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국학원 http://www.kookhakwon.org


환웅세력의 이주와 홍산문화

 

저자 정형진은 1985년 연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천년고도 경주로 내려가 지난 30여 년 동안 한국 고대사와 고대 종교문화를 연구해오고 있다. 신라얼문화연구원 원장이다.



동이족은 단군신화의 주인공이 아니다


   필자는 한국의 고대종교와 문화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고 있다. 한민족의 정신사를 일관되게 관통하고 있는 그 무엇을 이해하려면 가장 시급한 것이 한민족 초기공동체를 담당한 사람과 그 이후의 주도세력이 누구인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그들의 정신세계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여 필자는 단군신화의 주인공인 환웅세력과 곰 토템 부족, 부여와 삼국의 왕족 세력인 부여족, 신라의 김씨 왕족 등에 관해서 연구했고 그 결과를 책으로 발표했다.


  왜 한민족 초기 공동체를 주도한 주민에 관한 이해가 필요한가.  가령 최치원 선생이 풍류도가 유불선 삼교를 포함한다고 했을 때, 풍류도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한민족 초기 공동체를 주도한 사람들의 생각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그들의 정신문화와 연결된 풍류도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풍류도에 관해서 많은 사람들이 연구하고 글을 발표하지만 동어반복적인 표현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도 한민족 초기공동체를 구성한 사람들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강단학자들은 문헌자료가 부족함만 탓하고 있다. 요서지역에서 요하문명이 대대적으로 발굴되어도 깊이 연구하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한민족 초기 공동체를 구성한 사람들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궁금해 하지만 아직까지 정설이 없다.


  혹자는 한민족 초기 공동체를 이끈 사람들이 동이족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동이족이라는 명칭 자체를 지나치게 확대해석해서 적용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 문헌상으로 볼 때 선진시대까지의 동이족은 산동지역과 그 이남의 회하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진·한 시기를 거치면서 중원 세력들이 대제국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산동을 비롯한 이전의 동이 지역이 중국에 편입되면서 연산산맥 너머의 동북 혹은 동쪽 지역을 동이라 칭했다. 

  그러므로 엄격히 말하면 산동지역의 동이를 한민족 공동체의 주맥(主脈)이라고 할 수 없다.   그들 중 일부가 동북으로 이동했다가 한반도로 이주하기는 했겠지만 그들이 한민족 초기 공동체(단군신화의 무대)의 주역은 아니었을 것이다.


  1980년대 이후 홍산지역의 신석기문화가 대대적으로 발굴됨으로써 그 지역의 문화가 한민족 초기 공동체와 관련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런데 언론이나 학자들 중에는 그 지역이 동이족의 문화라고 하면서 한민족과 동이족을 연결시키고 있다.   하지만 중국문헌에서 선진 시기에 동이를 칭하던 사람들과 홍산문화 지역 사람들은 별개의 사람들이다.


  요하지역의 홍산문화와 그 이전의 신석기 문화 유적에서 새를 토템으로 하는 사람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그들이 남하하여 산동지역으로 내려가 대문구 문화 등의 신석기 문화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의미에서는 요하문명 지역의 일부 세력을 동이족이라고 소급해서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결과를 가지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선진 문헌 속의 동이족은 아니다.   선진 문헌에서 동이족을 말할 때 북경 이북 혹은 연산 너머의 어느 공간에는 숙신이라는 정치공동체가 있었다.   은나라 말기에 은나라가 동이족을 정벌했을 때 ‘숙신이 하례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산동 중심의 동이와 별개로 그 이북 지역에 숙신이라는 정치공동체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들 숙신에 대해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분명 조선이란 정치공동체보다 먼저 이들 지역에 등장한다.

 


홍산문화의 곰 토템인과 공공족(共工族)의 이주


  또한 후기 홍산문화(기원전 3500년 전후) 지역의 주도세력은 곰을 토템으로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에 대해서 중국학자들도 동의하고 있다.   그렇다면 동이족과 이들 곰 토템 부족을 연결할 수 있는가?   곰 토템 부족은 기본적으로 바이칼 이동과 동시베리아 지역을 연고로 한 사람들이 남하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후기 홍산문화의 담당자들을 동이족이라고 칭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그리고 한민족 초기공동체의 주도세력에 대해서 연구할 때 유라시아 문명사의 큰 흐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일부 학자들은 바이칼 지역이 한민족 초기 구성원들의 기원지일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단군신화가 보여 주듯이 환웅 세력은 현지 주민보다 앞선 종교이데올로기나 문화 역량을 가지고 이주해 온 사람들이다.


   때문에 후기 홍산문화와 그것에 뒤이어 일어난 하가점하층문화를 단군신화의 초기무대로 상정하려면, 유라시아 문명사에서 그들보다 앞선 이데올로기나 문화역량이 있는 지역에서 환웅세력이 이주해 왔어야만 한다.   바이칼 지역이 홍산문화 지역보다 앞선 문화 지역이었다는 것이 고고학적으로 밝혀지고 있는가? 아니다.

