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tong.nate.com/hanger99

**  중국인들의 조선의 중국영토사실을 증명함.

  21.  장계석 총통이  (대한독립군)임시정부 의 이시영 전 부통령에게


   중국 전체가 당신들(조선인의) 역사무대(옛영토)인데 이런 역사도 모르고

   독립운동을 하고 있읍니까?




             한일합방이후 조선의 영토분할


. 대륙동쪽(남조선,또는 중국), 만주(만주국),한반도(조선총독부)는 일본이 분할지배,

  대륙남쪽은 서구열강(영국,프랑스,독일등)이 지배,

  대륙서쪽, 북쪽은 청이 각각 지배




  22.  장개석 총통이  백범 김구선생에게 한 만찬회장에서


     자기 고향이 옛 백제 땅(절강성)   이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 일제의 대륙침략에 따라 중칭(重慶)으로 후퇴한 장개석(蔣介石) 총통은 함께 피난 온 상해임시정부의 김구 주석 일행을 위로하기 위해 만찬에 초대했었다고 )


 23.  주은래수상은 (중국)동북 지역의 역사가 조선인에게 귀속된다


   (조선의 영토이자   그들의 역사이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24. 초대 문교부장관인 안호상(1902-1999)박사가  중국의  문학자이며 평론가인

     림어당(1895-1976) 선생에게

 

   "중국이 한자를 만들어  우리 나라까지 문제가 많다"

 

     고 하자 림어당 선생은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한자는 당신네들 東夷族 조상(고조선)

      이 만든 문자인데 그것도 모르고 있소?"라고 핀잔을 들었다고 한다."


 

  25,  "한글재단 이사장인 한갑수 박사가 미국 공군지휘참모대학에 입교

 

      했을 당시 같은 입학생인 중국 학자 서량지(徐亮之)가 한박사를 찾아와 말하기를

     "귀국 한민족은 우리 중국보다 더 오래된 역사를 가진 위대한 민족인데

 

     우리 중국인이 한민족의 역사가 기록된 포박자(抱朴子)를 감추고 중국

     역사를 조작하는 큰 잘못을 저질렀읍니다.

 

       본인(서량지)이 학자적 양심으로 중국인으로서 사죄하는 의미로 절을 하겠으니

      받아달라며 큰 절을 올렸다."

  26.  1930년대 장려화와 그 문하생들의 노력으로

     중국고금지명대사전이 편찬되면

     중국에서의 우리 조선의 영토와 역사가 완전히 중국인의 의해 조작되었다.

27. 정명가도(명으로 가려면 조선을 건너야 한다)


   황하이북(명)을 치기 위해서는 조선(=중국대륙)을 건너지 않고 갈수없는 구조.

   즉  명이 중국대륙이라면 바다를 통해서 직접 침략이 가능하기 때문.

   중국대륙의 중부,동부, 남부인 조선과 몽골,하북성의 명,청으로 갈라진 형국을

   말하는 것


... 조선의 민요에 낙양성 십리하에라는 구절....


28. (성주풀이)


낙양성 십리허에  높고 낮은 저 무덤은
영웅호걸이 몇몇이며   절세가인이 그누구냐
우리네 인생 한번가면   저기 저 모양 될 터이니
에라 만수                    에라 대신이야


저 건너 잔솔밭에          설설기는 저 포수야
저 산비둘기 잡지마라   저 비둘기는 나와 같이
임을 잃고 밤새도록       임을 찾아 헤매노라
에라 만수                     에라 대신이야


한 송정 솔을베어             조그많게 배를지어
술렁술렁 배뛰워놓고       술이나 안주 가득싣고
강릉 경포대 달구경 가세   두리둥실 달구경 가세
에라 만수                       에라 대신이야


(판소리 심청가)"

"황천길이 멀다더니 방문 밖이 황천이라


(만가)" 

"고관대작 다 버리고 북망산을 찾아갈 제


낙양의 고려의 수도(고려도경:서긍)이라 나오고 그 곳 북망산에는

 백제인 흑치상지(黑齒常之), 백제 의자왕의 아들 부여륭(夫餘隆),

고구려 연개소문의 둘째와 셋째 아들인 남생(南生)과 남산(南産),

남생의 둘째 아들 헌성(獻誠), 연개소문의 고손자 비(毖) 등이

묻힌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29.양사언의 태산가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마는
사람은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양사언

시대 조선
생몰년 1517-1584(중종12-선조17)
본관 청주(淸州)
응빙(應聘)
봉래(蓬萊)/완구(完邱)/창해(滄海)/해객(海客)
활동분야 문인, 서예가



놀라운 사실!

 조선의 중국영토인 강원도(산동성)에 바로 태산이 있다. 결코 중국(지나인)의

영역이 아니다. 조선시대에도 태산의 우리나라 고유의 산이다.


티끌모아 태산.....
갈수록 태산이다
.또는 걱정이 태산이다.


조선인들은 태산이 흔하고 누구나 잘알고, 흔하게 올랐던 산이다.



흔하게 사용하는 태산이 왜 중국대륙에 있는지 의심해본적은

없읍니까? 

해방이후 두고 온 대한민국의 산하입니다.

중국공산당에게 빼앗긴 우리의 강토입니다.


 30  장안의 화제

 장안은  배달(아사달), 고조선(평양), 고구려(평양), 고려(서경),조선(한성), 대한제국(한성)

  의 수도였던  우리나라 9000년의 도시입니다.

바로 조선의 중국영토 섬서성 서안시입니다.




   조선이 중국대륙이기 때문에 우리민족이  

 

  낙양,태산, 장안을 흔하게 사용함.

 


31. 대동여지도 서문(김정호)

   우리나라(조선)는 ... 길이가 두루 1만9백20리나 된다

    (조선이 만리지국으로 중국전체를 뜻하고 있다)


 蓋我東邦域 三面際海 一隅連陸 一萬九百二十里 凡三海沿一百二十八邑 總八千四十三里

[번역] 우리 동방 강역은 3면이 바다에 접하고 한 모퉁이가 육지에 이어져 있으며, 강토는 10,920리이며, 세 바다 연안은 도합 128읍에 총 8,043리이다





32. 신하멜표류기

    새롭게 고쳐쓴 신 하멜표류기(최두환 역주) 2003. 우석출판사


     남한산성의  높이가 2메일(3218m)였다고 한다.

     현재 한반도 남한산성은 400~500m의  산으로 맞지않음

     중국의 한성(서안)의 남쪽산들은 모두높이가 2000~3000m 이고 서남쪽은

     유명한 태백산(3767m,배달국의 시조산인), 남쪽엔 종남산(2604m, 목멱산,남산)

     이 있다.





                           조선 중국영토의 태백산


                 조선 중국영토의 종남산(남산,목멱산)

                        굉장히 험준하고 높은산임.


     (즉 병자호란때 청나라는 조선의 국경선인  황하  (압록강)을 건너 한성(서안)을

     치고 여세를 몰아 한성 남쪽의  남한산성을 공격한것이다. 중국의 남한산성이다)


33. 서거정(1420~1488)의 성삼문의 정원을 보고 지은 가산에서   

    정원을 보면서 (중국의 지명인) 형악,여산,태산,화산,동정호,팽려호를 보는

     듯 했다고 한다

     수려한 금수강산의 조선의 산야를 보고 비유한 것이다. 즉 중국이 조선의

    영토이었음에 가능 하다.


34. 김수온의 성현의 석가산에서

   숭산(중국 하남성 낙양시), 화산(섬서성)을 보는 듯하다고 했다. 조선의 영토에

   속하는 산들이다.


35. 예수회 선교사 알드신부(1735) 의 조선통사 4권중 조선편

   한성은 조선의 수도로 북위 36도에 있으며~

   즉 위도상 북위 36도와 경도상 북경보다 10도 동쪽이라 하여 한반도가 아닌

   중국영토의 섬서성에 있음이 드러났다.

   (지금도 섬서성과 산서성 인접지역에 한성이라 표기되어 있다)

 

 36. 새롭게 고쳐쓴 신 하멜표류기(최두환 역주) 2003. 우석출판사 (20번~25번 참고)

     11월 하순에 한강에 얼음이 두껍게 언다고 함. 이 한강은 황하 중류를 뜻하며,

   현중국에선  강의 기능을 살리기 위해 얼음을 일부러 폭파를 하여 없앤다 한다.

   한반도 한강은 11월에  거의 얼지 않는다.


37. 청나라는 산서성북쪽에 위치하였다.






38. 조선에는 야자나무와 파인애플이 즐비하였다.

    제주도는 1990년대부터 실내등지에서 특수재배로 파인애플을 키워왔으며,

   산과 들에 원래  없었다. 조선의 중국남부영토을 뜻하며,

   이곳은 야자나무등이 모두 자연산이다.


39. 조선의 인구(1500~1600년대)는 1200만에서 1300만이었다.

