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스터 션샤인이라는 주말 드라마가 이병헌, 김태리 주인공으로 방영되고 있습니다. 

제작비가 약 400억원이나 들었고 넷플릭스와의 방영권 계약 체결로 전 세계 190여 개국에서 동시 방송하게 된다는 것에 놀랍고 화제가 되었지요.

고애신 배역을 맡은 김태리가 조준하고 있는 모습.



여기 아무개 의병(義兵)에 대한 얘기가 있다.

뜨겁고 의로운 이름, 의병(義兵)

역사는 기록하지 않았으나 우리는 기억해야 할, 

무명의 의병(義兵)을,

노비로 백정으로 아녀자로 유생으로 천민으로 살아가던 그들이 원한 단 하나는

돈도 이름도 명예도 아닌, 제 나라 조선[朝鮮]의 '주권'이었다.

[미스터 션샤인]은 흘들리고 부서지면서도 엄중한 사명을 향해 뚜벅뚜벅 나아가는 이름 없는 영웅들의,

유괘하고 애달픈, 통괘하고 묵직한 항일투쟁사다.


'미스터 선샤인 Mr. Sunshine' 뜻에 대해 알아볼까요?   네이버에 검색해보면  "미국 의회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브라이언 웨스버리가 2009년 말 처음 사용한 용어로, 한국을 세계 경제에 밝은 미래를 가져다줄 수 있는 국가" 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한국 경제가 돋보인 측면도 있지만, 신흥국 가운데 첫 G20정상회의 의장국으로 그만큼 기대를 모은다는 의미에서 붙여졌다.

[네이버 지식백과] 미스터 선샤인 [Mr.sunshine] (한경 경제용어사전, 한국경제신문/한경닷컴 )


역사 시간에 구한말이라 배웠는데 지금 생각하니 참으로 애매한 단어네요. 조선 말기도 대한제국 시기도

아닌 것이. 독립 운동을 한 집안은 3대가 망한다고 이런 서글픈 얘기가 있지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대한제국 시기 의병 (동학농민혁명, 을미의병(을미왜변, 을미사변), 을사의병(을사능약), 정미의병(고종 퇴위))은 일제 강점기 독립군이나 광복군으로 이어집니다. 조선 말기 의병은 어떻게 시작됐을까요?  1984년 7월 일본군이 경복궁을 포위하고 고종 황제를 포로로 사로잡고 김홍집을 수반으로 하는 친일 정권을 수립하고 갑오왜란, 갑오경장, 갑오개혁을 일으킵니다.  갑오개혁의 연장에서 을미개혁을 하게 되고 체감할 수 있는 단발령, 머리카락을 짧게 자를 것을 하게 됩니다.  예전에 신체는 부모님께 물러받은 것으로 목숨은 내줘도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는 것이 양반, 유생의 생각이었습니다.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 것을 수치로 생각했던 시대였어요.  그리고 일본 낭인(사무라이)에게 명성황후, 민비(민자영)가 시해, 살인을 비참하게 당합니다.  그러면서 의병 운동이 본격적으로 막이 오르게 되고 일본군과 정부에 탄압받던 동학혁명군도 함께 참여하게 됩니다.  

의병운동은 항일구국 즉 일본에 항거하고 나라를 구하겠다는 의지입니다. 

구한말 의병운동을 깊이 연구해 온 역사학자인 연세대 오영섭 연구교수는   "현재 의병운동 연구는 일반 민중에 의한 의병운동만을 이야기하고 있다. 의병 지도부를 꾸린 유림층과 병사를 구성한 평민층이 연합했다는 것"이라며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당시 중앙에는 고종(1852~1919)이 있었고, 그 주변에는 수많은 대신들이 있었다. 이 대신들은 다들 지방에 자기 근거지를 두고 있었다. 각자 근거지에 수많은 마름, 소작인들이 있었기에 쉽게 전력화·무력화할 기반을 지녔다. 고종이 위에서부터 내려보내는 항일구국 움직임, 일반 민중이 가지고 있던 원초적인 항일의지가 맞물리면서 의병이 일어났다고 본다." 

그는 "그런데 현재 연구는 이러한 고종의 역할은 싹 빼고 의병운동을 이야기한다"며 "교과서 역시 의병운동을 철저하게 일반 민중에 의한 자발적인 항일운동이라고 설명하고 있다"고 말했다. 

"의병은 군사집단이다. 총, 총알 등 무장을 갖추고 밥을 먹이려면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는 것이다.   그 엄청난 돈을 재야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마련할 수는 없었다.   고종을 비롯해 그 측근 대신들과 연결된 지방 부호들이 그 돈을 마련하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이다.   박경리 소설 '토지'에 이러한 이야기가 잘 묘사돼 있다. 결국 의병은 중앙에 포진한 고종과 그 측근의 구국의지가 재야에 있는 유림·농민 등 민중의 항일의지와 합쳐지면서 일어났다고 봐야 한다.     " 이회영 선생은 국내에 있을 때 의병 조직에 엄청난 자금을 지원했다. 주변에 있는 부호들에게도 '의병에게 자금을 지원하라'고 독려했다. 

그렇게 하느라고 엄청난 고통을 겪었는데 성과가 별로 없어서 고민했다고 측근들이 써둔 기록에도 나온다.   조선의 부호·지주층이 해외로 망명하는 과정에서 들고 간 재산이 독립군을 키우는 1차적인 재원이 된 셈이다." 

조금 빗나간 얘기지만 2차 동학혁명 경우, 전봉준에게 내린 고종의 거의(擧義) 밀서 등 새로운 사료들이 발굴되면서 동학의 2차 봉기는 일본에 맞선 고종과 동학의 연합항전이었음이 새롭게 밝혀지고 있습니다. 

오 교수는 "당대 의병운동은 실패할 소지를 100% 안고 시작했던 것"이라며 "의병장 최익현(1833~1906)의 경우 '내가 패배할 것을 안다. 그렇지만 나는 나라를 위하는 사람이니 목숨을 걸고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고 전했다. 

"의병은 그런 것이다. 현실적으로 패배할 것을 뻔히 알고, 성공하지 못할 것을 안다. 하지만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 가치 있는 인간 존재로서 자신을 나타내려는, 궁극적인 가치 실현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의 활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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