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玄濟 현제  2009-03-02 12:38:57

 


▲ 참고로 백석산(白石山)은 살수(薩水)와 깊이 관련되는 지명이라고 했습니다..

만약, 현 감숙성(甘肅省) 서남부의 롱서(隴西) 수양산(首陽山)은 고죽국(孤竹國)이라면..
롱서(隴西) 수양산(首陽山)의 서쪽에는 백석산(白石山)이 실존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① 東漢經文學家曹大家(即班昭)注《幽通賦》說:"夷齊餓於首陽山 在 隴西首陽。" …

▲ 윗 문장을 읽어보면, 알 수있듯이..
반고(班固)의 유통부(幽通賦) : 백이 숙제가 굶어 죽은 곳 즉 수양산(首陽山)이고, 롱서(隴西)의 수양(首陽)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② 史記:正義曹大家注幽通賦云:「夷齊餓於首陽山,在隴西首。」
③ 竝有夷、齊祠耳。而曹大家注《幽通賦》云。隴西首陽縣是也。今隴西亦有首陽山。 … (중략) … 許愼云。首陽山在遼西。諸說不同。致有疑惑。而《伯夷歌》云。登彼西山。則當隴西者近爲是也。


즉, 기록에는 옳다(是) 이라고 분명히 나와있어서, 현 감숙성(甘肅省) 서남부의 롱서(隴西) 수양산(首陽山)은 본디 백이 숙제의 무덤임을 자연히 알 수 있습니다..

또, 백이가(伯夷歌)에 의하면, 백이(伯夷)와 관련되는 서산(西山)도 역시 당연히  현 감숙성(甘肅省) 서남부의 롱서(隴西) 이라고 기록되어 있기도 합니다..

적어도, 기록에 따르기 위해서는 본래 고죽국(孤竹國)은 현 하북성(河北省)과 현 산서성(山西省)에 위치할 수 없는 지명이었다는 말이 됩니다..

제 견해로 보자면.. 현 산서성(山西省) 서남부의 수양산(首陽山)은 본디 근세 조선(朝鮮)의 황해도(黃海道) 해주(海州)이라고 추측합니다..

감사합니다..

섬서성 서안 서쪽까지 점령한 단군조선 (1부)

성훈 http://blog.joins.com/slsung

B.C 1,100년 경 은나라 말기에는 고대사의 중요한 인물들이 많이 등장한다.
주지육림(酒池肉林)과 포락지형(炮烙之刑)으로 유명한 은나라 마지막 주(紂)왕과 은나라의 제후였던 주나라 문왕(西伯昌)과 무왕(武王)이 등장하며, 그 유명한 기자(箕子)와 백이.숙제(伯夷.叔齊) 그리고 낚시로 천하를 낚은 강태공(姜太公)이 등장한다.


필자가 이들의 역사이야기를 소개하는 이유는 이들의 이야기 속에는 당시 하남성에 있었던 은나라의 사방을 둘러싸고 있던 단군조선의 강역이 보이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타임머신을 타고 3,100년 전 당시로 돌아가 보기로 한다.  

은나라 건국에 관련된 단군조선 
먼저 은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간단히 알아보도록 한다. 중국은 삼황오제의 시대를 지나 중국 최초의 왕조인 하(夏)나라가 들어서고, 4백 수십 년이 훨씬 지나 하나라 다음에 은(殷)나라가 들어선다. 이 은나라 역시 삼황오제와 하나라와 마찬가지로 우리와 동족(同族)인 동이족(東夷族)이 세운 나라였다. 

중국 사학자들의 공동 저서인 ‘고사변’에 따르면 “현조(玄鳥)는 은나라 사람과 동이족의 조상신이다. 동이와 은나라 사람은 같은 종족이며 그 신화 역시 근원이 같다. 태호, 제준, 소호, 제곡, 제순(순임금) 그리고 설(은나라 조상) 등이 동이족과 같다고 하는 것은 근래 사람들이 명확히 증명하는 바이다.”라고 말하고 있어 은나라는 우리와 동족임을 알 수 있다. 참고로 현조는 검은 새로 은나라 조상인 설(契)의 탄생난생신화(誕生卵生神話)에 나오는 새이다.

이런 은나라의 건국에는 단군조선이 깊숙이 개입되어 있다. <단군세기>에 따르면, “13세 흘달단군 갑오 16년(B.C 1767년) 겨울 은나라가 하나라를 정벌하니 하의 걸왕이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단제께서 명하여 구한(九桓)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싸움을 돕게 하니 은나라 탕왕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였다. 

이에 군사를 되돌리게 하였는데 걸왕이 조약을 위배하고 길을 막자 은나라와 함께 하나라 걸왕을 정벌하기로 하여 견(畎)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낙랑과 합쳐 진격하여 관중(關中-섬서성)의 빈.기(邠.岐)의 땅에 웅거하며 관청을 설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라가 망하고 은나라가 들어설 때의 일인데, 은나라가 하나라를 쳤으나 조선이 하나라를 도우니 은나라가 사죄하고 돌아갔고, 하나라 왕이 약속을 어기자 이번에는 조선이 은나라와 함께 하나라를 정벌하였다는 기록이다. 즉 하나라와 은나라의 운명은 단군조선의 손에 달려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섬서성 빈.기의 땅에 관청을 설치했다 하는데 빈.기는 섬서성 서안 서쪽을 말함이다.
 
빈기고지도.gif
▲   고대 중국지도에서의 빈과 기. 섬서성 서안 서쪽의 고대 지명이다.

이 기록은 <단군세기> 뿐만 아니라 중국의 사서에도 그 관련 기록이 있다. 한나라 때 유향이 쓴 <설원(設苑)> 권모(權謀)편에 같은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번역) 성탕이 걸왕을 치려 하자 이윤이 말하길 “청컨대 걸왕에게 바치는 공물을 막고 그의 행동을 살펴보십시오.” 그러자 걸왕이 노하여 구이(九夷)의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왔다. 이윤이 말하길 “아직 때가 아닙니다. 저들이 아직도 능히 구이의 군사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은 잘못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고 하였다. 이에 성탕은 사죄하고 다시 공물을 바쳤다.
(원문: 湯欲伐傑 伊尹曰 請阻乏貢職 以觀其動 傑怒起九黎之師以伐之 伊尹曰 未可彼尙猶能起九黎之師 是罪在我也 湯乃謝罪請服 復入貢職)  

이듬해에 탕왕이 다시 공물을 끊어버리자 걸왕이 노하여 다시 구이의 군사를 움직이려 하였다. 그러나 구이의 군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자 이윤이 말하기를 “됐습니다.” 탕왕은 마침내 군사를 일으켜 잔당을 징벌하니 걸왕은 남소씨의 땅으로 도망하였다.
(明年又不供貢職 傑怒起九黎之師 九黎之師不起 伊尹曰可矣 湯乃興師伐而殘之 遷傑南巢氏焉)


이 외에도 <후한서> 동이(東夷)전과 서강(西羌)전에도 같은 내용이 간단히 기록되어 있다.
(동이전) “걸왕이 포악하고 잔인하자 여러 동이들이 쳐들어왔다.(傑爲暴虐 諸夷來侵)”
(서강전) “걸왕이 어지럽자 견이가 빈(邠).기(岐) 사이에 들어와 점거하였다. (傑之亂 畎夷入居邠岐之間)”

위 <단군세기>의 기록과 중국 사서의 기록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 위 중국 기록에서의 구이(九黎)와 견이(畎夷)는 단군조선임을 알 수 있다. 하나라가 멸망한 것도, 은나라가 일어난 것도 모두 단군조선의 강력한 힘이 작용했다는 기록이다.

이렇게 탕왕(湯王)에 의해 세워진 은나라는 17세 30명의 왕에 의해 통치되었다. 은나라의 통치기간에 대해 중국 기록인 <죽서기년>에는 은나라가 496년간 다스렸다고 하고, <삼통력>에는 629년으로 기록되어 있어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단군세기>의 기록으로 볼 때는 <삼통력>의 기록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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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경대 역사교재에 나와 있는 하대형세도에 하나라는 하남성 일대에만 있고 서안 바로 서쪽에 견이가 그려져 있다.

 
은나라와 단군조선의 갈등 

은나라는 단군조선 덕택에 나라를 세우고는 조선에게 계속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치곤 했다. 그러다가 약 470년 후에 아래와 같이 단군조선에게 도전장을 던진다. 참고로 고등(高登)이란 사람은 쿠데타를 일으켜 단군조선의 22세 단군이 되는 색불루의 조부이다.

<단군세기>의 기록에 따르면, “21세 소태단군 47년(B.C 1291년) 은나라 왕 무정(22대)이 귀방(鬼方)을 쳐 이기더니 대군을 이끌고 색도(索度), 영지(令支)등의 나라를 침공하였으나 우리에게 대패하여 화해를 청하며 조공을 바쳤다.
B.C 1289년 개사원의 욕살 고등(高登)이 몰래 군사를 이끌고 귀방을 습격하여 이를 멸망시키니 일군국과 양운국의 두 나라가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이러한 귀방이 어디인지 <중국고대지명대사전>으로 찾아보기로 하겠다. 참고로 귀방은 은허(殷墟)에서 발견된 갑골문자에도 나와 <단군세기>의 기록이 얼마나 정확한 기록인지를 입증하고 있다. 