  이는 그당시 조선의 중국영토의 만리땅이었을때 가능하다. 한반도는 말도 안된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사회경제생활 이야기)
    지은이 / 한국역사연구회
    펴낸이 / 정성현

조선시대의 호구통계에 기초하여 실제 인구를 추정한 연구에 의하면 조선시대의 인구는
1900년에는 1700만, 1910년대에 1750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연구에서 제시된
조선시대의 호구통계와 추정 인구 치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시대 인구변동(호구자료통계와 인구 추정치)>
1393년(태조 2)에 호구자료 통계는 301,300명이고 이에 따른 인구 추정치는
5,572,000명이다.
1440년(세종 22)에 호구자료 통계는 692,475명이고 이에 따른 인구 추정치는
6,724,000명이다.
1551년(중종 6)에는 호구자료 통계가 없었고 인구 추정치는 10,010,000명이다.
1543년(중종 38)에 호구자료 통계는 4,162,021명이고 이에 따른 인구 추정치는
11,643,000명이다.
1642년(인조 20)에 호구자료 통계는 11,649,012명이고 이에 따른 인구 추정치는
10,764,000명이다.
1744년(영조 20)에 호구자료 통계는 7,209,213명이고 이에 따른 인구 추정치는
18,275,000명이다.
1843년(헌종 9)에 호구자료 통계는 6,703,684명이고 이에 따른 인구 추정치는
16,632,000명이다.
1910년(융희 4)에는 호구자료 통계가 없었고 인구 추정치는 17,427,000명이다.
  이것을 보면 조선초기-중종(1400-1590)까지의 인구증가율과 병자호란 이후
현종초(1639-1666)까지의 인구 증가율이 상대적으로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의
인구가 1천만 명을 돌파한 시기는 대체로 1500년 전후의 시기, 즉 16세기 전후임도 알 수
있다.


40. 조선에는 악어가 많고 물소도 있었다.

    조선의 중국남부영토의 이야기다. 한반도는 절대 아니다.


41. 동국여지비고

    한성의 둘레는 18km,  한성 4대문밖에 창경궁성, 경희궁성이 있었다

    현 서울에는 창경궁,경희궁이 모두 4대문 안에 있다.

     (조선의 중국영토 섬서성의 한성을 뜻한다)


42. 조선의 영토(1800년대) 지도 : 러시아제작.  제목="  조선의 엄청난 지도!"

출처 : Tong - hanger99님의 기본통

    조선의 영토가 만주를 포함하여 한반도, 중국전체를 차지한 것을 알수있다.

 

[출처] 시대소리뉴스 www.sidaesori.co.kr


<근대 한민족사 엑스파일> 대륙조선은 어떻게 한반도로 축소되었나 ?

대륙조선의 멸망, 대륙-반도의 분리, 한국전쟁, 그리고 유태-지나의 결탁 / 동북삼성 지나족은 1948년 공산화 이후 식민된 것 / 끊임없이 자행되는 한민족 근거지 파괴, 최종종착역은 ??

치우

[편집자주]

동북공정의 파고가 거세다. 동북공정은 애초에 정치공정으로서 시작되었지만 학술공정인 것 처럼 위장되었다. 한국 외교부를 대표한 반기문은 겉으로는 8시간 동안 중국당국과 동북공정문제를 논의한 것으로 보도되었지만 실제로는 할 말이 없었다. "조용히 추진해 달라" "한국정부의 입장을 고려해 달라"를 제외하곤..강단사학은 이 문제에 대해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사실상 없다. 게다가 숭미 반기문이 외교적으로 미국과 마찰을 부를 일을 할 턱이 없다. 외교부는 지금도 한민족공동체가 실질적으로 작동하는 것을 막고 있다. 학술도, 정치도 동북공정에 대응할 수 있는 자세도 역량도 되지 못하는 것이다.

고구려재단은 동북공정에 허겁지겁 대처하기 위해 급조된 바 있다. 기어코 동북아 역사재단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제대로 된 역사학자들이 거의 없다. 역사문제의 "정치적" 해결을 시도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문제의 정치적 해결은 중미협력체제라는 국제정치적 외압에 의해 그 틀이 주어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애초에 동북공정의 실체인 정치적 해결이라는 목표에 맞추어 학술도 국제정치도 호흡을 맞추어 나가고 있으며, 이러한 과정을 한반도에 강요하기 위한 체제가 구축되어 있다. 6자회담은 북핵을 빌미로 중국의 한반도, 특히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제도화하는 동시에 한반도의 대륙으로부터의 고립을 철옹성처럼 죄기 위한 틀로 작동하고 있다.

이러한 국제적 역사왜곡 음모가 일거에 백일하에 드러났으니 그것이 바로 "백두산은 우리땅" 카드섹션이었다. 유태-지나-숭미 국무성 2중대 한국외교부의 행각이 일거에 폭로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향후에도 수십년간 한민족의 뇌리에 생생하게 살아서 작동하게 될 것이다. 현재 진행중인 역사왜곡은 단지 역사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것은 한민족의, 대한민국의 주권의 현시를 봉쇄하는 차원에서 전개되고 있다. "백두산은 우리땅"은 주권억압에 대한 통렬한 봉기였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이러한 정치적 음모에 대해 각성케 하는 것과 학술적으로 역사왜곡에 대응하는 것이다. 가장 강력한 증거는 대륙이 온통 한민족사의 흔적 투성이라는 것이지만 역사는 또한 문헌과 유물과 타당한 해석으로 설득력있게 설명되어야 한다. 강단사학은 애초에 틀린 학문이며, 밥그릇 사학에 불과하다. 대륙사학은 이제 이 험난한 시대가 요구하는 필연이다. 또한 국제정치 차원에서 자행되고 있는 한민족 약소국화 및 주권박탈 음모에 대해 그 정치적 의식을 지속적으로 일구어내야 한다. 이 두박자가 갖추어져야만 동북공정에 대항할 수가 있다.

이 글은 대륙사와 반도사의 통합에 대한 폭넓고 깊은 통찰이라 생각된다. 최근 지나정권의 혈통적 기반이 지나-유태 혼혈이라는 점이 부각되고 있다. 1935년 만주에서는 이스라엘 건국 전에 유태국가의 건설이 기도된 적이 있다. 유태자본의 동아시아 집결이 가시화되고 있다. 중미협력체제가 본격적으로 가시화되기 시작하였다. 역사적 과정 속에서 한민족은 고통받고 있다. 매국노들은 창궐하는데, 대한민국 국민은 한민족의 단결은 고사하고 아직도 숭미반북에, 겸손한 역사관에 매몰되어 있다. 적극적인 가설의 개발 및 기존사료에 대한 적극적인 해석을 통하여 우리는 이 난국을 돌파해야 한다. 여기에 시대소리가 대륙조선사론을 새해벽두부터 간판으로 삼고 정면돌파를 시도하는 뜻이 있다. 국제적인 환경도, 국민의 의식도, 정권의 의지도, 학문적인 여건도, 심지어 시간도 우리의 편은 아니다. 그러나 단 하나 믿는 것은 한민족의 역사와 문명은 지난 5천년 이상 동아시아에서 시행되었고 번성하였다는 점, 바로 그것이다. 여러분의 일독을 권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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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때부터 우리는 백제,고구려,신라는 한반도와 현재 만주라고 불리는 지나족들이 차지하고앉은 동북삼성이라고 배워왔다.

과연 이것이 사실일까?

우리가 배운 역사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우리가 우리조상들이 기록한 역사서를 해석하지않고는 알수가 없다.

단지 학교에서 선생들이 가르쳐주고 신문방송에서 매일같이 내보내는 기사를 보며
아하 그렇구나 하고 믿는것뿐이다.
결국 학교에서 한자교육을 등한시하게되면 우리 스스로는 조상들의 역사를 해석할수가없다.
단지 권력을 장악한자들과 그들과 짜고치는 매국노 언론세력들에게 세놰당하는길밖에 없다.

일제후 해방된후에 아직까지도 우리나라 역사학계는 일제가 조작한 날조된 역사를 가르치는 식민사관의 후예들에게 장악되어있다는 것은 역사에 관심이있는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있을것이다.

이자들은 절대로 우리 자라는 어린아이들이 한자를 익히는것을 달가워하지 않을것이다.
만약 어린아이들이 한자를 익혀서 조상들의 숨겨진 역사서를 해석할수있다면
역사의 진실이 밝혀지기때문이다.

우리는 학교다닐때 우리역사가 신라의 김부식이쓴 삼국사기에 바탕을 두고있다고 배웠다.
과연 우리가 학교다닐때....역사선생이 삼국사기나 그외 역사책의 원본 한문을 학교에서 가르쳐준적이 있는가?

나는 거의 보지못했다. 거의다가 이랫고 저랫다는식으로 한글로 써있었을뿐이다.

결국 우리는 우리조상들이 쓴 한문의 원본을 본적이 거의없이
역사라고 배워온것이다. 이런상태의 역사교육은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하다.