   그렇다면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하지 않나. 그곳이 어디인가?   

  바로 중국 황하 중류지역의 신석기 문화인 앙소문화 지역이다.   우리가 인류 4대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로 배운 황하문명이 바로 앙소문화이다. 이들 앙소문화인과 홍산문화인이 교류하고 있었음은 이미 고고학적으로 증명되고 있다.


  한 가지 더 언급하고 넘어가자.   최근 들어 요하지역의 신석기인들이 이른 시기부터 상당한 역량을 가진 요하문명 일구었다는 것이 밝혀지자, 일부 사람들은 그곳이 환웅 세력, 더 나아가 환인 세력의 근거지인 것처럼 믿고 싶어 한다.

  그러나 현존하는 단군신화를 바탕으로 이해하면, 환웅은 이주세력임이 분명하다. 다른 곳에서 이주해온 세력으로 그들이 누구이며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가를 파악해야 한다. 


  필자는 문명사적인 관점에서 환웅세력의 이주를 추적해 보았다. 환웅세력에 관한 단서는 삼국시대 선덕여왕 때 활약한 자장스님에게서 찾았다.『삼국유사』탑상편, 황룡사 9층탑조에 보면 자장 스님이 당나라로 유학을 가서 중국 오대산에서 문수보살과 감통하여 문수보살에게서 전해들은 말이 실려 있다.


“너희 국왕은 인도의 찰리종족(刹利種族)의 왕인데 이미 불기(佛記)를 받았으므로 남다른 인연이 있으며, 동이공공(共工)의 종족과는 같지 않다.”


  위에 인용한 자료는 엄밀히 말하면 역사연구의 직접적인 자료가 될 수 없다.   그러나 한민족의 기원을 연구함에 있어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현실을 감안하고, 자장이라는 인물이 당시 최고 지식인의 한 사람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무턱대고 무시할 필요는 없다.   그의 아버지 김무력은 진덕여왕 때까지 재상을 비롯한 권신으로 활동하던 진골 귀족이다.   자장 또한 재상자리를 거부하고 출가한 인물이다.   자장은 지금은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지만 당시까지 전해오던 어떤 정보, 혹은 중국 유학에서 얻은 정보를 토대로 위와 같은 기록을 남겼을 것으로 추론해 볼 수 있다.


  필자는 이미 발표한 책에서 신라의 김씨 왕족은 오래전에 천산(天山)을 넘어와 그곳의 몽골리안[姜族 등]과 혼혈된 사람들이 동쪽으로 이주하여 신라까지 들어오게 된 과정을 밝힌바 있다.   필자도 어떤 계기가 있어 자장의 정보가 사실일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해서 이들 공공족이 단군조선의 주도세력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다년간 자료를 검토하고 추적했다.   그 결과 한민족 고유의 핵심 문화코드를 공공족의 문화로 해석할 수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공공족 이동로

 

  필자가 파악한 공공족의 원주지는 천산(天山)이나 그 이서 지역과 관련이 있기는 하지만, 오래 전에 그들의 조상은 하서회랑을 거쳐서 황화 중류 지역, 즉 후에 한원(韓原)이라고 불린 지역에 들어와 농사와 어렵에 종사하면서 살았다.   그들이 일군 문화가 바로 일명 황하문명이라고 하는 앙소문화이다. 그들은 황제계의 사람들이 중원의 패권을 장악한 초기까지도 중원에 살았으며, 그 이후에도 상당기간 중원의 북쪽과 동북쪽을 거점으로 활동했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중국의 전설 시대의 이야기에 그들의 존재가 강하게 각인되어 있다.   그들은 황제계 이전에 천하의 주인이기도 했으며, 중원 지역의 농경문화를 주도했다. 그들이 중원에서 황제계에게 실질적으로 밀리기 시작한 것은 요임금 때이다. 단군신화에 보이는 요임금 50년의 비밀은 이러한 역사적 상황을 이해함으로써 풀 수 있다.   그들은 새로운 세계인 동북 지역으로로 이주 했고 거기에서 자신들의 이상세계를 건설했다.


  잠시 중국 문헌에 나타나는 공공에 대해서 살펴보자. 공공(共工)은 복희 여왜의 시대가 끝날 무렵 등장한다. 당나라의 학자인 사마정(司馬貞)은 여왜의 천하를 노려 공공이 반란을 일으키고, 그것을 축융(祝融)이 평정했다고 했다. 축융은 염제의 후손이라고도 하고 황제의 후손이라고도 하는 전욱(?頊)의 손자이다.