鬼方(귀방) : 古远方国,《易既济》“高宗伐鬼方,三年春之,”其说有五,
1)谓即西戎,《后汉书章帝纪》克伐鬼方,开通西域,《西羌传》武丁征西戎鬼方,三年乃克,《文选赵充国"042;李善注》“鬼方,于汉则先零戎也,”世本注同,案当在今青海境,
(서융으로 “<서강전>에 무정이 서융귀방을 정벌했다” 지금의 청해와의 경계이다)

2)谓即周荆楚之地,〈惠栋九经古义〉汲郡古文云,武丁三十二年,伐鬼方,次于荆,三十四年,王师克鬼方,氐羌来宾,商"042;殷武云,挞彼殷武,奋伐荆楚,疑周之荆楚,商时谓之鬼方,古文所谓次于荆者,盖鬼方之地也, (주나라 형초의 땅)

3)谓即今贵州,《清一统志》贵州,商周为鬼方地,(지금의 귀주)

4)《丙子学易篇》“苍"049;篇云,鬼,远也,又云鬼方言其幽昧也,”此不以地实之,惠栋斥为臆说, (유매의 땅)

5)近人王国维谓鬼方即狄人,殷周时据陕西西北一带,古之獯"739;,汉之匈奴,皆其同种,春秋时狄人隗姓,隗即鬼也(즉 적인으로 은.주 때 섬서성 서북일대)

여기서의 귀방은 1)번과 5)번으로 거의 같은 지역이다. 즉 단군조선이 하나라가 망할 때 점령해서 관청까지 설치했던 빈(邠).기(岐)와 가까운 곳이다. 필자는 이 지역을 계속 단군조선의 점령지로 보는 이유는 은나라의 도읍은 하남성에 있었기 때문에 아마 섬서성 서쪽까지 그 영향력을 미치기가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맹자가 이야기했다. “하나라 뒤의 은나라 주나라가 융성했을 때의 강역도 일천리가 넘지 않았다. (夏后殷周之盛地未過千里者也)”

또 은나라 왕 무정이 공격했다가 단군조선에게 대패한 영지(令支)에 있던 나라는 바로 고죽국(孤竹國)이었다. 중국에서는 고죽국을 은나라의 제후국으로 보고 있으나, 고죽국은 단군조선의 제후국임이 증명되는 기록이라 하겠다. 은나라가 자기네 제후를 침공하는데 단군조선이 공격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이 고죽국이 있던 지역이 바로 후에 유주(幽州)의 요서군(遼西郡)이 되는 곳이다. 그 문헌적인 근거가 아래에 인용한 <한서지리지>이다. 이 요서군의 위치는 고죽국의 왕자인 백이.숙제의 묘가 산서성 남부 황하 굴곡 지점에서 발견됨으로서 분명하게 밝혀지게 되었다.

(辽西郡 요서군) 秦置。有小水四十八,并行三千四十六里。属幽州。户七万二千六百五十四,口三十五万二千三百二十五。县十四:且虑,有高庙。莽曰鉏虑。海阳,龙鲜水东入封大水。封大水,缓虚水皆南入海。有盐官。新安平。夷水东入塞外。柳城,"532;首山在西南。参柳水北入海。西部都尉治。令支,有孤竹城(영지에 고죽성이 있다)。莽曰令고 氏亭。肥如(비여),玄水东入濡水。濡水(유수)南入海阳。又有卢水,南入玄。莽曰肥而。宾从,莽曰勉武。交黎,渝水首受塞外,南入海。东部都尉治。莽曰禽虏。阳乐,狐苏,唐就水至徒河入海。徒河,莽曰河福。文成,莽曰言虏。临渝,渝水首受白狼,东入塞外,又有侯水,北入渝。莽曰冯德。CB63。下官水南入海。又有揭石水、宾水,皆南入官。莽曰选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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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이.숙제는 고죽국의 왕자로 고향인 수양산에 와서 굶어 죽었다. 백이.숙제의 묘가 황하 굴곡 지점에서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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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이 바로 요서군의 땅이라고 밝혀주는 백이.숙제의 묘가 일년 반 전에 발견되었다.


이어서 단군조선이 군사적으로 가장 강력했던 때인 23세 색불루단군 때의 <단군세기> 기록이다.
“B.C 1285년 은나라 서울을 격파하고 곧 화친했다가 또 싸워 이를 쳐부수었다. 이듬해 2월 이들을 추격하여 황하 주변에서 승전의 축하를 받고 변한(弁韓)의 백성들을 회.대(淮岱)지방으로 옮겨 살게 하니 나라의 위세가 떨쳐졌다.

B.C 1266년 람국(藍國)이 매우 강성하여 고죽군(孤竹君)과 더불어 여러 적들을 쫓고 남으로 이동하니 은나라 땅과 가까웠다. 여파달(黎巴達)로 하여금 병사를 나눠 진격하여 빈.기(邠.岐)에 웅거하도록 하면서 나라를 여(黎)라 칭하고 서융(西戎)과 함께 은나라 제후들 사이를 차지하고 있도록 하였으니 황제의 교화가 멀리 항산(恒山) 이남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당시 은나라의 도읍은 황하북부 하남성이며, 고죽군(孤竹君)은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고죽국의 왕으로 뒤에 나올 백이.숙제의 아버지이다. 단군조선은 다시 빈.기를 점령하고는 여(黎)라는 나라까지 세운다. 여는 구리(九黎)와 연관된 말로 단군조선을 의미하며, 여파달이라는 장수의 성이기도 하다. 

<단군세기>의 이 기록은 사마천의 <사기>에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당시 빈 땅에) 고공단부(古公亶父)가 살고 있었는데, 훈육(熏育)과 융적(戎狄)이 공격해 와 그에게 재물과 땅을 요구한 뒤 땅과 백성들을 차지하려 하였다. 이에 백성들은 융적에 맞서 싸우고자 하였으나 고공단부는 백성들을 희생시킬 수 없다 하고는 기산(岐山) 기슭으로 옮겨가자 백성들 역시 그를 따라 기산으로 모여들었다.”

고공단부가 옮겨간 기산이 섬서성 서안 서쪽 감숙성과 가까이 있는 바로 기(岐) 땅이다. 이러한 고공단부의 손자 중에 창(昌)이라는 사람이 나오게 되는데, 은나라 말기에 서쪽 제후로 봉해졌다 하여 서백창(西伯昌)이라고 하며, 나중에 주(周)나라 문왕(文王)이 되고 강태공(姜太公)을 발탁한 인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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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이 섬서성 서안 서쪽인 빈.기를 점령한 것은 조선의 핵심 강역이 산서성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서안 서쪽의 피라미드는 누가 만든 것인가?

섬서성 서안 서쪽에서 엄청나게 큰 피라미드가 많이 발견되었다. 발굴 작업을 하던 중국 당국은 이 유적에서 동이족의 유물들이 튀어나오자 급히 발굴을 중단했다. 그리고는 발굴 작업을 했던 인부들에게 입단속을 시켰다. 게다가 피라미드를 흙으로 덮고 나무를 심어 위장을 해 인공위성에서 볼 수 없도록 했다. 중국 정부는 왜 그랬을까?

중국 고대역사의 심장이라는 서안의 서쪽에서 동이족의 유적이 발견되었다는 것이 세상에 알려지면 중국의 자존심이 구겨지고 또한 고대 중국의 영토는 옛날부터 만리장성 안쪽이라는 엉터리 거짓말이 드러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섬서성 서안 서쪽 피라미드의 주인은 바로 단군조선이었던 것이다. 

만주와 한반도 일대를 고조선의 영토로 보는 식민사학자들에게는 이러한 사실들이 마치 기록이 잘못된 허구의 이야기로 들릴 것이다. 그러나 단군조선의 핵심 강역을 산서성에 놓고 보면 단군조선의 서안 서쪽 점령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님을 쉽게 느낄 수 있다.
아~! 단군조선은 실로 엄청나게 크고 위대했던 나라였던 것이다. 이런 나라를 이천년 넘게 다스린 47분의 단군을 곰의 신화로 만든 식민사학자들에게는 천벌이 내려야 할 것이다. 

서안피라미드.jpg
▲  섬서성 서안 근처에서 발견된 피라미드는 아래 사진과 같이 중국정부에서 나무를 심어 철저히 위장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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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림성 집안에 있는 피라미드들.  피라미드는 원형이 고인돌로 단군조선/고구려의 전통 무덤 형태이다.


곧 이어서 (2부) ‘낚시로 천하를 낚은 강태공의 조상은?’이 연재됩니다.

강태공의 고향으로 본 단군조선의 영토는? (4부)

성훈님 http://blog.joins.com/slsung   2010-05-03 21:52:58

아래 글은 본 시리즈의 (4부)입니다.
(1부) 섬서성 서안 서쪽까지 점령한 단군조선
(2부) 은나라를 멸한 주나라도 단군조선의 제후국
(3부) 낚시로 천하를 낚은 강태공의 조상은 누구인가?


병법과 권모술수에 뛰어난 강태공

(3부)에서의 내용과 같이 서백 희창(西伯 姬昌=周文王)은 위수(渭水)에서 여상(강태공)을 만나 수레에 모시고 와서는 그를 군사(軍師)로 임명하고 은나라를 뒤엎을 것을 비밀리에 의논했다. 그 때 강태공이 내놓은 계책은 주로 군사를 일으키는 것과 모략(謀略)이다. 후세 사람들이 병법과 주나라의 권모술수에 대해 말할 때 강태공을 그 시조(始祖)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동해가 고향인 강태공이 저 멀리 섬서성 서안 서쪽에 있는 위수까지 가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가 천하를 낚은 것은 강태공이 권모술수에 뛰어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것이라 하겠다. 강태공은 (3부)의 내용과 같이 미리 역관(점성술사)과 각본을 짜고 서백(西伯)이란 대어 중의 대어를 기다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얼마 후 서백 희창이 죽고 아들인 희발(姬發=武王)이 즉위했다. 강태공은 군사로서 희발을 도와 은나라를 멸하고 주나라를 일으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다. 그는 군사로서 모든 군을 장악하고는 그의 뛰어난 병법과 권모술수로 주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는다. “만약 강태공이 없었다면 주나라가 은나라를 멸할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그의 역활은 일등공신 중에서도 일등공신이었던 것이다. 

9년 희발(武王)은 은나라를 멸하기 위해서는 제후들의 협조가 필요한데 과연 그들이 동참할 것인지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어 도읍인 풍읍(豊邑:낙양)에서 군사를 일으켜 맹진(盟津)으로 진격한다. 그러자 사전에 약속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맹진으로 달려오는 제후가 800명이나 되었다. 모두들 은 주왕을 칠 때라고 말하나 희발(무왕)은 “서두르지 말라. 천명은 아직 은나라를 떠나지 않았다.”하고 일단 철군을 한다. 