지금 지나족이 차지한 중국대륙에 수많은 "고려성" 과 "백제향"이라는 지명이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지명이라는것은 그지역을 차지하지않고는 만들어지지않는다.
현 중국대륙 최남단의 배트남북쪽 광시자치족지역에 백제향과 수많은 백제연관지명이
존재하고.....하북지방과 몽골에 아직도 많은 고려성의 흔적과 이름이 존재하는것은 이지역이 분명이 고구려와 백제의 영토였기 때문이다.

실제 현재 지나족이 황하강 이북에 살게된것은 근세 100여년에 걸쳐서 이루어졌다고본다.
우선 1948년 현 중공이 개국되기전까지.....현재 만주라고 일컫는 동북삼성에는 지나족이 거의 살지않았다.

모택동이 공산화한후에 남방의 지나족을 수천만명을 동북삼성으로 이주시킨것이다.
현 동북삼성지역은 본래 우리조선인,고려인들이 대대로 살아왔고

일제때 일제의 핍박을피해서 소수가 이주해갔다는것 역시 날조에 가깝다고본다.
조선시대에도 역시 현재 동북삼성(만주)지역은 우리민족의 무대였던것이다.
이것을 일제가 원래 현 동북삼성은 여진족이 살던지역이라고함으로서 조선인과 무관한지역으로 역사를 날조했고
식민사관의 후예들이 이것을 학생들에게 주입식교육으로 세뇌시킨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국제적인 영어명칭은 "KOREA" 이다.
그러나 수천년이상 서양이 우리민족을 부르는 명칭은 "The Corea"였다.

누가 이것을 바꾸었는가? 일본인들이 일제때 바꾼것이고 이것을 우리는 아직도
The Corea로 고치지않고 Korea로 쓰고있는것이다.

이외에도 원래 태전이었던것을 일제때 대전으로 바꾼것을 아직도 그대로 쓰고있는등
아직도 우리는 일제로부터 제대로 해방이된것이 아니다.
단지 매국노들은 일본이라는 말에서 미국이라는 말로 말만 갈아탔을뿐이다.

The Corea는 제국이었다.

서양과 아랍인들은 아직도 우리를 Corea라고 부른다.
동북아끝쪽에 귀퉁이에 있는 나라가 The Corea였다면......과연 대륙끝의 서양인과 아랍인들이 우리의 존재를 알고서 Corea라고 불렀을까?

만약 현재 교통수단이 말밖에 없다면 우리가 유럽끝쪽에 있는 포르투갈의 존재를 알수있을까?
로마는 알수있겠지만 포르투갈은 알기힘들것이다.
결국.....고려가 동북아 끝자락의 반도귀퉁이에 있었다는것은 새빨간 날조인것이다.

고려는 제국이었으며 현 한반도와 만주...중국대륙대부분...그리고 현재 중앙아시아 키르키즈즈탄, 카자흐스탄에 걸치는 대제국이었던것이다.

이것은 거란의 위치를 생각해보면 명확해진다.

현재 거란과 돌궐의 후손이 바로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 우스베키스탄등이다. 이들역시 자신들이 거란,돌궐의 후손이라고 말하고있다.

또한 우리와같은 동이족의 정통후손들이라서 우리와 생김새도 거의 구분이 안가고
(물론 세월이 오래흘러 러시아와 아랍피가앾간은 섞였지만).....이곳지역을 자세히보면 우리 상고사와 연관이있는 지역명이 수도없이 많다.

다시말하면 거란과 돌궐의 위치는 원래부터...현재 중앙아시아 천산유역이었던것이다.

그렇다면 고구려와 고려의 위치는 자연스럽게 몽골과 현 중국 양자강이북...동북삼성.한반도에 이르는 지역이다.

서울대 박창범교수가 컴퓨터를 이용해서 측정한 삼국시대의 천문기록은
고구려의 위치가 바이칼호,현 외몽골,내몽골지역, 현재의 신만주(동북삼성),등으로 나오고

백제는 산동반도,화북지방,한반도,요서지역으로 나온다.
박창범교수의 과학에근거한 사료증명이 이를 뒷받침하고있는것이다.

몽골인들과 키르기스스탄인들이 전세계에서 우리와 가장비슷하게생긴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혈통이 같기때문이다.


식민사관의 일제후예들이 강단사학을 장악하고 말로는 우리를 속일수있다....
그들이 1945년이후로 장악해온 신문과 방송을통해서도 역사를 속일수있다.......

그러나 과학은 속일수가없기에 박창범교수가 컴퓨터로 측정한 삼국의 위치는 대륙과 한반도를 다 포함하는것이며......

피는 속일수없기에 삼국시대에 우리와 같은 한민족구성원이었던 몽골과 부리야트,키르기스스탄인들은 우리와 똑같은 생김새를 하고있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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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대륙조선사이트(http://cafe.daum.net/chosunsa)를 접한것은 얼마되지않는다.
대륙조선은 한반도가 대륙조선과 전혀다른국가였다고 완전히 분리하는 주장을 하는사람들도있는데

나는 이것에는 동의하지않는다.
산동반도에서 보면 한반도가 보이고..배타면 불과 몇일이면 도달하는 한반도가 대륙의 영향권과 전혀 별개일수는 없는것이다.

베이징과 중국남부의 광동성은 산동반도와 한반도보다 몇배 더 먼데 그럼 어떻게 한국가가 될수있는가?
결국 근세말까지도 조선조정이 중국 장안(Xian)에있었다면.....한반도역시 조선제국의 영향권이었거나 조선연방의 일원....혹은 몽골(여진)인이었던 이성계의 이씨조선에
완전히 흡수되지않았던 고려의 후손들이 연방의 형태로 느슨하게 대륙에서 대피해와서 대대로 살아왔던 지역일것이다.

그러나 나는 근세까지도 양자강이북...최소한 현 북경지역과 장안지역등의 화북지역과 한반도만큼은 청의 영역이 아닌 조선의 영역이었다고 본다.

현재 시안부근에 있는 이집트보다도 수천년 더 오래된....크기도 이집트피라미드보다 몇배더 큰 피라미드를 중국정부가 일반인의 접근을 통제하고 숨기는 이유는
바로 이 피라미드를 조사하면 대륙전체가 한민족의 땅이었다는 엄청난 진실이 밝혀지기때문이다.

지나족이 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친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지나족들은 공산화이후 역사를 거의 가르치지않았다. 왜일까?

대륙의 역사가 바로 한민족의 역사이기때문이다.

그 대륙을 중국 광동과 복건성에서 세력을 북으로 넓힌 지나족과 현재 일본정권을 장악한 그 지나족의 갈래인 일본집권층이
구한말 공산주의와 제국주의를 통해서 대륙을 차지한것이다.

우리는 만주가 현재의 북한위쪽의 동북삼성이라고 배웠다.
이것은 사실인가?

그리고 우리는 여진족이 대대로 동북삼성에서 살아왔고 누르하치는 압록강 백두산주변에서 발원했다고 배웠다....

사실일까?

그렇다면 현재 동북삼성에 만주족의 후손들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어야하고...그들은 만주어를 구사할수있어야한다.

그러나 현재 중국에서 만주어를 구사할수있는 만주족들이 사는곳은 동북삼성이 아니라 내몽골이다. 옛날부터 오르도스라고 불리는곳이고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집안이 발원한곳이다.

왜 만주족은 동북삼성에 남아있지않은가?

동북삼성에 남아있는 소수의 원주민은 우리와같은
퉁구스계이긴 하나 그들은 만주어를 전혀 구사하지못하고 퉁구스어를 구사한다.

결국 현재 동북삼성이 만주라는것은 한민족의 역사를 철저히 왜곡하기위해서 날조한것이다.
원래 우리 주무대가 대륙과 그중에서도 장안(시안)이었던것을 날조하기위해서.....


우리역사를 반도로 축소하기위해서....대륙의 장안을 반도의 서울로 옮겨놓고...

대륙서부 오르도스에 있었던 여진족의 근거지를 현재의 동북삼성지역으로 위치만 옮겨놓은것이다.

여진글자를 보았는가? 겉으로보기에는 몽골문자와 거의 구분이 가지않는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여진이 몽골이고 몽골이 바로 여진인것이다.
바로 이성계가 여진이고 이성계가 몽골인것이다.

우리민족과 몽골족,여진족은 전부다 한민족...전부다 몽골족이고 단지 세밀한 갈래일뿐
그뿌리는 전부다 한뿌리로 한족,몽골족인것이다.

이것을 지나족과 그뿌리가같은 현재 일본의 권력을 장악한 왜족이

한민족을 갈기갈기찢어놓기위해서 한국인과 몽골인을 갈라놓고.....

몽골인과 여진인을 갈라놓고.....

한민족과 거란족을 갈라놓고....
거란족과 돌궐족과 흉노족을 또 갈라놓고......몽골인과 말갈인을 또 다른민족인것처럼
갈라놓은것이다.