  또한 공공은 인면사신주발(人面蛇身朱髮)이라고 묘사되기도 한다.   그 부하인 상류(相柳)는 머리가 아홉인 인면사신이고 푸른색의 흉측한 모습이었다.   공공은 『神異經』에 완우(頑愚)하다고 표현되었고, 『周語』에는 ‘천하를 해치다’라고 기록되었다.   이러한 표현으로 미루어 보아 공공은 중원 세계에서 상당히 미움을 샀던 세력이었던 것 같다.   그는 중국의 고대 신화세계에서 자주 등장하는데 항상 악당의 역할로 등장한다.   그는 시간과 관계없이 악당이 필요할 때면 끌려나왔다.


  공공의 또 다른 전적을 보자. 『사기』 초세가에 의하면, 전욱의 증손인 중려는 제 곡(황제의 증손)을 섬기고, 공공의 반란에 임해서 토벌하라는 명령을 받았는데도 실패해서 주살 당했다.   그뿐만 아니라 요임금 시대에도 공공은 유주(幽州, 현 북경 주변)로 쫓겨나고,   순임금 때에는 유주로 유배를 갔다. 공공은 우(禹)의 시대에 또 다시 추방당한다.


  위에 열거한 정보들로 우리는 공공과 후일 중원을 주도한 세력 간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신화 속의 공공은 때를 가리지 않고 나타났다가는 당하고 있었다.   아무리 신화 속의 신이라고 천 년 가까이에 걸쳐서 계속 나타난다는 것은 너무 집요하다.   이것은 공공을 조상신이라고 우러르는 부족이 끊임없이 중원정권과 충돌한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공공의 후예인 한민족의 영적 자존심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북경 지역인 유주로 이주한 공공족


  공공은 요임금 때 처음으로 유주지역으로 축출 되었는데, 당시 그들이 이주해간 곳이 지금의 북경시 밀운현이다. 밀운현에는 북경대학교 역사학계에서 발굴한 공공성 유지가 남아 있다.   한동안 그곳에 머물던 공공족이 연산을 넘어 홍산문화 지역으로 들어와 하가점하층문화의 주도 세력이 된다.   이들이 바로 숙신이라고 중국문헌에 기록된 사람들로 이들을 필자는 단군숙신이라고 규정한다.

 

밀운수고의 반대편에서 바라본 운봉산과 공공성 유지

 

  이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한 세력은 길림성 방향으로 이동하여 숙신의 명맥을 이어가고, 다른 한 세력은 의무려산(醫巫閭山) 지역을 거쳐서 요동으로 진입한다.   요동지역으로 들어온 숙신 인들이 그곳에 고인돌을 만들었으며, 후대에 진국으로 불린 사람들의 조상이다. 


  숙신이 진번과 관련됨은 중국학자도 인정한다.   최근에 고구려를 자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려는 의도를 드러낸 중국의 ‘동북공정’이 발표됨으로써 야기된 고구려사 논쟁의 중심에 섰던 손진기도 숙신을 후대에 진번이라고 불렸다고 보았다.   

  진번의 진(眞)이 숙신계 주민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주장은 안정복에 의해서도  제기되었다.   진번에 대해서 안정복은 『동사강목』「고이진번고(考異眞番考)」에서 진번의 진(眞)은 숙신의 신(?)에서 나왔고, 후세의 여진의 진(眞)은 진번의 진(眞)을 따른 것이라고 했다. 신채호를 비롯한 후대의 역사학자들도 이를 계승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요동으로 들어왔던 숙신인들이 문헌에는 기록되어있지 않지만 요동에 살 때 혹은 그 이전부터 진인(辰人) 혹은 진인(眞人)으로 불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진국이라는 나라의 구성원의 정통성이 숙신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북경시 밀운현 중심가에 있는‘박달촌[白檀忖]의 흔적,

이곳은 수(隋)나라 초(598년)에 단주(檀州)로 불린 이래

1368년까지 반복적으로 중국왕조에 의해서 檀州로 불리던 곳이다.


 

  앞에서 자장 스님은 문수보살에게 감응해서 얻은 정보라고 하면서, ‘신라 김씨 왕족 이전의 주도세력을 동이공공이라’고 했다. 김씨 왕족들이 주도하기 이전의 신라를 주도한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진한 12국의 하나인 사로국을 모태로 일어난 신라인들이었다. 진한 12국의 하나였던 사로국에서 출발한 신라는 공공족과 요서지역의 웅녀가 만나서 이루었던 단군숙신의 후예들인 진한인들과 단군숙신을 뒤이어 대릉하 유역에서 발흥한 고조선인들이 평양으로 들어왔다가 경상도 지역으로 이주한 사로 6촌인들이 힘을 합쳐 세운 나라이다.

 다시 말하면 박혁거세는 진한 12국 중 하나인 사로국 지역에 들어온 고조선계 6촌 사람들의 옹립을 받아서 신라를 건국했다.  이들 주도세력은 범 숙신계, 즉 최근에 회자되고 있는 쥬신족이 주도한 나라이다.