은나라를 멸하는 희발(주무왕) 

드디어 11년 희발(무왕)은 제후들을 향해 동참할 것을 재촉하고는 서백(문왕)의 위패를 받들고 스스로를 태자 발이라 칭하고는 강태공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5천의 군사를 이끌고 맹진으로 나아가자 주변의 제후들도 속속 모여 들었다. 즉 이번 출정은 명망이 높았던 문왕의 뜻이라는 것을 대외에 알리려는 것이었다.

드디어 맹진에서 동쪽으로 사(汜:사수진) 땅으로 나아가 황하를 건넌 후 북상하여 백천(휘현)까지 올라가서는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은나라의 수도인 조가(朝歌:기현)를 향해 진격하였다. 드디어 주나라와 은나라는 목야(牧野)에서 서로 대치하게 되었다. 아래는 목야전투의 중국 자료이다.

公元前1046年(一说前1057年)正月,周武王统率兵车300乘,虎贲3000人,甲士4万5千人,浩浩荡荡东进伐商。同月下旬,周军进抵孟津,在那里与反商的庸、卢、彭、 濮、蜀(均居今汉水流)、羌、微(均居今渭水流域)、"667;(居今山西省平陆南)等部落的部队会合。武王利用商地人心归周的有利形势,率本部及协同自己作战的部落军队,于正月二十八日由孟津(今河南孟州市南)冒雨迅速东进。从汜地(今河南荥阳汜水镇)渡过黄河后,兼程北上,至百泉(今河南辉县西北)折而东行,直指朝歌。周师沿途没有遇 到商军的抵抗,故开进"034;利,仅经过6天的行程,便于二月初四拂晓抵达牧野。 周军进攻的消息传至朝歌,商朝廷上下一片惊恐。商纣王无奈之中只好仓促部署防御。但此时商军主力还远在东南地区,无法立即调回。于是只好武装大批奴隶,连同守卫国都的商军共约17万人(一说70万,殊难相信),由自己率"046;,开赴牧野迎战周师。
 

주무왕진군로.jpg
▲  당시 주나라의 도읍은 낙양.  맹진-->사수진-->휘현-->은나라의 도읍인 기현으로 갔다. 목야는 기현 서쪽 교외에 있다.  위휘현은 강태공의 고향으로 제나라 땅이 된다.  위휘현 근처에 제나라의 도읍인 영구와 임치가 있다.  즉 주나라는 발해(대야택)을 넘지 못했다.  소정방이 백제를 멸하기 위해 떠난 래주는 하남성 위휘현 아래 황하변이다.

주나라 군대가 목야로 진격할 때 백이.숙제가 나타나 주 무왕의 마차 앞으로 달려가 말고삐를 붙잡고 무왕에게 출병의 부당함을 고한다. 그러자 무왕 주위의 장수들이 백이.숙제를 죽이려고 하자 강태공이 “의인(義人)이니 살려주어라”라고 지시를 한다. 해서 백이.숙제는 목숨을 잃는 화를 면하고 그 자리를 떠나게 되었다. (백이.숙제에 대한 상세한 것은 제 6부에서 다룬다)

드디어 무왕은 목야에서 은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도읍인 조가에 입성하여 자살한 주왕의 시체에 화살 3개를 꼽고 마차에서 내려 다시 칼로 치고 황금으로 만든 도끼로 주왕의 목을 잘라 대백기의 끝에 걸었다. 다음 날 희발은 은나라의 궁전으로 들어가 즉위식을 올렸다. 희발의 쿠데타가 성공하여 은나라가 망하고 주(周)나라가 새로 탄생한 것이었다. 

강태공이 제후로 봉해진 제(齊) 땅은 어디인가? 

주나라 탄생의 일등공신인 강태공은 제(齊) 지방의 영구(營丘) 땅을 다스리는 제후로 봉해진다. 무왕의 동생인 주공 단에게는 곡부(曲阜)에 봉하고 노(魯)라고 했고, 소공 석은 연(燕)에, 동생인 숙선에게는 관(管)에, 동생 숙도를 채(蔡)에 봉하고 그밖에 각자의 공적에 따라 봉지를 주고 제후로 삼았다.

제후에게 하사하는 봉지는 통상 약 사방 100 ~ 200 리가량의 땅이었다. 당시 주나라의 전체 강역이 천리가 넘지 않았으므로 중국에서 주장하는 지금의 산동성에 노나라와 제나라가 있었고, 하북성 북경 근처에 연나라가 있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 하겠다. 노, 제, 연나라는 모두 하남성 황하 주변의 일개 군(郡) 정도의 영토였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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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노, 연이 하남성에 있었다고 고백한 중국지도. 중국은 역사왜곡을 위해 제나라와 노나라를 산동성으로, 연나라를 북경으로 옮긴다. 그러나 실제로는 산동성과 하북성과 산서성은 단군조선의 영토였다.  

강태공이 영구 땅에 도착할 무렵 느닷없이 래후(萊候)의 군사들이 공격을 해왔다. 상호간에 영구 땅을 차지하려는 공방전이 벌어진다. 그 원인은 당시 낙양에 있던 주나라가 은나라를 평정했을 뿐이지 멀리 떨어진 곳까지는 통치권이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래(萊)란 영구 땅 주변에 사는 만족(蠻族)이라고 <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래후를 물리치고 영구에 부임한 강태공은 정치 제도를 가다듬는데 있어 그 고장의 풍습을 귀히 여겼고 예절을 간소화 시켰다. 또한 상공업을 장려하여 고장 특산물인 소금과 생선으로 상업을 크게 일으키니 수많은 백성들이 제나라로 모여들어 강국으로 뻗어나가 춘추.전국 시대를 풍미하는 제나라의 기반을 확실히 다져놓는다.

우리는 이렇게 강태공으로부터 시작된 제나라가 산동성에 있었고 도읍은 임치(臨淄)로 알고 있으며, 위에서 언급된 래(萊) 땅을 지금의 산동성 래주(萊州)로 알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래주는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하기 위해 수군을 출발시킨 곳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그런 래주가 과연 어디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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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동성 임치 주변에 만들어 놓은 제나라 고도 영구의 유적은 가짜이다. 제나라 유적이 산동성에 있다는 것은 명백한 역사왜곡이다.

강태공의 고향인 동해(東海)는 어디인가? 

래주가 어디인지 알아보려면 강태공의 고향이 어디인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사마천이 쓴 <사기>에 따르면, “태공망 여상은 동쪽 끝 해안지대의 사람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강태공의 고향이 동해(황해) 바닷가로 알고 있다. 특히 산동성과 접해있는 강소성 연운항 근처에 동해(東海)라는 시가 있어 그쪽 출신으로 알기 쉽다.

중국은 산동성의 도읍인 제남(濟南)시와 임치(臨淄)시에 강태공의 가짜 묘를 만들어 놓고 산동성이 제(齊)나라 땅이었다고 알리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한 역사왜곡으로 산동성은 제나라 땅이 아니라 바로 단군조선의 땅이었다. 이를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을 뿐이다. 과연 그런지 지금부터 알아보기로 하겠다.

임치강태공묘.jpg
▲  중국은 강태공의 묘를 산동성 임치와 제남에 만들어 놓았다. 이 묘는 100% 가짜이다.

강태공의 고향을 중국 인터넷 백과사전으로 찾아보면 아래와 같이 나온다.
(원문) “姜太公故里,位于河南省新乡卫辉市西北十二公里处。公元前1210年农历八月初三,姜太公诞生于卫辉太公泉镇吕村。据《竹书纪年》上说,姜太公仙逝于“周康王六年”十月二十日。终年一百三十九岁。葬于卫辉太公泉。至今太公泉境内还保留着许多姜太公的历史遗迹,其中较为著名的有:姜太公墓、姜太公祠、姜太公庙、姜太公吕望表等。”

(번역) “강태공의 고향은 하남성 신향시 위휘현 서북 12Km에 있다. B.C 1210년 음력 8월 초삼일 위휘현 태공천진 여촌에서 태어났다. <죽서기년>에 따르면, 강태공의 서거는 주 강왕 6년 10월 20일로 139세였다. 장례는 위휘현 태공촌에서 치렀다. 지금의 태공촌 경내에는 강태공묘, 강태공 사당, 강태공여망표 등이 있다.”
 
위휘태공묘.jpg
▲   강태공의 고향인 하남성 신향시 위휘현에 있는 강태공의 진짜 묘.
사마천이 쓴 <사기>의 기록에는 “강태공은 동해(東海) 출신”이라고 간단히 기록되어 있다. 그런 강태공의 고향이 하남성 신향시 위휘현이므로 그 근처에서 바다로 불릴 수 있는 곳은 대야택(발해) 밖에 없다. 즉 고대 중국의 동해는 바로 산동성과 하남성 경계에 있는 대야택 즉 발해(渤海)였다. 당시 <사기>에 기록된 제나라의 동쪽 경계는 동해 즉 발해(대야택)로 황하변 하남성이 주나라의 주 무대였던 것이다.  (발해가 어디인가는 아래 자료 참조)
 
제목: 발해를 지명조작하여 역사를 왜곡한 중국
http://www.hinews.asia/sub_read.html?uid=288§ion=sc5§ion2=
발해 지명이동.jpg
▲  하남성과 산동성의 경계였던 발해(=동해)는 역사왜곡을 위해 지명이동되었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또 이런 기록이 있다. 주 무왕의 아들인 성왕(成王)이 아직 어릴 때 주위에서 주나라에게 반기를 들자 성왕은 강태공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린다. “동쪽 동해(東海)로부터 서쪽 황하(黃河)까지 남쪽 목릉(穆陵)으로부터 북쪽의 무태(无棣)까지 이 모든 지역의 제후들은 각자의 소신대로 반란군을 정벌해도 좋다.”즉 주나라의 동.서.남.븍 강역이 어디인지 보이는 대목이다.

여기서의 동해는 바로 강태공의 고향인 하남성 위휘현인 것이다. 따라서 제나라의 도읍인 영구나 임치는 바로 위휘현 서쪽에 있었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소정방이 수군을 출발시켰다는 래주도 위휘현 서쪽 가까운 황하변에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그런 제나라가 산동성에 있었다는 것은 명백한 역사왜곡 임을 알아야 한다.