이렇게 갈라놓으면.동이족은 전부 다른지역에 사는 다른민족이 되어서 원래 대륙이 동이족이 주인이었다는 사실을 숨길수있기때문이다.

고구려인이 바로 말갈인이고....고구려의 후손이 바로 현재의 우리와 같은 핏줄인 몽골인이고 돌궐이 바로 거란이고 거란이 바로 몽골과 거기서 거기인것이다.

그때그때 이합집산에 의해서 세력을 재편했을뿐.....그 뿌리는 바로 천산산맥(현 키르기스스탄)지역의 아사달에 도읍을 정한 단군(Tengri) 후예들인것이다.

이성계의 초상화를 보았는가?

청색의 곤룡포다...청색은 바로 여진과 몽골의 상징이다.

몽골의 상징이 바로 징기스칸의 심볼인 푸른늑대다.

결국 여진과 몽골은 한뿌리고 한민족이기때문이다.
오르도스지방은 현 내몽골지역인데..여진과 몽골을 구분하는것자체가
바로 쪽바리들이 심어놓은 식민사관,반도중심사관에 넘아가는것이다.

현 동북삼성이 진짜 만주고 진짜 여진족의 발원지라면.....현몽골지역에 사는 몽골인들과 여진을 다른민족으로 보는것이 타당해진다.

그러나 원래 만주가 신강위구르 근방의 내몽골지역이고. 바로 대륙조선이 있었던 장안(시안)의 서북쪽지역이었다는것을 알게되면....
몽골과 여진은 분리되는 민족으로
볼수없다는것을 알수있다...내몽골지역이 겹치기때문이다.

한반도처럼 산악지역도아닌 내몽골초원지역에서 여진과 몽골을 분리하는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을 일제와 지나족은 한민족을 갈기갈기찢어놓기위해서 ...
청(몽골)이 대륙을 제패했을때는 청이 몽골을 격파했다고 날조한것이다.

이렇게 일제와 지나족은 만주를 현재의 동북삼성지역으로 옮겨놓고...여진족이 거기살았다면서
여진과 몽골이 다른민족인것처럼 역사를 날조하고..

.다시 우리민족이 대륙과 무관한것처럼 하기위해서
여진과 우리민족을 다시 갈라놓은것이다.

여진(몽골)은 우리와 한뿌리로...단군의 후예지만 단지 유목생활을 고집한 또다른 형제들일뿐이고
우리는 같은 환인의 후손이지만 농경과 유목을 병행하면서 한반도로 차츰차츰 지나족에 쫏겨들어왔고 구한말 서양세력을 주도하던 영국과 미국,러시아의 유태인세력과 이 유태인서양세력의 도움을 받은 지나족 공산주의세력과 왜족에의해서 대륙의 근거를 완전히 잃어버린것이다.

내가 유럽에 체류하고있을때 중국 칭화대출신을 만난적이있는데 역사얘기가 나왔는데 징기스칸이 누군지를 몰랐다.

.나에게 징기스칸이 누군지 가르켜달라고하는것이 아닌가?
칭화대는 중국최고의 명문인데 징기스칸을 모른다니.......그의 말은 역사를 별로 배우지 않았단다.

이것이 바로 중국공산당의 현실이다.

그들은 대륙에 자기역사가 거의 없기때문에 역사를 일부러 가르쳐오지 않은것이며
이제 차지한 대륙의 정통임을 날조하기위해서 동북공정으로 대륙이 주근거지였던 고구려역사를 훔침으로서 우리역사자체를 훔쳐서 대륙의 주인행세를 정당화시키기위한것이다.

이성계가 몽골인(여진인)이라해서 우리가 이성계를 다른민족으로 보는것도 식민사관의 장난질에 넘어가는 것이다.
이성계가 몽골인(여진인)인것은 확실하지만....몽골인(여진인)자체가 바로 우리와 한핏줄인 한민족인것이다.
요즘으로 치자면 경기도인(고려인)이 차지하고있던 대륙정권을 경상도인(이성계)가 찬탈한것에 지나지않는다.

홍건적이 침입해와도....왜적이 침입해와도.....왕은 몽진피난길에 오른다.

몽진이란 무엇인가? 몽골쪽으로 피신하는것이 바로 몽진이다.

홍건적은 바로 꽝똥지역에서 발호한 지나족이고...

왜적역시 근세에 일본섬으로 대량이주하기전까지
대만,복건성,광동성,필리핀등지에 근거하며 해적질하던 지나족의 일원이었으므로

이들이 난을 일으키면 우리조상들의 본래 근거지인 오르도스지역..몽골지역으로 피신하는것이다.

현재의 반도서울에서 평양이 몽진이 아니고.......
중국 장안(시안,Xian)에서 몽골지역으로 피신하는것이 몽진이다.

그곳은 바로 우리 민족조상 단군의 근거지이고......

유목지역에는 언제나 우리핏줄인 유목부족들이
웅거하고있기때문에 유사시 원군이 되어줄수있기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렇지않다면 장안(시안)에서 현재의 동북삼성이나 타이완으로 도망가지 왜 서쪽인 내몽골로 피신할까?

중국공산화의 과정을 보면.........역사의 진실의 단편을 볼수있다.

모택동은 어디출신인가? 바로 후난성(호남성)출신이다. 호남성은 어디인가?
바로 지나족이 웅거하고있던 꽝똥지역이다.


손문이 어디출신인가? 역시 꽝똥출신의 객가다....객가는 누군가? 바로 꽝똥지역에서 근거하는 중국 유태인 혈통들의 근거지이며.....구한말에 유태인서양세력과짜고 조선세력을 대륙에서 몰아낸자다.
손문이 공부한곳이 바로 유태인들의 근거지인 영국과 미국이다.

또한 손문은 러시아의 스탈린과
밀접하게 교류한인물이다. 모택동이 튀어나오기전까지...

스탈인이 누군가? 바로 유태인이다. 스탈린은 Georgia에서 러시아로 이주한 유태인이다. 그러기에 2000만이 넘는 러시아인을 죽일수있었던것이다..

자기민족이 아니었기때문에..

이 손문이 바로 대륙조선을 무너뜨리는데 결정적역할을 했다.
그뒤를 장개석이 이었고..

...유태인세력의 도움으로 대륙조선을 축출할수있게된후에
누가 대륙을 차지하느냐를 놓고 싸운것이 바로 손문의 똘마니 장개석과 모택동의 싸움인것이다.

모택동이 한 대장정의 루트를 본적이 있는가?

중국에서 옛날부터 끈질기게 살아온 유태인혈통들이라는 말들이 많은 꽝똥 객가 지나족의 근거지인 꽝똥에서 쓰촨지역등의 엄청난 산악지역만을 골라타고 올라가서.

....대륙조선의 근거지였던
중국장안(시안)에서 장개석군과 일전을 치르고 이긴후에 대륙을 차지한다.

결국 장안이 대륙의 핵심이었다.

장안을 차지하는자가 대륙을 차지하기때문이 아니었을까?

조선이 대륙의 중심이었을때....대륙의 남방은 지나족이.....오르도스지역은 청나라가....
요서지역과 화북지역,서안지역은 여전히 대륙조선의 영향권이었을것이다.
한반도는 대대로 고려인,조선인의 피난지였을것이고....


요즘같이 교통이 발달한때에도 미국같은경우만 보아도 대륙끝에서 끝까지 갈려면
차로 일주일이상 가야한다. 말이라면 몇달가도 부족할것이다.

그런데 중국 대륙전체를 청나라가 차지하고 통치했다는것은 새빨간 역사의 날조다.

근세까지 대륙은 조선황제(장안(시안))를 중심축으로하는 느슨한 연방체제였을것이고......
청나라와 지나족은 그 연방의 구성원이었다고 본다.

모택동이 장안을 장악하고 중국의 수도를 베이징에 정한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왜 날씨도 춥고..대륙의 동북쪽에 치우쳐있으며....자신의 근거지인 남부 광똥성의 호남지역과도 엄청나게 거리가 먼 북경에 수도를 정했을까????????????

그것은 북경은 대대로 한민족(몽골족,거란족포함)의 핵심연결고리지역이었고..
중국대륙을 지배한 유목민족의 전략거점이었기때문이다.

이 전략거점을 끊어버리고 지나족의 대륙지배를 공고히하기위해서
모택동은 중국대륙의 중심인 우한이나 충칭,또는 지나족의 본거지인 광뚱이나 스촨의 청뚜지역이 아닌 몽골리안 루트의 핵심요충지인 북경에 수도를 정한것이다.

만약 모택동이 수도를 동해안의 가운데인 상해나....자신의 지지기반이 강한 지나족지역인 꽝뚱지역에 수도를 정했다가...북방에서 한민족과 몽골인들이 다시뭉치면 대륙은 다시 유목족이 장악하기때문이다.

이것을 막기위해서 모택동은 몽골리안루트의 요충지인 북경를 장악하고 동북삼성에 수천만명의 지나족을 이주시켜서.....한반도 한민족과 대륙한민족(몽골,키르기스스탄,카자흐스탄,부리야트)의 연결고리를 완전히 끊어버린것이다.

