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나라인 發朝鮮을 發, 朝鮮으로 보는 것은 지나인들이 찍어 놓은 방점에만 의지하여 사서를 해석하려는 어리석은 사람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이렇게 두개의 나라로 보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지나인들이 근대에 만들어 놓은 사서의 표점교본에서 發朝鮮을 發, 朝鮮으로 나누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발조선이 나온 사서의 기록을 하나씩 봅시다.

1. 관자 권 23
    - 發朝鮮之文皮一筴也 (발조선의 문피도 그중에 하나 낀다. 즉 발조선의 문피도 좋다라는 말입니다) 
    - 八千里之發朝鮮 (발조선까지 8백리)
    - 發朝鮮不朝 (발조선이 조공하지 않다)

관자에서 발조선을 발과 조선의 문피다라고 해석하면 아주 우습습니다. 안그렇습니까? 저렇게 동시에 조공도 안構?8백리로 위치도 같고 문피도 똑같이 나는 곳이 두 나라다라는 것은 똥인지 된장인지 모르는 사람이 하는 말입니다. 

2. 사기 권1
   -  南撫交阯北發西戎析枝渠廋氐羌北山戎發息慎 (남으로 교지交阯, 북발北發,  서쪽으로 융戎, 석지析枝, 거수渠廋, 저강氐羌 북쪽으로 상융山戎, 발식신發息慎을 위무하였다. )

사기에서는 발식신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발조선의 전음(轉音)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항상 사서에서는 지나의 북쪽에 있는 나라를 설명할때 發이라는 글자는 朝鮮(혹은 息慎, 혹은 肅愼)이라는 글자가 따라다닙니다. 즉, 북쪽에 발국(發國)이 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설사, 발국(發國)이라는 나라가 있다고 가정합시다. 그러면 남쪽에 분명히 북발(北發)이라는 나라가 존재하는데 북발(北發)의 북쪽에 발국(發國)이 있는 꼴이 되므로, 이것은 남북의 개념을 모르는 자들이나 그렇게 볼 것입니다.


3. 대대례 권7
南撫........北山戎發息慎(案史記索隱云山戎下少一北字北發是北方國名)
북으로 산융 발식신을 위무하였다(생각컨대, 사기색은에 말하기를 산융山戎 밑에 작은 글자 북北자가 보이므로, 북발北發은 북방의 국명이다)

아 주 우습죠. 뭔가를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저기 사기 권 1에 보면 南撫交阯北發 남쪽으로 교지(交阯)와 북발(北發)을 위무하였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즉, 북발(北發)은 남쪽에 있는 나라인데 여기 북쪽에 있는 나라라고 사기색은에서 말하고 있는데 사기색은의 주석은 틀린것입니다. 사기색은은 그저 북발(北發)이라는 나라가 있으니 발식신(發息慎)의 발(發)도 북발(北發)일 것이다라는 틀린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북발(北發)은 남쪽에 있는 나라이고, 북쪽으로 산융(山戎)과 발식신(發息慎)이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발국(發國)이 존재한다면 지나의 남쪽 나라인 북발(北發)보다 더 남쪽에 있어야 논리적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앞서 "기자는 풍백의 자손이라는 글"에서 發, 番의 지나인의 발음이 fan 혹은 fa이고 이는 우리나라 영토 서쪽에 있었던 풍백이 다스리던 藍國의 뜻인 "파란"을 지나인들이 음차한 것이라는 것을 그 지역과 다스리던 통치자, 그리고 람국의 뜻과 지나인의 발음을 근거로 발조선은 바로 람국이고 번한도 람국이다라는 것을 논증하였는데,지나인이 그저 점교본에  發, 朝鮮이라 하였다하여 그것이 두개의 나라라고 하는 것은 역사를 공부할줄 모르는 자나 하는 것입니다.