맹자는 하나라 뒤의 은나라 주나라가 융성했을 때의 강역도 일천리가 넘지 않았다.(夏后殷周之盛地未過千里者也)고 말해 제나라의 종주국인 주나라도 그 영토가 천리를 넘지 못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당시 종주국인 주나라의 도읍은 하남성 낙양이었다. 어떻게 하남성 동쪽 끝인 대야택 건너의 산동성이 제나라의 영토가 될 수 있으리오!

황하 주변 하남성은 주나라의 강역이고, 산동성은 바로 단군조선의 땅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하남성의 북쪽인 산서성은 당시 백이.숙제의 나라인 고죽국이 있던 곳이므로 단군조선의 강역이었던 것이다. 중국에서는 고죽국을 은나라의 제후국이라 말하고 있으나 그건 어불성설로 고죽국은 명백한 단군조선의 제후국이었던 것이다.

<단군세기>에 따르면, “22세 색불루단군 때인 B.C 1266년 람국(藍國)이 매우 강성하여 고죽군(孤竹君)과 더불어 여러 적들을 쫓고 남으로 이동하니 은나라 땅과 가까웠다. 이에 병사를 나눠 진격하여 빈.기(邠岐)에 웅거하도록 하면서 나라를 여(黎)라 칭하고 서융과 함께 은나라 제후들 사이를 차지하고 있도록 하였으니 황제의 교화가 멀리 항산(恒山) 이남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기록되어 있어 그 근거가 된다.

또한 36세 매륵단군 때인 "B.C 653년 병력을 보내 수유(須臾)의 군대와 함께 연나라를 정벌하였다. 이를 연(燕)나라 사람이 제(齊)나라에 알리니 제나라가 고죽(孤竹)에 쳐들어 왔는데 이기지 못하고 화해를 구걸하고는 물러갔다."는 기록이 있어 고죽국과 연.제나라는 매우 가깝게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고죽국은 단군조선의 남쪽에 있었던 것이다.
 
하대형세도.jpg
▲  북경대학교재에 있는 하나라 형세도는 하남성 일대이다. 하나라에 이어 은나라와 주나라도 이 형세도와 비슷하다.  하남성 이외의 사방은 모두 단군조선의 땅이다.

<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강태공의 고향으로 본 고대 중국의 영토는 황하변 하남성 주변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의 산서성과 하북성 그리고 산동성과 섬서성 서안까지 하남성을 제외한 전 중국 대륙이 단군조선의 강역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단군조선의 강역은 세월에 따라 위축된 적도 있었으나 거의 그대로 이어져 후대에 고구려.백제.신라의 강역이 되는 것이다. 

이렇듯 위대하고 장엄했던 단군조선과 삼국의 영토를 만주와 한반도 일대로만 국한하는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반도사관의 이론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이론이라 하겠다. 식민사학자들이 이 땅에서 박멸되는 날이 어서 빨리 와야 우리의 장엄했던 역사가 화려하게 부활될 것이다. 그래야 중국의 지명조작을 통한 역사왜곡을 엄중하게 질책할 것이 아니겠는가!

 
이어지는 (6부)에서는 진시황 만리장성의 비밀이 밝혀집니다.

전능자가 주도한 고조선 역사

와당문화는 고조선 건국 초기부터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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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이웃추가 | 2016. 6. 26.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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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당문화는 고조선 건국 초기부터 시작되었다

 

 

Ⅰ. 서론

 

승리제단에서는 한민족의 뿌리가 이스라엘 민족이며, 고조선은 단지파가 기원전 1000년경 세운 최초의 고대국가라는 것을 계속 밝혀왔다. 그 근거로 대동강변에서 발견된 와당에 기록된 문양(文樣)이 고대 히브리어이며, 우리 민족의 풍습과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 민족의 풍습이 수십 개 동일하다는 점을 제시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우리말 속에 들어있는 히브리어를 찾아 우리가 알타이어를 사용하기 전에 히브리어를 썼었다는 점을 밝혔다.

 

​이처럼 고고학적으로 증명이 되는 유물이 있고, 문화사적으로도 인정되는 내용, 또한 언어학적으로 히브리어에서 온 우리말이 있는데도 역사학계에서는 현재까지도 이러한 사실(史實)을 외면하고 있다.

 

한민족의 뿌리가 되는 단지파가 가나안(지금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소라 성읍을 떠나 한반도까지 와서 대동강 유역에 고조선을 건립하였다고 해서, 만주지역의 홍산문명(紅山文明, 요하문명)이 고조선의 문화권에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기원전 15세기에서 13세기까지 지중해 연안에서 이집트의 청동기 문화와 블레셋의 철기 문화를 경험한 단지파가 지도자 삼손 장수를 잃고 지금의 레바논 남쪽 소라 성읍을 떠나 한반도까지 왔기 때문에, 대동강 유역에서 세워진 고조선은 이미 청동기와 철기를 결합한 우수한 문화의 터전 위에 전통적으로 이어오던 제정일치 사회를 열었던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3200년 전에 지중해 연안의 팔레스타인에서 동방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던 단지파는 알타이산맥 근교(지금의 중국 서북부)에 와서 약 200년간 우거하고 그리고 몽고(蒙古)를 거처 만주를 지나 압록강을 건너 대동강 유역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여기서 한민족의 뿌리가 되는 단지파의 이동 과정에서 중국의 주나라를 세운 주역이 단민족의 비주류로 추정되며 또한 몽골초원의 유목민이 단지파의 사람들로 구성되었음을 확연히 알 수 있다. 그리고 만주는 자연히 몽고의 단지파 사람들과 한반도 고조선의 단지파 사람들과의 가교 역할을 할 수밖에 없으며, 몽골의 단민족과 한반도의 단민족이 융화되던 그곳에서 홍산문명을 꽃피울 수 있었다.

 

본고에서는 고조선의 실체와 관련하여 와당문화를 중점으로 다루되 기존에 알려진 광범위한 학설의 언급을 피하고 독자적으로 연구한 와당문화의 기원을 밝히는 과정에서 특히 고조선 시대의 수막새에 그려진 문양 속에서 고조선 사람들의 정통 사상을 엿볼 수 있었다는 점에 큰 의의를 둔다.

 

 

Ⅱ . 본론

 

1. 연화문(蓮花紋) 수막새가 아니라 근화문(槿花紋) 수막새다

 

현재 학계에서 고구려시대 와당으로 인정되고 있는 연화문(蓮花紋) 수막새 다수가 잘못 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것은 고조선시대 사용된 근화문(槿花紋) 수막새이다. 와당문화가 한사군 시대에 중국으로부터 들어왔다고 알고 있는 기존의 학설은, 국가라는 형태로써의 고조선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한반도 초기 국가가 삼국시대부터 시작된다는 일제 강점기 일본 사학가의 편년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결과이다. 이는 고조선의 건국초기부터 찬란한 청동기와 철기문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무지의 소치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편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2333년에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오늘날 국사 교과서에서는 기원전 2000년경 내지 기원전 1500년경에 한반도의 청동기 시대가 열렸다고 한다. 그렇다면 청동기 시대에 국가가 성립되었다고 하는 것이 통설이므로 고조선의 건국원년을 고고학적 증거에 입각하여 재정립할 필요성이 있다.

 

​20세기 말에 이웃 나라인 중국이 역사학자, 고고학자, 천문학자 등 각 분야 전문가 200명을 동원하여 ‘하상주 단대공정(斷代工程)’을 시작했을 때, 중국의 학자들은 조선시대에 편찬된 동국통감에 고조선의 건국원년이 기원전 2333년이라고 기록하고 있음을 알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중국 최초의 국가 하(夏)나라의 건국연도를 기원전 2070년으로 설정하여 고조선보다 263년이나 뒤늦게 건국한 것으로 하였다. 이것은 고조선의 설립시기를 기원전 2333년으로 보지 않겠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중국 학계의 한반도 고조선 국가에 대한 관점은 “고조선은 한무제 당시 설립된 한사군(기원전 108년) 이전, 고대한반도 북부국가의 명칭이며 단군조선 및 기자, 위만조선 3개 왕조를 포함하고 있다(바이두 백과 古朝鮮)”고 본다. 세계사적으로 하나의 국가가 천 년의 역사를 존속한 예가 거의 없는데 승리제단의 조희성 총재는 “신라가 천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던 것과 같이 한민족의 최초 국가인 고조선도 중국의 한무제에 의해 멸망당하기 전까지 천 년 동안 역사를 간직했다”고 하는데, 이를 근거로 고조선의 건국원년을 기원전 1000년 전후로 추정해본다.

 

청동기 문화가 번성한 이집트에서 벽돌과 기와를 굽던 한민족의 뿌리 단지파가 기원전 1446년에 출애굽하고 그리고 가나안이었던 팔레스타인에 입성하여 약 2백년간 블레셋 민족과 대치하다가 결국 분배받은 기업을 차지하지 못하고 동쪽으로 이주하여 기원전 1000년경 대동강변에 고조선을 설립하였다. 고조선 건국 초기의 구성원들은 이미 이집트의 청동기 문명에서 습득한 1,000℃ 이상의 고온에서 벽돌과 기와를 구워내는 가마를 만들 줄 알았다. 그래서 평양 근교에서 출토되는 고조선의 초기 와당은 처음부터 정교한 문양을 새긴 특징을 보이며 수천 년의 장구한 세월 동안에도 보존될 수 있었다.

 

 

지붕의 기왓골 끝에 사용되었던 기와를 '수막새'라고 하는데, 이 수막새는 기원전 1000년경 대동강변에서 도래인(渡來人) 한민족이 고조선을 세울 당시 최초로 창안한 와당(瓦當)이다. 기왓집의 와당 문화는 고조선에서 중국으로 전파되었기 때문에, 중국 최초의 와당이 서주 중기(西周中期, BC 9세기중엽~ BC 771) 시대의 협서(陜西) 주원(周原) 유적지에서 소규모로 발견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기와의 사용은 대체로 한(漢)문화가 유입된 낙랑시대부터라고 추정하는 것이 오늘날 사학계의 통설인데, 이는 평양 근교에서 출토되는 고대 와당에 새겨진 문양의 기원을 제대로 알지 못한 데서 기인한다고 판단할 수 있다.