여기에다가 대륙조선을 망하게만드는데 지나족을 도와준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를 다시 둘로 갈라놓은것이다.

거기에 그치지않고......한반도에 대륙조선을 이식하고 역사를 날조하고
20만권에 이르는 정사책을 불태우거나 일본으로 가져가고 지나족사대에 물든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달랑 두권만 남겨두고(삼국사기도 조선왕조와 일제때 상당히 많이 조작되었다고 하는것은 재야사학자들에 의해서 밝혀지고있음).....

여기에 일제가 역사를 날조해왔고
아직도 그 일제 후예들이 강단사학을 장악하고있는것이다.

대륙조선을 붕괴시키고 대륙을 차지한 지나족......그리고 지나족을 도와서 조선제국을 무너뜨린 유태인이 지배하는 미국과....유태인들이 공산혁명을 통해서 장악한 유태러시아 공산정권은

연해주에있던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이주시켜서 한민족의 연해주,만주지역 영토를 뺏기위해서 수작질을 벌이고.......유태인혈통인 트루먼은 유태인 스탈린과의 교감하에 .....김일성을 유인하는 전술을 써서 한국전쟁을 발발시킨다.

유태인들의 꾀임에 넘어간 김일성은 얼씨구나 좋다구 남침하고......

미국의 개였던 미국시민권자 기독교도 이승만은 기다렸다는듯이

서울을 지킨다고 사기치며 서울시민들이 한강다리를 건너지
못하도록 한강을 폭파하고 저먼저 도망가버린다.

한강다리 폭파하고 도망간 이승만이 제일먼저 한일이
일제의 주구였던 김창룡이를 시켜서 자신에게 저항하던 민족주의자들을 빨갱이로 몰아서 그 전쟁와중에 제일먼저 대전교도소에 수감되어있던 이승만의 반대세력을 만명가까이 학살해버린다.

내 개인적인 견해는 이승만은 김일성을 유인해서 북진통일하자는 유태인들의 꾀임에 빠졌던것같다..........

그렇지 않고서야..6.25발발전에 이승만이 똘마이들과 북진운운하며
평양에 몇일이면 도달할수있다는둥의 전쟁암시 발언을 할 이유가없고

당시 전방에 국지전이 벌어지는 살벌한상황에서 대다수의 전방군인을 후방으로 휴가보내서 김일성을 유인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모택동이 6.25때 보낸 중공군의 상당수가 대륙에 남아있던 조선인들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그 대륙조선인들은 총도 안주고 꽹가리하나 달랑 쥐어주고 뒤에서 총을 갈기며 전장 터로 내몰았던것이다.

당시 모택동의 뒤를 이은 등소평이 6.25때 감군참모인가로 참전한것으로 아는데.....
대륙에 남아있던 조선인들을 청소하는데............감독관으로 등소평이 참석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고 본다.

등소평이 누군가? 손문과같은 객가출신이다. 등소평이 중국에 오랫동안 거주한 유태인혈통이라는 사실은 대만의 역사학자들에의해서 이미 언급된바 있다.

중국공산당은 극히일부만 제외하고는 대륙의 역사를 모른다......

대륙의 역사는 대만인들이 오히려 더 잘안다. 대륙조선왕조의 역사책과 유물들을 장개석이 전부 가지고 떠났기때문이다.

결국 한민족과 대륙조선의 진짜 역사책은 일본황실과...대만국립도서관...그리고 영국,미국,Israel에 거주하는 유태인들의 서재에서 찾아야 할것이다.

유럽이나 미국의 서점에가보면....서양인들이 쓴 중국여행참고서적이 많다.

그런데 그 중국여행가이드북에 반드시 등장하는 도시는 어디일까?

베이징? 상하이? 홍콩???

대륙에 관한 가이드북은 상해보다......중국장안(시안)이 더 만이 나오고 지도에서도 가장 중요하게 나온다.

장안에 중국의 유물이 가장 많이나온다는것은 대륙역사의 핵심은 바로 중국 장안에 있다는 말이다.

서양인들이 중국 장안을 베이징과함께 반드시 가봐야하는곳으로 추천하는 이유는...??..

중국역사를 알기위해서일까?

아니면......서양인들은 중국 장안의 역사적중요성을 알고있기
때문일까?

미국과 영국등의 출판계는 유태인들이 완벽하게 장악하고있다는 점에서.......그들이 장안(서안,xian)을 엄청나게 중요시하는 이유는 그곳에 엄청난 비밀이 숨어있기 때문이 아닐까???

치우, 시대소리독자
시대소리뉴스
www.sidaesori.co.kr

by 리프트 나라 | 2007/02/22 12:30 | 조선사(대륙조선) |
http://jwlift.egloos.com/
대륙조선, 조선의 역사 1.
최근 북관대첩비가 100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북관대첩비는 임진왜란 당시 함경도 북관지역의 승첩비를 일제시대에 관동군이 본국으로 가져서 보관한 비문이며 최근 반환운동이 결실을 맺어 다시 한국 땅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북관대첩비에 숨겨진 역사적 진실은 놀라운 것이다. 함경도의 북관지역이 길림과 장춘일대를 말하며 임진왜란 당시 조선 8도 중에 하나인 함경도라는 사실이다.최근 재 부활한 KBS역사 스페셜에서 100년 만에 귀환한 북관대첩비에 방영된 함경도 지도가 요동반도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다.일본 역사 연구가가 함경도라고 제시한 지도가 화면에 잠시 방영되었다.



야스쿠니 신사에서 북관대첩비를 가지고 저주의식을 거행하다!

일제 때 약탈되어 일본 야스쿠니(靖國) 신사에 보관된지 100년 만에 귀환되었다. 일본 군구주의 상징인 야스쿠니 신사 한 구석에 보관된 것이다.이 유물이 여기에 보관된 것은 한국의 유물을 보관하는 차원이 아니라 저주의식을 거행하기 위한 소품으로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지난 일제가 한민족의 정기를 끊기 위해 한반도 8도에 수백개 철심을 박아 정기와 지기를 끊으려 하였다. 이와 같은 연장선에서 야스쿠니 신사 일반인 손길이 닿지 않는 깊숙한 곳에 가두고 비석머리에는 상식적으로 도저히 납득이 안가는 엄청난 머리돌을 눌러 100년 동안 저주의식을 거행한 것이다.바로 임진왜란 당시 가장 강력한 항거를 한 함경도의 기운을 꺽는 상징을 북관도 대첩비로 삼은 것이다.그 곳은 그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게 철저히 격리된 장소에 보관하였다.

북관지역은 어디인가!
북관대첩비를 가지고 간 동기는 다음과 같다. 만주국을 세운 일제 관동군이 러일 전쟁을 하다 함경도 길주에서 북관대첩비를 발견한 것이다.이 비석을 발견하고 전리품으로 가져갔다. 그러나 그 발견 장소가 현 한반도 내에 있는 함경도 길주가 아니라는 사실이다.러일전쟁 당시에 만주국 전쟁터는 송화강 일대였으며 관동군이 활동한 지역의 중심이다.

일본이 만주에서 활동하는 군인을 관동군이라는 부르는 것은 만주 일대를 관동지방으로 불렀기 때문이다
. 우리는 강원도 태백산맥 대관령을 중심으로 대관령의 동쪽을 관동지역이라 하고 대관령 서쪽을 관서지역이라 하는데 그것은 조작된 것이다. 관동군이라고 한다면 강원도 동해안 지역에 활동하는 일본군이여야 한다. 그러나 만주에서 활동하는 군인을 관동군이라고 한 것은 이 일대가 관동지방이기 때문이다.
외국 고지도를 보더라도 북경의 동쪽을 관동이라고 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본다면 만리장성이 끝나는 산해관을 중심으로 동쪽을 관동이라고 한 것이다.위 그림에서 관동이라는 영문 표기를 볼 수 있으며 그 옆에 요동이라는 영문 표기를 볼 수 있다.또한 고구려 시대 천리 장성이 축조된 그림이 점선으로 그려지고 있으며 이 지역이 1900년 전후 조선과 청 국경을 정한 지역이다.또 다른 지도를 보면 목책이 있었던 지역이다.

관(關)이라는 것은 중요 국경이나 요충지역을 말한다.국경이나 관경을 의미하는 말이나 관공서 관찰사 등에서 알 수 있듯 중요 국가 요충지역을 말한다.그리고 관이라고 하는 것은 중심을 말한다. 흔히 경기장 내에 구경군을 관중석이라고 한다. 즉 경기장 중심을 바라보는 자리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즉 관은 중심을 말한다. 그래서 관중지역은 수도가 있는 지역을 의미한다. 서안이나 북경이 고대 역사에서 수도로 사용되어 왔다.그래서 일대를 관중(關中)지역으로 불리웠다. 다른 말로 수도를 중심으로 일정한 거리의 지역을 경기도라고 불리웠다.이 지역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나누어 관서와 관동 관북과 관남으로 부른 것이다.