환웅의 문화 한민족의 의식과 무의식 속에 면면히 흐르고 있다.


  공공족의 문화유산으로 한민족의 유무형문화의 뿌리를 이해 할 수 있다. 


1. 진한인들이 왜 편두를 했는지, 


2. 무당들이 왜 고깔모자를 쓰는지, 


3. 산신제를 올릴 때, 굿을 할 때 왜 명태나 북어를 바치는지,


4. 조선 후기의 무신도에는 왜 칠성·고깔제석·삼신제석만이 고깔모자를 쓰는 지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다.


5. 더불어 한민족의 주도 종교인 칠성신앙이 바로 공공족에 그것에서 시작되었음도 밝힌다.


6. 또한 삼한 지역의 종교문화인 ‘소도’도 공공족의 문화로 이해할 수 있다.


다양한 도판 자료를 이용해 공공족의 이동과 그들이 가지고 있던 문화 흐름을 강의 중에 제시할 것이다.

 

○ 주 제: 환웅세력의 이주와 홍산문화
○ 일 시: 2012년 6월 12일(화) 오후 7시~9시
○ 장 소: 광화문 삼청동 입구 대한출판문화협회 4층
○ 강 사: 정형진 역사연구가
○ 주 최: (사)국학원
○ 찾아오시는 길: 3호선 안국역 1번 출구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10분거리  
○ 참가비: 무료
○ 후 원: ㈜ 국학신문사, 한민족역사문화찾기추진위원회, 국학운동시민연합, 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
○ 문의전화: 041-620-6947, 041-620-6700, 010-6316-1785


동호(東胡) 퉁구스(Tungus) 연관성3 - 나라 장수 진개秦開와의 전쟁

 

고조선과 주변 유목민족 간의 관계가 궁금했는데 상세하게 설명한 글이 있어서 소개하고자 합니다.

 

출처 : 역사신문

저자 : 정길선 박사

일본 도쿄대학 역사문화학 터키·이슬람 문화사 전공.

러시아 모스크바 대학 Aspirant, Candidante, Doctor과정 학위 및 수료.

불가리아 소피아 대학 Research Professor.

유라시아 고고인류학 연구소 Research Professor.

 

1.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나타난 동호(東胡)의 역사와 연나라 장수 진개秦開와의 전쟁

 요녕성에서 하북성 북부까지 진출한 동호는 산서성 이북까지 세력을 확장하였고 융족과 결탁해 조, , , 나라의 국경지대를 약탈을 계획하게 되는데 융족을 주로 위나라와 진나라를 동호는 연나라와 조나라 국경에 대한 대대적인 약탈을 감행했다.

 이후 부여가 세력이 막강해지면서 해모수가 말년에 남하했고 부여의 약진으로 인해 동호의 세력은 절반으로 축소되었다. 이는 해부루가 동쪽 가섭원으로 천도하기 전까지 부여의 세력은 북변지역에 걸쳐있었다. , , , 진라라의 국경은 부여의 공격을 주로 받았고 부여와 동호, 융족들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장성長城을 축조하게 된다.

 연나라 장군 진개秦開가 소왕昭王의 명을 받아 장성을 넘어 동호를 공격하게 되는데 동호의 약탈에 대한 대응책인 것으로 해석된다. 진개의 공격에 대한 기록은 여러 사서에서 언급되고 있는데 대표적인 기록이 [위략魏略] [사기史記] 흉노열전匈奴列傳의 기록으로 볼수 있다. 그러나 [위략魏略]의 경우, [삼국지三國志] <위치魏志 동이전東夷傳> [위략魏略]을 인용하여 해당사료가 나타난 것과 [위략魏略] 원문의 기록이 약간 다르다.

 진개의 기록에 대한 대표적인 두 사서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동으로 취지이천리하였다. 燕取地, 二千里的, 兩個人東

위략에 이르길 …(중략)… 이 이에 장군 진개秦開를 보내어 그 서   西方을 공취하여서 2천여리 땅을 취하여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러 경계를 하였으니 조선朝鮮이 약해지기에 이르렀다. 에 현명한 장수賢將 진개秦開가 있어 ,에 인질로 잡혀있었는데 호는 그를 깊이 신임하자 연으로 돌아와서 동호東胡를 불의에 엄습하여 격파해 달아나게 하여서 동호東胡가 천여리를 믈러서게 하였다.

 형가荊軻가 더불어 진왕秦王을 죽이고자 한 진무양秦舞陽이란 자가 개의 후손이다. 은 조양造陽으로부터 양평襄平에 이르는 장성長城을 쌓았고 상곡上谷, 어양漁陽, 우북평右北平, 요서遼西, 요동군遼東郡을 세워 이로서 호를 막았다.

 [위략魏略]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의 경우를 비교해 보면 사료가 삼국지 위지 동이전 의 내용이 훨씬 더 상세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 조선朝鮮이라는 단서도 추가했다. 그러나 [사기史記] 흉노열전匈奴列傳 에는 동호東胡로 표기되어 있다.