 

기원후 372년 소수림왕 때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와당에 새겨진 문양을 연꽃무늬의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해서 '연화문(蓮花紋)수막새'라고 통칭하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 이전의 고조선 시대에 제작된 원시 수막새는 무궁화 꽃씨(또는 보리씨앗)와 무궁화 잎사귀 등 무궁화와 관련된 것을 새긴 문양을 하고 있다. 고조선의 근화문(槿花紋)수막새는 무궁화 무늬를 알지 못한 삼국시대 사람들에 의해서 연꽃무늬의 수막새로 와전(訛傳)되기도 하였으며, 백제와 신라의 중흥기에 연꽃 모양을 그대로 표현하는 와당이 비로소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앞으로 고조선 수막새에 무궁화 문양을 새기게 된 동기를 자세히 언급하고자 한다.

 

 

2. 근화문(槿花文) 수막새로 볼 수밖에 없는 몇 가지 이유

 

고조선 수막새에 무궁화 문양이 새겨져 있다고 밝히면서 그 동기를 자세히 언급하고자 한다. 그 동기를 밝히기 전에 먼저 무궁화가 우리 민족에게 어떤 의미가 있으며 언제 전래되었는지 등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① 우리 민족의 상징 무궁화

 

무궁화는 우리 민족의 상징이다. 언제부터 무궁화가 우리의 상징이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무궁화에 대하여 BC 8-3세기 에 기록한 문헌이 있는 것을 볼 때 무궁화는 최소한 고조선 시대에도 우리민족에게 유의미한 꽃이었다는 것 을 알 수 있다. 춘추전국시대에 저술된 지리서(地理書)인 '산해경(山海經)’에 군자의 나라(고조선)에 훈화초(薰華草) 즉 무궁화가 있는데 아침에 피고 저녁에 진다고 기록하고 있다. 군자국(君子國)이라고 표현한 것은, 당시에 이미 고조선이 국가 형태를 갖춘 나라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논란이 있는 ‘단기고사(檀奇古史)’에는 근수(槿樹)로, ‘환단고기(桓檀古記)’에는 환화(桓花) 또는 천지화(天指化)로 표현되어 있고, 천신께 제사지내는 제단(祭壇) 둘레에 심은 것으로 보아 신성한 꽃으로 여겨졌음을 알 수 있다.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한반도를 일컬어 근역(槿域)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무궁화의 고장이라는 뜻이며, 신라시대에는 중국에 국서(國書)를 보낼 때‘신라’라는 국명 대신에 근화향(槿花鄕) 즉 무궁화 마을이라고 썼다. 또한 고려시대 이후 조선시대에는 과거(過擧)의 문무과에 급제한 사람에게 대나무 대롱 끝에 무궁화를 달아 어사관의 양쪽에 길쭉하게 끼워주었고, 궁중 연회 때 신하들이 좋은 음식을 바치며 임금의 만수무강을 빌 때, 그 신하들의 사모(紗帽)에 진찬화(進饌花)라고 하여 무궁화를 꽂았다. 이는 무궁화가 국가를 위하여 일하는 공복(公僕)이라는 의미도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전통은 현대에까지 이어져 대통령의 좌석이나 군경(軍警)의 계급장에도 무궁화가 들어있었던 것이다.

 

② 오엽화와 협력하여 신의 나라에 들어가자

 

승리제단에서는 고조선 시대 사용한 와당(사진 상단중앙) 문양에 나오는 ‘오엽화’는 무궁화라고 밝힌 바 있다.

 

 

  

 

위 문양의 해석을 신사훈 박사(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히브리어 전문가)에게 의뢰한 바 <오엽화와 협력하여 신의 나라에 들어가자>는 뜻이다. 그럼 왜 하필 ‘오엽화’가 무궁화인가. 무궁화는 꽃잎과 꽃술, 그리고 씨방에 이르기까지 5숫자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무궁화는 영생을 상징하는 꽃이요 무궁화 노래가 동요를 비롯하여 가요에도 있다. 무궁화는 글자 그대로 영원히 피는 꽃이므로 ‘영생’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우리 민족이 영생의 세계를 얼마나 고대했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③ 무궁화를 어떻게 가져왔나

 

그럼 고조선 건국 초기의 사람들은 그 당시 무궁화를 볼 수 없는 대동강 유역에 언제 어디서 무궁화 꽃씨를 가져와서 심게 되었는지 그 기원을 한민족의 이동과정에서 찾아보자. 무궁화는 학명이 Hibiscus syriacus이다. 이는 무궁화가 시리아 지방에서 자생한 꽃이라는 근거가 된다. 학명에 시리아를 적은 것은 우연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우리 민족이 이스라엘 야곱의 12지파 중 동쪽으로 사라진 단지파라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승리제단 조희성 총재의 말씀과 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다. 단지파는 블레셋 민족과 싸우던 중 기원전 1216년경에 장수 삼손을 잃고, 지금의 레바논 남쪽 소라 성읍을 떠나 동북쪽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시리아, 이라크, 이란의 북서쪽을 경유하여 카스피 해(海) 서안의 바쿠(Baku; 아제르바이잔의 수도)에 도달하였고, 바다를 만난 우리 민족은 배를 만들어 바다를 건너갈 때, 바쿠에서 무궁화(Hibiscus syriacus) 씨를 채집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바쿠는 북위 40도선에 위치하고 있지만 한겨울 평균 기온이 영상 4도로 온화하여 무궁화가 꽃필 수 있는 자연환경이 된다. 무궁화의 재배조건은 최소한 영상 몇 도가 되어야 한다.

 

온대지방에서 여름에 피는 꽃나무는 거의 없는데, 무궁화는 7∼10월에 약 100일 동안 계속하여 화려한 꽃을 피운다. 한반도에서는 제주도에서 평안남도까지 자랄 수 있지만 평안북도와 함경남도 그리고 만주에서는 자라지 못한다. 이러한 무궁화의 한반도 분포도를 염두에 두면, 고조선의 수도로 알려진 아사달(阿斯達)은 대동강 유역의 토성리(土城里)로 비정(比定)할 수 있다. 이유인즉 토성리에는 고조선 시대의 수막새가 다수 출토되고 있는데, 특히 그 수막새에 무궁화와 관련된 문양을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카스피 바다를 건넌 한민족은 동쪽으로 이동하여 중국 북부 알타이 산맥 부근에 이르러 그곳에서 일시 우거(寓居)한다는 것이 2백여 년 동안 살게 되었고, 이후 알타이 산맥을 넘어 몽고를 거쳐 만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에 도착한 후 대동강변에 고조선을 세웠던 것이다. 이때가 지금으로부터 3천여 년 전이다.

 

 

Ⅲ. 결론

 

고조선 건국 초기에 신전(神殿)을 지을 때, 지붕을 기와로 장식하였다. 당시 일반적인 주거형태는 나무나 풀로 제작한 집이었으나 신전과 관공서 등은 기와를 사용하였다. 그런데 지붕의 기왓골 끝에 사용되었던 기와, 즉 수막새는 인류 최초의 와당 건축물 양식으로 창작되어, 고조선의 수도로 비정되는 토성리에서 사용된 것이다. 기원전 1000년경 고조선의 원시 수막새에는 고조선의 나라꽃이라고 할 수 있는 무궁화를 최대한 실제 모습과 연관하여 새겨놓았다. 그런데 기원전 사오백년경의 고조선 시대의 중엽에 이르자 근화문 수막새에 새기던 무궁화 문양은 실제 모습을 그대로 구현하던 초기 문양과 다르게 단순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근화문 수막새

 

  

[그림1]의 근화문 수막새에는 고조선 초기 와당으로 무궁화 씨앗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새겨져 있다.

 

 

  

[그림2]의 근화문 수막새 역시 고조선 초기 와당으로 무궁화의 암술머리 5개를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무궁화는 꽃잎과 꽃술, 씨방 등 모두 5개로 구성되어 있다.

 

 

  

[그림3]의 근화문 수막새에는 다섯 갈래로 갈라진 잎사귀와 다섯 장인 꽃잎을 복합적으로 표현함으로써 무궁화의특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고조선의 근화문 수막새의 두드러진 특징은 수막새 중심에 일원상(一圓相)의 동심원 문양을 한결같이 고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고조선 백성들의 선조들이 섬겼던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연관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수막새 중앙에 일원상의 동심원 문양을 둔 것은 태양을 상징하였다기보다 유일신 하나님과 신(神)의 나라를 표상한 것으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천제를 지내는 제사터를 둥글게 쌓은 환구단 또는 원구단(圓丘壇)도 고조선 수막새의 동심원 기원(起源)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전능자가 주도한 고조선 역사

와당문화는 고조선 건국 초기부터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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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당문화는 고조선 건국 초기부터 시작되었다

 

 

Ⅰ. 서론

 

승리제단에서는 한민족의 뿌리가 이스라엘 민족이며, 고조선은 단지파가 기원전 1000년경 세운 최초의 고대국가라는 것을 계속 밝혀왔다. 그 근거로 대동강변에서 발견된 와당에 기록된 문양(文樣)이 고대 히브리어이며, 우리 민족의 풍습과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 민족의 풍습이 수십 개 동일하다는 점을 제시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우리말 속에 들어있는 히브리어를 찾아 우리가 알타이어를 사용하기 전에 히브리어를 썼었다는 점을 밝혔다.

 

​이처럼 고고학적으로 증명이 되는 유물이 있고, 문화사적으로도 인정되는 내용, 또한 언어학적으로 히브리어에서 온 우리말이 있는데도 역사학계에서는 현재까지도 이러한 사실(史實)을 외면하고 있다.