관동군의 유래를 보면 다음과 같다.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러시아와 맺은 포츠머스 조약에서 군 주둔권을 승인받고, 러시아의 조차지(租借地)인 랴오둥 반도[遼東半島]를 인수하여 관동주[關東州]를 만들고 관동도독부를 두었다. 관동주와 남만주 철도의 경비를 위해 병력을 주둔시킨 것이 관동군의 시초이다.요녕성이 관동지방이며 북경을 관으로 보고 지역을 구분한 것이다.

간도의 유래를 알면 역사가 보인다!
북관이라고 하는 것은 관의 북쪽이므로 북경을 관중으로 불리웠으며 이 곳이 요동성이 있던 지역이다.이 곳의 북쪽을 북관지역이며 북동쪽 방면을 간방이라고 칭하였다. 8괘로 동북방을 간(艮)으로 표현하였다. 이 일대를 간도라고 한 것도 간도(艮道)에서 간도(艮島)로 지명이 변경된 것이다. 그래서 만주 일대를 간도로 불리운 것은 중심에서 동북방이기 때문이다. 지명에서 알 수 있듯 고려와 조선의 중심이 중국 중심지역에 위치했다는 반증인 것이다.간도를 동북방으로 보았으며 이 곳이 함경도 지방이며 김종서가 동북방 6진을 구축한 지역이다.
우리가 우리 땅인 곳을 간도라 부른 것은 우리의 영토의 중심에서 불렀다는 것이다.간도는 동북방의 섬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대룩에 존재한 중앙조선에서 만주와 한반도를 그렇게 불렀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대륙 조선론이 증명된 것이다.

북관대첩비 특집으로 방영된 함경도 지도가 요동반도 지역을 가르킨다!

지난 2005년 10월 21일 KBS에서 방영된 < [긴급기획 역사스페셜] 100년만의 귀환, 북관대첩비 >를 보면 놀라운 장면이 방영되었다.그러나 아무도 그 진실에 대해 모르게 넘아간 엄청난 장면이 나온다.그것을 취재한 PD도 그것을 시청한 시청자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장면이 무엇인가!
임진왜란 당시에 함경도를 침공한 대표적인 다이묘(大名)가 가등청정(가토 기요마사)인데 그는 함경도를 장악하려고 많은 사전 준비를 한다.화면에 캡처된 <가타지마 만지> 교수가 연구한 지도를 설명하고 있는 장면이다.그 교수의 증언에 의하면 가토 기요마사는 함경도 농업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한다.쌀을 물론 콩 . 기장. 조를 수탈하는 대상으로 삼고 생산량과 조세표까지 철저히 파악한 것이다.그러면서 함경도 지방을 공격한 지도를 보여주고 있다.문제의 지도를 펼치고 가토 기요마사가 점령한 지명이 함경도이고 구체적으로 덕원.문천.고원.영흥을 가르킨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두가지 발견된다.
첫째는 한반도 함경도는 산악지대라 농사지울 땅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한반도 함경도는 가장 농지가 적고 가장 산악이 많다.그런데 가토 기요마사는 함경도 농사 지역과 생산량에 대단히 욕심을 가지고 침공 전부터 심혈을 기울인다.과연 한반도 함경도라면 바보가 아닌 이상 이 지역을 공략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함경도를 공략한 지명을 보여주는 지도가 함경도 동해안이 아니라는 사실이다.함경도 동해안은 강이 거의 없으며 섬도 거의 없다.그 곳과 가장 흡사한 곳이 중국 요녕성 지역이다. 요하의 하구에 장산열도가 있으며 1000개에 가까운 많은 섬들이 존재한다.양자강 하구 주산군도 다음으로 섬이 많은 지역이다.그 곳에 한반도 지명과 같은 흑산도도 존재한다.화면에 나온 지도는 대능하와 요하가 밀집한 곳이다. 이 곳은 화북평원으로 논농사는 물론 많은 농산물이 산출되는 중요한 곡창지대이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드넓은 곡창지대와 목초지대인 것이다. 요하를 따라 올라가면 길림과 장춘이 나온다.

종합하면 함경도로 진출한 곳이 바로 요동만이라는 사실이며 요하(압록수)를 따라 내륙 깊은 길주(길림)에서 함경도 의병과 관병의 대접전을 벌인 것이다.조선군 3000명대 왜군 22000명이 싸워 조선군이 승리하였다. 전술 중에 하나는 청야전술인데 왜병이 진군한 곳마다 곡식과 장비를 불태워 현지 보급품을 끊는다는 것이다.한반도에 좁은 지역에는 도저히 사용할 수 없는 전술이 청야 전술인 것이다.이 곳에서 유목족의 깅인한 조선족과 싸워 퇴각하여 이 이후에도 침공하지 못한 지역이다.일제 시대에도 독립군이 활동한 지역과 동일하다. 역사는 반복될 뿐이다.

함경도라고 방영된 지도가 단순한 요하강 일대라는 가정이 아니라 진실인 이유는 또 다른 고지도와 아주 흡사하기 때문이다.위 지도에 위 부분은 조선후기에 북경을 다녀온 여행기에 나오는 지도이다.북경에서 신의주 까지 자세한 여행지도인데 그 중앙 부분과 가의 흡사하며 여러 강을 지나가는 구간이 있다.산해관-(난하-대능하-요하-태자하)-요양-압록-신의주 일대 중에 4개강이 이 곳 지도와 거의 같다는 것이다.왼쪽을 보면 산해관 북쪽을 지나는 장백산맥도 거의 같게 나온다.과연 한반도 함경도에 4개의 연속된 강이 있으며 않은 섬이 존재한 지역이 있는 것인가! 아무리 찾아 보아도 일부라도 비숫한 지명이 없다는 사실이다.

가토 기요마사가 바보가 아닌 이상 산악지대에 눈독을 들이지 않는다. 그리고 함경도가 최고 알짜 지역이기 때문에 욕심을 낸 것이다.그 지역이 바로 요동만인 것이다.일본 교수인 가타지마 만지는 알 것이다. 그 곳이 절대 함경도 일대가 아니며 요녕성이라는 것을 .. 그러나 시청자나 일반인은 물론 그것을 취재한 PD 도 그 곳이 한반도 함경도지도가 아니라는 것을 의심하지 못한다.모든 정황과 증거가 한반도 함경도가 아니라 요녕성이어야 맞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가토 기요마사는 세계적으로 가장 위대한 바보장군이 되는 것이다.왜냐하면 한반도 8도 중에 가장 농산물이 적은 곳에 가장 많은 농산물 확보를 위한 목적으로 침공하였고 최종적으로 욕심을 냈기 때문이다.

함경도는 동북삼성이라야 모든 것이 맞아 떨어진다.
그것은 엄청난 사건이기 때문이다. 한반도 내에 존재한 모든 반도사관이 거짓이라는 것이 판명되는 것이며 고려와 조선의 한반도 정위론과 그것을 주장하는 강단사학에 사망선고를 내리는 사건이며 재야사학과 민족사관이 승리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대륙고려 대륙조선의 결정적 증거가 많다고 하더라도 비록 사실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절대 승복하지 못하는 세력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대외적으로 중국과 일본의 강력한 반대에 직면한다. 중국은 동북 공정과 중국 대통일을 위해서 그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그리고 일본은 대륙 조선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은 만일 한일관계사에 있어서 일본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대륙을 여러번 공격하였지만 만일 그 공격지가 대륙이라고 밝혀지면 일본의 우월성 보다는 한국의 대륙지배가 밝혀지기 때문에 모든 사실을 은폐하는 것이다. 중국과 일본의 명분 때문에 철저히 숨기고 있는 것이다.현 재야사학은 일제가 식민지 교육용으로 한반도 안에서 모든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반도사관을 세뇌시키고 있으며 그 후학이 강단을 장악한 것이다.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의 후손 이병도가 근대 역사학의 뿌리인 것이다. 그 후학의 학맥이 대세를 장악하는 이상.. 그 어떤 근거나 증거가 나와도 받아 들이지 않는 것이다.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강단사학 전체가 괴멸되기 때문이다.우리는 중국과 일본 뿐 아니라 내부의 역사전문가라고 알려진 강단사학의 또 다른 적과 싸워 우리 민족의 웅대한 대륙사를 회복해야 한다.