①: 프리기아(B.C. 12세기 - B.C. 7세기 초)
②: 고창국 서북 동굴(6장 6절 돌궐 지조)
③: 감숙성 흑산 암각화(춘추에서 서한 초기)
④: 난하(灤河) 하류의 리지(離枝), 영지(令支) (齊 桓公: B.C. 685 - B.C. 643)
⑤: 요동(난하 지역으로 들어온 초기에 이동한 것으로 추정)
⑥: 난하에서 제 환공의 공격을 받아 시라므렌 강 유역으로 이동
⑤→⑦: 난하에서 요동으로 들어 왔던 사람들이 북으로 이동
⑥-1 →⑦: ⑥의 후예로 믿어지는 고리국(高離國)에서 남하하여 부여를 세움
⑧: 고구려, ⑨: 백제, ⑩: 가야, ⑪: 신라
(a): 돌궐 원주지

 

국회세미나 발표(2005.9.9) <한국 고대문화의 새로운 인식과 21세기 한국>

최근 중국의 역사관련 국가 공정들과 한국의 과제

우실하 ( 한국항공대학교 조교수) (홈페이지: www.gaonnuri.co.kr 이메일: woosilha@yahoo.co.kr)

 

부여의 출자에 대한 <삼국지 한전>분석 (5부)
 
심제 이진우 박사 기사입력  2015/01/20 [17:40]
Ⅳ.부여의 출자(出自)에 대한 삼국지 韓傳 분석

   부여(夫餘)와 관련된 언어학적 관련성 즉 파생 국가명과 지명 등을 이루는 한국어가 고대 어떤 언어로 부터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한 연관성은 이미 2장에서 검토하였고 그 결과 한국고어는 전반적으로 터키어의 영향이 컸음을 설명하였다. 부여라는 국가명은 앞부분 음가인 부리(不而,夫里) 혹은 비리(沸利)등의 발음군과 뒷부분 음가인 령지(令支), 이지(離支)라는 발음군의 연결체임을 알 수 있는데, 이를 합하면 불리지(弗離支) 혹은 비리지(不離支)등으로 읽을 수 있다.

이것 또한 백제의 비류(沸流)나 가야(伽倻)등이 부여의 어원에서 파생된 언어임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언어 분석 결과와 사서의 기록에 의하여 기원전 6C이전에 이미 동북아시아에 진출한 터키계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에 관한 강길운의 한국고어 연구를 기초로 고대음가를 제공한 집단에 대한 실마리를  『삼국지』한전에서 발견할 수 있다.

『三國志』韓傳 - 韓在帶方之南,東西以海為限,南與倭接,方可四千里.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韓.辰韓者,古之辰國也.馬韓在西.其民土著,種植,知蠶桑,作緜布.各有長帥,大者自名為臣智,其次為邑借,散在山海間,無城郭.(臣雲新國등.. 중략)凡五十餘國. 大國萬餘家,小國數千家,總十餘萬戶.辰王治月支國.`”臣智或加優呼臣雲遣支報安邪踧支濆臣離兒不例拘邪秦支廉之號”.其官有魏率善,邑君,歸義侯,中郎將,都尉,伯長.

이는 언어적으로 부여(夫餘)와 진(辰)은 터키계언어를 이해하였다는 사실에 기반 하며 그러한 사실을 추정할 수 있는 내용이 다음과 같음을 볼 수 있다.
“臣智或加優呼臣雲遣支報安邪踧支濆臣離兒不例拘邪秦支廉之號”

상기 문장에 대한 선행 연구자들의 해석으로“신지에게는 간혹 우대하는 신운견지보(臣雲遣支報) 안야축지(安邪踧支) 분신리아불례(濆臣離兒不例) 구아진지렴(拘邪秦支廉之號)의 칭호를 더하기도 한다”라고 하였고, 이 구절의 해석은 대체로 이병도의 설을 따른다 하였는데 부여 출자에 대한 인식부족과 문장의 난해성으로 인하여 아직도 더 연구가 필요하다고 한바, 최근의 해석 시도로서 정형진은 문장의 띄어 읽기 변화를 통해“신운국의 견지보, 안야국의 축지, 분신국의 리아, 부례구야의 진지렴“으로 해석하고, 특히 부례구야(不例拘邪)를 프리기아로 해석하여 신채호가 주장한 불리지국(弗離支國), 불령지(弗令支)에 대응한다고 보았다.
 