 

한민족의 뿌리가 되는 단지파가 가나안(지금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소라 성읍을 떠나 한반도까지 와서 대동강 유역에 고조선을 건립하였다고 해서, 만주지역의 홍산문명(紅山文明, 요하문명)이 고조선의 문화권에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기원전 15세기에서 13세기까지 지중해 연안에서 이집트의 청동기 문화와 블레셋의 철기 문화를 경험한 단지파가 지도자 삼손 장수를 잃고 지금의 레바논 남쪽 소라 성읍을 떠나 한반도까지 왔기 때문에, 대동강 유역에서 세워진 고조선은 이미 청동기와 철기를 결합한 우수한 문화의 터전 위에 전통적으로 이어오던 제정일치 사회를 열었던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3200년 전에 지중해 연안의 팔레스타인에서 동방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던 단지파는 알타이산맥 근교(지금의 중국 서북부)에 와서 약 200년간 우거하고 그리고 몽고(蒙古)를 거처 만주를 지나 압록강을 건너 대동강 유역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여기서 한민족의 뿌리가 되는 단지파의 이동 과정에서 중국의 주나라를 세운 주역이 단민족의 비주류로 추정되며 또한 몽골초원의 유목민이 단지파의 사람들로 구성되었음을 확연히 알 수 있다. 그리고 만주는 자연히 몽고의 단지파 사람들과 한반도 고조선의 단지파 사람들과의 가교 역할을 할 수밖에 없으며, 몽골의 단민족과 한반도의 단민족이 융화되던 그곳에서 홍산문명을 꽃피울 수 있었다.

 

본고에서는 고조선의 실체와 관련하여 와당문화를 중점으로 다루되 기존에 알려진 광범위한 학설의 언급을 피하고 독자적으로 연구한 와당문화의 기원을 밝히는 과정에서 특히 고조선 시대의 수막새에 그려진 문양 속에서 고조선 사람들의 정통 사상을 엿볼 수 있었다는 점에 큰 의의를 둔다.

 

 

Ⅱ . 본론

 

1. 연화문(蓮花紋) 수막새가 아니라 근화문(槿花紋) 수막새다

 

현재 학계에서 고구려시대 와당으로 인정되고 있는 연화문(蓮花紋) 수막새 다수가 잘못 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것은 고조선시대 사용된 근화문(槿花紋) 수막새이다. 와당문화가 한사군 시대에 중국으로부터 들어왔다고 알고 있는 기존의 학설은, 국가라는 형태로써의 고조선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한반도 초기 국가가 삼국시대부터 시작된다는 일제 강점기 일본 사학가의 편년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결과이다. 이는 고조선의 건국초기부터 찬란한 청동기와 철기문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무지의 소치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편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2333년에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오늘날 국사 교과서에서는 기원전 2000년경 내지 기원전 1500년경에 한반도의 청동기 시대가 열렸다고 한다. 그렇다면 청동기 시대에 국가가 성립되었다고 하는 것이 통설이므로 고조선의 건국원년을 고고학적 증거에 입각하여 재정립할 필요성이 있다.

 

​20세기 말에 이웃 나라인 중국이 역사학자, 고고학자, 천문학자 등 각 분야 전문가 200명을 동원하여 ‘하상주 단대공정(斷代工程)’을 시작했을 때, 중국의 학자들은 조선시대에 편찬된 동국통감에 고조선의 건국원년이 기원전 2333년이라고 기록하고 있음을 알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중국 최초의 국가 하(夏)나라의 건국연도를 기원전 2070년으로 설정하여 고조선보다 263년이나 뒤늦게 건국한 것으로 하였다. 이것은 고조선의 설립시기를 기원전 2333년으로 보지 않겠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중국 학계의 한반도 고조선 국가에 대한 관점은 “고조선은 한무제 당시 설립된 한사군(기원전 108년) 이전, 고대한반도 북부국가의 명칭이며 단군조선 및 기자, 위만조선 3개 왕조를 포함하고 있다(바이두 백과 古朝鮮)”고 본다. 세계사적으로 하나의 국가가 천 년의 역사를 존속한 예가 거의 없는데 승리제단의 조희성 총재는 “신라가 천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던 것과 같이 한민족의 최초 국가인 고조선도 중국의 한무제에 의해 멸망당하기 전까지 천 년 동안 역사를 간직했다”고 하는데, 이를 근거로 고조선의 건국원년을 기원전 1000년 전후로 추정해본다.

 

청동기 문화가 번성한 이집트에서 벽돌과 기와를 굽던 한민족의 뿌리 단지파가 기원전 1446년에 출애굽하고 그리고 가나안이었던 팔레스타인에 입성하여 약 2백년간 블레셋 민족과 대치하다가 결국 분배받은 기업을 차지하지 못하고 동쪽으로 이주하여 기원전 1000년경 대동강변에 고조선을 설립하였다. 고조선 건국 초기의 구성원들은 이미 이집트의 청동기 문명에서 습득한 1,000℃ 이상의 고온에서 벽돌과 기와를 구워내는 가마를 만들 줄 알았다. 그래서 평양 근교에서 출토되는 고조선의 초기 와당은 처음부터 정교한 문양을 새긴 특징을 보이며 수천 년의 장구한 세월 동안에도 보존될 수 있었다.

 

 

지붕의 기왓골 끝에 사용되었던 기와를 '수막새'라고 하는데, 이 수막새는 기원전 1000년경 대동강변에서 도래인(渡來人) 한민족이 고조선을 세울 당시 최초로 창안한 와당(瓦當)이다. 기왓집의 와당 문화는 고조선에서 중국으로 전파되었기 때문에, 중국 최초의 와당이 서주 중기(西周中期, BC 9세기중엽~ BC 771) 시대의 협서(陜西) 주원(周原) 유적지에서 소규모로 발견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기와의 사용은 대체로 한(漢)문화가 유입된 낙랑시대부터라고 추정하는 것이 오늘날 사학계의 통설인데, 이는 평양 근교에서 출토되는 고대 와당에 새겨진 문양의 기원을 제대로 알지 못한 데서 기인한다고 판단할 수 있다.

 

기원후 372년 소수림왕 때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와당에 새겨진 문양을 연꽃무늬의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해서 '연화문(蓮花紋)수막새'라고 통칭하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 이전의 고조선 시대에 제작된 원시 수막새는 무궁화 꽃씨(또는 보리씨앗)와 무궁화 잎사귀 등 무궁화와 관련된 것을 새긴 문양을 하고 있다. 고조선의 근화문(槿花紋)수막새는 무궁화 무늬를 알지 못한 삼국시대 사람들에 의해서 연꽃무늬의 수막새로 와전(訛傳)되기도 하였으며, 백제와 신라의 중흥기에 연꽃 모양을 그대로 표현하는 와당이 비로소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앞으로 고조선 수막새에 무궁화 문양을 새기게 된 동기를 자세히 언급하고자 한다.

 

 

2. 근화문(槿花文) 수막새로 볼 수밖에 없는 몇 가지 이유

 

고조선 수막새에 무궁화 문양이 새겨져 있다고 밝히면서 그 동기를 자세히 언급하고자 한다. 그 동기를 밝히기 전에 먼저 무궁화가 우리 민족에게 어떤 의미가 있으며 언제 전래되었는지 등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① 우리 민족의 상징 무궁화

 

무궁화는 우리 민족의 상징이다. 언제부터 무궁화가 우리의 상징이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무궁화에 대하여 BC 8-3세기 에 기록한 문헌이 있는 것을 볼 때 무궁화는 최소한 고조선 시대에도 우리민족에게 유의미한 꽃이었다는 것 을 알 수 있다. 춘추전국시대에 저술된 지리서(地理書)인 '산해경(山海經)’에 군자의 나라(고조선)에 훈화초(薰華草) 즉 무궁화가 있는데 아침에 피고 저녁에 진다고 기록하고 있다. 군자국(君子國)이라고 표현한 것은, 당시에 이미 고조선이 국가 형태를 갖춘 나라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논란이 있는 ‘단기고사(檀奇古史)’에는 근수(槿樹)로, ‘환단고기(桓檀古記)’에는 환화(桓花) 또는 천지화(天指化)로 표현되어 있고, 천신께 제사지내는 제단(祭壇) 둘레에 심은 것으로 보아 신성한 꽃으로 여겨졌음을 알 수 있다.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한반도를 일컬어 근역(槿域)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무궁화의 고장이라는 뜻이며, 신라시대에는 중국에 국서(國書)를 보낼 때‘신라’라는 국명 대신에 근화향(槿花鄕) 즉 무궁화 마을이라고 썼다. 또한 고려시대 이후 조선시대에는 과거(過擧)의 문무과에 급제한 사람에게 대나무 대롱 끝에 무궁화를 달아 어사관의 양쪽에 길쭉하게 끼워주었고, 궁중 연회 때 신하들이 좋은 음식을 바치며 임금의 만수무강을 빌 때, 그 신하들의 사모(紗帽)에 진찬화(進饌花)라고 하여 무궁화를 꽂았다. 이는 무궁화가 국가를 위하여 일하는 공복(公僕)이라는 의미도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전통은 현대에까지 이어져 대통령의 좌석이나 군경(軍警)의 계급장에도 무궁화가 들어있었던 것이다.

 

② 오엽화와 협력하여 신의 나라에 들어가자

 

승리제단에서는 고조선 시대 사용한 와당(사진 상단중앙) 문양에 나오는 ‘오엽화’는 무궁화라고 밝힌 바 있다.