 얼필 해당 두 사료만 보면 고조선과 동호는 동일국가 개념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위 두 사료만 비교해서 고조선 = 동호는 상당히 설득력이 떨어진다.

 

2. 연나라 진개 공격 기록에 대한 논란과 우려

 

 [위략魏略]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 [사기史記] <흉노열전匈奴列傳> 의 기록 중에서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은 진개의 공격에 의해서 2천여리의 영토를 잃은 것과 천여리의 영토를 잃은 부분의 진위여부와 해당 지역의 위치 여부이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의 경우, 전한前漢시기 서술된 사료이고 진수의 [삼국지三國志]는 삼국이 통일된 이후 진나라 시기에 서술된 사료이다. [사기史記][삼국지三國志]보다 서술된 시기가 200년 이상을 앞서 있고 [사기史記]에 기록된 천여리가 [삼국지三國志][위략魏略]에 나타난 2천여리라고 기롤되어 있는 것은 후대에 의한 가필이라 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2천여리와 천여리의 차이 못않게 중요한 것은 그 위치이다.

현재 중국사학계나 한국의 강단사학계에서 지정해 놓은 연나라의 위치는 하북성河北省이고 요하遼河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연나라의 수도는 계로 오늘날의 베이징北京이라 보편적으로 비정되어 있다. 그래서 북경을 오랜 기간 동안 연나라의 수도인 연경燕京이라 칭해왔다.

 연나라의 국경의 시작을 요하로 판단한다면 진개가 흭득한 영토인 1~2천리는 청천강이나 대동강까지 능히 넘어갈 수 있지만 난하나 영정하를 연나라 경계로 놓고 판단한다면 압록강 인근까지 축소될 수 있다.

동호(東胡) 퉁구스(Tungus) 연관성2

 

고조선과 주변 유목민족 간의 관계가 궁금했는데 상세하게 설명한 글이 있어서 소개하고자 합니다.

 

출처 : 역사신문

저자 : 정길선 박사

일본 도쿄대학 역사문화학 터키·이슬람 문화사 전공.

러시아 모스크바 대학 Aspirant, Candidante, Doctor과정 학위 및 수료.

불가리아 소피아 대학 Research Professor.

유라시아 고고인류학 연구소 Research Professor.

  

1. 동호(東胡) 언어, 민족적 계통학 분석

 

동호 연구에서 언어, 계통학 다음으로 중요한 고찰은 인류학적 계통에서 나타난 민족, 혹은 부족의 분류이다. 이러한 분류에서 동호에 대한 정의는 시미즈 마사오(淸水正夫) 이후 일본학계에서 쿠도 노리오카(工藤紀岡)가 부여계통에 대한 소고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정의를 내렸다.

 동호東胡와 조선朝鮮은 동족이고 융과 같은 계열이다. 융의 동쪽 지역은 요하遼河를 중심으로 호족이 분포하고 있었고 이 역시 부여계夫餘係이다.”

 쿠도의 정의에 의하면 동호는 애초부터 동북쪽 대흥안령大興安嶺산맥이 위치해 있던 초원지대에 분포했을 가능성이 높다. 대흥안령산맥이 위치한 지역은 현재 몽골과도 위치가 맞닿아 있고 남쪽으로는 숙신肅愼과 흉노의 본거지인 오르도 지역과도 인접해 있다.

 

2. 동호의 기원과 인식에 대해 필자, 타 학계의 시각과 한국 학계의 반응

 필자는 고조선의 혼란기, 말기 즈음에 고조선과 동맹관계, 혹은 종속해 있던 유목민족들이 일제히 독립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니 고조선과 다른 계체로 나타나 있었을 것이다. 서융西戎과 동호가 분리되었고 서융은 오늘날의 감숙성甘肅省과 섬서성陝西省 지역으로 남하하여 춘추시개의 진나라와 합류했다.

 동호는 현재 내몽골 홍산 지역과 서랍목륜하 西拉木倫河지역으로 이주하였고 여기에서 동북방의 숙신肅愼도 분열한 것으로 보았다. 숙신은 송화강松花江지역으로 진출하였고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 산서성山西省지역에는 산융山戎, 적융狄戎이 잇달아 갈라져 나갔다. 숙신肅愼은 예맥濊貊과 동족이고

같은 고조선이자 동호와 동족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필자는 해당 시기에 동호의 동쪽 지역에는 숙신이 존재하고 있었다. 東方東胡, 有肅愼 라는 일주서逸周書의 기록을 들어 숙신과 동호가 분리되어 있는 세력이고 동북지역에 갈려져 나왔다고 추정하고 있다.

 북한학계에서는 리지린李址麟이 예맥과 동호가 같은 국가라는 동일 국가설을 주장하였고 동호東胡와 맥을 동일민족으로 보았다.