함경도의 지명 유래와 길림의 지명 유래는 같다!
네이버 백과사전을 기준으로 함경도와 길림을 비교한 것이다.함경도는 태조 때 영흥(永興)과 길주(吉州)의

이름을 따서 영길도(永吉道)라 하였으나,
1416년(태종 16) 함주(咸州)를 함흥부(咸興府)로 승격시켜 관찰사(觀察使)의 본영을 둠으로써 함흥과 길주의 이름을 따 함길도(咸吉道)라 고쳐, 이때 8도가 갖추어졌다.그리고 길림은 청(淸)나라 때부터 불러온 이름인데 1929년에는 융지현[永吉縣]으로 개칭하였다가 1936년에 지린시[吉林市]로 고쳤고, 청(淸) 말기에 성(省)이 설치되었으며 1954년까지는 지린성의 성도이었다. 여기서 조선은 함경도를 영길도(永吉道)라고 부르며 청은 길림을 영길현(永吉縣-중국 발음 융지현)이라 부른다. 즉 길림성의 지명을 공통적으로 영길이라 한 것이다.그러므로 길주는 길림이며 길림은 영길로 불렀다는 것이기 때문에 길림이 함경도 중심도시사 되는 것이다.조선은 도(道)로 지역을 구분하였고 청은 현(縣)으로 구분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영길도를 영길현으로 바꾼 것 이외는 없는 것이다.현 길림성 지도에도 길림 밑에 영길이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임진왜란의 당시 해저 유물이 남해안에서 거의 안 나오는 이유!
가토 기요마사와 이순신이 전투를 벌인 지역이 요하 근처인 장산군도 일대일 가능성이 많으며 특히 장문포전투와 고금도 해군기지 이전에 대한 추정지역이 장산군도 일 가능성이 많다.또한 북경 일대가 순천부로 불리운 지역으로 보아 백의종군하고 난 이후 삼도수군 절도사 자리를 차지한 이후 해군을 재건한 지역 중에 유력한 추정지역이다.순천 광양 곡성 구례 지역은 어디인가! 북경에서 단동까지... 황하에서 압록까지....발해만와 요동만의 연안에서 해군 재건설을 하는 가장 유력한 지역이다.

부산이라는 지명은 산동성 동래현 지방과 양자강 항주 근처도 부산으로 불리운 적이 있다.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주 수도는 서안과 북경 그리고 무한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이 개성과 평양 그리고 한성의 영역인 것이다.실제 임진왜란에서 싸운 이순신의 바다는 양자강 일대와 산동성 일대 그리고 요녕성 일대 그리고 한반도 남해안 잔적 소탕작전등으로 방대한 지역이다.그렇기 때문에 난중일기에서 절강에서 강소까지 바다를 지켰다고 나온 것이다.자세한 정위론과 전체 전쟁상황은 차후에 자세히 언급을 드린다.조선 수군이 전멸했다는 거제도 칠천량 바다를 뒤져 보아도 임진왜란 당시에 침몰한 어떤 배의 흔적도 안 나온다.그 이전에 침몰한 배는 많이 나와도 확율적으로 많은 것 같은 임진왜란 유적은 거의 안 나온다.그것은 임진왜란 당시 주 강역이 한반도가 아니기 때문이며 변방에 지나기 않았기 때문이다.막강한 자금을 동원해 남해안을 뒤져도 거의 나오지 않을 것이다. 양자강이나 황하강 그리고 요하의 바다를 뒤져보면 많은 임진왜란 유물이 나올 것이며 거북선도 나올 것이다.

백두산 경계비의 진실-압록강과 두만강은 요하와 아무르강을 말한다.
 



아래 그림은 간도지방을 세밀하게 그린 지도이다.요하와 송화강을 결합한 지역을 표시한 것이다. 노란색 지도는 1895년 전후로 하는 조선과 청의 국경지도다. 요하 근처를 절충지로 하여 송화강 지역을 양분한 지도다.그리고 푸른색 지도는 일본이 정밀 측량하면서 백두산 유역의 세부 지도이다.백두산 위쪽으로 표시된 강이 토문강으로 나온다.


우리는 중국으로 부터 간도반환 운동과 함께
러시아로 부터 연해주와 사할린 반환운동을 해야 한다.
아직 국제법 상 법적 청구가 가능한 시점이다.
이순신이 지켜낸 녹둔도가 사할린이며
우리는 녹둔도 회복운동을 해야 한다!
김종서의 6진중에 한 지역이 바이칼호 남쪽에 회령진을 설치하다.

 



**. 선조실록

12.  임진왜란중에서 풍신수길이가 제후로 인정해 달라고 요구함 
      (조선이 중국의 천자의 나라로 만리의 국가로 있었기 때문에 변방의 일본의 제후,속국 은   당연지사) 
13. 왜가 침입해오자 조선의 왕은 서쪽으로 피신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상식적으로는 조선이 한반도라면 북쪽으로 피신해야 옳다. 그러나 조선이 중국이었기 때문에 동에서 일본
       의 침입을 피해
서로 피신간것이다.)
14. 선조실록 52권 27년 6월 2일 (기유)

  1)  각성(各省)의 순무(巡撫)를 맡은 신하가 마땅히 관중(關中)과 낙양(洛陽)을 한 집안처럼 형세가 서
      로 연결되게 하여,
  2) 적이 산동(山東)에 들어오면 회주(淮州)·서주(徐州)가 지원하고,
  3) 적이 회주·서주에 들어오면 절강(浙江)·직례(直隷)가 지원하고,
  4) 적이 절강·직례에 들어오면 민중(?中)·양광(兩廣: 광동성과 광서성)이 지원하게 하소서. 
  5) 이와 같이 한다면 군대의 사기가 진작될 것입니다.
  6) 척계광(兪大猷)과 유대유(兪大猷)는 다 왜적을 무찌른 공신으로서 강남(江南)에서는 시축(尸祝)
     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省直撫之臣, 當使關、洛如一家, 形勢相及, 賊來山東則淮、徐爲援; 賊來淮、徐則浙、直爲       援; 賊來浙ㆍ直則(關)〔?〕ㆍ廣爲援。 如此則軍聲振矣。 戚繼光ㆍ(余)〔兪〕大猷, 皆平      倭勳臣, 江南屍祝。]
왜군이 쳐들어 오는 길목을 미리 예상하고 대비책을 보고한 것으로 완전히 한반도가 아닌 중국지역이다.

 

                          조선의 영토 (일설)- 정명가도가 맞지 않음.

15. 청나라의 공물거래협정서   
    원서명:
중강통상장정 의 원안 및 수정(1883)
    보관장소: 서울대 규장각 (구한말 고문서해제)

제1조 중국을 봉성(奉省으)로 수정함. 봉성은 조선의 중앙,즉 경기도, 수도권을 뜻함으로 대륙의 중앙에 위치한 조선을 두고, 중국으로 표현한 것을 봉성으로 고친것이다. 이는 청나라가 변두리 국가를 자인한 결과이기 때문에 이를 시정한 것이다.
즉 중국이란 말은 청나라가 조선을 애칭하여 부른 것이다. 

16. 조선실록, 동의보감(허준) 
     조선의 지형은 서고동저이다..(중국대륙을 뜻함)
17  청나라때 이전의 서양의 고지도
    조선의 국경이 발해만까지 이고,좀 더 심한것은 시베리아,만주, 한반도,
    중국의 북부지역이 조선의 영토로 그림

18. 조선실록 
    조선의 강은 모두 동쪽으로 흐른다 (중국대륙을 뜻함)
그런데 『한경지략』 산천조에도 우리 나라의 강물이 모두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서울의 개천만은 동으로 흘러 나가므로 사람들이 정도(正道)를 얻었다고 한다.
(진본은 없고 필사본만 있음- 수정의심)

19. 훈민정음 해례본 
     江南은 황제가 계신 나라
    강남은 양자강,장강의 이남지방인 절강성,호남성,사천성,지역으로 조선의 땅이고, 
    황제는 곧 조선의 황제를 뜻함

20. 독립신문
』(1896.4.7 창간)(이십사호: 1896년 5월 13일 논셜) 
"조선의 인구 수효는 1600만 명인데, 남자는 900만 명, 여자는 700만 명이며, 호수(戶數)는 348만911호 가량이다. 지면은 영국 리수(里數)로 12만 방리(方里)요, 조선 리수로는 60만 방리 가량이다
(대한제국의 강역의 크기가 9500방리, 또는 12만방리,즉 만리지국)
 아메리카 합중국 외에는 조선같이 인구 많은 나라는 없고~~

 조선이 세계 가운데서 큰 나라요, 토지는 동양에서 제일이다."
 (중국대륙이 모두 조선의 땅임을 밝힌것)

No.113  |  조회수 :433  I  자은 최두환 (2008-08-20 21:17:33.0) http://cafe.daum.net/chosunsa 
씰크 로드는 아시아 조선의 길


누군가 지은 책이《씰크 로드는 신라인의 길》이라고 한 것을 보았다.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 절판이 된지도 오래되었음을 듣기도 하였다. 그런데 과연 그 길이 누구의 길일까?
씰크 로드(Silk Road)라는 말은 옛날부터 있었던 말이 아니다. 아주 근래의 일이다.《씰크 로드학》이라는 책을 지은 사람의 글을 보면, 독일 지리학자 리히트호펜(K. von Richthofen: 1833-1905)이《China》(Berlin, 1877)를 지은 데서 비롯되었다고 하는데, 1877년이면 지금부터 130년 전의 일이다. 그런데 정작 그는 그 책을 짓는데 1877년부터 1912년까지라고 했으니, 그가 죽고 난 뒤 5년만에 출간된 셈이다.[정수일,『씰크로드학』(창작과 비평사, 2001), p. 28]