 

 

  

 

위 문양의 해석을 신사훈 박사(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히브리어 전문가)에게 의뢰한 바 <오엽화와 협력하여 신의 나라에 들어가자>는 뜻이다. 그럼 왜 하필 ‘오엽화’가 무궁화인가. 무궁화는 꽃잎과 꽃술, 그리고 씨방에 이르기까지 5숫자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무궁화는 영생을 상징하는 꽃이요 무궁화 노래가 동요를 비롯하여 가요에도 있다. 무궁화는 글자 그대로 영원히 피는 꽃이므로 ‘영생’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우리 민족이 영생의 세계를 얼마나 고대했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③ 무궁화를 어떻게 가져왔나

 

그럼 고조선 건국 초기의 사람들은 그 당시 무궁화를 볼 수 없는 대동강 유역에 언제 어디서 무궁화 꽃씨를 가져와서 심게 되었는지 그 기원을 한민족의 이동과정에서 찾아보자. 무궁화는 학명이 Hibiscus syriacus이다. 이는 무궁화가 시리아 지방에서 자생한 꽃이라는 근거가 된다. 학명에 시리아를 적은 것은 우연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우리 민족이 이스라엘 야곱의 12지파 중 동쪽으로 사라진 단지파라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승리제단 조희성 총재의 말씀과 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다. 단지파는 블레셋 민족과 싸우던 중 기원전 1216년경에 장수 삼손을 잃고, 지금의 레바논 남쪽 소라 성읍을 떠나 동북쪽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시리아, 이라크, 이란의 북서쪽을 경유하여 카스피 해(海) 서안의 바쿠(Baku; 아제르바이잔의 수도)에 도달하였고, 바다를 만난 우리 민족은 배를 만들어 바다를 건너갈 때, 바쿠에서 무궁화(Hibiscus syriacus) 씨를 채집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바쿠는 북위 40도선에 위치하고 있지만 한겨울 평균 기온이 영상 4도로 온화하여 무궁화가 꽃필 수 있는 자연환경이 된다. 무궁화의 재배조건은 최소한 영상 몇 도가 되어야 한다.

 

온대지방에서 여름에 피는 꽃나무는 거의 없는데, 무궁화는 7∼10월에 약 100일 동안 계속하여 화려한 꽃을 피운다. 한반도에서는 제주도에서 평안남도까지 자랄 수 있지만 평안북도와 함경남도 그리고 만주에서는 자라지 못한다. 이러한 무궁화의 한반도 분포도를 염두에 두면, 고조선의 수도로 알려진 아사달(阿斯達)은 대동강 유역의 토성리(土城里)로 비정(比定)할 수 있다. 이유인즉 토성리에는 고조선 시대의 수막새가 다수 출토되고 있는데, 특히 그 수막새에 무궁화와 관련된 문양을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카스피 바다를 건넌 한민족은 동쪽으로 이동하여 중국 북부 알타이 산맥 부근에 이르러 그곳에서 일시 우거(寓居)한다는 것이 2백여 년 동안 살게 되었고, 이후 알타이 산맥을 넘어 몽고를 거쳐 만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에 도착한 후 대동강변에 고조선을 세웠던 것이다. 이때가 지금으로부터 3천여 년 전이다.

 

 

Ⅲ. 결론

 

고조선 건국 초기에 신전(神殿)을 지을 때, 지붕을 기와로 장식하였다. 당시 일반적인 주거형태는 나무나 풀로 제작한 집이었으나 신전과 관공서 등은 기와를 사용하였다. 그런데 지붕의 기왓골 끝에 사용되었던 기와, 즉 수막새는 인류 최초의 와당 건축물 양식으로 창작되어, 고조선의 수도로 비정되는 토성리에서 사용된 것이다. 기원전 1000년경 고조선의 원시 수막새에는 고조선의 나라꽃이라고 할 수 있는 무궁화를 최대한 실제 모습과 연관하여 새겨놓았다. 그런데 기원전 사오백년경의 고조선 시대의 중엽에 이르자 근화문 수막새에 새기던 무궁화 문양은 실제 모습을 그대로 구현하던 초기 문양과 다르게 단순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근화문 수막새

 

  

[그림1]의 근화문 수막새에는 고조선 초기 와당으로 무궁화 씨앗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새겨져 있다.

 

 

  

[그림2]의 근화문 수막새 역시 고조선 초기 와당으로 무궁화의 암술머리 5개를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무궁화는 꽃잎과 꽃술, 씨방 등 모두 5개로 구성되어 있다.

 

 

  

[그림3]의 근화문 수막새에는 다섯 갈래로 갈라진 잎사귀와 다섯 장인 꽃잎을 복합적으로 표현함으로써 무궁화의특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고조선의 근화문 수막새의 두드러진 특징은 수막새 중심에 일원상(一圓相)의 동심원 문양을 한결같이 고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고조선 백성들의 선조들이 섬겼던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연관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수막새 중앙에 일원상의 동심원 문양을 둔 것은 태양을 상징하였다기보다 유일신 하나님과 신(神)의 나라를 표상한 것으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천제를 지내는 제사터를 둥글게 쌓은 환구단 또는 원구단(圓丘壇)도 고조선 수막새의 동심원 기원(起源)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전능자가 주도한 고조선 역사

와당문화는 고조선 건국 초기부터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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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이웃추가 | 2016. 6. 26.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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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당문화는 고조선 건국 초기부터 시작되었다

 

 

Ⅰ. 서론

 

승리제단에서는 한민족의 뿌리가 이스라엘 민족이며, 고조선은 단지파가 기원전 1000년경 세운 최초의 고대국가라는 것을 계속 밝혀왔다. 그 근거로 대동강변에서 발견된 와당에 기록된 문양(文樣)이 고대 히브리어이며, 우리 민족의 풍습과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 민족의 풍습이 수십 개 동일하다는 점을 제시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우리말 속에 들어있는 히브리어를 찾아 우리가 알타이어를 사용하기 전에 히브리어를 썼었다는 점을 밝혔다.

 

​이처럼 고고학적으로 증명이 되는 유물이 있고, 문화사적으로도 인정되는 내용, 또한 언어학적으로 히브리어에서 온 우리말이 있는데도 역사학계에서는 현재까지도 이러한 사실(史實)을 외면하고 있다.

 

한민족의 뿌리가 되는 단지파가 가나안(지금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소라 성읍을 떠나 한반도까지 와서 대동강 유역에 고조선을 건립하였다고 해서, 만주지역의 홍산문명(紅山文明, 요하문명)이 고조선의 문화권에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기원전 15세기에서 13세기까지 지중해 연안에서 이집트의 청동기 문화와 블레셋의 철기 문화를 경험한 단지파가 지도자 삼손 장수를 잃고 지금의 레바논 남쪽 소라 성읍을 떠나 한반도까지 왔기 때문에, 대동강 유역에서 세워진 고조선은 이미 청동기와 철기를 결합한 우수한 문화의 터전 위에 전통적으로 이어오던 제정일치 사회를 열었던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3200년 전에 지중해 연안의 팔레스타인에서 동방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던 단지파는 알타이산맥 근교(지금의 중국 서북부)에 와서 약 200년간 우거하고 그리고 몽고(蒙古)를 거처 만주를 지나 압록강을 건너 대동강 유역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여기서 한민족의 뿌리가 되는 단지파의 이동 과정에서 중국의 주나라를 세운 주역이 단민족의 비주류로 추정되며 또한 몽골초원의 유목민이 단지파의 사람들로 구성되었음을 확연히 알 수 있다. 그리고 만주는 자연히 몽고의 단지파 사람들과 한반도 고조선의 단지파 사람들과의 가교 역할을 할 수밖에 없으며, 몽골의 단민족과 한반도의 단민족이 융화되던 그곳에서 홍산문명을 꽃피울 수 있었다.

 

본고에서는 고조선의 실체와 관련하여 와당문화를 중점으로 다루되 기존에 알려진 광범위한 학설의 언급을 피하고 독자적으로 연구한 와당문화의 기원을 밝히는 과정에서 특히 고조선 시대의 수막새에 그려진 문양 속에서 고조선 사람들의 정통 사상을 엿볼 수 있었다는 점에 큰 의의를 둔다.

 

 

Ⅱ . 본론

 

1. 연화문(蓮花紋) 수막새가 아니라 근화문(槿花紋) 수막새다

 

현재 학계에서 고구려시대 와당으로 인정되고 있는 연화문(蓮花紋) 수막새 다수가 잘못 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것은 고조선시대 사용된 근화문(槿花紋) 수막새이다. 와당문화가 한사군 시대에 중국으로부터 들어왔다고 알고 있는 기존의 학설은, 국가라는 형태로써의 고조선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한반도 초기 국가가 삼국시대부터 시작된다는 일제 강점기 일본 사학가의 편년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결과이다. 이는 고조선의 건국초기부터 찬란한 청동기와 철기문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무지의 소치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편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2333년에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오늘날 국사 교과서에서는 기원전 2000년경 내지 기원전 1500년경에 한반도의 청동기 시대가 열렸다고 한다. 그렇다면 청동기 시대에 국가가 성립되었다고 하는 것이 통설이므로 고조선의 건국원년을 고고학적 증거에 입각하여 재정립할 필요성이 있다.

 

​20세기 말에 이웃 나라인 중국이 역사학자, 고고학자, 천문학자 등 각 분야 전문가 200명을 동원하여 ‘하상주 단대공정(斷代工程)’을 시작했을 때, 중국의 학자들은 조선시대에 편찬된 동국통감에 고조선의 건국원년이 기원전 2333년이라고 기록하고 있음을 알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중국 최초의 국가 하(夏)나라의 건국연도를 기원전 2070년으로 설정하여 고조선보다 263년이나 뒤늦게 건국한 것으로 하였다. 이것은 고조선의 설립시기를 기원전 2333년으로 보지 않겠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중국 학계의 한반도 고조선 국가에 대한 관점은 “고조선은 한무제 당시 설립된 한사군(기원전 108년) 이전, 고대한반도 북부국가의 명칭이며 단군조선 및 기자, 위만조선 3개 왕조를 포함하고 있다(바이두 백과 古朝鮮)”고 본다. 세계사적으로 하나의 국가가 천 년의 역사를 존속한 예가 거의 없는데 승리제단의 조희성 총재는 “신라가 천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던 것과 같이 한민족의 최초 국가인 고조선도 중국의 한무제에 의해 멸망당하기 전까지 천 년 동안 역사를 간직했다”고 하는데, 이를 근거로 고조선의 건국원년을 기원전 1000년 전후로 추정해본다.