 과 예는 고조선의 종족으로 예족은 서기전 8~7세게 이전에 고조선을 세웠고 맥족은 이보다 늦게 부여와 고구려를 세웠다고 하였다. 이에 대한 또 다른 근거 논리는 예맥이 기마유목민족의 성향을 보였다는 것으로 예와 맥족이 자리 잡았던 송화강 유역에는 부여보다 이전의 기마유목민족들의 마구馬具들이 발굴되었다. 예맥, 동이, 동호를 동일민족으로 보는 경향도 존재했다.

 

동호(東胡) 퉁구스(Tungus) 연관성

 

고조선과 주변 유목민족 간의 관계가 궁금했는데 상세하게 설명한 글이 있어서 소개하고자 합니다.

 

출처 : 역사신문

저자 : 정길선 박사

일본 도쿄대학 역사문화학 터키·이슬람 문화사 전공.

러시아 모스크바 대학 Aspirant, Candidante, Doctor과정 학위 및 수료.

불가리아 소피아 대학 Research Professor.

유라시아 고고인류학 연구소 Research Professor.

 

1. 동호東胡에 대한 서문

 

 근래 들어 다시 회자 되고 있는 부분이 고조선의 위치 비정과 더불어 고조선과 주변 국가들과 관계이다. 고조선은 농경과 유목을 병행한 연방체 형식을 가지고 있는 일종의 공동체다. 단군이 이를 통치했고 공동체의 형태를 유지했으면 고조선에 속해있는 유목 세력들은 항상 국경 지대에 있으면서 조선을 보호하고 있는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이는 흉노, 동호, 월지 등이 그 경계인데 이들은 조선의 속민이거나 부용세력들로 조선의 외곽을 둘러싸고 있는 형세였다.

고조선과 특히 많은 연관성을 내포하고 있는 유목민족은 동호東胡이다. 이러한 동호의 역사적 성립의 배경은 많은 사료에 나타나 있지 않다. 동호東胡는 동쪽의 호족胡族이라는 뜻이다. 이들은 유목민족으로 정해진 영토가 없이 내몽골 일대를 주유하던 민족으로 인식되고 있다.

당시 한나라나 진나라 등은 호와 이의 개념을 아마도 동일한 족속으로 보았을 것이다. 이는 후대에 적, , , 를 같은 오랑캐로 표기했기 때문이다. 결국 동,,,북 방위에 따러서 오랑캐를 뜻하는 한자 표기만이 달라졌을 뿐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2. 동호東胡에서 파생된 민족 烏丸과 선비鮮卑, 그리고 융과의 관계

 동호에서 갈라지는 민족은 오환烏丸과 선비鮮卑인데 이것에 대해서 <사기-흉노열전> 집해와 색은의 주석에 나와있다. <집해> [한서음의漢書音義]에서 오환烏丸 또는 선비鮮卑를 말한다.” <색은> 복건服虔동호東胡오환烏丸의 선조로 뒤에 선비鮮卑가 되었다. 흉노 동쪽에 있으니 이 때문에 동호東胡라 했다.”

흉노의 동쪽이라고 하지만 해당 지역은 고조선의 영토와 겹쳐져 있었고

주 산업이 농업이었던 고조선은 유목민족인 동호와 같은 세력권에 있었고 이들 동호와 융과의 관계는 매우 긴밀했을 것으로 보인다.

 

[동호와 호로 부터 갈라진 민족]

 

3. 동호東胡에 대한 각 학계들의 정의와 결론

 중문대사전中文大辭典通古斯族(Tungus)는 통고通古는 곧 동호東胡 두 글자의 성전聲轉이다. 이 종족 사람들은 시베리아 동부에 많이 살고 있는데 곧 고대의 숙신肅愼, 말갈靺鞨 및 여진女眞이다. 얼굴이 길쭉하고 눈이 가늘며, 코가 납작하고 뭉퉁하며, 머리칼이 검되 곧으면, 피부 색깔이 활갈색이다.

 유목생활을 영위하며 매년 10월에는 무리를 지어 산림으로 들어가 수렵을 하고 돌아와서 농업에 종사한다. 성정이 활발하고 감정이 풍부하다. 쿠릴열도의 오로크족(Orochons) 및 동북 흑룡강 하류의 골디족(Golds)이 이에 속한다.

 서양학자들에게게도 찾을 수 있는데 이러한 동호東胡를 퉁구스(Tungus)라고 주장한 학자는 프랑스의 라무새(Ramusat)이고 이후 클라프로트(Klaproth)가 언급한 것이 두번째 나타난 부분이다. 서양의 한한자인 라무새와 샤반느

(Chavannes)는 동호가 근세의 소위 퉁고사(通古斯, Tungus)로 생각했으나 학계의 반발과 더불어 근거가 매우 부족하여 효력을 얻지 못했다.