그럼에도 불구하고 1877년에 지었다는 것은 그가 1866년까지 중국을 답사한 뒤라는 말에 무게를 두었을 뿐이지, 정작 그가 저술한 해와는 다르다. 그러니 이 책이 1877년에 편찬되었다면, 거짓이고, 1912년에 그의 손으로 편찬되었다면 귀신이 만든 셈이다. 참 알 수 없는 일이다.어쨌든 그 책에 "자이덴슈트라쎄(Seidenstrasse)"라는 말에서 "Silk road"라는 말이 생겨났smsepm 우리말로 대개 "비단길"이라고 한다. 그러나 "비단"은 "緋緞"이니, 순수 한글로는 "깁"이므로 "깁길"이라고 해야《한글맞춤법》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죽도록《한글맞춤법》의 덫에 갇히어야 하나보다.
무엇이 옳은 지도 말못하고....
그러나 이 "깁길"이야말로 "자이덴슈트라쎄"처럼 부자연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오아시스로(Oasis Road)"라고도 하는 말이 더 친근하게 들리는 것은 왜 그럴까? 이 "씰크로드"는 "동서 문명 교류 교통로"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그 범위는 동쪽의 일본렬도 경도·나라에서부터 서쪽의 이탈리아 베네찌아·메시나까지 북위 35도±12도의 범위를 한없이 오고갔다.

즉 극동-아시아의 끝에서 극서-아시아의 끝 터키의 이스탄불을 지나 동부유럽의 끝 지중해 이탈리아까지 1만4700㎞, 중국 장안에서는 1만2000㎞를 비단·자기·차·향료 등을 갖다 날랐다. 이것이 동서문물교류의 장이란다.씰크로드는 "비단의 유럽수출에서 비롯된 일방적 對-서방 수출에서 유래되었다"고[위의 책, p. 36] 하지만, 그 의미에 지금 딴지를 걸어본다.
왜냐하면 [아시아]=[조선]이라는 개념이
새로운 패러다임의 력사관이 대두되었기 때문이다.이 지리적 범위의 중심은 두말할 것 없이 중앙-아시아이다.

다음의 사료를 보자.

(1) 大秦國 一名犁 , 以在海西, 亦云海西國, 地方數千里, 在四百餘城.[후한서권88 서역전76]
[대진국은 리건이라고도 하는데, 해서 지역에 있으며, 해서국이라고도 한다. 땅은 사방 수천리이며, 400여 고을이 있다.]

우리는 대진국(大秦國)을 로마(Rome)라고 하지만, 바다의 서쪽에 있기 때문에 '해서국(海西國)'이라고 한다고 했다.로마가 지중해 북쪽 해안에 있지, 바다의 서쪽[海西]라고 볼 수 없다. 이 바다[海]라는 것이 에게해(Aegean Sea)라면 몰라도. 그래도 바로 그 서쪽엔 그리스[희랍]이 있으니 뭔가 어울리지 않는다. 이 "바다"란 결코 "에게해"도, "지중해"도 아니며, 그냥 "해[太陽]"과 같은 "천자"가 있는 지역, 즉 "중국"이란 의미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대진국을 알기 위해서는 다른 지명 하나를 더 알아야 하는데, 조지국(條支國)이 있다. 이곳을 대개 "시리아(Syria)"라고 보지만, 그 지역은 사실 아라비아반도를 설명한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그 지명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잇다.

(2) 條支國 臨西海, 海水曲環其南及東北, 三面路絶, 唯西北隅通陸道.
      土地暑濕, 出師子犀牛封牛孔雀大雀, 大雀其卵如壅.[위의 책]
[조지국은 서해에 닿았는데, 바닷물이 그 남쪽과 동북쪽을 둘러져 있어 3면으로 길이 끊어져 있고, 오로지 서북쪽 모퉁이로만 육로가 나 있다. 토지는 무덥고 습기가 많으며, 사자(獅子)·무소[犀牛]·낙타[封牛]·공작(孔雀)·타조[大雀]가 있으며, 타조는 그 알이 옹기만하다.]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서북쪽만이 육로로 트인 곳은 곧 아라비아 반도 전체가 매우 적격이다. 이보다 더 설득력 있는 글은 없을 것이다.
서-아시아에는 사자(獅子)가 있고, 또 무소, 즉 코뿔소가 있고, 낙타 등등이 있다고 했다. 낙타를 타고 고구려·백제·신라를 누비며 싸웠던 력사적 사실을 여기서 새롭게 음미해보자. 느낌이 새로워질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뒤에 적힌 글을 보면, 안식국과 대진국과의 관계이다.
(3) 自安息西行三千四百里至阿蠻國. 從阿蠻西行三千六百里至斯賓國. 
      從斯賓國南行度河, 又西南至于羅國九百六十里, 安息西界極矣.
     自此南乘海,   乃通大秦.
[위의 책]

[안식국에서 서쪽으로 3400리 가면 아만국에 이른다. 아만국에서 서쪽으로 3600리 가면 사빈국에 이른다. 사빈국에서 남쪽으로 강을 건너고, 또 서남으로는 우라국 960리에 이르는데, 안식국의 서쪽 경계의 끝이다. 이 남쪽에서 배를 타고 가면 대진(大秦)에 이른다.]

3400리는 1285.2㎞, 3600리는 1360.8㎞인데, 이들 나라들이 어디에 있는 것이든 이 거리를 서쪽 끝에서 동쪽으로 재어보면, 이 거리만 더하여 보면, 2646㎞는 레바논에서부터 아프가니스탄 중심지까지의 거리이다.

매우 먼 거리이므로, 안식국이 페르시아의 중심지라고 보면 그 대진국이 어디에 있어야 할까?
정말로 우리는 저 "대진국"이 로마라고 할 수 있을까? 다른 사료를 보자.

(4) 拂凜國一名大秦, 在西海之上, 東南與波斯接, 地方萬餘里,
      列城四百, 邑居連屬.[舊唐書권198 列傳148 西戎]
[불름국은 일명 대진국이라고 하는데 서해에 있고, 동남쪽에는 페르시아와 붙어 있으며, 땅은 사방 1만리 남짓하고, 여러 고을이 400개인데, 고을들이 쭉 붙어있다.]

이 불름국이 대진국이라고 했으며, 위의 (1)에서 400고을과 같은 규모이니, 같은 지역을 말하고 있다. 그러니 이 불름국을 "동-로마"라고 해석하고 있는 것이 끝내 처음의 "로마"라는 것과 같은 지역임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이탈리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아예 흑해(黑海: Black Sea)가 있는 서-아시아의 지역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동-로마를 아시아의 서쪽에 잇는 것으로 해석되어 있는 것이 그 이전의 시기나 그 뒤로도 같은 지역의 이름이지, 이탈리아라는 로마와는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大秦"은 "로마"가 아닌 것이며, 동-지중해를 낀 극서-아시아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불름"이란 글자는 한자로는 아무런 뜻이 없다. [fulin]으로 소리나는 이 지역은 옛날의 "Phrygia"[프리기아] 지역인 것으로 보아, 이곳은 북부여와 해부루가 가섭원(Caspian)으로 옮겼던 곳과 연계해보면, "夫餘/扶餘"[부여]의 땅이 된다. 그러면 "부여"는 "프리기아"지역이고, 곧 "불름"이라는 "대진"지역인 것이다. 불름(佛倫 : Frum)

이 "대진(大秦)"과 같은 소리의 나라가 "大震"인데, 이것이 대조영이 나라를 세운 "발해(渤海)"의 다른 이름이다. 이 발해가 전에 언급한 바가 잇듯이 곧 "Black Sea"[黑海]인 것이다.
이 발해라는 나라는 "키타이[契丹]"이니, "말갈(靺鞨)"과 인접해 있고, 고구려의 후예라고 하는데, 사실 그들 키타이니, 말갈의 같은 부류이기도 하다.그러면 씰크로드가 이탈리아까지의 이동이 아니라, 장안[長安: 西安]에서부터 아시아의 서쪽 끝까지이며, 이것은 곧 유럽과의 동서문명의 교통로가 아니라, 아시아 조선 사람들의 길이었다. 물론 한반도와 일본 렬도와의 교류가 있었다는 것에는 유물·유적의 유무와 더불어 사료에 의하여 좀더 살펴보아야 할 문제이다.

어쨌든 씰크로드는 중앙-아시아, 즉 중원에서 동쪽으로
극동-아시아까지, 서쪽으로 극서-아시아까지의 북위 35도±12도를 중심으로 조선 제후국들의 상인들과 사신들이 많이도 오갔던 문화교통로였고, 대진=大秦=大震=渤海(발해)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좀더 덧붙이자면, 발해라는 이름은 대조영이 건국하기 이전부터 있었던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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