   본 연구자는 선행연구에 대해 보완된 의견을 제시하고자 한다. 『삼국지』한전 내용에서 “진한(辰韓)은 고진국(古辰國)이라 하였고, 옛 진왕은 월지국(月支國)을 다스린다”는 내용에 대해 기존 연구자들은 『삼국지』에서 표기된 월지국과 달리 『위략』과 『후한서』의 내용을 들어 월지국을 목지국(目支國)의 오기로 주장하는데 대해서 연구자는 동의하기가 힘들다. 여기서 월지국은 고진국(古辰國)과 정치적으로 연결된 국가로 추정되며, 시기적으로 진국(辰國)이라는 존재를 기술한 『삼국지』  저술시기보다 수세기 전인 기원전 3세기 이전에 동음(同音)의 흉노풍속을 가진 강력했던 국가 월지(月氏)가 존재했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목(目)은 월(月)의 오기로 보아 연구자는 이 월지국을 다스리는 왕을 고진왕(古辰王)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본문에 출현한 직급 신지(臣智)는 삼한의 수장을 일컫는 뜻으로 상기 문장에 대한 새로운 해석 시도로 연구자는 “臣智或加優呼, 臣雲遣支, 報安邪踧支, 濆臣離兒,不例拘邪秦支廉,之號”로 읽으려 하며, 이를 해석하면 “신지 혹은 가우라고 부르는데, 신운국의 견지, 보안야국의 축지, 분신국의 리아, 부례구야의 진지렴”으로 해석된다. 진국(辰國)의 언어가 부여를 비롯한 고대 터키계어 음가와 관련 있으므로 『삼국지』가 쓰여진 3세기 이전의 국가이름과 지역을 고찰하면 『한전』에 기록된 신운국, 보안야국, 분신국, 부례구야국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문장에 열거된 신지(臣智) 혹은 가우라 부르는 나라와 수장 이름의 음가를 알기 위해 기원전·후로 터키어와 관련된 어원을 사용했을 나라들의 명칭을 고대 아나톨리아에 위치했던 프리기아(Phrygia)가 부례구야(不例拘邪),불리지(弗離支)로, 폰투스(Pontus)가 보안야(報安邪)로, 카파도키아(Cappadocia)가 가독(加毒)등으로 대응된다고 볼 수 있다.

한국어 기원추적에 대한 강길운의 주장을 기반으로 할 때, 위만조선의 대신들이 백성들을 이끌고 망명한 진왕(辰王)이 이끄는 고진국(古辰國)이 터키계어를 사용했고 또한 월지국(月支國)을 다스리는 기록은 시기상으로 기원전 3세기경에 감숙성과 영하성에 존재하다 기원전 2세기말 흉노에게 패한 후 박트리아 지방으로 서천(西遷)한 월지(月氏國)로 대응될 수 있다고 본다. 이와 관련하여 『사기』흉노열전에 의하면 월지는 기원전174년 흉노의 노상선우에 의해서 궤멸적 타격을 입고 서쪽으로 이동하며, 그 지역에 존재하던 대하국(大夏,박트리아)을 공격하여 속국으로 삼았다.

또한 『사기』대완열전에 따르면 월지 또한 흉노와 습속이 같다고 하였으며, 고진국(古辰國) 또한 지역적으로 월지가 있었던 지역과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고 가정하면, 이미 소아시아 지역에서 기원전 7C초까지 존재하다 먼저 동진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철기문화와 흉노습속을 가진 부례구야(不例拘邪, Phrygia)의 영향 하에 있다가 이후 동진(東進)하여 진한(辰韓)이란 이름으로 낙랑지(樂浪地)에 도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1세기 그리스 지리학자 스트라본은 『지리지』에서 그리스, 박트리아 왕들의 세력 반대편에 Phrynoi(흉노)와 Seres(비단, 중국)이 있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부례구야(不例拘邪,Phrygia)는 진국보다 시기적으로 먼저 동진하여 활동한 사실이 기원전 6세기 이전 기록인 『관자』등에서 발(發)로 확인되는 것으로 보인다. Phrynoi의 등장 기록과 관련하여 삼국지『한전』의 기사를 연구한 자료에는 흉노라는 단순설명으로 후속 연구 없이 그친 것은 흉노사 연구에 매우 아쉬운 점이라고 할 수 있다.
 
  『후한서』 등에는 부여와 진번 그리고 고구려를 흉노라 칭했고 흉노와 습속이 같다고 하였던바, 부여와 흉노,고구려와 관련된 특이할 만한 습속으로 형사취수제 (Lavir-ate Marrage)를 꼽을 수 있다. 이 제도는 유목민족 원래 혈족의 재산이 족외로 유출을 방지하고 혈족이 형수를 부양하는 의미가 있다. 이와 같은 흉노계열의 문화인 형사취수제의 전통을 이어가고 터키계 언어를 구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부례구야(不例拘邪,Phrygia)와 월지(月支)족의 동진 과정의 중간 기점에 중앙아시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현대까지 그 습속이 남아있는 카자크스탄(Kazakhstan)을 눈여겨볼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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