 그래서 이를 첨삭한 것이 중국의 역사학자 마장수馬場秀로 동호의 원래의 명치이 도하屠何이고 동호東胡의 조선을도하屠何라 주장하게 되면서 라무새와 샤반느의 주장이 많은 부분에서 효력을 얻게 된 것으로 보인다. [馬場秀, 烏丸鮮卑, 上海 : 上海人民出版社, 1979 참조]

 그러나 여전히 이에 대한 타당성이 부족하여 명확한 결론은 아직 유보적인 것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 현재 중국학계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 않다는 것은 중국학계에서 [중문대사전]을 편집합으로서 위에 필자가 서술한 내용, 마장수馬場秀가 주장했던 그대로를 수용했다.

 이러한 이중적인 중국학계의 태도는 퉁구스에 대한 중국 정부의 정치, 외교적인 부분에서 동북공정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의도적인 해석으로 판단된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동북공정으로 우리의 역사와 문명을 자기네 것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

신석기와 청동기 시대 역사인 홍산문화, 동이족의 영웅인 치우 그리고 쥬신족의 최초 나라인 고조선 등 이제는 상고시대 역사까지 중화의 것으로 만들거나 왜곡, 부정, 파괴하려고 합니다.

고조선은 한겨레의 최조 나라이고 한겨레의 뿌리입니다. 실상 뿌리인 고조선을 신화로 치부하고 존재 마저 부정하는 처지에 있습니다.

과연 중원 국가에 대한 고조선은 존재감은 어땠을까요? 국가간의 우위는 군사력이고 전쟁에서 확인이 됩니다. 춘추전국시대 고조선과 중원 국가간의 전쟁을 사서를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중원 사서에서 고조선을 비하한 다른 이름으로 교묘하게 표현하고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퍼옴] http://m.blog.naver.com/knightblack/10013824767

 

환단고기(桓檀古記) 단군세기(檀君世紀)에 「戊午五十年 帝遣將彦波不哈 平海上熊襲 사벌(沙伐) 단제 무오50(B.C 723) 언파불합을 보내어 바다의 웅습을 평정하였다.

甲戌六十六年 帝遣祖乙 直穿燕都 與齊兵 戰于臨淄之南郊 告捷 갑술66(B.C 707), 사벌단제께서 조을을 보내 연나라의 도읍을 돌파하고 제나라 군사와 임치의 남쪽 교회에서 싸우고 승리를 알려왔다.」 기록되어 있다.

 

사기(史記) 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二十五年, 北戎伐. 鄭使太子忽來救. 희공 25년 북융(北戎)이 제나라를 침공하자 정나라에서 태자 홀을 보내 제나라를 도와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조선 사벌단제가 제나라를 공격한 것은 제나라 13대 희공(BC 731~ 698) 때의 일이다. 희공 25년 이면 기원전 707년에 해당하므로 그 연대가 단군세기와 일치하고 있다. 사기는 고조선을 가리켜 북쪽의 이족이라는 뜻으로 북융이라고 표현하고 있음을 볼수 있다. 참고로 중국 사서를 보면 고구려를 동이라 표현한 예로 보아 북융은 조선을 가리킨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더욱이 중국의 임혜상은 중국민족사에서 진나라 이전에는 동호를 북융과 산융으로 호칭했음을 말한다. 동호는 동이와 같은 뜻으로 고조선을 비하하여 부르는 호칭이었다.

 

사기(史記) 흉노전(匈奴傳)에는 「是後六十有五年 而山戎 越燕而伐齊 齊禧公與戰于齊郊. 전략. 그로부터 65년 뒤 山戎(산융)() 나라를 넘어와서 () 나라를 공격하여 () 禧公(희공)이 산융과 제 나라 도성 밖에서 싸웠다.[ 사기(史記) 흉노전(匈奴傳)에는 이해가 B.C 705년경(770-65=705)으로 적혀 있다.] 이 기록에서는 왕검조선(王儉朝鮮)이 산융(山戎)으로 적혀있다.

 

제태공세가에서는 북융이라 하더니 흉노전에는 산융이라 한다. 이는 조선의 실체를 감추기 위한 중국인의 의도적인 곡필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왜 고조선은 제나라를 공격하였을까? 그것은 제나라가 산동성 일대의 래이(萊夷)를 병탄한 사실과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설원] 정간 편에 의하면 “래국(萊國)이 신하인 자맹의 말을 듣지 않자 제나라가 이를 병합해 버렸다”고 한다.

 

고조선과 제나라와의 싸움에 대해서는 춘추 좌전에도 언급하고 있다.

(노나라 환공 ; BC 712 ~ 694) 6(BC 707) 북융이 제나라를 공격하자 제후(齊候 : 희공)는 정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이에 정나라 태자 홀이 군대를 끌고가 제나라를 구원하였다. 6월에 북융의 군대를 크게 쳐부수고 북융의 장수인 대량과 소량 및 갑수 300명을 잡아 제나라에 바쳤다.

