 (작위를) 명하였다.

()나라 선왕(宣王) 4(기원전 824)

왕이 명하여 궤보(蹶父)를 한()에 보냈다. 한후가 내조하였다.

 

성왕의 병사와 연의 병사들이 한후의 성을 지었다고 한혁에서과 같은 내용을 말하였다.

궤보(蹶父)를 한()에 보내고 또 한후가 주나라에 온 것은 한혁의 내용처럼 한후가 궤보의 딸과 혼인하였기 때문에 서로 오고 간 것이다.

 위 두 기록에 보이는 한후는 시간적으로 270년의 차이가 있으므로 같은 사람이 아닌 것이 확실한데도 한혁에는 두명의 한후가 각각 있었던 일을 특정한 한명의 한후에 관한 일인 것처럼 기록하였다.

 사학자들 가운데 한후(韓侯)를 주()나라의 제후국인 한나라 제후로 보기도 하지만 이는 사실일 수 가 없다. 한나라가 제후국이 된 것은 전국시대가 시작된 서기전 403년으로 진()나라가 한(),(),()로 나뉜 때부터 이다. 그러나 한후는 그 보다 이런 4 ~6백년전의 인물이다.

또한 한나라는 공국(公國)인 진()나라가 셋으로 나누어진 작은 나라로 후국(侯國), 백국(伯國) 아래 자국(子國)이었다.   만약 한혁(韓奕)의 한후(韓侯)가 제후국 한()의 통치자였다면 한후(韓侯)’가 아닌 한자(韓子)’로 불러야 마땅하다.   실제로 주()의 제후국이었던 한()의 통치자들은 한무자(韓武子), 한선자(韓宣子), 한경자(韓 子) 등으로 불렸다.

끝으로 한후(韓侯)가 누구인지 고찰해 보면 한혁(韓奕), 죽서기년(竹書紀年)에 한후의 나라를 한()이라고 하였는데 한후는 삼한(三韓) 가운데 중국의 북쪽 및 동북쪽을 다스린 변한(弁韓), 변한의 단군(檀君, Dangur)이다.  

대한(大韓)의 기원, 한후(韓侯)

大韓民國, 三韓(진한(辰韓), 마한(馬韓), 변한(弁韓)) 


시경(詩經) ‘한혁(韓奕)’편과 동한(東漢)시대의 왕부(王符)의 잠부론(潛夫論)에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전국시대(戰國時代) 서주(西周) 왕실과 동성인 희성(姬姓)으로서 한()나라의 제후였던

환숙(桓叔)의 후손과 관련된 성씨는 모두가 희성(姬姓)의 후예로서 한씨(韓氏)이다. 옛날 ()주의 선왕(宣王) 때에 또한 한후(韓侯)가 있었으니 그 나라는 연()나라에서 가까웠다고 하였다.

옛 시경(詩經)넓고 넓은 한성(韓城)은 연나라 군사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고 하였다. 그 후에 (한후(韓侯)) 한국(韓國)의 서쪽에서도 ()을 한()이라고 하였는데 (한국(韓國)) 위만(衛滿)에게 공벌(攻伐)받아 바다로 옮겨가 살았다고 했다.

 

此皆韓後姬姓也. 中亦有對韓侯的記載: ‘昔周宣王亦有韓侯, 其國也近燕, : 普彼韓城, 燕師所完. 其後韓西亦姓韓, 爲衛滿所伐, 遷居海中.” [ 한왕부저(漢王符著) 잠부론(潛夫論) ]

 

한후(韓侯)는 후대의 진()나라에서 분리된 전국시대의 한()나라와는 다르다.

주평왕(周平王) 14(기원전 757)에 진()(한후(韓侯)) 한국(韓國)을 멸망하였다.

平王十四年  晉人滅韓. [ 금본죽서기년(今本竹書紀年) ]

 

시경(詩經) 한혁(韓奕)韓西에 대한 해석을 살펴보겠습니다.

 

1. 이병도(李丙燾), 한서(韓西)한동(韓東)’의 오기 라고 했다. 한후(韓侯) 한국(韓國)

조선(朝鮮)의 한씨(韓氏)를 다르게 인식함

2. 윤내현(尹乃鉉), 한서(韓西)고조선 한국의 서쪽에 있던 기자조선

3. 조선후기 실학자 한치윤(韓致奫 ; 1765~18140), ‘한후(韓侯) 한국(韓國)’이 위만에게

공벌당해 바다로 옮겨갔다.