 

청동기 문화가 번성한 이집트에서 벽돌과 기와를 굽던 한민족의 뿌리 단지파가 기원전 1446년에 출애굽하고 그리고 가나안이었던 팔레스타인에 입성하여 약 2백년간 블레셋 민족과 대치하다가 결국 분배받은 기업을 차지하지 못하고 동쪽으로 이주하여 기원전 1000년경 대동강변에 고조선을 설립하였다. 고조선 건국 초기의 구성원들은 이미 이집트의 청동기 문명에서 습득한 1,000℃ 이상의 고온에서 벽돌과 기와를 구워내는 가마를 만들 줄 알았다. 그래서 평양 근교에서 출토되는 고조선의 초기 와당은 처음부터 정교한 문양을 새긴 특징을 보이며 수천 년의 장구한 세월 동안에도 보존될 수 있었다.

 

 

지붕의 기왓골 끝에 사용되었던 기와를 '수막새'라고 하는데, 이 수막새는 기원전 1000년경 대동강변에서 도래인(渡來人) 한민족이 고조선을 세울 당시 최초로 창안한 와당(瓦當)이다. 기왓집의 와당 문화는 고조선에서 중국으로 전파되었기 때문에, 중국 최초의 와당이 서주 중기(西周中期, BC 9세기중엽~ BC 771) 시대의 협서(陜西) 주원(周原) 유적지에서 소규모로 발견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기와의 사용은 대체로 한(漢)문화가 유입된 낙랑시대부터라고 추정하는 것이 오늘날 사학계의 통설인데, 이는 평양 근교에서 출토되는 고대 와당에 새겨진 문양의 기원을 제대로 알지 못한 데서 기인한다고 판단할 수 있다.

 

기원후 372년 소수림왕 때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와당에 새겨진 문양을 연꽃무늬의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해서 '연화문(蓮花紋)수막새'라고 통칭하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 이전의 고조선 시대에 제작된 원시 수막새는 무궁화 꽃씨(또는 보리씨앗)와 무궁화 잎사귀 등 무궁화와 관련된 것을 새긴 문양을 하고 있다. 고조선의 근화문(槿花紋)수막새는 무궁화 무늬를 알지 못한 삼국시대 사람들에 의해서 연꽃무늬의 수막새로 와전(訛傳)되기도 하였으며, 백제와 신라의 중흥기에 연꽃 모양을 그대로 표현하는 와당이 비로소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앞으로 고조선 수막새에 무궁화 문양을 새기게 된 동기를 자세히 언급하고자 한다.

 

 

2. 근화문(槿花文) 수막새로 볼 수밖에 없는 몇 가지 이유

 

고조선 수막새에 무궁화 문양이 새겨져 있다고 밝히면서 그 동기를 자세히 언급하고자 한다. 그 동기를 밝히기 전에 먼저 무궁화가 우리 민족에게 어떤 의미가 있으며 언제 전래되었는지 등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① 우리 민족의 상징 무궁화

 

무궁화는 우리 민족의 상징이다. 언제부터 무궁화가 우리의 상징이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무궁화에 대하여 BC 8-3세기 에 기록한 문헌이 있는 것을 볼 때 무궁화는 최소한 고조선 시대에도 우리민족에게 유의미한 꽃이었다는 것 을 알 수 있다. 춘추전국시대에 저술된 지리서(地理書)인 '산해경(山海經)’에 군자의 나라(고조선)에 훈화초(薰華草) 즉 무궁화가 있는데 아침에 피고 저녁에 진다고 기록하고 있다. 군자국(君子國)이라고 표현한 것은, 당시에 이미 고조선이 국가 형태를 갖춘 나라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논란이 있는 ‘단기고사(檀奇古史)’에는 근수(槿樹)로, ‘환단고기(桓檀古記)’에는 환화(桓花) 또는 천지화(天指化)로 표현되어 있고, 천신께 제사지내는 제단(祭壇) 둘레에 심은 것으로 보아 신성한 꽃으로 여겨졌음을 알 수 있다.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한반도를 일컬어 근역(槿域)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무궁화의 고장이라는 뜻이며, 신라시대에는 중국에 국서(國書)를 보낼 때‘신라’라는 국명 대신에 근화향(槿花鄕) 즉 무궁화 마을이라고 썼다. 또한 고려시대 이후 조선시대에는 과거(過擧)의 문무과에 급제한 사람에게 대나무 대롱 끝에 무궁화를 달아 어사관의 양쪽에 길쭉하게 끼워주었고, 궁중 연회 때 신하들이 좋은 음식을 바치며 임금의 만수무강을 빌 때, 그 신하들의 사모(紗帽)에 진찬화(進饌花)라고 하여 무궁화를 꽂았다. 이는 무궁화가 국가를 위하여 일하는 공복(公僕)이라는 의미도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전통은 현대에까지 이어져 대통령의 좌석이나 군경(軍警)의 계급장에도 무궁화가 들어있었던 것이다.

 

② 오엽화와 협력하여 신의 나라에 들어가자

 

승리제단에서는 고조선 시대 사용한 와당(사진 상단중앙) 문양에 나오는 ‘오엽화’는 무궁화라고 밝힌 바 있다.

 

 

  

 

위 문양의 해석을 신사훈 박사(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히브리어 전문가)에게 의뢰한 바 <오엽화와 협력하여 신의 나라에 들어가자>는 뜻이다. 그럼 왜 하필 ‘오엽화’가 무궁화인가. 무궁화는 꽃잎과 꽃술, 그리고 씨방에 이르기까지 5숫자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무궁화는 영생을 상징하는 꽃이요 무궁화 노래가 동요를 비롯하여 가요에도 있다. 무궁화는 글자 그대로 영원히 피는 꽃이므로 ‘영생’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우리 민족이 영생의 세계를 얼마나 고대했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③ 무궁화를 어떻게 가져왔나

 

그럼 고조선 건국 초기의 사람들은 그 당시 무궁화를 볼 수 없는 대동강 유역에 언제 어디서 무궁화 꽃씨를 가져와서 심게 되었는지 그 기원을 한민족의 이동과정에서 찾아보자. 무궁화는 학명이 Hibiscus syriacus이다. 이는 무궁화가 시리아 지방에서 자생한 꽃이라는 근거가 된다. 학명에 시리아를 적은 것은 우연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우리 민족이 이스라엘 야곱의 12지파 중 동쪽으로 사라진 단지파라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승리제단 조희성 총재의 말씀과 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다. 단지파는 블레셋 민족과 싸우던 중 기원전 1216년경에 장수 삼손을 잃고, 지금의 레바논 남쪽 소라 성읍을 떠나 동북쪽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시리아, 이라크, 이란의 북서쪽을 경유하여 카스피 해(海) 서안의 바쿠(Baku; 아제르바이잔의 수도)에 도달하였고, 바다를 만난 우리 민족은 배를 만들어 바다를 건너갈 때, 바쿠에서 무궁화(Hibiscus syriacus) 씨를 채집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바쿠는 북위 40도선에 위치하고 있지만 한겨울 평균 기온이 영상 4도로 온화하여 무궁화가 꽃필 수 있는 자연환경이 된다. 무궁화의 재배조건은 최소한 영상 몇 도가 되어야 한다.

 

온대지방에서 여름에 피는 꽃나무는 거의 없는데, 무궁화는 7∼10월에 약 100일 동안 계속하여 화려한 꽃을 피운다. 한반도에서는 제주도에서 평안남도까지 자랄 수 있지만 평안북도와 함경남도 그리고 만주에서는 자라지 못한다. 이러한 무궁화의 한반도 분포도를 염두에 두면, 고조선의 수도로 알려진 아사달(阿斯達)은 대동강 유역의 토성리(土城里)로 비정(比定)할 수 있다. 이유인즉 토성리에는 고조선 시대의 수막새가 다수 출토되고 있는데, 특히 그 수막새에 무궁화와 관련된 문양을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카스피 바다를 건넌 한민족은 동쪽으로 이동하여 중국 북부 알타이 산맥 부근에 이르러 그곳에서 일시 우거(寓居)한다는 것이 2백여 년 동안 살게 되었고, 이후 알타이 산맥을 넘어 몽고를 거쳐 만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에 도착한 후 대동강변에 고조선을 세웠던 것이다. 이때가 지금으로부터 3천여 년 전이다.

 

 

Ⅲ. 결론

 

고조선 건국 초기에 신전(神殿)을 지을 때, 지붕을 기와로 장식하였다. 당시 일반적인 주거형태는 나무나 풀로 제작한 집이었으나 신전과 관공서 등은 기와를 사용하였다. 그런데 지붕의 기왓골 끝에 사용되었던 기와, 즉 수막새는 인류 최초의 와당 건축물 양식으로 창작되어, 고조선의 수도로 비정되는 토성리에서 사용된 것이다. 기원전 1000년경 고조선의 원시 수막새에는 고조선의 나라꽃이라고 할 수 있는 무궁화를 최대한 실제 모습과 연관하여 새겨놓았다. 그런데 기원전 사오백년경의 고조선 시대의 중엽에 이르자 근화문 수막새에 새기던 무궁화 문양은 실제 모습을 그대로 구현하던 초기 문양과 다르게 단순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근화문 수막새

 

  

[그림1]의 근화문 수막새에는 고조선 초기 와당으로 무궁화 씨앗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새겨져 있다.

 

 

  

[그림2]의 근화문 수막새 역시 고조선 초기 와당으로 무궁화의 암술머리 5개를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무궁화는 꽃잎과 꽃술, 씨방 등 모두 5개로 구성되어 있다.

 

 

  

[그림3]의 근화문 수막새에는 다섯 갈래로 갈라진 잎사귀와 다섯 장인 꽃잎을 복합적으로 표현함으로써 무궁화의특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고조선의 근화문 수막새의 두드러진 특징은 수막새 중심에 일원상(一圓相)의 동심원 문양을 한결같이 고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고조선 백성들의 선조들이 섬겼던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연관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수막새 중앙에 일원상의 동심원 문양을 둔 것은 태양을 상징하였다기보다 유일신 하나님과 신(神)의 나라를 표상한 것으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천제를 지내는 제사터를 둥글게 쌓은 환구단 또는 원구단(圓丘壇)도 고조선 수막새의 동심원 기원(起源)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고대 히브리어 와당.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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