 

[춘추]는 노나라의 사서를 공자가 도덕적 견지에서 수정 가필한 문헌이다. 윗글을 보면 북융이라 표현된 고조선이 제나라와 연나라 연합군에서 크게 깨진 것처럼 기록되어 있으나 다음의 춘추 기록을 들여다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여러 제후들이 (북융 : 조선의 공격에 대항하여) 제나라를 수비하였기 때문에 제나라에서는 구원하러 온 제후들에게 가축과 곡식을 보내고 노나라로 하여금 서열을 정하게 하였는데, 연나라는 뒤로 물러났으며 태자 홀은 전공이 있는데도 뒤로 밀려나 이를 분하게 여겼다.

 

전공(戰功)에 따라 서열을 정하는 과정에서 연나라가 뒤로 밀려난 것은 실상 그들이 고조선과의 전쟁에서 패했음을 알 수 있다.

 

고조선과 제나라와의 전쟁에 대해 한단고기 단군세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을 남겼다.

[戊辰五十二年, 帝遣兵與須臾兵伐燕. 燕人告急於齊. 齊人大擧入孤竹. 遇我伏兵戰不利乞和而去.] (36대 매륵 (買勒: BC 704~BC 646)) 무진년(戊辰年)이며 재위 52년에 즉 BC 653년에 매륵단제(단군)께서 병력을 보내 수유(須臾)의 군대와 함께 연나라를 정벌케 하였다. 이에 연나라 사람이 제나라에 위급함을 알리자 제나라 사람들이 크게 일어나 고죽(孤竹)에 쳐들어왔는데 우리의 복병에 걸려서 싸워보았지만 이기지 못하고 화해를 구걸하고는 물러갔다.

 

위의 단군세기 기록은 매륵단제가 군대를 보내 연나라를 공격하자 다급해진 연나라가 제나라에 구원을 요청한 사실을 설명하는데 사기 제태공세가에도 위와 같은 사살이 실려있다.

 

二十三年 山戎代燕 燕告急於齊 齊桓公救燕代山戎 至干孤竹而還. 제나라 환공 23, 산융이 연나라를 정벌하자 연나라는 제나라에 위급함을 알려왔다. 제나나 환공은 연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마침내 산융을 쳐서 고죽까지 이른 다음 돌아왔다.

 

사기(史記) 흉노전(匈奴傳)에는 「전략. 그로부터 44년 후 산융이 () 나라을 쳤다. 연 나라는 곧 위급함을 () 나라 알렸고 () 桓公(환공)은 산융을 공격해 패주시켰다. 其後四十四年 而山戎伐燕 燕告急于齊 齊桓公北伐山戎 山戎走.(B.C 653년경) [ 사기(史記) 흉노전(匈奴傳)에는 이해가 B.C 661년경(705-44=661)으로 적혀 있다.]

 

위의 문맥을 잘 살펴보면 당시 제 환공(BC 685 ~ 643)이 고조선 및 연제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사실을 교모히 감추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만약 승리하였다면 기사의 마무리가 “산융을 격파하고 대승을 거두어 돌아왔다”는 식으로 기록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시 고조선 대 연제 연합군의 싸움에서 어느 쪽이 승리를 거두었을까? 설원 권모편을 보기로 하자.

 

“제 환공이 산융과 고죽을 치면서 사람을 시켜 노나라에 도움을 청하였다. 이에 노나라 왕은 신하들 불러 모아 대책을 논의하였는데, 신하들이 말하기를 ‘군대가 수천리를 가서 만이(蠻夷)의 땅에 들어가면 반드시 돌아오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자 왕은 말로만 도와준다 하고서 군사를 보내지 않았다.

 

환단고기 단군세기에서는 연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연나라 군대와 합세한 제 환공이 고조선의 복명에 걸려서 전세가 불리하게 되자 화해를 구걸하고 물러갔다고 하는데, 이렇게 전세가 불리해지자 제 환공이 다시 노나라에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그렇지않았다면 무엇 때문에 노나라에 도움을 요청했겠는가? 노나라가 도와주기 않자 제 환공은 고조선에 화해를 구걸하고 물러갈 수 밖에 없었다.

 

제 환공의 신하 관중이 없었다면 중국은 피발이 되었을 것이라는 공자의 말(논어) [, 여기서 피발은 종발이라고 하며 고대 고조선인의 머리를 트는 모양을 말한다.], 고조선의 거듭된 공격으로 멸망의 위기 가까이 간 연나라, 그리고 고조선 연제 연합군과의 싸움을 기록한 사서 등을 종합해 볼 때 고조선은 신화상의 국가가 아니라 실존한 국가였으며, 중국이 두려워한 국가였다.

[출처] 실증 한단고시 (정신세계사), 한단고기 역주본(상생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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