4. 잠부론전교정(潛夫論錢校正)의 해당 주에서는 한서(韓西)는 조선(朝鮮)의 오기다.“

라고 했다. [ 청대(淸代) 왕계배(汪繼培) ]

5. 주선왕(周宣王) 때의 한국이 동천하여 조선(朝鮮)을 이루고 조선왕을 위만에게 공벌당해

남천하고 삼한을 형성했다. [ 명대(明代) 곽조경(郭造卿) ]

 

 정형진 선생은 적어도 기원전 756년 이후 기자(箕子)가 서로부터 왔다 해도 왕통이 기자(箕子)에서 한국(韓國)의 한씨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한(大韓)의 한()이라고 부르는 동북아시아에서의 뿌리이고 진한(辰韓), 마한(馬韓), 변한(弁韓)으로 한()을 붙이게 되었다.” 라고 강조한다. (, 三韓)은 바로 단군조선이 해체된 이후 그 후예들에 의해서 다스려진 나라였다.

 

역사학자인 동빈(東濱) 김상기(金庠基, 19011977)시경(詩經)’ 한혁(韓奕)편에 나오는 한국(韓國)은 처음에 섬서성(陝西省) 한성현(韓城縣)에 있다가 하북성(河北省) 고안현(固安县)으로 이동했고 다시 만주와 한반도로 이동했다고 주장했다.

    하북성(河北省랑방시(廊坊市고안현(固安县대한채촌(大韓寨村)  입구

북경(北京)에서 남동쪽으로 40km 즘에 하북성(河北省) 랑방시(廊坊市) 고안현(固安县) 대한채촌(大韓寨村)있다. 대한채(大韓寨)는 다른 말로 하면 '대한성(大韓城)'인데 한성(韓城)이 토성으로 남아있다. 이 마을은 회족(回族)들만이 집단을 이뤄 살고 있는데 인구는 약 1,300여 명쯤 되고 이들 회족들은 아직도 한족과 통혼을 잘 하지 않는다고 한다.

 

지역으로 관련있어 보이는 선우(鮮于)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968년 역사학자 천판(陳槃)이 펴낸 춘추대사표열국작성급존멸선이(春秋大事表列國爵姓及存滅)’라는 책이었다. 기존 사서를 근거로 중국 중원에 산재했던 춘추시대 170여 소국의 역사를 비정한 역사책인데, 바로 선우라는 항목이 있다.

선우(鮮于) 일명 중산(中山)이라 한다. 회남자(淮南子)는 우()는 혹 우()라 했다. 선우(鮮于)는 그 선조가 자성인데(其先子姓), 기자는 조선에 봉하고(以箕子封朝鮮), 기자의 둘째 아들은 우(; 핑산(平山) 추정)에 봉했다. 여기서 자손들은 조선의 선()과 봉지 우()를 따서 선우(鮮于)씨라 했다. (子孫因合 鮮于爲氏)”

 

19735최근 천진(天津) 무청현(武淸縣) 고촌(高村)에서 동한(東漢)시대의 선우황(鮮于璜) 비석(碑石)이 발굴되었다. 비석은 높이 2.45m, 81, 두께 12되었다.

 비문(碑文)에는 전서(篆書)로 연희 8(환제 연희延熹 8; AD 165)과 상단에 한나라의 안문태수 고 선우황비(漢故雁門太守鮮于璜碑)’ 그리고 “(선우)의 이름은 황이며, 자는 백겸인데, 그 조상은 은나라 기자(箕子)의 후예에서 나왔다.(君諱璜 字伯謙 其先祖出于殷箕子之苗裔~)” 라고 했다.”

 

중국 역사학자 리쉐친(李學勤)

최근 톈진(天津) 우칭셴(武淸縣) 가오춘(高村)에서 발굴된 선우황(鮮于)비는 선우씨는 상나라 기자(箕子)의 후예다’(鮮于氏系商箕子後裔)라고 했다.”

선우(鮮于)는 은()의 후예=기자(箕子)의 후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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